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Sunny 1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오주원 옮김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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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은, 특히나 천재가 많이 나오는 나라이다.

일본의 각종 매체들은 뻑하면 '천재가 나타났다' 며 호들갑을 떨고, 언론의 스폿라이트를 받던 어린 천재들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재능을 소모하며 둔재로 잊혀져간다. 그들이 정말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본 매체들은 지나치게 가볍게 '천재' 라는 호칭을 붙이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일본에서도 '천재' 라는 호칭을 붙이기 주저하는 장르가 있으니, 바로 '만화' 이다. 일본에서는 축구나 야구, 피겨 같은 스포츠 종목에서는 일년에 두세명씩 꼬박꼬박 천재들이 출몰하는데 반해, 만화에서는 1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하다. 일본 만화의 신, 데츠카 오사무 이래로 '천재' 라고 불리웠던 만화가는 토리야마 아키라, 우라사와 나오키, 마츠모토 타이요와 국내에서는 우익작가로 폄하되고 있지만 이사야마 하지메 정도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작가로 평가된다. 일본 만화계에서 '천재' 라는 호칭는 귀재나 명인, 장인과는 다른 의미로 신인시절부터  '번득이는 무언가' 가 있는 작가들에게 붙게되고, 실제로 이들은 일본 만화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곤 한다. 

 이들 '천재' 작가들의 공통점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재능이 빛을 발한다는 데에 있다.(몇몇 반대의견이 있을수도 있지만)

'진짜' 천재 작가는 작품과 함께 연륜을 쌓아내 이윽고 그것들을 종이위에 녹여내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러한 경지에 이른 작가들은 그야말로 영혼을 뽑아 종이위에 그려낸다. 

 

 마츠모토 타이요가 진정한 천재로 불리는 이유들 중 하나는 현실과 공상을 넘나드는 묘한 경계를 굉장히 드라마틱하면서도 만화답게 표현해낸다는 데에 있다. 대중과 예술의 경계선에 걸쳐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는 독창적인 필치로 극사실주의와 표현주의를 찰흙처럼 주무르며 판타지를 그려낸다. 때문에 현실도, 환상도 아닌 대단히 묘한 느낌이 난다. 

이런 묘한 느낌이 드는 데에는 마츠모토 타이요만이 갖고 있는 절묘한 표현력과 연출력에 독특한 그림체가 이뤄내는 조화 덕분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개발괴발, 초등학생이 그린 어설픈 그림 같지만, 꼼꼼히 뜯어보면 인체와 배경, 앵글의 어우러짐이 절묘하다. 인체와 공간에 대한 이해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일관된 작화력을 유지해낸다는 점 역시 마츠모토 타이요라는 작가가 절대 그림을 못그리는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품의 배경은 [별 아이 학원] 이라는 일종의 민간 보육시설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Sunny 는 보육원 아이들의 놀이터인 버려진 자동차 Sunny 1200 모델을 말한다. 일본의 유수의 자동차 업체인 Nissan의 1970년대 모델인 이 노란 자동차를 보아,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중~ 후반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연령층과 성별의 아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올망졸망 모여있는 이 [별 아이 학원]에 세이라는 아이가 새로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첫 권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하얀 머리의 하루오, 약간 지능이 떨어져 보이는 아프로 머리의 준스케와 동갑인 세이는 이들과 거리를 두고 싶지만, 어쨌든 같이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 밖에 메구무, 키이코 등 동갑내기 여학생부터  중학생인 켄지와 고등학생인 아사코 , 보육원의 선생님 역할을 하는 아다치와 미츠코, 쇼스케와 같은 3~4살 무렵의 아이들과 재미난 감초 역할을 하는 쌍둥이 자매 등 가지 각색의 아이들이 잔뜩 등장한다. 이런 여러 색깔의 아이들을 등장시키면서도 마츠모토 타이요만의 고요한 분위기를 내고, 그 분위기에 상반되는 역동적인 느낌의 연출은 여전하다. 정중동. 그의 작품은 그 아이러니한 이미지를 완벽하게 형상화해낸다.

 책을 덮는 순간, 레이몬드 카버의 말년의 단편들과 아사다 지로의 최근 단편들을 덮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밀려왔다. 스스로의 삶과 세상을 동일시하며, 동시에 보다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경지.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하며,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인 세계임은 동시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동적인 세계라는 사실을 관조하며 표현해낼 수 있는 경지. 

마음을 크게 때리며 뒤흔들지는 않지만, 가슴 깊숙히 심겨있는 심지를 살짝 흔든 느낌.

가장 깊숙히에 있는 심지가 흔들리니, 그 파동이 점점 커져 가슴을 둥 하고 울리는 느낌.

 

 마츠모토 타이요는 유독 성장기에 천착하는 작가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철콘 근크리트] 를 시작으로 [핑퐁] , [하나오] 등 그가 재능을 화려하게 꽃피운 작품들은 거의 다 성장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성장통을 겪기에 성장기 플롯은 가장 검증받은 플롯인 동시에, 반대로 가장 어려운 플롯이기도 하다.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면 1차원적이고 빈약한 작품이 되는 반면, 지나치에 내러티브를 우겨넣으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장르가 되어버리고 만다. [철콘 근크리트] 와 [핑퐁] 같은 작품은 성장기의 플롯에 판타지와 조폭 스토리, 스포츠 등을 활용한 작품으로 장르간의 장점을 취합하여 이야기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뤄낸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렇게 특징이 뚜렷한 하위 장르의 장점만을 취합하는 센스야말로 타고나지 않으면 획득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마츠모토 타이요가 '천재' 로 손꼽히는 가장 대표적인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GoGO 몬스터] 를 통해 현실의 교육환경을 그려냈던 마츠모토 타이요는 만화의 모든 대가들이 최후의 최후의 최후; 스스로가 기량의 정점에 올랐다고 판단될 때 손을 댄다는 최후의 '밑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만화에서 자전적 이야기는 가장 어려운 소재로 손꼽힌다. 실제로 자전적 이야기는 만화가 지망생들이 수련 초기에 가장 많이 되풀이하는 것 중 하나로, 나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공감되게, 게다가 재미있게, 거기에 진정성까지 덧붙일 수 있어야 가능한 소재이다. 단편으로는 가능할 지 몰라도, 장편으로는 정말 어려운 소재인 반면, 기량만 원숙하다면 가장 안정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Sunny]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작가가 실제 겪었던 일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사실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려온 모든 성장담이 자전적 이야기였을 수도 있을터이다.  아니다, 누구나 성장기는 있고, 누구나 성장통은 있다.  단순히 '나' 만의 성장기와 성장통이 아니라, '타인' 의 성장기와 성장통을 섬세하게 잡아서 재미있게 그려내는 그 능력이야말로 '천재' 만이 할 수 있는 과업일 터다. 이제, 그 첫 권이 등장했다. 과연 이 작품이 마츠모토 타이요라는 희대의 천재에게 어떤 지표가 될까.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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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전날
호즈미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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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여성만화를 보다보면, 종종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일본 만화의 흐름에 아주 빠삭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 만화가 '캐릭터 중심' 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나가는 데에 특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 정도는 알고 있다. 캐릭터를 먼저 만들고, 매력을 충분히 설정한 뒤에 그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가는 방식에 능숙하다는 것이다. 예컨데, A와 B라는 두 인물을 축으로 그 인물들이 매력을 발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설계해 나가는 방식이다. 무척이나 효과적일 수 밖에 없고, 대중성을 획득할 수 밖에 없다. 캐릭터의 매력이 이미 명료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사건의 흐름을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고, 그런 독자들의 예측 - 혹은 니즈를 정확히 파악해 그대로 그려주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 된다. 캐릭터가 독자들의 예측을 벗어날 수 있는 범위를 주도면밀하게 계산해야 하고, 사건들은 정확히 계산된대로 진행되야 한다. 캐릭터의 매력은 파생상품이 남기는 이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기 캐릭터를 창조해낸 만화가에게 여러명의 담당자가 붙어 시장상황과 대중의 니즈를 예측하고 충족시킬 방법을 강구한다. 

때문에 신인 만화가를 등단시킬때에도 단편에서 '이 인물들의 앞으로의 이야기를 보고싶다.' 는 느낌을 중요시 한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분명 힘이 있다. 토끼와 거북이과 같은 단순하고 명료한 플롯이라도 원피스의 루피와 나루토가 들어가면 독자들의 반응은 달라진다. 이 안에 독자들의 예측과 니즈가 포함되면 단순한 플롯 안에서도 어마어마하게 폭넓은 내러티브가 형성된다. 

 때문에, 평범한 인물로 평범하지만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은 두각을 드러내기 쉽지 않지만, 일단 등장하면 엄청난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인물로 매력적인 인물을 이겨내려면 그보다 훨씬 대단한 이야기나 놀라운 소재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 모두를 갖춘 경우가 있는데, 그런 작가들은 대부분 '천재' 혹은 '귀재' 소리를 듣곤 한다.)

 

 지인들의 호평속에 당연스레 만나보게 된 [결혼식 전날]. 

6편의 단편속엔 매력적인 인물이나 놀라운 소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인물과 자연스러운 소재들을 조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각 단편들은 테마가 되는 감정들이 있다.

우애, 부父정, 모정, 고독 등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억지로 그려내려 하면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호즈미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자체에 매우매우매우매우 능숙한 느낌이랄까. '모았다 터뜨리는' 호흡이 절묘하고, 독자들의 뒷통수를 칠 줄 안다. 타고난 감각이 아니라면, 충분한 훈련을 거쳤다는 느낌이다. 아니, 능숙을 넘어, 원숙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6편 모두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야기의 힘이 있었다. 작가가 던지고자 하는 따뜻한 메시지가 깊숙히 파고들어왔다. 뭔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은데,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큰 실례가 될 것 같아 도저히 못 붙이겠다. 일단은 작품 속 단편들 중 [아즈사 2호로 재회] 와 [꿈꾸는 허수아비]후편이 특히 좋았다. 애묘인으로써 [그후] 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플롯' 자체에 대한 이해가 매우 뛰어나다. 많은 작가들이 플롯에 대한 공부를 소흘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플롯은 정해진 틀이 아니다. 오히려 정해진 틀을 뒤집고 엎고 비틀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게 하는 일종의 공식이다. 3차 함수와 방정식을 이용해 입체를 만들어내고 세상에 구현시켜 내듯 플롯을 잘 활용하면 평면적인 이야기도 입체감을 얻고, 전형적인 인물도 변화무쌍한 인물로 변모한다. 인위를 작위로 만들지 않는 능력이 플롯에 존재한다.

이 작품은 사실 연출도 단조로운 편이고, 작화도 화려한 편은 아니지만, 호즈미 작가가 구사하는 이야기의 기술은 눈에 띄는 모든 단점(일 수도 있는 부분)을 완벽한 장점으로 바꾸어 버린다. 개인적으로 화면 연출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라는 느낌이 있지만(사실 일본의 여성만화가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마저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넘어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호즈미 작가가 매우 원숙하게 활용해내는 플롯의 힘이 아닐까 싶다. 앞뒤를 뒤엎고, 생략과 압축을 매우 잘 활용하고,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를 적절히 활용해낸다. 

아마 위에 언급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호즈미 작가가 하면 가슴을 등~ 하고 울리는 반전을 만들어줄 것 같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특별한 소재를 둘러싼 화려한 이야기도 물론 대단하지만, 호즈미 작가는 전형적인 캐릭터의 평범한 소재를 묵지근하게 녹여낼 줄 아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 중심의 작가는 장편에 능하지 못하다는 통설이 있다.

만화는 매체의 특성상 장편이 아니면 크게 어필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단편은 장편을 위한 훈련의 일환으로 사용된다. 

호즈미 작가가 갖고 있는 플롯의 이해, 활용도와 스토리 텔링에 대한 장점은 단편이기 때문에 도드라지는 것일 뿐, 장편에서는 어떻게 활용될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에피소드 중심의 드라마가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 과연 여러 군상들이 어우러지는 긴 호흡의 연재물에서는 어떤 재능이 발휘될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아니, 이런 작가가 마음먹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그려내면 어떨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 간단한 예로 우루시바라 유키는 단편집 [필라멘트] 에서는 탄탄한 이야기 중심의 작품들을 뽐냈었고, 히트작인 [충사] 역시 에피소드 중심의 옴니버스식 장편이지만, 깅코와 단유같은 중심 캐릭터의 매력 또한 어마어마했더랬다. 

작가의 필모를 보니 장편연재중인 듯 하다니, 언젠가 만나볼 수 있겠지.

잊지 말고 기억해둘 작가로 콕 박아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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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브라이언 아자렐로, 리 베르메호 지음, 임태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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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자궁안에서 만난 작은 세포 하나에서 시작되는 '생명'은 수개월동안 세포 분열을 반복하며 인간의 모습을 갖춰 나간다. 태아의 뇌가 만들어지고 각종 신경 줄기들이 몸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데, 눈目이 만들어지는 모습은 흡사 뇌가 더듬이처럼 길게 뻗어나오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한다. 눈은 어찌보면 몸 밖으로 돌출된 뇌의 일부분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눈은 뇌 - 정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기관이다. 중요하다고 인지하는 점은 잘 보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것 처럼 스쳐 지나기도 한다. 그런 반면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진처럼 그대로 찍혀 뇌 안에 저장되는 능력을 타고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를 본 순간, 그 사람과 관련된 기억들이 떠올라 여러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렉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넌 인간이 아니야." 

루터의 눈 앞에 나타난 이 강철의 남자; 맨 오브 스틸 이자 빅 블루 스카우트, 블러, 그리고 포 투머로우(미래의 사나이)인 슈퍼맨은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거대한 벽에 불과하다. 루터에게 슈퍼맨이란 존재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아이콘에 불과하다.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 그의 앞에서 모든 인간의 모든 과학과 능력은 인간의 개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인간인 루터에게 슈퍼맨은 거대한 악몽, 그 자체이다. 

 

 이 작품이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그러한 '시각의 다름' 을 표현한 곳에 있다.

루터의 눈에 슈퍼맨은 정의의 수호자나 인간의 친구가 아니라 거대한 악당이고 악마에 불과하다. 우리에겐 슈퍼맨의 가장 큰 숙적이자 빌런('히어로'의 상대개념으로 흔히 '악당'으로 번역된다.) 으로 알려져 있는 루터이지만, 루터가 왜 슈퍼맨을 적대시할 수 밖에 없는지 이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미국 코믹스의 양대 산맥, 마블과 DC에는 각각 '간판 캐릭터'라 불리우는 캐릭터들이 있다. 수십년간 수백명의 작가들을 통해 에피소드가 쌓이고, 재해석이 거듭되며 인격이 형성되어 생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작은 만화 출판사를 차근차근 대기업으로 성장시켜준 '1등 직원' 들. 특히 DC의 '슈퍼맨' 은 그 자체가 미국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적인 철학들이 쌓인 미국의 아이콘이랄 수 있다. 

 슈퍼맨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신神이고, 완벽한 존재이다. 렉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태풍에 의지가 있다고 해봐. 그 다음 그 힘에 천 배를 곱해 봐. " 

 그가 우리편이라 다행이라는 브루스 웨인에게 루터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변하면? 만에 하나... 오늘이라도 갑자기 우리를 내려다보며 더 이상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면? 내일 불현듯 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어쩌지? '뭐하러 지구를 지키고 있나? 그냥 손가락 딱 튕기고 지배하면 되는데?' 그 땐 우린 어쩌지? 우리가 가진 건, 우리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건 결국 그의... 말뿐이잖나."

현대의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맡고 있는 역할 역시 이와 비슷하지않은가? 

소비에트가 무너진 이후 홀로 승승장구해 온 미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자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이다. 그 어느 국가이든 미국의 눈 밖에 나면 손가락 딱 튕기듯 제거된다.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손에 잘려나갔다. 렉스 루터의 눈에 비친 슈퍼맨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어떤 사람들 눈에 비친 미국과 같을 터다. 


 렉스는 [인간의 미래]를 위해 슈퍼맨은 불필요한 요소라고, 초인이란 인류의 앞길을 막을 뿐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슈퍼맨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강력한 힘과 그 앞에서 아무리 용을 쓰고 노력을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임에 자괴하고 자조한다. 슈퍼맨의 힘에 대한 강력한 질투와, 욕망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루터에게 '절대 가질 수 없는 것' 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극한 분노가 더해진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세상 그 누구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아집과 내가 뛰어넘을 수 없다면, 없애서라도 능가하겠다는 욕망의 화신인 것이다. 

 루터는 인류를 위해, 인류의 적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모든 인간이 숭배하는 슈퍼맨을 처단하기 위해, 슈퍼맨을 숭배하는 모든 인간들을 적으로 돌리는 길을 택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인류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정한다. 인류가 [미래의 사나이]라 부르는 신-슈퍼맨을 처단하기 위해 모든 인생을 걸기로 결정한다. 


그는 냉혹하고 과감하게 슈퍼맨과 맞선 유일한 인간이었다. 태풍에 맞서고, 신에 맞선 유일한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본다. 

눈이란 외골격으로 돌출된 뇌와 같아서, 눈에 보이는 것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맞닿아있다. 

누군가에게 루터는 사악한 빌런일 것이고, 누군가에게 루터는 인류를 외계인으로부터 해방시켜줄 히어로일 것이다. 


브라이언 아자렐로는 이렇듯 다른 시각에서 히어로와 빌런을 바라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유난히 음영이 짙은 마스크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리 베르메호는 찰떡 궁합을 선보인다. 

그야말로 최고의 이야기와, 최고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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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서유요원전 대당편 10 만화 서유요원전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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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서유기로 잘 알려져있는  [대당삼장취경시화] 를 각색한 '거장'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서유요원전 - 대당편] 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개인적으로 시리즈물의 경우 완결편이 나오지 않으면 리뷰를 잘 안 하는데, 이 작품의 경우 2011년에 첫권의 리뷰를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발매 초기부터 상당한 기대작이었고, 햇수로 3년동안 꾸준하게 구입해서 감상한 몇 안되는 콜렉션이기도 하다. 사실 5~7권쯤엔 지나치게 스토리를 질질 끄는 듯한 면이 있어서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10권까지 다 읽고 나니 대당편의 매조지를 위한 호흡 늘리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작가가 10권이라는 방대한 스토리 안에서 자유롭게 독자들의 호흡과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작품의 강약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행히 작품의 후반에는 한국판 발매 속도도 빨라서 지루함은 쉽게 사라졌다. 솔직히 8권쯤에선 '아 이제 그만 읽을까.' 싶기도 했지만, 10권을 읽은 지금은  "서역편 언제나오나요???" 의 심정이다.

 

 [서유요원전]의 주제의식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내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악마인가, 천사인가?" 

사람은 누구에게나 선한 면과 악한 면이 공존한다. 수많은 철인哲人 들은 예로부터 '인간은 나면서부터 선하다' 와 '인간은 나면서부터 악하다' , 혹은 '인간은 백짓장과 같고 자라면서 주변환경에 의해 선과 악이 변화한다' 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견을 활발히 나누었다. 그 모든 의견은 어쨌든 인간에게 선한면과 악한면이 모두 보여지기에 나온 것이다. 

 갓난 아이 였던 손오공이 화과산에서 원숭이들에게 납치당했다가 인연을 얻어 산골 작은 마을에서 성장하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끔찍한 참변을 목도했다가, 결국은 '무지기' 라는 신에게 선택되어 겪게되는 이 대서사는 실제 역사와 전설을 넘나들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서유요원전]의 주제의식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장면. 부처안에 사마...사마 안에 부처...

 

 

 

 

 이 거대한 대서사극을 보는 내내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이 떠오르기도 했고, 단테의 [신곡]이 떠오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도 떠올랐다. [서유요원전]에는 오공이 걷는 지옥도圖와 같은 당시의 시대상이 매우 잘 표현되어 있었으며, 그런 시대에 태어나 거스를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악귀같은 형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그 길고 긴 여정은 끊임없는 시험이 반복되는 미답의 공간을 헤매이는 구원을 향한 여정과도 같고, 빨리 끝나기만을 소망하는 지옥의 여정과도 같으며, 영혼의 고향을 찾아 헤매이는 여정과도 같았다.

 [서유요원전]은 주인공 손오공이 자신의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끊임없이 지옥도道로 향하는 '제천대성' 이자 '무지기' 의 유혹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이자, 탐욕스럽고 사악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엾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들과 얽히고 설키는 은원의 이야기이다. 손오공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싸우는 장면들도 재미있지만, 각기 사연을 가지고 역사의 흐름에 의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을 반복한 조연들의 이야기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손오공을 제천대성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던 제천대성의 수족과도 같았던 '통비공'을 비롯, 손오공과 살을 맞대며 정情을 알려주었던 '용아녀', 복수와 집념의 화신인 '금각', '은각' 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애증의 관계였던 '홍해아' 와 '황포'. 이 큰 이야기에서 손오공의 여정과 대척점을 이루며 균형을 맞춰가는 '혜안 행자' 와 손오공과 이어질 듯,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묘한 인연의 '현장' 은 물론, 중간 중간 등장하는 '황풍대왕' 과 '나타태자', '칠선고' 에 '팔계' 와 '손이랑', '일승금'. 그리고 [서역편] 과의 연결점이 되어줄 '나찰녀' 까지. 모두가 인간의 오욕칠정을 대변하는 듯 또렷한 욕망을 가지고 손오공과 은원을 쌓는다. 

 그렇다. 손오공이 받는 거대한 시험은 결국 언제나 '사람들' 이었다. 자아와의 싸움이자, 타자와의 싸움. 무엇이 먼저인지,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가늠할 수 없다. 누구를 이겨야 진짜 이긴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겨야 하고,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는 남을 이겨야 한다. 손오공이 맞닥뜨린 지옥같은 여정에서, 머리에 씌워진 관과 그 무엇보다 강한 봉은 굴레이자 방향타였다. 손오공에게 그것들이 없었다면, 그는 현장을 만날 수도 없었고, 그 뒤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통과 해소는 같은 곳에 있다. 마치 사마와 부처가 함께 있는 것 처럼, 굴레와 키도 같은 곳에 있었고, 고통과 해소도 같은 곳에 있었으며, 지옥과 극락은 물론 삶과 죽음도 같은 곳에 있었다. 깨달음을 향해 천축으로 향하는 현장과, 구원을 위해 현장의 발자욱을 쫓는 오공. 동행할 듯 동행할 듯 동행하지 못하는 오공과 현장의 엇갈리는 인연은 마치 어긋나는 연인들을 보는 것 처럼 애틋하기까지 하다.  

 

 또한 [서유요원전]의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강한' 여성 캐릭터들이다. 총 열권의 '대당편' 중 한권에 수록되어 있던 저자와의 대담에서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직접 밝히기도 했는데, 정말 강한, 그래서 매우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작품의 서두를 장식하는 '용아녀-용화' 와 말미를 장식하는 '나찰녀' 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들이다. 용아녀가 보다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면, 나찰녀는 제천대성의 능력을 쓰는 손오공마저 압도할만한 강력한 힘을 가진 중성적인 마성을 자랑한다. 그 뿐 아니라, 여인들의 모성애를 다룬 '나타 태자' 와 그 어미인 '지용부인' 그리고 나타태자를 돌보는 요괴 '음도녀' 의 에피소드, '연리지'를 모티프로 한 듯 보이는 '부상부인'과 '동군' 의 애틋한 사연도 빼놓을 수 없고, 영원한 순정의 테마인 '보디가드' - 충직한 '석방상' 의 '백화수' 를 향한 순애보도 인상적이다. 사랑愛이 증오憎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려줄 '일승금' 의 애완동물(?) 사랑도 빼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 역시 마지막에야 엄청난 떡밥을 던져주는 나찰녀. 

누구지?? 누가 등장하는거지??(혹시 베지터가 등장하는건 아니겠지?ㅋㅋ)

 

 [대당편] 의 완결편은, 역시나 대가의 '대단원' 답게 한 권 만으로도 대단히 완성도 높은 한 단원의 마무리를 감상할 수 있다. 10권에 달하는 시간동안 은혜로, 또는 원수로 쌓여온 인연들이 차근차근 정리된다. 비록 1부격이긴 하지만, 최근엔 이렇듯 1권부터 10권을 관통하는 뚜렷한 주제의식, 통일성 있는 스토리 텔링, 일관성 있게 완성도 높은 작화로 완결되는 장편 명작은 쉽게 만나보기 힘들다. 성장해가는 손오공의 외모부터 대사와 행동까지 디테일하게 지켜볼 수 있다.  

 
 일본 망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재적인 몇명의 작가들이 시대별로 명멸하며 '왕국' 의 위세를 이어왔다. 우리에게도 매우 잘 알려진 망가의 신 '데츠카 오사무' 에서부터 '드래곤 볼'의 아버지 '토리야마 아키라' 에 '슬램덩크' 와 '배가본드' 의 '이노우에 다케히코' 까지. 그리고 그 사이사이 마다 그에 뒤지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뛰어난 작가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서유요원전] 의 모로호시 다이지로 역시 그 천재성에 비해 국내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개성 강한 그림체와 일본의 전통적인 색채가 짙은 매니악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인데, 다행히 [서유요원전] 을 필두로 다양한 출판사에서 여러 작품들이 출간되었다. 그 중에서도 [서유요원전] 은 가장 긴 장편으로, 단연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대가다운 스토리 텔링을 유감없이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일종의 '자아 찾기 여행' 이자 '진리를 추구하는 여행' 이며 '영웅 서사물' 이기도 한 현장과 손오공의 여정은 이제부터 [서역편] 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터다. 무지기의 끊임없는 유혹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고, 또 애쓰는 손오공. 그 여정에 끝엔 무엇이 있으며, 그 곳에서 손오공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는 - '조금'은 뻔하고도 추측 가능한 결말을 향해 나아갈 테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그것이 아니다. 그 여정 '중' 에, 손오공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이야기들을 쌓아갈지. 그리고 그렇게 얽히고 설키는 인연들 속에서 손오공은 어떤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역시 장편은 쌓아놓고 읽는게 제맛. 1권은 장기 대여중.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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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더볼츠 Thunderbolts 2 : 우리 안의 천사 시공그래픽노블
워런 엘리스, 마이크 데오타토 주니어 지음, 임태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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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 유니버스에 가장 큰 사건이었던 '시빌 워(내전)' 은 슈퍼 히어로들에게 엄청나게 큰 후폭풍을 몰고 왔다. 어벤져스의 양대 거목이었던 '아이언 맨' 과 '캡틴 아메리카' 가 '초인등록법안' 을 두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파벌을 형성해 격렬하게 대립했던 시빌 워는 캡틴 아메리카의 죽음으로 아이언맨이 이끄는 찬성파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초인등록법안 이라는 법안 상정 자체가 정부는 '히어로' 와 '빌런(슈퍼 파워를 지니고 있는 슈퍼 악당)' 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정의했다는 증거였다. 닉 퓨리에 이어 초인 국가기관인 'S.H.I.L.D(이하 '쉴드')' 의 국장을 맡게 된 아이언맨은  초인등록법안에 찬성하고, 반대파를 일소하며 신뢰를 쌓는 듯 했지만, 오히려 시빌워를 통해 발생한 사회적 혼란의 책임을 떠안고 쉴드라는 단체 자체가 사실상 기능이 정지되기에 이른다. 
 그 빈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슈퍼 빌런 '그린 고블린' 의 이중 인격체인 '노먼 오스본(스파이더맨의 숙적)'이었다. 시빌워 때 캡틴 아메리카와 스파이더맨, 데어 데블 등을 위시한 초인등록법안의 반대파들을 숙청할 때 실제로 빌런들을 활용한 작전이 정부 고위 인사에 의해 시행 되었었, 당시 노먼 오스본은 이 작전을 비교적 잘 통제하며 상당한 신임을 얻었던 터였다. 캡틴 아메리카가 죽고 데어 데블 등이 체포되며 초인 등록법안 반대파는 와해된 것으로 보였으나, 아직 등록하지 않은 히어로들은 너무나 많았고, 그들 중 누가 반대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초인등록법안의 주체가 되고 남은 반대파들을 숙청해야 할 쉴드가 기능이 정지되어 버린 판에, 노먼 오스본이 '통제'하는 빌런 팀 '썬더볼츠' 가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다. 
  이이제이. 악당으로 영웅들을 때려잡는 상황이었지만 , 정부의 입장에선 법안에 반대하는 자들은 빌런과 다를바 없었다. 실제로 노먼 오스본은 제어하기 힘든 사악하고 강력한 악당들을 비교적 잘 통제하며 등록하지 않은 히어로들을 '죽이지 않고' 합법적으로 체포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이뤄낸다.  하지만, 악당은 어디까지나 악당. 썬더볼츠의 가장 핵심적인 멤버 중 하나였던 '불즈 아이(데어데블의 숙적)'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노먼 오스본의 또다른 인격체인 그린 고블린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며 깊은 곳에서부터 어두운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썬더볼츠' 는 완벽하게 악당들이 주인공과 화자로 전면에 등장하는 타이틀이다. 'JOKER' 나 '웃는 남자' 처럼 악당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래픽 노블들은 종종 봐왔지만, 악당들이 팀을 짜서 등장하는 타이틀은 꽤나 생소했다. 사실 미국 히어로 그래픽 노블들이 큰 인기를 얻는 이유는 강력한 주인공에 버금가는 강력한 악당이다. 배트맨을 '가지고 노는' 조커나 슈퍼맨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렉스 루터, 아이언맨을 떡실신 시키는 만다린, 캡틴 아메리카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레드 스컬 등 슈퍼 히어로를 상회하는 능력을 지닌 악당들이야말로 이야기의 꽃이랄 수 있다. 
 '썬더볼츠' 는 이러한 미국 그래픽 노블들의 생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스파이더맨의 가장 강력한 숙적인 '노먼 오스본'은 스파이더맨의 세계관 속에서 거대한 과학 테크놀로지 기업인 오스코프사社의 평범한 연구원이었지만, 방사능 실험과 오컬트적인 영향으로 인해 엄청난 파워와 광기를 지닌 '그린 고블린' 이라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린 고블린이라는 악당이 재미있는 부분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처럼 평소엔 노먼 오스본의 인격 아래 숨어있다는 점이다. 그린 고블린은 노먼 오스본의 이면에 자리잡고 마음 깊숙히 숨어있는 악마성과 광기를 이용한다. 샘 레이미의 첫번째 스파이더맨 영화 시리즈에서는 '웰렘 데포'가 그러한 양면성을 굉장히 잘 표현해냈다. 노먼 오스본은 처음에는 그린 고블린의 힘을 두려워하고 거부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강력함에 유혹을 느끼며 결국 그 스스로도 진정한 악당이 되어가는 인물이다. 아무리 공포스러운 힘이 있더라도 거대기업의 일반 연구원이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기는 힘들다. 그는 그만큼 술수에도 능한 인물로서 뛰어난 모략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무기들로 끊임없이 스파이더맨을 괴롭힌다. 심지어 이 인격은 아들에게 유전이 되기도 하는데, 스파이더맨의 본래 모습인 스콧 파커와 노먼 오스본의 아들인 해리 오스본과는 절친으로써, 두 부자 고블린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지경에 몰리기도 한다.
 이런 캐릭터인 노먼 오스본이 썬더볼츠의 수장으로 악당들을 통제할 수 있었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대 기업의 오너로써 정치계에도 줄이 닿아 있었고, 모략과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악당들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여 통제한다.  

사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악당들은 그 수가 꽤 많아서, 어떤 악당이 어떤 히어로와 관계가 있는지는 쉽게 파악할 수는 없다. 꽤나 많은 수가 등장할 뿐 아니라, 진짜 거물급 악당은 노먼 오스본과 불스아이, 베놈 정도에 불과하다. 이야기의 흐름에 맞춰서도, 그게 맞는 설정이긴 하다. 진짜 강한 거물들은 이런 혼란기에 섣불리 운신했다가 불똥을 얻어맞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노먼 오스본은 그런 틈새를 노려 정치적인 술수를 발휘해 상당한 권한을 획득한 것이다. 

악당들이 왜 악당일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악당들은 왜 항상 질 수 밖에 없는지를 악당들 내부에서 상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노먼 오스본이 아슬아슬하게 악당들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상당히 스릴있고, 노먼 오스본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자기 자신 안의 그린 고블린을 제어하기 위한 노력도 상당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물론 등장하는 악당들의 여러가지 슈퍼 파워들을 감상하는 것도, 히어로들의 슈퍼 파워들을 즐기는 것 만큼 재미있다.  

항상 슈퍼 히어로들이 등장해,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결국 악당들을 물리치는 내용의 그래픽 노블들에 질리셨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이 사악한 악당은 어떤 방식으로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결국 어떤 결과를 향해 나아가게 될것인지 꽤나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악당은 왜 악당일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악당들의 회합은 결국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 직접 감상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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