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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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전 출판사에서 제공한 가제본판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2018년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 없던 한 해였습니다. 성폭력 사건으로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상 선정 권한이 취소되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문학계 전반에 걸쳐 미투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 해이기도 했는데요, 그러한 일련의 사건과 맞물려 50주년을 맞이한 맨부커상은 만장일치로 애나 번스의 <밀크맨>을 소설 분야 수상작으로 선정했습니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없습니다.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아빠, 엄마, 언니, 형부 등의 가족관계를 제외하곤 '아무개'라는 표현이 등장하죠.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의 딸, 아무개의 오빠 이런 식으로요. 

 

<밀크맨>은 1969-1998년에 이르기까지 소모적이고 성과 없던 30년간의 종교분쟁(개신교vs가톨릭)인 '북아일랜드 분쟁(The Troubles)'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 기간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72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는데요, 그 해 1월 30일 북아일랜드의 런던데리에서 아일랜드계의 시위를 진압하러 온 영국군이 시위 중이던 비무장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으로 14명이 죽고, 13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이었죠.

 

이 사건은 IRA 과격파에게 명분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어 이들이 득세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영국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으로 북아일랜드 주민들이 죽어나가자 그 유족들이 다시 IRA에 가입하거나 소년병이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기도 했습니다. 보복으로 IRA은 영국의 왕족을 죽이고, 영국은 또다시 무장 진압을 통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고 은폐하고... 끝없는 분쟁 끝에 1998년 토니 블레어 총리가 '피의 일요일 사건'의 재조사를 지시하면서 12년간 이뤄진 조사(새빌 보고서)로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기도 했었죠.(자료출처-나무위키:  북아일랜드, 피의 일요일 pt.3 북아일랜드 데리) 개인적인 언급이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룹인 'U2'가 이를 다룬 'Sunday Bloody Sunday'라는 곡을 만들었기에 북아일랜드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기도 했었구요.  

 

국가적 분쟁에서는 누구나 피해자이고 가해자이지만, 특히 여성과 아이들은 최대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책 <밀크맨>도 18세 소녀가 살아내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개의 가운데 딸인 18세의 소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밀크맨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스토킹을 당합니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아직은 순수한 그녀의 세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죠. 소녀는 가족들마저도 자신의 말보다는 동네를 떠도는 루머를 믿는 상황에 지쳐서 더 이상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더 큰 소문을 불러일으키고 남자친구와의 갈등도 깊어지기만 합니다.    

 

문이 열리고 내면의 모순이 드러난다. 그렇게 되면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충돌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옳은 발언은커녕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말이 되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랬다저랬다 하고 뭉개버리고, 나는 모른다며 미시감 상태로 들어가고 하얗게 지워버리고 걸으면서 책을 읽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힘과 감정이 직접 의식 속으로 파고 들어와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반대자가 왜 필요한지는 알았다. 법제화된 불균형을 생각하면 왜 반대자가 생겨났는지, 생겨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이 격동의 시기에는 누구도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고집을 꺾지 않고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 단층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또 반대자들도 생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죽는 일은 일상적이어서 일일이 따지지는 않았다. 그게 아무 일이 아니라서가 아니고 너무나 막대하고 너무나 많이, 빨리 벌어져서 거론할 시간이 없었다는 의미다. - <밀크맨> 본문 중에서

 

그녀가 살아내는 북아일랜드의 상황은 이름도 마음대로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종교와 신념이 모든 것의 최상위에 존재하며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시대였죠. 그 시대는 그래서 '이름이 없는' 시대입니다. 맹목적인 믿음, 자신이 왜 싸우고 있는지 의미를 잊은 사람들, 복수에 복수가 거듭되고, 생존을 위해 폐쇄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는 시대에 과연 18세 소녀는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요? 밀크맨은 단지 그녀를 괴롭혔던 단 한 명의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살아야 했던 그 시대를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아프게도 이 소설 <밀크맨>은 저자인 애나 번스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18세 소녀의 감성이 정말 날것 그대로 섬세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분쟁의 피해자로 대물림(아버지의 과거) 되는 그녀의 18세에 '부드러운 변화의 빛'이 도달할 때까지, 그 여정에 응원의 깃발을 세워봅니다. 이젠 진정으로 평온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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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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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는 도서출판 창비에서 '내일을 향한 질문, 젊은 문학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슬로건으로 나온 '소설Q'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입니다. 이 시리즈가 어떠한 곳으로 향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시리즈의 시작인 이 소설은, 읽는 동안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나고, 내가 어른이라서 미안하고, '애쓰는 인간'이 되길 노력하는 제야의 등 뒤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18살, 친구가 있고, 꿈이 있고, 동생 제니와 사촌인 승호와의 시간들이 그저 평범하기만 했던 소녀, 이제야.

한 권은 숙제를 위해, 한 권은 비밀 이야기를 적기 위해 일기를 쓰는 평범한 소녀에게 2008년의 7월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시간이었는데요, 평소 자신에게 친절하던 '사람 좋은'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었죠. 사건 당시 십 대의 치기 어린 마음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피해자 임에도 비난받아야 했던 제야. 어른들은 유지였던 당숙의 호소를 듣고 제야를 '행실이 나쁜 음탕한 년'으로 매도합니다.

 

승호와의 비밀 장소에서 치기 어린 마음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 것이, 너무 무서워서 반항하지 못해 상처 하나 없었던 것이, 사건 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는 것이 폭행 피해자 치곤 너무 냉정한 대처라서 '믿을 수 없다'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던 거죠. 엄마마저도 '엄마를 믿어'라며 제야의 인생을 위해 '입을 다물어야 한다'라고 압박합니다. 어른들은 당사자인 제야를 제쳐두고, 어른들끼리 합의를 하고, '제야의 미래를 위해'라며 사건을 덮어버립니다.

 

일어난 일은 종이가 아니니 찢어도 태워도 없어지지 않고 없던 일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없애버리고 싶다. 없던 일로 만들고 싶은 건 엄마도 아빠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내게 모든 걸 떠밀고 나를 없애버리고 있다. 지금의 나를 쓰레기로 만들어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다 나를 위해서라고, 내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찢어버리고 싶은 건 내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찢어지고 있다.(49쪽)

 

진짜 읽는내내 어찌나 분하고 억울하든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엔 너무도 미안해서, 너무도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제야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죄스러울 지경에 이르더군요. <이제야 언니에게>는 성폭행 이후 피해자의 심리 상태를 너무도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어, 마치 제야가 제 주변에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줍니다. 이하게 이 소설에서는 대화체에 따옴표(" ")를 사용하지 않고, 쉼표의 사용도 극도로 자제한 문체 때문인지, 오히려 제야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기분이 들어요. 문장과 대화체의 구분(따옴표)이 없어서 읽는 동안 걸리는 부분이 없거든요.

 

나는 이제 가만히 있어도 음흉한 애다. 헤픈 애고, 착각하는 애고, 꿍꿍이가 있고, 남자를 꼬드기는 애다. 거짓말하는 애고, 부풀리는 애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애다. 그냥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나는 그런 애다.(129쪽)

 

아 진짜... 우린 제야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가슴에 묵직함이 느껴져 죄스러운 마음만 가득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꺼내봅니다. '이제야 언니에게... 이제야 말해봅니다. 이런 어른이라 미안해요. 나도 애쓰는 인간이 되기를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당신, 견디는 것이 아닌 당신의 온전한 삶을 살아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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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온 - 잔혹범죄 수사관 도도 히나코
나이토 료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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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ON)>은 낡은 주택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되는데요, 주인공 도도는 '여형사가 멋있으니까 너 형사해'라는 엄마의 말대로 형사가 되었고, 고추 양념을 모든 음식(코코아에조차)에 뿌려 먹는 특이 식성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미제 사건을 몽땅 외울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죠. 도내에서 엽기적인 모습으로 자살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도도는 변사자들이 강력 사건의 용의자들이었음을 알아냅니다.

 

 

 

<온(ON)>은 2016년 일본 KTV에서 9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요(ON 이상범죄수사관 토도 히나코)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은 '하루'는 제가 좋아하는 배우이기도 하고, 도도역에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어서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었어요. 드라마는 도도 시리즈를 제작한 거라서, 책과 다른 부분이 많긴 하지만요. 원작보기 전에 드라마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이든 사형이 집행되어 자신이 죽는 것은 단 한 번 뿐입니다. 자살할 수 없으니까 사형당하고 싶다는 바보 같은 논리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죽는 건 한 번뿐이라니 참으로 불공평한 이야기지요.(86쪽)

 

사건이 진행되면서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저자가 범인을 하도 꽁꽁 숨겨놓는 바람에 나름 추리하는 재미가 배가되는 독서였어요. 잔인한 범죄 앞에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봤던 이야기, '저 놈(또는 저 놈 자식새끼)도 똑같이 당해봐야 해.'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과연 정의감에 휩싸여 마냥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요?

 

범인은 추억마저도 빼앗아갔다. 교수형 따윈 미적지근한 형벌이다. 사랑하는 자를 그런 끔찍한 꼴로 만든 녀석은, 자신도 똑같은 모습으로 죽어야만 한다. 같은 모습으로 죽어 마땅한 것이다.(191-192쪽)

 

<온(ON)>은 방치아동, 소위 '형광등 베이비'로 자란 아이의 범죄를 그리고 있는, 잔인하지만 마음 한켠이 아려오기도 하는 범죄소설입니다. 범죄용의자이자 범인일 수도, 또는 자살자일 수도 있는 변사자들이 공포와 쾌락을 동시에 느낀다는 설정이 엄청 마음에 들었고요, '누가' '왜' 그들을 '어떻게' 그런 상황으로 몰아 넣는지에 대한 추리와 자극적인 묘사가 한데 엉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그 사람들은 감정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는 있습니다만, 감정을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엽기 사건도, 본인이 생각한 명쾌한 이유 때문에 이루어진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갖고 싶으니까 갖는다, 방해되니까 죽인다, 흥미 있으니까 먹어본다는 식입니다. 그 사람들은 피해자가 존재했다는 기억은 있어도, 그 사실에 대해 우리가 느낄 만한 후회나 슬픔이나 동정이 없으므로, 사건 자체를 기억하는 방식이 우리의 상상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174쪽)

 

사람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잔혹함을, 책이 완성되기까지 수도 없이 상상했을 작가의 머릿 속이 궁금했던 책, <온(On)>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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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웨이 아웃
스티븐 암스테르담 지음, 조경실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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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웨이 아웃>은 가상의 도시에서 '961법'이 합법화된 후 안락사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시스턴트'인 에번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1인칭 소설입니다. 이 책에서 안락사는 인간의 목숨을 약물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끊는 행위를 뜻하는데요, 아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락사는 이 '적극적 안락사'일 듯합니다.

"말씀드렸던 그 약물입니다... 이걸 드시면 몇 분 안에 잠이 들고 의식을 잃습니다. 그리고 3~4분 정도 지나면 심장이 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소생시키기 위한 어떤 응급처치도 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사망하게 됩니다. 그동안 가족들과 저는 이곳에 함께 머물면서 당신이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도울 겁니다. 원하시는 게 이게 맞습니까?"(11쪽)

<이지 웨이 아웃>은 기존 영화에서 봐왔던 안락사와는 조금 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뭐랄까... 건조함? 네, 맞아요, 무척 '건조한' 감성을 느끼게 합니다. 인간의 목숨을 다루면서도 그저 직업적으로 건조한 에번의 태도에 묘한 괴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 듭니다. 주인공이자 어시스턴트인 에반은, 까다로운 선별 과정을 거쳐 안락사 신청이 받아들여진 환자들에게 '잘 죽을' 수 있도록 다독이고, '약물'을 전달하는 일을 하는 간호사입니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친을 잃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파킨스 병에 걸린 어머니 비브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었죠. 그리고 비브는 항상 농담인듯 진담인듯 '그날이 오면 나에게 네가 컵(넴뷰탈이 담긴)을 다오.'라고 말하곤 했었습니다.

고통으로 울부짖던 그녀의 신음 소리에 대한 기억과 평소 불붙은 차 안에서 아버지는 의식이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나를 이 일에 지원하게 했다. 과연 편안한 죽음을 마다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55쪽)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죽음을 권유할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타인의 죽음을 선택해 줄수 없습니다. 죽음과 고통이란 누구에게나 두려운 법이지만 피할수 없는 외통수길입니다. 그 누군들 편안하고 안락한 죽음을 원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내가 유일하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목숨 뿐이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지 웨이 아웃>에서도 안락사를 선택한 환자들은 스스로 약을 마셔야 하며, 만일 어시스턴트가 그 과정에 관여하게 된다면 '살인'이라는 굴레를 벗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도 근육 이상으로 컵을 떨어뜨린다면, '자의'로 약을 마실 수 없다면 그 안락사는 무효가 되어 지리한 신청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환자가 살아 있을지는 미지수지만요.

961법안은 아무나 쉽게 죽음을 맞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당신이 죽는 모습을 상상해보셨나요? 당신이 세상을 떠난 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당연히 '젠장'같은 말이 먼저 튀어나올테지만, 일단 병원에 한 달 정도 입원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이어졌다.(17쪽)

<이지 웨이 아웃>은 에반의 독특한 직업과 너무나도 평범한 생활의 한편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삶속엔 언제나 죽음이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타인의 죽음 앞에 무덤덤한 에덤의 모습이 '나와 다른 게 뭐지?'라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하지만 그것이 '나'의 일로 닥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요? 내 눈 앞에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가족이 있다면? 그럼 과연 저는 넴뷰탈을 건낼 수 있을까요? 내 가족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은 다른 것일까요?

에반의 일상이 너무나도 건조해서 저 조차도 등장하는 안락사 신청자들에게 무덤덤한 시선을 보내게 된 소설, <이지 웨이 아웃>이었습니다.

당신은 어시스턴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날 당신의 기분이 슬프건 혐오감으로 가득하건 그런 건 상관없어요. 환자와 가족들이 준비됐든 안 됐든 상관없긴 마찬가지고요. 감정이입을 줄이고 적당히 연기해야 해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거들기만 하는 거죠. 이 말이 분명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에요. 우리는 컵을 건네주는 일 외에는 거의 필요 없는 존재들이죠.(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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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이민희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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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없는 세상...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어린 시절 수도관이 고장나서 물차에서 물을 받아봤던 기억이 있는데요, 단 하루, 그것도 24시간이 아닌 반나절 정도 였는데도 어지간히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버리고, 어디에서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은, 너무 흔해서 그 중요성을 잊고...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내기도 하죠.

 

<드라이>는 오랜 가뭄으로 애리조나주와 네바다주가 저수지 방류 협정에서 탈퇴하면서, 콜로라도 강의 댐 수문을 닫아버린 후 물이 말라버린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로 인해 약 2,300만 명의 인구가 단수를 겪게 되고, 이 재난은 생존 본능으로 광기에 휩싸인 '워터좀비' 틈새에 빠진 10대 청소년 얼리사와 켈턴, 그리고 얼리사의 동생인 개릿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수 3일 째, 개릿의 실수로 마지막 생수를 마실 수 없게 된 얼리사의 부모는 바닷물을 식수로 치환하는 담수화 설비가 된 남부로 물을 구하러 떠난 후 연락이 끊기고 맙니다. 얼리사는 이웃에 살던, 평소 얼리사를 마음에 두고 있던 '오싹하고 총까지 든 녀석'인 켈턴의 도움으로 개릿을 데리고 부모님을 찾아 바닷가로 향하게 되죠. 하지만 담수화 시설에 도착한 그들 앞에 벌어진 상황은 폭동의 흔적과 떠다니는 시체 뿐이었습니다.

 

<드라이>는 자연 앞에 무기력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면서 세 아이들이 겪어가는 광기 속의 생존기입니다. 작가인 닐 셔스터먼과 재러드 셔스터먼의 '드라이 아포칼립스'는 연료 부족 재난을 다룬 '매드맥스'나 물 부족 재난을 다룬 '워터월드'를 연상하게 하는데요, 앞의 영화들이 '건조함'을 다룬 아포칼립스 였다면, <드라이>는 '약자'로 설정된 아이들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소설이었어요. 거기다 '추가 조치 중, 조금만 참으십시오.'라고 의미 없이 반복하는 정부의 발표는 이런 상황에서 버팀목이 되주지 못하는 국가에 대한 배신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워터좀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죽이려드는 인간들은 언제, 어떠한 매체로 보든지간에 '제일 무서운 건 사람'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세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상황에 대한 표현의 흡입력이 대단하고요, 현재 상황을 알려주는 부분때문인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상황들에 갈증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가뭄과 생존, 워터좀비 앞에 내던져진 이 아이들은 과연 살아 남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전 이런 세상을 견딘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되어갈지 더 궁금했던 소설, <드라이>였습니다.

 

뼛속까지 오싹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눈들이 양의 것인지 늑대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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