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문학동네 소설상 17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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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가 아직 국민학교였던 무렵, 우리 반에도 지능지수가 약간 모자란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때는 그렇게 모자란 아이는 반 아이들이 다 조금씩 도와주는 분위기였다. 학기 중간에 아이들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이 끝나면 선생님은 짝바꾸기를 실행하셨었는데, 그 여자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짝으로 하게 해주고, 그 여자아이와 집이 가까운 아이들을 주변에 앉게 해서 자연스럽게 등하교를 챙겨줄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여자아이에게 찍힌 남자애는 무슨 잘못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땐 어린 마음에도 다들 배려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그때 그 여자아이가 좋아하던 남자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도 기억난다. 

 "어떠니, 네가 짝 해줄래?"

 남자아이는 조금 고민하더니, 그 여자아이 옆에 가서 앉았고, 그 여자애는 조금 부끄러워 하며 엄청 환하게 웃었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그리고 난 그 여자아이와 집이 가까웠기에, 역시 그 여자아이와 집이 가까운 다른 여자아이와 짝이 되어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해 내가 집안 사정으로 다른 학교로 전학 갈 때 까지 우리는 자연스레 학교 안팎에서 자주 어울렸더랬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세명의 주인공 중 한명인 '일우' 도 지능지수가 약간 모자란 아이다.

하지만, 사람이 달랐던 건지, 아니면 세상이 달라진 건지. 일우는 보호받기는 커녕 학대당했다. 그렇게 깊은 상처를 가지고 안으로, 안으로 자꾸 파고 들게 된 일우. 나는 국민학교 이후로도 쭉 그렇게 지능지수가 약간 모자란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런 친구들은 주변에 굉장히 많다. 굳이 만나려고 하지 않아도, 한 학년에 서너명쯤은 있었고,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간 그 아이들 중 한명과 한 반이 될 확률은 생각보다 높았으니까. 20세 이후 나름 열심히 활동했던 교회 청년부 안에도 그런 형이 한명 있었다. 

7~10세 사이의 지능지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서 잘 챙겨주며 사회성을 길러주면, 지능지수가 15~18세 정도까지는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당연히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일반인 수준까지는 못 되더라도, 꾸준히 성장한다.

단지, 그 속도가 느릴 뿐이다. 일우는 그 때문에 가족들에게 학대 당하고, 동네에서 학대당하고, 학교에서도 학대당했다. 

애초에 남들과 동등한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들인 세오시장 상인협회 총무 정기섭과 네오 프로덕션 PD 박상운은 서로의 꼼수가 맞아 떨어지면서 [더 챔피언] 이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일우가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면서 세명의 인생이 맞물리기 시작한다.

 최근 우리 나라의 방송용 TV쇼들은 그야말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천국이다. 대부분의 방송사는 동일한 플롯, 심지어 소재마저 동일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고, 소재만 조금씩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여러개가 난립하고 있다. 이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치열한 경쟁을 담보로 성공을 꿈꾸는 수많은 도전자들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많고, 문의 갯수는 적다 . 문을 통과하기 위해 옆 사람보다 잘해야 한다. 문을 통과할 때 마다 다른 문이 나타나고, 그 수는 점점 더 적어진다. 단순하게 말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시종일관 발랄하고 경쾌한 필치로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들을 그려나간다. [더 챔피언] 이라는 프로그램 안에 속해있는 일우도, 프로그램을 만든 기섭과 상운도 모두 똑같은 상황이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외길위의 상황. 모두 큰 성공을 바라지도 않았고, 뭔가 대단한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 뿐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회는 거짓말처럼 왔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와 함께, 균형을 이루며 공생의 모습을 하고 있던 상운, 기섭, 일우의 상황 역시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같은 형태로 흘러간다. 세 명이 모두 성공의 달콤함을 맛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셋은 서로를 물고 늘어져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하고 만다. 서로에게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 큰 야망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살기 위해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작품은 아주 잘 만들어진 한편의 블랙 코미디 영화처럼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을 경쾌한 필치와 짜임새 있는 이야기로 담아냈다. 무엇보다 작가의 메시지가 뚜렷하고 군더더기가 별로 없다는 점이 매우 큰 미덕이다. 문장은 간결하고 재기 발랄하면서도 전달력이 뛰어나고, 캐릭터들은 굉장히 입체적이다. 그 와중에도 [더 챔피언]이라는 서바이벌 게임의 소재가 되는 '쓰리컵 대회' 자체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무맹랑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얼개 속에서 입체적인 캐릭터들과 만나 놀라울 정도의 현실감으로 가공된다. 그것이 작가의 문장과 캐릭터들의 적절한 균형, 적당한 밀고 당기는 호흡과 어우러져 대단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특히, 공생의 모습으로 시작된 세 주인공들의 구도가 서바이벌로 변해가는 과정의 인과관계가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우가 맞이하게 되는 클라이맥스가 너무 안타깝다. 결국 생존을 위해 다시 공생을 시도하는 박상운, 정기섭, 김일우이지만,    일우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현실에서 해갈 할 수 없는 법 아니던가. 


순간 김일우는 여기가 어디고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 잊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붉은 방.

나가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슬퍼. 불쌍해. 한심해.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뭐가 될까.

그때 멀리 어딘가에서 쾅 하고 커다란 빛이 터졌다. 순간 김일우의 심장도 펑 하고 터졌다.

심장이 터지며 가슴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도망쳐!"

p. 297

 

일우가 들은 소리들은, 그 소리들로 느낀 세상은, 그리고 그 안에 속해있는 자기 자신은, 과연 어떻게 느껴졌을까? 











[더 챔피언]의 티져 포스터를 만들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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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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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미국 문학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로빈쿡, 존그리샴, 리처드 매드슨, 스티븐 킹은 물론, 헤밍웨이, 레이몬드 카버, 토니 모리슨, 하퍼 리, 폴 오스터, 코멕 매카시는 물론 최근에 접한 마이클 셰이본과 팻 콘로이, 조너선 샤프런 포어 까지. 그래픽 노블 스토리 텔러와 드라마 작가들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할거다. 엔터테인먼트가 가득한 장르에서부터 르포타주에 가까운 리얼리즘까지. 

 뿐만 아니라 문학적 표현의 폭도 굉장히 넓다. 언제나 참신한 화법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실험적인 표현들이 시도된다. 아, 그러고 보니 잭슨 폴록,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도 미국 문화의 범주 안에 넣어야 겠구나. 다양한 문화가 모인 덕인지 미국 예술은 정말 다양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다양하다. 문학에서도 그러한 특징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리의 편협한 시각 속에서 "이것도 책이야? " "이것도 소설이야?" 라고 부를만한 작품들은 대부분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일 것이다. 아 난 물론  가카같은 '종미'는 절대 아니다. 미국엔 가본적도 없고, 미국 친구도 없고, 사실 그닥 가고싶지도 않다. 하지만, 미국 문화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 만큼은 존중하고, 좋아한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에서 보았던 깜짝 놀랄만한 파격적인 '문학적 표현' 들을 [깡패단의 습격] 안에서도 여지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깡패단의 습격]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모든 세대에 고루 어필할만한 포인트가 있었으며, 메시지가 좀 더 보편적이었다는 점이 '2011 퓰리처 소설상' 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을 터다.   



작품상 가장 중요한 인물, 아니, 이 작품 안에서 이런 표현은 의미가 없을터다. 작품상 기준점이 되는 인물인 '베니' 는 음반 회사의 프로듀서이다. 밴드를 발굴, 기획, 관리는 물론 전체적인 활동의 컨셉까지 잡아주는 역할이다. 베니의 비서인 '샤사' 가 '알렉스' 와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내용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각 챕터별로 시간과 화자가 끊임없이 바뀌게 된다. 첫 챕터가 현재의 사샤의 이야기이고, 두번째 챕터는 첫 챕터보다 과거의 베니의 이야기이다. 세번째 챕터는 갑자기 베니가 고교시절이었을 무렵의 '리아' 라고 불리는 소녀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네번째 챕터는 리아가 친구 조슬린, 그리고 베니의 밴드가 함께 만났던 '루' 라는 늙은 음반 프로듀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시간은 세번째 챕터보다 훨씬 과거로 젊은 시절의 루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매 챕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간과 공간, 화법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주인공 시점으로, 3인칭과 1인칭을 왔다 갔다 하고, 각종 도표로 꽉 찬 PPT 화면 같은 연출로 한 챕터가 이어지기도 하고, 기사와 편짓글이 반씩 나뉘어 실려있는 연출도 있다. 한마디로, 집중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흐름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전 챕터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세 챕터쯤 뒤에 흘러가듯 지나가기도 하고, 몇 챕터 전 이야기 안에서 지나가듯 흘러간 인물이 이번 챕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앞에 나왔던 사건의 원인이 훨씬 뒤에 나타나기도 하고, 챕터 별 캐릭터의 행동 요인 역시 챕터 곳곳에 파편처럼 흩어져있다. 챕터가 총 19개인데, 19명의 화자,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정말 읽기 까다로운 작품이다. 이런 비슷한 화법을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이름은 빨강]의 경우엔 서사의 흐름에 따라 화자만 바뀌는 형식이어서 읽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깡패단의 습격] 은 [내 이름은 빨강] 보다는 좀 더 까다롭다. 


 집중해서 책을 읽다보면, 예전에 한때 인터넷 상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케빈 베이컨 놀이' 가 떠오른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일군의 학생들이 '케빈 베이컨' 과 함께 다른 배우들을 함께 출연했던 영화로 연관시키는 놀이에서 시작된 이 법칙은, 최대 4다리만 거치면 모두가 케빈 베이컨과 연관이 되는 재미난 현상을 보여주었더랬다.

예를들어, 마이클 더글라스와 케빈 베이컨을 연결하려 해 보면, 마이클 더글라스는 블레어 브라운이라는 배우와 센티널이라는 영화에 함께 출연을 했고, 블레어 브라운은 러버보이라는 영화에 케빈 베이컨과 함께 출연을 했다. 마이클 더글라스는 두단계만 거치면 케빈 베이컨과 연결된다. 재미있는 점은 어떤 무명 배우를 떠올려도 거의 네 단계 안에 다 연관이 된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송혜교 같은 국내 배우를 떠올려봐도 된다.

송혜교는 이병헌과 '올인'이라는 드라마에서 함께 연기를 했었다. 그리고 이병헌은 '나는 비와 함께 간다' 라는 영화에서 엘리아스 코티즈와 함께 연기를 했고, 엘리아스 코티즈는 노보체인이라는 영화에서 케빈 베이컨과 연기를 했다.

이렇게 송혜교도 3단계만 거치면 케빈 베이컨과 연관이 된다. 

이 놀이는 여러 대학에서 SNS의 파급력을 연구할때 비슷한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페이스 북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나도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 놀이에서 '함께 출연한 작품' 을 '함께 다닌 학교' '함께 다닌 교회' '함께 가입한 온라인 커뮤니티' 등으로 연관시키면 엄청나게 크고 복잡한 거미줄 같은 인맥을 발견할 수 있을터다. 

이 작품은 이런 사회 현상을 너무나 절묘하게 잡아내고, 묘사하고 있다.

사샤의 이야기로 첫 문을 연 [깡패단의 습격]은 케빈 베이컨 놀이와 비슷하게 챕터와 챕터; 인물과 인물의 이야기가 물리고 물린다. 사샤가  모시던 상사 베니, 베니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던 리아, 리아와 잠깐 인간적인 관계가 있었던 늙은 프로듀서 루, 루가 젊은 시절 낳은 아들 롤프, 루가 정부였던 민디, 아들 롤프, 딸 샬린과 함께 떠났던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죽어가는 루가 임종을 앞두고 불렀던 과거의 친구들, 그 자리에 참석한 리아, 학창시절 리아, 베니 등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던 스코티...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간다.  


우연같은 만남은 필연적으로 또다른 우연을 낳는다. 우연과 우연 속에서 인연과 인연이 연결되고, 촘촘하게 얽힌 인연과 우연의 거미줄 사이로 또다른 우연이 걸려드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결과는 원인을 낳고, 원인은 결과를 낳으며, 그 결과는 또 다른 원인을 낳는다. 필연적으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이 모두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 하나의 결과는 여러개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맞아 떨어졌을 때 발생되는 경우가 많다. 원인들이 우연히 결합되고, 그 결합된 것들이 우연히 결과를 도출해내고, 그 결과 역시 우연히 다른 무언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란 그렇게 우리에게 결코 선택권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는다.  


 누구나 늙는다

그리고, 누구나 죽는다. 

 시간의 흐름은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빨라진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마치, 죽지 않을 것만 같이 느껴진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다른 세상 사람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영원히 내 편일 것만 같고, 영유하는 모든 시간들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젊음을 지나 육체가 서서히 쪼그라들어가는 시점이 찾아오면, 시간은 더이상 내 편이 아니고, 모든 시간들은 칼날처럼 육신을 쪼아대기 시작한다. 무덤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가다, 옆에 놓여있는 삽을 주워들고 열심히 웅덩이를 파기 시작하면, 언젠가 그 웅덩이 위로 종잇장처럼 팔랑대며  고꾸라질 터다. 삶이 결국엔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젊음이 눈부시게 느껴진다. 

 그래, 어쩌면 [은교]의 이적요 처럼, 그런 눈부신 젊음 앞에 눈이 멀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젊음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질터다.

아아, 그래서 제니퍼 이건은 "시간은 깡패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우리는 깡패같은 시간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 비참하게 쪼그라들어 죽어야만 하는걸까?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들이 수많은 결과를 낳고, 그 수많은 결과들이 또다시 수많은 행동 요인이 되어, 스코티는 시간이라는 깡패와 대면하게 된다. 한때는 화려한 뮤지션이었으나, 이혼당하고 노숙자로 살아가던 스코티 하우스먼.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p.451


 우리는 필멸의 존재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 죽음으로 가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째깍째깍. 시간은 우리의 모든것을 앗아간다.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누구와 우연히 만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다른 누구를 우연히 만나고, 또 사랑하고, 또 미워하게 될 것이다. 사실, 시간이라는 깡패는,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늙더라도, 약해지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고, 자라는 법이니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시간이라는 깡패는 우리에게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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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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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완벽한 서사. 처음부터 끝까지 꽉 조여진 탁월한 완성도. 무엇하나,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이야기였다. 

작품을 읽어가는 내내 기리노 나쓰오와 미야베 미유키같은 작가가 떠올랐다. 태생은 장르 문학이었으나, 그 틀을 가볍게 넘나들어 문학적 완성도와 장르적 재미를 자신의 품 안에 너끈히 쓸어담는 탁월한 이야깃꾼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작품은 전형적인 '장르문학' 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최근 큰 주목을 받았던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나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 을 동일한 선 상에 놓고 가늠해 볼 수 있으리라. 

국내 문학은 장르문학의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대여점에 가보면 커다란 공간의 한쪽 면에 두겹 세겹으로 꽂혀져있는 수많은 킬링타임용  장르문학들을 목도할 수 있고, 장르 문학 작가들은 마치 70~80년대 대본소 만화 공장처럼 판타지, 무협 소설을 찍어내듯 써나가고 있다. 문학판에서는 당연히 이들을 천시하고 홀대한다. 'SF적' '판타지적' 이라는 애매모호한 형용사를 남발하면서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바득바득 나누고 있다. 'SF적' 상상력이 사용되었으나 이 소설은 절대 SF소설 같은 장르문학이 아님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거다. 

애초에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과연 어떤 잣대로, 얼마나 객관적인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느냐의 문제는 차치하자. 애초에 나는 그런걸 뭣하러 나누냐는 쪽의 사람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구태여 그런 틀에 맞춰 구분하자면, 분명 [화차] 나 [아웃] 과 같은 포커스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사건이 있고, 미스테리가 있으며, 액션도 있고, 복수와 과거와 비밀도 있다. 


제목처럼 이 이야기의 시작은 '7년전 어느 날 밤' 에 일어난 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야구선수 출신이었던 보안업체 관리팀장 '최현수' 가 가족들과 함께 '세령호' 라는 곳의 '세령댐' 에 댐 보안 팀장으로 부임 하면서부터이다. 현수에게는 아내 '강은주' 와의 사이에 '서원' 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현수의 가족은 댐 직원들을 위한 사택에 살게 되는데, 여러 이유때문에 부하직원인 '승환' 과 한 집에서 살게 된다. 방은 둘뿐인 작은 아파트여서 안방은 현수와 은주가, 작은 방에서는 아들 서원이가 승환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세령댐 직원을 위한 사택은 세령 수목원 내에 있었고, 그 거대한 부지는 치과 원장인 '오영제' 의 것이었다. 대를 이어온 거대한 동산과 부동산, 지방의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역시 그 지방의 유지로 자라난, 마치 한 지방의 영주처럼 군림하게 된 오영제에게는 아내 '문하영' 과의 사이에 '세령' 이라는 딸이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정석대로,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사고였다. 안개가 자욱한 밤, 술에 잔뜩 취해 자가용을 몰고 부임지로 향하던 현수가 영제의 딸 세령을 차로 친 것이다. 그리고 현수는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엉망진창이 된 세령을 확실히 죽여 아무도 없는 세령호에 던져버린다. 


 이야기는 7년 후.

서원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사건 당시 서원은 초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꼬마였다. 살인자의 자식으로 세상에 낙인찍힌 서원의 삶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친척의 집을 전전하다가, 그 시절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던 승화을 찾아 함께 지내게 된다. 서원에게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낙인 '살인마의 아들' . 그렇다. 현수는 연쇄 살인마로 사형을 앞두고 있다.

 과연 7년 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 뒤 7년동안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걸까? 


'범죄자의 가족' 이라는 소재는 장르문학의 천국인 일본에서는 꽤나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단순히 사건 - 범죄자 - 형사 혹은 탐정 이었던 미스테리 추리물의 구도는 장르문학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이른바 '사회파 추리물' 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등장해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 요시다 슈이치의 [사요나라 사요나라]등은 살인자의 가족들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면서 실제로 일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서원' 도 그런 범죄자의 가족이다. 말 그대로,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격리되고 고통을 당한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연좌제' 가 실제로 존재하는 시절이 있었다. 탈북자의 자식은 고스란히 탈북자와 마찬가지 취급을 당하며 '빨갱이' 로 낙인찍혀 사회의 주변부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서원 역시 그러한 연좌제와 같은 형벌을 당하게 된다. 


이 작품이 시종일관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며 긴장의 끈을 놓치 못하게 만드는 요소는 '세령을 죽인 현수'보다 '딸을 잃은 영제'가 더 나쁘고 더 악독한 놈이라는 데에 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현수의 순간의 실수가 점점 더 아쉽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현수는 순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고통스러운 유년기를 이겨내 프로 야구로 성장했으나, 정작 중요한 순간에 행운은 그를 비껴가기만 했다. 은주와의 만남조차도 불운에 가까웠고, 세령을 차로 친 것도 불운이었다. 그는 천성이 순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반면, 딸을 잃은 영제는 현수의 완벽한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유년시절부터 풍족했고, 약삭빠르고,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는 사람이었다. 성정이 잔혹했고, 아내와 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싸이코 패스 기질이 다분한 놈이었다. 

 결국 독자들은 가해자, 즉 살인자의 편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기 때문에 심한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것과 함께 위에서 언급한 서원이 범죄자의 가족이기때문에 당하는 부당한 사회적인 배척 또한 불편하게 느끼게 되고, 그 사건이 있은 지 7년간 서원의 등 뒤에 어른거리는 위태로운 검은 그림자에 또 불편하게 된다. 

이러한 불편함들이 작품 내내 독자를 잔뜩 긴장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고, 세련된 액자식 구성의 연출은 이야기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면서 독자들을 강력하게 빨아들인다. 


 시간의 흐름은 서사에 맞게 차근차근 진행되지만 시종일관 꿈과 현실, 상상과 실재를 복잡하게 오고가며 사건들의 인과관계와 등장인물들의 행동 요인을 섬세하고 치밀한 심리묘사로서 풀어낸다.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품 여기저기 뿌려져있던 미스테리적인 요소들이 차근차근 모여나가며 클라이맥스의 대폭발을 예고한다.   


근래에 읽어본 미스테리물 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완성도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확실히, 정유정 작가도 정말 엄청난 이야깃꾼이다. 완급조절도 훌륭하고, 달음박질 치는 듯 힘있는 문장력도 참 좋다. 그 와중에도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인물묘사가 철저한 사전 준비작업을 통해 태어난 치밀한 디테일과 어우러져 엄청난 리얼리티를 뿜어낸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테리-추리 장르물의 결정판 처럼 느껴졌다. 수년간 그 장르만 파온 미야베 미유키나 기리노 나쓰오 같은 여성 작가들은 물론, 요시다 슈이치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점들을 다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과연 정유정 작가가 이 작품을 능가할 만한 작품을 또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충분히 먹힐만한 보편적인 소재들을 아주 잘 활용했다고 느껴진다. 


때로 우리는 '운명' 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성공' 이 운명이라면, 당연히 그 반대편 '파멸' 도 운명일터.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경기 안에 성공과 파멸의 운명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승패를 떠나 손가락에서 떠난 주먹만한 야구공 하나에 운명이 오락가락한다. 절호의 찬스를 놓친 4번타자는 빨리 다음 찾아올 운명의 순간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에 놓친 찬스에 연연하다가는 다음 찬스에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복기는 하되, 얽매여서는 안된다. 홈런을 맞은 투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음 타자를 상대해야 한다. 포수는 재빠르게 경기의 흐름을 읽고, 운명의 순간을 맞이한 투수의 심경을 헤아려야 한다. 역시, 운명의 순간을 맞은 상대편 타자의 심경도 헤아려야 한다. 그에게는 파멸의 운명을, 우리 투수에게는 성공의 운명을 이끌어야 한다. 현수는 7년간. 2500여일의 밤 동안 다음 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놓친 절호의 찬스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새까맣게 잊힌 지 오래였다. 그 시간동안 현수는 끊임없이 상대 타자를 분석하고, 우리편 투수의 심경을 헤아렸다. 

그리고, 사인을 냈다.

이제 투수는 공을 던질 것이고, 타자는 배트를 휘두를 것이다.

9회 말 투아웃. 

7년간의 경기는 그렇게 막을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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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세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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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정말정말, 정말정말정말이다, 정말. 정말 이야깃꾼이구나. 이 사람은 정말정말 정말 정~~말 이야깃꾼이구나. 라는 생각을 온다 리쿠의 책을 한번 읽을때마다 100번씩 생각했는데, 이번 책에서도 100번쯤 되뇌었다. 

개인적으로 온다 리쿠 작품의 특색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대화]를, 그 뒤로 [회상] [여행] [고교생] 을 꼽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이고, 어쩌면 온다 리쿠의 작품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할 터다.

음반 기획자인 '다몬'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작품집은 안에 실려있는 작품들 또한 그러한 온다 리쿠만의 색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단편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다섯편의 이야기들이 실려있는 이 작품집은 주인공 다몬이 겪는 다섯가지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들어있다고 해도 좋고, 연작 단편 소설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섯 작품 모두에 다몬을 중심으로 그 주변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작품간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


[나무지킴이 사내] [악마를 동정하는 노래] [환영 시네마] [사구 피크닉] [새벽의 가스파르] 라는 작품들이 모여있는데, 각 작품들 모두 주인공 다몬이 개인적인 관계로, 혹은 일 관계로 알게되는 사람들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겪는 수수깨끼 같은 일들을 풀어내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작은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은 대부분 다몬의 추리력과, 주변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져 나간다.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두 페이지짜리 작가의 노트를 통해 주인공 '다몬' 이 이미 한참 전에  [달의 뒷면] 이라는 작품에 처음 등장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인공 다몬은 주변 상황에 예민하고 민감하지만, 성격은 느긋하고 모나지 않아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고 어디에나 잘 스며드는 물과 같은 사내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변 모두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 관조하는 듯한 자세를 가진, 중성적인 느낌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주변에 따뜻한 시각을 가지고 있고 상상력도 풍부하고 논리적인, 어떤 면에서는 초월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온다 리쿠는 이런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 전체가 조금은 몽환적이고 어딘가 붕 떠있는 듯한 분위기를 이끌어 내곤 한다.  

이 작품집에 모여있는 다섯편의 작품 모두 그런 온다 리쿠 작품만의 독특한 색채를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고, 말장난처럼 아주 사소한 것도 등골이 오싹 해 질 정도로 철렁이게 만드는 탁월한 스토리 텔링도 여전하다. 


역시 작가 노트를 통해 작가가 작품집 전체의 제목인 '불연속 세계'를 상징할 만한 작품으로 [새벽의 가스파르]라는 작품을 꼽았는데, [달의 뒷면] 에서부터 주이공 '다몬'에 이입해온 독자라면 쇼킹할 정도로 재미있는 반전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이 단편집이자 옴니버스식의 장편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반전때문이랄 수 있겠다. 

다몬은 작품 안에서 사실 쭉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하고, 사실은 그 때문에 모든 작품들이 분절성을 갖게되지만 [새벽의 가스파르] 에서는 그 공식이 깨어지기 때문에 앞의 네 작품을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집은 몇년간 써 온 작품들이 묶인 것이기에 사실 작가가 처음부터 그걸 의도한 것은 아닐터이지만, 묘하게도 그런 즐거움이 생겨버린것이다.  

   

이제 다몬이 처음 등장했다는 [달의 뒷면]을 읽으려고 준비중이다.

언제나 온다 리쿠의 이야기는 기대 이상이다. 세상 모든 것이 미스테리. 아니, 세상 모든 것에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같은 작품을 여러차례 읽어도 그 독특한 위화감이 뱃속을 간질인다. 

작품이 쌓여갈수록 온다 리쿠의 필력도 나날이 높아지는 것도 확실히 느껴진다. 이야기의 힘을 충분히 전달해준다. 

그녀에게 온 세상 모든 것은 미스테리고, 수수깨끼고, 이야깃거리일터.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까??

나날이 기대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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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왕 미스터리 소년추격전 1
한상운 지음 / 톨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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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세계가 화려할수록 기반은 허약하고 몰락은 거대하다" P. 020 


 여느 대한민국 고등학교의 교실에는 크게 네 부류의 아이들이 있다.

 먼저 공부를 잘하는 엘리트 부류

그야말로, 교실의 10%에 해당하는 아이들이다. 선생님의 사랑과 관심은 이 아이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학교의 시스템도 이 아이들을 위해 움직인다. 아니지, 이 아이들을 명문 대학에 보내기 위한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고 해야 맞을 것이다. 

 두번째 부류는 소위 '일진' 이라고 불리는 아이들. 역시 교실의 10%에 해당하는 아이들일 것이다.

선생님은 이 친구들은 아예 없는 학생으로 친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선생 그 자신도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이 친구들을 힘으로 휘어잡을 수 있었지만, 교권이 추락하고, 교원조차 여성들이 대부분이기에 10대 후반의 덩치크고 혈기좋은 학생들을 힘으로 휘어잡는다는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세번째 부류는 '셔틀' 이라고 불리는 아이들. 이 친구들 역시 교실의 10%에 해당한다. 

일진들에게 돈을 뺏기고, 심심풀이 대상으로 샌드백이 되어 얻어터지고, 교실이 지옥처럼 느껴지는 아이들이다. 

선생님은 이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지만,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단, 교무실도 일종의 교실과 같다. 교장을 중심으로 계급과 체계가 잡혀있다. 우리반에 문제아 - 특히 왕따 당하는 학생이 있다고 알려지만, 그 선생님 역시 교무실 안에서 비슷한 처지가 될수도 있다. 그 밖에 여러 제도적, 장치적, 교육부 전체적인 문제로 인해 사실상 이 친구들을 구제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교실은 학생들만의 정글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정글 자체를 갈아 엎지 못하는 한,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이 학생들은 언제나 먹잇감이 될 수 밖에 없다.

 네번째 부류는 위의 30%정도는 제외한 나머지들이다.

이 아이들은 어떤 분야에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지만, 주로 문제풀이에 재능이 없어서 성적이 잘 나오지 않고, 운동신경도 보통정도에, 일련의 사건을 통해 내재된 폭력성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운이 좋아 '셔틀'은 면한, 조용히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일진들 눈에 띄지 않게 운신하며 학교를 출퇴근 하듯 등하교하는 아이들이다.


 '태식' 은 네번째 부류에 속해있는 70%의 부류에 속해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부모님께 받은 도서관비를 삥땅치고, 시험기간에 게임을 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떨고, 여자 연예인을 좋아한다. 하지만 가출이나 큰 반항을 하지는 않고, 부모님께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고, 공부를 잘 하고 싶기도 하지만, 부모님은 내 부모님이니까 괜찮고, 공부는 너무 재미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잠재된 폭력성은 소심함과 상식으로 누르며 사는 일개 소시민, 아니, 정말 그야말로 평범한 소년이다. 

 

 태식이 즐기는 게임 '판타지 온라인' 은 대한민국 최고의 온라인 게임이었다. 

지금은 개발사의 여러 이유로 서서히 인기가 하락해 가고 있지만, 온라인 게임 대부분의 장르인 MMORPG의 선구자 격인 작품이었고, 아이템의 현금거래와 유저들간의 전투를 허용하고, 길드와 같은 커뮤니티를 지원하고, 게임속 경제구조를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탄탄한 회원풀을 구축하고 있는 게임이었다. '중경' 은 이 게임의 개발자이자 개발사인 '폴룩스 엔터'의 대표이기도 했다. 판타지 온라인의 인기 하락과 함께 폴룩스 엔터도 자금난을 겪고 있었고, 중경은 이 사태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쓰는 중이다.


  판타지 온라인의 세계를 양분하는 거대 세력은 '훈남 길드' 와 '인맥 길드'였다. 게임의 내로라 하는 고수들은 대부분이 이 양대 길드 소속이었고, 게임 내 경제구조를 좌지우지 하는 최강자들이었다. 이들은 게임을 취미로 한다기보다 사업처럼 하는 사업가들이었다. 게임의 세계도 현실세계와 똑같다. 무기 아이템 하나를 얻으려고 해도, 실제로 광산에 가서 광물을 캐야 하고, 필요한 여러가지 다른 재료들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대장간에서 제련을 해야 한다. 게임 유저들은 게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세계관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어떤  유저는 광산에서 광물만 캐서 다른 유저들에게 팔아 골드를 모으고, 그걸로 더 좋은 아이템을 구한다. 길드의 수익원은 이런데에서 나온다. 

거대 길드가 광산을 장악하고,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사냥터를 장악해, 골드를 모으고, 희귀한 무기들을 보유한 뒤, 그것들을 현금을 받고 판다. 이것은 실제로 돈이 된다. '훈남 길드' 의 리더인 아이디 '인투더레인' 은 판타지 온라인 게임의 초기부터 뛰어난 명성을 떨치던 고수였다. 레벨 10차이가 나는 상대를 거뜬히 이겨낼 정도로 컨트롤이 뛰어났고, 공격과 회피의 타이밍을 잡는 기술이 탁월했다. '인투더레인'-'정준'은  실제로 조직 폭력배 출신이었다. 훈남길드를 만들고, 건물 지하에 컴퓨터를 여러대 놓고 유령회사로 사업자 등록까지 한, 게임으로 사업을 하는 인물이었다. 


 태식과 중경, 정준은 각자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건들을 맞닥뜨려 가면서, 서서히 서로에게 얽히게 된다.


 한상운 작가의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긴박감 있게 펼쳐지고, 다음 페이지를 미치도록 궁금하게 만든다. 중경과 정준은 다소 전형적인 인물이지만, 태식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완벽한 소스를 제공하고, 간결하고 속도감있는 문장력과 어우러져 상당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게다가 이야기의 밸런스를 맞추는 능력은 역시 명불허전이다. 

무엇보다, 현재 대한민국 고교생들의 현실과 온라인 게임계의 상황을 면밀하게 꿰뚫고 있는 통찰력이 대단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렇게 이야기로 빚어내는 능력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한상운 작가의 재능. 이야기 전체의 짜임새도 아주 탄탄하다. 


사건과 일이 겹쳐가며 차근차근 변화해 나가는 태식의 모습을 보는것도 상당히 재미있다.

특히 에필로그와 같은 작품의 엔딩은 한상운 작가다운 위트와 캐릭터들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묻어있어 정말 좋았다. 

앞으로 태식의 삶은 어떤 식으로 변화할까? 이 리뷰의 서두에 인용한 문장, '화려한 세계' 의 주인인 중경과 정준의 앞에는 어떠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미스테리 소년 추격전] 이라는 시리즈 타이틀을 가지고 만나보게 되는 한상운 작가의 작품. 번외편까지 총 네 편으로 기획되었다는데, 나머지 권들이 엄청나게 기대된다!!! 


고교시절은 누구에게나 인생을 좌우할만큼 큰 선택을 하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폴룩스 엔터의 대표인 중경은 고교때는 전국 석차 100등안에 들 정도의 엘리트 부류였고, 인투더레인으로 게임 안에서 명성을 떨치는 정준은 고교시절부터 조폭 지망생이었고, 결국 고교를 중퇴하고 조폭이 된 인물이었다. 그들의 현재를 만든건 고교시절이라는 과거.

 그리고 태식은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만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숱한 중고등학생들이 급우들의 폭력에 못이겨 건물에서 뛰어내렸다는 기사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온다. 한창 자아를 찾아나갈 시기, 그들의 삶은 폭력으로 멍들어가고 있다. 숱한 선택의 순간들을 인격적, 육체적 모독으로 물들여가고 있다. 

어른들도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 안달인데, 소년들의 스트레스는 누가,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

육체적으로 우위에 있는 '일진'들은 동급생들을 괴롭히면서 풀어내고, 두배 세배의 스트레스를 받는 '셔틀' 은 결국 이 괴로움만 가득한 세상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들이 적어놓은 유서들은 그들이 명백히 스스로 삶을 포기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지 않는가.

누가 그들의 삶을, 숨쉬는 모든 순간이 괴로워지게 만들었는가? 

 '재미' 안에서 느껴지는 괴로움이 가슴 한켠을 짓누른다. 

 


"때린 놈은 다리를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 뻗고 잔다고? 거짓말이다.

때린 놈이 맞은 놈 얼굴도 기억 못하는데 무슨 소리냐.

평생 때려보기만 한 놈들이 만든 말이다.

맞은 놈만 평생 치욕에 떨며 괴로워할 뿐이다." P. 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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