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그림 :


몇 해 전 혼자 설악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 설악산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몇 정거장을 잘못 간 탓에 입구까지 가는데도 한 시간을 넘게 걸었다.

 

한 겨울의 중심, 차가 한 대도 없던 주차장에서 바라본 설악산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다시 한 달 후에 그림을 그렸고 액자에 넣었다.

 

숨이 찰 정도로 외롭게 걷다가 어느새 나타난 반가운 모습. 하늘은 더 파랗고, 건물들은 더 따뜻했다. 나무와 숲은 사진보다 훨씬 더 생기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장면이 의도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기억으로 남는다. 사진은 기록으로 그림은 기억으로. 기억과 기억이라는 왜곡의 간격에서 나라는 사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발견한다.


그 어떤 좋은 책이나 타인의 사진에서 좋은 사진을 발견한다 해도 기억과 왜곡의 간극이 주는 나의 시선과는 바꿀 생각이 없다. 나에게 지금, 사진과 그림은 그런 존재

















구름 : 


구름을 사랑하지만 이 책을 쓴 저자만큼 사랑하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구름을 너무 사랑하여 결국 책을 쓰게 된 사람.



"오래지 않아 회원들은 내게 일반 독자가 읽을 만한 구름 관련 서적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찾아보기는 했으나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이상한 그림책만 있지, 적당한 그림책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결국 <구름 읽는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구름이 보여주는 별나고 즐거운 온갖 특성들을 안내해주는 길잡이다.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보내준 사진도 함께 실었다. 이 책은 기상학 교과서가 아니다. 기상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많이 아는 사람들이 쓴 뛰어난 교과서가 이미 많다. 이 책은 그런 교과서들보다 더 진지한 책이다. 


이 책은 아무런 걱정도, 목적도 없이 그저 끊임없이 삶을 긍정하며 즐기는 취미활동인 구름추적에 바치는 찬양이니까." 


개빈 프레터피니 <구름 읽는 책> 서문 중에서. 



이 책을 보며 여름을 좋아해야 할 까닭 1을 추가했다.










맥주 : 


Blanc 1664 / 하이네켄 


여름이 되면 맥주는 보통 다른 계절보다 5-10% 이상 판매가 많아진다고 한다. 


블랑 1664 + 하이네켄 / 보통은 Tika 감자칩과 함께 먹는다. 때로 달걀 후라이와 함께.  



문득 맥주가 가장 맛있는 시간은 입추와 말복 사이 그 어디 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










밤 : 


나는 밤과 새벽 그 어디즈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가끔 밤마중을 떠난다. 익숙한 길이지만 매일 달라지는 밤의 얼굴이 좋다. 


6월의 설익은 풋내나는 밤냄새도 좋고, 7월의 깊은 습도의 풍성함. 8월, 말복의 그 안타까운 시선도 좋다. 


1월... 2월... 12월까지. 모든 밤은 다르고, 또 그 밤을 모두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싶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대해 더 알고 싶다. 


밤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밤은 무엇을 하는가


기차는 무엇을 하는가


좁은 골목은 무엇을 하는가


물안개 속 강은 무엇을 하는가


물을 건져 올리는 그물


손 닿지 않는 바다와


하늘은 무엇을 하는가



사과는 썩고


피부약은 뚜껑 밖으로 흘러넘치고


내의는 뒤집히고


구두는 떠나가고




어둡던 보관 창고가 


한꺼번에 열려버린 그날




그 밤에 비는 무엇을 하는가 


눈송이들은 무엇을 하는가


기차는 무엇을 하는가


기차를 탄 밤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세상은 무엇을 하는가


세상이 무엇을 할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내가 무엇을 할 때 


세상은


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김경미 시 <밤, 기차, 그림자>














Sometimes it's hard to be a woman
Giving all your love to just one man.
You'll have bad times
And he'll have good times, 
Doin' things that you don't understand


But if you love him you'll forgive him,
Even though he's hard to understand
And if you love him oh be proud of him,
'Cause after all he's just a man 


Stand by your man,
Give him two arms to cling to,
And something warm to come to 
When nights are cold and lonely
Stand by your man,


And show the world you love him
Keep giving all the love you can
Stand by your man
Stand by your man,


And show the world you love him
Keep giving all the love you can
Stand by your man







88일은 입추. 즐겨 듣는 라디오의 오프닝 멘트는 대략 이랬다


여름의 끝자락. 아직 말복을 앞에 두고, 등장하는 입추.

 

해마다 등장하지만 기적 같은 절기. 반갑고 유쾌하고, 반가운 시 같고 유쾌한 농담같은.

 

기적 같은 일. 다음 계절을 기대할 수 있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여름의 계절에 숨은 그림처럼 숨어 있는 가을을 느껴보는 저녁

 



나는 이 멘트에 조용히 혼자 이렇게 화답했다.



 

반가움과 그리움. 짧고 강렬한 인사 같은 반가움 뒤에 등장하는 시간의 연속.

 

그것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감정, 그리움

 

강렬함이라는 만남 뒤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만남의 의지가 필요하고, 의지로 인해 생겨나는 의미, 그리고 그 의미의 공통분모.

 

그리움이라는 건 바로 그런 시간이 있음에 만들어지는 것.

 

때로, 그리움은 반가움에서 만들어지는 기적과 같은 것.






아마도 한 낮이 주는 강렬함에 지친 누군가가 이 밤, 나의 시간과 평행을 걷고 있다면 


여름이 주는 기록과 기억에서, 어느 높게 떠가는 유쾌한 구름처럼, 여름에 더 많이 팔린다는 맥주처럼, 이제 살짝 창문을 조심스럽게 넘어오는 가을 바람처럼, 카를라 브루니(carla bruni) 의 목소리 처럼  


그렇게 기분 좋은 밤을 보내며, 함께 여름도 즐거운 인사와 함께 보내주면 좋겠다는 생각. 


사진과 같은 기억이 즐겁고 유쾌한 그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비록 슬픔과 외로움과 자책의 밤을 보내고 있다 할지라도 


잠깐이라도 가을이 오는 기적의 시간을 즐기고 반가워했으면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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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1 0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1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