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길을 가다 잠시 멈춰 서서 본 어느 풍경

어느 기억이 있고 이어진 긴 생각이 있었던 어떤 밤

잠시 멈춤, 그리고 짧은 낮 잠깐

 

그것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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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엘레지

 

- 비스와바  쉼로브르스카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붙들어 완전한 내 소유로 만들 순 없다.

 

가까스로 떠오른 불완전한 기억,

깊은 땅속에서 애써 끄집어낸,

몸통과 머리를 잘못 맞춘 오래된 여신의 조각상처럼.

 

사모코브에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모른다.

 

파리의 정경은

루브르에서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까지

가물가물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생마르탱의 가로수 길,

그곳의 계단은 갈수록 페이드 아웃.

 

내 기억 속에서 '다리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고작 다리 한 개와 반쯤 남은 또 다른 다리의 영상.

 

가여운 웁살라에는

무너진 대성당의 잔해.

 

소피아에는 얼굴 없이 몸통만 남은

가여운 무희가 있다.

 

떨어져 나온 얼굴에는 눈이 없고,

떨어져 나온 눈에는 동공이 없다.

결국 떨어져 나온 동공은 고양이의 몫.

 

새롭게 재건된 협곡 위에서

카프카스의 독수리가 날고 있다.

태양의 황금빛은 전혀 사실적이지 않고,

바위는 엉터리 모조품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실은 잠시 동안 통째로 빌려온 것이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을 붙들어 완전한 내 소유로 만들 순 없다

 

더 이상 재생도, 복원도 불가능하다.

미세한 섬유질이나 모래알,

물방울이 만들어낸 세밀한 풍경일수록 더한 법.

 

작별을 내포한 환영의 인사는

단 한 번의 눈짓으로 족하다.

 

과잉이건 결핍이건 간에

그저 고개 한번 까닥이면 그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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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8-28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곡 정말 정말 좋아하는 곡이랍니다.
단, 자주 안들으려고 하는 곡이기도 해요. 마음을 천근 만근 아래로 무너뜨려서요.
아껴서 듣는 곡을 지금 듣고 있습니다.
저 그림은 물론 Nussbaum님이 그리셨을텐데 그림 사이즈가 얼마나 될까요?
정말 멋집니다. 채색 안한것도 그대로 좋고, 파랑과 노랑이 들어간 위의 그림도 좋고요.
쉼보르스카 시 속에 등장하는 도시가 도대체 몇개인가 헤아려봅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에도 다리가 많은가봐요. 저 이번에 다녀온 피츠버그도 다리의 도시라고 불린다던데요.

Nussbaum 2019-08-28 21:35   좋아요 0 | URL
엊그제, 어제 퇴근 후에 그림 그리면서 꽤 많은 음악을 들었는데 하나같이 이 그림의 느낌을 대변하는 음악이 없어서 놀랐습니다. 쉼보르스카의 시는 제가 이 밤풍경을 봤을 때랑 맞아 떨어졌는데 음악을 뭘로 할지 고민하다 결국 이 음악까지 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음. 이 그림은 도화지 8절에 그렸으니 대략 35x26 센티미터 정도 될까 합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길을 걷다 문득 발견한 풍경. 수채로 그리려다 펜화로 마무리했네요. 마무리하니 펜과 마카로 그린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은 차분한 느낌이었고, 어딘가 어둡지만 조금은 밝은 그런 느낌이어서 말이지요. 코팅해서 어딘가 걸어두고 계속 보고 있는데 여전히 늘,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제가 본 풍경의 느낌과 꽤나 일치해서 다행이네요.

얼마 전 가죽으로 된, 꽤 비싼 여권지갑을 구매했습니다. hnine님 여행하신 밤 사진을 보면서 조금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떠나게 될 어느 곳의 밤풍경을 기대해 봅니다.

그 때는 쉼보르스카와 hnine님의 댓글을 기억하면서 뭔가를 눈에 담겠지요.




그나저나 댓글쓰다 밖에 잠깐 나갔다 왔는데 바람이 참 시원합니다.
이제 가을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ㅎ

blanca 2019-08-29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ussbaum님 그림이 나날이 더 좋아지네요. 깊이도 넓이도 다요. 쉼보르스카 시와도 잘 어우러집니다. 가을이 오려고 하니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가 싶어 마음이 좀 그렇네요.

Nussbaum 2019-08-29 12: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

이렇게 마실다니는 것처럼 뵙네요. 이젠 밤도 낮도 바람도 햇빛도 다 가을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어서 굳이 가을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이 듭니다. 아마 조금 빨리 올 해 나머지가 지나겠지요.

요새 사진기를 하나 사서 그 사진을 보니 디테일도 색감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좋으네요. 그림은 매일 그리면 참 좋을텐데 그러질 못해서 아쉽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조금 나아졌다면 아마 디테일이 더 담긴 사진(또는 눈)이 있고 뭐라도 그려보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며칠 어제 올린 사진하고, 그림, 시가 계속 생각나 무한 반복중입니다.

애써 서로 잘 어울린다고 합리화 중일지도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