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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해줘, 구름아> 박정대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피운다. 삶이라는 직업

커피나무가 자라고 담배 연기가 퍼지고 수염이 자란다. 흘러가는 구름 나는 그대의 숨결을 채집해 공책 갈피에 넣어둔다. 삶이라는 직업 

이렇게 피가 순해진 날이면 바르셀로나로 가고 싶어. 바르셀로나의 공기 속에는 소량의 헤로인이 포함되어 있다는데, 그걸 마시면 나는 76초의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삶이라는 직업 

약속해줘 부주키 연주자여, 내가 지중해의 푸른 물결로 출렁일 때까지, 약속해줘 레베티의 가수여, 내가 커피를 마시고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고 한 장의 구름으로 저 허공에 가볍게 흐를 때까지는 내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 *


 

한 시인의 시집을 읽다 생각했다. 회사에서의 일과 일상의 일이 뒤바뀌어 일상의 삶이 직업이 되면 어떨까 하고.

 

처음에는 마냥 좋아하다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나름의 또 어려움이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다 잠깐 자신의 서재를 막장이라 표현한 김훈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나는 어떤 도구를 갖고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생각해보았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오면서 꽤 많은 것들을 버렸지만 견물생심과 합리화를 통해 열심히 물건을 채워가고 있는데, 과연 그것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좀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 * * 



꽃 : 올 봄 집 옆에 핀 벚꽃. 

꽃을 좋아하게 되었다. 









바람 : 바람이 물건이 될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모든 종류의 바람을 좋아한다. 










노을 :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의 시간.

노을을 볼 때는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나는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나무 : 나무로 된 모든 것을 사랑하며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상, 스피커, 앰프, 각종 그림도구 거의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전주 최명희 문학관에서>












바다 : 바다를 꽤 좋아한다. 

만일 일년에 한 번만 여행할 수 있다면 반드시 바다로. 


<며칠 전 바다에 다녀온 바다> 









만년필 : 10년 동안 써온 만년필 두 개와 최근에 새로 산 만년필 하나.


왼쪽부터 라미 cp1 / 라미 사파리 라임 / 라미 2000.


만년필의 가장 큰 장점은 생각을 노트에 적을 때 가장 빨리 전달할 수 있는 도구라는 점에 있다.

마치 노트에 원래 생각이 적혀 있었다는 듯 적혀진다. 이것은 마법과 같아서 다른 도구로는 전혀 되지 않는 것.

써두었던 노트를 다시 읽을 때도 만년필로 적었던 글이 가장 만족스럽다. 




그리고.. 몽블랑. <마에스터스튁 르 쁘띠 프린스 솔리테어 듀에> 라는 긴 이름을 가진 만년필.










턴테이블 : 레가 RP6

스피커 : PROAC

앰프 : 온쿄 / 그람슬리


엘피로 듣는 음악, 확실히 덜 피곤하다.  










선풍기 : 발뮤다 그린팬 S

무선으로 사용 가능하며 쓸데 없는 버튼이나 장식이 없다. 

바람이 황당하게 작게 분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자연스러운 바람이 온다는 생각. 








감자칩 : 감자의 그 맹한 맛이 좋다. 

고구마의 그 달달함이 끌리지 않아 과자는 거의 감자칩만 먹게 된다.







라디오 : 세상의 모든 음악


오프닝멘트를 매일 노트에 적고 있는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을 듣고 있으면 라디오를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진행자의 멘트와 음악, 그리고 깊은 사유의 결과물까지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 프로그램.








카메라 : 소니 RX1RM2


언젠가 사진을 찍어 나중에 그림을 그리려 확대해 보니 정확한 색감과 형태를 알 수 없었다. 

스냅사진을 주로 찍어서 가볍고, 렌즈 교환이 필요하지 않은 작은 카메라가 필요함. 에 의한 심한 합리화 






* * * *



언젠가 라디오에서 먼 길 떠나는 사람들의 배낭 무게가 그 사람이 짊고 사는 인생의 무게라는

말을 들었다당장 내 주위를 둘러보면 짐이 참 많은 걸 보면서 내 인생의 무게가 꽤 많이 나간다는 생각에 잠시 측은해지기도.

 

"당신이 무엇을 ... 말하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게요시리즈가 참 많다따지고 보면 아무 것이나 다 붙여도 이 무엇이 시리즈는 완성할 수 있다무엇을 먹는지무슨 책을 읽는지쉬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무엇을 취미로 하는지 등등.

 

요새 내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정의해보려 하고 있는데 내가 쓰고 있는 물건들이 곧 나의 삶의 대변인이 아닐까 싶었다물건 그 자체뿐만 아니라 물건을 사용하는 태도와 그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포함해서.







* * * * * 


이 카테고리 <물건> 시리즈는 계속 이어집니다.


음악은 세상의 모든 음악을 통해 만났던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의 <가을이 오면>


덥고 습하지만 약 보름 후면 말복이네요. 


말복이 지나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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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7-26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우리 나라 가요 <가을이 오면>이네요.
더운 날 선곡으로 정말 멋집니다.
이 <물건> 카테고리 좋아요. 저도 생각해본 적 있는 카테고리인데, 언제부터 만들어만 놓고 빈 카테고리로 있는지 꽤 되었네요.

Nussbaum 2019-07-26 22:10   좋아요 0 | URL
에어컨 켜놓고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청소하고, 책 읽고, 맛있는 거 해 먹고 하다보니 밖의 세상이 어떤지 몰랐습니다. 잠깐 쓰레기 버리러 나갔는데 너무 덥더군요 ㅎ

이런날 어디선가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이 주어지길 기원했습니다. 우리나라 가요들을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가 편곡해서 연주한 곡인데, 처음에 라디오에서 듣고 참 좋아서 앨범도 구입했습니다. 원곡과는 조금 다른 감성도 좋고, 비슷한 감성도 좋고 그랬는데 LP를 구하지 못한 것이 좀 아쉽기도 합니다.

저도 이 카테고리에는 참 오랜만이어요. 계속 여기에 물건에 대해 써야지 했는데 그간 버리고 사고, 버리고 사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버릴거 이젠 거의 버려서 이 카테고리에 정리된 물건들을 나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 집중할 수 있을 때, 한 2주 정도 물건들 좀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요 ^^

그나저나 hnine님. 몸 안좋으신 거라면 얼른 나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2019-07-27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7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연 2019-07-27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음악도 이 여름방학을 더디게 만들어주네요.

Nussbaum 2019-07-27 23:25   좋아요 0 | URL
움.. 그런가요?? ㅎ

여름방학이라니.. 어떻게 아셨지 ㅎ 하는 마음에 흠칫하다가 아! 수연님 여름방학인가? 하고 괜히 웃음지어 봅니다.

여름방학 잘 즐겨보시지요 !!

2019-07-27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7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