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뜨기에 관하여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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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접하는 이영도 작가님의 저작이다.


이영도 작가는 인터넷 이전의 멀티다중접속 온라인 매체였던 "PC통신" 시절 "하이텔" 이라는 서비스(지금으로 따지면 포털 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다.)에서 활동하던 소설가로 이우혁, 전민희 등과 함께 대한민국 1세대 장르소설의 문을 활짝 연 인물이다.


이 당시에 집필했던 [드래곤 라자] 는 서양 판타지인 "D&D(Dungeons & Dragons; TRPG라는 보드게임의 설정과 스토리를 담고 있는 방대한 세계관)" 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유려한 스토리 텔링과 생생한 인물묘사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폴라리스 랩소디]와 [드래곤 라자]의 후속편인 [퓨쳐 워커]는 대여점이 난립하며 판타지 소설이 쏟아지던 소위 "양판소" 시절에도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성을 인정받으며 바야흐로 "판타지" 라는 장르가 문학(비록 "경계문학" 이라며 모호하게 수식됐지만)으로 자리잡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영도 작가는 장르 문학 스토리 텔링의 기본기 중 하나라고 언급되는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들기" 에 매우 능숙한 작가이다.


실제 우리가 사용하는 속담을 비틀어 드래곤이나 오크 같은 상상의 존재들을 끼워넣거나 평범한 직업들에 뜻밖의 종족들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등 독자들을 설득하고, 현혹시키는 데에 탁월한 기술을 선보인다.


이는 이후 D&D의 세계관을 완전히 탈피하고 동서양의 신화속 세계관을 차용한 [눈물을 마시는 새] 와 [피를 마시는 새] 에서 극대화된다.


이영도 작가의 이러한 능력은 장편에서 폭넓게 활용되지만, 중단편에서도 제법 파괴력을 발휘한다.



이영도 작가는 [피를 마시는 새] 이후 3권 이상의 대하 장편은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최근까지 꾸준히 매 해 한두편 이상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은 다양한 웹진에 소개되는 단편들이지만, 1권 이내의 중장편들도 존재한다.



이 작품집 [별뜨기에 관하여]는 표제작을 비롯, 이영도 작가가 2000~2012년 사이에 발표한 10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첫 작품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를 시작으로 "구세주가 된 로봇에 대하여", "별뜨기에 관하여", "복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 이렇게 다섯작품은 세계관을 공유하며 느슨하게나마 연작의 성격을 갖고 있는 SF소설들이고, 나머지 다섯 작품인 "나를 보는 눈", "아름다운 전통", "전사의 후예", "SINBIROUN 이야기", "봄이 왔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들이다.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부터 가장 최근의 작품까지는 거의 10년에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지라 다양한 느낌을 맛볼 수 있다.


낯선 것들을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다양한 스킬들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작품집의 모든 작품들이 고르게 높은 수준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불과 몇페이지에 불과한 엽편도 있고, "복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는 이영도의 이름값 치고는 평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여전히 수준이 높고, 장르적 문법의 스킬도 무척이나 뛰어나다.



모든 작품의 감상 기록을 적기보다는 깊은 인상을 준 몇 작품만 추려보겠다.


우선, 표제작인 "별뜨기에 관하여" 를 이해하려면 첫 작품인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통일 직후, 혼란기 한국의 한 언어학자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지구를 방문한 범은하 문화교류촉진위원회, 줄여서 '문교촉위'의 외계인들은 인류가 단계적으로 우주로 진출할 수 있게 도와주려 한다. 그들은 일단 중개자의 입장에서 인류와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외계 문명을 정해주고, 서로 '동화' 한 편 씩을 교환하게 한다. 그 첫번째는 "권티다" 라는 문명의 동화였으나 그들의 언어는 복잡한 구조의 화학식이었고, 인류는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는 도중 단층을 자극할 정도의 폭발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 중에 지구에는 외계문명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생겨났고, 문교촉위는 권티다와 인류의 교류를 취소하고, "위탄" 이라는 문명과의 교류를 재추진한다. 저명한 언어학자인 주인공 화자는 한국어로 위탄인의 언어를 번역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마치 [유년기의 끝](아서 클라크) 과 어슐러 르 귄의 "해인 시리즈", 그리고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를 비롯한 다양한 SF 걸작들의 오마쥬 같은 작품으로 짧은 호흡 안에 다양한 내러티브를 함축시키고 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 까지 다섯작품은 연작의 형태로, 제목만 봐도 뭔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중, 표제작인 "별뜨기에 관하여" 는 첫 작품에 등장했던 위탄인과 지구인이 동화 교환을 넘어 제법 충분한 교류를 하기 시작한 이후의 시간대를 다룬다. 어쩌다 보니 거대한 우주 화물선에서 지구인과 위탄인이 동행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문교촉위의 의도대로 인류는 건강하게 성장하여 심우주로 진출하게 되었다.


거대한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들은 모래사장의 모래 한톨 정도였기 때문일까. 문명과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전쟁 같은 일은 이 세계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문교촉위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구절들이 등장한다. 그 결과 엄격하게 문명간의 접촉을 제한하고, 관리하기로 한 것일 터. 위탄인과 인류는 한 우주선에 동승해도 될 정도로 밀접한 사이가 되었지만, 이 두 문명은 너무너무 달랐고, 신체적 특징은 인간쪽이 너무너무 불리했기 때문에 화자인 주인공은 엄청난 불편을 겪게 된다.



이제 막 심우주에 진출하게 된 인류와 이미 어느정도 수준높은 진출을 완성한 위탄인의 티키타카는 시종일관 위트가 넘쳐서 무척 읽는 맛이 좋았다.


그 중, "별뜨기" 는 점성학자에 SF적 상상력을 더한 직업으로, 인류가 심우주에 진출하게 되면서 "자식을 원하는 별자리 밑에서 태어나게 해줄 수 있다" 는 신박한 아이디어로부터 탄생했다.


주인공 화자는 문교촉위의 제안으로 특정한 행성에 사는 한 문명을 위해 "별을 뜨는" 다소 황당한 임무를 받게 된다.



이 짧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이 신박한 아이디어에 감탄해서 육성으로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두세번 더 완독했다.


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위탄인과 반드시 잠을 자야하는 지구인의 동행으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 가득한 티키타카로 시작한 이야기는, 오히려 너무나 달랐기에 지구인인 화자를 이해하게 되는 위탄인의 통찰로 매조지된다.



이 짧은 이야기가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온 이유다.



인류가 먼우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선도해서 이끌어줄 초월적 존재가 필요하다는 가설은 수많은 SF작품들이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페르미의 역설' 부터 파생된 대여과기 이론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처럼 읽히기도 하는 "문교촉위" 는 존재 자체가 데우스 엑스마키나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아이디어였다. 물론 어슐러 르 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이다.



우주.


나는 이 무한한 공간을 상상하면 공황에 가까운 공포에 빠져들곤 한다.


그리고 이 무한한 공간이 오직 "무無" 로 가득하다면 더더욱 공포스럽다.


지구와 인류는 무한에 가까운 무의미한 공간 안에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나" 는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가.



SF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무한에 가까운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상. 상상. 비록 망상에 그칠 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저 발버둥치는 자위행위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이 무한한 우주 속에, 우리처럼 밤하늘을 바라보며 상상력을 펼치는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그 형태가 어떠하건. 바이러스 같은 작은 존재부터, 행성처럼 거대한 존재까지.


무한한 우주에 대해 경외감과 공포를 갖는 또다른 존재들이 있으리라는 상상만 해도, 나는, 이 공황에 가까운 공포를 간신히 극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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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그라운드 - 끝나지 않는 전쟁, 자유세계를 위한 싸움
H. R. 맥매스터 지음, 우진하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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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戰史에 해박하신 블로그 이웃 한분이 있다. 한창 제2차 세계대전사에 관심이 있던 무렵, 많은 글들을 찾아 다니다가 태평양 전쟁에 대한 글들을 읽게 됐고, 블로그를 타고 타고 들어가다가 태평양 전쟁은 물론, 중일 전쟁 등 아시아 근대 전사를 중점적으로 포스팅을 하시는 분의 블로그를 발견하게 됐다. 

바로 욱이님의 '팬더아빠의 전쟁사 이야기(https://blog.naver.com/atena02 )라는 블로그다. 한국전쟁에 대한 최근 공개된 자료와 관련된 글들도 많다. 직접 저술하신 책도 있고, 감수하신 저서들도 많은 분인데, 이 책은 마침 이 블로그를 통한 서평 이벤트로 출판사에서 받은 책이다. 

문학동네 그룹의 인문서적 임프린트인 교유서가와는 개인적인 인연도 있는 편이라, 이렇게 한다리 건너 받게 되니 참 재미있는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맥 매스터는 외교안보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물론, 트럼프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다가 1년만에 당한 "트위터 해고" 로 더욱 알려지긴 했지만, 대북정책에 대한 대표적인 강경파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볓정책을 비판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유화책을 비난했던 일화도 있고, 중국, 러시아, 중동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던 인물이다. 이런 그의 성향은 이 책의 서문에서부터 드러난다. 

  

이 책은 챕터별로 러시아, 중국, 남아시아, 중동, 이란, 북한 을 거쳐 최종 결론으로 향한다.

리뷰 기한인 "한달" 안에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꺼운 첫인상이지만, 우려만큼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훠얼씬 쉽게, 정말 잘 읽힌다.

이 책은 700페이지짜리 국제 보고서가 아니라, 에세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평생 전쟁터를 찾아다녔던 군인의 경험이 정부의 국제외교관계 요직으로 근무하며 접한 정보들이 적절하게 조합된 훌륭한 요리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전장들이 우리나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국가들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깊은 역사를 함께 하며 수많은 질곡을 선사했던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이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출작전으로 국제무대에 우리 실무진들의 우수함을 선보였던 남아시아, 석유값과 함께 휘청이는 우리 경제의 바로미터인 중동과 이란, 그리고 가장 아픈 손가락인 북한. 어느 한 챕터도 대충 읽을 수 없었다. 

심지어 저자가 이 책의 도입에서부터 강한 우려를 보냈던 푸틴의 러시아가 실제로 얼마전,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면서 이 책에 대한 신뢰도가 더더욱 높아졌다. 

게다가, 팩트에 기반한 수치나 전문용어들이 아닌, 저자가 직접 나눈 대화들, 경험들 위주로 서술된 그의 글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이 리뷰에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전반적인 내용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고, 한참 뒤로 훌쩍 뛰어넘어 "북한" 챕터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챕터의 시작은 맥 매스터와 정의용 대사의 만남부터 시작된다. (박근혜의 탄핵과 함께 19대 대통령으로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면서 국가안보실장에 임명된 정의용 실장은 정부 출범 초기부터 미국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양국에 우호적인 기류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당시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한 짤막한 소개부터,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에 대해 간략하게 풀어내고 있는데, 한국전쟁 파병용사의 아들인 맥 매스터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은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인권유린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고,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직전 미국의 상황에 대한 내용도 무척 짧게 등장하지만 상당히 흥미로웠다. (나중에 관련된 서적을 찾아보고 싶을 정도였다.) 이 책이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을 위해 쓰여진 책임을 상기해보면 우리 근대사를 짧아도 정확하게 소개해준다는 사실은 고마울 따름이다.  
이어,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논쟁, THADD배치, 김정남의 사망과 남북평화공동선언, 핵미사일 개발, 핵개발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 일본과의 무역분쟁 등 우리에겐 마치 어제처럼 또렷히 기억나는 사례들이 맥 매스터의 관점에서 소개되고 있다. 읽다보면, 그가 대북 강경책을 주문한 이유가 납득이 된다. 
하지만, 북한 챕터는 김정은에게 '핵을 포기해도 내외부의 도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내용으로 매조지 된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그의 주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설득력이 높아졌다. 
'러시아' 챕터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었던 푸틴의 야욕과 전쟁 가능성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책을 몇번 더 펴게 되는 날이 많을 것 같다. 좋은 의미로든, 안좋은 의미로든...
책을 읽어가며 느끼는 건, 비록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지만, 그 역시 결코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왔기에,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평화의 시기라고는 하지만, 그건 아주 극히 일부 지역에서나 그렇다. 이 책이 "배틀 그라운드" 로 꼽는 지역들은 지구의 2/3 정도 된다. 내전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는 완전 배제되어 있으니, 그 부분까지 다 포함하면 열손가락 정도 빼고 다 일 것이다.
그도 우리만큼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전략적으로 전쟁을 아예 배제하지 않는, 대담함과 계획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할 뿐이다.
자유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다른 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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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들 -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손석희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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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군 2022년 초입에 이 책을 잡게 된 건, 의도와 우연이 적당히 겹친 결과일터다.

이 책에 의하면 손석희 앵커가 뉴스룸을 마지막으로 진행한게 2020년 5월이었고 이 책의 초판 인쇄가 2021년 11월이니, 저자도, 출판사도 엄청나게 열심히 제책작업에 매달렸을 것이다.

특히, 이 책은 "뉴스" 를 다루고 있으니, 무엇보다 팩트 체크에 심혈을 기울였을터이니, 쓰는것도 쓰는거지만, 검열, 교열 등 후반부 작업에 훨씬 더 많은 품을 들였을터다.

요즘 젊은, 아니, 나도 아직 젊으니, 어린 친구들은 손석희 '앵커' 보다 손석희 '사장' 이 익숙할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80년대 초반생이나 70년대 형님 누님들에게 손석희란 이름은 'MBC' 와 '뉴스' 그 자체일 것이다.

매끈한 외모에 적확한 발음, 그리고 매력적인 음색과 발성을 자랑하는 손석희는 백지연 앵커와 함께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방송언론인이다.

이 책은 방송언론인 손석희로서 그가 MBC를 떠나는 순간부터 JTBC 사장이 되어, 뉴스룸을 런칭하여 앵커석에 앉았다가 내려오기까지 겪은 일들에 대한 '가벼운' 기록과 그 시간 전체를 지배했던 묵직한 상념들을 적어낸 책이다.

대선 시즌을 맞아, 음악 선곡 하나때문에 여당의 압박에 하루아침에 라디오 DJ에서 하차한 이재익CP와 기자협회가 좌편향 되었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던 모 후보, 발언 하나를 꼬투리잡아 프로그램 하차 요구를 받는 YTN 변상욱 앵커끼지, 방송언론인의 수난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여러가지 생각할만한 내용이 많은 책이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어젠다 키핑" 이다.

조금 거칠게 말해, 이 책 전체가 방송언론인 손석희의 머릿속에 '어젠다 키핑' 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구체화 되는 과정을 다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소 생소했던 이 개념은 첫 챕터의 제목부터 등장하여, 손석희 사장이 JTBC에서 처음으로 다뤘던 삼성 관련 사안이었던 "노조 무력화 관련 문건" 과 함께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이후 어젠다 키핑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구현되고, 최순실 타블렛 사건을 통해 다듬어진다.

이어지는 촛불 시위와 박근혜의 탄핵은 더 이전, 손석희가 MBC를 떠나게 만든 단초였던 이명박 시절 MBC에 가해진 압력 속에서 공고해지고, 이후 치뤄진 대선을 통해 자리잡게 된다. 서지현 검사로 시작해 김지은씨로 폭발된 미투 현상과 북한과의 화해무드부터 경색국면까지 더듬어가며 어젠다 키핑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가 닿는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는 다시 JTBC로 출근하게 된 계기를 찬찬히 되짚으며 '저널리즘' 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으로 회귀한다.


이 책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굵직한 사건을, 어쩌면 '촉발' 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닌 당사자의 책이기도 하다.

누가 뭐래도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건은 JTBC가 보도했던 최순실 타블렛부터였고, '젠더 감수성' 의 근원인 미투의 시작도 서지현 검사가 JTBC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테니까.

 

언론이란 무엇인가? 언론인이란 어떤 직업 윤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어젠다 키핑' 은 결국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책의 초입에 언급된 필립 티치너의 '언론의 경비견(Guard dog) 모델 가설' 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미디어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언론은 '감시견' 과 '애완견' 으로 비유되어 왔다고 한다.

감시견으로서의 언론은 사법, 입법, 행정의 3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제4의 부 역할을 맡아 시민사회에 복무하는 것이고, 애완견 언론은 주인 무릎에 앉아 애교를 떨듯 정치, 경제 권력 등 엘리트 계급에 충성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경비견 언론은 전체 사회가 아니라 기득권 집단을 위한 경비견으로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

애완견 언론과 비슷해 보이지만, 경비견 언론은 기득권을 의존하지만, 복종하지는 않으며 지배세력이 미처 알지 못하는 침입자에 대한 경고를 미리 울리기도 하고, 지배그룹 내에 불화가 생기면 그 갈등을 정치화 하고,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경비경 언론은 특정한 지배집단을 위해 경비를 서는 것이 아니라, 지배 시스템을 지켜낸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 가설을 증명하는 좋은 예시가 실려있기도 한데, 나는 영화 "내부자들" 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 안에서 백윤식 배우가 연기했던 언론사 논설주간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이 책은 저자 손석희가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개념 안에 어젠다 키핑이라는 또다른 개념을 녹여내고 구체화 시키는 지난한 과정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개발이랄까.     


이 책은 에세이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아무래도 "뉴스" 에 관한 소재이니만큼 팩트를 정확히 하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워낙 민감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터뷰이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분석한 서적을 통해 자신의 발언에 담긴 함의를 간접적으로 풀어내는 점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스스로가 "손석희" 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잘 알고, 대선을 앞둔 마당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려는 의지가 보였다.

이 책에서만큼은 '운동가' 가 아닌, '저널리스트' 로서의 "손석희" 로 읽히기를 원했던 것 같다. 때문에, 진보쪽 인사들이 손석희에 가했던 비난, 그리고 비난을 마주한 손석희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는 대목에서는 복합적인 마음이 들기도 했다.

뉴스룸의 상징이었던 앵커브리핑에 대한 대목도 빼놓을 수 없다. 


중간에 작은 부분을 할애해서 MBC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일련의 사정들과 JTBC로 취임하는 과정은 이 책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이라면, 부분일 수 있겠다.

그러고보니, MBC시절의 손석희는 MB시절이었지.    




-.

JTBC의 뉴스룸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당연히 나는 아론 소킨 각본의 드라마 "뉴스룸" 이 먼저 떠올랐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 윌은 메인 앵커이지만 공화당 지지자라는 사실이 명확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대선 후보 토론에서 양쪽에 동일하게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사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을 싫어하지만, 공적으로는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흥미로웠다.

정치적 이념이 완전히 다른 국가를 머리위에 얹고 사는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진보주의자는 곧 사회주의,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북한과 결부시키는 사회니까.

이 드라마 속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처럼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발전적인 타협이 가능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깊게 들어가보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지향점은 같다. 

같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모두가 잘먹고 잘사는게 정치이념의 지상목표니까.

민주주의의 최종 진화단계로 여겨지는 기본소득 개념이 결국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되살릴 필요도 없고, 유럽의 많은 국가들의 토지제도가 굳건한 사적소지제 안에서도 다양한 공유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역시 들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이겐 아직 너무나 먼 일이지만.  



-.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쓸 즈음은 대선 전이었는데, 마무리할 즈음에는 이미 대선이 끝난 후다.

앞으로 시작될 5년. 윤석열 정부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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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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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챕터는 총 세개로 이루어져 있다.

"1996" 과 "1997". 그리고 에필로그인 "그 후" 이다. 하지만, 마치 이 작품은 앞의 챕터들에 비해서는 얇디얇은 몇 페이지 "그 후" 를 위해 쓰여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마지막에 던지는 파문은 상당하다. 


소설은 1996년 8월, 마지막까지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화자" 가 컬럼비아 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 오리엔테이션에서 "빌리" 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을 설명하는 몇 문장들과 빛과 공기마저 느껴질만큼 디테일한 분위기 묘사가 순식간에 나를 잡아끌었다. 

화자가 빌리와 함께 수강하는 과목은 창작과 합평으로 이뤄진 워크숍으로 소수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창작물에 비평을 하고, 함께 뒤풀이를 하며 교류하는 순서로 이뤄진다.

이런 형태는 국내의 문예창작 수업에서도 자주 이뤄진다고 알고 있다. 문창과 출신의 지인들로부터 이 과정의 잔혹함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고, 분야는 다르지만 나 역시 창작에 살짝 발을 담궜던 사람으로써 비슷한 과정을 겪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마치 발가벗겨져 몸의 구석구석을 평가받는 느낌. 나아가 X-ray 나 CT, MRI로 피부 아래, 근육 아래, 뼈와 장기들까지 샅샅히 드러나는 느낌.

그것은 도무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는 과정이었고, 대다수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리라고 생각한다. 

빌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화자를 변호해줬던 인물이었다. 

이는 이후 화자가 빌리에게 품게되는 막연한 호의, 또는 호감에 대해 높은 설득력을 부여함으로써 이후에 전개되는 소소한 대화들과 에피소드가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든다.

작가는 이렇게 능숙하게 화자와 독자들에게 빌리를 소개하고, 동시에 순식간에 매료되게 만든다.  

곱씹어보면 뜨악한 일이지만, 화자가 안지 2주밖에 안된 빌리에게 홈 쉐어링을 제안하는 부분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화자와 빌리가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첫눈에 반해서 시작하게 되는 연인관계와 비슷하고, 홈 쉐어링을 시작하면서 전개해 나가는 에피소드 역시 그러했다.

호감에서 시작된 무조건적인 호의와 정기적으로 갖는 둘만의 시간, 자연스러운 집안일 분담과 그로인해 시작되는 갈등, 그렇게 쌓이는 오해와 악감정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전형적인 퀴어 로맨스로 흘러가리라 생각했다.


화자는 빌리의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매일 바에 출근해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돈을 벌어 생활비를 벌고, 학비를 벌어야 했던 빌리는 심지어 바 지하 창고에 딸린 다목적 룸에서 살아야 했지만, 화자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자녀로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부모님이 지원해 주셨고, 좁은 침대와 리놀륨 바닥으로 대표되는 대학 기숙사조차도 마다할 수 있었다. 지옥같은 뉴욕의 집세를 무시하고 대고모가 거주하던 좋은 아파트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비는 일리노이주와 보스턴주라는 서로의 고향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빌리는 "블루칼라", 화자는 "화이트 칼라" 를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노골적인 전형성을 가지고 있다.

이후에 드러나는 빌리의 정치적인 성향, 자유로운 성생활, 인종적 편견과 추구하는 지향점 등이 이러한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어준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므로, 저자는 독자에게 빌리의 감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오롯하게 화자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데, 우리는 화자처럼 오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빌리에 대해 무조건적인 애정을 갖게 된다.

사실, 빌리는 엄청나게 전형적인 인물이다.

특히 문학 등 예술을 소재로 다루는 작품에서는 여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정의감 있고, 압도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지만, 겸손하기까지 할 뿐 아니라, 리더쉽까지 있는 인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만화에 등장할 법한 인물이다.

이 작품의 시점상 화자가 보지 않는 동안 빌리가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화자의 눈을 통해 전달되는 빌리의 전형성(과 그로 인한 변화) 때문에 빌리는 갈수록 매력이 떨어져갔고, 반대로 화자의 감정에 더욱 이입하게 되면서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화자가 저지르는 행동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사족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저자의 진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마지막 챕터로 향한다.

고작 몇 페이지에 불과한 이 부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좋아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싫어하게 될 터이다.


책을 덮은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필립 로스의 [울분] 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필립 로스는 불가해한 삶의 불공정성, 결코 "올바른 선택" 이란 것이 없는 수많은 삶의 갈림길에 대한 웃기지 않은 농담같은 작품들을 선보였던 작가다. 삶을 뒤바꾸는 농담 같은 선택. 화자 역시 그런 선택을 한다.


화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리한 여러가지 배경을 갖고 태어났지만, 정작 자신이 가장 갈구하는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고, 빌리는 그 반대였다. 

빌리는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히며 사고를 넓혀가는 한편, 화자는 자신만의 아파트먼트 안에서 안온함을 누리며 더 단단한 껍질 안으로 침잠한다.

어쩌면 "창작" 이라는 욕구는 화자가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유일한 비상구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챕터는 그가 그 비상구의 문을 완벽히 닫은 후의 이야기였다.

빌리의 삶과 업적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내심 평가절하 하는 모습은 거대한 자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이 그려지기도 했다.

정말 많은 부분, 콕콕 찔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빌리가 되고 싶지만, 화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창작의 꿈은 갖고 있지만, 재능은 타고나지 못한.

 

창작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필멸하는 존재로서 가장 근원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지점은,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라는 잣대는 언제나 시대와 상황이 결정한다는 부분이며, 사람들 사이에 재능이라는 차별점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재능이란 것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상황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박형서 작가의 "신의 아이들" 이라는 작품에서는 소설에 대한 엄청난 재능이 있지만,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으로부터 재능을 발견했지만, 개인의 고집이라는,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상황이 벌어진다.


위대한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으로 간섭할 수 없는 '적절함' 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아무리 적절해도 또 바뀌기도 한다. 한때는 모든 대중을 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던 작품도, 어느샌가 성차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로 바뀌어 파쇄기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모두가 절대라고 믿는 정의나 도덕, 윤리관은 이념과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파쇄기 안으로 들어갔던 작품들이 언젠가 다른 평가를 받으며 다시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추앙받는 작품들도 미래의 어느땐가 다른 평가를 받으며 스러질 수도 있다.

너무나 불공정하고, 너무나 불가해하고, 너무나 괴롭지만, 중독적이고, 또 중독적이다.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지만, 창작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다.

창작의 기술은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훈련하고 쌓아간다. 

이는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를 묻히고, 엄마에게 "안먹었어요." 라고 하는 순간 시작된다. 태어나면서 하는 숱한 거짓말들과,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기만들, 좋아하는 이성에게 어필하기 위한 메시지와 동갑내기 사이에서 돋보이기 위한 행위들, 장난감을 갖고 노는 동안 하는 수많은 공상들과 책과 드라마, 영화, 만화를 보며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창작" 의 기술들이다. 

누군가는 이 과정 속에서 창작자로의 꿈을 꾸게 된다.

마치 물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신의 숨결을 느껴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그것을 보고 자연현상에 궁금함을 느껴 과학에 투신하는 사람이 있듯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 빌리와 화자,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같은 인물들이다.

이렇게 탄생한 창작 지망생들은 더 많은 기술을 익히고, 수준 높은 창작물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알아가게 된다.

어느정도 학습을 한 지망생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자기혐오에 빠지는 쪽과, 자기애에 빠지는 쪽이다.


이 작품이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었던 이유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와 빌리가 이미 대학 4년 이상의 학업을 마치고 심화 단계인 대학원생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이미 이 벽을 넘어선 단계이다. 화자가 친한 친구들 중엔 데뷔한 친구들이 아예 없고, 화자 자신도 교열하는 일을 파트타임으로 꽤 해본 인물이다.

전업작가가 되기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고 학업중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화자도, 빌리도 아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친구들은 아니다.

다만 빌리는 서너기수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재능을 타고난 건 맞지만, 동 세대 미국을 통틀어보면 그다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사실 그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화자의 자기혐오는 곤란한 상황이면 어김없이 터지는 땀샘으로 표현된다.

그는 스스로의 역량을 알았고, 재능이 없음을 알았다. 재능이 없는 이들은 기술에 집중한다. 그리고, 사실 기술은 재능의 부족을 상당히 보완한다.

작품 안에서 지속적으로 화자는 플롯과 구성이 탄탄한 작품을 만든다는 평을 듣는다. 

거기에 "뭔가" 가 결여되었다는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기술로 보완되지 않는 "뭔가". 사실 그것은 재능의 영역일 것이다.

세상에... 창작하는 이로써 가장 괴로운, 그리고 어려운 과제인 셈이다.

애초에 갖고 있지 않은걸, 작품 안에 녹여야 한다고 하는 셈이니, 이보다 더 무책임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빌리는 그 "뭔가" 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화자는 빌리가 수정해준 원고로 작은 승리를 한번 맛봤고, 그 뒤로 그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빌리는 자기혐오와는 달과 태양처럼 동떨어진 존재다. 외모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이 작품 안에서 유일하게 아름답게 형용되는 외모도 한 몫 했을테고, 장학금을 받는걸 기본으로 생각할 만큼 어느정도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 

화자는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쇠처럼 그에게 끌렸을터다.

그리고, 결국은 그에게서도 듣게되는 "뭔가" 의 "결여".

아마 화자에게는 그 지적이 쐐기처럼 깊게 박혀있었을터다.

책 속엔 나오지 않지만, 대학때에도, 어쩌면 그 전부터도.

그리고 그 쐐기를 빌리가 내려치는 순간, 그 울림이 어딘가로 폭발한 것이었을 것이다.

화자가 머물던 아파트먼트는 자기혐오를 막아주는 유일한 둥지였다. 비록, 대학원시절 한정이었겠지만, 그 안에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던.

그리고, 그 둥지가 뭉개지는 순간, 화자는 자기혐오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삶이라는 연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지만, 빌리를 통해 잠깐 가질 수 있었던 "뭔가"와 결별하고, 창작이라는 세상과의 소통마저 포기하고.


나는, 화자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빌리가 마지막에 외쳤던,

"여기서 평생 살 생각이냐" 는 말이 귓가에 쟁쟁 울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귓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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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로 배우는 배경 일러스트 쉽게 배우는 만화 시리즈 65
사케하라스 지음, 김재훈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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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클립 스튜디오 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책입니다.


바야흐로 대 스케치업의 시대다. 


지금까지 만화에서의 배경작업은 대부분 트레이스로 이뤄져왔다.

작품의 설정 구상이란 캐릭터와 스토리 뿐 아니라, 작품의 배경과 환경도 포함된다. 

많은 작가들이 작품 구상 기간에 영화의 로케 장소를 탐색하듯, 여러 동네를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아직 데뷔를 못한 지망생들은 필름 값도 부담이어서 원하는 각도대로 쉽게 찍을 수 있는 집이나 작업실 인근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면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배경자료집들을 외서 전문 서점에서 구입하곤 했는데, 필름 인화 가격을 생각해보면 경제적으로 그게 더 나은 선택이기도 했다.

작법서보다 더 필요한게 자료집이었고, 코믹월드 같은 만화 페스티벌에는 동인지 말고 그런 자료집을 웃돈을 받고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코미커즈" 같은 만화 지망생들을 위한 잡지 뒷부분엔 자료 사진들이 흑백으로나마 실려있기도 해서, 나도 열심히 스크랩해서 모아두곤 했다.

작가들의 작업실에 견학을 가보면 책장 가득 배경화집을 비롯한 각종 자료집과, 잡지 등에서 손수 모은 스크랩북, 직접 찍은 배경 사진들을 모아놓은 클리어 파일들이 꽂혀 있곤 했다.

그것이 모두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인터넷만 두들겨보면 자료로 쓸만한 수많은 사진들이 넘쳐난다.

적당한 금액을 지불하면 트레이스를 할 수 있는 사진들을 구매할 수도 있다. 역시 과거의 필름값을 떠올리면 납득할 만 한 수준이다.

게다가 디지털 작업이 일반화 되면서, 이렇게 구매한 사진을 확대, 축소할 수 있고, 트레이스 대신, 포토배쉬 같은 방식으로 사진을 직접 가공할 수도 있다.


모바일 환경처럼 작은 화면으로 보는 웹툰의 특성상, 적당히 가공된 배경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작화의 퀄리티가 크게 높아 보일 수 있다.


그래선지, 이제는 사진을 가공하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대부분의 웹툰들이 3D소프트 웨어인 "스케치업" 으로 렌더링한 배경을 갖다 쓴다.

문제는 스케치업이 3D치고 가벼운 프로그램이라, 곡선렌더링에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고, 자신의 그림체와 어우러지지 않으면, 굉장히 튄다는 점이다.

특히 구도, 원근감의 기초가 부족한 지망생들이 어설프게 합성하면 오히려 퀄리티를 크게 낮춘다.


이 책은 이러한 오류를 최대한 잡아줄 수 있는 정보들이 가득하다.


내가 직접 찍을 수도 있지만, 종이 질이 좋아서, 넘나 반들거려서 인터넷 서점에서 홍보자료를 퍼왔다.



 이런식으로 배경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첨삭하듯 소개하고 있다.

주로 오른쪽 면에는 이론적 설명이, 왼쪽 면에는 실전활용법이 소개되고 있다.

사실,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내용들이라 지나치게 요약한 감이 없지 않지만, 사실 그런건 원근과 구도에 관한 이론서를 읽는게 낫고, 실전에서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방법으로서는 매우 영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넘어가기 쉬운 작은 글씨들로도 다양한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꼼꼼히 읽으시길...


다만, 배경을 이제 막 입문한 초보자들이라면, 이해가 잘 안될 수도 있으니, 꼭 구도와 원근에 관한 다른 책들을 함께 읽어보길 추천한다.

한스미디어에서는 "배경작화" 라는 책이 있는데, 기본기가 잘 소개되어 있고, 영진닷컴에서는 "일러스트와 만화를 위한 구도 노하루" 라는 책이 있다.

두 책 모두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한권 선택해서 함께 보시길.

(영진닷컴에서 나온 무로이 야스오의 "가장빠르게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작화기술" 이라는 책의 후반부에 실린 구도 잡는 법에 대한 노하우도 배워볼 만 하다.) 


일본의 만화 인프라는 엄청나게 깊고 넓다.

지금 국내에 출간되고 있는 책과 비슷한 작법서들이 이미 수십년 전부터 수백종씩 쏟아지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웹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인프라가 조금씩 넓어지는 느낌이다.

내가 어렸을때, 열심히 만화공부를 하던 그 시절에 지금의 반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이 책 역시, 그정도로, 참 좋은 책이다.

다양한 정보들이 보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작법서를 눈으로 보는 것 만으로는 실력이 올라갈 리 만무하다.

꼼꼼하게 읽을 뿐 아니라, 반드시 한번쯤은 따라 그려보는 것이 좋다.

완벽하게 모작을 할 필요는 없지만, 트레이싱은 절대로 안된다. 

트레이싱은 결코 실력을 올려주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러프하게 콘티 형식으로 모사를 하는 것이 백번 천번 낫다.

스케치업을 활용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원근과 구도를 손으로 그릴 줄 아는 사람의 합성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과 큰 차이가 난다.

작은 모바일 화면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술의 깊이는 결국은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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