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로마사 - 7개 테마로 읽는 로마사 1200년
모토무라 료지 지음, 이민희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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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제국 로마의 번영과 몰락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마치 혈관처럼 이탈리아의 주요 지역들로 단단하고 곧게 뻗어있는 도로들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정비된 도로는 아군이 진군하기도 쉽지만, 그만큼 적군에게 침략받기도 쉽다.

아마 로마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로마의 거대한 경기장이나 목욕탕만큼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뻗어있는 단단한 도로 정도는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군대의 진군 뿐 아니라 물자의 수송도, 일반 시민들의 이동에도 큰 이점을 주었던 도로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로마의 자신감과 자존심의 상징이었으며, 결국 로마 중흥의 증거가 되었다. 그 중 '아피아 가도'는 지금도 그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오랜 역사 유적들 중 하나이다.


[처음 읽는 로마사]는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 오브 로마' 에 깊이 빠져 있는데, 함께 보기에 더 없이 좋았다.(마침 3부인 '포르투나의 선택' 의 사전 모니터 선물로 받은 책이기도 했고!)

일던에 교유서가에서 함께 나온 '첫단추 시리즈' - [로마 공화정] 도 읽었는데, [처음 읽는 로마사]와 성향과 집필 기조가 다소 달라서 느낌이 신선했다. 특히 인물들에 대한 평이 다른 부분이 툭툭 튀어나와서 상당히 재미있었다. 게다가 '마스터 오브 로마' 시리즈 까지 함께 읽다보면 한 사건이나 인물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들을 볼 수 있어 읽는 맛이 쏠쏠하다. 특히 '마스터 오브 로마' 의 경우엔 소설이라는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세밀하고 디테일한 고증과 묘사가 더없이 훌륭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후대에 어떻게 전해지고, 각기 다른 연구가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마스터 오브 로마' 가 실제 역사라면, 그를 바탕으로 '로마 공화정' 은 통사로서 흐름을 읽는 재미, [처음 읽는 로마사] 는 좀 더 최근 - 변화된 시각을 발견하는 재미랄까? 예를들어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의 1부와 2부인 [로마의 일인자] 와 [풀잎관] 의 주인공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에 대한 인물평도, 비록 한두줄에 불과하긴 하지만 두 책에서 다루는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다! 

 


[처음 읽는 로마사]는 일단 굉장히 쉽게, 그야말로 술~술 읽힌다.

마치 강연록 같은 느낌인데, 다양한 방법의 강의 기술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구어체, 특히 경어체로 번역되어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은데, 때문에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설명이 보다 쉽고 부드럽게 읽혔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로마사 전체를 '기, 승, 전, 결' 네 단락으로 나누었다.

흔히 알려진 왕정 - 공화정 - 제정의 구분도 포함되어 있지만, 로마의 태동과 중흥, 멸망을 이야기의 구조로 나누어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이 보다 쉽게 읽힌다.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은 역시 '결'. 로마 제국의 명멸을 단숨에 표현해낸 마지막 부분이다.

로마의 멸망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무너져 가는 로마의 권력을 재정비 하기 위해 로마의 일인자들이 수많은 노력을 했고, 결국 역부족으로 동서로 갈라졌다가 그냥 그렇게 희미하게 옅어져갔다. 저자는 이러한 로마의 멸망을 단순히 한 제국의 멸망이라기보다 '변화' 에 가까운 해석을 내놓는다.

특히 '황제' 라는 개념이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과 상당히 달랐던 로마 제정기에 대해 많은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흔히 우리는 공화정이 제정보다 진보한 정치 형태라고 여기는데, 오히려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변화했다. 개인적인 지식으로는 로마의 정치형태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비롯된 초기 공화정을 계승, 발전해가다가 지배지의 양적인 팽창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제정으로 다소 퇴보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고 난 뒤 약간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치의 행태와 시민의식의 진보, 퇴보는 크게 관계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아직 좀 더 많은 책들을 읽어보고, 인문. 사회. 역사. 철학 등을 폭넓게 접해봐야 하겠지만, 역시 한 두 사람의 책과 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네로에 대한 해석과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해석에 대한 다른 시각도 참 흥미로웠다. 



역사서는 저자의 사관이 깊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대중 역사서, 게다가 사료가 풍부해 숱한 사가들이 수백 수천번 해석과 재해석을 반복했던 시기를 다룬 데다가 한 권으로 압축한 다이제스트의 형태라면 더더욱 그렇다.

독자들은 저자의 기준에 따라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이 추려지고, 통일된 사관만을 멍하니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라는 장르 자체를 접할 때 독자들은 비판적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긴 하지만, 여러 의견을 폭넓게 수용한다는 자세를 가지는 것도 좋다. 비판이란 충분히 다양한 의견과 사고방식들을 습득한 후에야 비로소 올바로 작동하는 것이다. 지나치에 '나만 옳다'는 자세는 자칫 편향된 사관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편향된 역사관의 결과물을 우리는 2015년 정부의 몇몇 뻘짓을 통해 보았지 않은가? 

이 책은 시종일관 그러한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반복해서 저자의 사견임을 주지시키고, 통설과 다른 부분은 자신이 다르게 생각한 이유를 간략하게라도 꼭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의 [로마 공화정]과 [로마 제정]을 함께 읽길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도 아직 '로마 제정'은 못 읽었는데, 기회되면 꼭 읽어보고 싶다.) 첫단추 시리즈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통설들을 소개해주는 개론서 시리즈인데, 함께 읽으면 저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인물이나 사건들을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던 [마스터 오브 로마] 역시 같은 이유로 함께 읽기를 다시 한 번 추천한다. 일례로, 그 유명한 공화정 말기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제정 초기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뉘앙스가 조금씩 다 다르다. 특히, [로마인 이야기],[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물론, BBC의 드라마 [ROME] 과의 차별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역사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 인물들 또한 그렇다. 심지어 우리는 함께 살았던 부모님의 역사에 관해서도 형제, 자매들, 친척들간에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우리 정부는 몇몇 인물들을 획일화된 잣대로 신격화 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심지어 학생들의 역사관마저 획일화 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래, 때때로 통일된 방향성을 보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파시즘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혐오의 시발이 되기도 한다.


1+1이 항상 2인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1+1이 때로는 3이 되기도 하고, 100이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제도권 교육 아래에서 가장 기초적인 인문학은 바로 역사일텐데. 

이런 쉽고 재미있는 대중 역사서들이 많이많이 나오기를, 그리고 그렇게 많이 읽고, 많이 비교하면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수용하며, 건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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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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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지나온 길 중 피칠갑이 아닌 길이 있을까.

동물이건, 동족이건. 인류 문명은 지성이 있건 없건 피로 가득 찬 주머니들을 정신없이 터뜨려 쌓으며 어디론가 올라갔다. 그렇다. 피로 가득 찬  주머니. 누군가의 아버지이건, 누군가의 어머니이건, 누군가의 형제이고 자매이고 친구이던. 눈 앞의 목적, 딱 잘라 권력 앞에서 사람이라는 두 글자는, 그의 앞에서는 단지 피로 가득찬 주머니에 불과했다. 맘에 안들면 짓이겨 터뜨리면 그만인.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이라 했다.

그래서였을까?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지 11년 5개월 뒤 독재자 박정희는 새로운 형태의 쿠데타를 감행한다. 국회를 해산하고 현행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새로운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겠다고 밝혔다.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한 유신체제를 출범시켜 종신집권의 꿈에 한발 다가섰다. 그 꿈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과 함께 끝장났지만, 그 뒤를 이은 전두환과 노태우까지. 박정희 없는 박정희 시대는 계속 되었다고 한다. 

 그 시대가 남긴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는데,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무래도 그 시절의 상처가 그리 크지 않았던 걸까? 그 시대를 겪지 않은 나는 너무나 궁금했다. 한국 근현대사 책들을 찾았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만났다. 

박정희와 유신. 그 두 테마에 집중한 한 권의 책. 

다 읽고 나니,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어째서?? 왜??  

 

이 책은 고은 시인의 추천사와 이만열 교수님의 여는 글, 그리고 저자이신 한홍구 교수님의 서문으로 시작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광주 사건을 향했다. 

유신체제의 출범부터 시작되는 처절한 한 시대의 이야기는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의 시작점부터 유정회의 정체와 젊은 정치가 김대중을 향한 사상 초유의 납치사건, 긴급조치와 민청학련, 육영수여사 피살사건과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거쳐 새마을 운동과 산업화의 기수였던 공순이 엄마,이모,누나들의 절절한 노동조합사를 되새김질하고, 자유언론실천선언과 동아일보 사건, 삼청 교육대를 위시한 조국 군대화의 면면은 물론 새마을 운동과 강남 불패 신화의 서곡, 우리 아버지 세대라면 누구나 아는 YH사건에 방점을 찍고, 결정적 한방인 10.26 으로 마무리된다. 박정희 시대라는 이름으로 담을수는 없지만,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시작과 끝의 광주는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희생자들에 대한 깊은 슬픔과 유족들이 흘린 수억톤의 눈물에 대한 지극한 공감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눈물없이 되새길 수 없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허나 왕과 대통령 중심으로 역사를 배운다면 결코 흘릴 수 없는 눈물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초등학교가 아직 국민학교였던 시절, 바로 그 국민학교의 입학을 코앞에 두었던 내게 담장마다 붙어있던 노태우 후보의 벽보와 '노태우'를 연호하던 군중들의 목소리는 비교적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보다 더 예전의 기억은 작은 고모 손을 붙들고 명동인가 종로인가로 놀러 나갔다가 시위대에 휩쓸려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맡았던 기억 역시도. 눈과 코에서 정신없이 물이 쏟아졌고, 숨쉬기가 너무 괴로웠던 그 느낌 - 12~3년 뒤에 다시 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던 -과 급히 셔터를 내리던 근처 상점 아저씨가 '빨리 이리로 와라!' 고 손짓하던 장면. 콜록거리는 나를 앉혀두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창밖을 바라보던 그 아저씨와 너무 고통스러워서 바닥에 드러눕다 했던 당시의 나를 기억한다. 어마어마한 인파에 휩쓸려 오도가도 못했던 당시의 기억과 최루탄의 매캐한 내음이 가득했던 상점의 느낌은 트라우마로 깊이 남아있다. -물론 최루탄의 매캐한 내음은 군생활을 통해 훌훌 털어냈다. 

 당시에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느꼈던 것은 딱 두가지였다. 

일단 엄청난 공포가 첫째였고, '저 아저씨들은 뭐하는걸까?' 였다. 

그들은 성난 황소 같았다. 내가 워낙 어린 나이였기에, 젊은 청년들이 그렇게 느껴졌을테지만, 그들은 분명 '썽'이 나있었다. 

이 책을 읽고서야 그들의 '썽' 에 공감된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 그 대열에 동참하고 싶다.

그래, 나는 고모와 함께 버스 안에 있었다. 하지만 대로를 가득 메운 인파로 인해 버스는 멈춰섰고, 고모는 약속장소로 향하기 위해 멈춰진 버스를 내려 나와 함께  큰길로 내려섰다. 순간 뒤에서 따라오던 인파에 휩쓸렸던 것이다. 내가 그 때 흘렸던 눈물은 최루탄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 책을 보며 흘린 눈물은 역사의 뒤편에 숨겨진 사람들에 대한 눈물이다. 

역사의 대부분은 위정자들 중심으로 기록되지만 그 기록뒤에 그러한 수천 수만 수억의 사람들의 기록이 녹아있다. 한 위정자가 자신의 권력을 1년 연장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들.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들. 산술적으로 따져보아도, 1:1000에 달할 어마어마한 양. 1명의 미소를 위해 1000명은 눈물을 쏟아야 했을. 당시의 순간들. 누군가의 1분의 기쁨을 위해 다른 누군가는 1000분동안 고통받았을, 그 숱한 이야기들.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여러번 눈물이 쏟아졌다. 

장준하 선생 이야기도 그랬고, 인혁당 사건때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여공들의 이야기에 한움쿰의 눈물을 쏟아냈다. 교도소가 직장보다 더 좋았던 어머니들. 그리고 사장의 개가 되어 어머니들을 괴롭히고 똥을 먹여야 했던 아버지들. 오늘은 살아냈지만, 내일도 살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어머니들. 그녀들 덕분에 그나마 화장실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노동 환경이 만들어 졌지만, 당시 자신의 삶을 내던지신 어머니들은 대부분 지금 파파할머니가 되어 건물 청소도 간신히 하며 입에 풀칠만 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들의 자식들 역시, 만만치 않은 삶을 살고 있을 터다. 

 

 여기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했던 한 단락을 전한다.

 

"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가 민주화와 산업화라면 그 역사는 반드시 다시 쓰여야 한다. 그 성취의 진정한 주역은 박정희도 아니고 몇몇 이름난 민주화운동가들도 아니다.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 할 사람들은 그 시절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 자신들이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 당시 민중의 최전선을 지킨 것은 무쇠팔뚝의 남성 노동자들이 아니라 가려린 '공순이'들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은 그들의 역사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p.182

 

이 대목을 읽고 나서야 쌍용 자동차 노란봉투 캠페인이 눈에 들어오더라.(아름다운 재단) 

어머니 아버지의 피땀이 느껴지더라. 난 아이 안 낳을란다. 내 피땀은 나랑 부모님을 위해 쓸란다, 고도 생각하게 된다. 

 

 사는 것이란  무엇이관대 이렇게 괴롭고 괴롭고 괴로운 것일까. 

천안함에 장병들을 수몰시키고, 어두운 강당안에 새파란 젊은이들을 수몰시킨 것도 모자라 10대 청소년들을 바닷속에 처박은 어른들을 증오한다. 이들의 가족들이 수십년간 더 흘릴 눈물의 몫까지 더해 증오한다. 광주 시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도 사과 한마디 없는 빡빡이도 증오한다. 이렇게 많은 눈물을 먹고도 10원 한장 덜 내려고 아등하등 하는 그 모든 가솔들 역시도. 아직 마르지 않은 인혁당 희생자들의 피와 장준하 선생의 유골과 베트남 파경기를 빼고도 2만여명의 국군장병 청년들의 시신을 어루만지지 못하고 그 유족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박정희도 증오한다.  

 

이렇게 증오하다 보면 신을 증오하고, 나아가 나의 삶 자체를 증오하게 된다. 당연하다. 

내가 닿을 수 없는 존재들을 증오하다 보면, 결국 할 수 있는 건 증오밖에 없는...무기력한 자기 자신을 증오하게 될테니까.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길 수 없는 힘. 닿을 수 없는 힘에 도전한 이들. 

거대한 합성피혁의 밑에 깔려서도 정신없이 아둥바둥 꿈틀거렸던. 

 

 인류가 밟아온 피칠갑의 길 위를 걸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리고 누군가 바로 그 피칠갑 위에 나를 얹고 밟아 터뜨려 붉은빛을 보태고 걸어 나갈터다. 

구역질나지만, 인간도 동물과 다를바 없다. 그냥 약간 더 복잡한 트릭을 더할 뿐.

주위의 수컷들을 하나하나 물리치고 구역을 지키는 동물들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와중에도 말도 안되고 재미도 없는 만화를 그린다고 앉아있는 나를 증오한다.

이렇게 증오한다는 글을 쓰면서도 내일 또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만화를 그릴 나를 증오한다. 

그리고, 삶이 이렇게 괴로움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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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5-08-14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홍구님 책 하나 장바구니 담았는데 사야겠당^^

열혈명호 2015-08-20 20:48   좋아요 0 | URL
광복절 전후로 한겨레에서 제작한 영상이랑 팟캐스트에서 자주 나오시더라고요. 엊그제 팟캐스트 방송에서 영화 [암살] 둘러싼 광복군과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 해주셨는데 완전 재밌더라고요. 역시 한홍구님은 짱짱맨이심!
 
주객전도 - 멀쩡한 사람도 흡입하게 만드는 주당 부부의 술집 탐방기
오승훈 지음, 현이씨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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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개신교 교회에서 기존의 신자가 새로운 신자를 이끌어 오는 일을 '전도' 라고 한다.

한자로는 傳道 라고 쓴다.

이 책의 제목은 유명한 사자성어인 주객전도主客顚倒 에서 주인 주主자를 술 주酒 자로 바꾸어서 술과 손님; 그러니까, 술이 주인이라면 손님은 안주일터,술과 안주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뜻으로 쓰였지만, 책을 덮은 뒤에 생각난 주객전도의 의미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 책의 제목은  酒客顚倒 가 아니라 酒客傳道 라고 고쳐야 한다!!!!!!

흔히 논쟁을 즐기는 사람들을 논객論客 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술을 즐기는 사람은 응당 주객酒客 이라 불러야 할 터.

즉, 이 책은 술을 즐기는 자의 도리를 전파하는 책인 것이다!!!! 

책의 앞표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마지막 표지를 감상하는 그 순간까지 시종일관 키들거리게 만드는 이 책은, 아마 미국에서 출간되었다면 출판사 관계자들이 진지하게 지은이에게 알콜중독 상담을 권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술냄새가 풍기는 책이다. 

어딜펴도 코끝을 찌르는 맥주와 소주의 향이 온갖 맛집들의 시끌복작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와 함께 저자인 a.k.a. 'X기자' 와 영원한 술친구 '와잎' 의 알콩살벌한 부부생활이 거하세 펼쳐진다.

육아전쟁이라는 피할 수 없는 고고한 역사의 흐름속에서 와잎에게 꼭 붙들려 있는 X기자의 저녁시간 사수를 위한 눈물겨운 사투와 마치 손바닥 위 손오공을 바라보는 석가여래처럼 X 기자를 꿰뚫는 와잎의 밀당은 실로 유쾌하기 그지없다. 


한국인의 술 소비량은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주폭이나 음주운전이 사회적인 큰 문제거리로 자리잡은지 오래지만, 알콜중독에 대한 경계는 거의 없는 것이 우리 사회다.

권위주의적인 회식, 접대문화가 사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고, 젊은 사람들을 딱히 동갑내기들과 할 일이 없다. 함께 즐길 레포츠가 발달한 것도 아니고, 지속적인 청년 실업으로 경제적 여유가 줄어들어 있다고 해도 즐기기가 힘들다. 육아는 어느새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의 몫이 되었고, 회사 사정에 따라 임신조차 불가한 경우도 많고, 사실은 연애부터가 만만찮은 요즘의 젊은이들이다. 

그나마 술이라도 있으니, 팍팍한 사정에도 좋은 안주에 행복하게 한 잔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기대치 않던 사랑이 움트기도 한다.


나도 술을 참 좋아한다.

10년 넘게 일주일에 적어도 8시간 이상씩 꽤나 하드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땡이가 투실투실한 드럼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토록 열심히 운동을 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걱정스럽게도 혼자 마시는 술이 늘어서 X기자와 와잎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광경이 부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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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웨이트 트레이닝 아나토미 - 신체 기능학적으로 배우는 보디웨이트 트레이닝
브레트 콘트레이레즈 지음, 권만근 외 옮김 / 푸른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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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경. 한 친구가 "같이 헬스장 다닐래? 엉덩이가 올라붙으면 여자들한테 인기 짱먹어!!! "  라고 나를 꼬셨더랬다. 
마침 아르바이트를 하던 PC방 옆 건물 꼭대기에 자그마한 헬스장이 생긴 직후였고, 마침 알바로 돈도 벌고 있었고, 군대를 갈 계획으로 휴학도 하고 있어서 큰 고민 없이 헬스장을 1개월 등록했더랬다. 
처음 잡았던 쇳덩이의 감촉과 다음날 온 몸 가득 느껴지던 충만한 근육통은 그 뒤로 10여년간 내 삶의 활력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몸짱과 PT가 널리 퍼지기 전이었지만, 운 좋게도 헬스장을 막 오픈한 관장님은 부상으로 은퇴한 선수 출신의 젊고 의욕 넘치는 분이셨고, 심야 알바를 마치고 매일 아침 9시에 찾아와 11시까지 머물다 가는 나 역시 무엇이든 한 번 빠지면 최대한 연구하고 공부하는 타입이었기에 우리는 꽤나 죽이 잘 맞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몇가지는 

"헬스장에 와서 운동하는 시간동안에는 절대 앉아서 쉬지 마세요. 쉬더라도 서서 돌아다니면서 쉬세요. 기구 위에 계속 앉아있지 말아요."

-우리 몸에는 스위치가 있어서 몸이 운동 버전과 휴식 버전으로 바뀌는데, 그 과정이 무척 길다.
운동을 시작한지 최소한 20~40분이 넘어야 신진대사가 운동용으로 바뀐다. 에너지 소비와 근육 활용의 효율이 변하게 되는데, 웨이트 운동의 경우 중간중간 앉아서 쉬어버리면 그 변화 단계가 훨씬 길어질 수 있다. 똑같이 1시간을 운동해도 기구 위에서 앉아서 쉰 사람들은 쉬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운동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운동하는 내내 끊임없이 몸에게 운동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줘야 한다.

"바를 잡을때는 꽉 잡아요. 쇳덩이에 손가락 자국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아주 꽉 쥐어요." 
-바를 그저 꽉 쥐고 있는 것 만으로도 근육들은 잔뜩 긴장하여 팽팽하게 팽창한다. 주먹을 꽉 쥐는 행위 자체가 뇌에게 신호를 보내 일종의 준비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바를 꽉 움켜쥐는 동안 내가 운동할 부위의 근육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어떻게 움직일지 그려보며 완벽한 준비자세를 가져라.

"머릿속으로 운동하는 부위의 근육을 그려봐요. 근육이 움직이는 원리를 파악해요."
-모든 운동에는 생리학적 원리가 있다. 특히 웨이트 트레이닝은 중량을 사용하기 때문에 적확한 자세를 유지하지 않으면 실제로 만성적인 부상이 올 수 있다. 그런 적확한 자세를 위해서도 근육과 관절의 원리를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확한 호흡법이나 허리의 플랭크 유지, 점진적 증강, 고반복과 저반복 등 정말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위 세가지가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 세가지를 완벽히 이해하고 적용시키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처음 운동을 시작한 6개월 이후 나는 군대에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부터 수년간은 운동을 봐줄 트레이너나 친구 없이 나홀로 운동족이 되어 중량에 집중하고 나쁜 습관들이 몸에 익어버렸다. 대표적으로 벤치 프레스를 150kg 가까이 들게 되었는데, 사실 등과 삼두, 어깨가 엄청나게 개입된 리프팅에 가까운 벤치 프레스를 하고 있었다. 가슴에 집중이 하나도 안 되었던 것이다.

몇 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야 지금은 트레이너가 되어 만나뵙기 힘든 몸이 되신 운동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그 친구가 PT자격증을 위해 보디빌딩을 공부하는 것을 보며 함께 여러 책을 보고 운동법과 영양섭취 등 많은 것들을 나누며 나쁜 습관들을 고쳐나갈 수 있었다.
그 때 읽었던 여러 책들 중에 정말로 도움이 되었던 책들은 사진이 아닌 그림이 들어있는 책들이었다. 
무슨 의민고 하니, 미끈한 모델들이 나와 운동 장면을 시연하는 사진이 잔뜩 들어있어, 운동 관련 서적인지 몸짱 화보인지 알쏭달쏭한 그런 책들이 아니라 근육의 생김새와 관절의 움직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일러스트로 해부도와 같은 책들 말이다. 
그러한 부류의 책들은 대부분 '해부학' 이라는 의미의 '아나토미' 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처음에 배웠던 웨이트 트레이닝의 가장 중요한 기본을 되살려 주는 데에 정말 큰 역할을 했다.  
 
이 책 [보디웨이트 트레이닝 아나토미]는 당시 내가 즐겨봤던 그러한 부류의 책들과 같다. 
당시에는 다른 출판사의 [근육 운동 가이드] 와 같은 출판사의 [보디 빌딩 아나토미] 를 외울 정도로 즐겨봤더랬다.

[보디웨이트 트레이닝 아나토미]는 어떤 관점에서는 그런 기본 운동법들에 대한 책들보다 수준이 좀 더 높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덤벨이나 바벨, 머신을 이용한 운동법이 전혀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집 안에서. 좁은 공간 안에서 체중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운동들만 가득 실려있는데, 아주 쉬워 보이는 운동부터, 상당히 하드코어한 훈련까지 폭넓게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 홈트레이닝을 쉽게 생각하는데, 사실 홈트레이닝이야말로 정말 고급 스킬을 필요로 한다. 체중 부하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고, 그 체중은 완벽하게 활용하는 스킬 역시 상당히 고급스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에 실려있는 운동법들은 '크로스 핏'과 FMS로 대표되는 펑셔널 트레이닝부터 전통적인 피지컬 트레이닝까지 고루 적용시킬 수 있는 훌륭한 운동들이다.  
각 부위별로 5~8가지의 운동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책 안에서 1~4로 운동 레벨이 정해져있고 응용법들도 실려있다.
무엇보다 자극되는 근육의 모양새가 일러스트를 통해 상세히 설명되고 있어 무척 보기가 편하다. 
사실 이런 운동법들은 실제 선수들이 여행중이거나 체육관이 없는 지역에 가게 되었을때 좁은 호텔방 안에서 한 '알짜배기' 운동법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말 고급 기술이지만, 사실 굉장히 쉽고 부상 우려도 적은 너무 좋은 운동들인 것이다. 
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최근 크로스 핏 바람이 한국에도 불면서 펑셔널 트레이닝- 즉 기능적 요소를 극대화시키는 운동법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사실 머슬업에 중심을 둔 전통적인 피지컬 트레이닝과 펑셔널 트레이닝에 대한 토론은 꽤나 예전부터 있어왔다. 인터넷을 통해 장미란 선수의 스쾃과 세계적인 보디빌더인 필 히스의 스쾃을 비교하며 효용성에 대한 갑론을박을 벌이곤 했던 것이다.
물론 사람들 각자의 목적에 따라 자신이 필요한 것을 하면 되지만, 기능에 초점을 둔 펑셔널 트레이닝은 전문가들을 위한 훈련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은 그러한 전문적인 펑셔널 트레이닝들 중 제한된 공간 안에서 생활 안에서 보이는 평범한 소품들 - 덤벨, 바벨, 심지어 케틀벨 따위도 등장하지 않는다! - 을 이용해  누구나 할 수 있는 유용한 운동들을 소개하고 있다. 


몇가지 소개하자면,


이런 식으로 왼쪽 상단에 운동의 난이도가 표시되어 있고,
친절한 안전수칙도 빼먹어서는 안된다. 견고한 탁자, 카펫. 
참고로 운동의 난이도는 운동이 힘들고 힘들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원하는 근육에 적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운동법 자체의 난이도를 말한다. 



수 많은 삼두 운동 중 나도 결코 빼먹지 않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생각보다 쉽지만, 생각보다 어렵기도 한데, 팔꿈치가 벌어지는 것을 최대한 제어하며 반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관절의 모양과 근육의 원리가 상세히 그려져 있다.






집에 봉 하나쯤은 있잖아요???
없으면, 안하면 된다. 부위별로 여러 운동들이 충분히 소개되어 있다.



이건 정말 제대로 하고나면 눈앞에 별이 보인다.
척추 기립근과 힙을 위한 완벽한 운동. 
운동 난이도는 레벨 1!!! 무척 쉬운 운동이지만, 정말 힘든 운동.
개인적으로는 데드 리프트보다 힘들다고 생각한다.




펑셔널 트레이닝의 대표처럼 되어버린 운동.
실제 레슬링 선수들이 빼먹지 않는 운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분들은 허리에 고무밴드를 감고 엄청 큰 타이어를 달고 엄청난 속도로 기어다니시더라. ㄷㄷㄷ 맨몸으로 마루를 한바퀴만 돌아봐도 이 운동의 효용성은 실감할 수 있다. 


 


이렇게 워크시트도 들어있고, 이론적인 설명도 적당한 양이 알맞게 실려있다.
밸런스가 무척 좋은 책이다.

 22000원이라는 가격이 약간 부담스럽지만, 종이 질이 좋고 일러스트의 완성도가 높다.
이런 책들은  평생 곁에 두고 수백번 펴볼 가치가 있는 책이기에 책의 만듦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능에 비한다면 합리적인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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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 진옥섭의 사무치다
진옥섭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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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잊혀진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다.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고, 잊혀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 인간의 죽음은 그 자신에게는 세계의 소멸과도 같지만, 그 죽음을 바라보는 타인에게는 단지, 한 타자者의 소멸에 불과하다. 하루에도 수억명이 죽어나가고, 수억명이 태어나 그 빈 자리를 메운다. 수억명의 세계가 사라지고, 수억명의 세계가 생성된다. 하지만, 나머지 수십억의 사람들은 사라진 수억명의 사람을 서서히 잊어갈 뿐이다.

 때로는 한 인간의 죽음이, 실제로 한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언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언어는 타인에게 전래되지 못했고, 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이 죽었다. 그가 남긴 모든 기록은 전파되지 못했고, 그 언어를 사용했던 민족의 역사와 기록들은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다. 한 세계의 죽음이었다. 한 문화의 사멸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노름마치]는 '놀다'의 놀음과 '마치다' 의 마침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잽이(연주자)를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라고 한다. 곧 그가 나와 한 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했고, 이렇게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노름마치들은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기에 합당한 분들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 중의 최고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된 기억들을 몸 안에 새긴 고서高書이자, 흘러간 세월들이 빚고있는 한 세계의 마지막 사람들이다. 

 '예술' 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도 있고, 실제적인 의미도 있으며, 해석적인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게 "다른사람들이 보기에 즐겁고 아름다운 것"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즐거운 것과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고되기 짝이없는 삶은 특히 '생각하는' 능력이 있고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간들에게 특히 더 괴로운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예술을 만들어냈다. 삶의 고됨을 잊고 살아감에 대한 스트레스를 모두 해소할 수 있는,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 

 예술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각종 과학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을 접하기가 무척 쉬워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무척이나 가까워진 듯 보인다. 댓글을 통해 수초에 한번씩 서로서로 수많은 소통을 하고, 구만리 떨어져 있는 곳의 기인들이 펼쳐내는 화려한 기예를 감상할 수도 있다. 심지어 그들의 비법을 전수받을 수도 있고, 수많은 기술들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다. 세계가 그만큼 좁아졌다. 

 하지만 불과 백여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세계는 너무나 넓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놀라운 기예를 갖춘 예술가를 평생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했다. 장터에 뛰어난 예술가가 나타나 노름을 놀면 모든 사람들이 생업을 내던지고 그 판으로 달려갔다. 사당패가 신묘한 묘기에 농삿일의 고됨을 잊었고, 무용가의 화려한 춤사위에 가뭄 걱정을 떨쳐보냈다. 명창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에 죽음의 공포를 잊었다. 그렇게 삶의 일부이고,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인 예술을 즐길 수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어렵다.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아름다움을 경탄받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수준의 기예로는 택도 없다. 아주아주 특출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십수년, 나아가 수십년에 가까운, 아니 평생에 가까운 정진이 필요하다. 재능을 타고 나기도 힘들었지만, 예술을 접하기도 힘들었고, 기예를 지닌 예인을 만나기도 힘들었으며, 특출난 기예를 가진 수준 높은 예인을 만나기는 더더욱 힘들었으니, 당시의 예인들은 가히 로또수준의 인연을 만나야만 가능했을터다.

 그렇게 인연의 고리가 닿고 닿아 맥을 이어오던 우리 전통 예술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다행히 일부 의식있는 예인들이 보존을 위해 발품을 팔고 주머니를 털어 지역 협회를 만들고 예인들을 모아 정기적인 발표회를 열고,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도 쉽지만은 않았다. 예인은 천한 신분이었다. 특히 여성 예인들은 대부분 기생이거나 무당이었다. 급격한 근대화를 겪으며 우리 사회의 신분제는 적절히 소화되지 못했고, 경제발전 중심의 상공업 발전정책으로 인해 복지와 문화는 뒤켠으로 밀려났다. 그 시기를 넘기니 이번에는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돈이 되는' 예술만 살아남기에 이르렀다. 오래된 것은 돈이 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모두가 새로운 것만을 찾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들은 가장 글로벌한 시대인 오늘엔, 확실히 배척받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전통 예술은 간신히 명맥만 이어지고 있을 뿐. 진짜 노름마치들은 자신의 기예를 오롯하게 전수해줄 후학도 길러내지 못한 채 사라져가고 있다.

     

 저자인 진옥섭은 전통무대의 기획과 연출을 하며 직접 만나온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록해 두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부터 시작하여, 한 사람의 일생을 가감없이 풀어내고, 그가 가지고 있는 기예를 능란하게 서술한다.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노름마치들의 춤사위와 소리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듯 하다. 감칠맛 나는 글맛이 오감을 만족시킨다.

 책을 읽는 내내 많은 부분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한 인간의 삶 쯤은 가볍게 무시하는 고고한 역사의 흐름에 의해 속절없이 휩쓸려간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뼈를 깎는 고통스러운 수련을 거쳤지만, 그래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올랐지만, 때를 잘못 만나 제대로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춤사위 한 번 떨치지 못했던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는 시시 때때로 어깃장을 놓는 우리 인생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삶과 종교가 하나가 되고, 고통과 눈물을 핏속에 녹여내어 인간이 바라볼 수 없는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것은 이미 '즐겁고 아름다운' 경지를 가뿐히 넘어선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들숨과 날숨을 빼앗고, 눈과 귀를 홀리고, 결국엔 그 혼마저 쥐고 흔드는 경지에 오른 예술가들. 노름마치.


과학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더욱 약해졌다.

이제 지인을 만나기 위해 애써 산 하나를 넘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갈 필요가 없다. 입을 열 필요도 없이 환히 빛나는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에 손가락을 바삐 놀리면 어떤 대화도 가능하다. 빨래나 설거지도 간단하다. 네모난 통 안에 쑤셔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된다. 요리는 또 어떠한가. 굳이 재료를 사러 시장에 갈 필요도 없다. 어제 수확한 채소를 오늘 집에서 받아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목에서 쓴 물을 쏟아내도록, 허리와 관절이 부서지도록 노력하여 '돈'도 되지 않는 기예에 인생을 바칠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갈 것이다. 노름마치에 이르는 길은, 그 끝에 부도, 명예도 없는 고난의 길이 되어버렸다.

 이 책이 감동적이면서도 아쉬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노름마치' 라는 한 세계의 종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많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 혼과 문화가 만들어낸 한 세상을 잃어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잊혀진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다.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고, 잊혀지는 것이 구슬프다.

이 책이 기쁘고 행복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책은 오래된 것들을 붙들고, 사라지 않도록, 잊혀지지 않도록 기록한 것이기에. 

어쩌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 혼과 문화가 만들어낸 한 세상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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