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발자국이 짧은 봄길의 따뜻함을 들어 올린다. 

그 속에서 때로는 앞서거나 뒤를 조용히 따르는 풋풋한 싱그러움. 

그 둘의 발걸음의 거리가 초봄의 한날만큼 작고 조용하다. 


꽃이 피는지도 모르고, 거리가 점점 차오르는지도 모른채

옅은 막으로 둘러싸인 책상에 앉아 답답함을 느낄 때 걷는, 

어느 그림자길 마주친 명도 9의 얼굴들.








그 명도의 극점이 불러오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날카로운 못 하나가 

가슴을 스쳐 지나갈 때, 그 날카로운 날을 세워 손에 들고 있었을지도 모를 때

깊은 검정의 한 숨. 


검정의 한 숨이 지난 깊은 밤의 생각을 떠올리게 하면 

나도 모르게 반걸음을 걸으며 멀어져가는 생각의 손을 잡아본다. 

너무 빠르거나 느려, 지나쳐버린 생각의 얼굴을 떠올리며 앉아 뒤를 돌아본다. 










쌓였던 눈 대신, 밝고 유쾌한 발자국들이 쌓인 길 어딘가.

얇은 기대와 가벼운 물음을 작은 가방 속 어딘가에 넣어둔 채

앞선이의 반걸음을 따르는 명도 7의 얼굴.


때이른 얇은 옷. 

미리 곱게 갈아 놓은 웃음.

주머니 속에 가득찬 기대. 









봄의 한낮이 그렇게 사라지듯, 봄의 발자국이 그렇게 흩어지듯, 

앞서가던 반걸음이 어느새 나란히 걷는 걸음이 되는.

짧은 봄날의 기억.


주머니속 가득찬 부푼 마음과 명도 7의 얼굴이  

짧은 봄날의 따스함을 품는다. 

곧 사그라질지라도, 명도 0의 기억이 될지라도. 


아주 곱게 거리에 내리 앉았던 얇은 봄이 수줍은 발자국과 함께 사라지면

기억에서 반걸음씩 뒷걸음을 걷는다.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게.  





*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마지막 나오던 음악은 <기억의 습작> 보다는 이 곡이었다면 더 좋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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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삶이 짧은 여행이었다고 부를 수 있는 작곡가 슈베르트. 그는 서른을 갓 넘기고 가느다란 발자국 소리를 내며 바람을 스쳐 지나갔다. 베토벤을 매우 존경했던 그는 "가곡의 왕" 이었으나 뿐만 아니라 현악 사중주, 교향곡, 피아노 소나타 등에서도 비할 바 없는 애잔함과 유머, 진지함과 회한이 담긴 작품을 남긴 작곡가 이기도하다. 


그만이 남길 수 있는 깊은 감정선의 골이 느껴지는 작품가운데에서도 1828년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 은 그가 사망한 해에 남긴 곡으로서 그의 최만년의 작품이다. 듣고 있으면 세상의 끝을 아주 가벼이, 그러면서도 아주 무겁게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곡은 진지하고 비장하면서도 어떤 뜻 모를 가벼움도 느껴진다.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답게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연주하고 그 연주를 음반에 담고 있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한의 시간 속에서 무심히 구름 흘러가는 어느 한적한 시골길, 그곳에서만날 수 있는 조금 쓸쓸해 보이는 눈빛의 노인을 보는 듯한 빌헬름 켐프의 1967년 DG녹음, 청량한 한낮의 그림자가 주는 명암 속에서의 한적함이 느껴지는 브렌델의 1971년 필립스 녹음. 


이 뿐만 아니라 라두 루푸, 클라라 하스킬, 디터 체흘린, 안스네스 ... 등 다양한 연주자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며 또는 숨기며 슈베르트의 아픈 발자국에 동행하고 있다. 시간을 담은 예술인 음악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일 수 밖에 없으니, 각각의 연주는 듣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겠다. 


이 곡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연주자가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가 아닐까 하는데 내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는 이 곡의 음반을 적어도 네 종 이상 남겼다. 1961년 (브릴리언트), 1972년 (올랭피아), 1972년 (프라하) 등이 그것인데 모두 뛰어난 연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내가 확인한 정보가 맞다면 첫머리에 크게 올린 음반은 1972년 9월 프라하 녹음으로서 바로 위에 올린 음반 가운데 맨 마지막 박스에 들어 있던 음원을 담고 있다. 그간 이 박스물은 절판 상태였고 중고가격은 아마존에서 수백, 수천달러로 거래가 이뤄지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프라하 녹음이 하나 둘씩 SACD 포맷으로 나오고 있다. 전설 속 연주를 음반으로 쉽게 만나게 되었다. 


이 프라하 녹음을 기억을 더듬어 위의 나열한 음반들과 비교해 들어 보았을 때 (브릴리언트 보다) 약간 더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음질탓도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명암대비가 덜 한 느낌이다. 피어나듯, 서서히 그러면서도 진한 어둠을 뿌리는, 약한 조명을 켜놓고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던 리히터의 해석은 크게 변함이 없으되 관조하는 느낌이 더 보인다. 


그대로 발을 담가 빠지게 만들며 곡을 차분하게 이끌어 가면서도 그 큰 테두리 속에서 마음의 결을 흔드는 것을 잊지 않는 그의 모습은 다른 피아니스트와 분명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리히터의 손과 발에 감탄하는지 이 음반에서도 그 모습은 찾아 볼 수 있다. 







Paul Klee, <Pastorale (Rhythms)> 1927, Tempera on canvas mounted on wood




조용하게 시작하는 도입부를 지나, 세상을 조심스레 어루만져주는 느낌의 곡이 흐를 때면 클레의 천진난만함을 담은 그림 속 음표들이 떠오른다. 세상의 시끄럽고 복잡한 일에서 잠시 손을 놓고 자신의 마음 속 장면에 몰두하게 만드는 추상미술의 장르에서 느껴지는 순진함과 그 이면의 고뇌가 들려온다. 


작곡한 음악의 전달자 라는 사명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리히터의 이 음반은 한껏 높아지는 소음과 밝음으로 가벼워지는 발걸음 뒤로 조금씩 사그러들어가는 어느 골목의 그늘 속 어둠을, 따뜻함이 미묘하게 섞여 풍기는 바람 속의 어느 북풍의 낮은 음을 내게 전해 준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수줍고 애달픈 발자국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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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3-1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69(네번째줄) 가 아니라 960인거죠?
마침 969도 한번 들어보았더니 쓰신 글의 분위기와 확연히 달라서 금방 알겠네요^^

저는 소리를 듣는 동안은 소리만 들리던데, 님의 글에서는 항상 그림과 음악이 공존합니다.
시끄럽고 복잡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도록, 세상을 조심스레 어루만져주는 음악이라니 참...좋지요?

Nussbaum 2013-03-10 18:50   좋아요 0 | URL
hnine 님 꼼꼼하게 읽어주셨네요 ^^
지적해주신대로 제가 오타를 냈습니다 ~

요즘은 예술을 사회의 맥락속에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대세인데 너무 그런 면에서 해석하다보니 가끔은 음악, 미술 그 자체로만 들여다 보는 시선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작가의 내면세계나, 의도에만 집중해 듣는 음악도 때론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늘 한결같이 자리에서 열심히 나아가시는 모습보면서, 덕분에 가끔 남기는 페이퍼나 리뷰의 이 공간이 덜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어딘가 산책 다녀오곤 하는데 오늘 달아주신 댓글은 산책길에 마주치는, 왠지 모를 삶의 여유가 느껴지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빛 같은 느낌입니다.
새삼스레 이런 공감의 띠도 참 소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역시나 첫 댓글 ! ^^ 감사합니다.
 

 

 

 

 

 

 

도나텔로 <성 조르주> 1415년, 대리석

 

<성 조르주>는 고대 이후 처음으로 제작된 입상으로서 고전적인 '대응 균형' 자세의 완전한 형식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작품이다. 도나텔로는 이 한 점의 작품을 통하여 고대 조각의 핵심적인 특징을 완벽하게 실현해 내고 있다. 즉 그는 인간의 신체를 움직임의 잠재력을 가진 하나의 조절된 '구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신체에서 발산되는 억제된 에너지는 저 멀리 지평선으로부터 접근해오는 적들을 응시하는 눈빛을 통해 방출되는데, 용을 죽일만한 용기까지 가졌던 이 성 조르주는 '새로운 아테네'의 자랑스럽고 영웅적인 수호자로 칭송된 인물이었다.

 

잰슨 서양미술사, 249-250 

 

 

서양미술사적 흐름에서 고딕 시기를 지나 르네상스가 발아할 무렵, 피렌체에서 도나텔로는 그리스의 조각들이 가져온 커다란 혁신성을 르네상스에 전해주었다. 대응균형은 "아르카익 스마일" 대신 진지하고 사색적인 표정과 콘트라포스토를 통해 역동성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도나텔로는 그 정신성과 물질성을 르네상스로 들어가는 문에서 다시 응집시켰다.

 

잰슨이 그의 책(서양미술사; Histroy of Art for young people)에서 소개한 것처럼, 그리 많은 동작을 취하지 않고 단지 약간의 몸의 뒤틀림만을 가미한 몸체에 꼿꼿이 세우고 날카롭게 응시하는 표정은 그리스 고전기의 이상적인 모습에 헬레니즘과 로마초상조각의 감정성까지 포함해 보는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이 작품의 경우 조각상 아래의 부조(릴리에보 스티아치아토(rilievo stiacciato, 평부조기법) 를 보면 대략 이 조각상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현재 대부분 통용하고 있는 예술가의 자의식이 높아가고 있던 그 시대에 제작한 이 조각상의 작품 의도나 해석의 근거는 학자별로 대부분 유사하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유형의 조각상의 분위기를 서양 고전 음악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무겁고 진지하며 사색적이고, 무엇인가 거대한 음의 흐름이 큰 줄기를 이루고 도도하면서도 감정을 고양시키는. 그러면서도 고전미를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 떠오른다. 아마도, 적어도 나의 생각으로는 장르면에서는 교향곡이, 인물면에서는 브람스가 먼저 떠오른다.

 

 

 

 


 

 


브람스의 교향곡은 모두 네 개이다. 베토벤의 교향곡들이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상황에서, 혹은 그렇게 작곡가 스스로 믿었던 까닭에서인지, 정확한 것은 그만이 알겠지만 첫 번 째 교향곡을 작곡하기까지는 2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2, 3번은 상대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하게, 1, 4번은 영웅적, 비극적 느낌이 든다.

 

1번 교향곡의 경우 마치 네 악장이 소설의 기승전결을 보는 것 같은, 베토벤의 영향을 감지하게 하는 부분도 보이지만 베토벤의 3번 영웅교향곡이나 9번 합창 교향곡과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 영웅교향곡보다는 강렬한 맛이 덜하고 중후한 맛이 있다. 합창교향곡보다는 짧고 거대하진 않지만 보다 간결하면서도 뭔가 톱니바퀴처럼 착착 굴러가는 느낌이 든다.

 

오래전부터 브람스의 교향곡에서 명반으로 사랑받고 있는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와 필하모니아의 1950년대 레코딩은 한 음 한 음 짚어가면서 브람스의 고뇌의 여정을 따라간다. 마치 저 멀리 몰려 오고 있는 적들 혹은 용을 향한 <성 조르주>의 응시처럼 서두르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결전을 준비한다. 어쩌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그 모습은 너무 차분하다.

 

비록 모노 레코딩이지만 1번 4악장의 그 유명한, 거대한 물결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상승점을 찍는 과정 속에서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녹음과 가까이에는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 요훔, 뮌시등이 있겠고, 이후 카라얀, 반트, 번스타인 등의 녹음을 꼽을 수 있겠지만 클렘페러의 전집은 약간 거친 감이 있으나 브람스의 음들을 호소력 있게 차분히 전해준다.

 

 

 

 

 

 

 

 

 

 

몇 해 전에 나왔던 첼레비다케의 EMI 녹음 전집 박스물처럼 클렘페러도 한꺼번에 이렇게 묶여 나오고 있다. 상대적으로 첼리비다케보다는 적은 주목을 받고 있는 감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예술에 있어 모더니즘의 시대는 가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성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지만 클렘페러가 남긴 음악은 시대가 흘러도 그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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