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르 한국 건축 - 프랑스 건축가 25인의 한국 현대건축 여행
강민희 지음, 안청 그림 / 아트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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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중인 저자가 '일드프랑스 건축협회' 라는 곳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 건축답사를 떠나는 내용의 책이다. 대상자가 현대의 건축가들이라 전통 양식의 건물들은 가급적 배제하고, 현대 건축가들의 건물들을 주요 답사지로 선정했다.


아무래도, 나 역시 만화를 하는 사람으로 무협,사극에 대한 꿈이 있는지라 한국의 전통 가옥이나 건물에 대한 책들은 화집으로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국내에 있는 현대 건축물만을 찾아다녔다는 점이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사실 건축이라는 장르에 문외한이라 안도 다다오나 DDP로 처음 알게 된 자하 하디드 정도의 이름만 알고 있을 뿐, 그들의 작품을 눈으로 확인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의 건물이 꽤 있다는 사실조차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어떤 작품들은 제주도의 모 리조트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고, 서울 중심부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이 상상 초월의 공법을 사용해 만든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고, 가끔 파주 출판단지에 가면 신기하게 바라보는 미메시스 아트뮤지엄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다 처음 알았다. @.@ 

그리고, 국내에도 세계적인 수준의 건축가들이 꽤 많다는 사실도.    


건물은 단지 우리가 몸을 누이고 잠자는 공간이 아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삶의 99.999999%를 건축물에 둘러쌓인 채 살다 죽을 것이다.

그 규모나 재료가 뭐든간에, 네모난 공간에서, 네모난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의 연속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동하는 길이나 지하도도 모두 건축의 일부분이다. 

이런 생각은 비단 현대인들 만의 것은 아니다.

이미 수세기 전, 기원전 시대의 사람들조차 그 사실을 알고, 인지했다.

습기와 병충해, 맹수들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서 인간의 삶이 바뀌었다.

'생존하는 삶' 에서 안락함을 '누리는 삶' 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생존은 기본이고, 생존의 내용이 중요해진 것이다.

나아가, 건축물은 인간보다 오랜 시간을 이겨내는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도 획득한다.

게다가 2020년이 코앞인 현대에는 도시 '생태계' 를 이루는 나무나 산과 같다.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를 철칙처럼 믿으며 자연과 병존하는 건축을 추구했다. 외려 근현대에 접어들어 자연을 마구 훼손하는 건축을 추구했다가, 요즘은 다시 자연과 병존하는 방식을 고민중이다. 도시는 더이상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 책 안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건물들을 답사한 건축가들의 감상이 적혀있다.

특히 DDP를 다룬 대목이 눈에 간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이 오갔는지 확실히 기억한다.

정쟁의 요소로 쓰이기도 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한국 건축가들에게 조언을 구할 때마다 답사 목록에 외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 왜 이렇게 많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MA(일드프랑스 건축협회)와 프로그램을 상의할 때는 그것이 전혀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열이면 열 고궁이나 절 등 좀더 한국적인 건축물을 답사 프로그램에 넣고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더 많이 소개하라는 얘기를 했다. 그 점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이 달랐을 뿐이다. "


 사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기껏 외국 건축가들을 한국에 초청해서, 왜 그 나라 건축가들의 작품을 보여줘?? 

외국인들이 한국의 절과 고궁을 보면서, '우와 조선 쩔어, 고려 쩔어' 하는거 보고싶어!!! 


"어떤 이가 설계를 했는지 상관없이 지금 서울을 구성하고 있는 현대 건축물 중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고 그것을 이 여행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렇지, 어차피 이 사람들은 건축을 '업' 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지금도 활발히'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현대' 의 환경 안에서 현대의 건축물들이 어떠한 모양으로, 어떠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건축엔 국적도, 인종도, 성별도 없다.


"파리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루브르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는 중국계 미국인 L.M 페이가 설계했고, 퐁피두 센터는 영국과 이탈리아 건축가의 합작품이다. 라데팡스의 신개선문은 덴마크의 건축가 요한 오토 폰 스프레켈센이 디자인했다. 다른 나라 출신의 건축가들이 작업을 이끌었지만, 이것들은 엄연히 파리의 것이며 파리 시민의 자산이다."


"도시는 거대한 유기체다. 무엇이 어떻게 뒤섞일지 알 수 없는 용광로다. 

설계자가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서울의 건축이 서울의 것이 아니라는 시선은 버려야 한다.

DDP도 마찬가지다. 이 낯선 공간도 결국 우리의 것이란 이야기다."

 p. 107  



문득, 어떤 건축가분이 조선총독부를 헐어버린 일을 아쉬워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민족의 자긍심에 상처를 낸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 도시의 중요한 역사 하나를 없애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나는 조선 총독부 건물이 국립 중앙 박물관이던 시절 정말 많이 갔었고, 아주 많이 봤더랬지만, 우리 이후의 세대들은 그런 건축물이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민족적 자긍심은 그런 것으로 쉽게 무너지지도, 세워지지도 않는 것인데.


이 책은 DDP가 완공되기 전, 천문학적 건설비용과 그 기묘한 외관에 비판적인 기사들이 매우 많은 시기에 쓰여진 책이다.

저자는 그런 반발들을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했다. 그 와중에도, DDP안에 유적들을 보존하려는 모습들을 인상적으로 본 외국 동료들의 이야기를 싣기도 했다. 

이 뿐 아니라, 가깝게는 인사동 쌈지길과 복개된 청계천, 이화여대 서울캠퍼스부터 멀게는 한탄강 전곡선사박물관과 바다건너 제주도 돌 박물관까지 수많은 현대적인 건축들이 우리 땅 위에서 살아 움트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땅 위에서, 내 땅에서 나는 재료로 만들어진 건축물조차도 외국인이 설계한 건물, 한국인이 설계한 건물을 나누고 있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외국 설계사가 설계했다고, 그걸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뚝딱뚝딱 망치질 하는게 아니다.

외국 건축 사무소와 국내 건축 사무소가 긴밀한 파트너쉽 아래서 작업을 한다.

토질, 주변환경, 재료수급 등 실제로 '짓는' 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인부 한명까지 다 우리나라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리고 누가와서 누가 지었던들.

그 곳에 살고 있는 내가 주인이고, 내 삶의 공간인데.

이미 만들고 떠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알게 뭐람!!!

게다가 수년, 수십년 전 사람인데!!! 


다만, 이 집을 지은 사람의 마음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이 방향에 창을 냈고, 어떤 마음으로 이 기둥을 세웠고, 어떤 마음으로 이벽을 발랐을지.

그 어떤 창보다 많은 햇살이 들어오길, 그 어떤 기둥보다 튼튼하길, 그 어떤 벽보다 단단하게 버텨주길. 

건축들은 그래서, 우리 삶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그 어떤 생태계보다, 도시 생태계가 우리와 밀접한 이유다.


[휴먼 에이지] 에서 저자인 다이앤 애커먼은 '인류세'  인류sms '도시종' 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인류의 절반이 넘는 35억명이 도시에 몰려 있다. 2050년이면 도시가 세계 인구의 70퍼센트를 홀리리라고 내다본다. 이 추세는 밤하늘의 달처럼 엄연하고 산사태처럼 막기 힘들다. 2005년에서 2013년 사이에 중국의 도시 인구는 13퍼센트에서 40퍼센트로 치솟았다.(...) 이 추세라면 2030년에는 중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서 살 것이다. 

(...) 

영국은 1950년 무렵에는 바둑판처럼 배열된 도시들이 인구의 79퍼센트를 품게 되었다. 도시 거주자 비율이 92퍼센트에 달할 2030년이면 영국은 진정한 도시형 국가가 되어, 그보다 할 발 앞서 그렇게 변한 다른 나라들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인구의 90퍼센트가 도시에서 살고, 독일은 88퍼센트가, 프랑스는 78퍼센트가,'


이 줄줄이 통계의 바로 다음에 한국이 나온다.


'한국은 80퍼센트가 그렇다.' 

([휴먼 에이지] p.105)


우리나라는 이미 80퍼센트가 도시에 산다!!

이제 지구는 오직 자연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자연 생태계 뿐 아니라, 자연을 인간의 생활권 안으로 끌어들인 도시와 병존하고있다. 바야흐로 도시 생태계의 정착이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건축이 있다. 건물이 있다.

이러한 고민은 문명을 선도하는 소위 '선진국' 에서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전용되고 있다.

지하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운동에너지)과 발산하는 열에너지로부터 전기를 생산하는 건물이 있고, 그 어떤 에어 컨디셔너 없이 오직 건물의 구조만으로 공기의 흐름을 조정해서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건물들도 있다. 건물의 외장재 대신 거대한 수풀을 옷처럼 둘러입은 건물들은 도시 생태계의 중요한 테마다. 태양에너지와 바람에너지는 이미 정착되어 있는 발상이다! 

건축가들은 오직 예술적인, 또는 기능적인 면만 보지 않는다.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기능적인 효율성은 물론, 도시의 역사성과 도시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습관은 물론, 도시 생태계의 원활한 사이클을 살핀다. 

 

참 절묘한 타이밍에 두 책이 얽혔다.

거의 두달간 천천히 곱씹으며 읽고 있는 '휴먼 에이지' 에 끼어든 [봉주르 한국 건축].

[봉주르 한국 건축] 에서 소개하는 우리나라의 건축물 중 한국인이 설계한 건축물은 몇 안된다.

하지만, 모든 건축물은 한국에서 건설되었고, 거의 모든 재료들은 한국에서 나왔고, 거의 모든 건축자들은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거의'의 나머지는 외국인 노동자겠지. 그럼, 외국인 노동자의 비율이 높으면, 그건 외국인이 지은 건물일까? 

'쌈지길' 을 품고 있는 인사동 거리 재정비 사업,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청계천 정비 공사, 동대문 운동장 터에 내려앉은 번득이는 곡선의 DDP. 우리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공 건축들은 과연 서울의 도시 생태계를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건축물'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진만 보아도, 이 거대한 예술품에 정신을 내려놓을 곳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자연을 이기고도 살아남을 우리의 흔적. 문명의 조각. 그 안에 녹여내는 작가의 메시지.


아, 그러고보니, '러브*데스*로봇' 이라는 넷플릭스의 단편 애니메이션 모둠에 비슷한 작품이 있었다.

지구를 넘어 대기권도 넘는 행성급 규모의 설치미술!! 지구만한 캔버스라면, 그것은 회화일까, 건축일까??  


단순히 상상만을 넘어 공학적 설계를 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반드시 협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장르.

건축. 


새삼, 건축의 예술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더불어, 여행이라곤 1도 관심없는 내가 이 책을 한 권 들고 우리나라 각지를 여행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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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5 : 춘추에서 전국까지 이중톈 중국사 5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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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춘추전국시대' 라고 뭉뚱그려 배웠던 기억이 있다. 

춘추와 전국은 우리도 열심히 외웠던 '하. 은. 주. 진. 한...' 중, '주' 에 속해있는 시기다.

진시황이 출현하기 전까지의 그 시간들은 '춘추전국시대' 라고 배웠다.

하지만, 춘추와 전국은 완전히 분리된 시대였다.

애초에 시대정신 자체가 달랐고, 국가의 개념 자체가 달랐다. 

주는 수도가 변한 시기에 따라 서주시대와 동주시대로 나뉘는데, 춘추와 전국은 동주에 속한다. 


우선, 춘추시대에는 한명의 왕과, 수많은 제후들이 있었다.

봉건사회였다. 이를 '방국邦國제도' 라 한다.

천자가 제후를 임명하고 영지를 하사한다. 제후는 대부를 임명해 영지를 다스렸다. 

즉, 천하를 여러개로 갈라 제후들에게 분봉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국國'  방국이다. 제후들은 그 방국을 여러개로 갈라 대부들에게 분봉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가家'. 채읍采邑 이다. 이것이 바로 봉건이었다.

봉건의 결과로 천하, 국, 가가 생겨났다.

가와 국이 합쳐진 것이 방국이며, 방국들이 합쳐진 것이 천하였다.

천자 자신도 하나의 방국을 갖고 있었는데, 가장 높은 등급의 방국, '왕국' 이었다.

나머지 방국들은 다스리는 제후의 작위에 따라 공公국, 후侯국, 백伯국, 자子국, 남男국 이었다. 

가신이 대부를 떠받들고, 대부가 제후를 떠받들며, 제후가 천자를 떠받든다.

춘추 시대엔 왕이 오직 한명이었다. 전국시대와 가장 큰 차이가 이것이다. 


봉건제는 모든 제후들이 힘이 대등해야하고 그 제후들을 다스리는 군주, 왕의 힘이 가장 강한 상태로 균형을 이루어야 유지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방국들의 세력 균형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바로 이 시기에 철기 농기구가 발명, 보급됐다. 농지의 계획적인 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농경정책에 따라 지역별 채산성이 크게 달라졌다.   
독립채산 시스템이었던 방국들은 제후와 대부의 역량에 따라 경제력이 크게 차이나기 시작했고, 군사력과 결부되었다. 

공자가 쓴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 의 원년은 기원전 770년.  노魯 은공隱公 원년이다.

이 책에서는 정鄭 장공莊 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생모와, 동생과 왕권 다툼을 했던 이야기다. 이를 통해 춘추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대표적으로 알 수 있다. 

정 장공은 어머니와 동생의 쿠데타를 진압해냈지만, 전국 각지에서 군주 시해사건이 일어난다. 
위, 노, 송에서 차례로 내란이 일어났고, 이 나라의 군주들은 정 장공과 달리 유명을 달리했다. 


진은 이미 여러 갈래로 쪼개져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었고, 위, 노, 송은 내란으로 인해 내정이 피폐해 있었다.

반면, 정 장공은 어머니와 동생을 제압하고 강력한 권위를 손에 넣었, 주나라의 왕. 천하의 유일한 왕인 천자, 주 환왕은 상황을 오판했다.

정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주나라였지만, 주 환왕은 계속해서 정나라를 자극했다. 


결국 정 장공도 참지 못하고 제후로서의 예의를 지키지 않자, 주 환왕은 춘추시대 최초이자 최후의 친정을 감행했다.

진, 채, 위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기세좋게 정나라로 침공했지만, 오히려 정나라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래도 이 시기엔 천자를 위하는 '척' 했다. '존왕양이' 의 기치를 내걸었고, 주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주 환왕에게 상처를 입혔던 정 장공은 그를 생포하기는 커녕,  후퇴하는 적을 쫓지 않고, 오히려 제신들을 보내 적군을 위문했다.

이것이 '화하', 즉, 문명국의 도리였다.

비록 전쟁을 치르긴 했으나 주나라와 정나라는 엄연한 군신관계. 군주에게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하게 해준 것이다. 

이 전쟁으로 시대가 크게 바뀌었다. 군주국가. 천자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춘추시대의 핵심은 제후들이 천자를 끼고 방국들을 호령하고자 하는 '패업' 이었다.

패업으로 나가는 길은 '패도', 패업을 이뤄낸 제후는 '패주' 였다. 
춘추는 패도와 패업, 패주의 시대였다. 


춘추에 기록된 약 370여년간 패업을 이룬 패주들은 한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를 '춘추오패' 라고 한다.

제 환공과 진 문공, 초 장왕은 어느 설에서도 빠진 적 없는 패주였고, [순자],[왕패] 등에서는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을 을 더하고, [풍속통], [오백] 에서는 송 양공, 진 목공 을 더한다. 역대로 다양한 견해가 있어왔다고 한다.

이중톈은 이러한 경향을 '삼황, 오제, 삼왕, 오패, 이런식으로 3과 5의 짝을 맞추려는' 다소 억지스런 견해라고 주장한다. 

송 양공은 명예에 금이 가고, 결국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죽은 인물이고, 오왕 합려와 월왕 구천은 춘추시대 말기에 활약한데다 지방에 치우쳐 있었기에 제 환공과 진 문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엔 적잖은 간극이 있다. 
수십년에 달한다. 적은 간극이 아니다. 로마 공화정의 전환기랄 수 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서부터 카이사르의 죽음까지는 고작 70년에 불과했으니.  다만, 사료가 부족하여 그 사이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중톈은 춘추 시대를 "팔씨름으로 영역 다툼을 하고 동생이 많은 자가 큰형님이 되는 식" 이라고 표현했다.

패업과 패주에 대한 가장 재미있고도 간명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춘추 시대의 전쟁은 스포츠 경기와 흡사해서 외교적인 예의와 게임의 규칙을 중시했다." 
사신을 죽이지 않고, 부상자를 제외시키고, 상대가 진용을 갖추기 전에 공격하지 않고, 도망치는 상대를 쫓지 않고, 나이많은 병사는 포로로 붙잡지 않고 풀어줬다고 한다. 제후들의 전쟁은 힘을 과시하여 다른 방국들을 '동생으로' 삼는 것이었다. 많은 동생을 거느린 큰 형님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연히 대규모의 양민 학살은 커녕, 궤멸수준의 군인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전쟁의 목적이 부를 약탈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춘추 시대 초기엔 가장 비열한 짓으로 여겨지던 행위였다. 이런 식의 과시는 패업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패주로 인정받지 못했다. 비열한 군주는 비열한 부하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으나, 춘추 시대 말기에 이르러 100여개에 달하던 나라들이 20여개로 줄어들었다. 전국 시대로 가는 과정이었다. 대국들이 소국들에 독립권을 주고 단순히 '관리' 하던 시기는 지났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약한 국가는 강한 국가에 먹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저자는 국가의 형태는 오직 두가지라고 봤다. 

하나의 도시를 거점으로 삼은 '도시국가'와 여러개의 도시를 거느린 '영토국가'다.

이 관점에서 "춘추시대는 도시국가와 영토국가가 병존하던 시기였다."

패권국들은 영토국가였고, 나중에 그들에 병합된 소국들은 도시국가였다. 

하지만, 전국시대엔 그런 소국들이 없었다.

대국들이 작은 도시국가들 뿐 아니라 중간 크기의 영토국가를 합병하거나 위성국가로 거느렸다. 정나라는 한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위나라는 꼭두각시 국가가 되었다. 

화하에 속하지 않았던 '만이' 의 국가였던 초나라는 동주 시대에 이미 왕이라고 칭했지만, 전국 시대에 접어들자 북방의 나라들이 줄줄이 왕이라 칭했다. 결국 전국 시대가 3분의 1쯤 경과하자 공국 전체가 왕국이 되었다. 

  이제 천자의 제후국, 방국이 아니라 독립 왕국이 되었다. 

주나라는 쇠퇴를 거듭해 두개의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더이상 왕이라 칭하지도 못했다. 만이였던 초나라는 존왕양이조차 관심이 없었다.  

봉건제도 혹은 방국제도가 해체됐고, 천자가 제후를 봉하는일은 통용되지 않았다. 제후들이 스스로 정벌했고, 그 자체로 예악의 붕괴였다. 국제 질서는 무너졌고, 게임의 규칙 역시 무너졌다.  

주나라와 '왕실'이 무너졌고, 진나라의 '공실'(군주의 일가)이 와해되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존왕양이' 를 말했다. 

모두가 왕인 것은 왕이 없는 것과 같았다. 한 명의 왕. 천자가 남을 때까지 왕들은 전쟁을 계속 할 수 밖에 없다.

'존왕' 을 위한 유일한 왕이 되어야만 했다.


진나라의 상앙은 평소 교분이 있었던 위나라군의 총사령관 공자 앙을 친구의 이름으로 연회에 초대하여 사로잡고, 위나라군을 기습해 크게 승리했다. 이 전쟁으로 위나라는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도시국가 수준으로 작아졌다. 

이렇듯, 전국 시대는 음모와 배신, 하극상의 시대였다. 
예악은 물론, 도덕도 무너졌다.

'전쟁은 속임수' 라는 말이 당연하게 쓰였다. 

이웃나라보다 강해야 했다. 강해져서, 먹어 치워야 했다.
 오직 군사력만이 국력의 바로미터였다.

군사력- 즉, 군량미와 병력을 안정적으로 생산해낼 제도가 필요했다. 
이것은 춘추시대 초기부터 활발하게 논의되었는데, 우리도 너무나 잘 아는 '관중과 포숙아' 의 그 관중이 춘추시대의 초기에 '행정 관리' 의 개념을 정립했다면, 전국 시대에는 '상앙' 이 있었다.
 

저자는 상앙의 개혁에서부터 중앙집권체제와 군국주의의 뿌리를 읽어낸다. 

위나라 출신의 상앙이 진나라에서 행한 개혁은 경제와 군사를 포괄하는 전면적인 계획이었다.

진 효공은 상앙과 면담을 한 뒤, 그를 파격적으로 중용했다.

전국시대는 또한 말과 정치의 시대이기도 했다. 
맹상군 같은 이가 수많은 식객들을 거느렸고, 뜻 있는 식객들이 왕들을 찾아 떠돌았다.

이름난 천재들이 왕들로부터 구애를 받았다. 패도의 시대. 출신도, 신분도 상관없었다. 능력만 있으면 어디서든 중용될 수 있었다.


상앙은 엄격한 법치주의를 표방했다. 

"상앙이 재상이 되어 처음으로 반포한 법령은 '보갑제保甲制' 와 연좌법의 시행이었다.  

상앙은 가구를 기준으로 서민들을 편성하여 5가구를 보保로 삼고 10가구를 상호 연결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죄를 지어도 전체에게 연대 책임을 물었으므로 이웃들은 즉시 정부에 보고해야 했다.

고발하지 않은 자는 허리가 잘렸고 범죄자를 은닉해준 자는 적에게 투항한 자와 똑같이 취급했으며 고발자는 사형당한 자들의 수급 숫자에 따라 상을 받았다. 진나라에서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는 사람이 없고 산에서 도적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이웃이 이웃을 고발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이 시기의 진나라를 나치 독일과 비교한다. 

진나라 전체를 병영으로 나아가 감옥으로 만들었다. 사회에 남아도는 무력을 집중시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상앙이 길러낸 자들은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살인기계였을 것이다. 

상앙 자신도 기록에 의하면 700여 명을 사형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저자는 '위 기록이 신빙성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전혀 근거가 없거나 과장됐다고 증명해줄 이도 없다' 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앙이 철혈재상' 이었던 것만은 확실할 것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과거의 기록들을 접근한다. 


 이 책은 저자 후기에도 '정말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어디부터 어떻게, 무엇을 기준으로 덜어내야 하는가.

이중톈 중국사 시리즈의 강점은 철저한 사료 중심의 서술이다.

수많은 대중들에게 강연한 이력답게 그의 글은 담백하고 간결하다. 너무너무 쉽다.

대중들의 언어로, 대중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설명한다.

그리고, 언제나 기록을 설명할 땐 둘 이상의 사료를 비교하고, 그로 인해 도출해낸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구분한다. 


역사에 진실이 있는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있다' 또는 '없다' 고 명확히 말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명확히 존재한다.

예를들어, 어떠한 구체적 사건의 경우엔 여러 기록들을 교차 검증하여 '일어났다' 고 명확히 이야기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 이라는 영화처럼 말이다. 

황옥이란 인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록' 에 비춰도 명확히 단정지을 수 없잖은가.

사람의 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록들을 통해 공백을 합리적으로 '추론'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은?  기록에 드러난 인물들의 행동을 바탕으로 '추론' 할 뿐이다. 추론을 바탕으로 기록을 검증하고, 기록을 바탕으로 추론을 검증한다. 역사 기록은 컨텍스트 없이 텍스트를 받아들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각 권의 후미에 실린 저자 후기와 역자 후기를 읽는 즐거움이 쏠쏠한 이유이다.

저자와 역자들의 고뇌가 짧지만 풍성하게 실려있다.

사실 저자가 속내를 드러내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훌륭한 역사책은 역사관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혼이다.

역사적 식견도 없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뼈대다.

또한 사료와 역사적 감수성도 없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들은 각기 피와 살, 그리고 분위기에 해당한다.

분위기가 없으면 매력이 없으므로 역사가 수술대 위의 미라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역사적 감수성은 당연히 공감을 통해 얻어지지만 한 가지 기법도 필요하다. 그것은 현장의 환원이다.

현장을 환원해야만 당시 상황을 추체험할 수 있고 당시 상황을 추체험해야만 공감이 강화된다. 

바로 이것이 본서를 무미건조한 줄거리 요약이 아닌, 생생하고 감동적인 텍스트로 만들어준다."

p. 252  저자후기 

 

 

그래, 사실 나는 상앙이 만든. 

결국 거열형에 쳐해지고 마는 상앙이 토대를 닦은 진나라의 통일 과정을 보고싶었다.

(7권 진시황의 천하)


다음 권은 6권. '백가쟁명' 이다.

나는 춘추, 전국 시대를 읽으면서 양차 대전을 겪은 유럽의 철학자들을 떠올렸다.

이성이 인류의 기본이자 본성이며, 끊임없이 인간의 삶을 진보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대. 

하지만, 그 이성이 수만의 젊은이들을 떨어지는 폭탄 아래로 밀어넣는 것을 1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은 시대. 

춘추시대는 그보다 훨씬 전에 인간의 기본 도리라 여겼던 예악과 도덕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한 시대였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탄생했다. 

공자, 맹자, 순자, 묵자, 노자, 한비.


자, 이제 [춘추에서 전국까지]를 통해 예악과 도덕이 무너지고 천하가 무너지는 과정을 봤다.

다음은 그 안에서 예악과 도덕을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학자들. 무너진 천하를 돌이키고자 하는 이들.
그리고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내는 천재들을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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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7년 - 문(問):지승호 답(答):김의성
김의성.지승호 지음 / 안나푸르나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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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읽었던 대담집은 '촘스키, 누가 세상을 무엇으로 지배하는가' 였다.

얇지만 더디 읽혔고, 분량도 적었지만 오래 읽었더랬다. 그래도 유익하긴 했다. 촘스키의 책은 너무나 어려웠는데, 적어도 대담집은 쉬운 편이었다.  눈 앞에 대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최대한 상대방에게 맞춰서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다. 그 상대의 반응을 보며 단어를 고르고, 어려운 부분은 쉽게 풀며, 과거에 있었던 주요한 발언과 그 발언이 나오게 된 계기들을 주관적으로 상세히 풀어준다. 그리고 상대방은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역시 자신의 주관대로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나눈 이야기들이 차례차례 실린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주관이 실리고, 그걸 읽는 독자의 주관이 섞인다. 

소위 '객관적' 이라고 주장했던 그것들이 그 안에서 산산히 깨진다. 

수학 공식도 아니고.

철학과 사상에 객관성이 존재할 리 없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중성을 끼얹어볼까? 

대중성은 얼핏, 객관성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사람은, 객관적으로도 인기가 많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대중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도 성공했다고 여겨진다.

자신이 그 인기를 실감하지 못해도, 자신이 스스로를 실패했다고 주장해도 말이다. 


김의성 배우는, 나에겐 어느날 갑자기 툭 떨어진 배우였다.

[관상] 에서 처음 봤지. 고개를 한쪽으로 꺾고, 얼굴은 거의 마지막에 등장하지만, 아주 강렬했다.

그 다음은 [육룡이 나르샤]였다.

정몽주 역이었는데, 선하게도 보였다가, 비열하게도 보이는 마스크가 굉장히 신선했다. 마침 그 작품에서는 정도전 역을 김명민 배우가 했었는데, 사료에 따르면 정도전은 풍채가 당당하고 뚱뚱한 편이었다고 하니, 싱크로율롷는 조재현 배우의 정도전보다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김명민 배우와 김의성 배우의 조합은 고려 왕조의 온건개혁 세력이었던 정몽주와 급진개혁 세력이었던 정도전으로 무척 잘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나는 트위터를 거의 안하는 탓에 김의성 배우의 SNS 활약은 잘 몰랐다. 

하지만, 설리를 두둔하고, 굴뚝에서 농성하던 쌍차 노조원을 지원하는 1인 시위를 하고, 명치를 존나 쎄게 맞겠다는 공약 정도는 알았다.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책 소식이 조금 의아했지만, 쉽게 손이 갔다.


영화 감독이나 배우들은 인터뷰에 특화된 직업들이기도 하다.

이동진 평론가는 수많은 감독과 배우의 인터뷰를 담은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책을 펴내기도 했고, 한 때는 영화 잡지를 통해 매주 수많은 배우와 감독들의 인터뷰를 볼 수 있었다.  
 

[악당 7년] 은 그러한 숱한 인터뷰들 중 일부다. 단, 한 자리에 앉아 반나절, 한나절을 이야기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수개월에 걸쳐 꾸준히 만나면서 내용들을 쌓았다. 몇주만에 다시 만나 이어가기도 하고, 며칠만에 다시 만나 이어가기도 한 것 같다.

그 때문에, 전에 나왔던 내용이 되풀이되는 경우도 있고, 이야기의 화제가 촛불 집회에서 박근혜 탄핵으로, 대선으로, 문재인 당선과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연극은 우리 문화에서 가장 진보적인 예술장르였다.

많은 연극들이 노동집회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상영되었고, 정치적, 이념적으로 민감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김의성 배우는 그런 우리나라의 연극판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몸담은 연극판은 노동운동 현장으로 향했고, 그 와중에 두번의 결혼과 두번의 이혼을 했고, TV드라마와 연극배우로 데뷔하고, 영화판을 떠나기도 했다. 무일푼으로 떠난 베트남에서 드라마를 제작했고, 무일푼으로 돌아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로 자신을 영화계로 이끌었던 홍상수에게 다시 이끌려 [북촌 방향] 으로 컴백했다.

그 이후 몇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고, [관상] 으로 대중들에게 깊은 각인을 새겼고, [부산행] 으로 지난 해 백상영화대상 조연상을 받으며 대중적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그래선지, 김의성 배우는 배우이지만, 배우답지 않은 발언이 많았고, 당시 정부에 대한 비판도 숨기지 않았다. 

비록 주연급은 아니라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반응은 아니지만, 그의 발언과 캐릭터는 호불호가 명확하다. 두번의 결혼과 이혼 경력부터 설리, 홍상수에 대한 의견, 주진우와 이승환등 '강동모임' 과의 관계, 쌍차 해고 노동운동가들과의 관계, 베트남 국민 드라마의 제작자, 여러 연극단과 얽힌 배우들과의 인연 등 상당히 광범위하게 까고 씹을 거리가 넘치기 때문이다. 

지승호 인터뷰어와의 대담을 통해 그런 이야기들이 보다 넓고 깊게 조망된다.

특히 '연기철학' 을 묻는 대화에선, '그런건 없다' 고 말하지만, 그가 살아온 삶 자체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과정 속에서 충분히 묻어난다. 


김의성 배우의 어린시절부터 50을 넘은 현재까지, SNS, 직접 겪은 노동운동과 메갈리안, 연극판, 영화판 스텝들과 함께 한 배우들의 이야기, 결혼관과 연애관, 연기와 철학, 나아가 예술관까지. 

차분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고, 개인적으로 나와 생각이 비슷한 부분들이 많았는데, 그 부분들을 논리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부분들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통해 대담을 읽는 재미가 생겼다.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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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10 : 삼국시대 이중톈 중국사 10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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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든 정치투쟁은 근본적으로는 다 이익을 둘러싼 투쟁이다. 이익을 다투면서 의를 얘기하는 것은 허풍과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위선' 이다. 이것이 바로 [삼국연의]의 병폐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씨본 [삼국연의]의 문제는 역사의 사실을 바꾼 데에 있지 않고 역사의 본성을 바꾼 데에 있다.

역사의 사실은 바꿔도 되지만 본성은 바꾸면 안된다."


"앞부분은 조조와 원소의 노선 투쟁이고 뒷부분은 조조, 촉한, 동오의 권력 투쟁이다. 나중에 삼국이 하나로 통일된 것은 역사의 원래 추세로 돌아온 것일 뿐이다. 그 추세를 가리키고 그 뒤편의 깊은 의미와 지배적인 힘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의 임무다."


 p. 263. 저자 후기 중.



중국 문화권에 걸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비, 조조, 손권의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적어도,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나, 영화로도 수차례 만들어진 적벽대전, 제갈량이 등장하는 삼고초려 정도도.

우리가 자주 쓰는 고사성어의 대부분도 연의에서 빌려온 것들이 많다. 

헌데, 중국 역사를 크게 나눌때 삼국시대는 없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때 비록 대충 배우는 것일지라도 중국 역사를 겉핥기로 싹 훑는데, 삼국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진시황이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하고, 항우와 유방이 패권을 놓고 싸우다가,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고, 한나라가 당분간 쭉~ 가다가 위진남북조시대가 도래한다. 삼국시대는 이 한나라와 위진남북조 시대 사이에 껴있다. 

따지고 보면 진나라 말기, 항우와 유방이 초나라와 한나라로 패권을 다투던 시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장기놀이를 통해 각인된 것 처럼, 삼국시대도 나관중-모씨본의 [삼국연의]를 통해 각인된 것이다. 

이 책은 면밀히 말해 삼국시대의 전반은 후한에, 후반은 위진남북조에 속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조조는 자신이 죽을때까지 황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한나라 황제를 '끼워' 제후들을 호령했다. 한 황조가 쭉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비가 제위에 오른 후, 뒤이어 촉의 유비가 제위에 올랐고, 오의 손권이 제위에 올랐다. 

조비가 제위에 오른지 45년뒤인 265년에 위가 망했고, 유비가 제위에 오른지 42년 뒤인 263년에 촉이 망했다. 손권이 제위에 오른지 51년뒤인 280년에 오가 망했으니, 한 시대로 통칭하기엔 너무 짧았고, 무엇보다 시대정신의 전환이 나타나지 않았다.

조조와 제갈량은 법가를 통해 유교 중심의 한나라의 정치를 뒤엎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대다수의 사족들은 한나라의 초기 정치로 복귀하고자 했다. 

저자는 천하가 세 나라로 변한 원인도, 조조와 제갈량, 원소가 실패한 원인도 그들이 추구했던 사상이 시대가 바라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수당 이후의 정치 노선은 원소의 '유가적 사족' 도 조조의 '법가적 서족' 도 아니고 '유가적 서족' 이나 유, 불, 도를 아우리는 서족지주였다.  

 하지만 그것은 위진남북조시대에 369년간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뒤에야 실현되었다."

p.253

즉, 저자는 삼국시대가 흥미본위로 각인된 것에 대해 심심한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이지, 시대가 대중들에게 크게 각인된 것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대중들의 관심과 흥미를 위해 지나치게 윤색된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이 책이 정말 재미있게 읽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연의의 대표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시대적으로 추론하는 방법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 인물의 한 사건과 인평에 대해 최소한 두가지 이상의 판본을 비교, 대조하는 방법으로 전후를 추론하고, 결론을 도출해낸다.

연의 안에서 과장되고 윤색된 부분을 도려내고, 사실을 읽는 방법을 소개하지만, 책 말미 저자의 말을 통한다면, 저자는 결코 [삼국연의]를 다시 읽기를 권하지 않고 있다.(ㅋㅋ) 
당연히 유비나 조조, 제갈량, 손권 등에 대한 지나친 비하는 전혀 없다.

그들이 했던 선택들이 충이나 의가 아닌,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흐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일종의 '시대적 재평가' 를 권하는 정도다. 연의의 팬들이 열폭할 이유는 전혀 없는 정도. 

서두에 언급했듯, 저자는 연의가 시대정신을 왜곡하고, 흥미본위의 역사 컨텐츠는 무의하다고 설파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저자가 역사와 전혀 무관하다고 언급한다면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작가가 없어서 문제인 것이지, 라며.)

[삼국연의]를 그 대표적인 사례로 도마위에 올린 것이다.


우리가 읽는 [삼국연의] 는 삼국시대에 쓰여진 책이 아니다.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약 1500년대인 명나라 시대. 무려 1200여년 뒤에 쓰여진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널리 퍼진 것은 1600년대 후반인 청나라시대 모성산, 모종강 부자가 수많은 주석을 붙였을 대라고 한다. 

저자는 삼국연의가 그 과정을 통해 역사의 본성이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불현듯, 우리 주변의 수많은 역사소설들이 떠올랐다.

가끔 지나친 국수주의와 배타주의에 젖은 소설들이 '역사' 라는 이름으로 출간되는 것을 본다.

심지어, 교과서까지. 

대중들의 시각에 영합하는 짓은 작가라면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다. 심지어, '실제 역사와 무관할리 없다' 고 주장하는 역사소설을 집필하는 작가라면 더더욱. 독자를 특정하고, 그 독자들의 입맛에 따라간다면, 그 시대엔 인정받을지 몰라고, 다음 시대엔 반드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다. 심지어, 그 독자가 대중이 아닌, 권력자라면 더더욱 안될 것이고.

(반면, 이중톈이라는 학자가 중국 관영매체인 CCTV의 TV강연을 통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기에, 중국 당국에 의해 키워진 어용학자라는 의심을 사고 있다는 건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 역시 후대에 평가받겠지.)   

그런 의심과는 별개로, 그의 역사서는 너무너무 재미있다. 
'이중톈 중국사' 는 총 16권에 달하는 출간 예정 목록 중, 이게 10권째의 책이다.

10권의 목록 중 가장 잘 아는 분야를 먼저 골랐다.

다음으로는 시황제의 진나라가 가장 흥미가 돋는다. 여불위와 영정의 이야기 역시 대중들에게는 아주 많이 알려진 인물들이니 이중톈 박사가 산산히 깨주겠지!! 
하지만, 좀 더 내려가서 춘추 전국시대인 5권부터 다시 차근차근 읽어볼 셈이다.

이중톈이라는 사학자가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것이, 공자와 맹자를 한 테이블 위에 올린 '백가쟁명' 강좌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아마 제 5권인 '춘추에서 전국까지'  역시 그 기조가 유지되겠지. 

역사서지만 정말정말 쉽고 재미있다.

대중 강좌에 익숙한 사람이어선지, 시간의 흐름에 구애없이 명확한 주제별로 짧게짧게 이어가는데, 굉장히 이해가 쉽다.

물론, 이 저자가 일부러 아주아주 잘 알려진 인물들을 도마위에 올리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5권부터 10권까지 올라오다 보면 11권.12권도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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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0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조는 죽는 날까지 헌제를 끼고 돌면서,
한왕조의 충신이라는 코스프레를 했죠.

아마 찬탈자라는 오명은 쓰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뭐 그런 오명은 선양이라는 형식
으로 아들에게 갔지만 말입니다.

나관중에 그렇게 추켜 세우는 유비 역시 지방
군벌에 지나지 않았다는게 현실 아닐까요.

그나저나 16권이나 된다고 하니 징하네요.

열혈명호 2018-08-27 18:02   좋아요 0 | URL
앗 레삭매냐님 댓글 이제 봤어요! ㅋㅋㅋ 죄송죄송.
유비, 손권, 조조는 물론 제갈량, 곽가, 가후, 사마의, 순욱, 원술에 대한 색다른 풀이들이 있어서 재미있더라고요. 특히, 당시 지방 호족들이 가장 싫어했던 부류인 조조에게, 당대 가장 명망있는 선비집안이었던 순욱이 가세한 이유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흥미로웠어요.

참고로, 이 시리즈는 아마 국내에선 16권 분량만 계약이 되어있나봐요.

중국에선 이미 30권 가까이 나왔대요;;;;
 
제1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
마이클 하워드 지음, 최파일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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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에 대해 흔히 '사라예보의 총성' 정도로 알고 지나간다.

1914년 6월 28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가 후원하는 흑수단이 훈련, 무장시킨 십대 테러리스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다.

발칸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화약고였다.

수많은 민족들이 얽혀있었고, 지리적으로도 중요했다.

수많은 열강들이 얽혀있었고, 작은 나라들과 큰 나라들이 위태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페르디난트의 암살로 촉발된 위기는 발칸 반도에서 발생하여 열강의 개입으로 평화롭게 해소된 이전의 대여섯 차례 위기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보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이제 세르비아를 확실히 제압하기로 결심했다.

수많은 주변국가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통일된 독일 제국은 프랑스의 자금을 받아 대규모 철도 부설 사업과 동원 계획을 수행 중이던 러시아가 1905년의 패배(러일전쟁)에서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일찌감치 전쟁을 치르는 편이 낫다고 계산했다. 프랑스에서는 호전적 민주주의가 득세하며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고, 러시아에서는 범 슬라브주의 여론이 전쟁을 강하게 압박했다.


이 책은 1914년, 전쟁 직전의 유럽을 전반적으로 훑어가며 제1차세계대전을 개괄한다.

20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 안에 1914년 전쟁직전부터 15~16년의 소모전, 미국의 참전과  18년부터 시작되는 당사국들의 강화가 합의에 이르는 과정까지 제법 꼼꼼하게 담아내고 있다.

단순히 전황이나 큰 전투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기병대의 몰락과 포병 전술의(관측) 발달과정, 탱크의 개발과정과 전투기 활용성의 변화(항공사진)는 물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아우르는 폭넓은 서술로 '전쟁' 그 자체를 과감하게 파헤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도입부다.

당시 유럽 상황을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중심으로 간명하게 짚어내는데, 서로가 어떤 관계로 묶여있는지, 어떤 조건 하에서 어떠한 합의들로 얽혀있는지 정말 쉽게 풀어놨다.

사실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들을 보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도입부다.

러시아의 범 슬라브 민족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체첸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아르메니안들과 오스만 투르크(터키)와 중동 민족들의  갈등상황, 나폴레옹의 복고왕정이 다시 무너지며 혁명과 반혁명파로 철저히 분열된 프랑스,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에서 광대한 자원과  인구로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존재감을 과시하는 러시아,  그리고 가장 복잡한 통일 독일.

민족주의가 전쟁으로, 나아가 군국주의로, 왕조로 묶여있던 민족들이 국가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들이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작고 얇은 책이지만, 부록도 충실하다.

당대의 국경선과 서부 전선, 중부 전선의 제법 상세한 지도들은 물론, 원저자와 역자가 추천하는 1차세계대전에 관련된 많은 책 목록까지 있다!

'첫단추 시리즈' 특유의 작지만 훌륭한 퀄리티의 도판도 빼놓을 수 없고.

개론서로는 더없이 좋은 텍스트다.



새삼, 이런 요약 정리본으로 한국전쟁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솜 전투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잘 알아도, 흥남철수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그만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물론,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당대 대한민국의 상황과 2차 세계대전을 막 끝낸 주변 열강들의 대치상황,전략, 전술의 시험장이 되었을 수많은 전투들, 중국이 참전하기까지의 과정, UN연합군의 창설과정, 미-소 냉전체제까지 아우르는 뜻깊은 텍스트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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