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어느 퇴근길 - Nussbaum>

 

 

 

빛이 많은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 유월은 늘 낯설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어둠에 살짝 덧붙여져 있는, 마치 막대사탕 겉 부분 얇은 막같은 그 흰색은 자체의 색을 넘어 투명해지기까지 한다.

 

위와 습기를 매우 싫어하는 내게, 언제부터인지 유월은 내게 뭔가를 하나씩 꼭 선물처럼 주고 간다. 한낮의 맹렬함은 칠월과 팔월을 낳지만 아직은 덜 여문 것. 그렇게 빛은 사라져간다. 그런 스침을 전한다.

 

매일 아침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길을 따라 가고 오는 길. 이때만 볼 수 있는 투명함과 낯섬. 팽팽해진 빛과 바람은 또다른 느림을 낳는다.

 

 

 

 

 

 

 

 

 

 

 

 

 

 

이런 느림의 시간에 안자이 미즈마루를 만났다. 작가는 유월의 밝은 투명과 닮았다. 그의 그림을 보니, 이 말은 마음을 다해 본질에 다가간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은 그런 뜻이리라.

 

무엇을 똑같이 그리기는 어렵지만 그것보다 어려운 것은 무엇의 느낌을 잘 보여줄 수 있도록 그리는 것이고, 그것보다 어려운 것은 대충의 선으로 그 무엇의 느낌을 잘 보여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어설픈 그림들. 그러나 거기엔 오랜 관찰과 날카로운 시선이 있다. 유월 한낮에 나뭇잎에 깃드는 쨍한 명암, 빛의 경계가 모호한 저녁의 투명함이 있다.

 

저는 뭔가를 깊이 생각해서 쓰고, 그리고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면 '대충 한다' 고 바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대충 한 게 더 나은 사람도 있답니다. 저는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지 않으려나요. 대충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긴 합니다만.

 

p.121

 

 

 

 

20140802  / 20150614

 

<6월, 1년만에 마음을 더해 대충 그린 그림- Nussbaum>

 

작년 8월 여름이 한참 목소리를 내고 있을 무렵 그렸던 그림 옆에 마음을 "더해" 그린 그림을 나란히 놓았다. 역시 아직 맹렬한 여름이 시작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투명한 유월이어서일까. 색이 엷다. 

 

어쩌면 아직 마음을 다하지는 못하고 더하기만 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

 

 

 

 

 

 

 

 

 

시간은 어디에나 있지만, 시간은 우리를 피해간다.

 

시간은 우리의 우주와 우리 자신과 매우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시간을 따로 떼어내어 규정하려는 우리 노력에 저항한다.

 

시간은 만물의 보이지 않는 영혼,

 

돌이칼 수 없는 어떤 진리처럼 우리 경험에 붙어 다닌다.

 

그리고

 

우리가 시간을 관리하려 노력하고 목표를 세우며

 

우리의 일상이라는 작은 집을 청소하고 정리하려 애쓸 때,

 

시간은 조용히 우리를 비웃는다.

 

p. 9

 

 

유월은 관계를 해체하는 어둠을 가져다준다. 덕분에 씨줄과 날줄이 서로 엮여 틈없이 빽빽하기만 한, 우리의 삶을 느슨하게 해준다. 뭐가 그리 중요했을까? 뭐가 그리 어려웠을까? 뭐가..

 

관계를 해체하는 어둠 속에서 말을 줄이고 있다. 책에 대해서도, 음악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니 사물이 좀 더 잘 들리고, 말을 더듬던 손이 조금 더 유창해졌다. 눈이 조금 커졌다.

 

... 줄간격과 행간격을 더 넓혔다.

... 생각이 들어갈 틈이 생겼다.

 

 

 

 

midori 다이어리

 

 

조용히 우리를 비웃는 시간을 위해, 그에게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마음을 더해 노트를 끼우고 느리게 한 줄 씩.

 

시간은 어디에나 있지만 우리는 시간을 피해간다.

우리의 무의식은 시간을 따로 떼어내 규정하려는 노력에 저항한다.

 

어쩌면 노트를 자꾸 들이는 것은,

시간의 스침을 준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손에 쥐어지는 빛을.

 

 

 

 

 

 

빛이 많은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 유월은 늘 낯설다.

마음에 마음을 더해 시간을 남기지만 때로는 너무 투평한 바탕이 흐릿하다.

 

한낮의 맹렬함은 칠월과 팔월을 낳지만 아직은 덜 여문 것.

그렇게 시간의 스침은 사라져간다. 

 

유월의 투명함과 낯섬.

팽팽해진 느림은 또다른 빛과 바람을 낳는다.

 

 

 

<20150524 바람 - Nussb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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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6-29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사진에 대해 궁금한거 한가지 여쭤볼께요. 사진부터 찍고 제목을 정하셨나요, 아니면 제목을 먼저 생각하고 사진을 찍으셨나요? (별게 다 궁금한 여자 ^^)
복잡하지 않은 직선 구도 속에 생겨나는 공간의 아름다움, 이건 NussBaum님 사진의 느낌이고요,
복잡하지 않은 반복 선율 속에 생겨나는 소리 공간의 아름다움, 이건 Max Richter 피아노곡의 느낌이어요. 닮았네요. 일관성의 발견! ^^

Nussbaum 2015-06-29 22:27   좋아요 0 | URL
hnine님 안녕하세요 ^^
여쭤보신 내용.. 그 사진 아래에 있는 <바람> 을 얘기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처음부터 답하자면 아주 미묘한 차이로 사진부터 찍고 제목을 달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바람을 보여주는 뭔가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조그만 나무에 잎이 바람에 스치는 모습이 눈에 띄어 찍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나무가 눈에 띄었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그것은 바람을 찍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요.

얼마 전 <나는 찍는다 스마트폰으로>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 눈으로 보이는 것,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모습을 담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나 과연 그런 사진을 담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저녁이네요.

그나저나 늘.. 미숙한 페이퍼에서 의미를 찾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5-07-02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채화 그리시군요. 멋집니다.
저도 생에 몇가지 하고픈 것들 중 하나가 수채화 그리기입니다. 종종 볼 수 있는 기회 주세요.

Nussbaum 2015-07-02 22:42   좋아요 0 | URL
네.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님은 아마 2008년도부터 제가 알라딘 서재에서 봐 왔던 분인데, 이렇게 또 뵙게 되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편안한 밤 되셨음 합니다.

보슬비 2015-07-0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는 다재다능하신분들이 참 많으신것 같아요.^^
언제나 저는 그림 잘 그리시는분들을 보면 샘이납니다. ㅎㅎ

Nussbaum 2015-10-05 03:19   좋아요 0 | URL
혹시 지난번 컬러링북 사진 올리지 않으셨었는지요? 그때 하신 거 보고 좋았었는데요. 보슬비님 작품도 종종 올려주세요~

다락방 2015-07-0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도리 다이어리가 궁금하네요. ㅎㅎ

Nussbaum 2015-10-05 03:19   좋아요 0 | URL
댓글을 무려 3개월만에 달고 있습니다. 용서하시기를.. 미도리 다이어리 써보니 나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가죽도 괜찮은 것 같고, 제가 구매한 사이즈는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데 어디 갖고 다니기에도 좋고요. 그런데 꼭 이 가격으로 구매해야할 까닭을 찾으라면.. ㅎ

blanca 2015-08-15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책들, 수채화, 다이어리....다 너무 낯익고 반갑네요.

Nussbaum 2015-10-05 03:20   좋아요 0 | URL
불면의 밤인데, 이름과 이미지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507 어느 중학교 화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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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5-23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정말 그렇게 보이네요.
원래 어떤 식물일까요?

Nussbaum 2015-05-24 10:36   좋아요 0 | URL
hnine님 안녕하세요~ 죄송하게도 어떤 식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학교에 매일 출근하면서 지나다니던 곳인데 오전 쉬는시간에 잠깐 나가보니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지난주에 보니 식물에 잎이 나 조금은 지저분해 보여서 여인의 날렵한 몸매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일상의 사물, 감정, 느낌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을 학생들과 공유해 볼 예정입니다 !!


blanca 2015-05-23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오랜만이에요!

Nussbaum 2015-05-24 10:37   좋아요 0 | URL
blanca님 저도 오랜만입니다 !! 평일에는 북플에서 잠깐잠깐 쓰신 글도 보고 하는데 알라딘 서재에는 좀처럼 들어오기가 어렵더라고요.

수연 2015-05-2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센스쟁이 누스바움님~

Nussbaum 2015-05-24 11:29   좋아요 0 | URL
:D 연휴네요. 여유가득 !!

oren 2015-06-13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몸의 발레리나가 `깃발을 높이 치켜든 발레리나` 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을 듯싶네요.. 하하

Nussbaum 2015-06-15 13:58   좋아요 1 | URL
ㅎ 네 oren님. 관리하시는 분이 가지치기를 해 놓으신 모양인데 저도 저 깃발부분의 큰 팔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덧하자면 요즘은 책에서 문자로 배워 익히는 것보다 우리 삶의 주위에서 깨달아 느낄 수 있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아졌네요. 그래서인지 작은 것부터 다시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 늘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5-07-02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Nussbaum 2015-07-02 22:46   좋아요 0 | URL
네 말씀하신대로 무심한 저만의 시선으로 보는 프레임이라는 생각입니다. 요즘 너무 피곤한 일상에 시간이 지쳐 가는데, 남겨주신 댓글 덕분에 잠시 멈춤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느닷없이 던져진 빗방울.

 

 

 

 

 

 

 

 

 

처럼, 맺힘은 말없는 외침을 낳는다.

 

 

 

 

 

 

 

WINSOR & NEWTON. 고체 수채화 물감.

 

 

 

 

 

 언제나 넘치는 말, 그러나 언제나 부족한 단어들.

 

 

 

 

 

루체플란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지 스탠드.

 

음악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지 디퓨저.

 

 

 

 

 

음악 없는 고요. 빛만이, 음많이.

 

 

 

 

 


Windfall Light. Visual Language of ECM - Visual Language !

 

Welcome Fricsay.

 

 

 


 

 

없음말은 상단 표기일까지.

 

 

 

 

 

 

Moma Perpetual Calender.

 

Moma Calender With Johanna Martzy.

 

 

 

 

 

 

단어들의 긴밤, 익숙하고도 낯선 밤의 대화는.

 

 

 

 

 

10년 이론 입문. - Victorinox (오른쪽)

 

삼일의 문화사 . - Greyhours (왼쪽)

 

 

 

 

 

 

맺히고 매쳐져, 다시 빛방울로.

 

 

 

 

 

Muji 문구들.

 

 

 

 

 

 

... 머금은 빗방울로.

 

 

 

 

 

 

덧)

오늘 사물을 담아준 올림푸스 Air01 - 소니 DSC-QX100 과 같은 원리로 움직이는 카메라.

일본내에서만 판매, 앱도 일본 앱스토어에서만 받을 수 있음.

화이트 아이폰과 매우 잘 어울리는 외형.

팬케잌 렌즈와 매우 잘 어울림.

국내 사용자가 있을까?

반응속도 괜찮음.

약간 불편함도.

어렵게 구함.

비싼편임.

예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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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4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4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5-06-0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뒤늦게 봤는데 하나 하나 다 눈에 쏘옥 들어오네요. 무지 문구들도 참 심플하니 예쁘고요.
문구, 주변을 둘러 싼 물건 하나 하나 그냥 허투루 막 손에 잡히는 대로 살고 싶지 않은 마음, 이 느껴집니다.

Nussbaum 2015-06-02 21:38   좋아요 0 | URL
blanca님 안녕하세요. 요새 메르스때문에 온나라가 시끄러운데 괜찮으실지요.. 꼭 내가 아프지 않아도 이게 언제 어떻게 퍼질지 모르니 더 애매한 걱정이 드는 것 같습니다. 부디 이 사태가 지나갈 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셨음 합니다.

최근에 렌즈형 디카를 하나 구매했는데 그냥 생각나는대로 좀 담아봤습니다. 책상 옆에 그간 눈에만 두었던 사물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연중에 말씀하신대로 이왕 쓸 것 맘에 드는 것 써보자 하는 바람도 담겨있습니다.
 

 

 

 

일월과 이월 내가 내린 뿌리는 몇 가닥이었을까?

언제나 그 땅을 밟고 지나가는 시간에는 알지 못하는 것. 땅을 들어 지나간 시간을 헤아린다.

사이를 걷는다. 

때로는 얇았을, 때로는 그보다는 조금 굵었을.

 

 

 

 

 

 

 

 

 

 

   시큼한 냄새가 옅어지면서 배후 세력처럼 떠오르는, 지린 듯 달고 쌉싸래한 냄새.... 마비의 기운을 풍기는 그 어떤 수상스러운...... 아무리 못해도 내 육체보다는 거대하리라, 짐작한다. 내 둔감한 후각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어떤 냄새만으로.

 

  그러나 뿌리가 얼마나 거대한지, 어떠한 형상을 그리고 있는지, 어떤 빛깔인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나는 모른다. 원뿌리에서 지파처럼 갈라져 나온 곁뿌리가 몇 가닥이나 되는지, 곁뿌리들이 저마다 어떤 방향을 향해 흘러갔는지.

 

  나는 뿌리를 보지 못했다.    

 

김숨 <뿌리 이야기> p.17-18

 

 

 

 

때로는 시대를 건너는 눈길이, 때로는 불편을 감수하는 손길이 그늘진 응달을 따뜻하게 데워줄 때가 있다. 시대를 거스르는 소설가, 불편을 기꺼이 즐기는 예술가. 이들은 그들의 시간을 직조(織造)한다. 그들의 상념과 그들의 낯섬 사이에 잠시 머물어 눈을 감아본다. 일월과 이월 사이 시간을 헤아린다.

 

 

글자와 글자 사이를 눈이 좇듯, 그림과 종이 사이를 붓이 잠시 머문다.

종이 위에 시간을 스친다.

 

 

 

 

 

 

 

 

 

 

 

 

 

 

 

 

 

 

 

 

 

 

 

 

 

 

  그가 포도나무 뿌리 앞에 바투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산양의 발목처럼 길고 흰 초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심지에서 바닥만 한 촛불이 일고, 작업실 벽과 천장으로 포도나무 뿌리의 그림자와 그의 그림자가 일렁일렁 번졌을 것이다. 검게 타드는 심지를 중심으로 웅덩이를 만들면서 고이는 촛농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는 초를 기울였을 것이다. 심지에 매달린 촛불이 길게 늘어나면서, 포도나무 그림자와 그의 그림자도 덩달아 길어졌을 것이다.

 

  불안정한 뿌리를 안정적으로 고정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그가 찾은 것은 촛농이었다. 촛농을 떨어뜨려 뿌리를 덮는 것이었다. 좀묘화를 그리듯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려 촛농 막을 뿌리 전체에 입히는 것이었다.

 

  원뿌리와 곁뿌리, 실뿌리가 어지럽게 얽히고 뻗은 뿌리는 결코 다루기 쉬운 오브제가 아니었다. 뿌리는 요동치는 오브제였다. 수분을 흠씬 머금은 뿌리도, 메말라 철사처럼 억세진 뿌리도, 각질이 일듯 외피가 너저분하게 벗겨진 뿌리도 요동쳤다. 죽은 뿌리도 요동쳤다.

 

* 김숨, <뿌리 이야기>   p.28-29

 

 

 

 

 

짧게 스치는 시간 속에 곁드는 짧은 무엇.

무엇은 무엇을 남긴다.

무엇은 무엇이 된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각자의 심연은.

저마다의 얇은 뿌리는.

 

 

 

모란디의 정물에는 병의 라벨이나 책의 표지와 같은 표식이 없다. (-위대한 예술가 501, 마로니에 북스, 363p.) 그것을 나타내는 사물의 형태,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형태, 색에 집중하며 그 사물들이 갖고 있는 고요한 물질성을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샤르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 화가의 그림은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사물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며, 그러기에 보는 이에게 새로운 의미를 환기시켜 준다. 사물은 상징을 드러내지 않으며 그 스스로 어떤 알레고리나 교훈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관심성과 몰개성성의 속성이 말을 하고, 생각을 투영한 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준다.

 

 

http://blog.aladin.co.kr/728246198/6369446

 

 

 

 

 

 

morandi < courtyard in via fondazza > 1958 / oil on canvas

 

 

 

 

 

 

 

 

 

 

 

 

 

얇은 뿌리 하나는 물을 머금는다. 그 물은 얇게 떨며 떨어지고, 저마다의 소리를 지닌다.

때로는 빛과 어둠의 소리를, 때로는 떨림과 단호함의 소리를.

때로는 약함과 강함의 소리를, 때로는 고음과 저음의 소리를.

 

 

 

 

 

        

 

 

 

  직업마다 자기 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의 왼쪽 손가락에는 티눈이 박히고, 구두 수선공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에는 못이 박힌다. 그들이 생트 콜롱브 씨네 집을 나왔을 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생트 콜롱브 씨는 갈색의 커다란 게이프로 몸을 휘감았고, 사긱 모직 천 밑으로는 눈만 보였다. 마레가 스승을

정원이나 집 밖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집 밖에는 절대 나가지 않을 사람인 줄 알았다. 그들은 비에브르 강 하류에 이르렀다. 바람이 휙휙 소리를 냈다. 그들 발바닥 밑에서 얼어붙은 땅이 빠지직 소리를 냈다. 생트 콜롱브는 제자의 팔을 잡고는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들은 두 눈을 강타하는 바람을 헤치며 앞으로 난 길을 향해 상체를 구부리고 시끄럽게 걸어갔다.

 

  "들리나!" 스승이 외쳤다. "아리아가 저음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p.56-57 

 

 

 

 

 

때로 말을 멈추면 생각이 걷는다.

때로 말을 멈추면 귀가 듣는다.

때로 말을 멈추면 손이 노래한다.

때로 말을 멈추면 내가 들린다.

 

 

때로 말을 멈추면 머리가 텅빈다. 하얗고 시원하게.

 

 

 

 

 

 

 

 

 

 

 

 

 

 

 

 

 

마분지 같은 커튼으로 새벽빛이 스며든다. 빛 한 점 떠돌지 않던 작업실에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번지면서 뿌리의 전체적인 윤곽이 서서히 드러난다. 뿌리가 한 가닥 지평선처럼 떠오른다. 팔 굵기의 , 원뿌리는 아니고 곁뿌리다. 취광이 감도는 그 뿌리 너머로 또 다른 뿌리가 떠오른다. 그 너머로 또 다른 뿌리가...

 

* 김숨, <뿌리 이야기>   p.60

 

 

 

 

감춰져 있는 발길.

늘 어두움으로 향하는 각자의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

감춤을 드러냄이 작은 의미이다.

 

많아야 세 가닥. 일인칭 시점으로만 보는 일월과 이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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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2-23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제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나오네요!!! 더구나 파스칼 키냐르와 모란디까지!!!!^^

Nussbaum 2015-02-23 23:16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페이퍼에 제가 파스칼 키냐르에 대해 올린 적이 있었지요. 그때도 비비아롬나비모리님 댓글을 볼 수 있었죠~ 파스칼 키냐르. 가끔, 아주 가끔 다시 만날 때면 참 독특하면서도 깊이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좋습니다.

음. 예전에 페이퍼에 모란디에 대해 남긴적이 있었는데 마침 모란디전을 덕수궁미술관에서 하길래 다녀왔는데, 그림을 실물로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꽃과 풍경도 신선했고요.

그나저나 해든이는 혼났지만 코~ 잘 자고 있겠죠~

라로 2015-02-24 03:52   좋아요 0 | URL
우왕~~~~ 역시 옛 친구는 좋아요!!! 그런 것도 다 기억하시고!!!!♥^^

Nussbaum 2015-02-25 01:34   좋아요 0 | URL
네.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밤 늦게 갈 곳 없으면 들르게 되네요. 알라딘 서재에.. 오래 전부터 들르던 서재에도 다녀오고요~

라로 2015-02-25 02:04   좋아요 0 | URL
사실,,,,알라딘 서재에서 파스칼 키냐르를 자주(?) 언급하신 분은 님이세요,,,그래서 처음에 찾아가고 좋아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 그걸 기억하시니~~~~.^^
예전 닉네임처럼 참 섬세한 분이세요!!^^

blanca 2015-02-2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수채화가 너무 좋아요. 눈이 시원해지는 느낌.

Nussbaum 2015-02-23 23:11   좋아요 0 | URL
눈이 조금이라도 시원해지셨다니 다행입니다~ blanca 님 댓글을 보니 문득 분홍공주님 생각이 나네요.
얼마쯤 자랐을까.. 그림도 많이 그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인터넷에 떠도는 20세기 위대한 10인의 피아니스트 순위(혹은 무순일 수도 있겠다.)를 보자. 아티스트의 순위를 매기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꼽아놓은 이름을 보면, 인기도에 따른 순위라면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서양 고전음악(이하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음의 피아노 연주자들을 접했을 것이며, 그들이 연주하는 스타일과 레파토리에 따라 선호하는 연주자가 생길 것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그 극도의 다이나믹속에서도 아주 고르게 펼쳐지는 음의 세계를,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의 맑고 영롱한 터치와 환상성을, 빌헬름 박하우스의 남성적인 힘과 여유를, 에밀 길렐스의 단단하며 강렬한 터치를, 알프레드 브렌델의 중립적이나 모범적인 연주를, 아르투르 베네디티 미켈란젤리의 그 강박과도 같은 피아니즘을,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교과서적인 연주를,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야생성을, 글렌굴드의 그 자유로움을..  등등 누구나 각자의 까닭으로 존경하거나 선호하는 피아니스트는 생기게 마련이다.

 

  무릇 서양 클래식 음반을 듣는 즐거움에서, 같은 곡이되 다른 개성을 첨가해 우리에게 펼쳐 놓는 그 무궁무진한 세계를 경험하는 즐거움은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닌 연주자들이 이 세상을 살고 있고, 또 살다 간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각자의 개성을 지닌, 우리가 각자 선호하는 연주자와 작품 또한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자 그러면 이쯤에서 위에서 말한 10인의 피아니스트에서 내가 일부러 빠뜨린 연주자(그 인터넷 자료 순위에는 2위에 해당하는)에 대해 얘기해보자. 아마 조금이라도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를 떠올릴 것이다. 비록 리히터의 피아니즘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를 비판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며 무수한 피아니스트에게 영감을 주었고, 또 엄청난 레파토리로 뛰어난 족적을 남긴 사람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리히터는 냉전시대 소련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며 바흐부터 현대음악에 이르는 엄청나게 광범위한 레파토리를 지닌 연주자였고, 서방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든 사람을 충격에 빠뜨린 연주자였다. 그렇다면 그의 연주 스타일은 어떠했을까? 왜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을까?

 

 

해롤드 숀버그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리고 아쉬케나지는 리히터의 연주특성에 대하여 정확히 지적해 주었다. "연주가 다 끝나고 나면 나는 비로소 내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러나 연주 도중에는 모든 것이 아주 잘 어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몰입되어 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압도당하고 만다. " 핵심은 리히터가 무대에서 그러한 마력과 강렬한 집중력을 발산함으로써 모든 사람들, 의심하는 자까지도 그를 따라오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청취자들은 다시 의혹과 의문으로 불평을 늘어놓는다. 말이 난 김에 아쉬케나지는 리히터가 생존하는 가장 뛰어난 드뷔시 연주자라고 강조했다. 리히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상력이 아름다운 소리 이면에서 신비스럽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p.625

 

  아쉬케나지의 평은 매우 적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은 마치 피아노를 두들기는 듯하여 음색이 거칠게 느껴진다. 프로코피에프, 슈만의 곡에서는 피아노를 내려 치는 듯한 모습도 보이고 여러 곡에서 음색이 어두우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텁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템포가 조금 들쑥날쑥하다는 인상도 받는다. 그러나 그 느낌은 역시 연주가 끝나고 난 다음에 드는 약간의 애매모호함이다. 그가 연주하는 영상이나 음반을 보고 듣다보면 그는 작곡가의 의도를 자신의 개성에 덧하여 매우 강렬하면서도 호소력 있게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쉬케나지가 지적하듯 연주하는 중간에는 리히터가 전하는 작곡가의 메세지를 귀기울려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저 멀리서 들려오는 황홀한 노랫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귀 기울이는 것처럼.

 

 

 

* 크고 두꺼운 손가락과 꽉 다문 입은 강렬하면서도 직선적인 스타일의 연주를 기대하게 만든다.

 

 

 

 

 

 

*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을 담은 음반으로 그의 음반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할 것인데

거침없는 질주와 박력, 오케스트라와 주고 받는 대화에서 아찔하리만큼 강한 긴장감을 들려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네이가우스에게 사사받기 전에는 거의 혼자 피아노를 익힌 것으로 되어 있다. 어릴 때는 오페라에 심취했었고, 다양한 곳에서 반주를 했으며 조금은 고집스럽게 연습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네이가우스를 찾아가 지도를 받게 되었을 때, 네이가우스는 그를 천재라 여겨 음악원 내에서도 특별한 존재로 여겼다. 네이가우스 하에서 그는 음색에 대한 고민과 음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그러나 학교의 틀에 박힌 학습에 실증을 낸 그는 때로는 고집을 피웠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가족사는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는데 독일인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와 러시아 지주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독일로 이주했던 사실은 그에게 평생에 남은 아픔이었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모르지만 그의 연주에는 강한 개성이 드러나며 격렬함과 서정이 동시에 빛과 어둠처럼 존재한다. 그는 정치를 매우 혐오했으며 뭔가 꽉 불편한 자리를 싫어했다. 음악에 대해서도 비슷한 자세를 견지했는데 일례로 카라얀, 로스트로포비치,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한 베토벤의 삼중협주곡 녹음에 대해 혹평을 가했던 사실이 그의 음악적 지향점에 대해 단적인 예를 제시하고 있다. 익히 알고 있듯, 리히터는 베토벤의 삼중협주곡(Triple Concerto)에서 자신은 더 많은 연주를 하고 녹음하기를 원했으나 카라얀의 지시에 따라 연출하듯 사진을 찍은 것에서 분노하였다. 그는 자신이 기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본질을 끝까지 추구한 연주자였던 것이다. 악보 한 페이지를 익히기 전까지는 절대로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으며 어느 누가 자신의 연주를 극찬하더라도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실패라고 규정하였다.  

 

 

 

* 그는 작은 등을 켜고 악보를 펴놓고 연주하곤 했다.

 

 

 

* 리히터에 따르면 카라얀은 뭔가 진지해 보이고 나머지는 바보같이 웃고 있는, 문제의 음반이지만

이 음반은 많은 이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글렌 굴드와 마찬가지로 매우 강렬한 인상의 연주자이며 때로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를, 브루노 몽생종은 인터뷰하여 그 기록을 책과 동영상으로 남겼다. 회고담은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동영상은 <리흐테르 - 이니그마> 의 DVD로 만날 수 있다. 이번에 아울로스에서 제작한 DVD는 이전에 워너레이블에서 나온 바 있는 영상물이다. 그간 워너의 DVD는 절판이었는데 최근에 아울로스에서 라이선스 받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피아니스트 리히터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위의 책과 영상물을 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카라얀이나 푸르트뱅글러와 같은 지휘자에 대해 자세히 다룬 책과 영상은 많지만 그 외의 연주자들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데, 이렇게 다양한 자료로 그의 삶과 피아니즘을 간접적으로나마 되짚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리히터의 레파토리는 이미 나온 음반에 실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지만 아직도 계속 나오고 있는 중이기에 그야말로 엄청난 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피아노를 선택하기보다는 자신이 피아노에 맞추어 운명에 맡기고, 큰 연주회이건 아주 작은 연주회이건 성심껏 연주하기를 좋아했던 그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음원은 매우 방대하게 펼쳐져 있어 다양한 레이블에서 나오고 있는데 DG, DECCA, Sony, EMI, Philips 등의 메이저 레이블에서 대규모로 나오고 있는 편이며 Praga, Melodiya, regis, Hanssler 과 같은 레이블에서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 몇가지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리히터가 DG에서 남긴 음반을 모은 박스, 최근 소니에서 오리지널 자켓으로 제작한 박스, 그리고 러시아 자국에서 보관하고 있는 음원을 발해하고 있는 멜로디야 레이블, 그리고 EMI 레이블의 박스이다. DG 레이블의 음반에는 저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콥스키, 그리고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이 들어있고 쇼팽, 하이든, 프로코피에프, 드뷔시의 곡들을 담은 음반이 있는데 모두 어느 면에서나 최상급이다. 두번째 소니음반( RCA + COLUMBIA )에는 리히터의 미국방문시에 이뤄진 유명한 "카네기 홀 연주" 가 들어 있으며 비록 그가 그리 성공적이라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대중들의 찬사를 받은 연주들을 만날 수 있다. 한편 멜로디야(멜로지야)에서 나오는 음원은 그가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내용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리고 Icon 시리즈로 나온 EMI 음반은 DG 음반에 비해 조금은 그 중요도가 떨어지는 평가를 받지만 올레그 카간, 로스트로포비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한 실내악이나 드보르작의 협주곡과 같은 곡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언급할 가치가 있다.

 

 

 

 

  

 

* 만일 녹음정보가 정확히 일치한다면 우리는 그 구하기 어려웠던 리히터의 프라하 박스를 더 좋은 음질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전에 다른 페이퍼에서도 말한 바 있다.)

 

 

 

 

 * 요즘이야 정말 입이 딱 벌어지는 박스들이 많이 등장하기에 별 놀랄일도 없지만 이 박스는 입이 벌어지게 만든다. DG, DECCA, Philips 레이블이 유니버설 뮤직 그룹으로 묶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박스인데 위에서 말한 DG의 박스, 낱장으로 어렵게 구해야 하는 DECCA의 2CD 시리즈(Richter - THE MASTER)의 음반, Philips의 명음반(소피아 리사이틀,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까지 모두 수록하고 있다.

 

 

    

 

 

 

 

 

  맨 첫머리에 제시한 리히터의 영상물을 보면 글렌굴드가 리히터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글렌 굴드는 리히터는 자신의 강한 개성을 바탕으로 작곡가와 청중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한편 그는 슈베르트의 곡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리히터의 연주를 듣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하겠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리히터가 레코딩 기술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으면 좋겠다는 말도 함께. 개인적으로 굴드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그의 강한 개성을 풍기는 음악에 때로는 반신반의하는 나로서는 그가 생각을 수정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리고 한편 굴드의 말을 들으면서 드는 생각은 리히터가 레코딩 기술에는 관심이 없어 무척 다행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가 내게 예술가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 음과 음 사이에 존재하는 몽롱하고 모호한 지점의 정지한 시간 때문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제일 잘 했던 것을 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그런 까닭에 리히터는 내게 매우 특별한 존재의 피아니스트로 마음에 남는다.

 

 

 

 

 

 

 

 

 

 

 

* 말년의 리히터. 그는 청각이상으로 은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젊을 때의 당당한 체구는 몰라보게 살이 빠져 있으며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인터뷰를 한 시기의 그의 나이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장수(1915-1997)했기에 노년의 모습이 나이에 따라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때 구하기 어려웠던 리히터의 인터뷰를 담은 DVD를 한글 자막으로 다시 보면서 지난 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최근에 발매한 DG+DECCA+Philips 박스를 보며 낱장으로 열심히 그의 음반을 찾아다니던 나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둘 다 조금은 서글프고 아쉬움이 남는 찰나이지만 그의 음악을 다시 들으면서 그의 삶이 녹아든 예술의 기록을 짚어보는 시간은 지금을 살아가는 삶 속의 작은 의미를 전달하는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언젠가 살면서 다시 그 장면을 마주칠 때는 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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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2-0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굴랜굴드처럼 리흐테르라고 전 발음하길 좋아하는데요, ㅋ~.
저 자켓노트가 갖고싶어서 책을 충동구매했습죠~^^
낯익은 문체인데 낯선 닉이네요.
뭐 아무렴 어떤가요, 오래 머물다 갑니다~^^

Nussbaum 2015-02-09 12:03   좋아요 0 | URL
리흐테르.. 아마 양철나무꾼님이 말씀하신대로 가장 근접한 발음이 리흐테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일정하게 리히터로 적은 것은 아마도 오랜만에 숀버그의 책을 보아서일 수도 있고 처음 그 피아니스트를 만났을 때 리히터로 발음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이 페이퍼에 뭔가 남기기 위해 DVD를 보면서 처음 워너에서 나온 이 영상을 봤을때보다 더 쓸쓸한 느낌이 들었는데 새로 나온 DVD의 표지는 그 모습을 더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늘 뭔가 가슴에 그늘 한 점을 지니고 사는 듯한 모습. 그것이 느껴지는 표지인 것 같아 좋습니다.. 왠지 양철나무꾼님도 그 모습을 파악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다른 부분을 감지하셨을지도 모르겠고요.

남겨주신 댓글을 보니, 이미 제가 예전에 다른 닉네임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다시 찾아와 주신 것이 감사하고 또 많은 죄송함이 몰려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뚜렷했지만 다른 사람에겐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까닭이었기에 조용히, 더 자유롭게 이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몰래 다른 님들 서재에 발길만 하고 거의 흔적도 남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쓰다보니 익숙한 댓글이네요. 얼마전 양철님의 페이퍼를 보면서 제가 지닌 목도리 하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라로 2015-02-09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바람결님이라는 분이 생각났어요. 원래 알라딘에서 긴 글을 안 읽지만 제가 읽는 몇 분이 계시죠~~~. 낯선 닉네임이었지만 리히터에 대해서 쓴 글이라 들어와 봤는데 참 운이 좋았네요, 제가. ^^ 리히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에요~~~^^ 언젠가 바람결님이라는 분께도 말 한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제 기억력이;;;;참 좋았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Nussbaum 2015-02-10 01: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아롬님. 음.. 아니 잠시 나비님이라고 줄여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국에서 나름 잘 정착하셔서 지내고 계시는 것 같아 늘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참 소식이 없다 최근에는 다시 왕성하게 소식과 글을 남겨주셔서 열심히 보고 있지요.

위에 양철나무꾼님이 말씀하셨듯, 사람이 쓰는 말이나 문장에도 지문이 있나봅니다. 아마도 예전의 그 누군가와 비슷하다는 것을 아시는 분들이 가끔은 이곳에 발걸음하시는 것 같아요. 그럴때마다 여러 감정이 밀려오는데, 그 가운데는 꼭 그래야만 했나 하는 생각도 들어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제가 하고 사는 일도 바뀌었기에 알라딘 서재라는 곳이 좀 더 편해졌습니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제 마음에 닿는대로 뭔가 남길 예정입니다. 아직은 선뜻 안부를 남기지 못하겠기에 그저 예전의 이웃님들의 글만 몰래 보고 있네요. 비비아롬나비모리님 서재를 보면서 무엇보다 즐거이 사시는 것 같아 좋아보였습니다.

미국은 이제 낮이겠지요. 여유있는 오후 되셨음 좋겠습니다.

들려, 흔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로 2015-02-10 12:16   좋아요 0 | URL
뭐에요!!!!! 저 누군지 아셨어요??? 저도 한동안 알라딘 못 들어왔었어요!!!! 사정은 서재에 올리긴 했는데,,, 더 자세한 소식은 차마~~~^^;;
저는 님이 주신 노트북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고이. 못 사용하겠더군요~~~ 북마크도~~~~^^
사라지지 않으셔서 좋아요!!! 막, 무지 서운했었거든요~~~^^
진짜 좋으네요~~~^^*

Nussbaum 2015-02-10 23:01   좋아요 0 | URL
당연 알죠~ 중간에 닉네임도 좀 바뀌셨던 것 같은데.. 서재가 휑해졌지만 그래도 가끔 들려 어떻게 지내시나 보긴 했습니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저를 격하게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재에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가끔 살다가 읽는 책 얘기라도 올리겠습니다. 그나저나 노트를 아직도 갖고 계시다니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말씀 들으니, 한 10년쯤 알라딘 서재를 하고 있다면 그때는 특별판으로 2탄을 만들어볼까 싶기도 하네요~ 음.. 그땐 몰스킨 수채화 용지에다 그리면 좋을 것 같아요!!

수연 2015-02-13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Nussbaum님 덕분에 친숙한 이름이 될 거 같아요. 리흐테르.

Nussbaum 2015-02-13 21:00   좋아요 0 | URL
네. 야나님~ 꼭은 아니지만 언젠가 그냥 얕은 미풍처럼이라도 한 번 스쳐가는 이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15-12-10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