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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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사회의 여성인식은, 아마 1970년대의 미국사회와 비슷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공식적인 국제기구들이 제공하는 수많은 '객관적 수치'상 뚜렷하게 여성들에게 가혹한 국가이다.

OECD 국가들 중에서 인권 수준도 높은 편이 아니지만, 여성 인권 수준은 낮은 편이 확실하다. 

안타까운 부분은, 우리 사회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살기 힘든 국가라는 점이다.

미국의 페미니즘이 꽃피운 70년대와는 달리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률은 둔화되고 있고, 청년들의 취업률은 사상 최저를 찍고 있다.

OECD 통계로도 우리나라의 남성들은 가장 많은 시간을 일하고,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가장 많은 이혼과 자살을 한다.

지옥불반도, 헬조선, 이 단어들은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성에게도 이 땅은 괴롭다. 

게다가, 남성들 스스로 체감조차 하지 못하는 가부장제와 남성 기득권을 무작정 비난부터 당하니,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다.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으로 대표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 

무엇이 떠오르나?

워마드, 메갈리안이다. 

 

 메갈리안은, 중동호흡기질환 - 메르스 사태때 촉발된 커뮤니티이다.

거대 커뮤니티의 메르스 관련 게시판에, 어처구니 없게도, 누군가 전염의 원인을 어떤 여성으로 특정했다.

이것은 명백히 우리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성차별적 시각이 툭, 하고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 최초의 글은 누가 뭐래도 명백한 여성혐오였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옹호하는 댓글들이 올라왔고, 순식간에 여성 전반에 대한 혐오로 불타올랐다. 

당연히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여성들이 반박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논리적인 반박이 따랐으나, 먹힐리가 없었다.

결국 여성들이 택한 방식이 미러링이었다. 급식체에는 급식체, 중2병엔 중2병으로 받아 칠 수 밖에 없다. 

혐오를 혐오로 받아치는, 본능적이고도 직관적인 단체행동이 시작됐다.


한편, 이 과정은 여성들이 자기 주도권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메르스 게시판에 가득찬 여성 혐오 글에 상처받은 여성들이 '메갈리안의 딸들' 이라는 여성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다. 흔히 '뒷담화를 하며 친해진다' 고 하지 않던가.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것은 매우 직관적이고 효과적인 전술이다. 이를 통해 여성들만의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공동체의 목소리' 를 낼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다. 우리 역사 상 가장 큰 여성들만의 커뮤니티였을터다.

이 와중에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졌고, 연이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들이 발생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국 남성들에 대한 뒷담화로 시작된 '반 여성혐오' 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억압당하고 고통받아온 여성들만의 커뮤니티는 사회 전반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보다, '여전히' 혐오를 혐오로 대응하는 스트레스 해소용 막말에 머물렀다.

발생 취지와 초기 발전 방향은 페미니즘의 그것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엄연히, '그렇지 않다.' 고 주장하는 근거다. 

슬프게도, 이런 모습들이 우리나라의 대다수 대중들에게 '페미니즘' 의 이미지로 굳어져버렸다.

촛불 시위에도 참여했던 많은 여성단체들이 있지만,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은 '한남충 타령'의 프레임에 갇혀있다. 

단지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과장하고 부풀리는 남성 커뮤니티, 혹은 언론의 잘못 역시 존재한다.

외국 사례를 봐도, 초기의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중심사회의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이것은 한때 우리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공산주의' 라는 프레임 안에서 억압받고 고통받았던 사례와 같다.

진보적인 사상은 언제나 기득권의 방어에 막히기 마련이다. 노동운동에 반하는 기득권층은 당연히 자본가들이었고, 여성운동에 반하는 기득권층은 당연히 남성들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성주의운동은 여러 이유로 '남성차별', 혹은 '남성혐오' 라는 프레임 안에 놓여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상당한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 건강한 활동들이 형성됐다. (히피운동과 궤를 함께 했던 미국의 여성해방운동은 폭탄테러와도 같은 과격한 방식이 기도된 적도 있다!) 

70년대 중후반의 풍요로운 미국에서 형성된 새로운 활동가들은 사상과 이론으로 페미니즘을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했고, 남녀 모두에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아젠다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등학생들에게도 통할만큼 교육적인, 남녀 평등을 위한 페미니즘 아젠다. 그것이 당대 페미니스트들의 지상과제 중 하나였던 것이다.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 책이 그 결과물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먼저 "페미니즘이란 간단히 말해서 모든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p.25) 이라고 정의한다.

70년대에 스텐포드에서 공부한 흑인 여성인 벨 훅스 역시 '남성들을 적대시하는 페미니스트' 라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위에 인용한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 역시 남성을 적대하지 않는 표현이 좋았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임신선택권, 외모주의, 페미니스트 내부의 계급투쟁, 일하는 여성들, 인종과 젠더의 문제, 폭력에 관한 부분, 활동하는 여성들이 남성성을 강요당하는 문제, 가정 내에서의 페미니즘 교육, 결혼관, 성에 관한 논쟁, 동성애 등 여성운동에 관한 거의 모든 문제를 한번씩 짚고 간다.


일단 이 책을 제대로 읽고나면,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그다지 큰 해악을 끼치는 이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어떤 테마들도 '남성 기득권' 과 충돌되지 않는다!! 


아마 많은 남성들이 '나는 차별주의자가 아니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남자에게든 '너 그거 여성혐오 발언이야.' 라고 지적하면, 대부분 손사래를 치며 '그럴 리 없다.' 고 펄쩍 뛸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엄연한 억압적 가부장제의 대표와 다름없을 정도의 남성중심사회이다.

그 예를 생활속에서 속속들이 찾을 필요도 없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 운동만 봐도 알 수 있다.

피해자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지적하지 않겠다. 그런 피해를 남성이 당했다면, 바로 공권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테니까. 직업적 약자, 게다가 여성은 단순한 갑질을 넘어 성적인 착취를 당한다. 공권력에 호소하면, 공권력으로부터 2차피해를 당한다. 굳이 장자연씨 사건같은 고위층이 얽힌 사건을 되새길 필요도 없다. 최근 청와대 청원으로 주목받은 단역 여배우가 2004년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과 협박에 시달리다, 2009년에 자살했던 사건의 전모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더 가볼까? 안희정 전 지사 사건도 우리의 사법체계가 지극히 남성중심적 시각을 갖고 있기에 범죄의 입증이 힘든 사건이다. 사실 대부분의 성폭력이 범죄 입증이 엄청나게 힘들고, 그 과정 안에서 피해 여성들은 2차 3차 가해를 당한다.

우리 사회 전반은 철저히 남성 중심적이다.

수많은 국제사회의 기준에 의한 객관적 수치들을 대입해도, 남성들은 '나는 누린게 없어' 라고 호소할터다.

사실일 수 있다.

가부장제에서 태어나 생득권을 취득했고, 누리며 살아왔지만, 무엇을, 어떻게 누렸는지 우리는 모른다. 

때문에, '미투운동' 을 통해 '착취당하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자 마치 착취가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했던 남성들이 벌벌 떨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당신이 뭐건간에, 다른 여성의 허벅지나 어깨를 함부로 쓰다듬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건 사회를 떠나 인격과 인격간의 가장 기본적인 예절이다.


이 당연한 '도덕' 을 60살 남성에게 또박또박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딸 같아서 그랬다' 면 눙치고 넘어가준다.

우리 사회가 남성주의 사회라는 증거이다. 

그렇다.

남성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그 방법과 형태에는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

어쩌면,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연하게 누려온 것' 을 가르치는 것보다,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알려주는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 

위에 언급한 벨 훅스가 내세운 테마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조차 여성들은 빼앗겨 왔다. 그것을 먼저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남성들을 가르치는 주체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한다는 생각 역시 차별주의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남성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오히려 같은 남성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다 여성주의적 시각' 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버려야 한다. 

한 명의 남성이 모든 남성을 대표할 수 없듯이, 한 명의 여성이 모든 여성을 대표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여성들 역시 남성중심 사고방식에 길들여있다.

여성들의 '자기주도권' 을 의식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남성들을 욕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치는 것 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그것을 통해 여성들이 자기주도권을 의식화한다면, 인정한다.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머무르면 안된다. 

자신들을 억누르고 있는 남성들이 '고작' '한남충' 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여성들의 자기 주도권으로 연결된다면, 그 다음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남녀를 떠나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목소리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타인의 인권을 낮추는 방법이 아닌, 여성의 인권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적 공감대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작게는 데이트 비용 문제에서, 생리휴가, 임신선택권, 육아 지원금, 미혼모 보조 정책 등등으로 단결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남성들의 군 가산점 찬반에 우루루 몰려갈 필요가 없다.

남성들의 권리를 뺏는다고, 여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남성들이 얻는 권리만큼, 여성들이 얻을 권리를 찾아야 한다.

남성을 비하하고 비난하는 일 따위로 감정을 소모할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모든 남성들에게 고한다.

어린 아이가 존중받는 사회가 지옥일 리 없다. 

노인이 존경받는 사회가 지옥일 리 없다.

일본인이 1등시민, 조선인이 2등시민인 사회가 지옥이다.

유색인용 화장실과 차량칸이 분리되어 있는 사회가 지옥이다. 

여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지옥일 리 없다.

남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지옥일 리 없듯이. 


남녀평등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가장 높은 고지이다. 

그러기 위해, 여성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사회 전체가 함께 공부하고, 학습해나가야 한다.

치고받는 공격과, 그를 받아치는 공격.

차별에는 차별로, 혐오에는 혐오로, 그래봤자 영원히 평행선이다.

여성 차별의 반대말은 남성 차별이 아니다.

모든 차별의 반대말은 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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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학사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8
윌리엄 바이넘 지음, 박승만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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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더 닉' 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서양 의학의 역사에 대해 조금 관심이 생겼다.

1900년대 미국 뉴욕. 닉커버커 병원의 전설적인 외과의 태커리 박사의 활약상을 그린 드라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평범한 의학드라마 같지만, 1900년대는 공기 중의 세균 감염에 대한 개념과 항생제도 없던 시절이다. 수혈에 대한 개념도 이제 막 정립되기 시작해서, 아직 대중적으로 퍼지지 않았던 시기이다. 

코카인 중독을 헤로인으로 치료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정신병에 대해 수많은 비인간적인 치료가 시도되는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드라마 1시즌의 1화에서 태커리 박사를 가장 괴롭히는 일은 제왕절개술이었다.

당시 제왕절개술의 성공률은 1% 남짓이었다. 그나마 태커리 박사는 그의 두배인, 2%의 성공률을 '자랑' 하는 전설적인 외과의였다.

가장 큰 문제는 혈액손실이었다. 태커리는 그나마 동맥을 피하는 기술이 뛰어나서 한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지만, 드라마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실패하고 만다. 실패가 당연했기에, 그것이 태커리의 명성에 해가되지 않았다.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당시 미국 사회 경제 전반을 살펴볼 수 있음은 물론, 인종차별과 성차별 등 의학사 뿐 아니라 미국사 전반에 대한 이슈들이 골고루 등장한다. 병원 내 자본에 관련된 다양한 권력관계와 주요 인물들의 로맨스도 등장하는, 아주 재미있는 드라마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의학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간단하게 그 맥이라도 짚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구글링을 통해 수집한 정보들은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어서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볼 수는 없었기에,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훑어보던 도중, 인문교양 입문서로 잘 알려진 교유서가의 '첫단추 시리즈'가 떠올랐다.


아니나다를까, [서양의학사]가 있었고, 역시 기대대로 고대 그리스의 의학부터 현재의 의학까지 빠르고 간결하게 훑어볼 수 있었다.

철학자에서부터 히포크라테스로, 그리고 도서관으로, 실험실로, 병원 진료실을 거쳐 대학 강의실로, 결국은 전쟁터와 지역사회로 의학의 패러다임이 탄생한 '장소' 를 중심으로 거침없이 서술해 나간다. 청진기나 현미경, 세균과 바이러스, 우두와 종두, 흑사병, 콜레라, 수혈과 신경정신과, 탄저균과 에이즈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재들을 예로 들어 정말정말 쉽게 잘 읽힌다. (청진기가 발명되는 과정은 정말 재미있었다.) 

드라마 '더 닉' 을 보다보면, 많은 의사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을 하곤 했는데, 이 책을 통해 그 이유도 알 수 있었고, 병원과 공중보건, 위생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이 기껏해야 150여년 전 안팎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특히, 책 안에서 '도서관 의학' 과 '실험실 의학' 을 큰 챕터로 소개해주는데, 드라마 안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역시 이해가 쏙쏙 됐다. 책은 아주 얇은 편이고, 판형도 작지만, 생각보다 도판도 많이 실려있어서 좋았다.

(역시, 최초의 청진기로 진찰하는 기록화는 정말이지, 빵 터졌다.ㅋㅋㅋ)



이 책은 말 그대로 '흐름' 을 보여준다. 

연대나 숫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일련의 인과관계를 뚜렷하게 서술해주며, 고대의 의학이 어떻게 도서관 의학으로 변화하고, 또 어떻게 실험실 중심으로, 병원 진료실 중심으로 축이 옮겨가는지 명확하게 알려준다.

딱히 외우려 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흐름이 그려지는 것이다.

첫단추 시리즈의 특징이다.

이전에, 이 시리즈의 '로마' 와 '로마공화정', '철학' 등을 읽었는데,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것 같다.

동시에, '내가 중 고등학교때 이 책들을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기도 하고.

'학문' 에 대한 전반적인 의식 자체를 바꿔주었을텐데.

지금이라도 읽기 시작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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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8-03-18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닉을 보셨군요.
저는 너무 징그러워서 보다 껐어요.ㅜㅜ

열혈명호 2018-03-20 13:26   좋아요 0 | URL
제 동생도 보다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더군요. 저는 아무 이상 없이 시즌2까지 완주했습니다. 시즌2 마지막 장면은...정말 역대급 호러쇼 수준이에요. ㄷㄷㄷ
 
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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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서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운다.

일반병들은 무척 간단한 기술을 배운다. 생명만큼 소중히 여기라는 총기 안에 총알이 가득찬 탄창을 넣고, 노리쇠를 잡아당겨 총알을 장전한 다음, 조종간 위치를 격발에 놓고, 상대방을 향해 겨눈 다음,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난 2년 6개월간 군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그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은 있었지만, 상상 속에서도 그 인간을 힘껏 두들겨 패기나 했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살인무기를 활용할 생각은 정말이지 1도 한 적이 없다. 

아마도 우리 내무실에 있는 사람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물론 우리 부대는 지원부대라 초소근무를 나갈 때 마다 실탄 지급을 받지는 않았지만, 당직실엔 언제나 정문 근무자용 실탄이 구비되어 있었고, 분기별로 하루는 사격을 하면서 영점조정도 하고 실력별로 포상을 주기도 했다. 

실탄은 언제나 묵직했고, 화약냄새는 항상 피냄새 같았다. 실탄사격을 하는 날은 부대 전체가 정적에 휩싸이곤 했다. 주기적으로 산속에 울려퍼지는 총소리는 무시무시했고, 모든 장병들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지만, 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그것을 사람을 향해 쏜다고 생각한 사람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정정하겠다.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실, 매일아침 당직사관이 점호시간에 알려주는 전날밤의 사건사고들에는 총기사고가 언제나 있었으니까.

목을 메는 이들보다는 자신을, 혹은 다른 누군가를 쏘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우리 부대에도 몇 명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이들이 나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았던 것은, 그저 순전히 운이었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내가 전역한지 딱 1년 뒤, 전방 어떤 부대에서 어떤 사병이 내무반 안에 수류탄을 던지고, 같은 부대 대원들을 겨누었으니.

난 2004년 6월에 전역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2005년 6월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콜럼바인 사건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1999년은 나 역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과과정과 미국의 교과과정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콜럼바인 사건의 두 주범자는 아마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학생들이었을터다.

이후 콜럼바인 사건과 함께 따라붙었던 국내의 칼럼들은 대부분 '집단 따돌림', '총기 소유의 위험성' 등 특정한 키워드에 집중됐다. 

으레 안좋은 가정환경 아래에서, 음침하고 내성적으로 자란 아이들이 자유롭게 총기를 소유하게 되면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처럼 보도되고 그쳤다. 

무시무시한 사건이었지만, 총기 소유를 아무나 할 수도 없고, 학원 폭력이나 따돌림과는 거리가 있는 학창시절을 보내던 나에게 그저 그렇게 외국의 어떤 사례에 불과했고, 국내 언론의 자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 해는 나에겐 수학능력시험이라는 인생의 큰 관문이 기다리고 있던 터라 큰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다.


콜럼바인에 대해 보다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훨씬 뒤에 김일병 총기 난사사건과 2007년 조승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 국적의 미국 영주권자가 벌였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그 일 이후 콜럼바인 사건에 대한 글들을 다시 접하게 됐고, '화씨 9/11' 과 '식코' 로 잘 알았던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 이라는 작품을 찾아 봤던 기억도 난다. (반면 내용이 뚜렷하게 기억에 남지 않아있어서 이번 기회에 다시 찾아봤더니, 콜럼바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총기 소유 자체와 선정적인 언론등에 대한 부분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역시 김일병이 부대 안에서 따돌림을 당했겠거니, 조승희군이 학교 안에서 잘 어울리지 못했겠거니, 하고 말았더랬다.

실제 당시의 기사들도 각각 군대라는 특수성과 재미교포라는 특수성, 인종차별과 열등의식 등으로 해석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면, 나의 확증 편향이던지.


그렇다. 확증 편향.

모든 인물은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에 걸리는 말들, 눈에 보이는 글들 중에서 '그럴 만한' 부분들만 저장한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고정 관념이나 언론이 만들어준 이미지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뿐 아니라, 언론의 헤드라인이나 짧은 한 줄 기사로 얻은 정보만으로도 쉽게 "안다" 고 인식해버린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자신이 "아는" 방향과 같은 쪽을 가리키는 정보들만을 인식하고 저장한다. 한번 잘못 저장된 정보는 쉽게 수정되지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정보들은 "틀린" 정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책 [콜럼바인] 은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얕은지, 그리고, 우리가 '안다' 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13명이 죽고 24명이 다쳤다.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는 미국의 여느 중산층 가족과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났다. 학교 생활도 곧잘 했다. 특히 딜런은 더 어렸을 때는 영재로 여겨질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고, 에릭은 셰익스피어와 안톤 체홉을 외울 정도로 문학을 사랑하는 소년이었다. 딜런은 소극적이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아이였지만,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도 있고,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붙여볼까 공상하는, 그 나이때의 여느 아이와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에릭은 쾌활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싹싹한 아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범죄의 징후가 없었다. 주변의 대부분의 어른들에겐 자신의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웃집 아이였다.

단, 에릭의 경우에는 몇몇 징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대다수의 어른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졌다.

몇몇 사건들이 있었지만, 정당한 벌을 받았고, 법원에서 부과한 사회봉사와 교화교육과정들을 충실히 이행했다. 학업 성적도 좋았다. 모두가 치기어린 시절 한번쯤 겪을 수 있는 실수였으며, 교화 프로그램을 통해 응분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고, 반성했다고 여겨졌고, 법원에서 지정한 상담의에게도 합격점을 받았다. 그 사이에 놓친 몇몇 징후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평범한 고등학생 아이들이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징후들을 약 1년여 후에 있을 미국 총기 사고 역사에 기록될 대학살의 전조로 볼 수는 없었을터다.  



 볼륨도 상당하고, 내용도 무척 빡빡하지만 페이지는 굉장히 잘 넘어간다.

우리나라에서 책으로 나올 정도의 르포르타주라면 세간의 관심을 끌만한 자극적인 소재이거나 유명한 작가의 글이라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책은 특히 더 술술 넘어갔다. 무엇보다 이런 책이 만들어지고, 출간될 수 있는 미국의 환경이 놀라우면서도 부럽다. 이 책은 음모론을 혁파하고 제퍼슨 카운티 경찰 당국의 실수를 꼬집으며 언론의 치졸한 행태를 드러내는 책이다. 몇 년 동안 이 사건을 이용해 이득을 얻은 장사꾼들의 속내를 파헤치고, 희생당한 이의 유족들과 가해자의 가족들 간의 진흙탕 같은 지저분한 다툼도 가감없이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후원금의 내역과, 그 용처를 두고 일어난 희생자 가족간의 사적인 법적다툼까지 샅샅히 실려있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 사건을 쫓은 저널리스트의 의지와 용기는 물론,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힘썼을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진다.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을까??

김일병을 다룬 사건은 군대의 폐쇄성 때문에 힘들지라도, 인천 유아 살해사건이나 세월호는 이런 객관적인 논조로 담담하고, 침착하게, 어느 한 곳에 쏠림 없이 공정하게, 백서의 형태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책의 구조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독립적인 다섯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각각의 챕터가 공히 시간의 순서대로는 사건 이전, 사건 당시, 사건 이후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다섯번의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겪게 되는 것이다.

에릭과 딜런의 시점에서, 희생자와 가족들의 시점에서, 보안관과 경찰들의 시점에서, 주변의 교회와 신도들 시점에서, 에릭과 딜런의 가족들 시점에서. 모든 챕터가 첫장은 사건 이전이고, 마지막장은 사건 이후인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결코 끼어들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감정적인 서술은 최대한 자제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자료들을 '정리' 하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고르고 고른 느낌이 역력히 묻어난다.


에릭과 딜런이 모의하고 준비한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도 대단하지만, 이후 진행된 수많은 송사들과 후원금의 분배, 종교적인 이용, 언론의 수많은 오보와 그것에 떠밀려간 대중들의 심리, 희생자 가족들과 가해가 가족들, 그리고 생존 학생들과 주변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갈등, 중상자들의 재활과,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피폐해진 삶까지 건조하고 담담하게 서술되어 가슴을 깊이 후벼팠다.

그 누구의 말처럼, 단순히 13명의 사망자와 24명의 부상자를 남긴 한 건의 사건이 아니라,

37건의 총격사건인 것이다. 

그 한 건,한 건들이 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재현되고, 또 재현된다. 



 이 책을 통해 드러난 콜럼바인 사건 이후 일련의 과정들은 9.11 테러 당시의 미국사회와 흡사할 정도로 닮아 있다.

쏟아지는 추측성 보도, 확증 편향에 따른 대중들의 이해, 그로 인한 분노, 희생양, 음모론, 오보, 오보, 또 오보.

물론 김일병 총기 난사 사건과, 세월호와도 닮아있다. 

대참사; 거대한 사건을 접했을 때 인간들이 저지르는 똑같은 실수들.

매번, 매번 똑같이 반복한다.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행정기관들은 은폐하거나 최소한 축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숨기고 감추고. 언론들은 속보 경쟁에 뛰어들어 크로스 체크조차 하지 않은 추측성 기사를 남발한다. 그 과정 중에 희생양도 생기고 수혜자도 생긴다. 귀신같이 돈냄새를 맡는 사람들도 있다. 이권 경쟁마저 생긴다. 오보는 오보를 낳고, 확증 편향은 또다른 편향을 낳는다.

결국 다른 사건이 터지면, 대중들의 관심은 그 쪽으로 쏜살같이 옮겨간다.

관계자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관련자들은 여전히 잘 숨기고, 감춰서 면피의 기회로 삼는다. 

진실은 그렇게 묻히고, 실수를 되짚어 올바른 대응책을 마련할 기회는 사라진다.

그래서, 같은 사건은 똑같이 반복된다.

특히 대한민국 군대는 소름끼칠 정도로 차폐된 세계이다. 사건 하나하나에 직업의 명운이 달린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며,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거짓말의 향연을 벌인다.

 

 콜럼바인 사건 당시 미국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가해자들이 자살했기에 희생자 가족들과 대중들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없었다. 언론들은 '트렌치 코트 마피아' '고스족' '학교내 따돌림' 등을 언급했고, 생존자들을 통해 반복 재생산 되었다. 수년간 그것이 진실처럼 여겨졌다.(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더라.) 가해자의 가족들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너희가 아들을 잘못 키웠어."

제퍼슨 카운티 당국은 과거 에릭의 사건기록을 삭제하고 경관끼리 입을 맞추면서 콜럼바인 사건 1년 전에 에릭을 제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이후에 드러난 자료들- 특히 에릭과 딜런이 사고 직전에 찍은 동영상을 은폐하고, 사건의 주요한 정보들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보들이 희생자 가족 개개인들과 변호사들의 대처로 순차적으로 세상에 공개됐고, 제퍼슨 카운티 경찰의 폭넓은 은폐시도가 드러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경찰은 그것이 '의례적인 일' 이었다고 수습했다. 내부적으로 판단해서 자료의 공개 여부나 파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경찰의 본디 업무들 중 하나라고 말이다. 정보 공개와 손해 배상에 대한 소송은 몇년으로 길어졌고, 희생자 가족들이 "비극 팔이" 를 한다는 자극적인 기사가 언론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대체 어느 나라, 어느 사건 이야기인가 싶어, 몇번을 다시 읽었다.


에릭과 딜런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매혹적이었다. 

사건의 심리 담당 중 한명이었던 퓨질리어는 에릭과 딜런에 대해 가장 깊이 파고든 인물이었다.

FBI 협상전문가인 그는 여러 인질사건을 겪은 베테랑이었고, 범죄수사의 전문가였다. 에릭과 딜런의 일지와 발견된 비디오 테이프들을 바탕으로 둘의 심리를 분석했고, 딜런은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에릭은?

싸이코 패스였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1999년은 싸이코 패스에 대한 연구가 초기단계였다.

에릭은 싸이코 패스의 전형에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에릭과 딜런은 표면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알콜 중독자거나 폭력적인 성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다. 형제간에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가끔 어린 애들을 괴롭히고 말썽을 일으키긴 했지만, '살인' 과는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에릭은 순종적인 아들이었고,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피잣집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영리하고 일 잘하는 직원이었다. 사장과도 친하게 지냈고, 손님들에게도 싹싹했다. 딜런은 다소 음침한 구석이 있었지만, 에릭과 함께 있으면 밝게 웃었고, 학업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누가봐도 얌전하고 순종적인 학생이었다. 에릭은 사건 직전에 남긴 비디오 테이프에 '좋은 엄마에게서 나쁜 아들이 태어났다' 는 말을 남겼다.


에릭이 싸이코 패스라는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사람들은 "왜?" 라는 의문을 비로소 풀 수 있었다. 

반면 딜런은 싸이코 패스는 아니었지만, 그의 일지를 통해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상태였으며, 에릭을 통해 경도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에릭과 딜런이 싸이코 패스가 시너지를 이룰 수 있는 조합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싸이코 패스만이 이런 대학살극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조승희를 비롯, 콜럼바인 이전에도 총격 사건은 있었지만, 이후에는 좀 더 심해졌다.

조승희의 예처럼 에릭과 딜런이 어떤 학생들에게는 일종의 모티프로 작용한 것이다. 



결국은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는 총기가 문제였을까?

미국에서도 미성년자의 총기 구입은 상당한 규약이 따른다. 총기 소지가 자유라지만, 아무런 규약도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총기를 쏴 본 적도 없다. 오히려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는 한국인들이 총기사용에 더 능숙할지도 모른다.

에릭과 딜런은 총기 판매시 규제가 덜 엄격한 총기 박람회에서 총기들을 구매했고, 그들에게 총기를 판 딜러는 5년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사는 사람보다 파는 사람에게 엄격한 법을 적용함으로써 총기 규제를 엄하게 했다지만, 어디에나 꼼수는 존재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 에서 마이클 무어가 중점적으로 다뤘던 부분이 총기 소유 허가에 대한 부분이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엄청난 총격 사건이 있었다. 

우린 SNS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그 충격적인 광경을 접했다. 한밤중에 흥겨운 콘서트장을 향해 발사된 수백발의 총알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쓰러졌다. 60여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콜럼바인에서 일어났던 리액션들이 몇초만에 일어났다.

SNS를 통해 추측성 글들이 퍼졌고, 공모자나 배후자가 의심됐다. 하지만, 이번엔 경찰과 당국의 대응은 달랐다. 최대한 빠르게 범인의 신상을 확보하고, 언론에 공개했다. 합리적이고 합당한 증거들은 모두 공개했고, 대중들은 빠르게 희생자와 피해자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콜럼바인에서처럼 총기 규제에 대한 이슈가 도마에 올랐지만, 미국 정부 당국은 역시 애써 외면중이다.

사회적 문제는 제쳐두고, 살인자 개인에게 모든 원인을 돌리고 있다. 


총을 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물건인지.

얼마나 쉽게 옆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물건인지.

과녁을 앞에 두고, 실탄이 가득찬 총을 전방을 향해 겨눈 상황에서 누구도 그 총구를 동료들에게 돌릴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아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를 떠올리면 등 뒤에 소름이 돋는다.

어쩌면 그 중에 한두명 정도는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계획을 세운 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2015년 5월 13일 내곡동 예비군 훈련장에 있던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로에서 일어나 자신의 사격을 돕던 부사수와 옆사로의 예비군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자살했다. 3명이 죽고 2명이 크게 다쳤다.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의 사건이었다.


분명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

통계적으로 범죄율은 꾸준하게 감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매스 미디어에서는 범죄와 관련된 영상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평화로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은 범죄와 폭력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악' 이 얼마나 일상적인 것인지,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는지 알고 있다. 

분열과 분노의 세상 속에서 약자는 언제나 폭력의 대상이다. 폭력이 축적되는 만큼 분노도 축적된다. 

비단 싸이코 패스만 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것을 방지하는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얼마나 얄팍한가.

우리는 과연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김영하 작가는 '작가란 질문을 던지는 사람' 이라고 했다. 

이 책 역시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 몇편을 링크한다.

어느정도 정리된 콜럼바인 고교의 사건현장




사건 당일 도서관에서 걸려온 911신고 음성 파일






콜럼바인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재현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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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4모 - 박근혜 4년 모음집, 본격 시사인 만화 2013~2017
굽시니스트 지음 / 시사IN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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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고 보니, 짧았던 것 같은데. 박근혜 정부도 무려 4년이었다. 

2017년 5월 29일 공판때 박근혜는 혼잣말로 '다 조작이야' 라고 궁시렁 거렸고, 급기야는 문에 발가락을 찧었다며 MRI까지 찍는 희안한 일을 벌이고 있다. 정유라의 결정적 증언에도 이재용은 사실 삼성의 실세가 아니었다는 말로 최악의 사태를 피해가려 하고, 최순실과 변호인측은 여전히 사법부를 농락하는 듯 고성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그네들의 정신세계를 알 것 같다.

이 책은 이제는 시사만화계의 거두로 자리잡은 '굽본좌' 굽시니스트가 시사인에 장기 연재중인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박근혜의 집권기간동안 연재된 분량을 묶은 책이다.

본격 시사인 만화가 2권까지 나왔으니 3권인 셈이다. 

아무래도 박근혜 집권기는 기존의 대한민국 정치사와 사뭇 다른 부분이 있어설까, 기존의 시리즈를 이어가기보다 '박4모'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편집부의 의도가 좀 궁금하긴 한데.... 문재인 정부는 어쩔라구???? @,@

아마 박근혜 정부를 우리나라의 '정부' 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보이는 듯도 하고.

 

 굽작가 책의 트레이드마크인 각 편마다 달려있는 해설도 역시 그대로다.

패러디로 사용된 작품들과 책이 묶이기 직전 소회를 풀어내듯 몇줄씩 코멘트가 달려있는데, 탄핵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라 당시에는 어처구니 없었던 몇몇 결정들이 지금 보니 '그랬구나' 싶은 부분들이 많다.


2012년 10월,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와 박근혜 당선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2017년 4월, 문재인과 안철수의 양강구도로 막을 내린다.

윤창중의 발탁과 낙마, 문창극 총리 후보 지명,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의 미스테리한 마무리와 무시무시한 크래킹 프로그램을 통한 도감청 의혹 등등. 빨간 마티즈 안에서 사망하신 국정원 직원분은 제대로 눈이나 감으셨을까... 세월호 아이들에 비할수는 없겠지만, 원통한 죽음도 꽤 많았던 4년이었구나, 싶다.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 지난해 촛불혁명부터 문재인 정권의 출범까지, 고작 1년 남짓이었다.

최순실의 태블릿이 발견된 지도 이제 1년 넘어, 2년째인거고.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엄청나게 많다. 박근혜, 최순실, 이재용의 공판은 끝나지 않았고, 블랙리스트의 김기춘, 조윤선도 마찬가지.

심지어 조윤선은 무죄 선고를 받고 호화로운 집으로 돌아갔다. 

최순실의 은닉 자금은 세계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규모로 발견되고 있으나 환수법은 지지부진하고, 동네 건달들의 강령 같은 혁신안을 발표한 박근혜 정부의 일등공신 자한당은 사사건건 적폐청산의 앞길을 막고 있다. 

박근혜 탄핵도 쉽지 않았으나, 앞으로의 길도 험난하다.

미국은 여전히 우리 정부를 따 시키고, 중국은 여전히 민간 기업들을 내몰면서 압박 하고, 그 와중에 북한은 미사일을 펑펑 쏴댄다.

일본은 스스로 정한 평화헌법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며 우리의 영토와 역사를 걸고 넘어지며 분쟁을 조장하고. 

동아시아의 지형은 북,중,미 대 한,미,일의 대결구도가 선명해진 가운데, 한국에서 먼저 정치적인 환난이 잘 극복됐고, 일본에서도 극우 정권을 향한 의미있는 움직임이 포착되는 중이란다. 


우리의 역사는 언제나 위기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위기 끝에 문민정부를 세우고 평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더니, 이명박근혜 10년이 민주주의를 엄청나게 후퇴 시켰다.

하지만, 역시 수많은 위기로 단련된 시민들이어서 기회가 주어지자 잃어버린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되돌아갔다.

어쩌면 우리는 10년쯤 뒤에 또,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니까.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곱씹어야 한다.

박정희를 잊지 말고, 전두환을 잊지 말고, 노태우와 김영삼, 김대중과 노무현, 이명박과 박근혜를 끊임없이 되살려야 하는 이유다. 

광주 민주화운동과 남북정상회담, 보건복지부와 삼성, 삼풍 백화점과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와 촛불 혁명을 끊임없이 돌이켜야 하는 이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난 10년은 그 증거였다. 

당장 다음 해에 총선. 그리고 그 뒤에 또 찾아올 대선. 아마 그 중간 어디선가 개헌이 있을수도.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먼지로 돌아갈 만한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외계인이 침략한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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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특별판)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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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이 책이 엄청 유행했던 적이 있다. 

나는 20대 후반에 처음 접하고, 이 책을 고등학교때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고두고 아쉬움을 삼켰다.

그리고, 40을 바라보는 30대 후반에 다시 읽어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연장통' 에 대한 부분이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스티븐 킹은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위한 '준비' 에 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연장통이 바로 그것이다. 

스티븐 킹은 글쓰기의 기본 능력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최선의 능력' 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연장이 필요하고, 연장의 활용법을 충분히 익혀야 하며, 많은 연장을 담을 통과 그 통을 들고 다닐 수 있는 팔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연장통의 맨 위칸에는 '낱말' 이 있다. 그 옆에는 '문법' 이 있고.

적확한 낱말을 간결한 문장 안에 넣는다. 

이 대목에서 그 유명한 "부사는 여러분의 친구가 아닙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로 뒤덮여 있다고 믿는다." 와 "부사는 민들레와 같다. 잔디밭에 한 포기가 돋아아면 제법 예쁘고 독특해 보인다. 그러나 이때 뽑아버리지 않으면~~' 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p.151) 그리고, 관용구를 피하는 방법과 수동태를 자제하고 능동태를 지향하라는 주장이 여러 예문을 통해 쏟아진다.

문장들이 알맞게 모인 "문단"의 중요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아, 그래.

이 부분은 대충 읽었었지. 

스티븐 킹은 수많은 대가들도 잘못된 문법을 사용한 예가 있지만, 탄탄한 문법적 기초 위에서 파생된 것이고, 수동태는 작가의 소심함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설파한다. 시종일관 유머러스 한 그의 책은 거의 중반인 이 즈음부터 상당히 진지해진다. 


그 뒤에 등장하는 "창작론" 역시 재미있다.

그는 작가란 "화석을 캐내는 고고학자" 라고 생각한다. 

물론, 수많은 다른 작가들의 수많은 창작론을 인정하고, 자신의 창작론을 진리로 따르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각자 자신만의 창작론을 따르라고.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 어떤 인물을 훅 던져 두고, '관찰' 함으로써 이야기를 '발굴' 해낸다고 한다.

작가의 역할은 그 이야기를 최대한 원형 그대로 캐내는 것이다. 적절한 연장을 적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붓이나 솔을 사용해야 할 곳에 망치나 끌을 들고 덤비면 큰일이다. 그것이 '연장통' 의 중요성이다.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평범한 작품과 아주 한심한 작품들을 경험한다. 이런 경험을 쌓아두면 나중에 자기 작품에 그런 단점들이 나타났을 때 얼른 알아보고 피해갈 수 있다. 또한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훌륭한 작품과 위대한 작품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정하고, 과연 이런 작품도 가능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독서는 작가의 창조적인 삶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맞아. 이 뒤에, 어디서든 읽으라, 러닝 머신 위도 좋은 공간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그래. 내가 헬스장에 책을 갖고 다니게 된 이유였다. 러닝 머신은 좀 위험하고, 인도어 사이클 위에서 읽는다.  

이 책도 헬스장 러닝 머신 위에서 다 읽었다. 


스티븐 킹은 시종일관 겸손하고, 유머러스하다.

에세이처럼 시작한 이 한권의 작법서는 수많은 '주의사항' 을 설파하고, 수많은 예제를 던져주며 마무리된다.

아마, 이 책을 다 집필하고도, '아 이런 부분이 있었는데,' 한 부분들도 많았겠지.

수많은 '지망생'. 장래의 동료들을 위한 존중과 배려, 따뜻한 시각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아마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향하는 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선' 을 그리는 것이다. 

아...이제는 컬러로 면을 표현하기가 쉬워진 시대라서 이런 지향점은 고루한 것이 되어 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살아있는 선'.


 어린 시절에는 그 선이 도구의 차이에서 나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그런 선을 그리는 작가들은 날카로운 쇠붙이에 제도용 잉크를 찍어서 사용하는 원시적인 도구를 벗어어나지 않더라. 가끔 플러스펜이나 제도용 만년필등을 사용하는 작가들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기능을 지닌 필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종이는 뭐, 조금 다르긴 했다. 물론 잉크도 조금 달랐다. '만년필용' 과 '제도용' 은 엄연히 다른 잉크이긴 하다. 

제도용 잉크를 만년필에 넣으면, 그 만년필은 거의 못쓰게 된다. 경유차에 중유나 등유(휘발유도 아니다)를 붓고 시동을 거는 격이랄까.

그러나, 역시 본질적으로 가장 간편하고 구하기 쉬운 도구들이었다.  


조금 지난 뒤엔 작가의 특별한 비법이 있는 줄 알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나? 

종이를 비스듬하게 기울여서 쓰나??

뭔가 특별한 비법이나 수련법이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무공 비급처럼.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게 사사받았을법한 드로잉의 비밀 필살기를 업계 스승들로부터 은밀하게 배웠을 것만 같았다. 


최소한의 선으로, 최대한의 것들을 표현한다.


항상 시간의 제약에 쫓기는 만화가는 더더욱 그 경지를 바라본다. 


물론, 여기서 '선' 은 만화 안의 수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배경에 그어지는 선, 집중선, 컷과 컷을 나누는 컷선. 

심지어 텍스트를 담고 있는 말풍선과 흔히 '효과음' 이라고 부르는 의성어, 의태어까지.

때로는 말풍선 안의 텍스트조차 '선' 으로서 만화 안의 미장센으로 작용한다. 


'살아있는 선' 이란, 결국 '이야기를 담아내는 선'이고, 오랫동안 변치않는 기본중의 기본이다. 

만화의 기본인 '선'이 부족할수록 '장식'에 치중하게 된다. 



아, 나도 빨리 그려야겠다.

나도 빨리 이야기를 캐러 가야겠다.

연장통도 챙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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