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개 탐정 1 - 세인트 메리의 리본
다니구치 지로 지음, 정은서 옮김, 이나미 이츠라 원작 / 애니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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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메이션<->TV드라마<->영화<->소설<->라디오 드라마  등 원소스 멀티유즈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완벽하게 작동하는 일본에서도 다니구치 지로는 꽤나 특별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인물이다. 

스토리 전반을 담당하는 '원작자' 와 스토리를 바탕으로 보다 최적화된 연출과 그림을 맡는 '작화가' 가 확연히 나뉘어 있기에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화도 이미 수없이 많지만, 특히 다니구치 지로는 문학적 색채가 짙은 원작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다니구치 지로가 가지고 있는 짙은 리얼리즘에서 기인한다. 

다니구치 지로는 훌륭한 작화가이기도 이전에 뛰어난 원작자이기도 하다. 실존 인물이나 스스로 겪은 경험을 모티프로 감성적이고 리얼하면서도 만화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직조해낸다.

실제로 우리에겐 앙굴렘 최우수 미술상을 수상한 유메 마쿠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신들의 봉우리]가 먼저 알려졌지만, 이미 그보다 두 해 전에 원작과 작화를 모두 한 [열네 살] 이 앙굴렘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다니구치 지로는 다른 작가의 소설을 각색하는 작업을 더욱 즐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원작이 있는 작품들의 말미에는 항상 원작자와의 대담이 실려있곤 한데, 자신의 작업물에 대한 원작자의 반응에 무척 즐거워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 작품 역시 소설이 원작인 작품으로, 말미에 뛰어난 원작을 각색하는 작업에 관한 멘트가 실려있다. 


[사냥개 탐정] 은 제목 그대로 사냥개만 전문으로 찾아주는 탐정 '류몬 타쿠'의 이야기이다.

류몬 타쿠는 상속받은 자기 소유의 광활한 임야에 거주하며 사냥꾼들이 잃어버린 사냥개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아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을 벌며 자연에 파묻혀 안빈낙도하는 인물이다. 충실한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인 늑대개 '조'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 우리나라 만화에서 '개'라는 동물은 웹툰의 신변잡기적인 소소한 이야기 속 반려견 정도로 등장하지만, 훌륭한 캐릭터성을 가지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연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꽤 많았다. 

개도둑에게 팔려가 투견장을 떠돌다가 결국 주인의 품에 안기는 개의 대서사시부터 시련에 처한 주인을 돕는 훌륭한 길잡이로서의 활약을 다루는 작품도 있었고, 매일매일 집에서 빠져나와 인간세상을 즐기는 응큼하고 코믹한 개의 이야기도 있었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참 많다. 유튜브의 컨텐츠들 중 가장 인기있는 리스트를 살펴보면 최소한 1/3은 개와 관련되었을 터다. 

인간 사회에 녹아든 최초의 동물(추정). 고양이, 소, 말 등과 함께 인류의 역사의 발전에 빠질 수 없는 존재. 

현대의 우리는 개를 또 다른 아기, 일종의 유사 자녀로 여기고 사랑하지만, 사실 인간에게 개는 식량 확보에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에서 개라는 동물은 식량 확보를 위해 필수적으로 함께 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오락의 형태로 되었지만, 수렵은 농사와 함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량 확보의 통로였고, 개는 필수불가결한 아군이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인간보다 몇배는 예민한 감각으로 각종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해 주는 훌륭한 척후병이자 불침번이었고, 심지어 보디가드였다.


읽어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후기를 통해 유추해보면 원작자인 '이나미 이츠라' 작가는 '사냥'을 작품 소재로 자주 활용한 모양이다.

당연히 사냥개가 중요한 존재로 등장했을 터이고, 결국에는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로서의 개를 그리기에 이르렀을 터다.

[사냥개 탐정] 에서는 이렇게 누군가의 유사 자녀로써 감정적인 결핍을 충족시키는 존재가 아닌, 실제 누군가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진정한 의미의 '반려'로서의 '개' 들을 만날 수 있다.    

주인공인 류몬 타쿠부터 반려견인 조가 없다면 직업 자체를 유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를 비롯해 개가 없으면 불가능한 전문 수렵인의 의뢰부터 시력을 잃은 소녀의 맹도견, 말을 관리하던 목장의 개까지 누군가의 삶에 있어 생존 그 자체와 연관되어 있는 많은 개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원작이 갖고 있는 문학성 높은 문장은 내레이션으로 삽입되고 그에 어울리는 완성도 높은 컷들이 마치 개개의 일러스트처럼 자리잡고 있고, 다니구치 지로가 원작에서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연구를 거듭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사자 무리 안에 염소와 송아지들이 있다.

사자가 풀을 뜯어서 염소와 송아지들을 먹이고, 그들이 수명이 다 해 죽으면 잘 매장을 해준다.

참 웃기고 재미있는 광경이 될 터다.

헌데,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광경이다. 

사자와 호랑이 같은 맹수들도 평생 꾸준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보급되면 사냥하지 않는다.

쾌락을 위해 사냥하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다. 


최근 짐바브웨의 국민사자,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언킹' 의 실제 모델이었던 세실이 잔혹하게 사냥당한 일과 야생 동물들을 박제용으로 '수집' 하기 위해 학살을 일삼는 '평범한 사람들' 에 대한 이야기가 줄곧 오르내리고 있다. 

정말 절묘한 타이밍에 이 작품을 만났다.


단언컨대, 인간에게 사냥본능은 없다.

인간의 사냥에 가장 필요한 것은 총이나 활이 아니라 개였다. 인류 역사에 있어 최초로 길들인 동물이 개이고, 바로 그 개가 인류 진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진 동물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으면 그 타당성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개와 고양이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목걸이를 달고, 칩을 박고, 등록을 하고, 이제는 GPS를 달려고 애를 쓴다. 

어쩌면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유전자 안에 깊이 박혀있는 생존본능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개는 사냥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고, 고양이는 곳간을 설치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개는 인간의 수십배에 달하는 감각과 운동신경을 가졌으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도 가지고 있다.

학습능력도 뛰어나고 인간에게 옮기는 치명적인 질병도 없다. 

심지어 개와 함께 자란 아이는 각종 병에 대한 면역력도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존재한다!!!  ;;; 


누군가 신은 고양이를 창조하고 고양이를 돌보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개는 그런 인간을 돌보기 위해 창조한 것이 틀립없다. 


아아...

이 리뷰는 분명 개가 아닌 다니구치 지로라는 만화가의 문학성에 관한 내용이어야 했는데...

재밌다. 정말 재밌어.

1권도 재미있고, 2권은 더 재미있다.


아아, 헌데, 별 수 없다.

이 책을 보면, 개만 보인다.

그것도 큰...

아주 큰 개....ㅠㅠ 

돈 많이 벌어서 꼭 키워보고 말테얏!! 


작가님, 다음권 더 내주시면 안되요???? 라는 부탁과 함께, 우리나라의 유기견 협회를 슬쩍 들어가보게 된다.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비단 예쁘고 착해서만이 아니다.

인류의 발전 자체가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신이 잊지 않고, 그 기억을 DNA안에 꼭꼭 눌러 적어줬다. 

그러니까 이런 멋진 작품들이 종이 위에 꼭꼭 눌러 그려진것이다.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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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지금 우리 학교는 1~5 세트 - 전5권
주동근 지음 / 애니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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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간 브라운관과 모니터에는 좀비,'리빙데드'가 가득했다. 엄청난 규모의 좀비 군단이 건물을 떼로 기어오르는 장면이 거대한 화면을 메웠고, 꽃미남 좀비와는 달달한 로맨스가 피어나기도 했다. TV 에서는 긴 호흡으로 좀비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인간들이 각자의 지독한 삶을 풀어내기도 했음은 물론, 그 원작이 된 미국 그래픽 노블과 일본 망가에서도 좀비는 여지없이 등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최고의 스토리 텔러인 강풀도 좀비를 꺼내들며, 웹툰계에도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강풀의 [당신의 모든 순간]이 좀비를 감성적으로 활용한 '한국형 좀비물' 이라고 한다면 주동근의 [지금 우리 학교는]은 좀비물의 장르적 장치들을 명민하게 활용한 '정통 좀비물' 이라고 할 수 있을터다. 


△이런 장면이야말로 좀비물만이 줄 수 있는 극도의 공포.




 좀비는 그 태생부터가 저 멀리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이다. 
남미대륙인지 중미대륙인지 애매한 곳에 자리잡은 아이티와 주변 부족들의 전통종교인 '부두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좀비는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인 근로자마냥 띄엄띄엄한 존재였지만,  최근 몇년 사이에 마치 다문화 가정처럼 친숙해졌다. 많은 엔터테인먼트 장르 중에서도 매니악한 호러, 그 중에서도 좀비 장르는 좀비가 지니고 있는 지나치게 뚜렷한 특징때문에 클리셰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패턴이 지나치게 명확한 것이 장점이자 단점인 것이다. 사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으로 '좀비'의 현대적 원형을 확립한 조지 로메로 이후 수십편의 좀비물이 꾸준히 등장했지만, 좀비를 소재로 한 플롯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재앙. 튀고, 튀고, 또 튄다. 주인공을 포함해 좀비 외의 등장인물들은 오로지 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행동이 별로 없다. 맞서 싸워봤자 쪽수로 겁나게 밀린다. 결국 '어떤 인물들이 나와서', '얼마나 참신하게 죽고 죽이며', '얼마나 참신하게 튈 수 있는가?' 가 좀비물이 지향하는 지점이자,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이러한 장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좀비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소재이다.
뱀파이어나 웨어울프, 듀라한이나 천사, 악마, 원혼, 처녀귀신, 도깨비, 저승사자, 구미호등도 꽤나 영감을 자극하는 소재들이지만, 좀비는 개별적인 존재로써는 미미하지만 '집단' 이라는 특징으로 여느 괴물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는 점 때문에 특히 더 구미를 자극한다. 좀비 영화나 좀비 소설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묘사하는 부분이 바로 이 특징이다. 마치 병정개미떼처럼 거대한 군집을 이루어 몰려드는 좀비들이야말로 좀비물이라는 장르가 줄 수 있는 가장 특별한 공포다. 일군의 좀비들은 인류가 이룩한 한 사회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 사회의 구성원 전체를 자신의 집단에 소속시킨다. 좀비와 다른 존재들과의 통로는 무조건 일방통행이다. 뱀파이어도, 웨어울프도, 심지어 처녀귀신이나 저승사자도 말이 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좀비와 인간의 사이는 절대적인 불통이다. 이 극복할 수 없는 불통이 좀비물이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이다. 일고의 여지가 없는 먹고 먹히는 관계. 그 관계에서 오는 절대적인 긴장감. 그것이 좀비물이 창작자들에게 주는 거대한 선물이며, 그만큼 압도적인 과제이다.  (이 부분이 통째로 거세되었기에 [웜 바디스]가 정통 장르 팬들에게 큰 비난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또한 태생부터가 종교적,사회적인 좀비는 그 자체로 많은 은유를 담고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인 '리빙 데드' 의 창시자 조지 로메로 역시 자신의 영화 안에서 뛰어다니는 '살아있는 시체' 가 담고 있는 사회적 은유를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좀비처럼 자제력을 잃고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거대한 군중집단의 모습은 실제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때문에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로 등장한 많은 영화들은 영화적인 완성도 뿐 아니라 영상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함의들을 재해석하는 현상이 무척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호러라는 장르가 추구하는 바는 단순하다.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이성을 잃은 식인자들의 거대한 집단은 물론 생존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무너져가는 인간들의 모습도 모두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인 것이다. 좀비물은 한 발 더 나아가 그러한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사회' 의 헐거움을 직설적으로 그려낸다. 이성적 집단과 비이성적 집단의 충돌. 그를 통해 보여지는 날 것 그대로의 비릿함이 좀비물의 본질이다. 


△1968년 작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조지 로메로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좀비의 원형을 창조해냈다. 일정 시기까지 부두교의 좀비와 로메로의 좀비를 구분하기 위해  영화 제목을 따 '리빙 데드'라는 단어를 썼다고 한다.


 
  한편, 만화계에서 좀비는 캐릭터로써 등장한 경우는 꽤 있지만, 좀비물이 갖고 있는 장르적인 장치들을 차용하는 일은 드물었다. 노동 집약적인 매체인 만화의 특성상 '집단'이 가장 큰 무기인 좀비물은 비경제적인 소재일 뿐 아니라, 매니악한 장르인 호러, 그 안에서도 더더욱 매니악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장르로써의 좀비물은 완벽히 대중성에 기반하는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소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 안에서 [지금 우리 학교는]는 대단히 용감한 작품이다.  웹이라는 인프라와 디지털 작업이라는 신기술이 아니었으면 쉽게 도전할 수 없었을 이 작품이 모니터에서 뛰쳐나와 지면에 섰다. 

이 심장 쫄깃해지는 이야기의 배경은 가상공간인 '효산시'의 '효산고등학교'이다. 과학 담당교사인 이병찬에게 이틀동안 감금되어있던 여학생이 가까스로 탈출하여 영어 담당인 박선생이 수업하고 있던 교실로 뛰어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품은 크게 전,후반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가 쫓고 쫓기는 전형적인 좀비 서바이벌 형식이라면 후반부는 피아식별이 모호해지는 심리 스릴러에 가까워진다. 전반부의 내용은 이야기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박선생님과 온조,수혁,남라등의 일행이 천신만고 끝에 가장 안전한 공간인 방송실로 모이는 과정이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닭장같은 교실들과 좁은 복도가 일순간에 지옥도로 변모하며 폐쇄적인 공포를 선사하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친구였던 이들을 피해 달아나야 하는 비극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익숙한  복도와 교실들은 지옥의 미로가 되어 기대 이상의 스릴을 선사한다.




△서서히 지옥도로 변해가는 학교. 아직 상황을 모르는 일부 교실에서는 여전히 수업중. 웹 연재당시 이러한 깨알같은 설정들이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백미는 전반부의 서바이벌 게임을 거쳐 박선생 일행이 방송실에 고립된 이후부터 시작된다. 다른 방향에서 서바이벌 게임을 펼친 미진이 장민재,하리 남매 일행과 합류하고 '변종' 인 귀남이가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중심에 근접하며 이야기의 전체적인 정서가  급격히 변화, 클라이맥스를 향한 카운트 다운을 시작한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 가장 영리하게 설정한 장치가  바로 '변종' 이다. 이야기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장치인 변종을 통해 생존자들 사이에 위태로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드디어 방송실에 도착한 친구들.
안심하긴 일러 얘들아.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거든.



△작품 후반부를 이끌고가는 싸이코 패스 '변종' 귀남.

싸이코 패스의 대표주자, '배트맨'의 조커에 대한 오마쥬 느낌이 난다.


아쉬운 부분은 평이한 화면연출이었다. 스크롤로 만화를 보는 웹에서는 큰 단점이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단조로운 구도가 반복되며 긴장감이 떨어졌다. 특히 책의 판형에 맞게 컷들이 웹에서 보던 느낌에 비해 많이 줄어든 느낌이라 단점이 더욱 부각된 감이 있다. 작가의 의도였을 수도 있겠지만, 정서적인 연출이 전무했던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 점 역시 앞서 언급한 연출의 단점과 맞물리는데, 이야기의 구조과 인물들의 개성에 비해 감정이입이 잘 안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야기와 캐릭터의 만듦새의 완성도에 비해 만화적 표현력이 조금 부족했던 것이 아쉽지만, 서사의 전개에 비중을 두어 만화적 과장이 미약한 점은 현재 한국 웹툰이 보여주는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중요한 대사를 나누는 일련의 연결된 씬들. 미들숏과 바스트숏만으로 그려져서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효과선이나 클로즈업, 여러 각도의 뷰 등 만화만이 줄 수 있는 다양한 표현들이 아쉽다.



하지만 분명 [지금 우리 학교는]는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이다. 특히 장르물로써의 완성도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 입시에 찌든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나와서 교실과 복도를 누비며 정신없이 도망다니고, 학교 기물들을 이용해 좀비가 된 친구들을 해치운다. 골판지나 문구용 가위가 유용하게 쓰이고, 사물함도 개인 벙커로 훌륭하게 활용된다. 조금은 생소하지만 양궁부가 등장하여 좀비장르의 특징인 사살(Shoot Dead); 헤드샷이 등장하는 장면도 재미있고, 변종이라는 포인트도 적절하게 활용된다. 서두에 언급했던 좀비물의 지향점을 적절하게 충족시킨다. 
이렇듯 작가는 장르로써의 좀비물이 가지고 있는 장치들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면밀하게 배치했고, 인물들의 역할도 나쁘지 않았다. 마치 배트맨의 조커를 오마주한 듯한 외모의 귀남은 신의 한수였고, 싸이코 패스적 기질과 좀비의 신체적 특징이 어우러지며 대단히 흥미로운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좀비물의 미덕인 사회 비판적인 접근도 빼놓을 수 없다. 효산시를 두고 전전긍긍하는 정치권의 모습이나 그런 무능한 정부 안에서도 제 역할을 잘 해내는 말단 형사들을 그려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주요 배경이 학교라는 점이 맘에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이미 거대한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성적에 의해 우와 열이 나뉘며 취향에 의해 그룹이 나뉜다. 성향으로 인해 따돌림을 당하고, 군중심리로 인해 집단 괴롭힘이 자행된다. 박선생에 의해 생존의 길을 찾는 친구들의 모습은 좀비가 없다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학' 이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절절 끓는 욕망과 기호가 거세된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이미 그 자체로도 '공부하는 시체(Studying Dead)' 아니던가. 살아남기 위해 교실과 복도를 질주하고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고등학교라는 거대한 형무소 안에서 각자의 미래를 찾아 모험을 택하는 색다른 학생들로 보였기에 작품의 제목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왔다.
비록 시체들이 되살아나 날뛰고 있지는 않겠지만, 어떤가? 
지금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그리고 지금 거기 당신들은?
당신은 진정, 좀비가 아닌가?



△책의 만듦새도 참 좋다. 역시 용자 애니북스.




※사진 출처 [월드 워Z],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스틸컷 - 네이버 영화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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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2 (완결) 노아 2
대런 아로노프스키 & 아리 헨델 지음, 이현희 옮김, 니코 앙리숑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혹시...혹시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건 아닐까? 

어쩌면 조물주께서는 우리가 함과 야벳에게 짝을 찾아주는 걸 바라지 않으실지도 몰라.

여기 이 동물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주는 것. 그걸로 인간의 임무는 끝인 거야.

그리고 인간은 사라지는 거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1권 100~101p

 

 

우리는 살아가며 가끔씩 - 아니면 매우 자주 -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무덤 속으로 간다는 매우 명쾌한 답이 있지만, 이 질문의 본질이 그것뿐이 아님은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우리에겐 사유의 능력이 존재한다. 만약 이 능력이 없었다면,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무덤 속으로 간다는 답 만으로 모두가 만족했을 텐데. 이와 거의 비슷하지만 만인에게 공감대를 끌어내는 답이 있다.

'신의 손 끝에서 태어나서 신의 품안으로 간다.'  는 답이다. 

생각이고 자시고, 이렇게 믿어버리면 제일 속 편하다. 누군가 나를 만든 고차원의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나의 삶에 목적을 부여했으며, 나는 삶을 통해 그 목적에 부합해가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그 목적인 수천년전에 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이 방대한 양의 책으로 남겨두었다니, 명쾌하고 속 시원한 해답이 된다. 

 

반면 '그런거 생각하지 말고 눈 앞의 현실에 집중해' 라고 일갈한 성인도 있다.

'시장통에서 독화살에 맞았는데, 치료하기는 커녕 독이 퍼져가는 상황에서 독화살을 쏜 사람을 찾고 있는 격' 이라고 일깨워 주셨단다. 

 

인간을 만든 상위 존재; 조물주 가 있건 말건, 문제는 직면한 '현실'이다. 

 

 

 [노아]는 기독교 세계관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며 성경 안의 노아 이야기를 원형 그대로 가져오되 노아가 했음직한 고뇌를 디테일하게 풀어낸다. 무엇보다 조물주에 대한 접근이 같으면서도 다른 뚜렷한 차별성을 보인다. 

기독교의 신은 세상과 인간들을 창조해내고 삶의 목적은 주었지만 '자유의지' 라고 부르는 충분한 선택권을 허락했다. 기독교의 신은 성경 안에서 인간의 부모처럼 묘사된다. 구하면 주고, 두드리면 열어주고, 부르면 응답하고, 때로는 믿음을 시험하기도 한다. 자애와 사랑의 존재이며 때로는 엄하게 회초리를 들기도 하는 대화가 통하는 인격적 존재로 받아들인다. 

 [노아] 에서의 조물주는 그렇지 않다.

작품 안에서의 조물주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노아에게 환상을 통한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노아는 처음 몇번은 환상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신앙이 깊었기에 비로소 그 환상들이 명확한 조물주의 메시지임을 알아채고 스스로의 선험적 지식에 기인한 해석을 시도한다. 

작품 안에서의 조물주는 거대한 섭리이고, 노아는 그 섭리를 먼저 접한 선각자인 것이다. 선각자는 언제나 외롭고 고통스럽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며,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먼저 발을 내딛는 선구자,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노아는 주도면밀하게 조물주의 환상을 해석하고, 그 메시지와 스스로의 역할을 깨달았다. 그 과정중에 살아오면서 느꼈던 인간에 대한 끝없는 불신과 인간사회에 대한 절망이 개입되며 다른 생명들에겐 구원자를, 인류에겐 심판자의 길을 선택한다. 단지 조물주의 말씀을 대신 하던 인간에서 조물주의 힘을 이용하는 대행자, 화신으로 거듭나게 된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한 노아는 결국 자기 자식들의 생사여탈에 관여하게 되고, 스스로가 해석한 조물주의 뜻과 스스로가 행해야 할 마땅한 행동 사이에서 고뇌하기 시작한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영원히 볼 수 없는 미래와 바로 두 손에 올려진. 지금 자신이 당면한 현실.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는 두터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희생의 순간을 직면하자 노아는 크게 흔들린다. 


 지금은 거의 발을 뗐지만, 개신교에 깊이 빠졌던 시기가 있었다.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봉사도 열심히 따라다녔고, 청년부 회장도 하면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논의에 깊은 흥미를 가졌더랬다. 하지만 나는 결코 감화될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순간' , 혹은 '신을 영접하는 순간' , 또는 '접신', '만신', 그리고 ' 열반' '대오각성' 일지도 모르는, 어쩌면 모든 종교와 철학이 일맥상통하게 가지고 있는 벽일터다.

 정해진 신앙의 훈련을 착실히 받았던 노아는 결국 조물주와 완벽하게 맞닿는 순간을 경험하고 세상과 자신의 운명을 깨우친다. 노아로 인해 노아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고, 새로운 민족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리고 누구는, 다른 길을 떠난다.  



[프라이드 오브 바그다드] 라는 작품으로 큰 찬사를 받았던 니코 앙리숑은 묵직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림으로 옮겨냈다. 동물의 시점과 시각, 화각을 자유자재로 활용한 다이내믹하고도 드라마틱한 연출이 돋보였던 [프라이드 오브 바그다드] 에 비해서는 전반적으로 평범하지만, 묵직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1권을 통해 예고되었던 함과 야벳의 형제간의 갈등, 함과 노아의 부자간의 갈등은 내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풀려갔다. 개인적으로는 노아의 가족이 사방이 물로 막힌 200여일간의 표류가 보다 농밀하고 파괴적인 감정을 이끌어 내리라 생각했었는데, 뜻밖의 제3자가 개입되어 갈등의 표출이 그를 통해 표출되었다. 무엇보다 전사인 노아와 달리 함과 야벳, 셈은 너무 나약했다. 당시의 강력했던 부권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노아가 조물주의 충실한 종이라면, 함은 조물주와 같은 아버지에 대항하는 구도를 좀 더 부각시켰어도 상당히 재미있는 드라마가 탄생했을 것 같다.

 1권 리뷰의 서두에도 언급했었지만, 신화는 창작자들에게 끝없이 샘솟는 영감의 샘이다. 

그 샘에서 퍼올린 맑고 시원한 한 바가지의 이야기.   

이 안에는 인간 개체의 존재론에서부터 신학, 개개인의 믿음과 행동에 관한 묵직한 화두들이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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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물원 세미콜론 코믹스
다니구치 지로 글.그림,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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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구치 지로. 한때는 참 좋아하는 소설가인 아사다 지로와 종종 헷갈리기도 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작가 모두 공히 자신의 분야에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분들이라는 점일 터다. 나는 [신의 봉우리]로 다니구치 지로를 만났더랬다. 무척이나 남성적이고 야성적인 '산' 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매우 섬세하게 풀어내고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침착하다는 느낌도 빼놓을 수 없었다. 화면 가득 펼쳐진 거대한 산들은 섬세한 터치와 훌륭한 기술로 능숙하게 그려져 있었지만, 주인공은 언제나 '사람' 이었다. 산을 보여주기 위해 '산' 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한 산 등성이에 점보다도 작게 박혀 있는 '사람' 을 그리기 위해 산을 택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웹툰이 큰 인기를 얻으며 소위 '일상툰' 이라는 자전적인 만화들이 난맥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만화계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는 기량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나 가능한, 최후의 '밑천' 으로 여기는 소재이기도 하다. 물론 만화를 처음 배울 땐 자신의 이야기나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습작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습작으로만 가능한 일, 철저히 '대중성' 을 담보하는 만화계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란 연출과 표현에 대한 완벽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면, 불필요한 과장과 허구가 잔뜩 들어간 무늬만 '자전적' 이 되는 경우가 많다. 

 

 [겨울 동물원] 은 1998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실제 섬유공장에 다녔고, 만화가 문하 생활을 거친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자전적 픽션' 이다. 문학으로 치면 수필과 소설의 경계에 머물러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글의 첫머리에 언급했듯 사실적인 연출과 서정적인 드라마를 펼쳐내는 작품들로 잔뼈가 굵은 작가 답게 소소한 이야기들을 잔잔하고 능숙하게 펼쳐내고 있다. 의류 잡화 공장 직원으로 일하면서 겪은 일들과 이후 만화가 문하에 있으면서 얽히게 되는 이야기들까지. 1인칭 시점으로 동료, 가족, 선생님 등 주변 인물들과의 일화들을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하마구치의 곁을 스쳐간 여성들. 말 그대로 '스쳐갔을' 뿐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녀들과의 순정적인 일화들이 평범한 일상을 매혹적으로 바꿔내고, 하마구치의 삶에도 알게모르게 변화를 이끌어낸다.  

특히나 이 작품의 안정적인 구도와 컷 연출은 특별히 눈여겨 볼 만 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의 흐름을 잡아 채면서 손을 놓지 못하게 하는 흡인력은 오롯하게 그래픽 내러티브의 힘이다. 과장되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힘은 뺐지만, 한 컷 한 컷에 작가의 철저한 계산과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진정성은 언제나 통한다는 통설은 글월에서나 가능한 전제였다.

만화에서는? 

적어도 '자전적 이야기' 에서 만큼은 택도 없다. 자전적 이야기와 진정성은 기본적으로 폭넓은 공감을 전제한다. 그리고 폭넓은 공감이란, 디테일과 그 디테일을 극화로 활용하는 기법을 통한다. 하지만 바로 그 디테일을 잡아내고,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들을 활용하는 작품이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만화 연출과 표현에 대해 완벽한 기량을 갖췄다면, 통한다. 통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는(꿈꾸는) 모든 웹투니스트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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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1 노아 1
대런 아로노프스키 & 아리 헨델 지음, 이현희 옮김, 니코 앙리숑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신화는 거대한 벽이자, 끊임없는 영감의 샘이다. 
인간이 겪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의 총아인 신화는 용감한 도전자들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왔다. 수많은 작가들이 신화의 날개를 달고 전설이 되었고, 훨씬 더 많은 작가들은 눈을 떨구고 무릎을 꿇었다. 그 중 중세에 꽃을 피운 기독교 신화는 고대의 신화들과 역사의 질곡들을 먹어치우며 그야말로 하나의 세계관으로 자리잡으며 현대까지도 그 위명을 떨치고 있다.
 
 기독교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약 250개의 민족들에게 공통으로 전래되고 있는 대홍수 설화는 특히나 더 강렬한 영감을 주는 이야기이다. 특히, 보다 폭넓은 상상력을 적용시킬 수 있는 영화와 만화의 영역에서는 훨씬 더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기독교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만화천국 일본에서도 대홍수와 방주를 모티프로 삼은 만화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접했던 여러 작품들 중 기억에 탁 떠오르는 작품은 일본 만화 한편과, 미국 영화 한 편이었다.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받은 히로시 다카하시의 [스프리건] 이라는 만화와 배꼽을 쥐고 웃었던 코믹 드라마 [에반 올마이티] 라는 영화였다. 두 작품 모두 배경은 현대였는데, [스프리건] 에서 방주는 지구의 대기에 영향을 미쳐 기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초고대문명의 비밀병기였다는 설정이 흥미로웠고, [에반 올마이티]는 기독교의 국가인 미국 영화 답게 종교색이 보다 짙지만 '현대 사회' 와 '노아 역할' 이라는 사회와 개인의 충돌이 꽤나 큰 웃음을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프랑스발 그래픽 노블인 [노아]는 판타지와 종교의 영역에서 묘한 중심을 잡고 있다. 그 배경은 성서에도 등장하는 수메르 문명이 절정에 이르렀던 바빌로니아 시대가 맞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한껏 가미된 독창적인 세계이다. 제목답게 이야기의 전반적인 색채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이 농후하다. 등장인물들의 이름 모두 성서에 등장하는 그것들을 따르고 있고, 세상을 창조한 유일신 조물주가 등장하며, 창세기의 구절들이 인용된다. 노아가 받는 신의 계시 역시, 성경의 그것과 같다. 특히 2권으로 묶인 이 거대한 홍수신화의 도입부인 1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이야기가 크게 특별한 점 없이 펼쳐진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거인' 들 역시 기독교 문화권 다운 설정을 지니고 있다. 도입부답게 여러 갈등의 도화선들을 준비하고, 복선으로 얼핏얼핏 내비추는데, 역시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연출과 컬러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구도의 컷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데, 컬러 역시 대담하고 화려하다. 미국발 그래픽 노블이나, 모니터에 특화된 우리 웹툰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색들로 보다 전통 회화 기법에 충실한  컬러들이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과 일본, 미국, 유럽 국가들의 만화 제작 방식과 타겟층, 만화라는 컨텐츠에 대한 접근 방법은 물론, 탄생 배경마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물론 인쇄술의 역사와도 큰 관련이 있기도 하다. 무튼, 이 리뷰를 통해 그 이야기를 다룰 필요까지는 없고, 그저 작품을 맞닥뜨려보면 '다르다' 는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 만화와 많이 다르지만, '그림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는 본질은 같다. 
 
 1권은 기대 이상도, 이하도 아닌 평범한 편이었지만, 2권이 기대되는 떡밥들이 잔뜩 뿌려져 있다. 
노아는 종말을 앞둔 세계에서 선택받은 단 한명의 인간이다. 그는 인류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대표해서 살아남았다. 그 고뇌의 깊이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그의 결정에 한 개체 전체의 존멸이 걸려있다. 그리고, 그가 가장 고뇌하는 존재는 바로 인류. 자신이 낳고 기른 자녀들의 생과 사에 대해, 인류의 미래에 대해 가장 깊은 고뇌를 안고 있다. 과연 인류에게 미래를 허락해도 되는걸까? 인간의 추악한 단면들을 베어내며 살아온 마지막 선인 노아에게 가장 깊은 고뇌는 바로 그것이었다.  

 홍수 신화는 인류의 멸망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이다. 절망과 희망에 대한 노래이지만, 노아가 갖고 있던 고뇌와 40일간의 정처없는 표류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절망과 희망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모두 공평하게 적용되었을 터. 과연 '선택받은 자' 를 아버지로 둔, 남편으로 둔 가족들은 40일간 어두컴컴한 방주 안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냈을까?  특히 성경에도 등장하는 노아의 세 아들간의 갈등과 아버지와의 관계들 역시 능숙하게 다루어질 터다. 
죽음으로 사방이 막힌 어두컴컴하고 고립된 공간 안에서 기약없는 절망의 표류를 해나갈 인류 마지막 가족들의 이야기. 
이 어찌 흥미롭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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