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론의 모든 것 - 신비평부터 퀴어비평까지
로이스 타이슨 지음, 윤동구 옮김 / 앨피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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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공부하거나 예술이론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만나는 영역이 있다. 바로 미학 또는 비평에 관한 것이다. 작가의 감정을 드러낸 것이든,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대입시킨 것이든, 작가와 사회와 격리하여 작품 그 자체만을 탐구한 것이든 예술작품을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수학문제와 같이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학교 교과과정의 경우 미술, 또는 예술에 한정 짓자면 최근까지도 냉전시대 스푸트니크 쇼크를 계기로 미국의 학자 브루너(Jerome Seymour Bruner)가 제시한 학문중심교육과정 (discipline-centered curriculum)에 의한 비평의 단계론(대표적인 예로 펠드먼)이 매우 빈번하게 쓰였다. 펠드먼이 제시한 비평단계를 간략히 제시해보면 작품을 보고 먼저 제목, 작가, 미술품에 등장하는 소재를 제시하는 "서술(기술)", 각종 소재와 색, 형태들의 관계에서 오는 조형성의 탐구과정인 "분석", 이의 단계를 근거로 작가가 나타내려고 했던 바가 무엇인지 분석해보는 "해석", 최종적으로 단계별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판단" 과정으로 약술할 수 있겠다.


학문중심교육과정을 적극 도입했던 3차 교육과정 (1973-1981) 이후 학교에서는 감상수업에서의 편리함과 명료함으로 펠드먼의 방법을 적용하였으며 교과서에 등장하는 각종 활동지, 워크시트 등이나 학교에서 시행하는 수업에서의 방향은 이와 유사한 방향성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언어를 사용하여 일정한 순서로 이뤄지며 수렴적 형태를 갖춘 펠드먼식의 모델은 작품 감상 수업의 재미를 반감시킬 뿐만 아니라 현대의 다양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현대미술을 수용하는데 큰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사회 전반에 퍼진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이후 많은 학자가 기존의 과정을 보완하기도 하고, 또 비판하면서 새로운 과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대략 공통성을 띠고 있는 것은 수용자에 대한 강조이다. 개인의 경험, 맥락에 따른 작품의 재구성을 할 수 있는 방법론 또는 자칫 대중매체가 전하는 메시지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어 그것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주며 나아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의 목표를 위해서는 도식화되어 있는 단계적인 비평적 방법을 쓸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이 생산해 낸 것들, 이를테면 문학뿐 아니라 영화, 음악, 미술, 학문, 기술, 건축물 등이 인간 경험의 산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 갈등, 잠재력을 반영한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생산물들을 해석함으로써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이 지닌 중요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곧 알게 되겠지만, 비평이론은 그러한 노력에 필요한 탁월한 도구들을 우리 손에 쥐어 준다. 우리는 그 도구들을 사용함으로써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새롭고 가치 있는 렌즈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뛰어난 통찰력과 함께 논리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p.26


책의 앞머리에 저자가 남긴 말을 듣다 잠시 존 듀이 경험주의 철학 이후 브루너의 학문중심교육과정하에서 이뤄진 교육이 성인이 되어서의 나와 내 주위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해 보았다. 또한, 예술적인 것의 감상에서 선형적이고 도식화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작품 판단과정과 질적평가보다는 수와 양적 평가로 치우친 평가방법은 매우 지겨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나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여러 눈보다는 정답을 제시하고 그 핵심 단어들만 외우게 했던 방법. 그 방법은 우리에게 문학, 미술, 음악과 같은 예술품에 오히려 멀어지게 한 건 아니었을까 .... 하는 생각도.



잠시 책의 목차를 보며 책의 인상에 대해 살펴 보면.

 


1장 비평이론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한 것들


2장 정신분석 비평


3장 마르크스주의 비평


4장 여성주의 비평


5장 신비평


6장 독자반응비평


7장 구조주의 비평


8장 해체 비평


9장 신역사주의와 문화비평


10장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


11장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비평


12장 탈식민주의 비평


13장 전체적인 윤곽 그리기



1장에서는 앞서 제시한 저자의 말처럼 "왜 우리가 비평이론을 알아야 하는가?" 에 대한 물음과 앞으로 각 비평방법에 대한 설명과 비평이론의 적용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다양한 방법으로 볼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2장부터 12장까지는 다양한 저자가 제시한 비평론에 대한 설명을, 그리고 13장에서는 각 비평방법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 간략한 정의을 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다양한 관점으로 "묶어 보길” 바라는 저자의 얘기를 담고 있다.

 

한국어판의 제목처럼 이 책이 비평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한정된 지면에 그 모든 것을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책은 문학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방법론적 비평이론의 핵심적인 것을 추려 쉽게 소개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적용해 볼 수 있도록 독려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나의 기준으로는 세 범주. 도구주의적 성격을 가진 비평과 작품 내적인 형식에 주목하는 비평, 그리고 사회적 맥락과 제도의 시선에서 보려는 비평의 다양한 예들을 이렇게 친근하게 설명해주는 예는 흔치 않다. 짧고 간단하며 친근하기까지 한 설명, 다양한 비평의 토대가 되는 철학자의 사유, 그것을 적용해 볼 수 있는 예와 저자의 해석, 더 나아가 우리를 더욱 넓은 세계의 프리즘으로 인도하려는 시도까지.... 두께가 꽤나 나가며 일견 재미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꽤나 풍성하며 지루하지 않은 책임은 분명하다.

 

저자는 13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평이론은 문학작품을 해석한다는 자체의 목적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비단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험 일반을 이해하는 지평까지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커다란 의미가 있다

p.930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설명하는 비평이론의 개념을 잊지 않는 것도 좋은 일이겠으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의 작품을 볼 때 여러 방향에서 탐색하고 "자세히" 보는 것, 그리고 날카로운 기준의 시선으로 전체를 일관되게 분석해 보는 일, 더 나아가 많은 비평이론을 통해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작품을 평가해 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그런 시도야말로 우리의 삶을 지금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가의 말을 따라 책을 넘기면 각각 다른 비평이론으로 분석하고 있는 작품 <위대한 개츠비>를 여러 각도로 다시 보게 된다. 그것의 시선을 따라가며 정말 중요한 것은 개츠비가 위대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가 하는 어떤 이의 도식화된 설명이 아니라 톰과 데이지, 개츠비가 엮어내는 인간 내면에의 장면들. 그것을 바라보며 전달하는 피츠제럴드의 작은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 던져본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피츠제럴드에게 가끔 물어보기도 하고, 또 조용히 듣기도 하다 보면 개츠비가 왜 "위대한” 지 진심으로 알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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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쉽게 따라 하는 인물 스케치 - 인물 드로잉, 이보다 더 쉬울 수 없다 누구나 쉽게 따라 하는 인물 스케치
김용일 지음 / 소울메이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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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나가보면 미술 관련 코너는 주로 서양미술사와 여러 종류의 그림을 그리는 법에 관련된 책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연필소묘에 관련한 책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두 가지의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그림을 전혀 그려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비교적 쉽게 다가가고 있는 책이며, 다른 하나는 미대 입시에 포커스를 맞춘 인체소묘나 정밀소묘에 관련한 책이다.

 

"쉽게 따라 그리기" 류와 요약할 수 있는 책들은 팔을 써서 그리는 그림이 아닌 손목으로 그리는, 작은 그림에 집중하고 있으며 대상의 정확한 관찰보다는 사물이나 동물이 가진형태의 패턴화를 연습함으로써 쉽게 그릴 수 있는 방법에 집중하고 있으며, 많은 시간과 기교를 요구하는 책들은 개인의 자유로운 개성을 드러내는 스케치보다는 미대 입시에서 시험을 보는 과목으로서의 소묘에 대한 요구가 강했기 때문에 어떤 단계나 친절한 설명보다는 완성작이나 디테일에 초점을 맞춰 책을 구성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 외국서적이나 몇몇 국내 서적은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에 집중하는 다채로운 드로잉을 소개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사실적인 표현이 주가 되는 책이 많으며 또한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적인 그림을 좋은 그림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파슨스(M. J. Parsons) 는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조사하여 사람들의 미적인식단계를 조사했는데 그의 연구결과에 바탕을 두어 단계를 나눠보면 다음과 같다.

1단계 - 영유아기 (편애)

2단계 - 초등학교나 중학년 시기 (미와 사실주의)

3단계 - 사춘기 시기 (표현력)

4단계 - 나이보다는 경험이나 환경이 중요 (양식과 형식)

5단계 - 나이보다는 경험이나 환경이 중요 (자율성)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이나 인식에 비추어보면 대부분 미술에 흥미나 소질이 있는 학생들은 중학교시기나 고등학교에 소수만이 미대로 진출하고 나머지는 집안의 반대나 스스로 미술이라는 것에 대해 평가절하를 하여 속칭 인문계로 진학하게 되는데 이런 경향이 사실적인 그림을 우대하는 일반인들의 인식에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고 또 개인에 따라 다양한 방법론이 있다. 파슨스가 얘기한대로 사실주의적 그림을 우대하는 것은 중학년 시기의 학생들의 미적 형태에 가깝고 미술적 표현물에 대해 보다 넓은 시각을 갖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다양한 감수성을 가지고 그림을 표출하는 데에도 기초가 존재한다고 보는데 수많은 정확한 형태나 비례,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명암 대비와 그 미묘한 질감을 파악하는 능력, 사물을 보는 관찰력은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속성이다. 마치 악기를 배울 때 처음에는 한 음 한 음을 정확히 내는 연습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런 기초적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기본기를 익히는 데는 소묘는 매우 좋은 방법이 된다.

 

물론 4B 연필을 쥐고 화지에 흑연을 묻혀 내는 아주 간단한 기초도 부족한 나의 견해로 보자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누구나 쉽게 따라 하는 인물 스케치" 라는 말은 왠지 약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악기를 처음부터 혼자 독학으로 배워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매우 힘든일인 것처럼 그림을 아무 기초도 없이 혼자 연습하여 그린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책에 나온 예시를 따라 그려본 소묘.

 

 

 

 

그럼에도 최근 나온 이 책은 연필소묘에서 "쉽게 따라하는...." 류의 책과 "미대 입시를 위한..." 류의 책의 중간 지점에 있는 책이다. 미술학원에 가면 처음 하게 되는 연필 잡는 법, 선연습, 명도 10단계 내기, 다양한 기본 도형 그리기 등의 초급 단계와 인물소묘를 보통 처음 하게 되면 그리는 얼굴의 부분등을 비교적 처음 소묘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제시하고 있다. 그림을 제시하면서 붙여주는 설명도 부족한 편이 아니며, 다양한 학생 작품을 보여주며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을 나란히 제시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어찌 보면 새로울 것 없고 기초적인 부분을 다룬 책이지만 소묘에서 그 양극단에 속해 있는 책들 가운데 중간 지점에 관한 내용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쉽게 다가가는 책이다. 조금만 기초가 있다면 편한 옷을 입고, 지우개 하나와 잘 깎은 4B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이 책에서 제시한 예를 따라가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직 완성 전의 스케치.

 

따뜻한 오후 편한 옷을 걸치고, 손에는 4B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 하나를 들고

좋아하는 배우의 모습을 화지에 옮겨보는 즐거움 한 장. 

 

 

 

 

괜찮은 책이지만 나는 이 책에 별 셋을 줄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노력과 의지가 없다면 이 책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머지 별 한 개 혹은 두 개는 이 책을 손에 쥐고 수많은 시간을 그리고 또 고민하며 엉덩이를 의자에 붙일 나와 어느 이름모를 누군가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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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4-15 0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버 피닉스인가요??
이제 막 시작한 소심한 마음에 저는 지금도 4B가 아닌 2H 연필로 그리기 시작한답니다.
그려보기 전에는 몰랐어요. 얼마나 많이, 자세히 관찰하고서 소묘 한장이 완성되는지...

Nussbaum 2013-04-15 13:5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아직 완성전이기도 하지만 사진과 꽤 많이 다르게 그려지기도 했는데요.
hnine님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

어느 정도 완성하고 보니코도 약간 길고, 턱이나 눈매, 얼굴 골격등이 동양인처럼 그려져 버렸네요 ^^ 제 얼굴이 약간 갸름한 편인데 얼굴을 그리다보면 은연중에 자신과 닮게 그리게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태가 조금 이상해져버렸지만, 머리가 좀 복잡해질 때 주의 사물이나 사람들을 그리면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빠져들 때 느끼는 즐거움이 있으니 좀 못그려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고요.

음... 말씀 들으니 그리실 때 2H로 형태를 잡으시나 봅니다. 2H로 처음 형태를 잡아본 적은 없는데 생각해보니 뭐 그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ㅎ

일본 톰보 연필을 사용하실지 아니면 스테틀러를 사용하실지... 스테틀러가 그나마 더 부드러워 처음에 형태 잡을 때는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본 어느 책에서는 잠자리 그려져 있는 톰보를 일본 초등학생이 그냥 학교에서 쓰는 연필이라고 좀 꺼려하는 얘기를 했는데 심이 약간 단단한 느낌이었습니다.

..

연필로 뭔가를 많이 그리다보면 사물이 조금 더 자세히 보이는 느낌이 들어요. 빛과 그림자, 그 속에 숨겨진 많은 이야기들도요. 언젠가 올리신 그림에 이은, 연필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이야기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부터 시작한 하루, 즐거이 보내셨음 좋겠습니다 !!
 

 

수입음반(CD)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그렇게 흔하지 않던 시절, 성음에서 나온 온통 노란 딱지가 붙은 테잎을 들으며 머나먼 세계를 동경하곤 했다. 동네마다 레코드 가게가 한둘씩은 꼭 있었으나 다양한 클래식 음반사들의 음반보다는 도이치그라모폰의 아티스트들에 집중했던 그때와 비교하면 매우 다양한 수입레이블이 들어오는 지금은 그야말로 클래식을 즐겨 듣는 이에게는 천국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는 외국에서 발매하는 음반들을 거의 국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요즘, 전세계적인 음반계의 불황으로 몇 년 전부터 국외의 수많은 음반사는 과거 명연들을 묶어 판매하거나 새로 발매하고 있고 신보의 경우에도 시리즈물을 거의 완결하자마자 묶어 판매하는 경우가 매주 잦아졌다. 국내 라이선스 제작사들은 인터네셔널반에는 없는 새로운 기획물을 꾸준히 만들어 판매하기도 하는데 나의 판단으로는 박스물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절판 또는 수입이 거의 되지 않아 구하기 어려운 음반들이 묶여 나오는 예는 매우 많으며 대부분 가격은 낱장 가격을 모은 것보다 저렴해진다. 이런 사정에서 20-30년 혹은 그 이상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분들에게는 낱장으로 어렵게 모으던 음반이나 해외에서 어렵게 구한 음반들이 거의 떨이 가격으로 너무나 "당연히"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팔리는 것을 목격하며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초심자는 매우 싼 가격에 수많은 명반을 구할 수 있다는 각종 음반리뷰나 평가를 보고 구입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CD의 경우 클래식 음반계에서 끊임없이 박스물이 쏟아지고 있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음반을 모으던 사람, 또는 새로 클래식 음악에 입문하는 사람 양쪽 모두 문제가 발생하는데 많은 음반을 갖고 있는 경우 음반사의 도산, 해당 제작사의 폐반등으로 음반 시리즈 구매를 완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중복 음반을 감수하고 이가 빠진 음반 박스를 사야 하는 경우가 생기며, 입문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 많은 음반 때문에 다 듣지 못하고 비싼 장식물이 되어가는 경우가 많다.

 

 

 

        

 

 

2008년, 2009년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정말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었던 카라얀 심포니 에디션과 DG 111주년 기념음반 카라얀 심포니 에디션.

 

왼쪽의 카라얀 심포니 에디션은 브루크너, 베토벤, 브람스 등의 교향곡에서 레퍼런스 급의 수준의 음반들이 들어 있었고 지금 생각해봐도 음반 수 대비 가격으로는 정말 믿기지 않는 수준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DG (Deutsche Grammophon) 의 수많은 명반들이 즐비하게 들어 있는 DG 111 주년 음반이 나왔다. 여기 들어 있는 낱장들은 각종 음반지에서 대부분 명반으로 꼽히는 것들이며, 해당 레파토리를 듣고자 할 때 거의 참조할 만한 음반들이 묶여 있어 이 음반이 나왔을 때 이제 음반시장은 급격히 몰락할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음반 커뮤니티를 다니다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음반에 대해 구입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의견을 을 묻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된다. 오래 들으면서 수집하던 분들은 각종 정보를 얻는 루트가 있겠으나 비교적 처음 접근하는 분들에게는 장수가 많은 박스물들의 정보가 부족하고, 가격도 비싸니 좀 선뜻 구매가 어려울 수 있겠다. 그라모폰지 한국판, 라뮤지카, 안단테 등의 음반잡지가 모두 이제는 더이상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아무래도 음반평을 그럴싸하게 써야 하는 인터넷 상품몰의 음반소개만 보고 구매하는 것도 조금 꺼려진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부족하나마 처음 음반을 구매하거나, 박스반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자 할 때 참조할 만한 여러 국내외 사이트 또는 서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http://www.goclassic.co.kr/

국내 최대의 클래식 음반 커뮤니티로 클래식을 듣는 모든 분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에는 워낙 겉옷을 바꿔 입고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 디스코그라피 메뉴를 보고 음반 녹음연도를 참조하곤 한다.

 

 

 

2. 펭귄가이드, 그라모폰가이드, 러프가이드 등

 

 

                   

 

모두 영미권의 클래식 음반 가이드이다. 셋 모두 해당 중요 작곡가의 중요 작품을 다루고 있는데 그라모폰은 중요 작품을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으며 주관이 강하다. 가운데의 러프가이드는 간단한 작곡가의 소개를 먼저 다루고 해당 중요 작품의 음반을 두 세개정도로 추천한다. 마지막의 펭귄가이드는 방대한 양의 작곡가를 다루고 있으며 추천반도 매우 많다. 두 세줄의 짧은 평과 함께 음반 가격, 추천순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모두 영어로 되어 있으나 어렵지 않은 영어로 되어 있어 클래식에 처음 입문하는 분들에게는 집에 두고 보면 꽤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3. http://www.prestoclassical.co.uk/

영국의 클래식 음반몰로서 국내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음반을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으며, 클래식 음반에 대한 정보를 탐색하기에도 매우 좋은 사이트이다. 위 세 가이드에서 좋은 평을 받은 음반을 따로 섹션을 만들어 구별해 놓고 있으며 해당 음반이 각종 음반 리뷰지나 사이트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도 상품 소개란에 적어 두고 있다. 음원을 조금씩 들어볼 수 있다. 

 

 

 

4. http://www.classicstoday.com/

몇몇의 필진이 Artistic Quality/Sound Quality 를 각각 10점 만점으로 보고 점수를 주고 리뷰한다. 비교적 상세한 리뷰이며 음반 가이드에서 볼 수 없는 상세한 리뷰가 실린다. 단, 필자의 의견이 강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5. http://www.scena.org/columns/lebrecht/070219-NL-Cdsoftheweek.html

우리에게 "왜 말러인가?" 라는 책으로 알려진 노먼 레브레히트의 음반 리뷰를 볼 수 있다. 다른 책에서 전통적인 명반으로 알려진 음반에 대해 거침없는 혹평을 했던 그의 리뷰가 실려 있는데 만족도에 따라 별점을 주고 있다. 

 

 


6. http://www.classicalarchives.com/

작곡가별로 구별이 잘 되어 있으며 역시 음원을 들어볼 수 있는 사이트이다. 프레스토클래시컬과 유사하다. 


 

7. KBS classic fm

하루 방송 가운데 전곡음반 위주로 방송하는 시간에 새로 나온 신보나 박스류의 음반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생생하게 새로운 음반의 정보를 얻을 수는 있겠으나, 진행자의 주관이 매우 강해 자칫 맹목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제 낱장으로 그동안 나오다 박스로 묶여 나온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자비네 마이어의 칼 슈타미츠 클라리넷 협주곡 음반(EMI). 꽤 오래전에 등장하여 당시 많은 찬사를 받았던 음반이다. 약간 빠르다 싶게, 매우 생동감 있게 연주한다. 탑 프라이스였던 것이 그녀의 다른 협주곡 녹음과 묶여 저렴하게 나왔다. 



 


 

    

텔덱의 음반들은 국내에서 매우 보기 드물며 가격도 비싼 편이다. 현재는 베를린 클래식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클라리네티스트 샤론 캄의 음반도 비교적 최근 묶여 나왔다. 크로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담은 음반은 흔하지 않은데 부드러운 음색과 정교한 터치를 동시에 보여주는 그녀의 음반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의 트렘펫터 세르게이 나카리아코프. 한때 모 음반사이트에서 엄청난 열풍의 불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피아노를 공부하다 허리를 다쳐 오래 서 있지 못하게 되자 트럼펫을 연주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주를 실제로 들어본 결과 매우 섬세하며, 쉽게 곡을 연주하는 느낌을 받았다. NO LIMIT, 엘레지 등의 음반에서 정말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기교를 보여주는데 최근에 텔덱에서 그의 음반을 저렴하게 묶어 판매하고 있다. 


 

 


 


     


 

왼쪽은 난곡인,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얘기할 때 거의 빠짐이 없는 음반. (Herbert von Karajan cond. / Berliner Philharmoniker. 1964) 크리스티앙 페라스의 박스반으로서 프랑스에서 제작을 하였다. DG에서 녹음한 전곡을 수록한 박스이며 최초로 음반화 한 경우도 있다. 국내에 매우 적은 양이 들어왔으나 해외에서는 문제 없이 구할 수 있다.

( 프레스토 클래시컬 음반 정보 참조 : Universal Music France pays homage to one of the greatest French violinists of the 20th century with an outstanding 10-CD box set (at budget price). This is, in fact, the first large-scale anthology devoted to the violinist. For the first time, this set takes his complete recordings for Deutsche Grammophon, including the Bach Concertos with Karajan and Serge Nigg’s Concerto, previously unreleased on CD.)


 

 

 

 

    


귀족적이며 영롱한 터치, 깊은 내면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연주자 디누 리파티의 마지막 리사이틀을 포함하고 있는 박스. 이제 과거 명성에서 끝없이 추락해 버린 EMI레이블의 아이콘 (ICON) 시리즈로 그의 과거 연주를 저렴하고 편하게 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생을 살다 간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의 전설적인 브장송 페스티벌에서의 마지막 리사이틀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에릭 르 샤쥬(Eric Le Sage)가  슈만 실내악을 연주한 음반으로서 시리즈물로 나오던 음반이다. 알파레이블의 또렷하게 들리는 음색에 더해진 깊이 있는 연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던 음반인데 가격이 꽤나 비싸 아쉬움을 주던 음반이다. 그런데 신보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간의 시리즈물을 모두 묶어 7장을 3장 가격에 판매하고 있어 한편의 아쉬움(?)을 준 예이다.

 

 

 

그런가 하면 눈에 띄는 국내/국외 기획물들도 있다. 최근의 것들을 몇 개 살펴보자. 

 

 

 

국내 기획으로 만든 첼리스트 엔리코 마이나르디의 박스이다. 몇 년 전스펙트럼에서 복각한 음반으로 매우 높은 인기를 끌었던 연주자의 음반인데 1950년대의 녹음으로서 현대의 연주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준다. 박스안에는 음반화하지 않은 LP 를 복각한 연주를 담고 있기도 하다. 최근 이런류의 음반은 인터네셔널 반이 아닌, 로컬반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클래식 음악의 동호회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Spring)" 을 얘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곤 하는 연주가 있는데 에리가 모리니의 연주가 그것이다. (Erica Morini (Vn.)Rudolf Firkusny (Pf.))

윤기있는 보잉, 우아한 향취가 가득하면서도 자유롭게 어디선가 음이 풀려나오는 듯한 환상. 강렬한 짜릿한 맛은 아닐지라도 독특한 향이 느껴지는 연주를 들려준다. 앞서 소개한 마이나르디, 잉그리트 헤블러, 또는 요한나 마르치 박스반등은 낱장으로 구하려면 전 세계를 떠돌아야 하고, 가격도 다소 비싼 편이므로 여러 모로 매우 의미있고 탁월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음반들이 아닐까 한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맑고 경쾌한 터치, 음악적 완성도를 통해 듣는 즐거움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곡인데 전집반으로는 피레스(DG), 우치다(Philips/DECCA)의 음반을 첫 손에 꼽을만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전의 녹음이 전설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고 있었는데 마로 잉그리트 헤블러(Ingrid Haebler)의 연주였다. 맑고 담백한 터치, 깊고 그윽한 프레이징. 국내제작반이라는 선입견을 벗어던지면 그간 너무나도 애타게 기다렸던 전설적 연주를 만나게 된다.

 

 

 

 

 

 


 

 

 

 

 


 

     

 

      

 

 

 

 

 

 

 

에네스쿠, 자크 띠보, 칼 플레쉬에게 배운 연주자 이블리 기틀리스의 화려한 연주

시원하고 강한 느낌을 풍모를 보여주는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의 타건

듣고있으면 정신의 정점의 혼연일체를 보여주는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

카라얀이 만들어낸 음악적 자취의 집대성

우아함에 탄성이 절로 나오는 연주자 요한나 마르치의 전설적 기록.

 

몇 개만 살펴보아도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음반들이다.

감히 예측컨데 앞으로도 계속 음반계의 불황은 이어질 것이고, 과거 명연주들이 묶여 나올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많은 박스가 등장하니 그 질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로 깊어질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좋은 음반을 구입할 안목이 먼저이지 않을까 싶다. 해외 사이트, 각종 서적등을 참조한다면 음반에 대한 정보도 쉽게 얻게 되고 품절이 되어 다음 수입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가격또한 저렴하게 구할 수 있겠다.

 

너무 빠른 속도로 나오는 음반의 홍수.

그것은 흡사 드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가운데에서 바늘찾기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또는 매우 복잡한 그림 속에 숨겨져 있는 숨은그림찾기 같다.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그림 속에서 마침내 숨은 그림을 다 찾았을때의 희열을 위해 조금은 느린 시간을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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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5-29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블로그에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걸치고 싶어
이것저것 찾아보면
참 좋아하는 노래는
거의 없거나 아예 없기까지 해요.

그래도, 600원 주고 사서
늘 들을 수 있는 노래를 얻는 일이란
무척 고맙구나 싶기도 해요.

저는 제가 잃어버린(도둑맞은)
오래된 노래테이프를 언제쯤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손꼽곤 해요.
그 음반들 다시 나올 낌새가 안 보이거든요.

'한돌' 노래모음,
'김남주 육성 시 낭송' 테이프,
'김민기' 1집 테이프...
더없이 아스라한 음반들입니다.

Nussbaum 2013-05-30 13:26   좋아요 0 | URL

요즘에는 아무래도 음반을 찍어내는 것보다는 음원쪽이 더 관리도 쉽고 재고도 쌓이지 않으니 그 방향으로 많이 흘러 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테잎, CD세대이다 보니 CD과 여러 모로 편리하고 좋아서 음원 다운을 거의 하지 않게 됩니다.

말씀하신대로 싼 가격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음악을 널리 알려줄 수 있으니 음원다운로드는 분명 좋은 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너무 인기곡 위주로만 나오다 보니 또 너무 빨리 잊혀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얘기해주신 테잎은 1분 빼고는 잘 모르는 것들이지만 저도 잠시 오래 전 열심히 듣던 그 시절의 것들을 떠올려 봅니다.
음악과 그리운 시절과 그 시절에 두고 온 무엇들까지도요.
 

 

내 20대 첫머리를 아름답게 장식해준 또 한 사람이 긴 여행길에 올랐다.

 

잘 가요.  

 

로저 에버트 (Roger Joseph Ebert, 1942. 6. 18 - 2013 4. 4.)

 

눈물겹게 아름답고, 한바탕 웃음을 지었던 순간이었기를.

빛과 그림자 속에서, 그 무수한 삶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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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4-05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 속에서 산 일생은 눈물겹게 아름다운 생, 맞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이 곡을 고르신 심중을 헤아려봅니다. 평소에 희,노,애,락이 다 들어있다고 생각하던 곡이랍니다.

Nussbaum 2013-04-06 17:39   좋아요 0 | URL
hnine님 안녕하세요 :)

그의 죽음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스무살에 비디오대여점을 돌며 로저 에버트의 책 "위대한 영화" 를 보며 비디오를 빌려다 보던 기억이 겹쳐졌습니다.

책을 읽으며 카메라의 움직임, 쇼트, 인물의 움직임등에 대한 기술적 설명과 함께 작품의 핵심이나 의도하는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앙드래 바쟁이나 타르코프스키의 책에서는 느끼기 힘든 친근함은 덤이었던 기억도요.

지나간 시절의 내 모습과 함께 이어지는 그의 기록들이 뭔가 가슴 밑부분을 아련하게 만들어 짧지만 투명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곡을 올려보고 싶었습니다. 알라딘 또 어딘가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한 무리의 발자국이 짧은 봄길의 따뜻함을 들어 올린다. 

그 속에서 때로는 앞서거나 뒤를 조용히 따르는 풋풋한 싱그러움. 

그 둘의 발걸음의 거리가 초봄의 한날만큼 작고 조용하다. 


꽃이 피는지도 모르고, 거리가 점점 차오르는지도 모른채

옅은 막으로 둘러싸인 책상에 앉아 답답함을 느낄 때 걷는, 

어느 그림자길 마주친 명도 9의 얼굴들.








그 명도의 극점이 불러오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날카로운 못 하나가 

가슴을 스쳐 지나갈 때, 그 날카로운 날을 세워 손에 들고 있었을지도 모를 때

깊은 검정의 한 숨. 


검정의 한 숨이 지난 깊은 밤의 생각을 떠올리게 하면 

나도 모르게 반걸음을 걸으며 멀어져가는 생각의 손을 잡아본다. 

너무 빠르거나 느려, 지나쳐버린 생각의 얼굴을 떠올리며 앉아 뒤를 돌아본다. 










쌓였던 눈 대신, 밝고 유쾌한 발자국들이 쌓인 길 어딘가.

얇은 기대와 가벼운 물음을 작은 가방 속 어딘가에 넣어둔 채

앞선이의 반걸음을 따르는 명도 7의 얼굴.


때이른 얇은 옷. 

미리 곱게 갈아 놓은 웃음.

주머니 속에 가득찬 기대. 









봄의 한낮이 그렇게 사라지듯, 봄의 발자국이 그렇게 흩어지듯, 

앞서가던 반걸음이 어느새 나란히 걷는 걸음이 되는.

짧은 봄날의 기억.


주머니속 가득찬 부푼 마음과 명도 7의 얼굴이  

짧은 봄날의 따스함을 품는다. 

곧 사그라질지라도, 명도 0의 기억이 될지라도. 


아주 곱게 거리에 내리 앉았던 얇은 봄이 수줍은 발자국과 함께 사라지면

기억에서 반걸음씩 뒷걸음을 걷는다.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게.  





*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마지막 나오던 음악은 <기억의 습작> 보다는 이 곡이었다면 더 좋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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