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섭게 추운 겨울이다. 며칠째 먹을 음식물을 구할 수 없었다. 하루종일 눈 속에서 찾아낸 것이라고는 나뭇가지 몇 개 밖에 없었다. 춥고 배가 고프다.  


지난 봄에 열매를 따다 만난 여자는 제법 배가 많이 불러 있다. 다른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거닐고 있었다. 다가가 몸짓으로 뭔가 얘기했고, 곧 나를 따라 이 무리에 들어왔다. 


동굴은 조금 아늑했다. 마침 불씨가 있어 그것으로 모닥불을 피워 놓았다. 배고픔에 먹을것은 없지만 밝은 느낌은 뭔가 좋은 일을 가져다 줄 것 같다.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가 난다. 곧 저 멀리 어떤 동물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두렵다. 달도 사라져 없는 겨울 밤, 춥고 배고프지만 밝은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아늑한 빛을 보며 동굴 벽에 들소를 그려본다. 내일은 우리 부족이 뭔가 덩치 큰 동물을 사냥했으면 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 얼른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 



* * *



어둠과 빛. 해가 떨어지고, 빛이 사라지면 우리는 잠을 자거나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빛이 서서히 많아지면 사람들은 활동을 하며 우리 주변의 물건들은 단정하게 옷을 입은 채 제 모습을 드러낸다. 구석기시대보다도 더 전, 인류에게 빛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앞을 보게 해주고, 두려움을 없애주며, 따뜻함을 전해준다. 전기가 없었을테니 불, 해와 달에서만 전해져 오는 빛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소중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주변의 맹수들, 추위, 배고픔에 시달렸을 그들에게 빛은 참 고마운 무엇.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의 빛 뿐만 아니라 전기가 만들어낸 엄청난 빛에 둘러싸여 있다. 언젠가 그토록 원했던 빛은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 주위에 넘쳐나고 있다. 휴대폰, 백열등과 형광등, 가로등, 네온사인, 자동차의 불빛, 컴퓨터와 TV의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 지금 이 시대에서는 빛이 너무나 강렬하고 많아 오히려 그 빛에서부터 도망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겨우 일어난 아침에 맞이하는 전철의 환한 빛, 일터에서의 눈부신 형광등과 휴대폰의 현란한 불 빛,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온갖 폭력적인 빛들. 

 

나를 끊임없이 심문하는 것 같은 그 빛을 피해, 사물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방에 물끄러미 앉곤 한다. 잠시 눈을 감고 그 먼 옛날의 어느날을 생각한다. 지금은 어둠 속에서 맹수가 나타나지도 않고, 추위로 동상에 걸리지도 않는다. 그 극심한 배고픔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단지 그 내 의지와 상관없이 폭력적인 빛에서부터 도망쳐 태고에 그 아늑함을 전해주는 은은한 빛이 생각날 뿐.


온갖 비개성적 소음이 귀를 피곤하게 하듯, 온갖 비개성적 빛이 나를 시달리게 할 때, 자리에 앉아 조용히 불빛을 켜곤 한다. 어둠이 빛을 빨아들이고 있을 무렵의 어느 저녁, 은은히 퍼져 나오는 약간 노란 빛의 빛. 그 빛을 지탱해주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루체플란이다. 무겁고 둥근 바닥에 휙휙 돌아가는 몸체, 그리고 무수한 모습으로 변형하는 형태, 어딘지 모르게 철지난 것 같으면서도 아직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디테일. 



 


 

http://www.luceplan.com/Prodotti/1/2/138/t/84/Fortebraccio


 


세상에서 벗어난 그 작은 방에서 퍼지는 그 은은한 빛 아래에서 손때가 묻어나는 노트를 펼치고, 수줍은 얼굴빛을 하고 나를 측은하게 바라봐주는 물건들의 인사를 들으면 그 아늑함이 물밀듯 몰려온다. 어쩌면 빛을 내는 그 무엇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길에서 파는 1000원짜리의 그것, 또는 대형마트에서 무심하게 서 있는 그것이나. 하지만 아늑한 빛을 내기 위해 몸체를 잡고, 전원의 손잡이를 올리고, 내쪽으로 그 몸체를 꺾어 빛을 모으는 것과 같은 행동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무엇이 있다. 



* * *



어떤 책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의식을 깨우는 감각의 힘에 대한 프루스트의 성찰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아주 먼 과거에서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했을 때, 인간은 죽고 사물은 부서져 산산조각 난 후에도, 훨씬 연약하나 오래 견디고, 실체를 찾기 훨씬 힘들고, 훨씬 끈질기고, 훨씬 충실한, 냄새와 맛은 유일하게 오랜 시간 남겨진다. 마치 영혼처럼 다른 모든 폐허 가운데 홀로 기억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져지지 않는 작은 한 방울 정수 속에 흔들림 없이, 추억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품는다. 


기억을 깨우는 의미 있는 사물은 '추억이라는 거대한 구조물' 이다. 이는 단순한 시적 해석을 뛰어넘는 사물이 지닌 위대한 치유 능력의 증거이다. D.W. 위니캇은 '중간대상' 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아이가 곰인형이나 담요한테 보이는 애착은 엄마한테 받는 사랑이나 안정감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p. 114-115. 수잔 폴락 - 할머니의 밀대 중 





* * *




 

 

 

 


 

저 먼 옛날 빛이 귀했던 시절, 어느 이름모를 누군가가 빛이 전해다주는 따스함을 그리워하며 두려움에 스스륵 잠이 들었듯 나 또한 언젠가 루체플란 이라는 이름을 잊으며 영원히 잠을 잘 것이다. 하지만 그 몰개성적이며 폭력적인 빛들과는 달리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던 그 빛은 나의 마음에 포근함과 따스함으로 남을 것 같다. 언젠가 프루스트가 마들렌 향을 느끼며 지난날을 회상했듯이, 수잔 폴락이 할머니의 밀대를 보며 어떤 희미한 기억을 생생히 불러냈듯이.


<윤광준의 생활명품>에서 말한 것 처럼 관절이 꺾이는 유형의 프로토타잎에 속하는 이 조명등은 어둠과 빛의 경계를 잘 잡아낸다. 그 빛에서는 회상을, 그 어둠에서는 휴식을 맞이한다. 생각보다는 가격이 많이 나가고, 우리나라에서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은, 아쉽지만 단정한 외관과 충실한 기능성은 그를 상쇄한다. 무엇보다도 하루를 살아가는 가운데 휴식을 주고, 회상의 향기를 덧붙여준다는 점이야말로 "나" 에게는 의미를 담은 물건이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생활품>의 조건이다. 


하루가 떠나간다. 나를 짓누르는 빈곤함,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무수한 눈과 입, 온갖 소음과 빛의 몰개성에서 나는 더 작아지고 볼품없어진다. 구석기시대에 어떤 이가 느꼈을 배고픔, 야생동물의 공격과 같은 두려움과 생존에의 공포 못지않은 사회. 점점 작아지고 어두워지는 내게 위안을 주는 빛. 내게 루체플란의 빛은 그러하다. 






 

Liszt / Consolation D flat major No.3 (S.172) / Pf. Valentina Lisit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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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6-3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환하다고 생각하며 책상에 앉아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두워졌네요. 컴퓨터가 아니라 종이 노트만 보고 있었다면 어두워진걸 진즉 알았을텐데, 컴퓨터 모니터의 빛 때문에 어둠을 못느끼고 있었던거죠.
마지막 세줄의 내용은 갈수록 저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이유중 하나와 일치하네요. 기계, 물질, 편리함, 외형, 결과물, 이런것들이, 생명과 정신과 과정의 우위에 서가고 있는 사회. 일부러 꿋꿋하자고 다짐하지 않으면 참 쉽게 마음이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선택하신 곡이군요. 위로가 필요하니까.

Nussbaum 2013-06-30 22:50   좋아요 0 | URL
hnine님. 댓글을 달다가 문득 옆의 그 바닷가 사진을 보니 마음이 시원해지려고 합니다.
이곳은 더운 하루에 비까지 내려 습한데 계시는 곳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요새 눈이 자주 피로해지는 것 같은데, 왜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니 눈을 너무 혹사시키고 있었더라고요. 컴퓨터, 책을 가까이 했는데 요새는 또 작은 스마트폰 화면까지 들여다 보고 있으니 눈이 쉴 틈이 없던 것이겠지요.
오늘부터라도 좀 눈을 종종 쉬게 내둬야겠습니다.

..

도서관에서 뭘 하다가 눈을 좀 감고 잠시 구석기 시대의 벽화를 떠올렸습니다.
무색무취의 형광등 빛 아래에서만 있다보니 집 책상에 놓여 있는 루체플란의 빛이 갑자기 생각나더라고요.
조용한 방에서의 포근한 빛.

그때의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그 그림을 그렸을까 싶었습니다. 그때가 더 살기 힘들었으되, 외려 생각은 많이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너무 저 개인적인 느낌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청년들의 느낌이겠지만 나와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이 제 머리 위에 늘 켜져 있는 형광등 같아 보였습니다.

자연을 다스려 얻은 문명의 이기, 짜여진 사회 속 삶. 때로는 그 언젠가의 배고프되 포근한 빛의 느낌으로 다가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맹렬한 칠월을 앞두고 언젠가 어디에서 제가 올린 곡. 리스트의 위로를 다시 한 번 들어보네요. 감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숲노래 2013-06-3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빛 가슴에 담아
좋은 하루로 즐거이 마무리지으셔요

이제 칠월이 되는군요

Nussbaum 2013-06-30 22:33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감사합니다.
갑자기 비가 와서 좀 습한 밤인데, 잘 지내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맹렬한 칠월이 기다리고 있지요.
함께 도시의 폭염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과일과 곡식이 그러하듯 저도 잘 견뎌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