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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서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운다.
일반병들은 무척 간단한 기술을 배운다. 생명만큼 소중히 여기라는 총기 안에 총알이 가득찬 탄창을 넣고, 노리쇠를 잡아당겨 총알을 장전한 다음, 조종간 위치를 격발에 놓고, 상대방을 향해 겨눈 다음,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난 2년 6개월간 군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그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은 있었지만, 상상 속에서도 그 인간을 힘껏 두들겨 패기나 했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살인무기를 활용할 생각은 정말이지 1도 한 적이 없다.
아마도 우리 내무실에 있는 사람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물론 우리 부대는 지원부대라 초소근무를 나갈 때 마다 실탄 지급을 받지는 않았지만, 당직실엔 언제나 정문 근무자용 실탄이 구비되어 있었고, 분기별로 하루는 사격을 하면서 영점조정도 하고 실력별로 포상을 주기도 했다.
실탄은 언제나 묵직했고, 화약냄새는 항상 피냄새 같았다. 실탄사격을 하는 날은 부대 전체가 정적에 휩싸이곤 했다. 주기적으로 산속에 울려퍼지는 총소리는 무시무시했고, 모든 장병들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지만, 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그것을 사람을 향해 쏜다고 생각한 사람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정정하겠다.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실, 매일아침 당직사관이 점호시간에 알려주는 전날밤의 사건사고들에는 총기사고가 언제나 있었으니까.
목을 메는 이들보다는 자신을, 혹은 다른 누군가를 쏘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우리 부대에도 몇 명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이들이 나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았던 것은, 그저 순전히 운이었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내가 전역한지 딱 1년 뒤, 전방 어떤 부대에서 어떤 사병이 내무반 안에 수류탄을 던지고, 같은 부대 대원들을 겨누었으니.
난 2004년 6월에 전역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2005년 6월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콜럼바인 사건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1999년은 나 역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과과정과 미국의 교과과정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콜럼바인 사건의 두 주범자는 아마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학생들이었을터다.
이후 콜럼바인 사건과 함께 따라붙었던 국내의 칼럼들은 대부분 '집단 따돌림', '총기 소유의 위험성' 등 특정한 키워드에 집중됐다.
으레 안좋은 가정환경 아래에서, 음침하고 내성적으로 자란 아이들이 자유롭게 총기를 소유하게 되면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처럼 보도되고 그쳤다.
무시무시한 사건이었지만, 총기 소유를 아무나 할 수도 없고, 학원 폭력이나 따돌림과는 거리가 있는 학창시절을 보내던 나에게 그저 그렇게 외국의 어떤 사례에 불과했고, 국내 언론의 자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 해는 나에겐 수학능력시험이라는 인생의 큰 관문이 기다리고 있던 터라 큰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다.
콜럼바인에 대해 보다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훨씬 뒤에 김일병 총기 난사사건과 2007년 조승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 국적의 미국 영주권자가 벌였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그 일 이후 콜럼바인 사건에 대한 글들을 다시 접하게 됐고, '화씨 9/11' 과 '식코' 로 잘 알았던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 이라는 작품을 찾아 봤던 기억도 난다. (반면 내용이 뚜렷하게 기억에 남지 않아있어서 이번 기회에 다시 찾아봤더니, 콜럼바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총기 소유 자체와 선정적인 언론등에 대한 부분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역시 김일병이 부대 안에서 따돌림을 당했겠거니, 조승희군이 학교 안에서 잘 어울리지 못했겠거니, 하고 말았더랬다.
실제 당시의 기사들도 각각 군대라는 특수성과 재미교포라는 특수성, 인종차별과 열등의식 등으로 해석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면, 나의 확증 편향이던지.
그렇다. 확증 편향.
모든 인물은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에 걸리는 말들, 눈에 보이는 글들 중에서 '그럴 만한' 부분들만 저장한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고정 관념이나 언론이 만들어준 이미지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뿐 아니라, 언론의 헤드라인이나 짧은 한 줄 기사로 얻은 정보만으로도 쉽게 "안다" 고 인식해버린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자신이 "아는" 방향과 같은 쪽을 가리키는 정보들만을 인식하고 저장한다. 한번 잘못 저장된 정보는 쉽게 수정되지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정보들은 "틀린" 정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책 [콜럼바인] 은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얕은지, 그리고, 우리가 '안다' 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13명이 죽고 24명이 다쳤다.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는 미국의 여느 중산층 가족과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났다. 학교 생활도 곧잘 했다. 특히 딜런은 더 어렸을 때는 영재로 여겨질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고, 에릭은 셰익스피어와 안톤 체홉을 외울 정도로 문학을 사랑하는 소년이었다. 딜런은 소극적이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아이였지만,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도 있고,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붙여볼까 공상하는, 그 나이때의 여느 아이와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에릭은 쾌활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싹싹한 아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범죄의 징후가 없었다. 주변의 대부분의 어른들에겐 자신의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웃집 아이였다.
단, 에릭의 경우에는 몇몇 징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대다수의 어른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졌다.
몇몇 사건들이 있었지만, 정당한 벌을 받았고, 법원에서 부과한 사회봉사와 교화교육과정들을 충실히 이행했다. 학업 성적도 좋았다. 모두가 치기어린 시절 한번쯤 겪을 수 있는 실수였으며, 교화 프로그램을 통해 응분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고, 반성했다고 여겨졌고, 법원에서 지정한 상담의에게도 합격점을 받았다. 그 사이에 놓친 몇몇 징후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평범한 고등학생 아이들이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징후들을 약 1년여 후에 있을 미국 총기 사고 역사에 기록될 대학살의 전조로 볼 수는 없었을터다.
볼륨도 상당하고, 내용도 무척 빡빡하지만 페이지는 굉장히 잘 넘어간다.
우리나라에서 책으로 나올 정도의 르포르타주라면 세간의 관심을 끌만한 자극적인 소재이거나 유명한 작가의 글이라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책은 특히 더 술술 넘어갔다. 무엇보다 이런 책이 만들어지고, 출간될 수 있는 미국의 환경이 놀라우면서도 부럽다. 이 책은 음모론을 혁파하고 제퍼슨 카운티 경찰 당국의 실수를 꼬집으며 언론의 치졸한 행태를 드러내는 책이다. 몇 년 동안 이 사건을 이용해 이득을 얻은 장사꾼들의 속내를 파헤치고, 희생당한 이의 유족들과 가해자의 가족들 간의 진흙탕 같은 지저분한 다툼도 가감없이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후원금의 내역과, 그 용처를 두고 일어난 희생자 가족간의 사적인 법적다툼까지 샅샅히 실려있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 사건을 쫓은 저널리스트의 의지와 용기는 물론,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힘썼을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진다.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을까??
김일병을 다룬 사건은 군대의 폐쇄성 때문에 힘들지라도, 인천 유아 살해사건이나 세월호는 이런 객관적인 논조로 담담하고, 침착하게, 어느 한 곳에 쏠림 없이 공정하게, 백서의 형태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책의 구조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독립적인 다섯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각각의 챕터가 공히 시간의 순서대로는 사건 이전, 사건 당시, 사건 이후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다섯번의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겪게 되는 것이다.
에릭과 딜런의 시점에서, 희생자와 가족들의 시점에서, 보안관과 경찰들의 시점에서, 주변의 교회와 신도들 시점에서, 에릭과 딜런의 가족들 시점에서. 모든 챕터가 첫장은 사건 이전이고, 마지막장은 사건 이후인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결코 끼어들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감정적인 서술은 최대한 자제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자료들을 '정리' 하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고르고 고른 느낌이 역력히 묻어난다.
에릭과 딜런이 모의하고 준비한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도 대단하지만, 이후 진행된 수많은 송사들과 후원금의 분배, 종교적인 이용, 언론의 수많은 오보와 그것에 떠밀려간 대중들의 심리, 희생자 가족들과 가해가 가족들, 그리고 생존 학생들과 주변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갈등, 중상자들의 재활과,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피폐해진 삶까지 건조하고 담담하게 서술되어 가슴을 깊이 후벼팠다.
그 누구의 말처럼, 단순히 13명의 사망자와 24명의 부상자를 남긴 한 건의 사건이 아니라,
37건의 총격사건인 것이다.
그 한 건,한 건들이 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재현되고, 또 재현된다.
이 책을 통해 드러난 콜럼바인 사건 이후 일련의 과정들은 9.11 테러 당시의 미국사회와 흡사할 정도로 닮아 있다.
쏟아지는 추측성 보도, 확증 편향에 따른 대중들의 이해, 그로 인한 분노, 희생양, 음모론, 오보, 오보, 또 오보.
물론 김일병 총기 난사 사건과, 세월호와도 닮아있다.
대참사; 거대한 사건을 접했을 때 인간들이 저지르는 똑같은 실수들.
매번, 매번 똑같이 반복한다.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행정기관들은 은폐하거나 최소한 축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숨기고 감추고. 언론들은 속보 경쟁에 뛰어들어 크로스 체크조차 하지 않은 추측성 기사를 남발한다. 그 과정 중에 희생양도 생기고 수혜자도 생긴다. 귀신같이 돈냄새를 맡는 사람들도 있다. 이권 경쟁마저 생긴다. 오보는 오보를 낳고, 확증 편향은 또다른 편향을 낳는다.
결국 다른 사건이 터지면, 대중들의 관심은 그 쪽으로 쏜살같이 옮겨간다.
관계자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관련자들은 여전히 잘 숨기고, 감춰서 면피의 기회로 삼는다.
진실은 그렇게 묻히고, 실수를 되짚어 올바른 대응책을 마련할 기회는 사라진다.
그래서, 같은 사건은 똑같이 반복된다.
특히 대한민국 군대는 소름끼칠 정도로 차폐된 세계이다. 사건 하나하나에 직업의 명운이 달린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며,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거짓말의 향연을 벌인다.
콜럼바인 사건 당시 미국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가해자들이 자살했기에 희생자 가족들과 대중들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없었다. 언론들은 '트렌치 코트 마피아' '고스족' '학교내 따돌림' 등을 언급했고, 생존자들을 통해 반복 재생산 되었다. 수년간 그것이 진실처럼 여겨졌다.(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더라.) 가해자의 가족들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너희가 아들을 잘못 키웠어."
제퍼슨 카운티 당국은 과거 에릭의 사건기록을 삭제하고 경관끼리 입을 맞추면서 콜럼바인 사건 1년 전에 에릭을 제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이후에 드러난 자료들- 특히 에릭과 딜런이 사고 직전에 찍은 동영상을 은폐하고, 사건의 주요한 정보들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보들이 희생자 가족 개개인들과 변호사들의 대처로 순차적으로 세상에 공개됐고, 제퍼슨 카운티 경찰의 폭넓은 은폐시도가 드러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경찰은 그것이 '의례적인 일' 이었다고 수습했다. 내부적으로 판단해서 자료의 공개 여부나 파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경찰의 본디 업무들 중 하나라고 말이다. 정보 공개와 손해 배상에 대한 소송은 몇년으로 길어졌고, 희생자 가족들이 "비극 팔이" 를 한다는 자극적인 기사가 언론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대체 어느 나라, 어느 사건 이야기인가 싶어, 몇번을 다시 읽었다.
에릭과 딜런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매혹적이었다.
사건의 심리 담당 중 한명이었던 퓨질리어는 에릭과 딜런에 대해 가장 깊이 파고든 인물이었다.
FBI 협상전문가인 그는 여러 인질사건을 겪은 베테랑이었고, 범죄수사의 전문가였다. 에릭과 딜런의 일지와 발견된 비디오 테이프들을 바탕으로 둘의 심리를 분석했고, 딜런은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에릭은?
싸이코 패스였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1999년은 싸이코 패스에 대한 연구가 초기단계였다.
에릭은 싸이코 패스의 전형에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에릭과 딜런은 표면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알콜 중독자거나 폭력적인 성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다. 형제간에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가끔 어린 애들을 괴롭히고 말썽을 일으키긴 했지만, '살인' 과는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에릭은 순종적인 아들이었고,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피잣집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영리하고 일 잘하는 직원이었다. 사장과도 친하게 지냈고, 손님들에게도 싹싹했다. 딜런은 다소 음침한 구석이 있었지만, 에릭과 함께 있으면 밝게 웃었고, 학업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누가봐도 얌전하고 순종적인 학생이었다. 에릭은 사건 직전에 남긴 비디오 테이프에 '좋은 엄마에게서 나쁜 아들이 태어났다' 는 말을 남겼다.
에릭이 싸이코 패스라는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사람들은 "왜?" 라는 의문을 비로소 풀 수 있었다.
반면 딜런은 싸이코 패스는 아니었지만, 그의 일지를 통해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상태였으며, 에릭을 통해 경도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에릭과 딜런이 싸이코 패스가 시너지를 이룰 수 있는 조합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싸이코 패스만이 이런 대학살극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조승희를 비롯, 콜럼바인 이전에도 총격 사건은 있었지만, 이후에는 좀 더 심해졌다.
조승희의 예처럼 에릭과 딜런이 어떤 학생들에게는 일종의 모티프로 작용한 것이다.
결국은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는 총기가 문제였을까?
미국에서도 미성년자의 총기 구입은 상당한 규약이 따른다. 총기 소지가 자유라지만, 아무런 규약도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총기를 쏴 본 적도 없다. 오히려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는 한국인들이 총기사용에 더 능숙할지도 모른다.
에릭과 딜런은 총기 판매시 규제가 덜 엄격한 총기 박람회에서 총기들을 구매했고, 그들에게 총기를 판 딜러는 5년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사는 사람보다 파는 사람에게 엄격한 법을 적용함으로써 총기 규제를 엄하게 했다지만, 어디에나 꼼수는 존재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 에서 마이클 무어가 중점적으로 다뤘던 부분이 총기 소유 허가에 대한 부분이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엄청난 총격 사건이 있었다.
우린 SNS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그 충격적인 광경을 접했다. 한밤중에 흥겨운 콘서트장을 향해 발사된 수백발의 총알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쓰러졌다. 60여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콜럼바인에서 일어났던 리액션들이 몇초만에 일어났다.
SNS를 통해 추측성 글들이 퍼졌고, 공모자나 배후자가 의심됐다. 하지만, 이번엔 경찰과 당국의 대응은 달랐다. 최대한 빠르게 범인의 신상을 확보하고, 언론에 공개했다. 합리적이고 합당한 증거들은 모두 공개했고, 대중들은 빠르게 희생자와 피해자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콜럼바인에서처럼 총기 규제에 대한 이슈가 도마에 올랐지만, 미국 정부 당국은 역시 애써 외면중이다.
사회적 문제는 제쳐두고, 살인자 개인에게 모든 원인을 돌리고 있다.
총을 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물건인지.
얼마나 쉽게 옆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물건인지.
과녁을 앞에 두고, 실탄이 가득찬 총을 전방을 향해 겨눈 상황에서 누구도 그 총구를 동료들에게 돌릴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아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를 떠올리면 등 뒤에 소름이 돋는다.
어쩌면 그 중에 한두명 정도는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계획을 세운 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2015년 5월 13일 내곡동 예비군 훈련장에 있던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로에서 일어나 자신의 사격을 돕던 부사수와 옆사로의 예비군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자살했다. 3명이 죽고 2명이 크게 다쳤다.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의 사건이었다.
분명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
통계적으로 범죄율은 꾸준하게 감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매스 미디어에서는 범죄와 관련된 영상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평화로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은 범죄와 폭력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악' 이 얼마나 일상적인 것인지,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는지 알고 있다.
분열과 분노의 세상 속에서 약자는 언제나 폭력의 대상이다. 폭력이 축적되는 만큼 분노도 축적된다.
비단 싸이코 패스만 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것을 방지하는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얼마나 얄팍한가.
우리는 과연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김영하 작가는 '작가란 질문을 던지는 사람' 이라고 했다.
이 책 역시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 몇편을 링크한다.
어느정도 정리된 콜럼바인 고교의 사건현장
사건 당일 도서관에서 걸려온 911신고 음성 파일
콜럼바인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재현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