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웰스
앤 패칫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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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검사보인 앨버트 커즌스는 모처럼 휴일인 일요일에 넷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세 아이의 뒷치닥거리를 피하려고 지방경찰청 형사인 픽스 키티의 둘째 딸 프랜시스의 세례파티에 참석했다. 한 주 동안 여러 범죄자들을 상대하며 진이 빠질대로 빠진 앨버트였지만, 금요일까지만 해도 주말은 온전히 임신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쏟기로 다짐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토요일 반나절을 보내자 그 다짐은 거품처럼 꺼졌다. 초대도 받지 않았지만, 직장 동료라는 핑계로 '일 때문에' 라며 집에서 빠져나올 구실은 픽스의 파티 뿐이었다.

 픽스의 둘째 딸 세례파티는 꽤 시끌벅적한 파티였다. 픽스는 사교성이 좋은 형사였고, 경찰서 동료들은 물론 커즌스와 함께 일하는 지방검사보도 초대되어 있었다. 픽스는 불청객인 앨버트를 반갑게 들였고, 앨버트도 여러 사람과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그리고, 픽스 키팅의 아내, 베벌리 키팅과 마주친다. 


 이 작품은 이혼하고 재혼한 두 가정의 여섯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픽스와 베벌리 사이에서 태어난 키팅가의 두 아이 캐럴라인과 프랜시스, 앨버트와 테리사 사이에서 태어난 커즌스가의 네 아이 캘빈, 홀리, 저넷, 앨버트가 그들이다.

1960년대 미국.

자녀의 양육권은 으레 부인에게 갔다. 남자는 섣불리 친권을 주장할 수 조차 없었고, 대신 상당한 합의금과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 까지의 양육비(때론 대학 등록금까지)를 부담해야 했다. 자녀에 대한 책임감이 별로 없어보였던 앨버트였지만, 친권과 양육비 대신 1년에 4주간 함께 있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고, 지방검사보였던 직업 덕에 어렵잖게 획득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이었다.

이 여섯 아이가 일년에 4주씩 버지니아에서 함께 보내야 하는 이유가.

앨버트는 자신의 자식들이 버지니아에 올 때마다 직장에서 일이 많아진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럴거면 왜 굳이 4주의 교섭권을 따내려고 기를 썼는지, 원...

키팅가의 두 아이와 커즌스가의 네 아이들은 모두 아주 개성이 넘쳤다.

사실 초반엔 이 아이들의 개성들이 워낙 뚜렷해서, 그 캐릭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이름은 헷갈렸을지언정, 캐릭터는 헷갈리지 않았다.

이 작품이 끊임없이 아무 징조 없이 시공간을 뛰어넘고 주된 화자를 바꾸지만, 전혀 서사가 헷갈리지 않았던 주요한 이유이다.


캘 커즌스가 가장 나이가 많았고, 캐럴라인 키팅이 조금 어렸다. 그 밑으로 캘빈, 홀리, 저넷 커즌스 순이었고, 프랜시스 키팅, 앨버트 커즌스 순이었다. 

도입부의 세례파티의 주인공이 바로 프랜시스였고, 그 때 앨버트의 아내인 테리사는 앨버트를 임신하고 있었다. (막내아들 앨버트의 이름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도입부에 등장한다. 이후, 소설에서 아빠 앨버트는 버트, 앨버트 주니어는 앨비, 로 통칭된다.)    



소설은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 시종일관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주된 화자도 자주 변하지만, 주요 화자는 프랜시스(이후 프래니)이다.

전체적인 감상부터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2019년 최고의 발견이라고 할 정도로 감명깊게 읽은 소설이다.

일단, 소설적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며, 작가의 스토리 텔링 기술이 기가 막히다.

이는 아주 독창적인 건 아니고, 제니퍼 이건 등 영미권 여성작가들에게서 먼저 보았던 기술이긴 하지만, 마치 영화처럼 씬이 바뀌는 느낌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개인적으로는 그 무엇보다도 이 스토리 텔링 기술에 푹 빠져서, 사실상 헤어나기가 힘들었다.

오렌지 향이 가득했을 것 같은 끈적한 불륜의 현장에서 순식간에 알콜냄새 가득한 병원으로. 그리고 약간 더 과거의 시끌벅적한 바bar로.

그리고 더 과거의. 더 시끌벅적한 공항으로, 그리고 한적한 버지니아의 시골로. 

그러다 또 불현듯, 어느 시점의, 어느 시간대로.

너무 자유롭게 휙휙 옮겨다니는데, 어딘가 덜컥대거나 물음표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이건 진짜 놀라운 경험이었는데, 영화처럼 페이드 아웃이나 오버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챕터가 나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시공간을 옮겨다닐 수 있는지... 헷갈려서 앞장을 넘긴게 아니라, 명확한 장치가 있었나 싶어서 앞장을 다시 읽은 책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정말정말 자연스럽고 능숙하며 관능적인 스토리텔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스토리텔링' 이라는 개념이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 



부모세대의 사랑과 이혼, 그리고 자식 세대의 사랑과 결별을 뒤섞어 40~50년대, 전후 미국의 부흥기는 프래니의 부모님을 통해서, 그리고 60~70년대는 프래니와 형제들을 통해 경제 성장의 후광을 충실히 누리며 한 세대 만에 크게 바뀐 사회 전반의 모습을 매우 잘 그려내고 있다. 서서히 변화하는 여성의 사회 참여의 형태 뿐 아니라 그 한계는 물론, 아프리칸과 동성애에 대한 인식,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등 미국 중산층의 변화 그 자체를 매우 훌륭하게 펼쳐낸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들을 녹여낸지라 정말 하고싶은 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정말 적절한 부분만 적당히 펼쳐낸 듯 하다.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다채롭고 풍성하게 펼쳐지지만, 사실 이야기의 볼륨 자체는 그리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적절하게 시공간을 뒤섞고, 굉장히 많은 생략과 압축을 통해 '잘라냄의 묘미' 마저도 보여준다. 이런 기술들은 사실 장르적 기술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순문학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다소 꺼려하는 이런 기술들과 그것들이 충분히 활용된 작품들이 유수의 문학상을 받거나 후보에 오르는 것을 보면 확실히 우리나라 밖의 작가들은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거의 나누지 않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를 떠나, 많은 작가들이 입을 모아 "어떤 이야기를 할지를 결정하는 것보다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결정하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다" 라고 말하는데, 앤 패칫은 그 힘든 일을 아주 잘 해냈다. 내러티브가 엄청나게 풍부하지만, 볼륨은 그에 비하면 그다지 엄청나지 않고, 전개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그러면서도 모든 캐릭터들의 개성이 아주 뚜렷하고, 설득력도 높다. 

그 누가 뭐래도,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기술적 완성도만큼은 흠 잡을 곳이 없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과연 하나라도 있을까?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태어남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설사, 자살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100%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심리상태, 살아온 환경, 주변에서 강해지는 수많은 압박 등,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인간의 선택을 좌우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아주 작은 것들 뿐이고, 따지고 보면 그조차도 대부분 여러 환경에 의해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이뤄낸다.

프래니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아빠와 언니의 영향이 있었지만, 프래니는 로스쿨을 선택했고, 공부를 하다보니 자신에게 공부에 대한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프래니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학업을 계속 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정도이고, 학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 몸을 팔 것인가, 바에 다니며 웃음을 팔 것인가 정도이다.

그 중 쉬운 길을 선택해도 프래니의 선택이고, 어려운 길을 선택해도 프래니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과연 프래니는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산 것일까, 아닌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은 주도적인 것일까, 그 반대일까? 

앨버트와 베벌리가 첫눈에 뭔가를 느끼고, 3년 뒤에 이혼하고, 재혼하게 된 것은 주도적인가, 아닌가.

커즌스와 키팅의 아이들이 서로 의붓 형제자매가 된 것은 주도적인가, 아닌가.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선택이고, 아닌가? 


이 작품은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을 정립하면서 무너뜨리는 동시에,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듯 하지만, 결코 많지 않음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선택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눈을 돌리면, 발길을 돌리면 다른 삶이 펼쳐질 것 같지만, 그러기 위해선 신데렐라의 마녀처럼 거부할 수 있는 거대한 뭔가가 필요하다.

홀리가 정신과 의사의 '약물치료' 를 '명상' 으로 잘못 듣게 한, 프래니가 일하는 바에 나타난 리언 포즌과 같은, 캘이 태어날 때 부터 갖고 있던 알레르기나 부모의 이혼, 때로는 몸과 마음에 생긴 거대한 종양 같은.

[커먼웰스] 라는 책은 앨버트가 초대받지 않았던 픽스와 베벌리의 두번째 아이 세례 파티가 아니었으면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앨버트와 테리사가 결혼하지 않았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한 사람의 삶은 가족, 사회, 국가라는 전통적인 네트워크 안에 허술해보이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은 그물망에 묶여있고, 아마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P.S

그런 관점에서 제목을 한번 되짚어보면, 참 여러 의미가 담겨있는 듯 하다.

'커먼웰스' 는 사전적으로는 독립된 공화국으로 republic과 비슷한 의미지만, 보다 용례가 확장되어서, 연방제 국가, 연방, 나아가 민중 결사체나 공동체에도 사용된다고 한다. 

Commonwealths of Nations 영연방,   Commonwealth of Australia 호주의 공식 국호, Commonwealth of Dominica 도미니카 공화국 등이 있고, 미국에서는 메사추세츠, 버지니아, 켄터키, 펜실베이니아 주는 공식 명칭을 우리가 흔히 '주' 라고 번역하는 state 가 아니라, commonwealth 를 쓴다고 한다. (하지만, 행정적, 의미적으로 state와 큰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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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도시 이야기
최정화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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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시에 이 전염병이 발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동휘는 시의 하급 보안/정보 공무원으로, 이 병에 관해 중앙 정부에서 주관한 집체 교육에 참가했더랬다.

병의 이름은 '다기조' 병. 피부가 하얗게 말라붙는다 해서 '다기'(daggi 동물의 보호용 껍질) 발병한 뒤, 병증이 진행되고 말기 증상까지 이겨낸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옮기 뒤에야 완치가 된다고 해서 '이조'(izo, 스스로 소멸되지 않고 이동함으로써 숙주를 떠나는 전염의 방식)라는 이름이 붙었다. 

 진행과정은 나름 정연했고, 병의 진행과정은 거의 동일했다.

불규칙한 과호흡 -> 가벼운 건망 증세 -> 갈증 -> 기침 -> 단기 기억상실, 허언증 -> 이상 음성 -> 신체 말단 근육 소실 -> 청색증 -> 자기 인식 불능 -> 신체 말단 부위의 각질화.  

 전염 과정은 불명확했다. 병자와의 접촉이 전염 요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으나, 어떻게든 전염된다는 사실 역시 확실했다.

병은 대체적으로 신체 말단 부위가 각질화 해서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끝났다. 걸리면, 신체 말단 부위를 반드시 잃게 되는 무서운 전염병. 남는 것은 '영구한 기억 손상'과 그에 따른 일종의 '현실 재인식'.

그 어떤 대책도 속수 무책이었고, 결국 중앙 정부는 병의 진원지라고 판단한 L시를 봉쇄하기에 이른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갈증과 기침 단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티가 났다. 그리고, 결국 L도시는 기억을 잃은 사람들과 하얀 각질로 뒤덮인 사람들로 가득 차다가, 결국 신체 말단 - 주로 손 - 을 잃은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동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딸을 잃고, 뒤이어 다기조에 걸린 아내가 손을 잃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전에- 이혼을 하게 되고, 결국은 동휘 역시 다기조에 걸려 하얀 석고처럼 손목에서 떨어져내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의 중요한 테마는 두가지다.

우선, '기억' 이다. 다기조병에 걸린 환자들은 손을 내주고, 기억을 잃게된다. 다기조 환자들은 처음엔 자신이 아이를 어디에 두었는지 잃어버리고,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아이가 있었다는 기억조차 잃어버린다. 많은 아이들이 실제로 다기조로 사망한다. 그리고 부모들의 상실감 또한 다기조로 잊혀진다. 그렇다면, 이 병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소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는 설정들이 눈에 띄는데, 결국, 이 병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메타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다 상관 없게된다.

기억은 한 사람을 구성하는 기본이자 전부다. 타인은 언제나 나의 경험과 그로 인해 쌓은 기억이라는 필터를 통해 마음속에 저장된다. 그것이 편견이건, 오해건, 이해건, 나를 아는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100명의 마음 속 '나' 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정보-직업, 출신지, 출신학교, 토익, 토플성적, 연봉, 가족관계 등등- 와 어우러진다.  

결국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기조병을 앓고 난 사람들은 결국 이 모든 기억이 무의미해지므로, 종이에 기록된 정보를 통해 타인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외부의 정보에 지극히 민감해지고, 언론과 대중매체에 쉽게 현혹되게 된다.

기억을 통해 쌓은 타인에 대한 경험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역시 저자가 은유하고자 한 대상이 어떤이들이었는지 제법 명확히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억에 가장 깊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의 두번째 테마인 '상실' 이다.

우리의 기억에 가장 강렬히 남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상실' 이다.

어렸을 때 한번이라도 부모님 손을 놓쳐 길을 잃어 본 경험은 있을 것이다. 그 경험은 굉장히 오래 남아 일종의 트라우마가 될 정도가 된다. 애완동물을 떠나보내거나 잃은 기억, 열심히 모은 용돈을 잃어버린 기억, 친한 친구와 헤어지거나, 사별한 기억....

사소한것부터 중요한것까지, 상실의 경험은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기조' 는 손이나 발을 대가로 기억을 앗아간다.

그리고 다기조병으로 아이를 잃은 L시의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다기조는 저주라기보다 축복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이 두 테마가 가장 극적으로 맞물리는 순간은 동휘가 병을 이겨내고 딸의 죽음을 기억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독자들에게 동휘의 상황을 명백히 알려줌에도, 이 장면에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지하철에서 읽다가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흔히, 가족을 잃는 경험을 '수족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 는 표현을 하곤 한다.

'다기조' 라는 병은 이 오랜 말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로 손발을 떼어주고, 아이를 잃은 기억을, 나아가 그 당시의 주변 인물들을 모조리 잊을 수 있다면, 많은 부모들은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 저자는 이 두가지 테마를 통해 '세월호' 를 끌어올린다. 

어느새 우리 사회가 잊어가는 참사와, 여전히 잊지 못하는 유가족들. 

어떻게든 수면 밑으로 끌어 내리려는 세력들과, 어떻게든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세력들.


 서사는 치밀하고 균일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맛이 상당하다. 

화자가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과 잃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겹쳐지며 과거와 현재, 왜곡된 기억과 진정한 현실이 끈적하게 달라붙는데도, 서사가 치밀하다고 느낀 이유는 감정의 흐름이 일관적이고, 캐릭터의 변화가 체계적이기 때문이다. 

불규칙하게 들쭉날쭉하는 왜곡된 기억과 진실이 그물처럼 촘촘히 조직되어 있어서 잠깐 집중력을 놓치면, 바로 앞페이지의 내용과 뒷페이지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런 연결성의 단락들을 통해 화자의 정신적인 상황을 적확하게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게 된다. 

모든 인물의 변화에는 이유가 있고, 과정이 있어서 인과가 명확하다. 

이 때문에 인물들이 다소 리얼하지 않은 느낌-작위적이기까지 한-이 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에 통일성을 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고 나면 그 이유가 납득이 간다. 

작가가 다루고 있는 소재와,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화자의 왜곡된 기억 안에서는 평안하고 안온한 느낌을 주지만, 진실 앞에서는 불안하고 위화감을 준다.  

왜곡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달콤하고, 편안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언론의 말을 믿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지금도 그러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그게 '통합' 이라고. 무조건 자기들을 믿고, 자기들을 따르라며.

반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말하라고. 다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공평하고 평등하게 댓가를 치뤄야 한다고.

'통합' 을 외치는 쪽에서는 이걸 '분열을 조장한다' 며 비난한다.

이거 왠지, 중국 정부가 홍콩 프리, 를 외치는 이들을 탄압하고 압박하는 장면 같지만, 어느쪽이 더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지, 공산주의에 가까운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다 잊고, 묻자고. 좋은게 좋은거 아니냐고.

그러면, 모든게 편하고 안온해진다고.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파헤치며 들추는 이들에게 말한다.

일제 강점기도, 그 당시의 성노예와 육체노역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한국전쟁때 학살당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군홧발 아래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람들과 자유를 외치다 머리가 터져 죽은 사람들, 참혹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스스로의 살갗을 불에 태운 사람들, 생떼같은 자식들을 바닷속에 수장시킨 부모들에게 말한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고. 좋은게 좋은거라고. 다 잊고, 묻으라고.

이제 그만 들추라고. 


진실은 언제나 시끄러운 법이다.

'인권' 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17세기다. 고작 400여년에 불과한 개념이다.

그 이후 계몽주의가 태동했고, 비로소 '평등' 과 '자유' 라는 이념이 등장했다.

절대왕정 시대, 인류는 얼마나 '통합' 되어 있었는가?

보통사람들은 얼마나 '닥치고' 살아왔는가??

인류가 그래도 나름 평등한 발언의 기회, 표현의 자유를 얻기까지 문명이 탄생하고 수천년이 지나서야 가능했고, 아직도 완벽히 자유롭진 못하다.

별로 오래 전 일도 아니다.

진정한 현실은 원래 시끄러운 법이고,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개념은 "표현의 자유" 다.


이 작품 안에서 과거의 기억을 잃고, 정부의 선전에 호도되어가는 사람들은 마치 나치 히틀러를 연호하는 군중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현상이 아니라, 그 상황과 현상을 자기 입맛대로 한두마디로 정리한 하나의 '의견' 에 수렴되는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의 아이콘은 언론이다.

전제군주 시대의 평민들처럼 언론들이 어떠한 한 집단, 한 단체에게 굽신거리게 된다면, 그 언론은 더이상 가치가 없어진다.


이 작품 속 다기조병 환자들처럼 말이다. 


대중도, 사람도, 언론도, 그리고 정부조차도 "모두 없었던 일" 로 치부해버린 일.

그 일을 기억하려는 사람을 도시 외곽으로 몰아내고, 격리시켜, 그 사람들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

우리 사회는 그 일을 할 수 있다.

가까운 일본만 봐라.

모든게 '오해' 라고 하지 않나.

엄청난 돈을 쏟아 피해자들을 왜곡하고,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우리에게 덤터기를 씌우고 있다.

인간의 수명 앞에서 기억은 왜곡되고, 돈 앞에서 역사는 조작되는 법이다.


"역사는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 

우리가 함께 기억할때 가치를 지닙니다."

우토로 마을을 향한 아름다운재단의 홍보 문구다.


이 책은 결국 세월호를 향한 이야기이지만,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있다.

진실은 시끄럽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괴로운 법이다.

힘센 자 옆에 빌붙어 기생하며 호도하고, 왜곡하는 일은 쉽고, 배부르고, 안온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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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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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환경주의자인 한아는 절친인 유리와 '환생' 이라는 공방겸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월세를 함께 내고 있지만, 분야는 서로 달랐다. 유리는 미술 관련된 작업을, 한아는 주로 옷 리폼 등 옷을 재활용 하는 작업을 하곤 했다. 기혼자인 유리는 오랫동안 한아와 연애중인 경민을 탐탁치 않아 했다. 유리의 눈에 경민은 절친인 한아가 마음 붙일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마음 내키면 지 멋대로 한아를 홀로 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경민은 누가 봐도 성실함과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한아 역시 반쯤은 정이었고, 반쯤은 관성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헤어질 정도로 마음이 식은 건 아니었다.  
 그 날도 경민은 캐나다 유성우를 보러 다녀오겠다며 연인인 한아에게 상의도 없이 혼자 여름휴가를 써서 훌쩍 떠났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헌데,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 경민은 지금까지 한아가 알던 경민과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좀 더 다정다감해지고, 식성도 꽤 변했을 뿐 아니라, 한아가 강조했던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등 환경문제에도 제법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였다. 제법 말이 통하는 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별했던 건, 입에서 정체모를 녹색 빛을 내뿜었다는 사실.


 

아서 클라크와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세례를 받고, 어슐러 르 귄과 필립 딕을 영접한 후, 엑스 파일과 맨 인 블랙, 닥터 후의 영향권 안에서 자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작품이었다.
곳곳에서 반짝이는 SF적 장치들이 이 영향권을 느끼게 해주었고, 이야기로 엮어내는 과정은 재기넘치진 않았지만, 발랄하게 통통 튀었다. 인물 한명 한명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고, 또렷하게 흘러나오는 메시지도 참 좋았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거의 모든 장면에서 서로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들을 배치한다.
자기 멋대로 훌쩍 떠나버리는 경민과 한 곳에 앉아서 옷을 수선하는 한아, 매사에 합리적이고 냉철한 유리와 우유부단하고 정이 많은 한아, 오직 한아만을 바라보는 달라진 경민과 경민을 의심하는 한아, 국정원 직원으로 룰에 얽매인 수동적인 엘리트 정규와 아이돌인 아폴로의 덕질로 일생을 보내는 열정적인 주영.
이 작품이 시종일관 통통 튀는 느낌을 주는 이유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캐릭터들이 다소 스테레오 타입이지만, 다채롭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서로 상반된 인물들을 꾸준히 한 장면 안에 담아내면서 끊임없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짧은 소설이지만, 풍성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캐릭터의 설정이 치밀해서 내러티브가 풍성하기도 하지만, 작가가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 넘쳐서 절제하지 못했다는 느낌도 있다. (작가 후기에서 그 이유가 다소 드러난다. ^^)
이야기가 치밀하게 직조되지 않았다고 썼지만, 인물들의 배치 만큼은 매우 영리했다.


나는 이 작품의 초반과, 후반을 매우 좋아한다. 중반은 ,'보통' 이었다.
몸의 일부가 광석으로 만들어진 외계인인 돌아온 경민은 물리적 법칙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다.
초반에 외계인 경민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고, 한아에게 다가서는 과정들은 재미있었지만, 외계인 경민과 한아가 본격적으로 연애하는 과정은 다소 김이 빠졌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그 능력을 이용해 지구에서의 부를 쌓아 생활에 편의를 더해주고, 나아가 우주 곳곳을 구경시켜주며, 부모님께 잘하고, 한아가 바라는 '지구인'으로서의 삶을 공유하는 등의 과정들은 딱히 외계인 완벽남이 아니라, 보통 로맨스물에서 등장하는 완벽남의 전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기사, 이 소설도 맥락은 로맨스 장르물이니까...
개인적으로는 육체가 있는 종족과 육체가 없는 종족의 컬쳐 쇼크급 갈등들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외려 더 완벽한 지구인 남자와의 연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지구에서 사는 동안 가지고 있어야 하는 보디슈트가 지구인형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상상력을 발휘할만한 부분이라고 느껴져서 이런 평이한 러브 스토리가 다소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이 부분에서 완벽한 부인을 만들어 낸다는 [스텝포드 와이프] 같은 작품이 연상되기도 했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이 꿈꾸는 이성상은 결국 맥이 통하는 것일까, 싶기도.
각자가 다 자신에게 맞춰주는 이성을 꿈꾸는데,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오직 여성이 남성에 순종적일 것을 강요하는 사회였으니, 여성들이 그 반대를 꿈꾸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고.
결국 , 남성중심 사회인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그런 이성과의 만남은 '외계인이 아니면 이뤄질 수 없는 꿈' 이라면, 납득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주영' 이란 인물이 그래서 이 작품 안에서 가장 특별한 요소이기도 하다. 외계에 광석 외계인 경민이 있으면, 지구엔 주영이 있다. 외계인 경민이 한아를 위해 2만광년을 날아왔다면, 지구인 주영은 아폴로를 위해 2만광년을 날아가는 여성이다.


이와 맞물려, 인간인 경민과 외계인인 경민이 대치하는 장면은 백미라고 보였다.
작품 안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기도 한데, 돌아오지 않기를 바랬던 한아, 최후의 최후에 봉착해 가장 '아쉬운 순간' 자신의 안식할 수 있는 인물에게 찾아온 인간 경민, 오직 한아만을 바랐고 모든걸 한아에 맞췄던 외계인 경민의 삼각 구도는 '인간' 와 '외계인' 의 테마가 가장 극명한 지점이었다.
마지막까지 인간 경민은 이기적인 남자였다.
그의 반대편에 있는 외계인 경민은 그 누구보다 순애보적이고 이타적인 존재였다.

한편으론, 병들어 죽어가는 인간 경민을 보며, 인간이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어가니까.
외계인 경민은 광석으로서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평화로울 수 있을지도, 그렇게 이타적일 수 있을지도, 그렇게 완벽한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강렬한 클라이맥스는 사족처럼 붙어있지만, 이 다리를 통해 뱀은 도마뱀이 되었다.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이 소설은 매우 다른 두 편의 소설이 된다. 어느 쪽이건 각자의 취향에 따르면 될 터.


에필로그는 마치 마블 영화의 쿠키영상처럼 붙어있다.
내용도 딱 그와 같다.
개인적으로는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최종 진화에 실패한 외계종족 오버로드의 도움으로 최종 진화의 대상으로 선택된 지구인 아이들이 무너져가는 지구에서 건져올려지는 장면. 이제는 내 아이도 아닌, 나아가 지구인도 아닌 아이들을, 최후의 지구인이 바라보는 그 마지막 장면.
한아는 유리와 유리 남편과 함께 광석 외계인 경민의 선택을 받았다.
아마 이제 한아는 경민의 진짜 이름을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육신을 벗고, 환생한다. 자신이 평생동안 환생시킨 옷들처럼,
아폴로가 노래하고, 주영이 덕질하는 그 영원한 우주에서.
오직 자신만을 영원히 사랑해줄 그와 함께.

 










덧: 이 작품은 절대 SF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사실, 본문에도 적었지만,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딱히 외계인이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외계인은 사실, 신에 가깝다. 그것도 항상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기독교의 신, 수호신, 수호천사 등등.

아주 오래전부터 마치 편재하듯 한아를 바라보고 있었고, 강림하듯 어느순간 갑자기 내려와 한아의 모든 고민을 일소해주고, 지구에서 완벽한 삶을 누리게 생활의 편의를 살펴준다. 

솔직히 대부분의 일들도 지구 안에서의 일이기에, 외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는 다소 떨어진다.

다만, 엔딩 부분의 구도와 에필로그에서 일종의 전화轉化(어쩌면 진화일지도 모르겠으나, 확실하진 않으므로)를 암시하는 장면에서야 외계인을 선택한 당위성을 얻는다. 

어쩌면 작가는 이 후의 이야기를 먼저 상상하고, 앞부분의 연애소설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고, 개인적 취향으로는 작가가 구체화하지 않은 이후의 삶이 훨씬 더 재밌을 것 같기도 하다.

여튼, 

이 소설은 완벽한 존재와의 완벽한 연애 판타지를 그린 소설이지-특히 여성을 위한-,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다루는 SF의 작법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덧붙인다.

덧: 이 작품은 절대 SF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사실, 본문에도 적었지만,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딱히 외계인이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외계인은 사실, 신에 가깝다. 그것도 항상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기독교의 신, 수호신, 수호천사 등등.

아주 오래전부터 마치 편재하듯 한아를 바라보고 있었고, 강림하듯 어느순간 갑자기 내려와 한아의 모든 고민을 일소해주고, 지구에서 완벽한 삶을 누리게 생활의 편의를 살펴준다. 

솔직히 대부분의 일들도 지구 안에서의 일이기에, 외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는 다소 떨어진다.

다만, 엔딩 부분의 구도와 에필로그에서 일종의 전화轉化(어쩌면 진화일지도 모르겠으나, 확실하진 않으므로)를 암시하는 장면에서야 외계인을 선택한 당위성을 얻는다. 

어쩌면 작가는 이 후의 이야기를 먼저 상상하고, 앞부분의 연애소설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고, 개인적 취향으로는 작가가 구체화하지 않은 이후의 삶이 훨씬 더 재밌을 것 같기도 하다.

여튼, 

이 소설은 완벽한 존재와의 완벽한 연애 판타지를 그린 소설이지-특히 여성을 위한-,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다루는 SF의 작법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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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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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은 1945년 1월 루마니아에서 시작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1944년 6월6일 이었다.

사실상 전쟁의 7부능선으로 히틀러 '최후의 도박'으로도 불리우는 '벌지 대전투'가 45년 1월에 있었고, 소련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바르샤바를 해방함으로써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실상이 최초로 목격된다.

이후, 45년 2월 14일에 커트 보니것의 [제 5 도살장]에 등장하는 독일 드레스덴이 폭격이 감행되고, 3월 19일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스스로 본토를 파괴하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 이 실행된다. 수용소에 간신히 살아있던 유태인들은은 대부분 이 시기에 학살당했다.

 4월 13일, 소련군이 오스트리아 빈을 해방하고, 16일 베를린 포위작전이 개시된다. 

4월 28일, 이탈리아를 탈출하려던 무솔리니가 잡혀 총살당하고, 30일, 결국 히틀러가 자살, 같은 날 독일 제국 의사당이 소련군에 점령당한다. 

5월 5일에 영국군이 덴마크를 탈환하고, 7일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9일에 동부전선에서 소련에게 항복함으로써 독일은 패망한다. 

 아직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미국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하기까지는 아직 몇개월 더 남았지만, 유럽전선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이후 소련이 8월 8일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남북 분단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흐름을 조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서 연대표를 참조했다.



다시 시계는 45년 1월의 루마니아로 돌아간다.

열일곱살의 레오폴트는 뜬금없이 소련의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게 된다. 

레오폴트는 고향 기차역에서 약 300여명의 사람들과 화물칸을 개조한듯한 열차에 실려 함께 12일인가 13일인가를 달려 수용소에 도착한다. 프리모 레비가 묘사했던 유태인 수송 열차정도는 아니었고, 최소한의 인간다움은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고통과 절망, 그리고 배고픔의 시간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다. 


 마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수용소에 대한 작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감생활에 대한 작품들은 하나의 장르라고 무방할 정도로 많고 많다.

나 역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를 반도 못 읽고 포기한 이후, 수용소의 '수' 자만 있어도 피하고 피해왔지만, 역사 장르 자체에 관심이 많다보니 어느덧, 대강 주워섬길 정도로 읽어보긴 했더라. 

추리소설을 읽으며 존속살인극을 피할 수 없듯, 인류의 전쟁사를 읽으며 수용소물을 피할 수 없다.

제 1차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향한 길을 찾은 듯 했다. 제네바 조약을 통해 적국의 포로에 대한 정책, 가스사용 금지 등 전쟁동안에도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여러 룰들도 만들어졌다.

이념과 이론, 대화와 토론, 바야흐로 누구나 꿈꾸던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수면 아래에서 들끓는 수중화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잔잔한 표면은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찢어발겨졌다. 

반 유대주의와 반 공산주의. 그리고 제국주의를 등에 입은 파시즘은 나치와 만나 유럽을 뒤흔들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자는 제네바 조약은 적국의 민가를 초토화시키는 이른바 '전략폭격' 이라는 개념 아래 조각났고, 무차별 학살과 허울뿐인 포로 수용소들이 넘쳐났다. 

패배한 적국 병사들이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평화롭게 전장을 떠날 수 있는 시절은 이미 수십년 전에 끝났다지만, 전쟁터의 군인이 아닌 일반 도시의 민간인들을 타깃삼아 무차별로 파괴하고 학살하는 시대는 처음이었다. 

오직 특정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앉을수도, 누울수도 없는 기차안에 꽉꽉 채워져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실려갔다. 서서 대소변을 보고, 서로의 무게에 짓눌려 선채로 질식해 죽어갔다. 

이는 마치 대항해시대 초기, 흑인들을 대륙으로 실어나르던 노예선과 다를바 없었다. 

이성과 이상, 철학과 사유의 시대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이 작품은 여느 수감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수기 형식으로 쓰여졌다.

다만, 여느 수기들처럼 하루하루를 꼽아가며 기록된 형식은 아니고, 서사의 흐름은 일정하지만, 수용소에서 보고, 듣고, 겪고, 느끼는 실제적, 감정적 이미지들을 취사 선택해 정서를 확장해 나가는 형식이라, 수기보다는 수필의 느낌이 강하다. 

레오폴트가 처음 수용소에 도착해서, 기한 없는 수감과 강제노역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통들이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기록되어있다. 

아침에 빵 몇백그램과 두번 나오는 양배추 수프, 사람을 석회조각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인 시멘트 공장 노역과 석탄의 찌꺼기인 슬래그를 처리하는 노역, 한벌씩밖에 주어지지 않는 옷, 속옷과 폐고무 타이어에 노끈을 묶어 만든 신발 등등... 

'인간다움' 이란 없고, 오직 노동하는 동물. 이전에 죽어간 수많은 강제 수용인들의 전례를 통한 노하우로, 최소한의 노력과 비용으로 '죽지는 않는 상태' 를 유지하며 기한 없는 노동을 하는 동물들. 

성욕은 물론, 수면욕조차 이겨내는 극심한 굶주림 안에서 사람은 사람일 수 없다.

노동의 내용이나 강도, 수용소의 생활들은 실제 체험했던 이의 수기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디테일히다. 베개 천을 이용하는 방법, 시멘트 노동이나 슬래그 노동의 방식과 형식, 수용소 내부에서 제공되는 음식의 양과 질, 그것들을 아끼고 아껴 하루를 버티는 방법,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거나, 상처를 이겨내는 방법, 이를 잡는 방법, 하물며 함께 끌려온 부부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실망하고, 죽어가고, 극복하는 내용 등등, 실제 경험하지 못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반면, 이런 끔찍하고 디테일한 상황들을 묘사하는 단어나 표현, 문장들은 지극히 아름답고 시적이다. 

끝없는 굶주림은 '배고픈 천사' 로, 피골이 상접해 앙상하게 마른 현실은 '뼈와가죽의시간' 으로, 그 어떤 감정도 없이 오직 굶주림만을 느끼는 현재의 상태는 '절대영도' 로 묘사한다. 비쩍 마른 얼굴에서 '흰 토끼' 를 보고, 까만 입 안에서 혼자 번득이는 아랫 이빨을 '석영' 으로 본다. 

살기위해 쉬는 숨, 입 안을 들락날락 하는 호흡은 '숨그네' 로, 그 와중에도 삽질하는 순간만큼은 고된 육체노동이라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수 있기에, 쉼 없이 들썩이는 삽을 '심장삽' 이라 표현한다. 한순간 리듬을 잃으면, 바로 엄청난 허기가 밀려오고, 그 고통을 죽고싶을 정도다. 그렇게 뼈와 가죽만 남아 심장삽으로 움직이는 스스로를 '구조바꿈' 이 일어났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숨그네' 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가쁜 호흡을 반복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하루하루가 고되지만, 삶을, 어떻게든, 붙들고 있다. 오직, 살고있을 뿐이다. 살아남을 뿐이다.

과연,

이들을 살아남게 하는 힘은 뭘까. 

언젠가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일까, 언제든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일까? 


 이런 수감기들을 읽다보면, 낙관적인 사람보다 비관적인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 더 높다는 내용도 함께 읽을 수 있다. 

그러고보니, 이 작품 속 화자인 레오폴트도 기본적으로 무덤덤하고, 회의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언제 돌아갈 수 있나요' 보다는, '돌아가지 못하고 죽을거야' 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다.

밤중에 끌려나가면, 총살당하리라 생각한다.

그러고보면, 나도, 군대갈 때, 영원히 전역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나도 낙관론자이기보다는 회의론자에 가까워서. 뭐든, 되리라기보다는 안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더 준비하고, 더 노력하고, 결과에 덜 상처받고, 덜 절망하기도 한다. 물론, 성취시의 만족감도 두배이기도 하고. 

(뭐 그렇다고 나도 그런 곳에서 버틸 수 있으리라는 뜻은 아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노역이란, 얼마나 큰 고통일까.

새삼 끝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죽음보다 죽음 뒤 영원하다는 사후의 영생에 대해 공황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끝이 없이 영원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지금 이 글을 쓴 순간에도 숨이 막히며, 심장이 조여든다.

때문에, 내가 기약없는 노동의 괴로움을 더 끔찍하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기약없는 수용생활은 그때문에 더 정신적으로도 괴로웠을 것이다.

이들은 삶 속에서 즐거움이나 쾌락을 희구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들을 충족시킬 수 없기도 하지만, 반복적이고 기계적이며 동물적인 노동으로 인해 감정이 거의 메말라 있다.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 1분 1초가 매번 배고팠을터다. 그리고, 이 고통은 끝나지 않고,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다. 그런 공간이라면, 감정은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레오폴트가 끊임없이 되뇌었던 '1삽질 = 빵 1그램'은 배고픈 1분 1초를 버티기 위해 고안한 일종의 주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강제노역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지만, 어느날 갑자기 해방됐다.

레오폴트는 정확히 5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수용소 인근에 러시아의 새로운 민가가 조성되고, 수감자들은 임금을 받게 된다. 

레오폴트가 수감되어 있던 수용소에서는 그동안 약 300여명이 죽었다. 레오폴트가 고향 기차역에 모였을 때의 사람 숫자와 비슷하다.

전반적인 수용소의 규모가 적시되어 있지 않고, 기록상으로도 명확한 것은 없지만,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나 '수용소 군도' 등의 기록을 떠올려보면 많게는 수천~만여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던 것 같다.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 수용소는 '굴라크(굴락)' 라는 이름으로 대표될 정도로 유명한 시설이다. 넓은 러시아 대지의 불모의 땅을 개간하고, 강제로 정착시키기 위해 전쟁포로, 정치범  할 것 없이, 표류하던 외국인들조차도 무차별적으로 굴라크에 보냈고, 많은 수용자들은 수감기간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방도가 없어 인근 정착지에 눌러 앉았다고 한다. (이런 시설은 흐루시초프때부터 조금씩 사라졌다고 한다.)

레오폴트와 함께 수감되었던 많은 사람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끌려온 나이도 꽤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5년이라는 기간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었을터다.

레오폴트가 고향으로 돌아가 편지를 받은 이발사 오스발트 예니에터는 고향에 돌아가니 아무도 없어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했다고 적었다. 특히 구직 적령기나 결혼 적령기에 끌려나갔던 사람들은 돌아간 뒤에도 막막했을것이다.

그래선지, 나는 수용소 안에서의 생활보다 복귀한 뒤의 생활들이 참 가슴 아프게 와닿았다.

아마 당시엔 그런 개념조차 없었을테지만, 레오폴트는 극심한 외상후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역시 그랬을터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10대에 떠났다가, 20대에 돌아왔다.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족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상처가 될까봐 쉽사리 묻지도 못했을터다.

레오폴트 역시, 쉽사리 그 시간들을 털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음식에 대한 집착과, 노동에 대한 갈구. 

함께 수용소에 끌려갔던 동네 지인인 트루디 펠리칸과 마주쳤을 때엔, 가슴 깊은 곳에서 연민이 치솟았다. 

둘은 서로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렸을까...

최근에 읽은 [제5도살장 ] 의 커트 보니것이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보후밀 흐라말 같은 작가들이 결국 정신병원이나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원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사실, 나는 마흔을 코앞에 두고, 묘한 정서적 괴로움을 겪고 있다. 

형들이, 서른될 땐 별 감흥 없었는데, 마흔 될땐 미칠 것 같다고 그러더니, 진짜 그렇더라.

나는 언제나 서른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스물 될 때보다 서른 될때가 더 기뻤다.

하지만, 마흔 될 땐 정말, 실제로 내 현실이 서른 될때와 거의 다름이 없기에, 더 그런 것 같다.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찼던 30대는, 돌아보니 텅 비어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들을 보낸 레오폴트를 보며 괴로운 마음을 많이 다잡을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우주 안에서, 한 사람의 인생은 오직 그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법이다.

나의 배고픔도 나의 괴로움도, 기쁨도 욕망도 쾌락도 모두 오롯하게 나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다. 

어떻게든 삶을 붙들어나가는 이유는 오직 그뿐이다.

내가 죽는 순간, 이 세상이 나에게 무의미해지듯, 이 세상 역시 내가 무의미하다.

우주적인 관점에서도 동일하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우주가 나에게 중요한 것이지, 내가 죽는다면, 우주는 없는 것과 같다.

우주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삶은, 이 우주에, 이 지구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것이다. 

내가 무엇을 성취했건, 무엇을 성취하지 못했건, 오직 나 자신에게, 오로지 나 자신에게, 오롯히 나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을뿐이다.

무의미가 예정되어 있는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나갈 것인가. 

나의 숨그네는 무엇을 위해 흔들거리고, 나의 심장삽을 무엇을 위해 박자를 맞추고 있는가. 

'인간은 산다, 단 한번만 산다'

각자의 보물을 찾아.  







참조: 이 책을 읽다보니, 전쟁 말기 루마니아에서 소련으로 독일인들이 끌려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대체 어떤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을지,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드라큘라의 고향인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를 품고 있는 루마니아는 고대 로마의 속주였다가, 중세엔 헝가리아 왕국으로 시작해, 트란실바니아 왕국으로 분리되고, 근대엔 오스트리아-헝가리 공국이었다가 오스만 제국의 강성기, 오스만의 영향권이었던 몰도바와 몰도비아 왕국을 형성했던 왈라키야와 합쳐져 루마니아 왕국이 됐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에 독립했고, 이후 1차 세계대전때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동맹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었으나, 승전국으로 큰 영토를 얻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도중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면서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1989년에 민주화가 되었다. 

이 과정은 좀 복잡한데, 이 책에서는 일단 1~2차 세계대전 사이만 알면 되니까, 이정도에서 생략.... 


루마니아는 슬라브족이 대다수로, 남유럽과 동서유럽 사이에 절묘하게 위치한 국가지만, 아주 특이하게 라틴계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마, 아주 예전부터 로마의 주요한 속주들 중 하나였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가까운 몰도바와는 거의 같은 민족, 같은 언어로 한때 통일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


루마니아는 2차 세계대전 초기엔 독일의 동맹국으로 소련을 공격했던 국가였다. 

1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국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때는 추축국의 일원으로 돌아선 과정이 궁금하긴 하지만, 역시 일단 넘어가기로...


 작가의 후기에도 등장하는 이온 안토네스쿠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의 파시즘 신봉자로 히틀러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던 정치가였다. (무솔리니와 많이 비슷하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 루마니아군은 전력을 거의 잃어, 소련군에 점령되던지, 끝까지 싸우다 패망할지의 기로에 놓이자, 사실상 실권이 없던 국왕 마히로 1세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안토네스쿠와 추축국파들을 숙청, 나치 독일과의 단교를 선언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변경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밀고와 수도인 부쿠레슈티를 함락하당고, 전쟁보상금 3억 달러와 10만명의 루마니아 노동자를 소련으로 파견하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게 된다. (참고로 이온 안토네스쿠 치하의 루마니아는 반유대주의가 상당히 강력했다고 한다. 당시 약 28만~38만에 가까운 유태인들이 학살당했고, 서부전선에서 루마니아군의 유태인에 대한 횡포는 독일군도 놀랄 정도였다고. 안토네스쿠는 전범으로 분류되어 후에 공산정권으로 이양, 총살된다.)

루마니아는 소련과의 휴전 조건으로 10만명의 노동자를 뽑아서 보내야했는데, 아마도 순수한 자국민들보다 오스트리아인과 독일인 등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차출했던 것 같다. 

특히, 17세에서 45세 사이의 독일인들이 최우선으로 차출되었고, 17세의 레오폴트가 그 대상이 된 것이다.(저자인 헤르타 뮐러의 어머니도 그랬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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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끝없는 세상 1~3 세트 - 전3권 블랙펜 클럽 46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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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7년의 잉글랜드 킹스브릿지.

 톰과 잭이 지었던 대성당은 어느새 지은지 150여년이 흘렀다. 

가난한 좀도둑의 어린 딸 궨다는 가족들과 함께 킹스브릿지 수도원 구호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노숙자와 병자들을 수용하는 수도원 구호소는 다음날인 '만성절' 을 맞아 모여든 사람들 중, 여인숙에 기거할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미사 시간이 다가오자 주교와 사제들의 행진을 보기 위해 성당 입구에 사람들이 까맣게 모여들었다. 궨다가 노린 인물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귀족. 

 궨다는 작고 어린 꼬마 여자아이였지만, 제 오빠인 필리먼보다 솜씨가 좋았다. 같은 좀도둑질을 해도 필리먼은 실수 투성이에 치안관에 잡힐뻔한 적도 많았지만, 궨다는 아직까지는 큰 실수가 없었다.  소녀는 하나님이 무서웠고 치안관도 무서웠지만, 아버지의 매질이 훨씬 더 무서웠다.


 궨다에게 주머니가 털린 인물은 제럴드 경이었다. 

부유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는 몰락해서 이름만 남은 상태. 오늘 그가 킹스브릿지의 대성당을 찾은 것은 명목상 소유권만 남아있는 작은 영지를 수도원에 기탁하고 자신과 가족들의 거처를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킹스브릿지는 영지 전체가 주교의 관할 아래 있었다. 상업, 농업, 공업 등 모든 산업은 교구 길드에 속해야 했고, 주교의 허가를 받아야했다.  제럴드경은 자신의 영지 소유권을 수도원에 기탁하고, 킹스브릿지 안에서 수도원이 마련해준 집에서 살며 매일 하루 두끼의 식사를 제공받는 피부양자가 되고 말았다. 

 제럴드 경에게는 두 아들, 머딘과 랠프가 있었다. 머딘은 제 동생보다 체구는 작았지만, 사려깊고 똑똑했으며, 손재주가 좋았다. 반면, 동생 랠프는 제 형보다 덩치는 컸지만, 성정이 포악하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머딘과 랠프는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에게 의지하는 바도 있었다. 


 킹스브릿지의 주요 산업은 양모거래였다. 분기별로 열리는 킹스브릿지 양모시장은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였고, 에드먼드는 이 곳에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인품이 훌륭하고, 사업수완이 좋은 그는 오랫동안 상인 길드의 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약점이라면 아내가 오랫동안 병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가업을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점 뿐이었다. 대신 그에겐 아름다운 두 딸이 있었다. 첫째 딸은 이미 건축가 길드의 수장과 결혼해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고, 둘째인 캐리스는 에드먼드의 장점을 쏙 빼다박은 재능 넘치는 소녀였다. 

 에드먼드의 성공에는 누나인 페트라닐라의 도움도 컸다. 페트라닐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났고,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알았다. 다만,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오직 남동생인 에드먼드의 조력자로서 만족해야 했다. 에드먼드는 페트라닐라의 이러한 장점을 모르지 않았다. 상당히 열려있는 인물이었던 에드먼드는 누나의 의견을 존중했고, 현재의 부는 그녀의 도움이 크다는 점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시대의 가부장 답지 않게 딸들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준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페트라닐라에게는 일찌감치 수도사로 종교의 길에 뛰어든 고드윈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고드윈은 페트라닐라가 여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가질 수 없었던 권력과 야심을 한 손에 쟁취할 수 있는 '아들'이었다. 고드윈은 킹스브릿지 대성당의 주인, 수도원장이라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에 닿는 길은 어머니인 페트라닐라가 그 누구보다 잘 안내해줄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족들이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만성절 미사에 참여하고 있던 그 시간, 이저벨라 여왕의 수하인 기사 토머스가 선왕인 에드워드 2세의 편지를 가지고 비밀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한명의 기사와 두 쌍의 소년 소녀. 토머스와 머딘, 캐리스, 랠프, 궨다가 킹스브릿지 인근 숲 속에서 마주치면서, 작가 추산 약 41만 5천자 이상의 거대한 서사시가 시작된다.    

 


  이 서사시의 시대배경은 1300년대 초~중반. 14세기 유럽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100년전쟁이 막 시작될 무렵이다. 이 시기의 잘 알려진 인물이라면, 단연 (게임 애호가들에게도 익숙한) '흑태자' 에드워드를 떠올릴 것이다. 100년전쟁의 수많은 전쟁영웅들 중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막 왕위에 올랐다. 이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 '흑태자' 에드워드다. 흑태자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의 칼레를 점령하기도 했고, 페스트;'흑사병' 이 전 유럽을 강타해 전쟁과 병마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시기다. 현대에 역산해본 결과 이 시기에 유럽 전체 인구의 약 1/3이 죽었다고 하니, 이 기간동안 세 집 중 한 집이 사라진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줄줄이 끌려갔다가, 철과 피의 향연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와보니, 이곳은 이미 전쟁터보다 더한 파리와 쥐떼들의 시체 뷔페였던 것이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톰의 먼 혈연인 캐리스와 고드윈,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넘어온 머딘과 랠프, 킹스브릿지에 터를 잡긴 했지만, 큰 애착은 없는 궨다와 울프릭의 이야기가 절절하게 그려진다.

재미있는 점은 톰이나 잭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머딘에게 건축의 재능을 선사했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로서 대단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완벽한 [대지의 기둥]의 속편인데, 등장인물들에게 전편의 주인공들을 1도 투영하지 않는다.


 [끝없는 세상] 은 크게 캐리스와 머딘의 러브스토리와 궨다와 울프릭의 러브스토리로 정리할 수 있는데, 서사 전체를 이끌어가는 딱 한명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단연 '캐리스' 다.

켄 폴릿은 꾸준히 대하 역사소설을 집필하며 당대 여성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듯 하다.

'스파이 소설' 을 비롯해 건축과 전쟁 등 남성 중심의 서사를 집필하던 노작가의 후반기가 신선하게 다가온 이유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3부작' 으로 불리는 [거인들의 몰락] [세계의 겨울] [영원의 끝] 연작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역시 굵은 줄기는 절절한 러브스토리이지만, 양차 세계대전과 흑백갈등이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남성사회에 눌려 있던 여성들이 어떻게 이 사회의 전면으로 나설 수 있었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캐리스는 그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인물이다. 그 감각은 '부조리' 에 대한 감각, 즉, '균형' 에 대한 감각이다.

이러한 감각은 처음엔 상업에 대한 소질로 드러난다.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누구에게 뭐가 필요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각적으로 터득하고, 행동력까지 갖춘 인물로 성장한 것이다.  

이 균형감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난다. 정신과 육체, 권력과 양심, 특히 종교인과 일반인 사이에 비틀린 균형을 감지해낸 것이다. 

이것들이 맞물려 당대의 사회제도, 왕과 신하, 영주와 농민, 남성과 여성에 대한 부조리에 대한 탐구심으로 발현되고, 그 안에서 최대한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캐리스의 이러한 재능은 평범한 사람들도 쉽게 알아챈다.

킹스브릿지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길드장의 딸이라는 휘장도 있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캐리스의 '합리성' 을 단박에 눈치챈다. 딱히 어려운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캐리스는 언제나 공정하게 대했을 뿐이다. '균형' 적으로. 사람들은 캐리스의 합리성에 매료되고, 그 리더쉽을 인정한다. 다만, 사회적으로 여성은 공적인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 모두가 아쉬워했지만, 그 누구도 그 규칙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캐리스의 합리성은 여기서도 발현된다. '합법적' 으로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귀족도, 남성도 아닌 캐리스가. 전쟁터나 무법지대도 아닌 교황과 주교의 땅 안에서. 심지어 당대 사회에서 여성은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다. 캐리스는 당대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능을 선물받았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것들을 갈고 닦을 수 없었다. 

 

한편, 머딘 역시 대단히 합리적인 인물이지만, 캐리스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예민하게 발휘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는 물리적인 감각이 뛰어났다. 과거에 해왔던 것들이 '틀렸음' 을 알았고, 그것들을 보완하기 위해 '공부' 를 하고 '계산' 을 해야한다는 점을 합리적으로 이해해낸 인물이다. 캐리스도, 머딘도 당대의 시대상에 비췄을 땐 지독할 정도로 진보적인 인물이지만, 현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단지 '대단히' 합리적일 뿐이었다.

당시 사회는 왕과 귀족을 위한 사회였다. 거기에 기독교적 세계관이 혼재되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신과 인간이라기보다 왕과 귀족이라는 지배층과 일반 백성이라는 피지배층을 고정시켜주는 안정제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왕의 이름, 신의 이름이라는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캐리스와 머딘은 이 단단한 콘크리트 안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입자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 세상에 통하는 사람은 서로밖에 없었기에, 이 둘은 급속도로 빠져들지만, 단 하나 둘이 타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결혼' 이었는데, 캐리스는 이 제도의 불합리성, 특히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사실, 여성의 모든 의무가 육아와 내조에 묶이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로 인해 캐리스는 머딘이 인정할 수 없는 선택을 하며 둘 사이는 크게 멀어지기도 한다.

이후 이 둘은 서로에 대한 마음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자신들의 균형적이고 합리적인 감각과, 그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사회와 세상 사람들의 고정관념 탓에 수많은 고난을 겪고 겪으며 또 겪어나간다.


캐리스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용기' 때문이기도 하다.

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 1300년대는 우리가 '암흑기' 라 불리는 중세의 한 복판이긴 하지만, 그래도 1200년대보다는 훨씬 '법' 적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영주들이 소작민들을 거침없이 취할 수 있었지만, 1300년대는 세속군주보다 교회의 힘이 더 강력했기에 왕이나 영주도 교회가 만든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성문법이 캐리스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을 옭아매기도 하고, 솟아날 구멍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도시 전체를, 나아가 유럽 전체를 뒤흔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100년 전쟁과 유럽 전역을 지옥으로 뒤바꾼 흑사병의 재앙이 도래하면서 등장인물들의 삶은 크게 뒤바뀐다.  


 어쩌다보니 국내에 번역되 켄 폴릿 작품들을 거의 다 읽었는데, 켄 폴릿은 등장인물들을 엄청나게 괴롭히지만, 기본적으로 해피엔딩 주의자이다. 등장인물들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정서적 폭력들은 크나큰 상처를 남기고, 때론 장애와 같은 후유증을 그 몸에 새기지만, 모두가 정신적인 성숙의 자양분이 된다. 

이 작품에서도 캐리스와 궨다는 당대의 여성이 겪을 수 있는 고난이란 고난은 모조리 다 당한다.

하지만, 그 어떤 고난도 이 여성들의 정신을 꺾지 못한다. 남성들과, 남성들이 이뤄놓은 세상속에서 자신들만의 균형을 찾아 빈틈을 메우고, 보완해서 끝끝내 자신만의 정의를 관철해낸다.


물론, 이들의 작은 성공은 소설속이라 가능할 수도 있다.

현실의 벽은 그보다 단단하고, 현실의 기득층들은 그보다 탐욕스럽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사랑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신- 운명, 섭리등 뭐든 좋다-은 그렇지 않다.


소설은 답을 주지 않는다. 작가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 답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조리할 리 없다.

작가가 언제나 책 안에 답을 넣을 수 있다면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조리할 리, 없다.

책은 문제를 제시한다. 그 문제의 답은 오직 독자들의 것이고, 각자만의 것이다.  

캐리스도 항상 옳은 선택을 한 것만은 아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고난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한 적도 많았다. 

인물들은 단지 그 세상 안에서 살기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작가는 인물들에게 고난을 던져주었고, 인물들은 그 고난을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고드윈도, 필리먼도, 캐리스와 머딘도, 랠프와 궨다, 울프릭도.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인물들도 모두 1300년대 잉글랜드 킹스브릿지에서 버티고 또 버티다, 죽어갔다. 

그들 자각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독자인 우리의 몫이다.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아쉬울 정도로 푹 빠져 읽었다.

모든 인물들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그들의 선택 하나하나에 가슴아파했고, 화냈고, 안쓰러워했고, 비통해했고, 이해할 수 없었고,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페이지. 작가추산 41만 4천 9백 9십 몇번째 단어들로 이루어진 마지막 단락.

등장인물들의 고난이 끝났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이 들었고, 그 고난의 삶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충만함으로 가득했다. 그래, 대하소설을 읽는 맛은 이런거지. 

고난에 가득찬 삶을 걸어온 머딘과 캐리스, 궨다와 울프릭 커플에게 해피엔딩 주의자인 켄 폴릿은 충분한 선물을 준비했고, 그 선물은 결국 독자들을 위한 것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대지의 기둥]의 후속작은, 사실 [대지의 기둥] 과는 사뭇 달랐다.

보다 치밀했고, 보다 격정적이었으며, 보다 다채로웠고, 보다 입체적이었다. 보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무엇보다, 보다 길었다.(그래서 나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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