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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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열정, 동기, 핍진성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 프랑스 시인 제라르 드 네르발이 말한 꿈처럼, 소설도 우리네 삶의 다채로움과 복잡함을 보여 주고, 우리가 아는 것 같은 사람, 얼굴, 물건 들로 가즉 차 있으니까요. 마치 꿈에서 그러하듯이, 우리는 때로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접한 것들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우리가 어디 있는지도 잊고, 우리가 보고 있는 상상의 사건이나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소설에서 보고 희열을 느꼈던 허구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느낍니다.

_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소설을 대할 때면 언제나 미안함이 든다. 다른 종류의 책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어서일까? 언제부터인지 소설에는 도통 손이 가질 않는다. 이러저러한 까닭으로, 지금 내 작은 책장에는 소설책이 거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소설을 멀리하게 된 것은.. 책장 뒤의 초라한 구색을 하고 있는 소설을 보면서 다시 소설에 대한 애정의 눈길이 생겼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스무살이 되던 해, 지극히 정신없으면서도 무료하기 짝이 없던 나는 나만의 재미있는 놀이를 하며 지냈다. 보통 책을 대출하면 나오는 대출증을, 책 맨 뒤페이지에 살짝 붙여 놓고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가끔 책을 반납 한 후 다시 그 책을 찾아보면 누군가가 거기에 낙서를 해 놓은 경우도 있었다. 그땐 그 놀이가 꽤 재미있었기 때문에 공강시간이면 총류 000부터 끝까지 훑어보고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책을 대출하고 내가 읽었다는 표시를 은밀히 하곤 했다.

 

  대출증을 붙여 놓는 놀이의 대상은 주로 아무도 안볼 것 같은 책이었는데, 이를테면 모기의 습성에 관한 책이나 좋은 이름 짓는 법 혹은 유전자의 역할, 종교전쟁을 다룬 것들이었다. 물론 소설도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소설은 많은 사람들이 책을 대여해 봤기 때문에 새책을 처음 펴는 희열을 느끼는 일이 적었다. 하지만 소설가의 삶의 때가 묻은 문장들을 몸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 때가 아니었으면 나는 마르셀 프루스트, 살만 루시디, 오르한 파묵, 움베르트 에코, 미셀 우엘벡, 폴 오스터와 같은 작가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과 만나 20대를 거쳐 30대를 때론 진지하게, 때론 헛웃음도 짓고, 때론 가벼이 털어버리고, 때론 상상 너머의 세계를 살고 시간을 지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여전히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책 가운데 가장 아끼는 책을 최명희의 <혼불> 로 여기면서 왜였을까? 도스토옙스키의 그 인간의 내면을 날카롭게 도려내는 모습에 진이 빠지고, 레이먼드 카버의 작은 일상을 사랑하며, 김소진의 안경알 사이의 거리에서 멈칫하기를 좋아하는데. 돌이켜보건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어느 추운 날, 술을 마시다 문득 든 생각이 그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어쩔 수 없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

 

 김연수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므로 지금 초고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말은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자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내가 왜 소설에 편견을 갖게 되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소설에 흥미를 잃게 된 시점은 언젠가부터 등장한 바람 불면 날아갈것 같은 텍스트의 나열 뿐인 소설을 읽고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거기엔 아무 의미도, 시사하는 바도, 고민도 없었다. 그런 경험이 되풀이되자 소설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훌륭한 소설가들이 경험한 것들, 내적인 것에서 끓어오르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며 표면화된 결과물, 고민하는 텍스트들이 포함하는 여러 함의에 대한 의미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된 것이다. 소설가와 소설이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의 시선, 나는 그것을 잃고 있었다.

 

 

 

 

 

 

 

 

 

 

2부. 플롯과 캐릭터

 

 

 

독자들은 왜 어떤 소설에 그토록 열광할까? 서평 때문일까? 서평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상을 받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잊어버린다. 책표지 때문일까? 좋은 표지를 보면 소비자는 진열대에서 한번 들어보지만, 표지는 어디까지나 포장일 뿐이다. 우아한 인쇄 때문일까? 책등에 찍힌 로고 때문에 책을 구입한 적이 있는가? 엄청난 광고 때문에? 대중들이 책 광고가 있다는 것일 알기나 할까? 영향력 있는 에이전트 때문에? 아쉽게도 이것도 독자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아니다. 실상 독자들이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훌륭한 이야기다.

_제임스 스콧 벨 <소설 쓰기의 모든 것> 플롯과 구조. p.22

 

 

  최명희 작가의 <혼불>은 내게 특별한 책이다. 실력있는 요리사에게 죽기 전에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라 하면 자기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음식이라고 말하거나 높은 명성의 화가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말하라 하면 자신이 천진난만했을 때의 첫 작품이라고 말하는 경우에서 보듯 "처음" 이 주는 강렬함은 매우 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들어가기의 그 기간동안 그리 용돈이 많지 않았던 나는 동네 서점에서 책을 보곤 했다. 그 때 꽤나 거금을 들여 책을 몇 권 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책들만큼은 버리지 않고 책장에 잘 꽂아 두고 있다.

 

  <혼불>. 10권으로 만들어진, 그러면서도 미완이라 부르는 그 긴 소설을 그렇게 열심히 읽었는지 지금도 의아스럽다. 작가 최명희는 교직에 있다가 나와 소설을 쓰기 위해 자신의 병과 싸우며 고독하게 그 책을 썼고 그 책은 꾹꾹 눌러담은 문장과 행간의 쉼표가 가득하다. 그 텍스트에는 우리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삶이 녹아 있으며, 잊고 지내왔던 문화의 조각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읽는 나를 다른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색다른 경험, 색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수학공식같은 증명이나, 논술의 글쓰기, 아마 가보지도 못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다른 새로운 삶. 그 삶이 책 안에서 일어난다는, 환상을 담은 이야기가 그 책을 그렇게 열심히 마르고 닳도록 읽게 만든 힘이었다.

 

  주인공 강모와 강실이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 무수한 삶의 발자국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지내는 사람을 한순간에 잡아다 머나먼 환상으로 이끄는 힘을 지닌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이루는 토대가 바로 플롯과 구조, 캐릭터일 것이다. 이런 소설에 애정을 듬뿍 가진 어떤 사람을, 조금 어색하지만 김연수가 얘기한 식대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소설가-> 독자)

 

내가 읽는 소설의 주인공이 '행동한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행동한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면, 소설을 읽는 나 역시 '읽는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읽는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소설 읽기의 절정으로 올라가야만 하리라. 독자라면 플롯의 시작점이 행동이라는 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삶이 '읽기' 에서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_김연수 <소설가의 일> p.104

 

 

소설을 읽겠다면, <크리스마스 캐럴>의 마지막 장면을 항상 기억하기를, 어떤 인간이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변함이 없다는 것. 달라진 사람은 말, 표정 및 몸짓, 행동으로 자신이 바뀌었음을 만천하에 보여준다는 것. 그러므로 소설을 읽겠다면 마땅히 조삼모사하기를. 아침저녁으로 말을 바꾸고 표정을 달리하고 안 하던 짓을 하기를.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은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_김연수 <소설가의 일> p.140

 

 

 

 

 

 

 

3부. 문장과 시점

 

 

소설을 가늠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가령 우정의 기준이라든가 우리가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의 기준처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될 것이다. 감상 뒤에 쳐져서 [아, 나는 그것이 좋은걸], [그래도 그것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걸] 하고 말을 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감상이 너무 크게 또는 성급하게 말을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소설이 갖는 강렬하면서도 벅찬 인간적인 면을 피해서는 안된다. 소설에는 인간성이 스며들어 있다. 인간성의 고양이나 침체를 피할 수도 없는 것이며, 비평을 받지 않도록 제쳐 놓을 수도 없다. 우리는 인간성을 미워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없어지든지 심지어는 순하게 되어도, 소설은 시들어 한줌의 언어 이외엔 남을 것이 거의 없다.

_ E. M. 포스터 <소설의 이해>

 

 

  아주 오랜만에 <혼불>을 꺼냈다. 책 윗등이 누렇게 바랬다. 내 마음이 저리 물러난 것인지 그 누런 종이는 나의 낯빛보다 더 빛을 잃어 조금 더 처량해 보였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 그 페이지의 구절은 강모와 강실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여전히 이 책은 어디를 펴도 늘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같은 표정도.

 

그 소꿉놀이 밥상을 받은 사람은 강모였다. 어린 도련님 강모는, 오류골댁 살구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차린 꽃밥에 칠첩 반상 백옥 같은 사금파리 접시 위의 색색 반찬을, 강실이가 집어 주는 대로 받아 맛나게 먹었다. 그 아홉 살 열 살의 동그란 머리 위로, 봄은 이울인 살구나무의 구름 같은 연분홍 비칠 듯 말 듯한 꽃잎들이 하염없이 흰 눈처럼 날아 내려,  강실이의 작은 어깨와 저고리 깃, 옷고름 사이로 스미어 지고, 강모의 앞자락 무릎에 졌다. 그리고 밥상 위의 밥그릇과 국그릇, 반찬그릇 색색 위에 하얗게 졌다. 나풀나풀 날아 내리는 꽃잎들은 여리고 곱다 못하여 애달프기 그지없는데, 강모는 내리는 꽃잎의 너울 저쪽에서 나뭇가지 젓가락으로 꽃밥을 먹으며 웃고, 강실이는 내리며 스러지는 봄눈같이 안타까운 꽃잎들의 이쪽에서 웃으며 새 그릇에 꽃밥을 담았다. 꽃잎은 녹는 것이 아니어서 봄눈보다 고와, 돗자리와 밥상과 마당 위에 비늘같이 작은 몸을 누이었다.

_최명희 <혼불> 6권. p.99-100

 

  마침표를 읽어내면서 나는 예전보다 꽤 납작한 삶을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김연수는 "문장" 을 다루는 부분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흔치 않은 사람이 되자.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 말은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 소설 속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추잡한 문장을 주인공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인생을 뻔한 것으로 묘사할 때 나온다.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진다." 소설 한 권 읽지 않는다고, 소설가가 쓴 미문 하나 못 읽어낸다고 다 흔한 인생과 흔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닐테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읽고,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마음상태를 만드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이며, 또 그 문장을 읽고 다시 그 아름다움을 텍스트 더 나아가 소설가가 쓰려고 했던 마음상태까지를 느끼는 흔치 않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오랜만에 꺼낸, 눈이 자연스럽게 애처로워지면서 애틋해지는 저 단어와 문장을 오랜만에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떤 작가가 17년간 쓴 소설을 대하며 그 문장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문장과 시점을 다루는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어쩌면 김연수가 이 책 첫머리에 마르셀 프루스트를 등장시킨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하다. 느리게 쓴다는 것은 문장을 공들여 쓰고 플롯을 좀더 흥미진진하게 구성한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거기에는 소설이란 인간이 겪는 고통의 의미와 구원의 본질에 대해서 오랫동안 숙고하는 서사예술이라는 인식이 숨어 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의미와 구원의 본질에 대한 숙고" 그것이 소설을 예술의 한 장르로 끌어 올리는 척도가 될 것이며 독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오래 머물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책장에서 꺼낸 어떤 책의 한 구절처럼.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그냥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 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도 지갑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 그러면서도 왜 넌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이런 비열하고 추악하고 저급한 짓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느냐? 그런데 너는 조금전에 그 지갑을 물에 던지려고 했다. 네가 아직까지 열어 보지도 않은 물건들과 함게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인가?>

  그랬다. 그건 그랬다. 그건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는 이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이건 그에게 전혀 새로운 질문이 아니었다. 지난밤에 물에 버리기로 작정했을 때도 그 어떤 흔들림이나 갈등도 없이,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다른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처럼 그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p.162-163

 

 

 

 

 

 

마치는 글.

 

 

소설은 처음과 끝 사리에 자신의 총체성의 본질적인 것을 포함한다. 소설은 그럼으로써 한 개인을, 그의 체험을 통해 하나의 전체적 세계를 창조해야 하고 또 그렇게 창조된 세계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인간을 무한한 높이고 고양시킨다. 이 높이는 서시시적 개인은 물론이고 단테의 개인, 즉 이 같은 의의를 자신의 순수한 개인성 덕택이 아니라 그에게 베풀어진 은총 덕택에 얻는 단테의 개인조차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높이다.

_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김연수는 이 책에서 그런 농담을 한다. 오르한 파묵이 자신의 책 <소설과 소설가>에서 자신이 소설에 대한 비밀을 너무 많이 하여 작가협회에서 제명당하게 될 지 모른다고 하였는데, 오히려 자신이 그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분명 이 책은 소설가의 작업 대한 많은 얘기를 한다. 그가 어떻게 착상을 하며, 어떤 자세로 텍스트를 다루는지, 어떻게 그럴싸한 사건을 만드는지, 사람들이 푹 빠져 읽을 수 있는 플롯과 개성적이며 전형적인 캐릭터는 어떻게 만드는지, 독자의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름다운 문장은 무엇인지, 소설가가 어떻게 그 자신의 일에 매진해야 하는지.. 분명 김연수는 인간을 사랑하고, 서사를 만들고 탐구하기를 좋아하며, 깊은 인식을 가진 미래의 훌륭한 소설가를 염두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그러나 나는 약간은 다른 시각을 덧붙여 글을 읽는다. 그의 글은 언젠가부터 소설 읽기를 멀리한, 그러나 아직은 애정이 남아 있는 독자를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책의 끝부분에 적은 말은 얼마나 나를 다시 소설로 이끌게 하는가. 눈물겹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한 일이다. 하지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문장이 쓰여지느냐는 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나는 평생을 쓸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_김연수 <소설가의 일> p.262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책장에서 꺼내어 읽은 소설은 살아있었다. 아직 그 문장은 거기서 숨쉬고 있었다. "허구" 라는 장르의 특성에 지나치게 마음을 뺏긴 나머지 본질을 잊고 있었던 내게 김연수의 책 <소설가의 일>은 곧 독자의 일이었다. 애정을 잃고 꽤나 멀리 걸어왔지만 돌아가려고 하는, 돌아가고 싶었던 어느 독자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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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5-01-2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젊을 땐 정말 `책은 곧 소설`인 줄 알았던 듯해요. 책을 붙잡는다는 건 언제나 `어떤 이야기` 속으로 풍덩 빠져들어간다는 걸 항상 기대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소설은 허구`라는 걸 자꾸만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느낄 때가 생기기도 하더군요.

최명희의『혼불』을 자신이 만난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주저없이 내세우는 제 친구가 있는데, 저도 언젠가는 그 소설을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인용해 주신 저 짧은 대목만 읽어 봐도 금세 그 책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느낌이 드니 말이지요.

Nussbaum 2015-01-25 00:00   좋아요 0 | URL
oren님 안녕하세요.

김연수의 산문집을 읽으며,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지나간 나의 20대를 돌이켜보기도 하고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요근래 꽤 많은 책을 팔아치워 책장이 조금이나마 한산해졌는데 그 팔려나간 책들 가운데 소설의 비중이 꽤나 큽니다. oren님 말씀을 듣고 나니 최근까지는 `어떤 이야기` 속에 풍덩 빠져들어간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천일야화 세트를 구매하여 다시 읽게 되니 `어떤 이야기` 에 다시 빠져드는 제가 좀 신기하기도 했지요.

이 글을 작성하면서 다시 오래된 소설을 펼쳐보았습니다. 언젠가 고민 없이 그저 그 세대만을 가벼이 반영하는 소설과, 그뒷표지에 그 소설을 극찬하는 평이 잔뜩 실려 있는 것을 본 후 멀어졌던 그 발걸음을 다시 되돌려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진짜 이야기` 는 그곳에도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그것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제가 너무 <혼불>에 대한 기대를 많이 심어드린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불완전하게 갑자기 뚝 끊어진 스토리, 중간중간 작가가 삽입한 많은 묘사에 의한 빠르지 못한 전개, 약간은 물을 먹어 늘 하강곡선을 그리는 듯한 어조와 풍경의 시선들. 현실 반영의 측면에서 부족한 감이 있다 하더라도 늘 제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문장과 같이 걸었던 제 푸른 날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대학 4년 내내 좁은 기숙사에서도 그 10권은 꼭 지니고 다녔던 그 시절의 추억은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네요.

blanca 2015-01-2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혼불을 너무 좋아해요. 이 책은 살아 있는 것 같아서 언젠가 또 한번 제대로 다시 만나얄 것 같아요.

Nussbaum 2015-01-31 18:34   좋아요 0 | URL
blanca님 안녕하세요.

예전에 <혼불> 관련해서 페이퍼였는지 남기신 글 본 기억이 납니다. 다시 제가 남긴 리뷰를 읽어 보니 그 책에 대한 내용을 많이 쓴 것 같네요. 늘 생각나는 책인데, 다시 생각해보면 소설의 힘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살아있다는 말 참 좋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