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삶이 짧은 여행이었다고 부를 수 있는 작곡가 슈베르트. 그는 서른을 갓 넘기고 가느다란 발자국 소리를 내며 바람을 스쳐 지나갔다. 베토벤을 매우 존경했던 그는 "가곡의 왕" 이었으나 뿐만 아니라 현악 사중주, 교향곡, 피아노 소나타 등에서도 비할 바 없는 애잔함과 유머, 진지함과 회한이 담긴 작품을 남긴 작곡가 이기도하다. 


그만이 남길 수 있는 깊은 감정선의 골이 느껴지는 작품가운데에서도 1828년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 은 그가 사망한 해에 남긴 곡으로서 그의 최만년의 작품이다. 듣고 있으면 세상의 끝을 아주 가벼이, 그러면서도 아주 무겁게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곡은 진지하고 비장하면서도 어떤 뜻 모를 가벼움도 느껴진다.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답게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연주하고 그 연주를 음반에 담고 있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한의 시간 속에서 무심히 구름 흘러가는 어느 한적한 시골길, 그곳에서만날 수 있는 조금 쓸쓸해 보이는 눈빛의 노인을 보는 듯한 빌헬름 켐프의 1967년 DG녹음, 청량한 한낮의 그림자가 주는 명암 속에서의 한적함이 느껴지는 브렌델의 1971년 필립스 녹음. 


이 뿐만 아니라 라두 루푸, 클라라 하스킬, 디터 체흘린, 안스네스 ... 등 다양한 연주자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며 또는 숨기며 슈베르트의 아픈 발자국에 동행하고 있다. 시간을 담은 예술인 음악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일 수 밖에 없으니, 각각의 연주는 듣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겠다. 


이 곡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연주자가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가 아닐까 하는데 내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는 이 곡의 음반을 적어도 네 종 이상 남겼다. 1961년 (브릴리언트), 1972년 (올랭피아), 1972년 (프라하) 등이 그것인데 모두 뛰어난 연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내가 확인한 정보가 맞다면 첫머리에 크게 올린 음반은 1972년 9월 프라하 녹음으로서 바로 위에 올린 음반 가운데 맨 마지막 박스에 들어 있던 음원을 담고 있다. 그간 이 박스물은 절판 상태였고 중고가격은 아마존에서 수백, 수천달러로 거래가 이뤄지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프라하 녹음이 하나 둘씩 SACD 포맷으로 나오고 있다. 전설 속 연주를 음반으로 쉽게 만나게 되었다. 


이 프라하 녹음을 기억을 더듬어 위의 나열한 음반들과 비교해 들어 보았을 때 (브릴리언트 보다) 약간 더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음질탓도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명암대비가 덜 한 느낌이다. 피어나듯, 서서히 그러면서도 진한 어둠을 뿌리는, 약한 조명을 켜놓고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던 리히터의 해석은 크게 변함이 없으되 관조하는 느낌이 더 보인다. 


그대로 발을 담가 빠지게 만들며 곡을 차분하게 이끌어 가면서도 그 큰 테두리 속에서 마음의 결을 흔드는 것을 잊지 않는 그의 모습은 다른 피아니스트와 분명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리히터의 손과 발에 감탄하는지 이 음반에서도 그 모습은 찾아 볼 수 있다. 







Paul Klee, <Pastorale (Rhythms)> 1927, Tempera on canvas mounted on wood




조용하게 시작하는 도입부를 지나, 세상을 조심스레 어루만져주는 느낌의 곡이 흐를 때면 클레의 천진난만함을 담은 그림 속 음표들이 떠오른다. 세상의 시끄럽고 복잡한 일에서 잠시 손을 놓고 자신의 마음 속 장면에 몰두하게 만드는 추상미술의 장르에서 느껴지는 순진함과 그 이면의 고뇌가 들려온다. 


작곡한 음악의 전달자 라는 사명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리히터의 이 음반은 한껏 높아지는 소음과 밝음으로 가벼워지는 발걸음 뒤로 조금씩 사그러들어가는 어느 골목의 그늘 속 어둠을, 따뜻함이 미묘하게 섞여 풍기는 바람 속의 어느 북풍의 낮은 음을 내게 전해 준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수줍고 애달픈 발자국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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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3-1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69(네번째줄) 가 아니라 960인거죠?
마침 969도 한번 들어보았더니 쓰신 글의 분위기와 확연히 달라서 금방 알겠네요^^

저는 소리를 듣는 동안은 소리만 들리던데, 님의 글에서는 항상 그림과 음악이 공존합니다.
시끄럽고 복잡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도록, 세상을 조심스레 어루만져주는 음악이라니 참...좋지요?

Nussbaum 2013-03-10 18:50   좋아요 0 | URL
hnine 님 꼼꼼하게 읽어주셨네요 ^^
지적해주신대로 제가 오타를 냈습니다 ~

요즘은 예술을 사회의 맥락속에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대세인데 너무 그런 면에서 해석하다보니 가끔은 음악, 미술 그 자체로만 들여다 보는 시선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작가의 내면세계나, 의도에만 집중해 듣는 음악도 때론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늘 한결같이 자리에서 열심히 나아가시는 모습보면서, 덕분에 가끔 남기는 페이퍼나 리뷰의 이 공간이 덜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어딘가 산책 다녀오곤 하는데 오늘 달아주신 댓글은 산책길에 마주치는, 왠지 모를 삶의 여유가 느껴지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빛 같은 느낌입니다.
새삼스레 이런 공감의 띠도 참 소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역시나 첫 댓글 !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