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텔로 <성 조르주> 1415년, 대리석

 

<성 조르주>는 고대 이후 처음으로 제작된 입상으로서 고전적인 '대응 균형' 자세의 완전한 형식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작품이다. 도나텔로는 이 한 점의 작품을 통하여 고대 조각의 핵심적인 특징을 완벽하게 실현해 내고 있다. 즉 그는 인간의 신체를 움직임의 잠재력을 가진 하나의 조절된 '구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신체에서 발산되는 억제된 에너지는 저 멀리 지평선으로부터 접근해오는 적들을 응시하는 눈빛을 통해 방출되는데, 용을 죽일만한 용기까지 가졌던 이 성 조르주는 '새로운 아테네'의 자랑스럽고 영웅적인 수호자로 칭송된 인물이었다.

 

잰슨 서양미술사, 249-250 

 

 

서양미술사적 흐름에서 고딕 시기를 지나 르네상스가 발아할 무렵, 피렌체에서 도나텔로는 그리스의 조각들이 가져온 커다란 혁신성을 르네상스에 전해주었다. 대응균형은 "아르카익 스마일" 대신 진지하고 사색적인 표정과 콘트라포스토를 통해 역동성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도나텔로는 그 정신성과 물질성을 르네상스로 들어가는 문에서 다시 응집시켰다.

 

잰슨이 그의 책(서양미술사; Histroy of Art for young people)에서 소개한 것처럼, 그리 많은 동작을 취하지 않고 단지 약간의 몸의 뒤틀림만을 가미한 몸체에 꼿꼿이 세우고 날카롭게 응시하는 표정은 그리스 고전기의 이상적인 모습에 헬레니즘과 로마초상조각의 감정성까지 포함해 보는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이 작품의 경우 조각상 아래의 부조(릴리에보 스티아치아토(rilievo stiacciato, 평부조기법) 를 보면 대략 이 조각상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현재 대부분 통용하고 있는 예술가의 자의식이 높아가고 있던 그 시대에 제작한 이 조각상의 작품 의도나 해석의 근거는 학자별로 대부분 유사하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유형의 조각상의 분위기를 서양 고전 음악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무겁고 진지하며 사색적이고, 무엇인가 거대한 음의 흐름이 큰 줄기를 이루고 도도하면서도 감정을 고양시키는. 그러면서도 고전미를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 떠오른다. 아마도, 적어도 나의 생각으로는 장르면에서는 교향곡이, 인물면에서는 브람스가 먼저 떠오른다.

 

 

 

 


 

 


브람스의 교향곡은 모두 네 개이다. 베토벤의 교향곡들이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상황에서, 혹은 그렇게 작곡가 스스로 믿었던 까닭에서인지, 정확한 것은 그만이 알겠지만 첫 번 째 교향곡을 작곡하기까지는 2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2, 3번은 상대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하게, 1, 4번은 영웅적, 비극적 느낌이 든다.

 

1번 교향곡의 경우 마치 네 악장이 소설의 기승전결을 보는 것 같은, 베토벤의 영향을 감지하게 하는 부분도 보이지만 베토벤의 3번 영웅교향곡이나 9번 합창 교향곡과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 영웅교향곡보다는 강렬한 맛이 덜하고 중후한 맛이 있다. 합창교향곡보다는 짧고 거대하진 않지만 보다 간결하면서도 뭔가 톱니바퀴처럼 착착 굴러가는 느낌이 든다.

 

오래전부터 브람스의 교향곡에서 명반으로 사랑받고 있는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와 필하모니아의 1950년대 레코딩은 한 음 한 음 짚어가면서 브람스의 고뇌의 여정을 따라간다. 마치 저 멀리 몰려 오고 있는 적들 혹은 용을 향한 <성 조르주>의 응시처럼 서두르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결전을 준비한다. 어쩌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그 모습은 너무 차분하다.

 

비록 모노 레코딩이지만 1번 4악장의 그 유명한, 거대한 물결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상승점을 찍는 과정 속에서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녹음과 가까이에는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 요훔, 뮌시등이 있겠고, 이후 카라얀, 반트, 번스타인 등의 녹음을 꼽을 수 있겠지만 클렘페러의 전집은 약간 거친 감이 있으나 브람스의 음들을 호소력 있게 차분히 전해준다.

 

 

 

 

 

 

 

 

 

 

몇 해 전에 나왔던 첼레비다케의 EMI 녹음 전집 박스물처럼 클렘페러도 한꺼번에 이렇게 묶여 나오고 있다. 상대적으로 첼리비다케보다는 적은 주목을 받고 있는 감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예술에 있어 모더니즘의 시대는 가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성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지만 클렘페러가 남긴 음악은 시대가 흘러도 그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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