당신에게 죽음을 안전가옥 쇼-트 21
유재영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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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개방과 광장의 시대를 지나 속도외 밀실의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개방적이고 열렸던 마음이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세상으로 급격히 옮겨가는 듯하다. 개인 사생활 보호의 권리 아래에서 은밀한 범죄는 더 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업화 시대는 범죄자를 공권력으로 구속하거나 처벌하는 일을 국가가 대신해줬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으로 옮겨오면서 개인의 사생활 보호의 명분 아래에서는 성범죄 등 은밀한 범죄는 더 늘어만 간다. 가상공간으로 숨어들면 잡는 데도 힘들고, 잡는다 해도 피해자의 원상 복구는커녕 제 2, 제 3의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은밀한 성범죄는 대체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르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응징하기에는 물리적으로 어렵다.

우리는 욕망과 사랑이 얽혀 있는 범죄를 뉴스에서 자주 본다. 특히 성범죄는 더 자주 오르내리고 이젠 디지털 성범죄가 이슈가 되는 것 같다. 사랑과 욕망이 얽힌 이 책에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도 낯설지 않다. 상대의 허락 없이 욕구를 앞세우다 상대를 해치는 사람도 있고, 결혼했으면서도 여러 애인을 한꺼번에 만나다 결국 대가를 치른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인연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칼을 겨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관계에 깊이 매인 나머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상대를 살리려 한다. 그리하여 『당신에게 죽음을』의 주인공인 오은수는 묻는다. 고통을 자초하고 죽음을 불사하려는 마음이, 사랑이냐고.

 


 

이 소설 작품 『당신에게 죽음을』은 주인공 설희와 오은수 또한 법이 죄인을 다스릴 것이라 기대하지 않기에, 자신의 행복과 평안을 빼앗은 자들에게 합당한 죗값을 물리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로 마음먹는다. 두뇌 싸움은 물론이고 육탄전도 마다하지 않는 두 주인공은 피해자 입장의 여성에게도 자기를 지키고 상황을 바꿀 만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 준다.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에는 충분한 설정이라고 본다.

저자 유재영은 사랑과 욕망의 이름 아래 자행되는 무례하고도 파괴적인 행위들에 주목한다. 불법 촬영, 성추행, 외도, 가정 폭력, ‘왜 안 만나 줘’ 범죄. 피해자의 고통과 대중의 인식에 비해 턱없이 낮은 형량으로 입길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안들이다. 눈 밝은 이야기꾼 유재영은 사람들의 서러움이 뭉쳐 있는 곳을 본다. 사연을 깊이 듣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재구성하면서, 서러움을 통쾌하게 풀어 주는 상상력을 발휘해 현실 너머를 모색한다.

저자에 따르면 결혼, 사랑, 살인이 뒤얽혀 있는 도메스틱 스릴러인 이 소설은 여러 번의 개작을 거친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이 바뀌었고, 스릴러 장르에 걸맞는 긴장감이 더해졌다. 신중함과 과감함을 겸비한 주인공들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종잡기 어려운 행보를 이어 간다. 치밀하게 묘사된 장소들은 단순한 배경에 머물지 않고 뚜렷한 존재 이유를 드러내며 이야기에 영향을 미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은 요소들이 종종 복선으로 작용하니, 정교한 짜임새를 선호한다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 사서인 설희와 대학 교수 이수혁은 연인 사이다. 이수혁이 자신의 저서 『악인과 광인』을 바탕으로 한 8회 차 강연을 설희가 일하는 도서관에서 진행하게 된 것을 계기로 가까워졌다. 해가 바뀌도록 이어졌던 두 사람의 관계는 이수혁이 숨기고 있던 진실이 드러나면서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 직후 이수혁의 신변에 큰 문제가 생기고, 이수혁이 감추고 있던 비밀 속의 인물들이 하나둘 설희 앞에 나타난다. 악인인지 광인인지 모를 그들이 흩뿌리는 단서를 종합해 본 설희는 이수혁이 얽힌 사건의 경과가 경찰 조사 결과와는 다를 것임을 직감하고 직접 추적에 나선다.

시작점에서는 로맨스였는데, 어느덧 스릴러로 변해 있다. 『당신에게 죽음을』은 모처럼 찾아온 사랑에 잠겨 있던 주인공 설희의 눈앞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내민다. 이 전환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상반된 분위기의 이야기들을 능란하게 연결하는 작가의 솜씨 덕분이기도 하고, 로맨스와 스릴러가 그 속성상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장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 뒷 부분에 있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저자 유재영은 『당신에게 죽음을』을 구상할 당시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젠더 권력을 등에 업고 악행을 벌이는 이들, 악인이라는 딱지를 개의치 않고 단죄에 나선 이들이 얽힌 짜릿한 스릴러가 탄생했다. 현실 속 설희들이 들었던 괴로운 판결문과 수많은 오은수들이 겪었던 무심한 폭력이 세상 곳곳에 어떤 형태로든 기록되어 있었던 덕분이다. 개인의 경험이 누적을 거쳐 공감을 사고 현상이 되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는 힘이 있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살아남을, 여기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힘 말이다. 저자는 출판사 안전가옥과 만나 출판을 의논하면서 '장르적 쾌감이 살아 있는 이야기'로 더 강렬한 느낌으로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책 속 인물 오은수의 질문에 간단히 답하기는 어렵다. 다만 ‘고통을 감수하겠다’도 ‘죽음을 불사하겠다’도 ‘함부로 대해 달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상식 같은 이야기지만 실생활에서는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각종 성범죄, 데이트 폭력 및 가정 폭력 관련 통계는 하나같이 가해자의 증가 추세를 알린다. 욕망과 애정을 핑계로 삼아 타인의 삶을 망가뜨린 가해자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를까?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대체로 그렇지 않다.

설희는 언젠가 들었던 판결문을 기억한다. ‘피고가 피해자 측과 원만히 합의에 이르진 못했으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고 전문직에 종사하며 초범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오은수는 그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는 태도가 거짓이라고 단언한다. 서로의 문제 해결 방식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설희와 오은수는 한 가지 사실에 동의한다. 법정은 인과응보가 구현되는 곳이 아니다. 죽어도 싼 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죽지 않는다. 뻔뻔하게 선처를 구한 뒤 풀려나 짓던 죄를 이어 짓는다.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세상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설희와 오은수가 미술관에서 본 그림이 힌트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구약성서 속 인물인 홀로페르네스는 유디트가 살던 마을을 짓밟고 그의 연인을 살해했다. 유디트는 투항하는 척하며 홀로페르네스에게 접근해 그의 목을 벤다. 17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 소재로 여러 작품을 그렸는데, 스승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모욕적인 재판에 참석해야 했던 개인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르테미시아는 그림으로 자신의 상처를, 분노를, 그럼에도 꺾이지 않은 삶에 대한 의지를 기록했다.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저작권법 위반 없이 사용했습니다. [사진 출처=두산백과]

 

설희는 전시장에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를 유심히 바라본다. 설희에게는 유디트에 이입할 만한 경험이 있다. 오은수는 아르테미시아를 주인공으로 삼은 극을 무대에 올린다. 오은수가 널리 알리고 싶어 하는 자기 인생의 한 부분이 아르테미시아의 인생과 겹치기 때문이다. 기록된 경험은 의미를 갖는다. 타인에게 영감을 주고 용기를 북돋울 수 있다. 기록된 경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또한 유의미하다. 아르테미시아가 유디트를 그렸다는 사실만큼이나,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에 주목하는 눈길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사회는 비록 오랜 세월이 걸릴지라도 사람들의 움직임에 반응한다.

17세기 이탈리아의 여성 거장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미술사에서 한동안 사라졌다가 최근 재조명되는 화가이다. 독자도 미술 관련 최근의 책들에서 젠틸레스키와 그의 작품을 유독 많이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라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작품은 물론이고 〈다나에〉, 〈비너스와 큐피드〉 같은 요염하고 관능적인 그림으로 당대 이름을 날렸지만 사후 아버지의 이름 아래 미술사에서 빠르게 사라졌다고 알려졌다. 화가인 아버지는 딸의 그림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친구에게 성폭행 당한 딸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기는커녕 오히려 화가로서의 흔적을 없애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1593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젠틸레스키는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로부터 그림을 배우며 조수로 일했던 그는 10대에 이미 실력을 인정받았다. 카라바조의 어두운 색조와 극적인 빛의 효과에 영향을 받았으며, 여성 화가의 일반적 규율을 깨고 성경과 신화의 주인공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며 화려한 성공을 거둔 서양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여성 화가가 되었다.

 


 

젠틸레스키의 생애는 이 책 『당신에게 죽음을』에서 주제와 소재로 자주 인용되기에 그의 생애와 작품을 좀 더 소개해본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곳곳을 여행하며 남성들과 동등한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일찌감치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 아버지의 동료 화가이자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길고 고통스러운 재판을 치러야 했고, 이 과정에서 느꼈던 오명과 치욕감은 이후 그의 작업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젠틸레스키가 특히 즐겨 그린 주제는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와 적진의 막사에서 동침한 후 그의 목을 베어 이스라엘을 구한 유대인 여성 유디트의 이야기였다. 이 주제는 카라바조의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는데,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확연히 달랐다. 그의 유디트는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냉철하고 결단력 있는 용맹한 여인이며, 근육질의 에너지가 넘치는 여전사로 이전의 서양 미술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강력한 여성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젠틸레스키는 당시 여성 화가가 그리기에는 불가능하다고 인식되었던 종교화와 역사화를 그린 최초의 여성 화가이다. 그는 왕후귀족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고,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으며 몇몇 작품에서는 카라바조를 능가할 만한 재능을 펼쳐보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656년경 나폴리에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미술사적 의미보다는 악명에 주목하여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근래에 들어서야 그의 작품이 재발견되어 미술사적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 중 어느 쪽이죠?”

설희가 물었다.

“권선징악인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선과 악의 개념이 분명하진 않으니까. 시대의 윤리에 따라 바뀌잖아요.”

설희는 전날 이수혁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일은 마음에 와닿지 않아요. 마을 사람들 중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었을 테니까요. 저는 그보단 개인적인 원한이 더 끌리던데.”

설희가 말했다.

“유디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대요. 마을에서 희생된 사람 중 한 명이었죠.”

“그럼 이해가 되네요. 머리를 자르고도 남죠.”(pp.83~84)

 

저자 : 유재영

 

소설가. 혼자 쓰고 함께 읽는다. 지은 책으로 《하바롭스크의 밤》, 《우리가 주울 수 있는 모든 것》 , 《한 줄도 좋다, SF영화: 이 우주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 《도메인》 , 《당신에게 죽음을》 이 있다. 1981년 서울 출생.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SF 영화는 [우뢰매], 그 뒤 텔레비전으로 [토탈 리콜]을 보고 화성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소설을 썼다. 소설집 『하바롭스크의 밤』, 『우리가 주울 수 있는 모든 것』이 있으며, 네이버 포스트 '자정의 매표소'를 운영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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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김정금 지음 / 델피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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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사기'란 소재는 그리 흔하지는 않다. 보험 사기 범죄는 늘어도 범죄와 범인이 금세 잡히고 해결되는 경우가 많아서인가? 보험 사기는 경제사범적 성격을 띄지만 대부분 형사 범죄가 연루되어 있어, 물증을 남기기 때문이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보험 액수도 커지기 때문에 고액 사기인 경우가 많아 전제 보험 사기 액수는 늘어나는 모양이다. 이 소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란 표제어가 말해주듯 미세한 차이를 짚어내야 하는 수사의 역할이 중요하게 떠오르지 않나 싶다. 소설의 주인공 김지섭은 보험조사원(손해보험사의 위임을 받은 손해사정 회사의 보험조사원)이다. 보험금 지급 요청이 접수되면 보험금 지급 결정을 위해 사고 현장이나 병원을 방문하여 사고의 고의성 여부를 조사하는 일을 한다.

수사 형사처럼 엄격하고 치밀한 조사 업무가 그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고객에게 뇌물을 받는 것은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조사 결과를 조작해서 보고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물이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2023년 현재 보험사기로 인한 피해가 1조 원을 넘어섰다. 이는 ‘보험사기’가 더 이상 특별한 몇몇의 이야기가 아님을, 누구나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방증한다. 특히 이 소설 작품은 있지만 없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이들의 삶에 주목한다. 모든 범죄는 가장 약하고 외로운 이들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이들을 통해 가장 낮고 약한 곳의 외로운 자들이 누구보다 먼저,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난다. 개인에서 나아가 한 가족을 파멸로 이끄는 보험사기의 비극을 여과 없이 그려낸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매우 시의적절한 소설로 우리가 주변에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만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다.

 


 

소설의 시작부터 저자 김정금은 주인공 지섭을 돈에 양심을 파는 파렴치한 성격의 소유자로 설정한다. "돈을 가진 자가 권력을 가진다. 지섭은 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끗 봤다. 뒷좌석에 흰 봉투가 놓여있었다. 조금 전에 면담한 고객이 열린 창문으로 던진 것이다. 그에게 보험금을 지급해달라는 일종의 뇌물이었다."(p.9)

사무실에 돌아온 지섭은 흰 봉투의 내용물을 가늠해보고 한 달 급여의 절반쯤 되는 액수에 만족감을 표시하며 막 들어온 김 과장과 업무적인 대화를 나눈다. 김 과장은 업무 차 경찰서에 다녀온 길이다. 김 과장이 내뱉은 말에 지섭은 귀가 쫑긋한다. "오는 길에 경찰이 했던 질문들을 곰곰이 돌이켜 보니까 말이야. 그 사람이 죽은 게 아닌가 봐." 이게 무슨 말인가? 사망진단서를 첨부하지 않으면 보험 조사 자체가 안 되는 일이다. 김 과장은 사망진단서만 보고 조사한 것이어서 사망진단서가 허위였거나, 죽은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짐작한다. 그럼 보험 사기? 김 과장은 조사를 위해 경찰서를 방문한 것이 아니고 참고인 조사를 위해 조사를 받고 온 것이다. 대화를 마친 지섭은 회사 전산망에 접속해서 배당목록을 확인한다. 진행하는 건은 10건, 그중에 이번 주 안으로 종결해야 하는 건은 1건, 오늘 새로 배당된 건도 1건이다.

피보험자 박연정의 〈수임 의뢰서〉를 훑어본다. 보험 약관에서 말하는 급격하고도 우연한 외래 사고가 맞는지 사고 경위를 확인해 달라는 단순한 건이었다. 다음은 보험 청구서로 눈길을 준다. 청구한 금액이 3억 원이나 된다. 3억 원을 지급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그의 손에 달렸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보험사에서 조사를 의뢰한 이유가 바로 일반적이지 않은 가입내용 때문이었다. 보통 고객은 보험 만기가 80세, 100세인데, 박연정은 30세였다. 그뿐만 아니라 보험에 가입한 지 3개월 만에 중대 사고가 일어났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보험조사원의 촉으로 께림칙하다는 느낌이다.

 

 

지섭은 고객 ‘박연정’의 사고를 조사하면서 묘한 의문에 빠진다. 보험청구서에 적힌 전화번호도 휴대폰 번호가 아니라 지역 전화번호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으니 입원 중인 병원으로 전화 주세요'를 발견하고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한다. 간호사로부터 전화를 전해 받은 박연정은 "뭐가 잘못됐나요?"라고 되레 묻는다. "아뇨, 잘못된 건 아니고, 조사가 진행될 예정이라 연락드렸습니다." "네? 조사요? 조사는 왜 하는 거예요?"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사고 현장이나 병원 방문이 필요할 경우 조사를 진행한다는 사실도 모른다. 지섭은 다짐하듯 말을 추가한다. "만약 동의하시지 않으면 보험금 지급은 지연될 거고요." 지섭은 조사를 진행하려면 먼저 고객을 만나 뵈어야 한다고 고지하고 시간을 묻는다. 의외로 박연정의 답변은 간단 명료하다. "아무 때나 괜찮아요."

다나음 재활요양병원 703호실로 오라는 박연정의 대답을 뒤로 전화를 끊는다. 김 과장이 모니터를 응시한 채 중얼거린다. "우리가 보험회사에서 수임료를 받는데, 공정할 수가 있나?" 매사 진지한 김 과장을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이어 김 과장은 보험회사의 처사에 불만스러운 말을 토해낸다. "공정한 심사를 하겠다고 손해사정 회사에 위임할 땐 언제고, 조사 결과에 개입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두 사람은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업무를 하기 때문에 공적인 대화와 사적인 대화도 나눌 사이다. 그러나 서로간에 부정한 일을 공모하진 않는다. 적어도 직업상 부정한 일은 곧 뇌물 받고 편파 조사를 하는 일이기에 보험조사원의 자격이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뇌물을 받는다는 것은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사실일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김 과장의 고객과의 만남에서 돈 한 푼 받은 적이 없고 설령 준다 해도 거절할 성격임을 드러낸다. "난 고객한데 커피 한 잔도 얻어먹고 싶지 않아. 내 돈으로 계산하고 말지. 그거 다 뇌물이잖아. 괜히 커피 한 잔 얻어먹고 조사하다가 뭐라도 나오기라도 해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하잖아 커피 한잔에 발목 잡히긴 싫어."

 


 

지섭은 서류 가방에 넣어둔 흰 봉투가 내심 신경 쓰였다. 고객이 건넨 돈 봉투를 받는다는 건 조사하다 보험금 지급할 수 없는 사유를 발견하더라도 그 사실을 보험회사에 숨기고 보험금 지급에 결격 사유가 없다는 결과를 내놔야 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김 과장이 덧붙인 말에 지섭은 양심에 찔리지만 내색하지 않고 모니터만 응시한 채 고개를 끄덕인다.

"보험회사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사는 우리가 객관성을 유지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양심은 잃지 말아야지. 보험회사에나, 고객한테나 말이야. 안 그래?"(p.23)

다음날 연정을 찾은 지섭은 업무적으로 필요한 말을 물어 확인하고 사고로 다쳤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을 순서에 맞춰 노련하게 해나간다. 당연히 사고 경위에 대해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다치신 거죠?"

"이불을 털다가 아래로 떨어졌어요."

"집이 몇 층이에요?"

"9층이요."

"난간이 있었을 텐데요?"

"창틀로 올라가서 까치발을 들었거든요."

연정이 한 말을 받아적으면서,

"큰일 날 뻔하셨네요."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행히 이불이 나무에 걸렸거든요."

 


 

지섭은 조사를 계속하면서 처음 만나 답변을 들을 때와는 다르게 ‘박연정은 이불을 털다 창밖으로 떨어진 것일까? 스스로 뛰어내린 것일까?’란 의문을 갖게 된다. 연정의 명확하지 않은 사고 경위 설명과 하나씩 드러나는 의문의 스토리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킬수록 지섭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섬뜩한 진실에 한발씩 다가선다.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보험조사원의 입장에서 경찰보다 정확하고 날카롭게 사건을 수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경찰의 수사 내용을 보험조사원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보험을 둘러싼 사기 사건의 진실을 파내기에는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 지섭의 능력을 더 확대시킨다. 저자 김정금은 사전에 주인공 지섭을 뇌물 받는 파렴치한으로 그려낸 데에도 저자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독자들은 진실의 절반쯤 왔다는 신호로 받아들여도 좋다. 저자는 거액의 보험금을 향한 인간의 탐욕과 잔혹함을 철저하게 고발하기 위해 어느 정도 부정한 인물 지섭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범죄 미스터리 소설답게 말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고 단서를 찾는 독자들의 숨소리조차 빨아들일 만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사건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기보다 아예 복선이나 스토리에 도움이 될 만한 장치들을 곳곳에 숨겨둔다. 사건의 묘사나 심리적 묘사 등은 사실적으로 묘사해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는 전형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범죄 소설을 완성시켜 간다. 독자들은 숨겨진 단서들을 하나씩 모아 퍼즐을 맞춰가는 내내 이야기에 푹 빠져 끝없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라. 당신 주변에 보이는 이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로맨틱 판타지인 전작 『은하수의 저주』과는 완전 다른 장르인 범죄 미스터리 소설을 선보인 저자의 실험 정신과 장르 확대 열정은 그가 앞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소설을 계속 보여줄 것이란 기대를 갖기에 충분하다.

 


 

숨겨진 반전과 급박한 장면 전환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두는 데 성공한 이 소설은 빠른 사건의 전개, 독자들이 예측하기 어려운 설득력 있는 돌발 상황을 모두 인정하게 하는 능력은 그의 빼어난 소설 구성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독자는 믿는다. 자칫 건조하고 우연이 섞인 스토리를 짜임새 있는 유기적 구성으로 극복해 낸 것이다. 특히 전반부는 빠른 호흡의 범죄 미스터리 소설이었다면 후반부터는 보이지 않는 범죄자에게 쫓기는 스릴러로서의 색깔도 작품의 매력 포인트라는 출판사 측의 평가도 진한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지섭의 시점으로 끌어가던 스토리가 후반 절정의 순간에는 조은희의 시점으로 바뀌는 것도 주의해 볼 사안이다. 자칫 주의가 산만해지고, 소설의 흐름을 망칠 수도 있는 실험적 작품은 역시 저자의 노련한 구성 능력으로 일시에 성공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흐름을 놓치기 쉬운 미스터리 범죄 소설을 리얼리즘 사회소설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은 저자의 글솜씨가 여과없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멋지고 흥미로운 소설임을 확인하는 순간 다른 독자들에게 권유하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망설이지 않고 추천하고 싶다.

 

저자 : 김정금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를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두려움이 앞섰다. 눈앞에 높은 벽이 세워진 것만 같았는데, 어느 순간 『고잉홈』과 『은하수의 저주』를 쓸 때와는 다른, 글쓰기의 재미를 알게 됐다. 이야기의 힘을 알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글쓰기를 멈추지 못할 것 같다. 지금도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공상으로 다음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렌다.

인스타그램 주소 @j_gold_writer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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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안보윤 외 지음 / 북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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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특히 단편소설은 첫 문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작가들은 물론 독자들, 심지어 평론가들도 한목소리다. 그게 정설이다고 한다. '소설 작법'에도 나와 있는 중요한 말이라고 한다. 독자도 그 말은 듣고 읽은 바가 있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소설 작법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소설 쓰는 법을 가르쳐 준 책이 있다고 해서 독자로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책에도 그 말이 쓰여 있었다. 이유도 "독자의 시선을 책에 잡아두기 위해서"라고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그래서 소설의 첫 문장은 그 책의 절반이라고 과장된 표현을 하는 작가도 있다는 말도 덧붙여 쓰여 있었다. 그런데 누가 한 말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소설을 쓰기 위한 목적으로 읽은 책도 아닌데 굳이··· 하며 넘겼다. 그 말은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신화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책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을 읽으면서 또 그 생각이 떠올랐다. 문학상이든 신춘문예이든 심사위원들이 엄선해 예선과 결선 등 모든 작품을 읽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문학상의 경우 추천작이 있다면 그 작품에 대해서도 심사위원이 모두 읽을 터다. 상을 주기 위한 심사위원들이 안 읽어보고 상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심사평도 쓰지 않은가. 이 책은 '이효석 문학상' 올해 수상자들의 작품집이다. 이 작품들에서도 이 소설 작법이 적용이 됐을까? 첫 문장에 주는 점수는 반영이 됐을까, 안 됐을까?

쓸데없는 궁금증이긴 하다. 심사위원들이 결정할 문제이지 독자가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효석 문학상은 이효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해마다 탁월한 작품을 발표한 작가들을 시상하여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지난 2000년 제정되었다고 한다. 엄격한 심사와 공정한 문학상 운영을 위해 문인 단체와 현장에서 활동하는 문인으로 문학상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심사와 시상과정 전체를 공개하고 있다고 선정과 시상 주체인 〈이효석문학재단〉은 밝히고 있다. 첫 회(2000) 대상 이순원의 「아비의 잠」부터 성석제, 윤대녕, 정이현 등 이름만 들어도 독자들이 잘 아는 기라성 같은 스타 작가들을 배출했다.

 


 

올해 대상 수상작은 안보윤 작가의 「애도의 방식」이다. 이 소설 작품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소란하다. 나는 소란한 것을 좋아하고 소란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무슨 뜻인지 읽는 즉시 알 수 있다. 독자 입장에서 그렇다. 이 문장은 심사위원들에게 어느 정도 어필이 됐을까? 앞서 언급한 대로 독자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말이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소란한 곳을 좋아하지만 소란해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은 '소란한 곳을 좋아한다'는 말을 중복해 쓴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도 중복이 아닌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있다. 다음 문장에서 말의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해진다. "이미 소란한 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소란해지기 시작한 곳에서는 대부분 내가 그 중심에 있다." 이미 소란해진 곳은 '나'가 그곳에 뒤늦게 갔고, 소란해지기 시작한 곳은 내가 소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성격이나 대인 관계의 성향을 드러내는 말이다. 다음 문장은 명확한 뜻이 전달된다. "나를 놀리고 조롱하고 멸시하느라 소란해진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건 지겹다." 쉽게 대인 기피 성향의 '나'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話者)이다.

지금 '나'가 있는 곳은 '미도파 카운터'이고 나에게 최적의 공간이다. 미도파는 성동터미널에 있는 유일한 찻집이다. 출입문에는 미도파, 라고만 쓰여 있는데 어째서인지 다들 미도파 찻집이라고 부른다. 미도파는 이곳의 유일한 찻집일 뿐 아니라 유일한 식당이기도 하다. 터미널은 작고 납작한 단층 건물이라 매표소와 화장실, 미도판만으로 내부가 꽉 찬다. 이곳은 '나'가 1년째 일하고 있는 직장이다. 원래는 고등학교를 떠날 작정이었으나 돈이 없었으므로 수도권보다는 바닷가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작가 안보윤은 '나'의 기억속을 돌아다니며 이유를 찾았다. "수험 준비를 하는 내내 선생님들이 니들 그렇게 공부 안 하면 나중에 배 타고 참치 잡으로 다니게 된다. 어디 섬에 처박혀서 시금치 농사나 짓게 된다. 고 말한 데서 힌트를 얻었다. 이곳을 떠나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지역에서 혼자 살고 싶었다."(p.11)

 


 

'나'는 그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터미널에 도착해 가장 비싼 표를 구매했다. 차 시간을 기다리느라 미도파 찻집에 들어갔고, 붓펜으로 직접 써넣은 정갈한 한글이 뜻 모를 한자어, 그러니까 〈求人, 所定의 給與〉 같은 글자들과 뒤섞여 쓰인 구인광고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일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나'는 손님 우산을 훔쳐 쓰고 폐점한 찻집을 나섰다. 폐점할 때까지 우산을 두고 간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스스로 우산을 훔쳤다고 생각할까. 주인이 나타나더라도 돌려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훔친 게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가 그쳤지만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우산을 쓰고 걸었다. 들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우산을 접었다. 저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우산과 맞잡고 걸었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미도파는 마늘 냄새로 가득하다. 마늘 냄새 사이로 한 여자가 들어온다. 믹스 커피를 주문해 마시고 난 후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한다. 구운 파인애플을 도막도막 잘라놓고, 감자를 으깨어 섞어놓고도 먹지 않는다. 그 여자는 승규 엄마다. 주인공인 나(동주), 승규, 그리고 승규 엄마와의 과거를 회상한다. 승규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인근 공사장 폐건물에서 추락 사고로 숨졌다. 사고 순간 동주가 봤지만 침묵했다. 심지어 119가 왔을 때 친구라면 동승하라고 말해도 친구가 아니라며 동승하지 않았다. 승규 엄마가 얘기를 들려주라고 간절하게 이야기했을 때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승규의 학폭 행위 피해자였다.

미도파는 폐건물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은 승규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유일한 목격자인 ‘나’가 모든 의심 어린 질문에 응답하지 않기 위해 도달한 침묵과 멈춤의 공간이다. ‘미도파’라는 공간 안에서 ‘나’는 옥상 끝에 서 있던 그날의 순간으로 끝없이 회귀해 다른 결말의 가능성을 상상해보며 결코 완료될 수 없는 윤리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으로, ‘승규의 엄마’는 미도파에서 일하는 ‘나’를 찾아와 으깨진 함박스테이크를 한 번 더 으깨놓는 것으로, 각자 자신만의 ‘애도’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처럼 「애도의 방식」은 지금까지 학교폭력을 다룬 보통의 서사(사적인 사연이나 복수의 서사)와 달리 폭력의 굴레와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요된 질문에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고자 노력한 소설이다. 또한 “단순히 소재적인 강렬함이 아니라, 그것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하는 놀라운 조형적 성취로써 격식 있게 극복하며 소설적 주제와 동시대적인 메시지를 동시에 달성”(심사평 중에서)하고 있다. 그럼으로 이 소설이 가진 진정한 가치는 오늘날 우리에게 진지한 삶의 태도를 묻고 답할 수 있는 ‘멈춤의 순간’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성에 짓눌려 있는 폭력의 굴레와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강요된 질문에 대하여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고자 노력한 소설이다. 단순히 소재적인 강렬함이 아니라 그것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하는 놀라운 조형적 성취가 놀랍다."고 심사위원 모두의 최고 평가를 자아냈다.

강보라의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우붓이라는 이국적 장소에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취향의 우월성을 유지하려는 주인공 ‘나’의 심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취향의 계급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 시대 고급문화에 대한 허영과 자존감 사이에 놓인 개인 심리의 미묘한 저울질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김병운의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성적 소수자인 ‘진무 삼촌’의 생존 사실을 알고서 그를 만나러 가는 주인공 ‘나’와 친구 ‘장희’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퀴어 서사에 대한 관성적인 이야기 문법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세대의 퀴어로서의 삶을 새롭게 교차하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교차성을 보여준다.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을 "‘취향의 계급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 시대 고급문화에 대한 허영과 자존감 사이에 놓인 개인 심리의 미묘한 저울질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문학을 하나의 취향으로서 소비하는 소설 독자라면 섬찟할 정도로 이 소설의 신랄함은 매력적이다."고 평가했다.

 


 

김인숙의 「자작나무 숲」은 어느 것도 자신의 혈족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 ‘쓰레기 호더’ 할머니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할머니의 집,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의 애증 섞인 시선과 신랄한 서술만으로도 독자를 압도하는 강렬한 작품이다. 사회적인 시선에서 가치 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할머니의 욕망과, 상속이라는 이름의 부의 대물림 혹은 끈질기게 무언가를 영속하길 바라는 손녀의 욕망 사이의 치명적인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신주희의 「작은 방주들」은 암호화폐 전자지갑 회사인 ‘더 코인 아크’에서 방주를 뜻하는 ‘아크(ark)’의 홍보를 맡았던 친구 ‘진주’가 실종되고, 주인공 ‘나’ 역시 갑자기 무보직 대기 발령을 받으면서 사회로부터 실족하게 되는 이야기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우리 시대의 개인이 꿈꾸는 저마다의 방주라는 미약한 구원의 형태와 그 (불)가능성을 탐문해나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지혜의 「북명 너머에서」는 가장 클래식한 단편소설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나’가 북명백화점에서 일했던 시절을 반추하며, 그때의 애틋함의 기억을 복원해나가는 서술이 시대적인 분위기와 당대의 장소성과 맞물려 더욱 매력적으로 읽힌다. 마지막으로 2022년 제23회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김멜라의 자선작 「이응 이응」도 함께 실려 있다. 혼자서도 성적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기계인 ‘이응’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실제적인 접촉(이를테면 뺨을 대거나, 포옹하거나, 반가운 마음에 상대를 안아서 들어 올리는)을 느끼고 싶은 주인공 ‘나’는 ‘우리의(we)의 포옹’이란 뜻의 위옹 클럽에 가입한다. 느슨한 S자 곡선을 그리는 것처럼 겉으로는 성장을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생장하는 인간관계의 친밀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심진경 문학평론가는 「자작나무 숲」에 대해 "어느 것도 자신의 혈족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 ‘쓰레기 호더’ 할머니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할머니의 집,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의 애증 섞인 시선과 신랄한 서술만으로도 이 소설의 읽는 재미는 보장된다."고 평가했으며, 소설가 정이현은 지혜의 「북명 너머에서」를 "단편소설 고유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주인공이 과거 북명백화점에서 일하던 시절을 생생하게 복원하는 과정의 서술이 시대적인 분위기나 당대의 장소성과 맞물려 더욱 매력적으로 읽힌다."는 소감을 내놓았다.

제24회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 「애도의 방식」은 물론이고, 이 책에 함께 수록된 우수작품상 수상작들은 한껏 납작해지고 왜소해진 개인의 삶의 가능성을 다시금 부풀려서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동시에, 관성에 의해 떠밀려 가는 삶의 가운데에 멈추어 서서 상상하는 순간을 발견하게 한다.

 

여자가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한다. 구운 파인애플을 도막도막 잘라놓고 먹지 않는다. 노른자를 터뜨려 끼얹은 고깃덩어리를 죄다 으깨놓고 먹지 않는다. (……)

음식에다 이게 뭔 짓이야. 너 진짜 모르는 사람 맞지?

몰라요.

나는 진심을 담아 말한다. 알 리가 없다. 이미 으깨진 것을 기어코 한 번 더 으깨놓는 사람의 마음 같은 건.(p.27~28)

안보윤 「애도의 방식」 중에서

 


 

저자 : 안보윤

198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로 제1회 자음과모음문학상을, 단편소설 「완전한 사과」로 2021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소년7의 고백』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중편소설 『알마의 숲』, 장편소설 『밤의 행방』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 등이 있다.

 

저자 : 강보라

소설가.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자 : 김병운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와 에세이집 『아무튼, 방콕』이 있다. 제13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저자 : 김인숙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201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꼬리』 『소금을 꾸러 갔다』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가 있고, 논문 「구상 시인의 생애와 왜관 낙동강」이 있다. 〈신라문학대상〉, 〈한국문학예술상〉, 〈농어촌문학상〉 대상, 〈경북작가상〉, 〈경상북도문학상〉, 〈석정촛불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경북문인협회 사무국장 및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자 : 신주희

2012년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에 단편 「점심의 연애」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세월호 추모 공동 소설집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남북한 작가 공동 소설집 『국경을 넘는 그림자』 등에 작품을 수록했다. 소설집 『모서리의 탄생』을 냈다.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제21회 이효석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저자 : 지혜

201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앤솔로지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AnD Vol. 1』, 『N분의 1을 위하여』에 참여했다.

 

저자 : 김멜라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 『적어도 두 번』, 『제 꿈 꾸세요』,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가 있다. 제 11회 문자문학상, 제12회·제13회·제14회 젊은작가상, 제23회 이호석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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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인 현대지성 클래식 52
알베르 카뮈 지음, 유기환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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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방인』을 읽을 때 『반항인』이란 카뮈의 저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방인』을 다 읽은 다음 『반항인』을 읽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러운 발로일 것이다. 내친 김에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방인』을 읽을 때와 다른 느낌이었다. 우선 어려웠다. 그리고 프랑스 문학을 많이 접해보지 못해서인지 『반항인』의 논리를 따라가기 벅찼다. 아니 어쩌면 논리의 문제라기보다 읽는 독자의 철학적 사고력과 사상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소설 『이방인』과 철학서인 『반항인』은 독자의 '철학 빈곤'을 드러내는 선에서 멈추고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다. 독서를 중단한 것이다. 아직 『반항인』을 읽을 정도로 독자의 지식이 따라가지 못한 상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대학 다닐 때의 일이다. 소설 『이방인』은 작품 그 자체로 보나 20세기 서사 형식의 역사에 있어서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작품으로 출판 당시부터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었다고 한다. 양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정신적인 공허를 경험한 서유럽, 특히 프랑스 독자들에게 당시 카뮈는,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관습과 규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현실에서 소외되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마주하는 실존의 체험을 강렬하게 그린 『이방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워지는 고전의 품격을 지닌 작품이라고 문학평론가들은 극찬했고, 그들의 평가처럼 『이방인』은 무명 카뮈를 단숨에 세계문학사 속의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다. 1942년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의 일이다. 다소 어렵다는 생각이었지만 소설이어서 끝까지 읽어 당시 평론가들의 평이 이해될 정도로 카뮈에 접근했다고 독자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 『반항인』은 달랐다. 이 책은 1951년 프랑스에서 출판된 '철학평론서'이다. 1956년에서야 『The Rebel, An Essay on Man in Revolt』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었다고 한다. 이 책의 영역본 서문에서 허버트 리드(Herbert Read)는 '이 책의 출판으로 1세기 이상 유럽의 정신을 뒤덮고 있던 불안·절망·니힐리즘의 시대라는 어두운 먹구름이 걷히고 인간과 미래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격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발표 당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반항인』은 카뮈가 자신의 소설 『이방인』과 평론 『시지프의 신화』(1942)속에서 추구했던 실존적 문제의식을 명쾌한 논리로 정리하여 발표한 철학적 에세이이자 평론서이다. 이 책은 〈서설〉에서 '부조리와 살인'에 대해 자신의 철학적 사상과 이념을 담았다고 밝힌다. 이어 1장 「반항적 인간」, 2장 「형이상학적 반항」, 3장 「역사적 반항」, 4장 「반항과 예술」, 5장 「정오(正午)의 사상」 등 모두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랑스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문학적인 문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반항사상의 역사와 반항적 행동의 역사를 중심 테마로 다루었다.

알베르 카뮈는 이 책에서 프랑스 혁명 이래 등장한 수많은 혁명가와 예술가·철학자· 정치가들의 사상과 행동을 검토 분석한 끝에 형이상학적 반항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혁명운동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반항정신에는 스스로 '절도(節度)'를 지킬 줄 아는 '긍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혁명적 수단과 유물사관을 비판하고, 점진적 중용(中庸)의 방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이 평론서를 통해 반항적 인간의 '중용'과 '균형'을 말하고, 결론적으로 절도와 사랑이 주축이 되어 니힐리즘의 암흑을 밝히는 밝고 찬란한 '정오의 사상', '태양의 사상'을 제창하였다. 당연히 당시 좌파와 공산주의 이념가들과 사상가들의 격렬한 비난을 샀다고 전해진다. 특히 공산주의로 연방제 국가를 세운 구소련의 정치가나 사상가들에게는 '공공의 적'이 되었던 것 같다.

평론 『시지프의 신화』에서 모든 가치를 부정한 부조리의 철학을 다루었으나, 『반항인』에서는 반항이라는 개념과 정치적·역사적 혁명을 대비시켜 반항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탐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는 혁명적 논리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견해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과 친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켰다. 특히 혁명과업의 수행을 강력히 주장한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와 알베르 카뮈 사이에 전개된 1952년의 논쟁은 두 사람의 10년 우정에 파탄을 가져올 만큼 격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독자로서는 『반항인』의 논리적 모순이나 내용의 공허함을 지적하기 위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기에 그저 이해한다는 선에서 서평에 임하고자 한다. 이 책을 번역한 유기환은 책의 앞 부분에 쓴 〈옮긴이의 말〉에서 "냉전 시대의 공산주의 비판서로 읽히던 『반항인』을 21세기에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란 질문과 함께 독서법을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카뮈의 저술 가운데 가장 두꺼운 이 책은 역사의 물꼬를 돌린 반항의 여울목을 빠짐없이 개관하고 있다. 대강만 간추려도 카인의 살인, 스파르타쿠스 반란, 사드의 신성모독, 프랑스대혁명, 낭만주의자들의 반항, 기독교 신학, 헤겔 철학, 니체의 허무주의, 마르크스주의, 러시아혁명, 초현실주의, 히틀러의 파시즘, 스탈린의 전체주의 등 서양사를 꿰뚫는 거대 담론이 숨 가쁘게 지나간다. 알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카뮈가 그리스적 균형의 시각에서 소개하는 '서구 저항의 역사', 바로 그것이 21세기에 『반항인』을 읽는 새로운 묘미가 아닐까?

유기환 역자는 카뮈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중심을 슬그머니 꺼내 놓는다. 카뮈의 글에 관한 한 최고의 번역가로 공인된 역자이다. 독자들이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또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카뮈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쓴 '반항'이란 단어에 집중한다. 부조리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반항이 존재한다. “숙명적으로 주어진 부조리 앞에서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반항’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알베르 카뮈가 말하는 반항인은 참을 수 없는 구속에는 ‘아니요’라고 말하며, 본질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에는 ‘예’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이 본질적 가치는 ‘숙명의 동일화’를 통해 개인적 차원에서 보편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카뮈는 말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반항인』에서도 카뮈는 지중해의 태양, 즉 헬레니즘 사상의 지배를 받는다. 카뮈는 반항에 한계를 두고 균형과 중용을 중시하는 이른바 ‘정오의 사상’을 역설한다. 현실이 이념을 압도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카뮈가 왜 그토록 균형과 중용을 역설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 세계는 또다시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이 벌이는 ‘절대’의 패권 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시대를 앞서간 책 『반항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시대의 반항인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가?”

 

 

『이방인』 발표 이후 스타덤에 올랐지만 카뮈가 평탄한 인생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 책 『반항인』 출간 이후에는 수많은 비판을 받으며 파란곡절을 겪는다. 1951년 출간되자마자 유럽 지식인 사회를 뜨거운 논쟁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방인』 출간 당시 카뮈를 극찬했던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해 좌파 계열의 지식인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섰다. 앞서 언급한 대로 결국 사르트르와 10년간 이어진 우정도 무너지고 말았다(사제지간). 그럼에도 카뮈는 『반항인』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책이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라 말하며 변함없는 애정을 보였다고 한다. 도대체 『반항인』은 어떠한 책이기에 카뮈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일까? 또 카뮈는 왜 그토록 이 책을 사랑했을까?

카뮈의 작품 세계는 〈부조리〉, 〈반항〉, 〈사랑〉이라는 세 가지 핵심 주제로 요약된다. 이 세 주제는 각각 소설, 에세이, 희곡으로 다시 형상화된다. 부조리 계열 작품으로는 소설 『이방인』, 에세이 『시시포스 신화』, 희곡 『칼리굴라』, 『오해』가 있고, 반항 계열 작품으로는 소설 『페스트』, 에세이 『반항인』, 희곡 『정의의 사람들』, 『계엄령』이 있다. 사랑 계열 작품에는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으로 남은 소설 『최초의 인간』이 있다. 따라서 『반항인』을 빼고서는 ‘반항’이라는 주제, 더 나아가 카뮈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반항은 부조리에서 태동한다. 습관과 타성으로 살아가던 인간이 어느 날 문득 죽음, 생명, 우주, 존재, 무(無) 등을 생각할 때 일어나는 막막하고 아연한 감정, 그것이 바로 ‘부조리 감정’이다.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숙명적으로 주어진 부조리 앞에서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반항’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부조리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반항이 존재한다. 카뮈가 말하는 반항인은 참을 수 없는 구속에는 ‘아니요’라고 말하며, 본질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에는 ‘예’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이 본질적 가치는 ‘숙명의 동일화’를 통해 개인적 차원에서 보편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카뮈는 말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이 책에서 카뮈는 「형이상학적 반항」과 「역사적 반항」에 특히 많은 양을 할애한다. 형이상학적 반항은 인간이 신을 거부하는 반항이며, 노예가 주인을 거부하는 것은 역사적 반항이다. 카뮈는 다시 역사적 반항의 차원에서 혁명과 반항을 구분한다. 카뮈는 일종의 항의에서 시작해 점진적 해방을 추구하는 반항과는 달리, 하나의 이론적 틀에서 출발해 역사를 전복하고 세계를 뒤바꾸려는 혁명을 비판한다. 대신 헬레니즘적 전통에 충실한 한계와 절도(節度)의 사상, 이름하여 ‘정오의 사상’을 강조한다. “인간에게는 인간에게 적합한 중간적 수준에서 가능한 행동과 사상이 있다.” 이 책에서 카뮈는 온갖 초월과 부정에 맞서 관용과 균형이라는 긍정의 몸부림을 친다. 세계의 전복이 아닌 이 지상에서의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것, 부조리에 맞서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완전해지는 것, 바로 그것이 카뮈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반항이었다.

"반항은 그것이 파괴에 이를 때 논리에 어긋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조건의 통일성을 요구하는 반항은 삶의 힘이지 죽음의 힘이 아니다. 반항의 심오한 논리는 파괴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논리다. 반항 운동이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모순의 어떤 항도 버리지 않아야 한다. 반항 운동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예’와 허무주의적 해석이 반항 속에 따로 떼어놓는 ‘아니요’에 동시에 충실해야 한다. 반항자의 논리는 인간 조건의 불의에 또 다른 불의를 보태지 않도록 힘쓰고, 세상에 널리 퍼진 거짓을 심화하지 않도록 명료한 언어를 사용하며, 인간의 고통에 맞서 행복을 위해 투쟁하는 데 있다. 허무주의적 정열은 불의와 거짓을 증식시킴으로써 광란 속에서 자신의 옛 요구를 파괴하고, 그리하여 자신의 반항을 받쳐주는 가장 명료한 이유를 상실한다. 허무주의적 정열은 세계가 죽음에 내맡겨져 있다고 여기며 광기에 빠진 채 살인을 한다. 반면 반항의 결론은 살인의 정당성을 거부한다. 원칙적으로 반항은 죽음에 대한 항의이기 때문이다."(p.412)

이 책에는 『반항인』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카뮈의 인터뷰 두 편을 추가했다. 하나는 『카뮈 전집』 제2권에 실린 『시시포스 신화』 해설에 수록된 글로 「아닙니다, 나는 실존주의자가 아닙니다」라는 인터뷰다. 이 글에서 카뮈는 사르트르와 자신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부조리와 반항의 관계를 설명한다. 다른 하나는 『카뮈 전집』 제2권에 실린 『반항인』 해설에 수록된 글로 『디아리우』 신문에서 인터뷰한 글이다.

 


 

"반항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일에 도전할 수는 있다."(p.439)

 

저자 :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그 모든 것에 항거하며 인간의 부조리와 자유로운 인생을 깊이 고민한 작가이자 철학자. 1913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몽드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사스 출신의 농업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고, 청각 장애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카뮈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가난, 알제리의 빛나는 자연과 알제 서민가의 일상은 카뮈 작품의 뿌리에 내밀하게 엉기어 있다.

1937년 첫 산문집 『안과 겉』을 발표하고, 이듬해부터 [알제 레퓌블리켕]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1940년에 파리로 활동 무대를 옮겨 [파리수아르]의 기자가 된다. 독일에 점령당한 파리에서 검열을 피해 지방으로 옮긴 [파리수아르]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에도 집필 활동에 매진한다. 초기의 작품 『표리』(1937), 『결혼』(19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1942년 7월, 자신의 첫 소설이자 대표작이 되는 문제작 『이방인 L' tranger』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이즈음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프랑스 해방 운동에 참여한 카뮈는 철학 에세이 『시시포스 신화』(1943), 희곡 작품 「오해」(1944) 등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후에 일간지가 된 [콩바]의 편집장으로서, 모든 정치 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좌파적 입장을 견지했다. 또 집단적 폭력의 공포와 악성, 부조리함을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한 소설 『페스트』로 문학계의 대반향을 일으켰고 1951년에는 마르크시즘과 니힐리즘에 반대하며 제3의 부정정신을 옹호하는 평론 『반항적 인간』을 발표하여 지성계에 큰 논쟁을 촉발한 사르트르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10년 가까운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1956년 『전락』을 발표하면서 사르트르에게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알베르 카뮈가 생전에 가장 아꼈던 책은 『반항하는 인간』이라고 한다. 카뮈의 철학적·윤리적·정치적 성찰을 담은 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반항하는 인간』은 『시지프의 신화』와 함께 카뮈의 대표적인 시론(試論)이다. 1951년 출간 당시 프랑스 지성계를 들끓게 했던 이 책에서 카뮈는, 폭력과 테러를 역사적·철학적·정치적 맥락에서 살피며,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한다.

이 외에도 『여름』, 『유배지와 왕국』, 『행복한 죽음』, 『정의의 사람들ㆍ계엄령』, 『결혼, 여름』, 『태양의 후예』, 『젊은 시절의 글』, 『스웨덴 연설ㆍ문학 비평』, 『최초의 인간』, 『여행일기』, 『단두대에 대한 성찰ㆍ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전락·추방과 왕국』, 『안과 겉』 등의 작품을 썼다.

 

역자 : 유기환

 

1959년 태어났으며 1977년 서울에 올라와 한국외국어대학 불어과에 입학했다. 외무고시 이차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1979년부터 한 십 년 열심히 세상공부를 했다. 세상공부가 끝났다고 자부하던 순간 닥친 1990년대, 즉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대궤멸은 그에게 또 다른 방황을 안겼다. 최종적으로 그가 택한 것은 프랑스 유학이었다. 파리8대학에서 지도교수 자크 네프와 학우 다미엥 자논을 만난 것은 더없는 행운이었다. 네프 교수는 문학의 경우 테제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미학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다미엥은 수사학이 다만 장식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 『알베르 카뮈』, 『조르주 바타이유』,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공저) 등을 썼고, 바르트의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카뮈의 『이방인』, 바타이유의 『에로스의 눈물』,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돈』, 외젠 다비의 『북 호텔』, 그레마스/퐁타뉴의 『정념의 기호학』(공역) 등을 번역했다. 그 외 「‘책을 읽는 하층민’ 쥘리엥 소렐의 독서 연구-『적과 흑』」을 비롯하여 불문학 관련 논문 30여 편을 썼고, 지금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 교수로 일하며 여전히 글쓰기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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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수명 시네마
노유정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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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도 수명이 있다. 직업인의 일과 죽음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기대 수명 시네마‘는 직업 선택이나 전환하려는 사람에게 적절한 안내를 해준다. 콘서트를 거쳐 적성에 맞는 직업으로 당신의 앞날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이 소설 작품은 누구에게나 흥미를 끄는 소재를 유기적 구성으로 잘 엮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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