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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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한 영화 <러브 레터> 의 한 장면.


이 영화에는 후지이 이츠키가 읽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 나온다. 

영화의 얼개와 잘 맞아떨어진 느낌. 두툼한 양장본으로 되어 있던, 하얀 표지의 책. 

아픈 추억, 좋은 느낌을 담은 기억의 단편의 향기를 다시 꺼내 놓으라 한다. 


잊은 줄 알았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이다. (...) 작품 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죽어 가고 있다는 세네카식의 인식이다. 특히 망각현상이 그 극명한 예이다. 까마득히 먼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쉽게 잊거나 잊혀진다. 그것이 프루스트가 인식한 우리의 정서적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뚜렷한 징표인 우리의 정서적 퇴직물은 덧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영영 지워지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 소멸되는 것일까?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 의 중심적인 의문이다. (...) 잃어버린 시간은 그토록 하찮은 사물에 의해 촉발된 황홀감이나 격정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줄로 믿었던 시간'을 가리키는 반어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조선일보 2005년 4월 9일 "책 읽는 대한민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편 발췌 (이형식 교수)



이 방대하고 읽기 까다로운 소설을 따라 읽어 나가기도 벅찬데, 이 소설을 과연 내가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온갖 외피같은 부연 설명을 제거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이 소설에 대한 인상뿐일지 모른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명료함과는 거리가 있다. 이 소설은 한 번에 손에 잡히지 않는다. 소설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면 손에 잡히기는커녕 손가락 사이로 그 텍스트들이 줄줄 새어 흩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왜 이 소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런 텍스트가 흩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 지독한 만연체, 하나의 기억을 회상하는 문장의 길이와 두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화가와 음악들이 파편처럼 마르셀의 기억 저편에 두툼한 먼지구름을 일으켜 그것을 감싸고 있다. 하여 나는 이 텍스트들을 읽을 때마다 하르트만이 제시한 '전경'과 '후경' 을 넘나들며 마르셀과 프루스트의 기억을 함께 더듬게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 (1871년 7월 10일 - 1922년 11월 8일) 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니체와 프로이트가 매우 큰 영향력을 떨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태어나 살았으며 러스킨과 모리스가 들고 나온 미술공예운동의 수공예와 과감한 재료의 사용과 유기적 곡선을 그 특징으로 하는 아르누보적 예술의 중심에서 살았다. 미술사적으로는 후기인상의 화가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하던 시기로, 어쩌면 그의 작품은 프로이트가 예술에 가져다준 초현실적인 의식 흐름과 당시 예술적 분위기를 함께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소설은 모두 일곱 권 (7부)로 되어 있다. 그 간단한 줄거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 책, 2010.3.26, 들녘)

 

「스왕네 집 쪽으로(Du côté chez Swann)」라고 이름 붙여진 첫 권은 마르셀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그가 해마다 부모와 함께 콩브레에서 보냈던 여름 휴가의 기억들이 그려진다. 마르셀이 이 초창기 시절에서 떠올리는 유일한 기억은 잠자리에 들기 전의 인사를 거부했던 연극이다. 그 집안의 친구인 스왕이 저녁마다 찾아오면 당시 열 살배기인 마르셀은 어머니에게 받고 싶어했던 잘 자라는 뽀뽀도 받지 못한 채 어김없이 잠자리로 가야 했다. 어머니의 관심을 계속해서 잃게 되자 이것이 평생의 상처로 남게 되고, 그 내면적 상처는 이후 마르셀에게 여성에 대한 상실의 불안과 공격적 질투심이라는 형태로 남게 된다. 잠자리 인사의 에피소드가 유년기의 유일한 기억인 반면에, 저 유명한 마들렌 과자 맛의 느낌은 돌연히 유년기 당시에 있었던 인물들, 장소들과 더불어 그의 기억을 다시 살아나게 만든다. 사랑받는 할머니, 고집 센 집안 하녀 프랑수아즈, 우울증을 보이는 레오니 고모, 서양산사나무 울타리, 콩브레의 교회 등까지 말이다.


제1권의 2부는 「스왕의 사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는 예술 애호가 스왕과 아주 수상한 소문이 떠도는 부인인 아름다운 오데트 드 크레시 사이의 연애담을 서술한다. 그 둘은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에서 만난다. 그 살롱은 상류 시민층이 모이는 곳으로 귀족들이 모이는 게르망트 살롱과 함께 소설에서 사회적 배경의 초점을 이루는 곳이다. 스왕은 오데트가 자신을 속였다고 의심하고 엄청난 질투심에 시달린다. 그의 사랑이 식었을 때 그는 오데트와 결혼한다. 「스왕의 사랑」은 아마도 프루스트의 소설을 처음 읽으려는 사람이 먼저 떼어 읽어볼 수 있는 부분으로 가장 적합할 것이다. 이 부분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를 형성한다. 화자의 탄생 시기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부분은 소설의 모든 부분들 중에서 통념적인 독자의 기대에 가장 상응하는 곳이다.

제2권의 제목은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다. 사춘기로 들어선 마르셀은 난생 처음으로 성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스왕의 딸인 새침떼기 질베르트를 샹젤리제에서 재미 삼아 만나 잊지 못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천식에 시달리던 마르셀은(프루스트도 그랬다) 열일곱 살 때 그의 할머니와 함께 노르망디 해변의 발베크로 해수욕을 하러 간다. 그곳에서 그는 로베르 드 생 루를 사귀게 된다. 생 루는 대단히 매력적인 젊은이인데, 훗날 동성애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질베르트와 결혼한다. 마르셀은 생 루의 삼촌 샤를뤼 남작도 만나는데, 그는 이후 동성애를 통해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르셀은 발베크에서 자신의 본격적인 사랑의 주인공 알베르틴을 만나게 된다. 마르셀이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그녀가 여자 친구들과 함께 있던 해변 거리에서였다. 그는 아름답고 활동적이고 현대적인 젊은 여성을 발견하고는 아주 놀란다.

제3권 「게르망트가의 사람들(Le côté de Guermantes)」에서는 마르셀이 그의 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주한다. 그들은 이제 게르망트 저택에 속하는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마르셀은 (늘 그랬던 것처럼) 먼발치에서 게르망트 공작 부인을 사랑한다. 마침내 그 부인을 만났을 때 그는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실망한다. 당시 사회생활의 중심인 살롱의 끊임없는 대화 소재는 유대인 대위 드레퓌스 사건(드레퓌스라는 유대인 대위가 군 당국이 조작한 증거를 근거로 국가반역죄 판결을 받았다가 혐의를 벗고 석방되자 사회에서 반유대인 물결이 일어났던 사건­옮긴이)이다. 드레퓌스는 1894년 이른바 모반죄라는 혐의를 쓰고 유형지인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프랑스 내정에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제4권 「소돔과 고모라(Sodome et Gomorrhe)」의 주요 테마는 동성애다. 처음에 마르셀은 우연히 샤를뤼 남작의 동성애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남작은 이 동성애 사건으로 점차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그 사이 알베르틴을 다시 만나게 된 마르셀은 그녀 역시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제5권 「갇힌 여인(La Prisonniére)」에서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자기가 있는 파리로 불러들인다. 그녀는 그의 집에서 기거한다. 알베르틴이 외출하면 그는 질투심에 불타 그녀를 감시한다. 소유욕에 사로잡힌 마르셀의 태도 때문에 알베르틴은 어느 날 아침 그 집을 떠나고 만다.

그 다음 제6권 「사라진 알베르틴(Albertine disparue)」에서 마르셀은 친구 생 루에게 알베르틴을 수소문하여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마르셀은 알베르틴이 승마를 하다 사고가 나서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7권이자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Le Temps retrouvé)」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마르셀은 게르망트 공작 저택으로 마티네를 방문한다. 그 집의 서재에서 마르셀은 문득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억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르셀은 이런 깨달음을 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소설을 쓰고자 결심한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소설은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처음으로 회귀하게 된다. 마르셀은 이 소설을 쓰게 되고,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는 비로소 독서를 마치게 되는 셈이다.


 


 

1부 <스완씨 댁 쪽으로>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을 잠시 옮겨보자.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 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 그러면 나는 여전히 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한 책을 내려 놓으려 하고 촛불을 끄려고 했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방금 읽은 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는데, 그 새악은 약간 특이한 형태로 나타났다. 마치 나 자신이 책에 나오는 성당, 사중주곡, 프랑수와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관계라도 되는 것 같았다. 이 믿음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몇 초 더 지속하여 내 이성에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내 눈을 비늘처럼 무겁게 짓눌러 촛불이 꺼졌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치리지 못하게 했다. (...)


나는 어린 시절 뺨처럼 팽팽하고 싱그러운 베게에다 뺨을 갖다 대었다. 시계를 보려고 성냥을 켰다. 곧 자정이다.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환자가 낯선 호텔 방에서 잠이 들었다가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깨어나 문 아래로 스며든 한 줄기 햇살을 기뻐하는 순간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벌써 아침이라니 ! 곧 종업원들이 일어날 테고 종을 울릴 수 있고, 그러면 누군가 와서 보살펴 주겠지 ! 고통을 덜 수 있다는 희망이 아픔을 견뎌 낼 용기를 준다. (...)


다시 잠이 들었다. 이따금 나는 아주 짧은 순간, 나무 벽판이 규칙적으로 삐걱대는 소리를 듣거나, 어둠의 만화경을 응시하려고 눈을 뜨거나, 아니면 의식의 일시적인 빛 덕분에 수면을 음미하는 그런 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때 가구며 방이며 모든 것은 잠 속에 잠겨 있었고, 그 작은 부분에 불과한 나 역시 무감각한 잠의 세계와 하나가 되려고 이내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또는 잠을 자면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내 원초적인 삶의 시기로 금세 되돌아가, 작은 할아버지가 내 곱슬머리를 잡아당기던 어린 시절 공포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잠을 깨는 과정에서의 의식을 적어 내려가는 장면을 굳이 분류하자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10페이지 가까이 되는 그 길이 속에서 사물과 나와의 관계, 그 오랜 관계에서 빚어진 심리적 거리, 언젠가 있었던 사건과 그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다채로운 프리즘의 환영들, 그리고 사라져 없어진 것 같았던 기억을 인간의 오감각으로 재생해내고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소설 속에서 그것을 이렇게 얘기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p.85)

 

 


한편 이 소설은 끊임없이 화가와 작곡가를 등장시킨다. 너무나 유명한 인물들과 작품이 나오는데 나의 견해로는 대부분 이야기의 흐름, 또는 인물의 유형을 드러내는데 보조적인 장치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싶다. 휙휙 스케치하듯 그림을 그린 티치아노와 바르비종파 화가 코로, 베토벤의 교향곡,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 모차르트의 우울한 클라리넷 오중주 등 프루스트는 그의 유복한 가정환경에 걸맞은 다양한 교양적 지식을 뽐낸다. 살짝, 조금씩 겹쳐 나오는 이런 부분들은 누군가에겐 명료함을 누군가에겐 쓸데 없는 사족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예시를 나열해보자. 스완이 등장하고 나서는 이런 부분을 만날 수 있다. 


할머니는 내 방에 가장 아름다운 유적들이나 풍경 사진을 걸어 주고 싶어 하셨지만, 막상 그런 사신들을 구입하려고 하는 순간에는, 비록 상당한 미학적 가치가 있다 할지라도, 사진술이라는 기술 복제 방식에서 저속함과 유용성을 발견하셨다. 그리하여 궁여지책으로 상업적인 저속함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다소나마 저속함을 줄이면서 그 상당 부분을 예술적인 것으로 대체하고, 예술의 여러 '두께' 를 입하려고 하셨다. 그래서 샤르트르 대성당이나 생클루 분수, 베수비어 화산을 찍은 사신 대신, 혹시 어떤 위대한 화가가 그린 것이 없는지 스완 씨에게 알아본 다음, 차라리 코로가 그린 [샤르트르 대성당] 이나 위베르 로베르가 그린 [생클루 분수], 터너가 그린 [베수비오 화산] 을 찍은 사진을 내게 주는 편을 더 좋아하셨다. (...)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예술을 이해하고 선물하는 방식이 반드시 성공적인 결과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석호를 배경으로 그렸다는 티치아노의 데생을 보고 내가 베네체아에 대해 가지게 된 관념은, 분명히 단순한 사진이 주는 관념보다 훨씬 부정확했으니까 (p. 78-79)

 

 


그리고 <스완씨 댁 쪽으로> 2권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렇다면 알겠소, 그럼 안단테만 연주하라고 하겠소." 하고 베르뒤랭 씨가 말했다. "안단테만이라고요?" 당신은 참, 바로 그 안단테가 내 팔과 다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걸요. 참으로 대단하신 주인양반이군요. <제 9교향곡> 에서 마지막 장만 듣자고 하거나 <마이스터징어> 에서 서곡만 듣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군요." 베르뒤랭 부인이 말했다. (p.41)


"스완은 울적하고 냉소적인 기분으로, 플루트의 아리아에 이어 연주된 리스트의 피아노를 위한 인터메조 <새와 이야기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를 들으며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연주를 듣고 있는 두 부인을 바라보았다. (p.242)


"오리안, 내일 저녁 잠시 우리 집에 와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오중주곡을 들어 주었으면 좋겠어. 네 의견을 알고 싶으니까." (p.250)



이렇게, 긴 호흡으로 제시하는 수 많은 생각과 인상들이, 당시 상류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 많은 화가와 문필가, 음악가들과 함께 우리에게 한꺼번에 밀려옴으로써 우리는 텍스트 속에 숨겨진 감정의 홍수를 만난다. 바로 그 부분이 이 소설을 그리 손에 쥐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날씨, 계절, 사물, 사람, 사회, 예술작품, 사랑... 우리가 살아가며 겪고 느끼며, 감정과 마음의 얇은 판에 새기는 무수한 감정들. 각각 저마다의 무수한 경험속 장면들에 새겨진 감정을 일깨우고, 또 그것을 느끼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나는 어떤 소설이든 "반드시 읽어야 할 목록"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봄날의 빛이 사그라진 건물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과 먼지의 켜가 겹겹이 쌓인 어느 조용한 방 안에서,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줄기 기억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 될 것 같다. 아주 미묘한 자국을 남기며 기록했던 누군가의 향기와 말이, 날씨와 계절에 따른 나의 시절에 추억이 진정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프랑스의 벨에어(BelAir) 에서 프루스트의 소설을 바탕으로 발레를 제작한 DVD 가 나와 있다. 롤랑 쁘띠가 안무를 맡고, 베토벤, 드뷔시, 포레, 프랑크 등의 작곡가의 음악을 소설의 부분을 재구성하여 챕터별로 제시하고 있다. 소설을 바탕으로 그 분위기를 묘사하는 장면은 함축적이면서도 프루스트의 소설의 분위기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 오른편 박스셑에는 왼편의 DVD가 함께 들어 있다.

 


 







 


 

마르셀의 눈으로 본 세계.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돌아보며, 사람을 만나고, 사물을 만지고, 세심한 눈으로 그것을 관찰하고 또 마음으로 보여주는 글과 소리, 감각들.

 

비록 프루스트가 남긴 문학적 성취를, 얕고 모자란 내 눈과 마음으로 마나 받아들일 뿐이지만 지금은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 언젠가부터 더 빨라지고, 지루해진 일상 속에서 부서지기 쉬운 저마다의 마음속 얇고 부드러운 기억의 판에 나 있는 그 홈을 따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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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15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며 누린 즐거움을 떠올리며
살짝 옮겨적을 수 있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해요.

Nussbaum 2013-07-21 15:02   좋아요 0 | URL
네. 가끔 책에 적힌 낱말, 문장을 옮겨 적을 때가 있는데 그럴때마다 글자들을 어루만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름이 가져다 준 넉넉한 마음을 품고 찬찬히 글을 보듬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