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bash 입문
조우노세.카도마루 츠부라 지음, 김재훈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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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스튜디오 네이버 카페 "코믹스튜디오-디지털 만화제작을 배워보자!" 카페의 이벤트를 통해 경품으로 받은 책입니다.




일러스트나 만화나 대부분의 배경작업은 사진을 레퍼런스로 해서 작업한다.

과거, 종이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던 시절엔, 라이트 박스 위에 사진과 종이를 겹쳐서 배경을 따는 작업을 했다.

해서,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기 전 시절엔 배경 사진만 전문으로 모아 파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고, 프로 만화가들은 작품 들어가기 전에 며칠씩 배경사진을 찍으러 다녀야 했다.  

코미카 같은 아마추어 만화동아리 행사를 가보면, 지금은 굿즈나 동인지를 주로 팔지만, 그 당시엔 자료로 쓸 수 있는 사진들을 모아 파는 친구들도 있을 정도였다. 

필름값도, 카메라도 고가이던 시기였다. 

라이트박스도, 카메라도 없던 나는 청계천 헌책방거리에서 구입한 잡지에 실린 흑백 사진들을 보고 배경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원하는 구도나 각도가 나오지 않을 경우엔 여러 사진을 부분부분, 참조해서 그리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프로 작가들이 그런 방법을 활용하곤 했다.

자신이 예전에 그렸던 배경들을 다시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고, 복사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정말, 철저히 노동 집약적인 직업이 만화가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약 20년 사이에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은 잉크와 펜, 원고지 대신, 타블렛과 모니터, 키보드를 활용하는 작가들이 다수가 됐다.

배경 작업의 레퍼런스로 삼을 사진들은 인터넷에 가득하고, 화소가 높은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 덕분에, 트레이싱을 할 사진을 찍기도 쉬워졌다.

이 책에 실려있는 기술들은 생각보다, 이렇게 전통과 역사가 꽤 깊은 기술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산업 디자인 쪽에서는 매트 페인트, 만화 쪽에서는 배경 작업에서 말이다.


'포토배쉬' 란 사진으로 찍은 오브젝트들을 레퍼런스 삼아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는 기술을 뜻한다.

그렇다고, 꼴라쥬처럼 사진을 그대로 잘라다 붙이는 건 아니고, 리터칭을 통해 상당히 크게 변화시킨다. 차용보다는 응용, 트레이싱보다는 레퍼런스에 가까운 방법이다. 

사실 이런 기법은 '코렐' 사에서 나온 '페인터' 라는 소프트웨어가 아주 특화되어 있었다.

수백개에 달하는 브러시와 함께 엄청나게 유명한 기능이었는데, 덕분에 프로 매트 페인트 작가들에게 사랑받으며 널리 퍼지기도 했다.

지금도 사진 편집 소프트웨어의 최강자는 '어도비' 사의 포토샵이지만, 일러스트쪽에서는 아직도 페인터가 최고다.


'클립 스튜디오' 는 "선" 을 중심으로 표현되는 만화쪽에서 단단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불과 몇년 전까지는 사진 가공 툴이 부족해서, 선은 클립에서, 마무리는 포토샵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최근 버전의 클립 스튜디오는 오히려 사진을 선화 느낌으로 가공하는 툴들을 발전시켜서 그럴 필요가 거의 없어졌다.

이 책은 이렇게 "사진을 가공하는 툴" 을 이용해 일러스트를 완성시키는 과정들을 꼼꼼히 소개해 주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웹툰 열풍이 불면서 작가 지망생들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기본기가 부족해도 사진을 가공한 배경을 여기저기 붙여 놓으면, 작품의 퀄리티가 훌쩍 높아지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손바닥만한 스마트폰 액정에서 확인해보면 훨씬, 훨씬 더 훌륭해 보이기도 한다.

작화와 스토리, 퀄리티와 개성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은 디지털화가 진행되기 전부터 일었던 논쟁이지만, 그건 온전히 만화가와 만화 독자라는 특정한 계층의 문제였다.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슬램덩크를 그리면서 NBA 잡지의 사진들을 트레이싱 한 사건이 일본 만화가들과 만화계에 한정된 문제였듯이 말이다.

하지만, 웹툰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그 대중 중 많은 수가 웹툰 지망생이 되면서 이러한 논쟁들은 보다 폭넓은 계층을 아우르게 되었다.

배경에 사진을 잘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교과서적인 작가들은 크게 셋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미생' 의 윤태호 작가님이다.

윤태호 작가님은 디지털을 아날로그처럼 활용하시는 분이다. 그 분은 직접 찍은 사진들을 밑에 깔고, 외곽선부터 보도블럭까지 꼼꼼하게 다시 자신의 선으로 덧입히는 방식을 사용한다. 마치, 라이트 박스 위에 사진을 올리고, 그 위에 종이를 올린 뒤 펜과 잉크로 따라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예전 "무한도전" 에 작업 과정이 직접 나온 적도 있다. 미생을 위해 직접 찍으신 사진들이 폴더에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뷰티풀 군바리' 도 이런 방식이다.)


다음은 '닥터 프로스트' 의 이종범 작가님이다.

이종범 작가님은 디지털의 최전선에 계신 분이다. 이 분은 사진 뿐 아니라, '스케치업' 이라는 3D 프로그램을 아주 잘 활용하신다. 만화진흥원의 스케치업 강좌에 출강하실 정도의 실력이신데, 3D프로그램 특유의 이질감을 죽이는 다양한 방법들을 활용하신다.

('테러맨' 의 고진호 작가님도 빼놓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프리드로우' 의 전선욱 작가님의 방식이 '포토배쉬' 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콘티에 맞춰 직접 찍은 사진들을 리터칭해서 활용하신다. 네이버 인터뷰였나...어디에서 작업과정이 공개된 적이 있었다. 고대비를 조정하고, 경계나 색감이 불명확한 부분들에 터치를 해서 활용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진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리터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그림체와 이질감이 없는 배경을 그려낸다는 점이다.

사진을 사용하는 작가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신의 그림체, 혹은 캐릭터와의 이질감이다.

나는 사진을 아무리 잘 합성해도 이 이질감을 극복할 수 없어서, 리터칭 하는 방식을 택한다. 어지간하면 그냥 그린다. 

물론 스케치업과 사진의 도움을 받지만, 특정 부분에서만 활용하고, 대부분은 그냥 그리려고 한다. 

배경을 위한 만화가 아니라, 인물을 위한 배경인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예제들은 이렇게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배경 만드는 기술에 대한 책이다.

다만, 내가 들었던 예시와 달리, 스토리나 캐릭터가 아니라 오로지 배경을 위한, 배경에 의한, 배경 그리는 예제들이 한가득 실려져 있고, 사진을 일러스트의 느낌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다양한 예제들이 아주 세분화되어 잘 설명되고 있다.

즉, 이 책은 초보자들보다는 고급자, 그것도 연재를 염두에 둔 프로 지망, 게다가 그림체가 실사와 잘 어울리는 층에게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아, 내가 너무 만화, 웹툰에 치우친 관점을 갖고 있는걸까.... 

여튼, 배경작업에 힘을 주실 분들 중 클립 스튜디오 유저라면, 처음에 집어들기 좋은 책이다.

당연히 주호민 작가님의 '신과 함께' 나 난다 작가님의 '어쿠스틱 라이프' 같은 그림체라면, 이런 사진을 활용한 배경이 전혀 필요 없을테니까. 아니, 이것도 고정관념인가.... 필요할 수도, 있으려나. ㅋㅋ 

사진을 활용해 소스를 만들고, 사진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는 방법, 사진의 고대비와 밝기를 조정해 일러스트의 느낌을 내는 방법 등 사진을 가공하는 방법들도 메뉴 하나, 툴 하나, 레이어 속성 하나까지 속속들이 예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실제 사진을 작품에 활용하는 노하우나 온라인 저작권에 따른 "웹에 게시된 사진의 사용범위" 에 대한 법적 설명도 들어있다.


자신의 그림체에 맞는, 그리고 매트 페인팅의 기초를 다지고 싶은 '배경'작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강추할 수 있는 책!! 





이렇게 기초적인 사진 합성부터 



배경을 흥미롭게 구성할 수 있는 팁은 물론,



클립 스튜디오의 주요한 툴들을 응용하는 방법은 물론


 

직접찍은 사진에서 텍스처를 추출해 활용하는 꽤 난이도 높은 응용방법까지 성실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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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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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병원은 이인시里仁市에 존재하는 단 두개의 종합병원 중 하나였다. 이인시는 한때 거대한 조선 단지가 조성되어 있던 곳으로 조선 사업의 위기와 함께 빠르게 해체되었다. 선도병원 역시 조선소와 명운을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사이. 조선소가 가동 중단을 결정하고, 근처의 산업 단지들이 폐업하고, 외지에서 온 근로자들이 도시를 떠나고, 노동자들의 숙소였던 원룸 주택단지는 거대한 공동이 되었다. 호황시에 불야성을 이루었던 상가들은 무덤처럼 조용해졌고, 고작 1년사이에 벌어진 이 쇠락을 '이석' 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인시에서 70여년을 살아온 이석은 선도병원의 터줏대감 같은 이였다. 간호조무사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관리직까지 두루 섭렵한 이석에겐 불치병에 걸린 아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병원에 출근해서, 가장 늦게 병원을 떠나는 이석의 모든 삶은 서울 대형병원에서 실낱같은 희망과 함께 아들의 숨줄을 붙들기 위해 소비되고 있었다. 그의 부인마저도. 

 '무주' 는 서울의 한 종합병원 직원이었으나, 병원에서 일어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일했던 과장의 소개로 도망치듯 이인시 선도병원 관리부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석은 무주를 곧잘 챙겨주었다. 그 덕에 무주는 빠르게 선도병원의 일에 적응해서, 맡은 바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더불어, 서울에서 잘 다니던 출판사도 그만두고 자신을 따라 이인시로 함께 와 준 아내의 임신 소식도 전해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주는 너무나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PIN시리즈는 얼마전 이영도 작가님의 신작 [시하와 칸타의 장-마트퀸 이야기] 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세로가 좀 더 길쭉한 문고본 같은 특이한 판형에, 공들인 티가 역력한 하드커버는 6편씩 묶인 작가진을 보면 시리즈의 야심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6권씩 묶여있다는게 재미있는 포인트다. 맨 뒷커버의 안쪽에 적혀있는 PIN시리즈 설명에는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 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시리즈의 1번인 [죽은 자로 하여금] 은 이후, 출간된 [당신의 노후(박형서)], [거울 보는 남자(김경욱)],[첫 문장(윤성희)],[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욥기43장(이기호)], 6번인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정이현)] 과 한 시리즈라는 뜻이다.


나는 이 시리즈의 최근간인 25번 [시하와 칸타의 장-마트퀸 이야기(이영도)] 와 26번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듀나)] 를 먼저 읽고, 시리즈 전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이렇게 1번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오이 가든] 부터 꾸준히 팔로우 하는, 내겐 몇 안되는 케이스의 작가이긴 하지만, 새삼스럽게도, 편혜영 작가의 장편과는 첫 만남이다. 편혜영 작가의 작품은 최근 몇년동안 최소한 1년에 한편 정도는 어떤 식으로든 만났던 것 같다. [몬순] 이후 다양한 문학상을 받아오기도 했고, 매년 이렇게든 저렇게든 그런 작품들이 묶인 소설집들이 다양하게 출간되기도 했으므로. 하지만, 희안하게도 장편은 만날 기회가 없었다.      


편혜영 작가의 글은 언제나 서늘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냉정하리만큼 관조적인 시점에서 등장인물들의 폐부를 가차없이 찌른다. 그 찔림은 오롯히 독자인 나에게 작용한다. 

수족 중 어딘가를 잃은 인물들에게도 냉정하고, 모든걸 다 가진 것 같은 인물들에게도 냉정하다. 그의 묘사는 언제나 적확하고 명료하다. 내가 주로 읽었던 작품들은 대부분 단편이었으므로 그런 장점들이 뚜렷하게 도드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로테스크하고 우중충한 세계관이 단숨에 다가오고, 진흙같은 삶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물들의 감정 또한 순식간에 덮친다. 


핀 시리즈의 소설들은 장편이라지만, 분량으로 따지면 중편과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기에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장점들은 여지없이 도드라진다. 

이 작품이 취하고 있는 소재-대형 병원의 비리라는 그 자체는 그다지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일어나는 사건들도 뉴스 언저리에서 들었을만한 일들이고,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들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선택과 감정선이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등장인물에 이입되어 읽다보면, 작가의 서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니, 이거 왜 이러셔, 작가 당신이 나한테 이런걸 시킨거잖아!!! 근데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셔!!!!'

랄까. ㅋㅋㅋㅋㅋ 


등장인물들은 독자인 나의 예상대로 흘러간다. 그도 그럴것이, 작가는 냉정하고 명료한 단어로 외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줄줄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도달하고, 그제서야 큰 한숨을 몰아쉬게 된다. 


솔직히, 편혜영 작가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게 비틀린 세계관을 좋아했던 나에겐 [몬순] 즈음부터 시작된 현실과의 융합이 마뜩찮았다. 이처럼 독특하고 신선한 장르적 감각을 지닌 작가가 결국은 그 세계를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나의 오해였고, 착각이었다.

단지 이제는 그러한 그로테스크하게 비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장르적 눈이 확장되어, 현실과 마주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바를 가장 압축해서 설명하자면, 한때 조직의 생리 안에서 상사의 비리를 보위하기 위해 동조자가 되었던 젊은 직원이 조직 전체의 비리를 축소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쓰여 한직으로 밀려났고, 그 밀려난 공간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터줏대감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자신이 꿰어차 들어앉은 그 자리는, 그 비리와 함께 하지 못해 잘려나간 인물의 빈자리였던 것이고. 

내용 자체만 보면, [하얀 거탑] 같은 드라마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런 엘리트 계층이 아니라, 그 아래. 종합병원의 행정을 관리하는 소위 "원무과" 의 비리라는, 보다 익숙한 소재가 등장한다는 점이 다를터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부조리하고, 가장 불합리한 건 무엇일까?

인간관계? 사건, 사고? 불치병? 자연재해? 

다 맞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원래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며, 비이성적인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점을 설파해왔고, 편혜영 작가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그 점을 설파해왔는데, 현실과 몽상의 경계에서 초월적 공포를 통해 그려냈던 방식에서 살짝 내려와, 현실에 안착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다.

나는 편혜영 작가가 한국의 스티븐 킹, 나아가 러브 크래프트가 될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더 섬뜩하고, 더 현실적이며, 더 우주적인.

아직도 나는 믿는다.

이 작품의 끈적한 클라이맥스 때문이다.

무주는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기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결말을 택한 편혜영작가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아마 어떤 사람들을 욕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뭐냐고.

하지만, 원래 무주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비리를 온통 자신에게 덮어 씌우고 "한직에  가서 고생하고 와. 나중에 진정되면 불러줄게 (나 대신 몇년 빵에 갔다오라, 는 조폭 같은) " 라고 했던 전 상사를 찾아가고, 왕따시키는 팀원들에게 "내가 더 큰거 다 알고 있어" 라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점이나, 결국 그 발언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데, 그걸 겨우 허장성세였다고 고백하고, 이석의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끝끝내 확인하고 마는, 그리고 그 결과에 그렇게 반응하는, 그런.

순수하고, 순박해서 여기저기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소시민. 
평범한 당신과, 나같은 사람.

우리들에게 진정한 코즈믹 호러는 우주에 있지 않다.

내 옆에 있지. 

편혜영 작가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이 무섭다. 무섭지만 재밌지. 어쨌든 나는 주인공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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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국의 연대기 - 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 걸작 논픽션 19
대니얼 임머바르 지음, 김현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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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019년에 미국에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는 카피와, 미국인들도 제대로 몰랐던 미국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라는 책 설명에,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더랬다. 다소 의심스러웠던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서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럴 만 했겠다' 싶었다.


책의 서문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이미지. '로고 지도' 와 미국의 현재 실제 영토의 지도를 비교해준다.

 


(미리보기에서 가져온 바로 그 페이지)

이 페이지를 보는 순간,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더랬다. 

미국령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알래스카와 하와이도 잘 알고 있고, 괌, 푸에르토리코 같은 미국령, 그리고 필리핀처럼 한때 미국령이었던 지명들도 알고 있었지만, 미국이 의도적으로 미국 본토만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실제로 많은 미국인들도 이 대목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미지가 작아 아래 글씨들은 잘 안보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꽤 도발적으로 주장을 펼쳐내고 있다. 문장과 단어들은 매우 적확하고, 매우 깔끔하게 읽힌다. 어학 실력은 형편없어서 번역까지 지적할 깜냥은 안되므로 그 부분은 패스하고... 오역으로 느껴졌던 부분이 두어문장 있었던 것 같은데, 워낙 방대한 볼륨의 책이라 단순 실수로 보이는 지점들이었다. 주석과 감사의 말을 빼면 590페이지다. 


다양한 국가와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저자는 의도적으로 매우 유명한 사건과, 매우 유명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논지를 펼쳐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찾아들었던 이유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서의 미국의 활약에 대한 의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적으로 보자면, 미국은 1770년대 중 후반에 정부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미국 정부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에 난리도 아니었다. 워낙 넓은 땅에 다양한 유럽 출신 유지들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긴 했지만, 많은 부분에 여전히 깊은 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바로 1810년대엔 영국과 캐나다 연합 군대에게 워싱턴이 털린적도 있었고, 1860년대엔 남북전쟁도 있었다. 이 전쟁이 수습된지 50여년 후.

미국은 어떻게 유럽에 참전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참전할 정도가 아니라 전쟁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그 지점이 꽤나 궁금했다.


 초반에는 바로 그 시점. 특히 루스벨트가 서부를 누비던 시기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금광이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을 흡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첫번째 위기는 산업화와 영토 확장으로 인한 폭발적인 인구증가에서 비롯됐다. 멜서스는 이런 속도로 인구가 증가한다면 식량 생산을 앞질러서 "인류는 때 이른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농업 방식이 오래 지속되려면 질소의 순환을 관리하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지혜를 바탕으로 순환 작물을 통해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쌓아야 충족되는 것인데, 산업화로 인한 도시화가 이러한 순환주기를 깨뜨렸던 것이다. 19세기 미국 동부의 농가들은 타격을 받았다. 에이커당 작물의 생산률이 반 이하로 급감한 것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연구 끝에 페루 연안의 친차 제도에서 서식하는 가마우지, 얼가니새 및 펠리컨에게서 나오는 질산이 풍부한 똥, 즉 해조분이었다. 

 당시 이러한 해조분은 다른 모든 것처럼 영국이 독점하고 있었고, 미국은 해조분이 쌓여있을 태평양의 무인도들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미국이 발견한 그런 무인도들은 점유권을 주장하고, 그 독한 해조분들을 채취하는 일은 대부분 흑인들이 투입됐다. 너무나 척박하고 괴로운 환경 속에서 일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비로소 해외 영토에 대한 법적, 전략적 개념을 획득하게 된다. "새똥이 널려 있는 바위와 섬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지간에 그곳은 결국 미국의 일부였다." 수십년 후, 이 곳들은 비행장 건설에도 적합한 곳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많은 미국의 해외 영토들이 어떻게든 연방으로 편입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은 얼핏, 로마 제국 말기, 시민권을 얻기 위한 시칠리아 동맹시들과의 갈등이 떠오르기도 했다. 새삼, 미국 사람들이 로마 역사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해하게 됐다.

 

 사실 이 책이 더 강조하는 부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으로 재편된 세계에 관한 부분이다. 

미국이 푸에르토리코를 차지해야 했던 이유, 괌, 사모아 제도, 하와이, 미드웨이 환초 등 태평양의 섬들을 가져야 했던 이유. 

나아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의 필리핀을 차지해야 했던 이유와, 일본에게 빼앗긴 이후, 다시 되찾는 과정. 그리고 이후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필리핀의 노력. 더글러스 맥아더가 필리핀에서 성장했고, 필리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터다. 독립을 추구하지만, 독립할 수 없었던 푸에르토리코의 경제적, 현실적인 고민,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을 독립시키고, 초토화시킨 일본을 점령하지 않았던 이유.  미국 상원의원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의 치열한 대립, 

그리고 전 세계에 산적해있는 약 800여개의 미군부대로 나아간다.

이란, 이라크 전쟁과 걸프전, 그리고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 

그리고 세계에서 모국어로 쓰는 빈도는 두번째이지만, 제2외국어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쓰고 있는 언어, '영어'를 위한 치밀한 전략.

그 실패의 잔재들과, 전략 밖에서의 뜻밖의 승리. 


대충 생각나는 것만 짧게 담아내기엔 너무너무 많은 내용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얽히고 설키면서 정신없이 펼쳐진다.


올 한해, 아니 최근 몇년간 읽은 인문, 역사서중 가장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히면서도 익히 알려진 유명한 사건들 이면의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사산에서 시작된 '국제 표준'에 관한 치열한 외교전이라거나 고무를 개발하는 과정 등등은 결국 전쟁이 아니었으면 쟁취하지 못했을 편리함이라는 사실에서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기사,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어야 잠재력을 발휘하는 법이기도 하니까...

미국은 일본의 침공이라는 역사적 위기 앞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고, 그 결과 영국, 독일보다도 빠르게 화공학, 원자물리학 분야에서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 


결국 식민지의 필요성은 전쟁 수행 능력과 결부된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불법 침략하고, 타이완, 싱가포르, 필리핀 등을 침공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원자재를 조달하고, 병참선을 구축하기 위함이다. 미국도 태평양의 섬들이, 필리핀이 필요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항공모함과 비행기의 발달로 '영토' 의 필요성은 점차 약해져갔다. 미드웨이와 괌이 중요했던 이유,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아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항공기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 대신, 곳곳에 미군 기지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제국주의가 변화하기에 좋은 구실이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세웠던 기지들을 철수하는 대신, 부지를 임대하는 방식으로 지배 방식을 변환시켰다. 오키나와의 미군부대는 하나의 커다란 예시였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오키나와를 점령했었다. 1970년 일본의 시위대가 폭동을 일으켜 미군부대로 쳐들어간 2년 뒤, 오키나와를 반환했지만 그 후에도 미군부대는 여전히 상주해있다. 미군부대는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주민들이 미군부대의 철수를 요구하지만, 그들 중 태반은 미군부대를 통해 일상을 유지한다. 철수와 유지에 대한 찬반 비율은 미묘하다. 심지어, 초토화되었던 일본의 산업과 경제가 일어선 계기는 미국의 군수품 조달을 통해서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대규모 군수품 조달을 일본에 맡겼다. 도요타는 한국전 직전 회사 규모를 축소할 정도로 상태가 안좋았고, 일본중앙은행은 '신의 도움' 이라고 할 정도로 산업 전반이 일어서는데 도움을 줬다.

무엇보다, 일본이 미국이 세운 국제표준에 적응할 시간을 줬다. 


이러한 현상은 미군부대가 상주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동등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사마 빈 라덴의 집안도 미군의 사업을 수주하는 업체였고, 오사마 빈 라덴 본인도 미군들의 휴양시설을 짓는 사업에 성공하기도 했다.

세계 각지에 퍼져가는 미군부대는 번영과 증오를 함께 퍼뜨리고 있다. 무려 800여 곳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점묘 제국주의" 라고 표현했다. 다소 도발적이고 신선한 내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적이지 않은 책은 아니다. 미국의 관점에서, 왜 세계는 미국을 증오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자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라는 개념 안에 여러가지 것들을 억지럽지 않게, 논리적으로 끼워 맞춰내는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무척 인상적인 마지막 한 페이지를 옮겨본다.


" 이상하게도 미국은 제국주의라는 비난에 자주 시달렸으나 영토 차원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미국을 로고 지도로 나타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은 나머지, 제국을 부르짖으며 열렬히 비판하는 전문가들조차 해외 영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확장된 미국 영토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영토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나 기지 근처에 사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 중요한 문제다. 미국 입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영토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군기지에서 시작됐다. 피임약, 화학요법, 플라스틱, 고질라, 비틀스, 초원의 집, 이란-콘트라, 트랜지스터라디오, 미국이라는 이름 자체에 이르기까지 영토 제국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들의 역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영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식민주의는 정체적 배경에서 그 존재가 가장 두드러진다. 매케인, 페일런, 오바마 그리고 트럼프는 모두 식민주의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는 이상하고도 놀라운 사실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놀라움을 뛰어넘어 미국의 역사는 제국의 역사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p.590


저자는 결국 제국주의 시대에 흩어진 미군부대가 다양한 국가에서 다양한 문명에 영향을 줬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현재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아이돌 음악도 결국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밴드, 그룹, 댄서를 빼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군 부대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이 머리맡에 있다는 점을 빼고라도, 미국이 결코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하지 않으리라는 명백한 이유가 이 책에 잘 서술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북한,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방어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국으로서의 미국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최소한의 깃발.

그것이 미군 기지이다. 


이 리뷰를 정리하는 동안, 또 미군 기지로 인해 시끌시끌하다.

미군이 순환 배치와 전략적 유연성을 갖추려 한다는 정책을 발표했기 때문인데,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미군이 한국에서 기지를 철수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미군 군인의 물리적인 숫자를 줄일 수는 있다. 이 책에도 언급되는데, 더이상 보병의 '쪽수' 는 그다지 중요한 전략적 개념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기지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상주인구가 있어야 하고, 기지가 설치되어 있는 국가, 지역, 주민들의 성격에 맞춰 재편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이라기보다, 미국의 지배 전략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또 크게 나뉜다.

미군들의 비행을 보도하며 반미감정을 증폭시키면서도, 미군이 쪽수를 감축할까봐 호들갑을 떤다. 

이 책이 예로 든 다른 나라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 안에 묶여있는 식민지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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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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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업작가로 세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화자는 현재 대학교수인 남편과 별거중이다. 영국에서 만난 남편과 함께 귀국해 제법 고난한 시간을 보냈고, 둘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보육원에 갈 나이쯤이 되자 대학 교수로 제법 탄탄한 기반 위에 올라선 남편은 마치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화자의 작품 활동을 위해 시간도, 장소도 아낌없이 제공했다.
 영국으로 떠난 남편과 별거하며 자연스레 그 기반들을 잃은 화자는 번역 작업을 주로 하며 근근히 아이를 살피며 삶을 이어가던 중, 자신이 2003년 문창과를 졸업하며 자비출판했던 소설 "난파선" 이 신문지상에 실린 것을 보게 된다. 게다가 작가의 이름은 자신이 아닌 "이유상" 이라는 이름이었고, 이 소설의 작가를 찾는다는 광고 문구를 발견한다.
 자신의 작품을 도난당했다는 불쾌감에 화자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광고를 실었다는 여성, "선우진" 과 만나 "이유상" 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선우진의 남편 이유상.
그는 사실 "이유미"라는 여성이었다.  

남장여성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설화들 중 하나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뮬란" 같은 작품이나, 조선시대 "방한림전" 같은 고전문학속에도 등장하고, 그리스, 로마, 이집트 신화속에도 등장한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적, 직업적으로 완벽하게 분리되어 구별되어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성으로 분장한다면, 여성들은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성으로 분장한다.
이는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그리기에 매우 적절한 장치인 동시에, 사회의 맹점을 드러내기에 매우 효율적이다.

 최근 몇년의 한국 문단은 바야흐로 여성문학, 특히 피해문학의 시대로 봐도 무방하다.
수많은 미투 폭로가 쏟아지며 이른바 "젠더권력" 의 추가 급격히 기우뚱거리기 시작했고, 문단도 그에 따라가기 시작했다. 최근 몇년간 이름난 문학상의 수상작들은 대부분 여성들의 피해를 다룬 소설들이고, 사이사이 퀴어 소설이 들어있다. 화제성이 있으면 우르르 몰려가는게 우리 문화의 특징이라면 특징일텐데, 부디 이번엔 후르륵 끓고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오랫동안 보글보글 끓어 좋은 국물이 우러났으면 좋겠다.
문학은 더이상 대중을 선도하거나 사회를 앞서갈 수는 없다. 정보의 바다는 매일매일 업데이트되고, 대중은 실시간으로 그것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시점에서 재해석되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한박자 늦게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이제 문학의 가장 큰 역할은 문제를 발견하고, 대중들이 알기 쉽게 인식토록 하는 것이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양한 계층이 동감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 최근 한국 문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기조는 그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친밀한 이방인]은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이러한 최근 한국 문학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있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를 거의 배제하고, 피해의식도 거의 발현시키지도 않고, 딱히 여성들의 연대 같은 의식적 고양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충실히 그려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의 오래된 차별은 단순히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이 남성을 이긴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어느날 하루 아침에 모든 남성이 싹 사라진다고 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성 '대결 구도'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인습적으로 규정해온 성역할은 오롯히 동물적인 분류에서 시작됐다.
체격, 근육량, 생리, 임신 등등의 신체적 특징들에 더해 정신이나 의식까지 싸잡아 "여성의 정의" 라는 프레임에 가두었다. 다른 수많은 차별들과 마찬가지로. 사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남녀의 신체적 특징들은 거의 다 상쇄되었다. 물론, 아직도 신체적 특징이 유리하게 작용되는 면이 있지만, 그런 부분들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반 동물적', 즉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남녀간의 성대결이 아니라, 소통과 타협,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하는데, 아직은 서로가 등을 돌리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친밀한 이방인] 은 매우 훌륭한 통역사와 같다.
이 작품 안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고, 서로를 돕는 동시에 상처를 준다. 남성, 여성의 차이는 없다. 오직 사회와 삶 자체가 부조리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선사하며, 그 안에서 순응할지, 극복할지는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다.
 
 [친밀한 이방인] 은 작가인 화자가 쫓는 이유미, 또는 이유상의 다채로운 인생역경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면을 날카롭고도 충실하게 담아낸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제법 정교해 보이는 인간의 공동체의 얄팍함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꽤나 부유한 축에 속하는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지원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이유미는 아버지의 몰락과 함께 사회의 변두리로 점차 밀려나기 시작한다. 부족할 것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고교 졸업 후부터 삶이 수렁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한다.
대학에 떨어졌지만, 붙었다는 거짓말을 시작으로 이유미의 삶은 거짓에 거짓이 붙어 한없이 부풀기 시작한다. 두 번의 결혼과 파혼이 있었고, 큐레이터부터 간호조무사, 의사, 작가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커리어는 의사라는 엘리트 직업에까지 이르렀고, 남편들과의 결혼생활들은 이유미의 거짓말이 드러나는 순간마다 박살났다.
하지만, 이유미는 쉽게 낙망하지 않는다. 끝끝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또 새로운 서류로, 신분증으로, 명함으로 마치 변검의 배우처럼 자유롭게 탈을 바꿔 쓰며 삶을 살아낸다. 이 모습에서 나는 꽤나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은 대단히 치밀하게 짜여져있다.
적절한 생략과 압축이 매우 효율적이고 적재적소에서 활용되어서, 전체적인 볼륨이 작은 작품이지만, 내러티브가 매우 풍성하게 느껴진다. 특히, 이유미의 삶을 쫓는 화자가 이유미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물론 이런 기법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남발되면 오히려 이야기가 산만해지고,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어려워진다. 때로는 작위적이기까지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매우 잘 활용되었다. 이유미의 탈이 주변 인물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과연 "나" 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작가의 통찰력이 느껴졌다.
많은 거짓들을 스스로 쌓아간 이유미이지만, 뜻밖에, 마지막 거짓말은 선우진의 오해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소설적으로 매우 휼륭한 접근이라고 느껴졌다.  

인간이 얼마나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애초에 '주도적' 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 조차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살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 아니냐, 고 반문할 수 있지만, 나는 자살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사회에 의해, 혹은 마음의 병으로 인해 타살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점심 메뉴도,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설계된 것들 사이에서 선택할 뿐이다. 책상이나 돌멩이를 점심메뉴로 선택할 수는 없잖은가.
지극히 동물적인 틀 안에서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제 아무리 주도적인 선택을 한다 한들, 자연재해나 전염병 한방에 모두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 중,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주도적인 삶일까??
이토록 수동적인 삶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친밀한 이방인] 은 이에 대한 작가의 물음으로 읽혔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때론 이성적으로 유리한 것들을 취하며 카멜레온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던 이유미의 삶은 언듯 주도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선택은 수동적으로 읽힌다.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와 남편, 아이를 위해 떠밀리고 떠밀리다가 불륜이라는 선택을 하고, 이혼위기를 맞이한 화자는 수동적으로 쫓기듯 살아갔지만, 마지막 선택은 주도적으로 읽혔다.
마지막으로, 이유미에 얽힌 하나의 반전과, 내 예상을 살짝 빗나간 화자의 마지막 선택이 이 질문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두 인물의 결말이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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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과 탄광
진 필립스 지음, 조혜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무엇에 홀린 듯, 서평단 공지를 보고 무심코 신청했다가 설 연휴 직전에 툭, 받았다.

연휴 기간동안 잊고 있다가, 2주 안에 리뷰를 써야 한다는 서평단 조건을 떠올리고 읽기 시작했는데, 흡인력이 대단해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었다. 


 1920년대 미국 앨라배마주 카본힐. 

카본힐은 인구의 75%가 탄광에 종사하는 광업 도시로서, 탄광노조의 중간 관리자급 인부인 베테랑 광부 앨버트는 리타라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버지, 테스, 잭 삼남매를 위해 매일매일 석탄 가루를 마시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기본적으로 매우 너그러웠고,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 애썼으며, 가족들에겐 생활력 강한 가장이었고, 광대하진 않지만 어느정도 땅을 갖고 있는 지주이기도 했던 그는 모든 이웃에게 따스한 사람이었다.

 리타 역시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내어주고, 산더미 같은 집안인을 하며 남편이 벌어오는 생활비를 알뜰하게 쪼개서 경제적으로 잘 쓸 줄 아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안주인이었다. 

고학년인 버지는 엄마를 닮아 매우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나고 있었고 맏이답게 사려깊고 동생들을 잘 챙겼다. 테스는 좀 더 말광량이 기질이 있었지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매우 활달했다. 막내인 잭은 아직 어렸지만, 아들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배 곯을 일도 없었던 이 따스한 가정에 폭탄같은 일이 벌어진다.

테스네 집은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뒷마당에는 숲에서부터 흐르는 개울이 지나고 있었고, 앨버트는 이를 생활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두터운 우물을 만들어 놓았다. 뒷마당 우물가는 테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어린 소녀의 공상의 도화지였다. 

 그 날, 어둑한 저녁에도 테스는 잔잔한 생활 소음을 BGM삼아 뒷마당이 보이는 부엌 문에 기대 어둠에 잠겨가는 숲과 우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우물 뚜껑문을 열고 무언가를 던졌다. 너무 어두워서 형체만 보였지만, 분명 아기였다.

 테스는 자기가 본 것을 가족들에게 말하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테스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다음 날, 리타가 길어올린 우물 양동이 안에서 퉁퉁 불은 아이의 사체가 발견되기 전까지 말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1920년대 중~후반 탄광마을 카본힐을 주로 다루고 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 작품 안에서는 경제 대공황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작품은 총 9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고, 각 장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작은 장들로 다시 나뉘어 있다.

이는, 20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활용되어온 기법으로 나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과 조지 R.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시리즈에서 처음 접했다. 

모든 등장인물이 각자 자신의 시점으로 서사를 이끌어간다.

이 시점들이 아주  친절하게 챕터로 나뉘어 있으며 매 챕터는 짧고 간결하다. 이러한 구조와 형식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에 집중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쉽게 따라갈 수 있다. 


시대적 정서보다는 작가 개인의 향수가 물씬 느껴지는 매우 목가적인 작품이다. 카본힐이라는 마을의 정경, 탄광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 가족들이 사는 집과 경작하는 땅, 해먹는 음식 등 소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이 따스하게 그려지고 있다.

우물 속에 던져진 아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로 시작되지만, 이렇게 따스한 필체로 버지와 테스의 성장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당시 시대상에 비춰지는 인종차별, 경직된 사회적 성 역할에 대해서도 풍부하게 담겨 있지만, 먹고, 놀고, 일하는 것을 그리듯 일체의 감정과잉 없이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볼륨이 결코 두껍지 않지만, 담겨있는 정서도 매우 풍부하고, 인물 개개인에 대한 내러티브도 풍성할 뿐 아니라, 제공되는 정보의 양도 꽤 많다.

열심히 읽다보면, 주요 인물들의 삶을 거의 다 알아낼 수 있는데, 책의 두께를 보면 '어떻게 이렇게 간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정말 필요한 이야기만 쏙쏙 뽑아 잘 만들어냈고, 감정과 정서의 흐름도 매우 균형적이다. 


나는 처음 이 작품을 펼쳤을 때, 비극적인 이야기를 상상했다.

전간기를 다룬 소설들이 대부분 그렇게 비극적이었기 때문인데, 다행히 이 가족에겐 전쟁과의 접점이 없었다. 잭의 나이로 보아 2차 세계대전은 잘 피해갔겠지만, 베트남 전쟁과 한국전쟁을 위한 징집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사건이 그것을 피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잭에게는 전쟁에 대한 공포보다, 언젠가 탄광에서 일해야 한다는 일상의 공포가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앨버트와 리타는 자식들에게 그런 삶을 피하게 해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고, 이 작품은 다행히 비극적으로 종결되지는 않았다.

작품에 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쏘아져야 하듯, 탄광은 반드시 무너져야 하는데, 다행히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진짜 다행다행)

무척 목가적이고 따스한 소설이었다.

읽는 내내 어렸을 때 작은 TV에서 봤던 [초원의 집] 같은 외화(지금으로 치면 미드.ㅋㅋ)가 떠올랐고, 연상 작용으로 그 시기의 나의 삶들도 많은 것들이 함께 떠올라서, 오랫동안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시대와 문화를 떠나 부모님이야말로 가장 영향력 짙은 선생님이고, 가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일터다.

 


p.s

재미있게도, 이 작품 직전에 시대적으로 거의 비슷한 시기를 다룬 뮤리얼 스파크의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를 읽었다.

두 작품 모두 영미권 여성 작가의 소설로 1920~40년대를 다루고 있고, 소녀들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한쪽은 대도시, 이쪽은 시골 탄광촌.

여러모로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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