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과 이월 내가 내린 뿌리는 몇 가닥이었을까?

언제나 그 땅을 밟고 지나가는 시간에는 알지 못하는 것. 땅을 들어 지나간 시간을 헤아린다.

사이를 걷는다. 

때로는 얇았을, 때로는 그보다는 조금 굵었을.

 

 

 

 

 

 

 

 

 

 

   시큼한 냄새가 옅어지면서 배후 세력처럼 떠오르는, 지린 듯 달고 쌉싸래한 냄새.... 마비의 기운을 풍기는 그 어떤 수상스러운...... 아무리 못해도 내 육체보다는 거대하리라, 짐작한다. 내 둔감한 후각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어떤 냄새만으로.

 

  그러나 뿌리가 얼마나 거대한지, 어떠한 형상을 그리고 있는지, 어떤 빛깔인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나는 모른다. 원뿌리에서 지파처럼 갈라져 나온 곁뿌리가 몇 가닥이나 되는지, 곁뿌리들이 저마다 어떤 방향을 향해 흘러갔는지.

 

  나는 뿌리를 보지 못했다.    

 

김숨 <뿌리 이야기> p.17-18

 

 

 

 

때로는 시대를 건너는 눈길이, 때로는 불편을 감수하는 손길이 그늘진 응달을 따뜻하게 데워줄 때가 있다. 시대를 거스르는 소설가, 불편을 기꺼이 즐기는 예술가. 이들은 그들의 시간을 직조(織造)한다. 그들의 상념과 그들의 낯섬 사이에 잠시 머물어 눈을 감아본다. 일월과 이월 사이 시간을 헤아린다.

 

 

글자와 글자 사이를 눈이 좇듯, 그림과 종이 사이를 붓이 잠시 머문다.

종이 위에 시간을 스친다.

 

 

 

 

 

 

 

 

 

 

 

 

 

 

 

 

 

 

 

 

 

 

 

 

 

 

  그가 포도나무 뿌리 앞에 바투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산양의 발목처럼 길고 흰 초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심지에서 바닥만 한 촛불이 일고, 작업실 벽과 천장으로 포도나무 뿌리의 그림자와 그의 그림자가 일렁일렁 번졌을 것이다. 검게 타드는 심지를 중심으로 웅덩이를 만들면서 고이는 촛농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는 초를 기울였을 것이다. 심지에 매달린 촛불이 길게 늘어나면서, 포도나무 그림자와 그의 그림자도 덩달아 길어졌을 것이다.

 

  불안정한 뿌리를 안정적으로 고정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그가 찾은 것은 촛농이었다. 촛농을 떨어뜨려 뿌리를 덮는 것이었다. 좀묘화를 그리듯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려 촛농 막을 뿌리 전체에 입히는 것이었다.

 

  원뿌리와 곁뿌리, 실뿌리가 어지럽게 얽히고 뻗은 뿌리는 결코 다루기 쉬운 오브제가 아니었다. 뿌리는 요동치는 오브제였다. 수분을 흠씬 머금은 뿌리도, 메말라 철사처럼 억세진 뿌리도, 각질이 일듯 외피가 너저분하게 벗겨진 뿌리도 요동쳤다. 죽은 뿌리도 요동쳤다.

 

* 김숨, <뿌리 이야기>   p.28-29

 

 

 

 

 

짧게 스치는 시간 속에 곁드는 짧은 무엇.

무엇은 무엇을 남긴다.

무엇은 무엇이 된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각자의 심연은.

저마다의 얇은 뿌리는.

 

 

 

모란디의 정물에는 병의 라벨이나 책의 표지와 같은 표식이 없다. (-위대한 예술가 501, 마로니에 북스, 363p.) 그것을 나타내는 사물의 형태,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형태, 색에 집중하며 그 사물들이 갖고 있는 고요한 물질성을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샤르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 화가의 그림은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사물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며, 그러기에 보는 이에게 새로운 의미를 환기시켜 준다. 사물은 상징을 드러내지 않으며 그 스스로 어떤 알레고리나 교훈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관심성과 몰개성성의 속성이 말을 하고, 생각을 투영한 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준다.

 

 

http://blog.aladin.co.kr/728246198/6369446

 

 

 

 

 

 

morandi < courtyard in via fondazza > 1958 / oil on canvas

 

 

 

 

 

 

 

 

 

 

 

 

 

얇은 뿌리 하나는 물을 머금는다. 그 물은 얇게 떨며 떨어지고, 저마다의 소리를 지닌다.

때로는 빛과 어둠의 소리를, 때로는 떨림과 단호함의 소리를.

때로는 약함과 강함의 소리를, 때로는 고음과 저음의 소리를.

 

 

 

 

 

        

 

 

 

  직업마다 자기 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의 왼쪽 손가락에는 티눈이 박히고, 구두 수선공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에는 못이 박힌다. 그들이 생트 콜롱브 씨네 집을 나왔을 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생트 콜롱브 씨는 갈색의 커다란 게이프로 몸을 휘감았고, 사긱 모직 천 밑으로는 눈만 보였다. 마레가 스승을

정원이나 집 밖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집 밖에는 절대 나가지 않을 사람인 줄 알았다. 그들은 비에브르 강 하류에 이르렀다. 바람이 휙휙 소리를 냈다. 그들 발바닥 밑에서 얼어붙은 땅이 빠지직 소리를 냈다. 생트 콜롱브는 제자의 팔을 잡고는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들은 두 눈을 강타하는 바람을 헤치며 앞으로 난 길을 향해 상체를 구부리고 시끄럽게 걸어갔다.

 

  "들리나!" 스승이 외쳤다. "아리아가 저음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p.56-57 

 

 

 

 

 

때로 말을 멈추면 생각이 걷는다.

때로 말을 멈추면 귀가 듣는다.

때로 말을 멈추면 손이 노래한다.

때로 말을 멈추면 내가 들린다.

 

 

때로 말을 멈추면 머리가 텅빈다. 하얗고 시원하게.

 

 

 

 

 

 

 

 

 

 

 

 

 

 

 

 

 

마분지 같은 커튼으로 새벽빛이 스며든다. 빛 한 점 떠돌지 않던 작업실에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번지면서 뿌리의 전체적인 윤곽이 서서히 드러난다. 뿌리가 한 가닥 지평선처럼 떠오른다. 팔 굵기의 , 원뿌리는 아니고 곁뿌리다. 취광이 감도는 그 뿌리 너머로 또 다른 뿌리가 떠오른다. 그 너머로 또 다른 뿌리가...

 

* 김숨, <뿌리 이야기>   p.60

 

 

 

 

감춰져 있는 발길.

늘 어두움으로 향하는 각자의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

감춤을 드러냄이 작은 의미이다.

 

많아야 세 가닥. 일인칭 시점으로만 보는 일월과 이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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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2-23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제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나오네요!!! 더구나 파스칼 키냐르와 모란디까지!!!!^^

Nussbaum 2015-02-23 23:16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페이퍼에 제가 파스칼 키냐르에 대해 올린 적이 있었지요. 그때도 비비아롬나비모리님 댓글을 볼 수 있었죠~ 파스칼 키냐르. 가끔, 아주 가끔 다시 만날 때면 참 독특하면서도 깊이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좋습니다.

음. 예전에 페이퍼에 모란디에 대해 남긴적이 있었는데 마침 모란디전을 덕수궁미술관에서 하길래 다녀왔는데, 그림을 실물로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꽃과 풍경도 신선했고요.

그나저나 해든이는 혼났지만 코~ 잘 자고 있겠죠~

라로 2015-02-24 03:52   좋아요 0 | URL
우왕~~~~ 역시 옛 친구는 좋아요!!! 그런 것도 다 기억하시고!!!!♥^^

Nussbaum 2015-02-25 01:34   좋아요 0 | URL
네.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밤 늦게 갈 곳 없으면 들르게 되네요. 알라딘 서재에.. 오래 전부터 들르던 서재에도 다녀오고요~

라로 2015-02-25 02:04   좋아요 0 | URL
사실,,,,알라딘 서재에서 파스칼 키냐르를 자주(?) 언급하신 분은 님이세요,,,그래서 처음에 찾아가고 좋아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 그걸 기억하시니~~~~.^^
예전 닉네임처럼 참 섬세한 분이세요!!^^

blanca 2015-02-2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수채화가 너무 좋아요. 눈이 시원해지는 느낌.

Nussbaum 2015-02-23 23:11   좋아요 0 | URL
눈이 조금이라도 시원해지셨다니 다행입니다~ blanca 님 댓글을 보니 문득 분홍공주님 생각이 나네요.
얼마쯤 자랐을까.. 그림도 많이 그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