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거리
아사노 이니오 지음, 이정헌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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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타스쿠. 

원래 언덕이었던 토지를 깎아 아파트 단지를 세워서 채광이 좋다고 주민들은 '빛의 거리' 라고 부르는 이 뉴타운에 아빠와 단둘이 거주하는 타스쿠는 뜻밖에도 '자살 도우미' 이다. 학교에도 가지 않고 시간이나 죽이려고 아빠의 노트북을 빌렸다가 자살 지원자들의 커뮤니티 사이트를 발견한 타스쿠가 생각해낸 돈벌이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비용으로 자살 지원자를 찾아 자살을 도와주고 그 최후를 지켜봐 주는 것이다. 타스쿠는 자살할 사람들이 자살하는 그 순간까지 용기를 갖고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자살하는 사람의 휴대폰을 챙김으로써 소임을 다한다.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인 타스쿠에게는 하루코라는 열 여섯살 짜리 여자친구가 있었다. 

연인까지는 아니고, 호감은 가지고 있지만, 서로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묘한 관계인 친구였다. 학교를 안 가고 텅 빈 아파트 단지안에서 마음을 나눌 만한 사람은 타스쿠에겐 하루코, 하루코에겐 타스쿠 뿐이었다. 어느날, 타스쿠는 밤에 자판기 앞에 나왔다가 총을 머리에 대고 있는 한 중년의 남자를 발견한다. 딸과 아내를 죽이고 나왔다며, 신세한탄을 늘어놓은 남자는 타스쿠에게 방아쇠를 당겨달라고 부탁하고, 타스쿠는 자살 도우미의 본분을 살려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 남성의 머리에 총을 쏜 것이다. 

타스쿠는 평소처럼 죽은 남자의 휴대폰을 챙기던 도중,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을 발견한다.

귀찮아하며 휴대폰을 끄려고 했던 타스쿠는 휴대폰 액정화면에 뜬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바로 하루코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타스쿠는 하루코의 아빠의 머리에 총을 쏜 것이다. 



 이야기는 크게 세 덩어리의 이야기가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 

가장 중심적인 이야기는 타스코와 하루코 이야기이고, 그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호이치에게 딸려 있는 가족인 사토시와 호이치인지 사토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둘 중 한명의 딸이라고 생각되는 모모코로 이루어진 묘한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약간은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으며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만화가인 노츠와 사요 커플이 등장한다. 

이 셋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착실하게 진행되어 나가며 '빛의 거리' 에 살고 있는 다른 주변 인물들도 골고루 등장하며 전체적인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도심과 멀찍이 떨어져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모여있는 이른바 '뉴타운' 은 처음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심 주변의 위성도시에 이른바 '신도시' 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도심지역에 집중되어있는 인구를 분산시키고 위성도시들을 발달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 방식은 일본으로 유입되었고, 뒤이어 우리나라에도 유입되어 지금은 서울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일찌감치 이 방식의 실패를 인정하고 대규모 뉴타운 건립 계획을 모두 철회했으며, 일본에서 역시 그 부작용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우후죽순으로 개발된 수많은 뉴타운들은 더이상 새로운 인구 유입이 되지 않아 고령의 노인들만이 거주하는 일종의 유령도시처럼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의도했던 도심의 인구분산도 이뤄지지 않고, 주변 개발 역시 이뤄지지 않으며 일종의 고립된 섬처럼 정체되어 버렸다. 

이런 현상을 소설로 옮겼던 것이 '오쿠다 히데오' 의 [꿈의 도시] 라는 작품이었다.


[꿈의 도시] 와 [빛의 거리]를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글로 묘사된 '꿈의 도시' 의 황량한 느낌과  아사노 이니오의 펜터치로 묘사된 '빛의 거리' 의 황량한 느낌은 대단히 흡사하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거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도 묘하게 접점이 있지만, 시기상으로 뉴타운이 고스트타운이 되기 전에 발표된 아사노 이니오의 [빛의 거리]가 좀 더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만화의 장점을 살린 넉넉한 상상력과 자극적인 소재들 역시 눈에 띈다. 


아사노 이니오는 일본에서도 문학적인 만화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만화가 소설이 되고, 드라마가 되는 이른바 '원소스 멀티 유즈' 가 활발한 컨텐츠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전작인 [소라닌]의 경우에는 원작이 거의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져 소설로 발표되기도 했고, 영화 역시 원작의 시나리오가 거의 그대로 브라운관에 옮겨지기도 했다. 

만화만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문학적인 묘사를 즐기며 현실의 이야기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원고지 위에 옮겨 넣기를 갈구하는 그의 성향은 [소라닌], [빛의 거리]를 이어 최근작인 [잘자, 뿡뿡] 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사실, [빛의 거리] 는 전작인 [소라닌]과 근작인 [잘자, 뿡뿡] 에 비하면 가장 단점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일단 중심적인 인물인 타스코가 가지고 있는 지나치게 싸이코패스, 쏘시오패스 적인 성향에 대한 설득력이 거의 없다. '아니 대체 이 애는 나이도 어린게 어떻게 이렇게 된거야?' 라는 의문에 대한 힌트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것 만으로 아이가 이렇게 되기에는 너무 근거가 빈약하다. 오히려 더 끔찍한 과거를 겪은 하루코의 성격과 비교해봐도 타스코는 지나치게 달관한 느낌이다.

이런 캐릭터가 작가의 의도였을 수는 있겠으나, 조금 더 근거를 튼튼하게 만들었으면 이야기 전체가 보다 단단해졌을 것이다. 

그 외에 이야기의 흐름과 큰 관계가 느껴지지 않는 뜬금없는 에피소드들 역시 이야기의 완성도를 상당히 떨어뜨리는 요소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문학적인 느낌이 폴폴 풍기는 멋진 작품임은 확실하다. 


언제나 현대문학에서는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획득되는 행복에 관해 이야기해왔다.

사람은 독자적인 존재이기에, 혼자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행 역시 타자와 얽히면서 생겨난다. 불행이 두려워 소통을 거부하면, 행복 또한 얻을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행복에 가장 가까운 것은 '돈' 일 터다. 이 작품 안에서도 '돈' 은 등장인물들이 행복에 가까워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연인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돈' 은 너무나 중요한 요소가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물약이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신비의 물약이다.

하지만, 바로 이 '돈' 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한 '인간' 의미는 그 사람의 연봉, 부동산, 통장 안의 잔고로 결정되어진다. 때로는 자기 자신마저 스스로를 그 숫자들로 이해한다.

통장에 찍혀있는 숫자를 보며 행복해하고, 때론 불행해한다.  

 

글쎄, 과연 어떤 삶이 옳을까?

과연 삶의 의미는 어떻게 잴 수 있는걸까?


문학이나 만화, 예술, 철학이 그런 답을 내려주지는 않고, 내려줄 수도 없다. 

작가나 철인들도 그저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니까.


일단 아사노 이니오는 이렇게 말한다.


"의미가 있든 없든, 그런거 상관없잖아. 

중요한 건 무엇을 믿으면 행복해 질 수 있나... 그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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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오스 폴립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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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딱 한마디로 소감을 풀어보자면, 퓰리쳐 소설상에 노미네이트 된 미국 현대소설을 한 편 감상한 느낌이었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들 중,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풀어낸다는 점을 포함시키는 데에 동의한다면, 이 한 편의 만화는 문학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하리라.

만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들 중, 주인공의 내면이나 자아를 시각적인 표현, 즉 그래픽 내러티브로 구현해 낸다는 점을 포함시키는 데에 동의한다면, 이 한 편의 만화는 충분히 높은 반열에 올려 놓아도 무방하리라.

 

 유망한 건축학과 교수로서 탄탄대로의 인생을 걸어왔지만, 이혼남. 돌싱인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오십번째 생일에 차가운 비를 맞으며 자신의 전재산이 화마에 집어 삼켜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반백년을 산 몸뚱이 하나와 지갑안에 든 얼마간의 현금만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보금자리였던 맨하탄을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페이퍼 아키텍트' 라고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그는 존경받는 건축가였지만, 그의 명성은 어디까지나 설계 때문이었고, 그 설계를 가지고 실제로 지어진 건물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설계 가운데 실제로 지어진 건물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많은 공모전에서 입선했고, 온갖 상을 받았으며 이것만 가지고도 상당히 성공적인 경력을 얻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가 전재산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무작정 떠나서 도착한 '어포지' 라는 시골 마을에서 얻게되는 직업은 자동차 수리공이었다.

이전까지는  종이 위에서나 가능한, 이론과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돈을 벌었지만, 이제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자동차를 수리하게 되고, 나아가 부품들을 가지고 거의 못 움직이게 된 자동차를 수리하게 되기도 한다.

자동차 수리점 사장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지난 50년과는 완벽히 다른 환경속에서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다. 그다지 화목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 자동차 수리점 사장 '스티플리 메이저' 부부와 그 아들, 그리고 주변인들과 섞여들면서 지나온 세월들을 돌아보게 된다. 

 

 작가는 마치 현실인식, 자아성찰, 현대문명, 자본주의, 가족, 연인, 외로움, 사랑, 타인과의 관계 등 인생의 거의 모든 것들을 모두 담아내려 한 듯 보인다. 어쩌면, 작가인 데이비드 마추켈리가 품고있는 모든 사상을 그려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터다. 재미있게도 모든 페이지에 넘버링이 되어있지는 않지만, 책 정보에 적혀있는 344페이지에 달하는 볼륨이 그것을 증명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작품 초반에 작가는 "만약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 단순히 자아의 연장이라면 어떨까?" 라는 질문을 던진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각 개인이 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줄 것이고,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서로 잘 지내는 듯 보이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안 그런지 설명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한다.(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초반에 던지는 이 화두야말로 아스테리오스 폴립의 삶을 통해 작가가 증명코자 하는 명제이다.

 대학이라는 공간과 교수라는 직함은 아스테리오스 폴립에게 다른 사람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다. 때문에 그는 각자 자신의 세계를 가진 수 많은 학생들을 평가하고, 때론 모욕할 수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세계관을 주장하고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였던) '하나', 그리고 그 주변의 예술가들과 아스테리오스 폴립이 어포지에서 겪고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각자가 경험하는 자기만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어포지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들을 깨닫게 된다. 특히 그가 사랑하는 아내, 하나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인식하게 되는데, 그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녀만의 세계를 충분히 존중하고 인정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모든 상황을 자신의 현실속에서 풀어내려 했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인 하나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라는 필터로 걸러내기 바빴던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너무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의 그러한 행동 방식이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한대로 주변 환경들이 그에게 그런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와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하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의 근원이었던 셈이다. 

 

 나는 작가가 아스테리오스 폴립의 삶을 통해 우리가 타인들과 맺는 관계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각자가 경험하는 현실은 오롯하게 그 사람만의 것이다. 대학교수에서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고, 그것은 결코 타인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각자에겐 그들 각자만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타인과 교감할 수 없고, 결국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파국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상당히 심오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아스테리오스 폴립과 하나의 말다툼 장면이나, 발바닥의 물집에서부터 시작되는 파노라마같은 하나와의 기억 같은 씬들(다시 언급하지만, 책 전체에 페이지 넘버링이 전혀 없어서 페이지수를 적을수가 없다) 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단순하고 평범한 듯 하면서도, 디테일하고 사랑스럽다. 종종 등장하는 팝아트와 모던아트를 넘나드는 참신한 발상의 그림들로 자아나 현실인식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풀어내기도 하고, 평이한 흐름의 이야기를 실험적이고 기발한 컷 연출로 단조로움을 극복하기도 하고, 특히 깜짝 놀랄만한 마지막 페이지는 작품 전체의 여운을 오랫동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 세상에 60억명이 있다면, 60억개의 현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현실들 중, 가장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 이라고 말하고 있다.  

 

평생, 한번쯤은 꼭 읽어보고, 두번 세번 곱씹어볼 만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왜 타인과의 관계에 몰두하는가?

그래, 어쩌면, 인간은 태생이 외롭기 때문일수도 있다.

다들 자기만의 현실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외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타인을 갈구한다. 

수많은 의문과, 고민과, 고통 속에서도,

한순간의 행복.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고, 살아갈 힘을 주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 행복은 아마도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생겨나게 되리라.

 

마지막으로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아스테리오스 폴립과 하나가 키웠던 고양이 '노구치'의 죽음에 관해 나눈 대화 부분을 옮겨보고자 한다. 나도 고양이를 키워서인지 쉬이 보아넘길 수 없었다.

 

하나: "...내 생각에 그 녀석은 잘 살다 간 것 같아."

아스테리오스 폴립: "그게 다 당신 덕분이지."

하나:"당신도 알겠지만, 그 녀석은 내가 어떻게 생겼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어. 가끔은 밤에 내가 정말 안좋은 모습을 보이는 때도 있었는데도...

그 녀석은 늘 나를 찾아와서 내 옆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잤어.

심지어 마지막까지도 말이야. 그 녀석 신장이 고장나고, 폐가 고장나고...

그런데 난 차마 그 녀석을 보낼 마음이 없었어. 그럴 힘도 없었고...

그래도 그 녀석은 여전히 오는 거야. 마치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건 마치, 자기가 무슨 일을 겪든 간에 아무 상관없이, 언제든지 가능한 한 행복을 부여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어. 

그게 겨우 매일 5분에 불과한 시간이라도 말이야.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내내 나는 그 녀석이 정말로 행복했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아스테리오스 폴립:" 아마도...그거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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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티미츠 Vol.2 : 국토안보 시공그래픽노블
마크 밀러 지음, 이규원 옮김, 브라이언 힛치 그림 / 시공사(만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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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의 강국인 일본과 미국의 '만화' 컨텐츠 활용법은 사뭇 다르다.

일본에서는 한 만화가 큰 인기를 끌면,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영화등을 제작한다. 매체의 특성상 전체 스토리가 압축되거나 생략되는 경우는 있겠지만 이야기의 큰 틀은 크게 다르지 않게 다른 매체로 '이식' 된다. 일본의 만화 구매층은 내용은 같지만, 각기 완벽히 다른 작품이라고 인식하고, 각기 그 매력을 만끽한다.

반면, 미국에서는 만화를 같은 내용으로 다른 매체로 이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파이더맨' 이나 '아이언 맨' 과 같은 영화들은 그래픽 노블을 기반하고 있지만, 단지 '모티프' 에 불과할 뿐이다. 영화는 영화대로, 그래픽 노블은 그래픽 노블대로 '캐릭터' 를 재해석한다. 때문에 같은 주인공을 여러번 등장시켜서 매번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도 미국의 관객들은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스파이더맨' 같은 경우도 이미 1편부터 3편까지 나왔지만, 관객들은 완전히 새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을 큰 위화감 없이 '새로운 시리즈' 라고 받아들인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이런 새로운 시리즈에 '리부트REBOOT' 라는 개념을 설명하게 이해시켜야 하지만, 여전히 위화감이 남는다.  

이러한 차이는 일본의 만화도 캐릭터 중심이고, 미국에서도 캐릭터 중심이지만 이야기를 대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일본 만화는 캐릭터 중심이지만, 연속된 긴 이야기를 통해 캐릭터를 드러내고, 미국에서는 단막으로 끊어져 있는 옴니버스식 이야기를 통해 캐릭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일본 만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에피소드와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만, 미국 만화는 기본적으로 그렇지가 않다. 가끔 에피소드를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선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국문화의 수많은 스토리들은 옴니버스형식을 기반한다.

 

지금 소개할 [얼티미츠] 라는 작품 또한 그렇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어벤저스] 의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영화와 스토리적인 연관성을 찾는다면 제대로 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국내에 정식 발매된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 나 [시크릿 워][시빌 워] [토르] 등의 작품들과 스토리의 접점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얼티미츠] 에 등장하는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토르, 헐크 등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배경 지식들을 깡그리 잊고, 새로 접한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딱 2권짜리 [얼티미츠] 를 충분히 즐긴 뒤에, 다른 작품에 등장한 캐릭터들과의 차이점이나 연관성을 찾으면 더욱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얼티미츠]는 히어로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냉소적이다.

아이언맨은 기존의 다른 시리즈에서처럼 백만장자에 천재이지만 재수없고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졸부로 그려지고, 토르는 자연주의자 사기꾼, 캡틴 아메리카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지식한 군인, 헐크는 제어 불가능한 폭탄처럼 다뤄진다. 쉴드의 수장이자 사뮤얼 잭슨과 굉장히 비슷하게 그려놓은 캡틴 퓨리는 음흉한 속내를 지닌 정부 고위급 관료로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작가가 히어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팀이지만 좀처엄 융화되지 않고 애초에 각자의 이익을 위해 모였기 때문에 물과 기름처럼 서로가 둥둥 떠있을 뿐이다.

그나마 1권에서 헐크가 폭주하는 대사건이 생긴 이후로 서로가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하고, 지구에 오랫동안 잠복해있던 차타우리와의 2권에 접어들며 각 캐릭터들의 진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시나, '말 안듣는 것들은 헐크가 패주면 됨'. 이라는 사실은 [얼티미츠] 에서도 여지없이 증명된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짜임새는 영화 [어벤져스] 보다 좀 더 나은 편이다. 특별히 캡틴 아메리카에게 이야기의 포커스가 집중되어있긴 하지만, 다른 캐릭터들의 역할도 비교적 높은 비중으로 잘 분산되어 있고, 매력들도 잘 드러나 있다. 사건의 인과 관계나, 캡틴 아메리카의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연관되는 부분의 드라마는 상당히 잘 표현되어있다. 물론 화려한 일러스트를 연상시키는 탄탄한 뎃셍의 작화도 대단히 멋지다. 

 하지만, 역시나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미미한 미국 그래픽 노블의 블록 버스터급 프로젝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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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아의 騎士 1
니헤이 츠토무 지음, 김동욱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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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의 오프닝부터 매우 독특하다.

딱 봐도, 거대한 무언가의 지하로 보이는 묘한 공간속에서 '타니카제 나가테' 라는 어려운 이름의 주인공이 훌쩍 등장한다. 솔직히 나도 일본만화 꽤나 봤지만, 이렇게 어려운 이름은 처음이다. 일본 만화의 이름들은 번역 관례상 모두 한글로 번역되기 때문에 한자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타니카제' 라는 이름은 검색해보니 대충 谷風 이런 단어가 잡힌다. 

(일본 만화의 주인공 이름들은 뜻문자인 한자를 통한 여러가지 장치들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특이한 이름들이 나오면 검색해 보곤한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 이름들은 작품을 통해, 혹은 작가의 입을 통해 의미가 나오기 마련이다. 한자를 읽는 방법이 몇가지가 있어서, 너무 복잡하면 자국 독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해서.ㅋㅋㅋ)

아무튼, 주인공 이름부터 강하게 잡아끈다.

 

 90년대 중~후반을 지배했으며,  수많은 오타쿠들과 작가, 애니메이터 지망생들은 물론 일본 컨텐츠 업계 전체를 요동치게 만들고, 아직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은 그야말로 일본 SF만화의 틀 자체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에반게리온 이전까지 거대 로봇물이건 리얼 로봇물이건, 피아의 구분은 명확하기 그지없었다. 주인공의 숙명이나 운명도 매우 또렷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은 그 제목에 당당하게 붙은 '신세기' 라는 단어를 증명하듯 매우, 매우 새로웠다. 피아의 구분도 애매하고, 주인공도 우울증에 걸린 소심하기 짝이없는 민폐덩어리였다. 그 주변 캐릭터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수많은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컬트적으로 추앙받은 히로인 '아야나미 레이' 는 답답을 넘어 지나치게 무심하고 시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상당한 매력이었고, 결국 '츤데레'(겉으로는 차갑고 무심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 챙겨주는 성향) 캐릭터의 원형이 되었다.) 주인공이 속해있는 '네르프' 라는 기관은 소속 기관원들에게조차 냉혹하고, 심지어 무엇을 위해 누가 만들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수수깨끼 같은 기관이었다. 심지어 후반에는 거의 적처럼 되어버린다.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사도' 라는 거대 괴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능이 있는지도 애매하고, 왜 자꾸 지구로 쳐들어오는지도 밝혀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불친절한' 작품인 것이다.

TV판의 엔딩은 아직까지도 수많은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으며, 그 팬들은 완결편을 앞둔 극장용의 새로운 에반게리온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에반게리온을 통해 컬트적인 색채를 지닌 감독으로 각인된 안노 히데아키가 신 극장판을 통해 에반게리온의 깊고 깊은 수수깨끼를 풀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수수깨끼를 오히려 증폭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지지한다. 안노 히데아키는 작품을 통한 논쟁을 즐기고 팬들과 두뇌싸움을 즐기는 타입이다. 기분좋게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감독이 절대 아니다. 어딘가 불편하고,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을 항상 남겨놓고 여지를 남겨놓는 타입이다.)

 

 이러한 '불친절' 은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1970년대 중반, '우주전함 야마토' 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작품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작품의 전체적인 세계관과 설정들을 발견하며 보다 깊이있게 세계관 전체를 파고들어가는 이른바 '오타쿠 문화' 가 촉발된 이후 가장 거대한 팬덤이 생겨났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지나칠 정도로 불친절한 스토리 텔링은 오타쿠 한두명이 작품을 들이 판다고 해서, 작품 전체에 깔려있는 설정과 세계관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단어 하나와 메카닉의 이름 하나하나가 모두 그 거대한 세계관의 하나로써, 작품을 벗어나 전문 지식쪽으로 시야를 넓혀야 메타포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용어로써 '예수님의 제자' 를 뜻하는 '사도' 라는 단어는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가장 무시무시한 적의 이름으로 쓰였고, 창세기에 등장하는 태초의 여성 '이브' 에서 온 것이 확실한 'EVA', 그리고, 기독교 성경 중 '위경' 으로 분류되는 부분에서 아담의 첫번째 부인으로 등장하는 '릴리스' 라는 존재의 등장 등, 유대인의 신화를 모티프로 한 것이 분명한 여러 장치들은 어지간한 전문가들이 아니면 발견하기도 힘든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네르프NERV' 와 '제레SEELE' 등 생소한 독일어 단어들이 활용된 소속 기관명 등 역시 전문지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시기는 지금처럼 인터넷 인프라가 넓게 퍼지기 전이었으니,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는 일단 팬들은 모여야만 했다. 

오타쿠들은 괴로워했고, 즐거워했다. 안노 히데아키를 욕하면서 찬양했고, 에반게리온을 짜증내면서 구입했다.

캐릭터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메카닉 디자인의 유려함에 열광하는건 한참 낮은 수준의, '오타쿠' 라고 불릴 수도 없는 '팬' 수준이었다.(물론 메카닉의 기계적인 논리를 파헤치는 '메카닉 오타쿠' 들도 성행했다. 실제로 이 메카닉 오타쿠들은 나이도 많고 학력도 뛰어난 전기, 로봇 공학자들이 상당히 많고, 아톰이나 건담등의 애니메이션 팬들이 일본 로봇산업의 근간을 다졌다는 이론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 오타쿠들의 이미지는 그 시기의 오타쿠들이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잡지인 '뉴타입' 은 연일 지면을 통해 전문 지식들을 내보냈다. 애니메이션 전문 기자들은 각종 기사를 통해 '릴리스' 가 유대인들의 신화상 인물이라는 사실이나, 1940년대 후반에 발견되었다는 '숨겨진 사해문서' 등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마침 그 즈음 한국판 '뉴타입'이 런칭되면서 한국 또한 에반게리온 신드롬에 휩싸였다. 일본문화가 완전 개방되기 전이었음에도 비디오 대여점에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떡하니 진열되어 있었고, 특히 똑똑한 친구들이 이 만화에 열광했다. (참고로 이 작품를 내게 전파해준 절친은 고교 3년내내 전교 1등을 도맡았고, 서울대 3~4학년 과 수석, 못해도 차석질을 했으며 지금은 모 대기업에서 근무중이시다....근데 나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은 일본의 컨텐츠 흐름 전체에 새로운 세기를 마련했으니,

 

그것은 '불친절' 이다. (그리고 츤데레)

 SF장르는 기본적으로 독자들에게 친절한 장르이다. 세계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들이 많다. 이 행성과 이 행성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으며, 이 외계인과 저 외계인의 생체적 특성은 어떻고, 그들의 과학기술 수준은 어떠하며, 이런 과학기술은 어떻게 발달되었는지 등등에 대한 설명이 또렷하게 제공되는 편이다. 

하물며 SF애니메이션이라면야.

하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 은 그야말로 '졸라게' 불친절했다. 

 

 이제야 다시 등장할 [시도니아의 기사] 의 '니헤이 츠토무' 는 사실 그러한 불친절함의 대가인 작가이다.

[블레임] 같은 작품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예 세계관을 파헤칠 의욕마저 들지 못하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여기는 어디, 너는 누구??'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거의 작품 끝까지 나오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이 작가와 작품의 개성이라고 할 지라도, 지나치게 독창적인 세계관은 오히려 외면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였을까? 

[시도니아의 기사] 는 의외로 꽤나 친절하게 시작한다.

 어느정도는 에반게리온이 만들어준 '신세기' 를 따랐고, 어느정도는 [마크로스] 의 느낌이 난다. 메카닉 디자인은 독창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파이브 스타즈 스토리]의 '나가노 마모루' 느낌도 물씬 난다.(하지만 이 작품 또한 그 스토리는 상당히 불친절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어...이럼 그냥 평범한 SF되는거 아냐? 싶어 찬찬히 읽어 나가보니, 작가가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포기한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세계관은 단순하게 벼렸고, 그림체도 많이 달라졌다. 전작에서 보여졌던 톤으로 뭉개지고 러프했던 선, 복잡하고 현란한 묘사들을 다 버렸다. 캐릭터의 개성도 또렷하게 등장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히스토리들도 친절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개그코드까지 등장한다. 사실 [시도니아의 기사] 에 등장하는 유머는 포복절도하게 웃기지는 않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많다' 고 느껴질 정도이다. 아니, 많은 만화 팬들은 '니헤이 츠토무에게 이런 개그센스가 있었어????' 싶을 정도이다. 게다가 무려 주인공의 입을 통해 기본적인 세계관을 설명까지 해준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은 본인의 세계관의 독창성을 자랑하기 위해 급급했다면, 이번 작품에서 확실히 '읽어주세요' 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는 작가의 바램이 읽힌다.  

 

사실, 전작들에 비해 [시도니아의 기사]의 세계관은 굉장히 평범하고, 어디선가 많이 접해본 느낌이다.

거대 인간형의 외계의 생명체 '가우나' 에게 파괴당한 지구. 

생존한 인간들은 일종의 '노아의 방주' 쯤 되는 '시도니아'를 타고 우주공간으로 도망친다. 

계속해서 시도니아를 추격하는 가우나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형 병기 '모리토' .

 

1980년대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마크로스]의 판박이이다.

거대 인간형의 외계 생명체 '젠트라디' 에게 파괴당한 지구.

우주로 쏘아진 거대 도시형 우주선인 '마크로스' 에 타고 있던 사람들만이 기적적으로 생존하고, 계속해서 마크로스와 생존 인류를 추격하는 젠트라디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형 병기 '발키리'.

 

일종의 '노아의 방주' 플롯이다. 

니헤이 츠토무가 가장 크게 양보한 부분이 이 세계관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결국 니헤이 츠토무가 [시도니아의 기사]로 승부를 보려는 부분은 세계관의 독창성이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세계안에 녹아있는 사람들의 드라마와 수수께끼, 그리고 디테일한 설정들이다.

니헤이 츠토무는 세계관의 독창성을 버리고, 대신 그 안에서 자신의 독창성을 맘껏 발휘하기 시작한다. 예를들어 마지막 인류가 우주 공간에서 최대한 오랜 세대를 버티기 위해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고 자가 생식이 가능한 방식으로 신체를 개조하고, 클론을 배양하고, 수명이 다한 인간은 비료로 재활용하는 등의 아이디어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가우나의 관계, 시도니아라는 거대 도시 우주선의 비밀, 모리토라는 병기의 비밀과 가우나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카비자시. 카비자시는 어떻게 가우나에게 타격을 줄 수 있으며, 왜 28자루 밖에 없는가? 그리고 가우나가 갖고 있는 절대 방어막인 '에나'. 그것은 또 무엇인가? 등 수수깨끼들을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을 작품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물론,  주인공 '타니가제 나가테'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뻗기 시작하는 타인들과의 관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드라마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덜 떨어진' 타니가제 나가테는 1,2권만에 모두에게 인정받는 영웅에서 '전범자식' 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추락하고, 사랑의 시작과 동시에 실연을 경험하는 등 다이내믹한 감정의 쌍곡선을 경험하고 있다.   

무한한 어둠의 우주를 떠다니는 우주선에 고립된 채 압도적인 적들에게 끊임없이 공격당하는 인류.

그 고립된 사회 안에서, '자연의 선택'이 아닌 '인위의 선택'으로 인간은 과연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장르만화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최근 또다른 젊은 천재작가인 이사야마 하지메는 이러한 아이디어의 지상버전인 [진격의 거인] 이라는 작품을 연재중이기도 하다. 이 작품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 [마크로스]는 물론 [시도니아의 기사] 와 날 것 그대로 비교당하며 물어뜯기고, 찬사를 받는다. 

UFC 파이터들이 8각의 '옥타곤' 이라는 틀 안에서 맨주먹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우열을 가리듯, 장르 만화가들은 비슷한 소재와 플롯 안에서 참신한 아이디어와 절절한 드라마, 송곳같은 유머센스로 독자들을 공략해 나간다.

[시도니아의 기사] 는 1,2권만을 통해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떤 무기를 선택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과연 그 위에서 [시도니아의 기사] 는 어떤 드라마를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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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 이 리뷰는 제가 전에 썼던 리뷰를 [알라딘 8회 리뷰대회] 참여를 위해 보완하고 다듬은 리뷰입니다. 




  만화의 시작을 이야기 할 땐 회화와 함께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언급된다. 미국이나 영국등 서구 사회에서는 유수의 언론들이 '올해의 픽션', '20세기에 꼭 읽어봐야 할 픽션' 같은 것을 뽑을 때, 주제 사라마구나 엘프리데 옐리녜크 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문학 작품들과 함께 앨런 무어나 프랭크 밀라의 그래픽 노블들이 함께 뽑히기도 하고,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대형 서점의 '회화' 코너에 진열되어 있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그래픽 노블 원화들로 이루어진 미술 전시장도 있고, 그런 원화들은 미술가들의 회화 작품과 비슷한 수준의 가격으로 거래된다. 뿐만 아니라, 그런 그래픽 노블의 스토리를 집필한 작가들은 상당한 수준을 지닌 '라이터Writer' 로 인정받고,  공을 많이 들이는 그래픽 노블 프로젝트의 경우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검증받은  유명한 소설가를 스토리 작가로 픽업해서,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만화 스토리' 를 쓰게 한다. 

 반면, 일본 '망가' 의 영향을 받아 '만화' 로 발전한 우리나라에서 만화는 그저 아이들이나 한번 보고 재활용 휴지통으로 내보내는 무의미한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예술'의 범주에 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는 오히려 너무 앞서간 논쟁이며, 어떤 사람들과 어디서 누가 논쟁을 벌여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건, 한국에서 만화가는 예술가에 포함되지 않고, 한국예술가협회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만화' 와 미국과 유럽 등 서구사회의 '만화' 는 개념이 완벽하게 다르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겐 예술이냐 아니냐를 두고 다투는 정도의 것이지만, 그들에게 이미 만화는 예술분야 - 회화이며 문학이다. 최근들어 웹툰으로 인해 책들이 좀 더 고급화 되고, 영화, 드라마화 등 멀티 유즈가 활발해지며 조금씩 그 위상이 높아져 가고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만화는 아직 '킬링 타임용 무료 서비스 컨텐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한국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그랬을 - 아주아주 생소한 캐나다의 작가 '세스' 는 자기 고백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만화가인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잭 캘로웨이' 라는 만화가의 삶을 뒤쫓는 내용이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온타리오 런던'(캐나다의 한 도시)에 도착한 세스는 중고서점에 들러 옛 잡지들과 단행본을 구입한다. 한 세대쯤 전의 옛 잡지들을 보던 세스는 '캘로' 라는 작가가 그린 카툰에 푹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작가의 작품은 한두작품 외에 눈에 잘 띄지 않았고, 검색되는 작품도 별로 없었으며, 만화가들의 이름과 작품이 소개되어있는 일종의 만화가 인명사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세스가 캘로의 작품을 발견했던 지면은 당대 최고의 카투니스트만이 작품을 기고할 수 있었던 잡지였다. '캘로' 는 만화가로서 재능을 인정받고, 나름대로 성공한 작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기록도 없고, 작품집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아했던 세스는 '캘로' 를 직접 찾아보기로 한다.    


 작품은 대체적으로 정적이고, 내레이션과 독백, 대사가 많은 미국식 그래픽 노블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유럽풍은 반대로 그림이 많고 대사가 적다.) 그림체는 단순하고, 2도 인쇄로 꽤나 독특한 느낌을 준다. 작풍과 이야기, 메시지와 아주 잘 어우러진다.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동안, '폴 오스터' 의 [환상의 책] 이 떠올랐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삶의 모든것을 잃어버린 중년의 남자가, 한 세대 전의 코미디언 '헥터 만' 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와 스스로를 구제불능에 외골수라고 여기고, 만사가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세스가 한 세대 전의 만화가 '캘로' 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는 묘하게 닮아있다.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는 그보다는 좀 더 쉽고, 편하게 다가온다.


주인공 '세스' 를 보는 내내 내 자신이 아주 많이 이입되었다. 자신의 여러가지 단점들을 잘 알고있고, 외골수에, 가끔은 우울해하고, 크게 만족하지 못하지만, 크게 부족하지도 않은. 평범하고, 보통의 젊은 남자.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며, 그걸 무척 좋아한다는 점도 비슷하고, 중얼중얼 불평 불만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가끔은 친구가 영화를 보러 가자그러면 주머니에 돈이 없어 거절할 때도 있다는 점까지.

만화가로서의 삶은 생각보다 그리 기쁘고 즐겁지 않다. 수시간동안 애써서 그린 그림은, 그냥 종이 한장에 불과하다. 디지털 작업이 많은 요즘엔, 수시간동안 애쓴 그림은 그냥 Delete 키 하나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지고, 며칠동안 그려서 올린 만화는 스크롤 몇번이면 끝나버리고, 허허한 댓글 한두줄로 대가를 지불받는다. 지금까지 내가 그려온 그림들 역시 나이먹고 이사다니는 사이에 폐휴지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부분의 만화가와 미술가, 소설가들은 그렇게 사라져간다. 


"한 생 다 살고 나면 결국 이깟 종이 몇 장 남고 끝이란 말이야?"

p.108


세스가 찾아나서는 '캘로' 는 어쩌면 세스 본인의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다. 

태어나고, 꿈을 꾸고, 그 꿈을 좇다가, 어느정도 지점에 오르지만,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고, 가족을 이루고, 죽고. 

세상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연속이 아니야.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이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냥 끌려 다니는 거지.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면 '좀 다르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게 마련이지만, 그것 정말 보통 의지로는 안 되었을 걸세. 그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그러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했을거야."

p.155


팀 보울러는 [리버보이] 라는 작품을 통해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긴 소년을 통해, 그냥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임을 에둘러 표현했다. 세스 역시 캘로를 찾아다니던 도중에 만난 캘로의 늙은 이웃에게 비슷한 뉘앙스의 한마디 말을 듣는다. '그냥 끌려 다니는 것. 그것이 인생'. 그냥 흘러가는 것. 그것이 인생. 


그렇다.

삶이란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란 그리 거대한 존재도 아니다. 심지어 자기 삶 안에서도 말이다. 

우리가 '꿈' 이라고 거창하게 말하는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거? 분명 축복받은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완전한 삶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주로 작고, 소소하고, 하찮아보이는 일들의 반복으로 채워지고, 나머지도 어쩔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 제목에 더 공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작고 소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인생이고, 인간이지만 지나치게 우울해할 필요도 없다. 

딱히 강해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딱히 지나치게 아둥바둥 발버둥 칠 필요 없다. 아프면 아파하고, 슬프면 울고, 미우면 미워하고, 기쁘면 기뻐하고, 행복하면 행복해하고, 사랑스러우면 사랑하고, 즐거우면 즐거워 하면 된다.  강해지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좌절하고 더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그리고 사실 그다지 강해지지도 않는다.

그저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제법 괜찮을 수 있는게 인생일터.


작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너무 아둥바둥 할 필요 없다고.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니까, 

딱 서서, 

버텨보자고.


 

  

p.s 최근 국내에도 웹툰을 통해 자신의 자전적인 -신변잡기적인- 작품을 그리는 작가나 지망생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하다.

자전적인 만화라고 주구장창 얼굴만 나오는, 독백과 내래이션만 나오는 만화는 '만화' 로서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힘들 테니. 이 작품은 '진짜' 자전적인 만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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