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박스판 - 전7권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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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애니메이션 회사인 '스튜디오 지브리' 의 창설자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뛰어난 작화가이고, 만화가이며,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도 수년 전에 정식 발매되어 꾸준히 증쇄되며 알음알음 퍼져나간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가로써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는 애니메이션으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풍성하게 담겨있어 애니메이션 팬들에게도 필수 도서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지금이야, 만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혹은 반대로 애니메이션에서 만화로 제작되는 '원소스 멀티유즈' 가 넘쳐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를 발표했을때만 해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화산업과 그에 수반한 애니메이션 산업의 초창기였기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을 완성하고 훨씬 뒤에 스스로 애니메이터 공동체를 만들고, 제작 회사까지 만들고 난 뒤에야 자신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에는 언제나 전체를 관통하는 두개의 큰 줄기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자연이다. 

[미래소년 코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 초기작은 물론, [모노노케 히메], [벼랑위의 포뇨], [마루 밑 아리에티] 등 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언제나 자연 친화적이고, 때로는 자연 그 자체가 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강한 여성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대부분에서는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여성들이 끌고 나간다. 

초기작인 [미래소년 코난] 에서 등장하는 여주인공 '라나' 는 얼핏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동적인 여주인공 -  '민폐형 히로인' 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바로 다음작품인 [빨강머리 앤] 에서부터는 능동적이고 강한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 시작한다.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몽고메리 여사의 원작인 [빨강머리 앤] 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각색 작업 속에서 능동적이고 강인한 여주인공의 이미지를 구체화 시킨 듯 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바로 그 직후부터 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하는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중심인물, '나우시카'와 '크샤나' 는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여성 히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들은 수동적으로 남자들을 보조해주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남자들을 이끌어 세상을 변화시킨다. 강력한 적과 용기있게 대치하고, 따스히 보듬어 안기도 한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방법. 여성성으로 남성들을 제압하고 이끄는 진정한 여성 리더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후로도, [천공의 성 라퓨타]의 '파즈', [모노노케 히메] 의 '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의 '치히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의 '소피' [코쿠리코 언덕에서] 의 '우미' 와 '포뇨' 와 '아리에티' 까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여성들이 이끌어 나가게 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는 무려 12년이라는 연재기간동안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세계관을 투영하고, 스스로 보완하며 구체화 시켜나가는 좋은 무대가 된 셈이다. 

 

 

 과학 문명이 엄청나게 발달했지만, 결국 그 때문에 파괴된 지구. 

대지의 대부분은 엄청난 독기를 뿜어내는 숲 '부해' 가 차지하게 되었고,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갔던 '불의 7일' 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인간들은 대륙의 가장자리까지 떠밀렸다. 부해가 닿지 않은 일부의 땅 곳곳에 자리를 잡고 다시 새로운 문명을 시작한 인류는 중앙 집권형 군사국가인 '토르메키아' 와 도시 연합국가인 '페지테'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 밖에 수많은 부족들이 부해를 사이에 두고 띄엄띄엄 흩어져서 트로메키아나 페지테의 동맹국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우시카의 고향은 바닷가에 인접한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바닷바람과 계곡이라는 지형적인 이점으로 부해를 피해 비교적 쾌적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부족장의 딸이자 차기 족장인 나우시카는 토르메키아가 페지테의 수도를  급습, 멸망시키면서 선포한 전쟁 동원령에 의해 토르메키아의 동맹국으로써 부족의 몇몇 원로들과 함께 치열한 후계자 다툼중인 토르메키아의 4황녀, 크샤나의 군에 합류하게 된다. 일종의 부족국가 연합체인 페지테의 상징적인 수도는 제압했지만, 토르메키아에게 가장 큰 적은 '도르크' 였다. 크샤나는 페지테의 수도를 공격하면서, 지난 '불의 7일' 의 핵심 병기였던 '거신병' 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를 이용해 권력 다툼중인 오빠들을 제압하고 토르메키아의 황제가 될 야심을 불태운다. 

 

 

1982년부터 연재가 시작된 이 작품은 12년간, 7권의 책으로 완결되었다.

애니메이션이 제작된 것은 1984년. 당연히 스토리는 약 1권 정도의 분량이다. 애니메이션과 달리, 만화는 2권을 지나 3권으로 접어들면서 훨씬 방대하고 깊이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신비. 그리고, 신비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종교'. 작품의 종반부는 그 모든걸 아우르는 깊이있는 철학적 사유에서 파생된 희생의 연속으로 치달아간다. 

 

다시 주인공 '나우시카' 와 '크샤나' 에게도 돌아가보자.

이 두명의 여성은 작품 안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들이다. 

이 둘은 처음에는 남성들의 세계에서 홍일점들이 가질 수 있는 희소성을 무기로 주목받기 시작하지만, 주무기는 판이하게 다르다.

나우시카는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인 모성애를 주무기로 성장해간다. 가벼움, 부드러움, 관용, 포용. '자애' 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만한 것들을 무기로 사용한다.  나우시카가 타고다니는 '메베' 라는 글라이더 형태의 탈것이 바로 그 상징처럼 사용된다. 바람을 얼르고 달래며, 예민하게 파악하고 부드럽게 활용하는 모습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을 정확하게 투영한다. 

크샤나는 남자에 못지 않은 냉정함과 잔인함, 그리고 권력을 주무기로 성장해 왔다. 겉으로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단단한 갑옷을 항상 입고 있으며, 군대 지휘관으로써의 자질도 뛰어나다. 자신을 목숨처럼 받드는 군단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야심도 대단하다. 그녀는 여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남성성을 무기로 삼고 있는 여성이다. 

크샤나는 나우시카를 강력한 적이나 찍어 눌러야 하는 상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않고,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종류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지도 않을 것이고, 권위를 무너뜨리지도 않을 것이다, 겹쳐질 일이 전혀 없는 서로 다른 평행선 위에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때문에, 크샤나는 같은 전쟁터에서 함께 서있지만, 나우시카를 방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고, 결국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깨달아간다. 

나우시카는 신적인 존재, 혹은 선구자적인 존재로 그려지지만, 크샤나는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 그 자체를 잘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가 더욱 풍성해 질 수 있었던 건, 나우시카와 크샤나를 서로 반대편에 놓아 긴장관계를 형성시킨 것이 아니라, 옆에 나란히 놓음으로써 각자가 상대방을 의식하며 자신의 길을 나아가게 한 데에 있다. 나우시카는 나우시카의 사명을, 크샤나는 크샤나의 사명을 찾아가는 과정을 풍성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류 역사상 손에 꼽을만큼 위대한 재능을 지닌 이야기꾼임은 틀림없다.

언제나 온가족이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품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의 깊은 속내를 발견하기 힘들었지만, 12년간이나 혼을 쏟았던 이 거대한 서사시 안에서 그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신. 신과 신앙. 신앙과 허무주의. 굵직한 철학적 담론을 장대한 서사시 속에 설득력 있게 잘 녹여냈다.

이 거대한 지구 안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아주 미미하지만, 자연은 물론 이 행성을 황폐화 시킬 수도 있는 존재이다.  반면, 자연은 물론, 이 행성과도 아주 평화롭고 풍족하게 공존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인간을 개조하고, 종족을 말살할 정도로 강력한 병기에 집착하는 작품속의 인류를 보며,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과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떠오른 건 비단 나 뿐이 아닐 것이다. 

 

작품의 종반부까지 나우시카는 끊임없이 허무주의와 싸우게 된다.

나는 왜 이런 고통을 겪는가?

왜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꼭 내가 해야만 하는가?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심각한 고민의 끝에는 언제나 쉽고 편한 허무주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해서 뭐할까?

나 말고 다른이도 있지 않을까?

그냥 모르는 척,

방관하는 것이 더 편한데.

왜 나는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하고 있는가?

 

그렇게 힘겹게 도달한 거대한 진실 앞에서 나우시카는 자신의 소신을 믿고 명확한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 것이다!

생명은 생명 자체의 힘으로 살아간다!

그 아침이 온다면 우리는 그 아침을 향하여 살 것이다.

우리는 피를 토하며 다시, 또 다시 그 아침을 향해 날아가는 새다!"

7권 p. 198

 

 

"자, 다들.

출발해요.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살아야 하니까..."

마지막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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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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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카툰과 코믹스, 망가를 폭넓게 아우르는) 라는 매체는 탄생 초기부터 회화와 문학 사이에 어중간하게 놓여있었다. 만화의 시작을 이야기 할 땐 회화와 함께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언급된다. 만화는 미국이나 영국등의 타임지나 BBC등에서 '올해의 픽션' 같은 것을 뽑을 땐 각종 문학 작품들과 함께 순위에 오르기도 하고,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대형 서점의 '회화' 코너에 진열되어 있기도 하다. 반면, 일본 '망가' 의 영향을 받아 '만화' 로 발전한 우리나라에서는 '예술'의 범주에 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여전히 논란거리이지만, 사실 어떤 사람들과 어디서 누가 논쟁을 벌여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건, 한국에서 만화가는 예술가에 포함되지 않고, 한국예술가협회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만화' 와 미국과 유럽 등 서구사회의 '만화' 는 개념이 완벽하게 다르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겐 예술도 아니지만, 그들에게 만화는 예술분야 - 회화이며 문학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그러했겠지만, 아주아주 생소한 캐나다의 작가 '세스' 는 자기 고백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만화가인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잭 캘로웨이' 라는 만화가의 삶을 뒤쫓는 내용이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온타리오 런던'(캐나다의 한 도시)에 도착한 세스는 중고서점에 들러 옛 잡지들과 단행본을 구입한다. 한 세대쯤 전의 옛 잡지들을 보던 세스는 '캘로' 라는 작가가 그린 카툰에 푹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작가의 작품은 한두작품 외에 눈에 잘 띄지 않았고, 검색되는 작품도 별로 없었으며, 만화가들의 이름과 작품이 소개되어있는 일종의 만화가 인명사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세스가 캘로의 작품을 발견했던 지면은 당대 최고의 카투니스트만이 작품을 기고할 수 있었던 잡지였다. '캘로' 는 만화가로서 재능을 인정받고, 나름대로 성공한 작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기록도 없고, 작품집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아했던 세스는 '캘로' 를 직접 찾아보기로 한다.    


 작품은 대체적으로 정적이고, 내레이션과 독백, 대사가 많은 미국식 그래픽 노블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유럽풍은 반대로 그림이 많고 대사가 적다.) 그림체는 단순하고, 2도 인쇄로 꽤나 독특한 느낌을 준다. 작풍과 이야기, 메시지와 아주 잘 어우러진다.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동안, '폴 오스터' 의 [환상의 책] 이 떠올랐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삶의 모든것을 잃어버린 중년의 남자가, 한 세대 전의 코미디언 '헥터 만' 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와 스스로를 구제불능에 외골수라고 여기고, 만사가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세스가 한 세대 전의 만화가 '캘로' 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는 묘하게 닮아있다.   

하지만,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가 좀 더 쉽고, 편하게 다가온다.

주인공 '세스' 를 보는 내내 내 자신이 아주 많이 이입되었다. 자신의 여러가지 단점들을 잘 알고있고, 외골수에, 가끔은 우울해하고, 크게 만족하지 못하지만, 크게 부족하지도 않은. 평범하고, 보통의 젊은 남자.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며, 그걸 무척 좋아한다는 점도 비슷하고, 중얼중얼 불평 불만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가끔은 친구가 영화를 보러 가자그러면 주머니에 돈이 없어 거절할 때도 있다는 점까지.ㅋㅋ

만화가로서의 삶은 생각보다 그리 기쁘고 즐겁지 않다. 수시간동안 애써서 그린 그림은, 그냥 종이 한장에 불과하다. 디지털 작업이 많은 요즘엔, 수시간동안 애쓴 그림은 그냥 Delete 키 하나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지고, 며칠동안 그려서 올린 만화는 스크롤 몇번이면 끝나버리고, 허허한 댓글 한두줄로 대가를 지불받는다. 지금까지 내가 그려온 그림들 역시 나이먹고 이사다니는 사이에 폐휴지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부분의 만화가와 미술가, 소설가들은 그렇게 사라져간다. 


"한 생 다 살고 나면 결국 이깟 종이 몇 장 남고 끝이란 말이야?"

p.108


세스가 찾아나서는 '캘로' 는 어쩌면 세스 본인의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다. 

태어나고, 꿈을 꾸고, 그 꿈을 좇다가, 어느정도 지점에 오르지만,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고, 가족을 이루고, 죽고. 

세상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연속이 아니야.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이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냥 끌려 다니는 거지.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면 '좀 다르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게 마련이지만, 그것 정말 보통 의지로는 안 되었을 걸세. 그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그러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했을거야."

p.155


팀 보울러는 [리버보이] 라는 작품을 통해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긴 소년을 통해, 그냥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임을 에둘러 표현했다. 세스 역시 캘로를 찾아다니던 도중에 만난 캘로의 늙은 이웃에게 비슷한 뉘앙스의 한마디 말을 듣는다. '그냥 끌려 다니는 것. 그것이 인생'. 그냥 흘러가는 것. 그것이 인생. 


그렇다.

삶이란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란 그리 거대한 존재도 아니다. 심지어 자기 삶 안에서도 말이다. 

작고, 소소하고, 하찮아보이는 일들의 반복이 삶의 대부분이고, 어쩔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 제목에 더 공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작고 소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인생이고, 인간이지만 지나치게 우울해할 필요도 없다. 

딱히 강해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딱히 지나치게 아둥바둥 발버둥 칠 필요 없다. 아프면 아파하고, 슬프면 울고, 미우면 미워하고, 기쁘면 기뻐하고, 행복하면 행복해하고, 사랑스러우면 사랑하고, 즐거우면 즐거워 하면 된다.  강해지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좌절하고 더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그리고 사실 그다지 강해지지도 않는다.

그저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제법 괜찮을 수 있는게 인생일터.


작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너무 아둥바둥 할 필요 없다고.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니까, 

딱 서서, 

버텨보자고.


 

 

 

 

 

덧: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무척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

진정 '읽는' 만화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작품.

만화 자체로서도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캐릭터와 편안하면서도 단조롭지 않은 연출과 구도는 깊이 공부해볼 만 하다.

최근 국내에도 웹툰을 통해 자신의 자전적인 -신변잡기적인- 작품을 그리는 작가나 지망생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하다.

자전적인 만화라고 주구장창 얼굴만 나오는, 독백과 내래이션만 나오는 만화는 '만화' 로서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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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3 : 디럭스 에디션 시공그래픽노블
그랜트 모리슨 지음, 임태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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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의 특성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미래의 총입니다. 

내일의 전쟁에서는 보시는 바와 같이 동물을 원격 조종하여 싸우게 될 것입니다.

생물병기입니다. 의원님.

인간의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미국 비밀 연구소에서 생체 병기가 완성되었다.

동물들을 소재로 한 Animal Weapon, 통칭AWE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이다. 세 기의 시험기가 탄생했고, 그들에게 WE3 라는 코드명을 붙였다. 개犬가 팀의 리더로서 코드명 원One, 고양이는 투Two, 토끼는 쓰리Three 로 불리게 되었다. 팀 WE3는 작은 몸집과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빠른 감각으로 통풍구와 하수구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위험한 임무들을 충실히 수행한다. 테러조직을 소탕하고, 미국의 적이 될만한 요인들을 성공적으로 암살해 낸다. AWE 프로젝트를 총괄한 상원의원은 대량으로 양산형 모델을 생산하기 위해, 시험기들을 폐기처분 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물인 로잔느 베리 박사는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베리박사는 자신의 자식같던 WE3 멤버들을 베이스 연구소에서 탈출시킨다.  



최첨단 탱크 한 대 급의 화력을 갖추고 있는 개犬- 원 , 스텔스 기술이 접목되고 강력한 살상무기로 무장된 고양이 - 투, 지뢰와 독가스 등 대량 살상 무기를 장착하고 있는 토끼 - 쓰리. 이 위험한 병기들을 제압하기 위해 수많은 군인들이 동원된다. 

하지만, 인간의 수배가 넘는 반응속도와 감각을 가지고 있는 WE3에게 군인들과 평범한 무기들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최첨단으로 무장되었으며,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는 것은 가차없이 말살시키도록 프로그램 되어있는 최첨단 생체병기였으니까. 







 이 작품은 이제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미국의 메이져 만화사 '마블'과 'DC'가 아닌 '버티고VERTIGO' 라는 회사에서 나온 작품이다.  버티고는 히어로물 일색인 마블과 DC와는 달리 성인 취향의 진지하고 어두운 작품들을 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V 포 벤데타] 같은 작품들도 버티고가 발굴해낸 역작이다.

WE3 역시 잔인하고 참혹한 묘사가 여과없이 등장한다. 사실, 이정도 묘사는 요즘 아이들이 즐기는 게임이나 만화 등에 비하면 별 것 아니긴 하지만, 국내에서는 [19금] 딱지를 붙이고 발간되었다. 


 작품의 플롯은 아주 단순하다. 

불가능한 임무들을 충실히 수행했던 생체병기 WE3. 하지만, 인간도 아닌 동물 - 그것도 미국 전역의 어느 가정에서나 쉽게 만나볼법한 개와 고양이 그리고 토끼가 모여있는 팀의 해체와 팀원들의 '처리' 는 그들에겐 너무나 쉬운 명령이었다. 이들은 프로그램 유지를 위한 약물 공급만 끊겨도 죽어 없어질 존재들이었다. 그런 WE3 였지만, 인간들의 제어를 벗어난 이상 그들은 우리를 벗어난 맹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특히 정식으로 AWE 프로젝트를 국책사업으로 지원을 받고자 하는'윗대가리' 들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았을 터. 결국 군대를 동원해 연구소를 탈출한 WE3를 제거하려고 하고, WE3 멤버들은 생존을 위해 그들만의 전쟁을 시작한다.


 할리우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전쟁에 특화된 유능한 요원들이 실컷 부려먹히다가 결국엔 효용가치가 떨어져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으로부터 쫓기게 되는 내용. 그런 내용에 주인공을 '동물'로. 게다가 인간들이 가장 사랑하는 동물로 바꾸면 된다. 충분히 교육받고 약간의 말을 할 정도로 언어능력까지 습득했지만, 그래도 동물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 부분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 개犬 인 원은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아주아주 충실한 살인병기 애완견이고, 고양이인 투는 비록 제멋대로인 성격이긴 하지만, 리더인 원을 존중하는 살인병기이다. 토끼인 쓰리는 역시 제멋대로인 모습을 보일때도 있지만, 순한 초식동물의 습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살인병기이다. 

 동물들은 살인병기로 개조되었음에도 애완동물로서의 모습을 유지한다. 주인에게 사랑받던 애완동물로서의 본능이 또렷하지만 자신들에게 적의를 갖는 대상은 가차없이 '처리' 하도록 '프로그램' 되었을 뿐이다. 주인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한다. 물론 '자신에게 적의를 갖지 않는 한.' 

 그런 연출들이 굉장히 감성적이면서도 만화적, 문학적으로 잘 그려져있다. 모든 컷들이 굉장히 많은 고민을 통해 앵글과 시선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림들도 모두 일러스트처럼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컷 하나를 봐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는데, 각 컷의 많은 앵글들이 동물의 시각을 표현하기 위해 애쓴 흔적들을 가지고 있다. 주로 인간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점이라던가,  인간보다 훨씬 빠른 동체시력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의 시선을 정적인 네모칸 안에 넣기 위해 시도한 여러가지 표현방법들이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디럭스 에디션' 이라는 제목답게 책의 말미에 DVD의 서플먼트처럼 작가들의 말이 실려있다. 특별한 컷에 대한 작가들의 의도와 아이디어 발상 과정, 작업 과정등이 상세하게 실려있는 것이다.  이런 친절함들을 통해 작품을 더욱 깊이있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미국 만화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 나아가 미국 문화의 근간이나 다름없다. 

만화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고, 글과 그림을 통해 다양한 연상작용을 도와주기에 전달력이 그 어떤 매체들보다 빠르다. 미국 만화는 히어로물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했지만, 수많은 스토리 텔러들은 그런 만화를 통해 수많은 메시지들을 전해왔다. 슈퍼맨은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에서 수많은 친구들, 자식들을 전쟁터로 내보내고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태생 자체가 반전反戰과 생명존중에 대한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배트맨, 스파이더맨, 헐크와 같은 히어로 캐릭터들은 물론이고, 렉스 루터나 조커 같은 악당들 역시 모두 범인류적인 메시지는 물론, 문학작품들 처럼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의 이면들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WE 3] 는 보다 또렷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대단히 쉽게 펼쳐내고 있다.

생명 존중은 비단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들. 

그런 메시지들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애완동물들을 통해 적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종일관 비극적으로 흘러가던 이야기는,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몇 사람에 의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다.

해피엔딩의 키는 두명의 과학자와 한명의 노숙자가 쥐고 있다. WE3 멤버 중 하나였던 토끼와, 토끼를 닮은 박사 한명이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다른 둘을 살려낸다.

인간들에 의해 길러지고, 인간들에 의해 개조되고, 인간들에 의해 다른 인간을 죽이도록 명받은 순수한 동물들은 다시 자신들의 자리인, 사람의 품과 무릎 위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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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수사대 박스 세트 - 전4권 - 진정한 협객의 귀환!
이충호 글 그림 / 애니북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무림수사대]는 사실 아주 새롭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아주 익숙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풍을 쏘고, 하늘을 걸어다니는 환타스틱한 무협의 세계를 서울이라는 도시로 끌고 왔을 뿐이다. 녹림방, 흑룡방, 개방 처럼 무협지나 무협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무림 세력들이 존재하고, 치열한 암수와 화려한 무공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절정의 무공과 절세의 비급, 신묘한 무술들도 모두 등장하며, 세상의 일과 무림의 일을 구분짓는 무협물의 특색도 여지없이 등장한다.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면, 무림이 아닌 무림 바깥, 즉 세상일을 담당하는 '경찰' 이 주인공인 것이고, 이 경찰 내부에 '무림' 일에 관여하는 부서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무림' 이란 일종의 초인집단이다. 우리 사는 세상 속에 일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셈이다. 무공을 사용하는 인물들은 '초인' 으로서 일반 소시민들과 접촉하는 일을 줄여야 한다. "강호의 일은 강호에"(강호와 무림은 내용상 동의어이다.) 많은 무협물들은 고강한 무공을 이용해 정부와 역사에 관여하려는 집단과, 그것을 막으려는 집단간의 갈등을 그리기도 했다. 

 [무림수사대] 에서는 애초에 그런걸 막는 공권력을 지닌 무림인 집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목과 같은, 대한민국 경찰에 소속되어있는 무림수사대인 것이다. 이들은 무림인들이 무공을 사용해 평범한 시민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는다. 무림인들끼리의 정당한 대결은 용인하지만, 그것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시민들에게 해악을 준다면 공권력의 이름으로 응징하는 것이다. 


 주인공 '지후'는 바로 무림수사대 소속 경찰이다. 

1년 전, 파트너를 잃고 방황하다가 서울 마포구 소속 무림수사대에 파견된 지후. 그곳에서 지후는 새로운 파트너, 팀원들과 새로운 사건을 맡게 된다. 대한민국 무림의 최고수들인 '오대신군' 들이 한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 무림을 떠받치는 큰 문파의 장문인들이기도 한 이들은 사실상 힘으로 모든것이 좌우되는 무림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적절하게 견제하면서 미묘한 균형을 이뤄내고 있기도 했다. 최고수들과 그들의 세력이 흔들린다면 무림은 다시 혼란 속에 빠져들 것이고 그것은 일반 시민들의 사회에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무림수사대는 그러한 점을 막기 위해 오대신군의 살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고, 지후와 팀원들 역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사건을 조사하면서 지후는 1년전에 죽은 파트너, '이현' 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의 큰 틀은 전형적인 무협물의 그것과 같다.

장르의 특성상, 클리셰는 피할 수 없다. 이미 '무협' 이라는 장르 안에서 나올 수 있는 플롯은 모두 다 나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무공' 이라는 소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핸디캡도 있다. 결국 정해진 틀 안에서 정해진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빚어내느냐가 관건이다. 결국은 클리셰를 얼마나 잘 갖고 노느냐가 관건이다. 

'만화' 는 이야기의 클리셰에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연출자의 역량이 너무나 크게 좌우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림 실력과 그림체, 컷의 모양과 크기, 배치, 앵글, 캐릭터 디자인, 디자인적 센스, 회화적 센스는 물론, 대사와 말 주머니 모양, 효과음의 레터링까지. 거기에 문학적인 연출기법까지 활용하면 한가지 플롯으로도 수백가지의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이충호 작가는 오랜 필력답게 그 모든걸 다 활용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먼저 명랑 만화 [마이러브] 에서부터 시작되던 소년 만화틱한 그림체에 기괴할 정도의 변형을 대담하게 주고, 먹을 많이 사용해서 그림에 무게감을 얹었다. 비교적 어두운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그림체를 변화시킨 것이다. 덕분에 '무협' 과 '경찰' 이라는 소재들과 어우러져 느와르 영화같은 분위기를 잔뜩 풍기게 됐다. 컬러의 사용 또한 탁월했다. 전에 웹에 연재할 당시 작가 본인이 직접 설명하기도 했는데,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메시지를 컬러를 활용했다. 작가의 메시지를 전함과 동시에, 흑백의 나눔이 분명한 원화와 톤으로만 변화를 준 컬러링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끌어 올릴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마이크 미뇰라의 [헬보이], 마크 밀라의 [씬씨티] 등을 효과적으로 벤치 마킹하여 웹툰의 그래픽 노블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웹툰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 - 그림 퀄리티의 하락 - 를 일소하는게 크게 기여했다.  


가로 연출에 익숙한 출판만화 시대의 작가가 웹툰에 적응하기란 아주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훌륭하게 세로 연출 작품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다시 가로 연출로 편집한 애니북스 편집부측의 센스도 충분히 칭찬할 만 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라고 할만한 강렬한 도입부인데, 마지막 부분, 책의 양면이 나뉘는 부분을 활용한 모양새가 정말 빼어나다.

책 곳곳에 이런 센서블한 편집들이 눈에 띈다. 웹툰으로서도, 웹툰을 책으로 옮긴 작품으로서도 대단히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강렬한 색채의 대비. 

작가는 의도적으로 테마 컬러를 적절히 활용한다. 

캐릭터의 성격과 시퀀스의 성격을 동시에 드러내며 그 안에서 작가의 함의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액션씬들을 빼놓을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하는데, 이 부분은 작가의 고집이 느껴지기도 한다. 전체적인 완성도에서는 훌륭하지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정련되고 무거운 느낌이라 다소 경직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부분에서 세로 연출을 처음 하는 가로 연출 전문 작가의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연재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픽 노블에 대한 의식을 많이 한 듯, 구어체의 대사도 지나치게 사용한 감이 있어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후속작들에서는 이러한 경향들이 많이 감소되었다.) 


[무림수사대]는 전반적으로 아주 훌륭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무협' 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권선징악' 이다. 작품의 성패는 나쁜놈은 얼마나 악랄한가, 주인공은 얼마나 큰 고비를 겪어내며 영웅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그리고 나쁜놈은 어떻게 응징되는가에서 갈린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100점짜리 무협장르물은 아닐수도 있다. 권선징악보다는 주인공 지후의 내면적인 성장과 과거의 청산에 대해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부분은 태생이 '소년'만화가인 작가의 본성일 터. 장르에 충실하지 못했다기보다, 장르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주인공 지후는 몸은 어른이지만 소년같은 인물이다. 소년만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지만, 가족처럼 따르던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이 깊게 박혀있다. 지후의 과거가 '이현' 이라면 지후의 현재는 '백운' 이다. 그리고, 지후는 '소년' 이기에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과거를 직시하고 현재를 밟아야만 가능하다. 이충호 작가는 이러한 메시지를 무협이라는 '과거' 와 웹툰이라는 '현재', 그래픽 노블이라는 '미래'로 담아냈다. 지후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일면이기도 하지만, 한국 만화가 처해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한국 출판만화 시장은 죽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일터다.

하지만, 언제나 생로生路는 사로死路 안에 있고,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법. 

웹툰은 새로운 만화의 활로로 발전해 나가고 있고, 지금도 수많은 작가들이 골방에서 종이와 펜과 잉크로, 타블렛과 모니터로 꿈을 그려가고 있다. 그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위로와,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ps. 비슷한 느낌의 무협만화를 한편 소개하자면, 단연 '브레이커'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충호 작가와 같은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스토리 작가 '전극진' 이 글을 쓰고 '카마로' 라고 필명을 쓰는 '박진환' 작가가 그림을 그린 '브레이커' 라는 작품이다. 1부가 10권으로 완결되었고, 2부[브레이커 N.W] 가 다음 웹툰에서 연재중이며 현재 3권까지 발간되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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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 웃는 남자 세미콜론 배트맨 시리즈
에드 브루베이커 지음, 김동욱 옮김, 더그 만케 그림 / 세미콜론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폭력과 증오가 판치는 고담시에 짐 고든이 부임한 시기와 배트맨이 나타난 시기는 거의 같았다. 

그로부터 1년.

메트로 시티와 키스톤 시 등에서는 '슈퍼맨'이나 '플래시'같은 슈퍼 히어로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담시는 부패한 시의회와 밀착되어있는 경찰은 아직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짐 고든 반장이 직접 관리하는 부서는 쓸만한 경관들로 채워졌다. 고담시의 강력 범죄들은 짐 고든과 정의롭던 시절의 하비덴트를 계승한 몇몇 검찰들, 배트맨에 의해 조금씩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 아니, 그런 것 처럼 보였다.



이엄청난 살육의 현장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죽은지 한달이 다 된 시신도 있던  지옥도와 같은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 하얀 얼굴의 괴인이 나타나 고담시에 선전포고를 한다.


"모두 죽여버리겠다!"

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한다.


요구사항도, 교환조건도 없었다.

일방적인 '살육예고'.

그에 앞서 괴인은 몇몇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을 먼저 죽이겠다고 예고한다.






배트맨과 짐 고든이 예고된 연쇄살인을 막기위해 노력하지만, 매번 한발씩 뒤쳐진다.

괴인이 예고한 인물들은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도 속수무책으로 괴이한 죽음을 맞이했고, 고담시 언론들은 그 괴인을 '조커' 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배트맨 역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광기어린 천재 싸이코 패스 범죄자를 맞아 고군분투하며 그의 정체와 최종 목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오히려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럼 대체 내가 무슨 수로 광인의 속셈을 읽는단 말인가?

이런 상황은 결코 예상치 못했다.

애당초 이 일을 시작할 때 내가 예상한 상대는 어디까지나 살인자, 약물 중독자, 성범죄자 같은 자들이었다.

극한 상황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발악하는 자들 말이다.


이번 조커 같은 상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p.53



'배트맨' 타이틀을 꾸준하게 펴내고 있는 '세미콜론' 에서 펴낸 이번 타이틀엔 표제이기도 한 [웃는 남자] 와 [나무로 만든 것] 이라는 두 작품이 실려있다. 그 중 [웃는 남자]는 배트맨과 조커의 첫 조우를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이전에 국내에서 정식 출간되었던 [배트맨: 이어원] 과 [킬링 조크] 와 함께 보면 아주 좋다. 그림의 스타일과 분위기, 이야기의 흐름도 완벽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웃는 남자]의 전체적인 내용은 팀 버튼 감독이 연출했던 첫번째 [배트맨] 영화와 유사하다. 조커 역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스 레저의 조커보다는 당시 잭 니콜슨이 연기했던 조커와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다. 

[웃는 남자] 에서 쓰인 대량 살인의 플롯은 사실 만화와 영화를 막론하고 가장 많이 쓰인 플롯이다. 클리셰에 가까운 플롯이지만, 사실 이 플롯 자체가 '조커' 라는 인물 그 자체와 다름없기에 백번이고 천번이고 되풀이될 수 밖에 없다. 조커는 이 작품 안에서도 기발한 양동작전으로 배트맨과 고든의 눈을 속이고 고담시의 시민 모두를 죽이기 위한 잔혹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시켜 나간다.

배트맨은 '탐정' 기질을 앞세워 조커가 일전 자신이 마주쳤던 '브라더 후드' ([킬링 조크] 참조) 라는 범죄자임을 간파해내고, 그가 저지르는 연쇄 살인을 막고, 그 이면에 숨겨놓은 대량 살육의 계획을 분쇄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두번째 작품인 [나무로 만든 것] 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고든이 고담시 경찰청장까지 맡았다가 정년 은퇴까지 한 뒤를 다룬다. 

 
배트맨 타이틀에서는 '짐 고든'이 '배트맨'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의 시점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작품집에 실린 두편의 작품 모두 그러하다. 배트맨 타이틀은 특히 '제 3자가 배트맨의 활약을 감상하는' 식의 스토리 텔링 기법이 많이 쓰이는데, 이번에 배트맨을 관찰하는 사람은 제 1대 그린 랜턴 '앨런 스콧' 이다.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 전 청장 짐 고든. 그와 배트맨은 이번 연쇄 살인이 40여년전에 있었던 연쇄 살인사건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범인을 찾기 위해 각자 자기만의 방식대로 수사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40여년 전 연쇄 살인 사건에 직접 관여를 했던 당사자이자 반지의 힘 '스타하트' 덕에 조금도 늙지 않은 그린 랜턴 앨런 스콧이 배트맨과 행동을 함께 하게 된다. 


강력한 반지의 힘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앨런 스콧과는 달리 평범한 인간인 배트맨.

그는 현재와 과거의 접점을 찾아 범인을 파악하고, 범인의 심리 상태를 프로파일링 하며 정석대로 사건을 추리해 나가고, 초인인 그린 랜턴  앨런 스콧은 그런 배트맨의 방식에 큰 감명을 받게 된다. '인간 본연의 강함' 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한편, 현직에서 물러났으나 사건을 모른척 할 수 없던 짐 고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동원해 차근차근 범인을 추리해 나간 결과, 범인의 정체를 거의 알아내게 되고, 그 순간 크나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DC의 영웅 모임인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 의 양대 거물인 슈퍼맨과 배트맨은 서로를 각각 '보이 스카우트' 와 '탐정 나으리' 로 부르곤 하는데, [나무로 만든 집] 은 배트맨이 왜 '탐정 나으리' 로 불리우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배트맨의 탐정 기질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마치 고전 추리물처럼 차근차근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정석적인 추리 서사 기법을 만화로 잘 풀어내고 있다. 외려 그렇기에 조금은 지루하게도 느껴지지만, 클래식한 스토리 텔링이 주는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식으로 충분히 상세하게 담긴 각주의 해설도 친절하다. 



개인적으로는 국내에 정발된 마블과 DC의 작품들 중, 보다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DC의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 마블의 작품들이 영화 '어벤저스' 의 영향 때문인지 과거의 명작들보다는 비교적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 위주로 런칭하는 반면, DC의 작품들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명확한 원 이슈의 작품들을 위주로 런칭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들은 주로 뛰어난 스토리 텔러들을 영입하여 짜임새있는 이야기를 구성하기 때문에, 완성도가 상당하다. 

[배트맨: 웃는 남자] 도 상당히 깔끔하게 완성되는 두편의 이야기가 잘 담겨져 있다.

상당히 만족스러운 작품집.

배트맨과 조커에 대한 다른 시각을 또 느껴볼 수 있는 작품.

기회가 된다면 꼭 [배트맨: 이어 원] 과 [배트맨: 킬링 조크] 를 함께 읽는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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