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Project LC.RC
이서영 지음 / 알마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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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증이 문제가 된다는 걸 안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는 이슬은 스무 살 무렵부터 악취를 동반한 심한 냉증과 생리통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연인 준규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슬은 하루하루가 짜증나고 무기력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형 백화점의 악취를 처리해 달라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땅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그것'과 마주하게 되는데...

 

 

 

 

경배하라! 경배하라! 송장이 모여서 신이 되었네!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는 불과 144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다. 하지만 그 강렬함이란 어떤 장편소설 못지 않다.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모여 (주)알마의, 크리처 소설의 대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다시 쓰기 프로젝트인 'Project LC.RC(H.P. Lovecreaft Recreat)'의 6번째 작품으로 판타지 소설 작가인 이서영이 참여했다.

 

러브크래프트는 크리처의 조상격인 '크툴루'의 창조자이며, 재창조 된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는 미지의 공포를 다룬 위어드 픽션 장르로, 그 크툴루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다. 또한 그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미지'라는 이름하에 이 책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수많은 해석이 가능해 보인다.

 

내가 본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는 '성차별', 즉 좁게 보자면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슬은 냉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냉증은 자신의 약점이기에 항상 위축되고, 사회생활과 연인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연인의 성폭력적인 발언에도 대꾸 한마디 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기회가 오는데, 바로 대형 백화점의 악취를 처리하라는 업무였다. 자신의 이력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한 슬은,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도무지 악취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백화점 매장 판매원 '다한'과 정체불명의 '김원식'이라는 노인은 각각 여성과 남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보석을 파는 다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자이다. 일제시대부터 존재했던 그 백화점의 지하엔 다한과 같은 다른 여성들의 고통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빈오재牝汚災'로 형상화되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하지만 김원식은 목숨을 걸고 빈오재의 부활을 막으려 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애써 막으려 했던 빈오재는 무엇이었을까?

 

 

그대의 정신은 함께할지니 깜깜한 암흑 속,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늑한 절망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세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고통은 불안하지 않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고통스럽지만 공포스럽진 않다. 겪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 마치 빈오재처럼 스물스물, 물컹물컹 한 것이 몸을 휘어 감는 공포에서 감히 그 누가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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