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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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출판사는 매년 데뷔 10년 이내의 작가들에게 이 상을 안긴다. 2010년, 처음 신설되었을 때는 김중혁, 편혜영, 배명훈 같은 작가들이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이 되었고, 이장욱 같이 새내기 작가는 이후로도 여러번 이 수상작품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후기를 통해 어떤 작가분은 일종의 '장학금' 처럼 받아들였다고 했다. 크게 이름을 떨치기 전, 많은 위안과 응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과 취지에 걸맞게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가들은 정력적으로 집필활동을 한다. 나도 한 3~4회정도 이 작품집을 읽은 것 같은데,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내게 '젊은작가상' 은 일종의 아방가르드와 같다. 최전방에서 앞만보고 질주하는 전위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적을 일격에 때려부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돌격, 또 돌격하는 선봉대. 때문에, 젊은작가상 수상작을 펼칠 때엔 조금은 다른 기대를 갖는다. 이번엔 누가, 내 뒤통수를 후려쳐줄까? 

맨 앞에 실린 작품을 비롯해 인상적이었던 몇 작품의 감상만 옮겨보겠다.


여느 수상작품집들이 그렇듯, 첫 작품이 대상 작품이다.

다만, 젊은작가상은 모든 상의 상금이 같기에, 대상은 오직 대표성을 가질 뿐이다. 그럼에도 '대표' 하기 때문에 조금 더 엄격한 시각으로 보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방가르드한 이 수상 작품집의 맨 앞자리에 선 작품의 첫인상은 살짝 실망스러웠다.

박상영 작가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그 제목부터 너무 참신하고 전위적이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분량은 꽤 된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깝지만, 중편이라 하기엔 단편에 가깝다. 딱 그 중간 쯤의 분량. 

이미 암투병 전력이 있었던 엄마의 암 재발소식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는 상투적이었다. 그와 오버랩되는 과거 연인과의 이야기도, 꽤나 상투적이었다. 거의 띠동갑 정도 나는 연인과의 연애이야기. 화자는 회사를 때려치고 본격적으로 엄마의 병수발을 하는데, 동시에 과거의 연인에게서 몇년만에 연락이 오는 전개다. 설상가상. 엎친데 덮친. 

엄마와 화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연인과 화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교차되며 진행된다.엄마와의 일화는 화자가 섭섭했던 일들과 괴로웠던 일들, 고통의 기억만이 가득하고, 연인과의 일화는 '우럭 한 점' 처럼, 섭섭했던 일들을 사랑으로 꾹꾹 눌러낸 기억들이 가득하다. 대사나 문장들이 감정에 따라 생생하게 요동친다.

화자가 엄마에게 갖고 있는 미움은 미성년때, 유일한 가족이자 온 세상과 같은 엄마의 행위를 통해 받은 것이고, 화자가 연인에게 받은 감정들은 성인이 된 후,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 두 과거가 오버랩 되는데, 정서가 같을 순 없다. 작가는 그 지점을 명확히 판단하고, 밀도 높고 무거운 두 정서를 능숙하게 분리해냈다. 이는 세 덩어리의 시간대가 불규칙적으로 오가는 이야기의 형식과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정서를 분리시키고, 그걸 문장을 통해 명확히 표현해냈다. 소설적 장치뿐 아니라 문장 가득한 정서를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작가의 기술과 센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소재가 너무 진부한거 아냐?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그에 동의한다.

다만, 진부한 소재를 세련되게 꿰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로 압축해서 보면, 모두 다 진부해 보이기 마련이다. 소설이란 결국, 어딘가 '있을 법한' 이야기이니까. 

진부한 이야기를 진보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인물들이고, 이 작품의 특별한 지점 또한 그곳이다.


 이 이야기는 동성애자의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엄마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던 순간, 엄마는 화자를 방학동안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사랑하는 연인 '형' 은 화자에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되묻는다.  낳아준 엄마에게도, 사랑하는 연인에게도 거부당하는 관계. 우리 사회의 관념상 동성애는 없는 개념이기에, 이론적으로 동성애자는 존재하는 않는다. 감정은 그 사람 자체이다. 끊임없이 감정을 거부당하는 삶. 존재를 부정당하는 삶. 하지만, 삶의 주인은 삶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모든 부정의 증거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삭혀야 한다. 그 와중에 정신은 물러지고, 곪아터진다.

가장 사랑했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부정당한 삶의 편린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 안에 녹아있다. 

BL에서나 보던 '퀴어' 가 순문학의 세계, 일상으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진부한 이야기가 진보한 이야기가 되는 지점이었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순간 속에서 그들이 겪었을 모든 부정.

취업, 직장 상사와의 소통, 엄마의 걱정과 잔소리, 연인과 나누는 대화, 주고받는 손길, 타액, 감정, 오해, 갈등, 편견. 그리고 또 편견. 또, 또 편견, 편견, 그리고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강고한 고정관념. 


엄마의 암 투병에 10살 정도 연상의 래디컬한한 운동권 출신-이라고 쓰고, 꼰대라고 읽는다- 연인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게이를 끼얹은 이야기. 엄마의 일방적인 애착관계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대한민국 누구에게나 짜증나는 법이고, 꼰대는 게이라도 그 근성이 변하지 않는 법이며, 나쁜남(여)자에게 끌리는 취향 역시 성별을 가리지 않는 법인지라 이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신선했고, 신선했지만 짜증났으며, 짜증났지만 읽는걸 멈출 수는 없었다.


현재에 있어 과거란 결코 벗어낼 수 없는 굴레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를 저당잡혀 오늘을 사는 법이다. 과거를 벗겨내는 일은, 모든 인간이 갈망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고, 그 갈망에 대한 모든 실패는 회한이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화자인 '영' 역시, 어머니의 병과 함께 과거의 상처들을 씻어내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화자가 갖고 있는 상처의 깊이는 망각이나 용서라는 개념과는 이미 멀어졌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선택에 회한이 따른다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체념, 밖에 없는 것일까? 

상처만 주었고, 용서할 수도 없는 엄마지만, 화자는 엄마에 대한 미련을, 어쩌면, 사랑인지도 모르는 그 감정을 놓아버릴 수 없다.

'용서하지 않았다' 는 사실을, 끝까지 감추는 것. 그것만이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작품은 김희선 작가의 [공의 기원]이다. 

이 작품은 SF/판타지 장르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좀비물' '스페이스 오페라' 등과 함께 서브 장르로 자리매김한 '대체 역사물' 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장르는 '팩션' 보다는 거시적인 시각을 자랑한다. 역사의 한 인물과 에피소드를 뒤틀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 전반의 전복을 시도하는 장르다.     

이야기는 1882년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한 영국함의 수병들이 모래사장에서 축구하는 것을 지켜보는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한다. 축구공을 통통 튕기며 시작된 이 놀라운 이야기는 영국의 산업 전반을 강타한 아동노동착취와 세계 축구인들과 스포츠인들을 경악시킨 현대의 동남아 아동노동착취를 거쳐 세계인들의 미래상에 대한 충격을 몰고온 인공지능 무인화 공장까지 짚어간다.  

장르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현실웃음을 빵빵 터뜨릴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치 '포레스트 검프' 처럼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교묘하게 비트는 작가의 패기 넘치는 '뻥' 이 사랑스러울 정도로 능청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축구와 축구게임도 즐기는 나로서는 축구공의 역사와 디자인이 작품 안에서 언급될 때 마다, 머릿속에 공의 디자인들이 되살아나서 제법 풍성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었었다. 무엇보다 더 재미있었던 점은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의 특징인 매 작품 말미에 붙어있는 작가노트와 해설까지도 작품의 일부처럼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뻥' 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픽션' 의 정의 자체가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내 기준으로 훌륭한 작가는 독자를 잘 속여야 한다. 그런 내게 있어 김희선 작가의 [공의 기원] 은 정말 훌륭한 작가의, 신나는 소설이었다. 



책의 말미에 나란히 실려있는 김봉곤 작가의 [데이 포 나이트]와 이미상 작가의 [하긴]은 [우럭 한 점~] 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이 두 작품을 잘 섞으면 [우럭 한 점~] 의 등장인물들의 다른 일상처럼 보일 것 같았다. 

작품의 나열을 누가 했는지, 의도적이었던 것 같았고, 매우 좋았다.

[데이 포 나이트] 는 퀴어 커플의 자기파괴적인 연애담이다. 다만, 이 작품은 보다 '감정' 에 집중했다. 육체는 어떻게 감정을 지배하고, 감정은 어떻게 육체를 제어하며, 시간은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뭉뚱그리는가. 그리고, 작가는 그것들을 어떻게 분리하고, 어디에 담아내는가. 기억들 안에서 시간별로 카테고리를 만들고, 하나씩 분리해서, 감정들을 되살려낸다.

[우럭 한 점~] 과 통한다고 생각한 지점이 이 지점이었다. 

또한, 이 작품은 회한으로 가득한 과거의 연애담을 넘어, 창작 그 자체에 대한 커다란 메타포처럼 읽히기도 했다. 


[하긴]은 자녀의 교육에 매달리는 한 부모의 이야기다. 

딸의 이름은 김보미나래. 이 이름을, 화자인 '나' 는 반대했지만, 아내가 밀어붙였다. 그렇듯, 딸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은 거의 아내에게 있었다. 화자는 아내의 길에 동참했다. 보미나래는 발달이 더뎠다. 화자와 화자의 아내는 대한민국 여느 부모들이 그렇듯 딸의 대학진학에 모든걸 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득하게도, 혼혈 손주였다. 


나는 작품집 전체에서 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가장 의미심장하며, 가장 단호하고, 가장 많은 것들을 맥락 사이에 숨겨두었다.

김중혁 작가는 소설에서 '무엇을 쓸까, 를 결정하는 것보다, 무엇을 쓰지 말까, 를 결정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으로서의 1인칭은 아내의 일생과 딸인 보미나래의 일생 전체를 뒤에 숨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작가가 쓰지 않은 것, '여백' 으로 남는다. 나는 이 탁월한 여백들을 무수한 상상들로 채워갔는데, 어쩌면, [우럭 한 점~] 이 이 여백들 중 한 칸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여운이 남아, 문장들을 바라보고, 여백들을 상상하고, 또 문장들을 바라보고, 또 여백들을 상상했다. 

아내의 여백, 보미나래의 여백, 샘의 여백, 화자인 나의 여백. 




+

 그냥 지나치긴 아쉬우니, 언급하지 않은 작품들도 살짝씩 되새기자면, 

백수린 작가의 [시간의 궤적] 은 일상의 무료함과 결혼과 육아의 무의미함, 무상함을 되새기게 만들었고, 이주란 작가의 [넌 쉽게 말했지만]은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 의 다른 버전, 또는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 의 변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영수 작가의 [우리들] 은 대담한 불륜 커플에 관한 이야기로,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의 한국버전처럼 느껴졌는데, 파격적인 소재에 비하면 지나치게 보일 정도로 안온한 엔딩이 조금 아쉬웠다.


++

재미있는 부분은 일곱 작품 중 네작품의 화자들이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들이었고, 여섯 작품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1인칭 시점의 소설들은 대체적으로 사소설의 형식을 띈 것들이 많았는데, 그래선지 각각의 작품들이 모두 한 사람이 차례대로 경험하는 일들처럼 읽히기도 했다. 동성애자들의 연애가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이 두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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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조각가
박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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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장실 가이드, 자살 관광특구, 벽, 무정란 도시, 악몽 조각가, 공터, 혀, 골목의 이면, 주  이렇게 총 9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제목만 보면, 모두 익숙한 단어들이다.

헌데, 약간 미묘한 조합들이 눈에 띈다. 화장실 가이드, 자살 관광특구, 악몽 조각가... 

익숙한 것들의 신선한 조합. 

이 인상이 이 작품집 전체의 인상과 같다.


잘 알려진 소설 기법 중,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가 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방법과 정도의 차이가 때로는 순수소설과 장르소설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눈이 멀게 되면 순수소설이 될 수 있지만, 외계의 존재가 이상한 공격을 해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게 되면 장르소설이 되곤 한다. 지성을 가진 바퀴벌레들이 인간들을 공격하면 장르소설이 되겠지만, 평범한 어떤 사람이 할루아침에 갑자기 벌레가 되버리면 순수소설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라 이런 구별이 무슨 의미 있을까 싶지만, 학문적으로 파고들기 위해서는 세세한 카테고리의 분류가 필요하긴 할터다. 

이 작품에 실려있는 아홉편의 작품들은 이런 관점에서 카테고리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다고 볼 수 있다. 


박화영 작가의 작품은 이 작품집으로 처음 접하는데, 익숙한 것에 익숙한 것을 덧붙여 낯설게 만드는 감각이 탁월한 것 같다.

살짝 배명훈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배명훈 작가는 그 출생부터 'SF' 라는 장르이고, 그 꼬리표 덕분에 보다 과감한 '덧붙이기' 가 가능했다. 박화영 작가의 아이디어 역시 상당히 과감하다. 이야기의 중심축을 살짝만 옮기면 장르소설에 들어갈 수도 있을 정도로 기발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들 모두를 충실히 기억하고 싶지만, 몇 작품의 감상만 이 공간에 기록하려 한다. 


먼저 작품집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화장실 가이드] 는 제목처럼 화장실을 전문으로 안내하는 가이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이디어도 무척 과감하지만, 작품의 구성도 무척 대담하다. '매년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들이 100만명 중 0.5명 꼴로 존재한다' 는 전혀 없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로 운을 띄운 [화장실 가이드] 는 화자의 개인사와 '화장실 가이드' 를 하며 만난 사람들의 사례가 교차로 진행된다. 여러 이유로 '특별한' 화장실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 그런 특별한 화장실- 특정 오피스텔의 화장실이나 군대 막사 건물의 화장실, 외딴 공원의 공중 화장실, 학교의 화장실 등- 을 찾아서 안내해주는 일이 바로 화장실 가이드의 일이다.

화자가 화장실 가이드를 하는 이유는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단순하지도 않다. 화장실에서 태어나서, 화장실에 버려진 화자. 그렇게 노숙자에게 발견된 화자는 고아원에서 자랐고, 친구가 술집 화장실에 갔다가 그대로 사라져 영영 연락이 끊기는 일이 발생한다.

정말 '화장실에 갔다가 사라졌다' 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화장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화자는 결국 화장실 가이드가 된다. 

굉장히 짧은 소설인데, 작품 전반에 흐르는 묘한 위화감은 과하지 않은 유머로 적절히 누르고, 과감한 생략과 시간과 공간에 구애됨 없는 전개로 내러티브를 굉장히 풍성하게 만든다. 훌륭한 아이디어에 과감한 연출, 그야말로 완벽한 서사가 돋보인다. 


'화장실'

인류 문명에 있어 더없이 중요하지만, 더없이 숨기고 싶은 곳이 바로 화장실일 것이다. 세계에서 공신력 있는 잡지나 일간지에서 인간의 삶을 바꾼 n대 발명품을 뽑으면 횃불, 화살 등과 함께 수위를 다투는 것이 바로 수세식 변기다. 배변활동은 섭식만큼 중요한 일이지만, 그 뒷처리는 인류 문명에 있어 아주 큰 숙제였다. 인간의 변은 그야말로 세균과 바이러스 덩어리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총과 대포보다 참호 안에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수인성 전염병으로 죽어갔는데, 그 이유는 수만명의 대소변이 섞인 진창 속에 발을 담구고 몸을 구르고 음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직도 수인성 질병의 대부분은 인간의 대소변을 타고 퍼져나간다. 이때문일까?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알거다. 군대에서 화장실 청결에 얼마나 큰 신경을 쓰는지. 언제나 치약이나 락스냄새가 나는 군대 화장실은 개인활동이 제한된 군대라는 집단 안에서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다. 언제, 어떤 시간에 가도 화장실 한칸은 잠겨있다. 언제나 누군가는 그 안에서 편지를 읽거나 쓰고, 초코파이 같은 간식을 몰래 먹기도 하며, 책을 읽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하며, 풀 수 없는 성욕을 다스리기도 한다.

단순한 배변공간이 아니라, 유일한 개인공간인 것이다. 


"화장실만큼 혼자 울기에 적합한 장소도 드물죠."

p.15 


이런 공간성은 결혼해서 한 집안의 가장이 될 때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남자들은은 본능적으로 자신만의 동굴을 찾곤 하는데, 집 안에서 아내와 아이들의 눈을 완벽히 피할 수 있는 공간, 화장실은 그야말로 완벽한 동굴이다. 

남녀노소가 따로 있을까.

회사에서 상사에게 핀잔을 들은 여직원이 눈물을 삼키고 번진 화장을 고치는 곳도 화장실이고, 바지의 한가운데 민망한 부위에 국물을 쏟은 남직원이 곤란해 하는 곳도 화장실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은밀한 공간. 

작가는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이야기함으로 이 공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실제로 우리는 가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라고 말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나에게도 몇번이나 있었다. 특히 여럿이서 함께 모이는 술자리에선 매우 잦다. 술자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화장실 핑계로 자리를 피하기도 하고, 눈맞은 커플들이 일행의 눈을 피해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차례로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기도 한다. 화장실에 갔다가 절친한 한두명에게 '나 갈게. 말 좀 잘 해줘' 같은 톡을 보내고 귀가하기도 하고, 술에 취해 화장실에 갔다가 귀가본능을 발동시키는 사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크게 머릿속에 연상되는 것은 '강남역 살인사건' 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유명 연예인의 섹스 스캔들과 관련된 커다란 화장실 사건도 있었고, 탄핵당한 전대통령의 화장실 일화도 있었지만, '화장실' 이라는 공간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은밀한 공간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공포의 공간이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화장실 100배 가중처벌법이 필요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여성혐오' 라는 이슈를 촉발시켰던 이 사건은 남성 중심의 우리 공동체에 경종을 울린 사건임은 분명하다. 

 26쪽에 불과한 이 작품을 덮었을 때 나는 강남역 살인사건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읽어보니, 이 작품은 살해당한 여성과 연인을 잃어버린 남성을 위한 추모와 위로의 소설로도 읽혔다.

이 작품 안에는 화자와 화자에게 가이드를 의뢰한 사람들 외에 화장실을 통해 평행우주를 여행한다고 주장하는 남고생도 등장하는데, 이 장치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돌아올 수 없는, 돌아오지 않는, 돌아오지 않을 이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희망의 메타포로 읽힌 이유다.


공중 화장실에서 태어나, 공중 화장실 그 자리에 버려진 사람이 있다. 바로 '나' 다. 

화장실에 들어온 노숙자에게 발견되어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리고 나름 친한 친구가 있었다.

단둘이 마주앉아 술 한잔 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나' 에겐 그런 친구가 몇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성이라면 더 없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아쉬운 이야기가 오고갔고, 나에게 '나쁜 놈' 이라며 나쁜 기억을 쏟고 오겠다며 화장실에 간다던 친구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자 그제야 나는 조금 당황하고는 주인을 부른다. 주인은 화장실 문이 잠겨 있는 걸 확인하고 열쇠를 가지러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런 다음 화장실 문을 열고는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을 내게 보여준다. 영원히 화장실 주변을 멤도는 나쁜 놈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p. 32   

     

이 작품은 명백히 '상실' 에 관한 이야기다. 

화장실을 '버리는 공간' 이다. 우리는 당연스럽게 버릴 것을 버리러 화장실에 가지만, 이 작품은 버리면 안되는 것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버리면 안되는 것,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렸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잃었다' 고 한다. 상실이다. 잃으면 안되지만, 잃지 않을 수 없는 것들. 반드시 잃고야 마는 것들. 

그런 것들이 뭐가 있을까? 

반려동물, 부모님, 친구들, 수많은 기회들, 우리의 수명. 지금 이 순간에도 매시간 매초 흘려보내는 이 세상에서 남은 각자의 시간들. 생명. 삶.

얻었다면, 그 다음 스텝은 '반드시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건.


화자는 화장실에서 태어났지만, 버려짐으로써 화장실에서 부모를 잃었다.

이후 화자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올때, 다른 평행우주로 이동한다고 믿는 고등학생을 알게 된다. 

결국 화자는 이 학생을 통해 자신의 친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자신의 방식으로 납득하고 받아들인다.

상실에 대한 화자의 대응인 것이다. 이것을 체념이라고 하면 체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작가는 '또다른 시작'이라고 이야기한다. 

결말로 향하는 이 개연성이 나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우울을 먹고 희망을 쌌다고 할 정도의 결말도 좋았다.

26쪽 안에 캐릭터를 완벽히 구축하고, 설정을 명확히 드러냈다. 세계관을 명징하게 표현했다.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작품들의 아이디어가 너무 기발하고, 서사의 만듦새도 탄탄하다.

모두 바로 만화나 드라마의 시나리오로 각색해도 덜거나 더할 곳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작품집에 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이 작품은 캐릭터성과 서사의 완성도, 발상이 너무나 흥미로워서 솔직히 뒷 작품들이 얼마간 맘에 안 찰 정도였다.

'화장실 가이드' 라는 이 직업은 배명훈 작가의 '고고심령학자' 에 맞먹을 정도로 머리를 딩~ 울렸다.

고고심령학자처럼 응용범위가 너무 넓어보이지만 적어!!!! 


많은 작가들이 단편의 아이디어를 장편으로 확장시키기도 하는데, '화장실 가이드' 는 정말이지 언젠가 꼭 장편으로 만나보고싶다.  



[혀] 역시 무척 직관적이면서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무슨이유에선지 수면제를 잔뜩 먹었다가 그걸 모두 토해내면서 자신의 '혀' 를 잃어버린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목구멍 안쪽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평범한-지않은- 회사원이었던 화자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말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주변 모든 사람들과 소통이 불편하게 된다. 특히 지금 회사에서는 화자의 상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으로 인해 들쑤셔진 상태였고, 화자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사이에 있는 주요한 관계자였기에 입장은 더욱 곤란해졌다. 게다가 여자친구와의 갈등도 있는 상태라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그러다 갑자기 몸 안쪽으로 넘어간 혀에게서 '맛' 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폐, 위, 간, 쓸개는 물론, 허리, 엉덩이, 종아리 등의 진피층까지.

특히, '고통스럽거나 후회스러운 기억과 연관된' 맛은 아주 짜고 씁쓸했는데, 어느순간 혀가 그런 곳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기억들은 대부분 타인의 폭력에 의해 굴복한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화자는 지금 그런 순간에 놓여있었다. 

온 몸의 맛을 다 보고 온 혀는 어느순간 제자리로 돌아온다.

화자의 선택만이 남은, 그 순간. 


작품집 전체를 통틀어 '화장실 가이드' 와 함께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몇번이나 다시 읽었고, 그 때마다 좋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변신' 이 떠오르는 카프카의 변주처럼 느껴졌는데, 담고있는 메시지와 소재가 참 좋았다. 

평생 타의에 의해, 폭력에 의해 억압받아온 화자가 스스로의 상처를 되짚으며 현실의 억압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는 주제는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 자체가 일종의 우화처럼 읽혀서 주제의식을 살리기엔 이런 직접적인 방식이 안성맞춤이었다. 작가의 의도가 행간과 구조에서 명확히 드러나는데, 작품집의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직구과 변화구에 모두 능숙한 유형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반면, [골목의 이면] 은 다 읽고 나서도, 이게 뭔소린가, 싶을 정도였다.

[악몽 조각가]에 등장해야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몽환적인 작품이다. 모든 등장인물의 방위와 거리를 숫자로 명확하게 표현하지만, 그래서 더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구조도 서사적이고, 형식도 명료하며, 사건도 뚜렷하지만 핵심이 잘 짚어지지 않는다.

진짜 기묘한 체험이었다.


책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는 [주] 라는 작품은 형식면에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무슨 사전'  시리즈가 떠올랐던 작품이다. 의도적으로 책의 말미에 배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주 잠깐동안은 정말 책의 각주를 모아놓은 것인 줄 알았다가, 단편집에 각주가 십수페이지나 될 리 없지, 하며 헛웃



음을 짓기도했다. 물론, 문장에 아주 작은 숫자가 찍혀있는 모양을 본 기억도 없었고.

'각주' 의 형식을 띈 소설이었다. 아이디어는 위에 언급했던 베르나르에게서 본 적이 있지만, 이 작품은 각주의 형식을 통해 한편의 서사를 충실히 완성한다. 이런 경우는 정말이지 처음 보았던 것 같다.

특히 작품에 등장하지 않는 또다른 텍스트 ;각주니까, 그 주가 달렸을 문장을 상상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야말로 독자를 참여시키는 작품이랄까. 

아마 주가 달린 원전 텍스트는 어떠한 '기둥' 에 관한 것인 듯 하다. 저자가 작중에서 언급하듯 러브 크래프트가 떠오르는 초고대의 신화적 존재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가 연상되기도 했다. 물론, 아이디어는 발표되는 순간 공공재와 같은 것이라서 아서 클라크, 러브 크래프트, 스탠리 큐브릭 모두 영향을 주고 받았을 수 있다. 박화영 작가 역시 그 세례를 받았을 수 있고.)

나 역시 책을 오랫동안, 각종 망상과 공상을 섞으며 천천히 읽는 편이라, 이 형식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특히 '체험' 으로서의 독서로 굉장히 좋아하는지라, 더더욱. 이 기둥과 주석에 등장하는 각종 전문가들, 전문 집단들 모두 기발하고 흥미로워서 아주 즐거웠다. 

작가가 머릿속에 담고 있는 세계관을 상세히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는데, 조만간 이 작품도 장편으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 세계에는 화장실 가이드도 있고, 평행우주를 넘나드는 사람도 있으며, 악몽 조각가와 주석만 읽는 사람들도 충분히 존재할 것 같다.


전체적인 감상은 '정말 기발하다' 였다.

익숙한 것을 비트는 각종 스킬들이 총 출동하는 그야말로 경계선을 시험하는 작품집이었다.

현실세계의 우울을 찾아내는 주의력과 관찰력도 돋보였고, 어떻게든 치유하고, 위로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낙천성과 따뜻함도 읽혔다. 

일종의 '기담' 으로 묶는 듯 한데, 박화영 작가가 그렇게 딱 잘라 정의하는 듯한 표현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다. 

비틀고, 꼬고, 변형하고, 파괴하고, 다시 조립하는 그런 작업을 좋아하는 것 처럼 보여서.

장편이 참 기대된다.

어떤 신묘한 세계가 등장할까?

그 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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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가야 한다
정명섭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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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위조' 라는 소재는 이야기의 역사 안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소재이다.

멀리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이 툭하면 신분을 위장해 인간들을 곤경에 빠뜨렸고, 수많은 구전 동화 속에서도 얼굴이 비슷한 인물들이 서로의 신분을 바꿔치기 하거나, 신통력을 가진 동물이나 사람들이 신분이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 집 안방을 차지하곤 한다. 기독교가 탄생한 중동 지방에서는 선하거나 악한 신이 여행자나 가족, 친지의 모습으로 공동체를 시험한다는 이야기가 넘치고 넘친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왕자와 거지' 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문명의 초기부터 이러한 소재가 쓰인 이유는 명확하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신분 정보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냐?" 는 말은 곧, "적이냐 아군이냐?" 와 같은 질문이다. 

타인에 대한 정보. 신분 정보를 통한 '피아식별'은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행위였다.

신분 확인이 중요했던 이유는, 신분 정보를 위조하는 일이 대단히 쉬웠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동족간의 생존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일이었다. 인간은 모든 '호모' 동족들이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 한 종만이 살아남았건만, 제한된 자원 속에서 더 나은 번성을 위해 서로를 죽여야만 했다. 다른 그 어떤 종족보다 동족들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타인을 의심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결국,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 혼자 만들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 사람 주변의 '다른 사람들' 로부터의 공증이 필요하다. 가족, 이웃, 지역 공동체, 국가. 신분을 위조한다는 것은 결국 주변의 모두를 속여야 한다는 것. 우리 공동체 안에, 나와, 우리 모두를 속이는 '신분을 알 수 없는 자' 가 있다. 그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가 좋은 것일 확률은 대단히 낮다.

우리가 리더로 따르는 '왕' 의 자식, 나아가 다음 리더로 따라야 하는 왕자가 아니라, 길거리를 떠돌던 '거지' 일수도 있다. 공동체원 전체를 속이는 리더. '왕자와 거지' 플롯의 핵심은 이 미스테리인 것이다.    


 '왕자와 거지' 의 이 플롯을 모태로 비틀리고, 무너지고 뒤집히고, 다른 플롯들과 유기적으로 섞여가며 놀라운 이야기들이 태어났다.  화자가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는 동안 생기는 불안감과 주변 사람들을 속이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이 조마조마한 서스펜스를 이끌어내고,  신분을 속여야 했던 이유와 개연성이 충분한 신분 공개의 과정이 드러나면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생겨난다. 이는 야깃꾼들이 결코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다.

하지만, 주요 인물들의 신분을 감추거나 뒤바꾸기 위한 설정들을 과도하게 하다 보면 작위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설정을 헐겁게 하면 도입부부터 설득력을 상실해버리고, 이야기는 그 순간 끝이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도 차근차근 따지면서 들어보면 설득되기가 쉽지 않다.

역사에 근거한 이야기일수록 고증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왕자와 거지가 길에서 마주쳤다고? 그 자리에서 옷을 바꿔입는다구?? 어느시대, 어느 국가의 어느 왕인데? 왕자가 수행원도 없이 나갔어? 그것도 아주 어린 꼬마가? 어느 시대가 그렇게 허술했지?? ' 

 이러한 초반 설득을 잘 한 작품이 "광해: 왕이 된 남자" 일 것이다.

궁정 암투로 혼수 상태에 빠진 왕을 대신한 광대의 이야기. 한낱 천민이었던 광대가 궁정 생활을 하며 매화틀이나 수라상을 돌보는 나인이나 기미상궁, 중전과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시대 임금의 일상을 비교적 세밀하게 고증함으로써 도입부의 설득력을 높였다. 물론,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서스펜스를 대부분 코미디로 활용했기에, 클라이막스의 카타르시스는 다른 방향에서 찾았다.

불안감을 고조시키다 마지막에 그 불안감을 일거에 해갈하는 것이 카타르시스의 기본이다. 애초에 [광해: 왕이 된 남자] 는 그러한 반응을 기대하고 만든 작품 자체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화'판 '왕자와 거지' 의 조선식 변주였다.


[살아서 가야 한다] 는 그 플롯에서 서스펜스를 극대화 시킨 작품이다.

서두에 장황하게 별 상관도 없는 영화 이야기를 갖다붙인 이유는, 이 작품 역시 고증이 대단히 잘 된 역사물이기 때문이다. 

초반에 등장하는 양반과 평민의 생활상의 차이에서부터 말습관, 소소한 예법까지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도입부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용도인 동시에, 후반부를 위한 치밀한 복선들이기도 하다.

초반부부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장치들을 배치하고, 그 대부분이 중~후반에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인물 한 명, 대사 한 줄, 소품 하나까지 적절하다. 마치 그 시대에 와 있는 듯, 간명한 묘사들이 쏙쏙 와서 박혔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황천도가 오랜 세월이라곤 하나 말투와 어법, 예법, 행동거지들을 단지 '들은 것' 만으로 익혔다는 것이 지나치게 과한 설정이었다고 비판할 수는 있을 것이나, 그것이 불가능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 볼 부분들은 서스펜스와 그것들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명나라로부터 출병 요청을 받은 조선과,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던 단시 조선의 조정, 그리고 먼 요동 지역으로 원정길을 떠난 조선 군인들의 안타까운 결말도 외면할 수는 없다.

저자 역시, 그 지점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 것이다. 신분이나 태생, 출생 등이 아무렇지 않게 전복될 수 있는 상황.

작품 안에서 가장 튀는 존재인 강은태의 부인 역시, 그러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역사의 고증 안에 스며든다.

모든 인물들이 이름이 명확히 등장하지만, 강은태의 부인은 '부인' 또는 '며느리' 로만 등장한다.

사실상 은태의 집안을 일으켜 세운 건 그녀였지만, 당시 역사적 고증에 따른다면 그것이 맞다. 

이야기는 황천도의 시점에서 흘러가고, 명백히 그의 사고방식을 좇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당대의 여성이라면 '유씨 댁 맏딸' 그리고 강철견댁 며느리, 강은태의 부인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이러한 세세한 설정들이 조금은 작위적일 수 있는 설정들을 미묘하게 피할 수 있게 하는 역사물로써의 리얼리티를 제공한다. 


당시 사회는 엄연한 계급사회였다.

양반은 언제나 평민, 천민에 우선했다. 그것은 여성도 변함없었다.

양반가 여성은 언제나 평민, 천민 출신 남성보다 우선했으나, 관념적 차이가 있었다. 여성과 노비는 그 집안의 '재산' 이었던 것이다.

노비와 여성, 아이는 집안의 소유였고, 집안은 가문의 소유였으며, 가문은 임금의 소유였다. 국가 경영은 임금의 재산을 경영하는 일이었다. 양반들은 왕의 집사들이었고, 평민들은 양반의 집사들이었으며, 노비는 단순한 재물이었다.

이 구도는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사대' 의 나라였다.

임금과 신하, 양반과 천민이 나뉘어 있듯, 국가간에도 신분의 차이와 그에 따른 질서가 있다고 믿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그렇게 여겼고, 명나라 역시 조선을 그렇게 여겼기에 조선의 번듯한 양반가 출신 무인들은 명나라의 군인들에게 칼보다도, 창보다도 쓸 모 없는 '것' 들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고, 방치되었고, 결국 모두가 똑같은 청나라의 '포로' 상태가 된다.

그런 시대였고, 이 작품은 아주 세세한 곳에서까지 그런 관념들을 잘 녹여내고 있기 때문에, 작품속 인물인 황천도와 강은태의 심경이 개연성을 얻는다. 

개념까지 고증해 내는 일관된 흐름이 자못 억지스러울 수 있는 설정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역사를 활용하는 장르물들이 고증을 소흘히 하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류 문명에 '자유' 와 '평등' 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은 것은 채 300년도 되지 않았다.

조선땅에 그런 '단어' 자체가 처음 등장한 건 고작 200여년 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러서다. 아마 그 당시 그 단어를 외쳤던 사람들도, 결국엔 '나랏님' 을 위해 칼과 죽창을 바닥에 버렸다. 이러한 신분 차별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일제 식민 치하까지도 우리 민족은 개화하지 못했다. 그토록 무능했던 고종이었지만, 초기 독립군들은 '나라를 왕에게 돌려드리자' 는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은 요동 일대에서 중국과 러시아 공산당과 연합했던 독립군들을 통해 비로소 들어왔고, 신분제는 왕정은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면서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이다. 


이렇듯 섬세한 고증과, 오직 서스펜스를 위해 쌓아올린 장작들, 그리고 그것들을 한방에 후루룩 태워버리는 짜릿한 카타르시스.

그리고 끈적한 마무리까지.

간만에 접한 깔끔한 장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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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나방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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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뒤져보면 수많은 괴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괴담부터, 히틀러가 아직 살아있다는 괴담, 일본에는 오다 노부나가도 아직 살아있다는 괴담도 있다. 십자군 기사단의 분파인 '템플 기사단' 과 이슬람 수니파의 '하사신' 들이 물밑에서 아직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으며, 세계 경제를 조종하고 있는 '프리 메이슨' 에 대한 이야기도 무성하다.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야기' 를 좋아하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때문이다. 

실체적 증거를 들이밀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괴담과 기담을 퍼뜨린다. 

설사 그것이 정치적이든 상업적이든 그 어떤 특별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저 '재미로' 혹은, '흥미로' 이야기들을 지어낸다. 

'이야기' 는 어쩌면 인류의 특징이자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소설가는 인류의 이러한 특질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직업일터다.

이야기를 '지어내도', 또 그것을 '퍼뜨려도' 된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람들. 

누구보다 그럴듯하고, 어떤 일들보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 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들. 

공인받은 이야기꾼들.


장용민 작가는 역사 속 괴담을 허투루 보아 넘기는 사람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천재 시인으로 잘 알려진 이상과 지금은 사라진 조선총독부의 건물에 얽힌 괴담을 활용해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이라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냈을 때 부터 말이다. 

이번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히틀러와 그의 수하들, 그리고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당시 독일의 과학기술에서 접점을 캐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1969년 미국. 인파가 가득찬 극장에서 어린 소년을 쏘아죽인 살인범 오토 바우만. 

사형을 코앞에 둔 그는 몰락한 칼럼니스트인 크리스틴 하퍼드를 지명, 방문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비록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지금은 일을 안하고 있지만, 뛰어난 언론인이었던 그녀는 죽음을 코앞에 둔 살인범의 이이야기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바우만의 이야기는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토 바우만은 유태인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가족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했던 그는 패망한 독일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전후 처리를 돕고 있었다. 독일어를 비롯, 폴란드, 러시아, 체코,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그는 소련측과 히틀러의 시신을 확인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고, 아직 그 어느곳에서도 히틀러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히틀러를 뒤쫓는 연합군의 특수 부대 '아디 헌터(Ady Hunter)' 에 대해 알게 된다.(아디는 아돌프 히틀러의 아명)

일련의 과정을 거쳐 아디 헌터에 입대하게 된 바우만은 전후 처리 과정 중에 압수된 독일의 기밀문서들을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는데, 독일 최고의 뇌 전문의이자 수많은 유태인들과 포로를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생체 실험을 거듭한 '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가 뇌 이식 수술에 성공했다는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통해 히틀러와 융케 등 나치의 핵심인사들이 뇌를 이식해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수십년에 걸친 아디헌터의 '히틀러 사냥' 이 본격화된다. 


흥미진진하지만, 아주 새로운 전개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영원히 사는 존재' 가 인류 사회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조종하고 있다는 설정은 고전에 가까운 클리셰다.

다만, 그 존재의 정체가 무엇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가 관건일 따름이다. 가장 흔한 존재는 물론 뱀파이어 같은 이들이 불멸의 삶을 이용해 아주 오랫동안 거대한 사업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정치계와 법조계를 좌우한다는 설정 정도일 것이다. 이는 혈통을 따라 대를 이어 기업체를 물려받는 서구 자본주의의 핵심 네트워크의 1차원적인 은유인 셈이다. 이런 존재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엔터테이너로 등장하는 정도가 좀 발전된 정도랄까.

[귀신나방]의 히틀러 역시 크게 신선한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데, 솔직히 기예르모 델 토로의 "스트레인" 시리즈가 오버랩 되는 부분이 눈에 띄였다.

하지만, 이 역시 고전에 가까운 클리셰이긴 하다.

모든 것을 다 이룬 갑부가 시한부의 삶 속에서 영생을 주겠다는 이의 유혹에 넘어가는 클리셰는 고대 세계 각지의 신화에서는 물론, 진시황의 역사적인 기록에도 등장하는 바이니... 


히틀러가 '자본' 의 힘을 깨닫고, 그에 다가가는 과정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캔자스 주 린츠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역시 실제 존재하는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는데, 아이디어와 소재, 전개 모두 깔끔하게 접합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방식은 주인공이 제3자에게 자신의 과거를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에서 자주 쓰이는 방식이다. 사건을 설명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허나, 캐릭터를 부각시키기엔 참 비효율적이다.

제 3자에게 설명하는 방식이기에, '나는 그때 기분이 이랬소, 저랬소, ' 라는 식으로 단순히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이해하기엔 좋지만, 작가의 특별한 장치가 없다면 감정이입이 참 어렵다.

이 작품 역시 이 장단점이 모두 부각된다. 

오토 바우만이나 크리스틴, 심지어 히틀러까지도 전형적인 성격인데, 작가가 이야기의 전달과 정서의 전달 중 하나를 확실히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그나마 크리스틴에게 이입을 유도한 장치와 작가의 의도가 느껴졌지만, 그도 정서의 전달이라기보다 드라마, 아니 '이력'전달에 가까웠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깊은 드라마나 정서적 공감을 이끌 수 있는 장치-가족이나 연인 따위의-를 부여했다면, 어느정도 예상 가능했던 마지막 장면이 보다 인상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는 저자의 선택으로 보인다.

사건도 전달하고, 정서도 전달하기보다, 장용민 작가가 정말 잘하는 것.

빠른 전개와,  적확한 구획, 요소마다 등장하는 강렬한 씬들을 위한 유려한 연출을 택한 것 같다.



이 책을 읽을때 즈음 인간의 뇌에서 두개골뼈로 향하는 림프관을 발견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지금까지는 없다고 여겨졌던 면역계의 연결고리를 찾았다는 건데, 인간은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아직 너무나 모르고 있구나, 싶었다.

그 와중에 '뇌 이식 성공' 을 전제한 소설을 읽으니, 사실, 스토리에 이입하기도 쉽지 않았다.

물론 나는 SF와 판타지와 같은 장르를 무척 좋아하기에, '소설적 상상력' 에 대해 누구보다 훈련이 잘 되어있다고 자신했지만, 뇌의 면역계조차 모르면서 뇌 이식을 성공할 수는 없을텐데, 그 존재 자체를 이제야 알았다는 기사를 봐버리니, 그 부분에서만큼은 소설적 상상력의 발현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이 선택한 "뇌 이식" "히틀러 생존" "네오 나치" 라는 일련의 소재들이 더 진부하다고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미국의 금융,자본 시스템, '연방준비은행' 을 주 소재로 택한 점도 흥미로웠다. 이 역시 장용민 작가 특유의 적확하고 간명한 묘사와 등장인물을 통한 강렬한 장면들로 정말 잘 활용했다. 마침, 내가 이 책을 읽을 즈음에 "황금" 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어서 이 책에 간추린 미국의 통화정책이 쉽게 이해됐고, 그를 이용해 미국을 지배할 야심을 키우는 히틀러의 야욕 역시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의 금융시장 전체가 몇개의 은행으로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는 뜻이다. 

참고로, 미국의 금태환은 1933년,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폐기됐다. 1929년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이겨내기 위한 방안들 중 하나였는데, 이전까지 미국의 달러는 금과 동가였다. 1달러의 지폐는 금 1달러어치와 동등했다는 뜻이다. 은행은 금을 맡고, 지폐는 금을 맡았다는 차용증서라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금은 희소성이 있어서 미국에서 발행된 돈은 세계 전체 금의 매장량을 쉽게 넘어버렸고, 이는 공황의 단초로 작용한다. 금과 지폐의 가치를 동등하다고 믿어온 시장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린 것. 금 본위제의 폐기는 시장을 위한 필수적인 선결과제였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작가는 이 부분에서는 소설적 상상력을 가해 금태환 중지의 시기를 뒤로 많이 미루어 케네디 대통령과 연관시켰다. 케네디의 암살설 역시 이 쪽 장르에서는 엄청나게 많이 활용했던 소재이긴 한데, 네오 나치와 연결시키기 위해 금 본위제를 끌어들인 것은 흥미로운 발상이었고, 효과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작품에서 활용된 '귀신나방' 이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음산한 연결고리로 작용하며 매우 흥미로운 시도로 읽혔다.

무엇보다 참 생소한 곤충이라서 전반적으로 평이한 소재들을 신선하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잘 해주었다.

정말 영리한 한 수 였다고 생각한다. 


각설하고,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완결성은 훌륭했다.

구성이 명확하고, 단선적인 서사를 플롯을 이용해 흥미진진하게 배열한 스토리 텔링 기술도 돋보였다. 

때문에, 약간 부족한 캐릭터가 더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일종의 대체역사물로 접근하면 상당히 재미있게 읽히는 면이 있다. 역사적 사실의 왜곡은 대체역사라면 충분히 허용되기도 하고. 장르의 속성에 매우 충실한 작품이기도 하다. 

장용민 작가는 협소한 우리나라의 문학계 안에서도 비주류로 분류되는 장르물에 특화된 작가이다.

이제, '장용민' 하면 어느정도의 완결성과 재미는 보장받을 수 있다고 여겨질 정도랄까.

뭐, 이런저런 아쉬움들을 토로하긴 했지만, 충분히 웰메이드로 평가될 만한 작품이었다.

엘릭시르의 한국 작가 라인업은 믿고 볼만한 수준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올 한해는 실망한 작품이 한 작품도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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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스터머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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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코끼리는 안녕] 이라는 특별한 소설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이었다.

이 책은, 지금도 가끔 출석중인 월례 독서 토론 모임에서 다룬 적이 있기도 했는데,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책이었다.

유독 그 날은 출석자도 많고, 강성(?) 패널들이 참석한 덕에 이 책이 수상한 상을 비난한 내용까지 있었고, 그 저주(?)덕인지 상 자체가 사라졌다.

나 역시 처음 읽기시작했을 땐, 이미지 과잉에 어디서 본듯한 캐릭터들의 향연처럼 느껴졌는데, 읽어가는 내내 묘한 매력을 느꼈더랬다.

뭐랄까, 강풀 작가나 주호민 작가의 웹툰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작화의 미숙함을 의도적 단순화를 통해 장점을 극대화하고, 그와 견고하게 맞아 떨어지는 연출과 이야기를 본 느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아무렇게 연결한 것 같은데, 결국은 듬성듬성해 보이지만, 잘 짜여진 큰 바구니 같은 느낌. 


그로부터 약 5년 후에 발표한 [커스터머]는 보다 세련된 문장과 안정된 연출을 이용해 '여전히' 통통 튀는 아이디어들을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갈음하는 기술을 선보인다.


판타지 문학의 오랜 팬으로써 이 작품의 근본적인 아이디어나 세계관이 막 '엄~~청나게' 신선한 것은 아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관이나 돌연변이, 의도적인 신체 개조 등은 고전적이랄 수 있을 정도로 흔한 소재다.

하지만, 누누히 언급해왔지만, 특정 장르의 문학들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장르적 한계가 존재한다.

클리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엄연히 공공재, 누구에게나 허락된 이야기의 '재료' 로 취급받는다.

판타지에서의 클리셰는 배추로 김치를 담그거나, 전을 부치거나, 쌈채소로 이용하거나의 차이에 불과하다. 심지어, 김치로 전을 부치거나, 찜을 쪄먹거나, 볶아 먹거나, 찌개를 해먹는 정도까지도 이해된다.

아주 약간의 새로운 것만 있어도 응원을 받을 수 있다.

김치 치즈 탕수육처럼.


그래, 이 작품은 딱 그렇다.

김치 치즈 탕수육 같은 책이다.


아주 신선하지는 않지만, 아주 새로운 조합이다.

익숙한 맛들의 조합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다.



'모래폭풍' 이 있었다.

그 이후 인류의 삶은 크게 변했다.

'재건' 이후, '모래' '비취' '태양' 이라는 세개의 구역으로 크게 나뉘었다.

모래구역은 일종의 슬럼가로, 가장 가난한 계층이 거주하는 구역이었다. 사막에 세워진 도시였고, 일년내내 모래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중엔 모래가 가득해서,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했고, 집 안에서는 언제나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 살아야 했다.

태양구역은 이름 그대로 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햇살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람들이 태양구역을 보고 '자연을 독점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비취구역은 모래구역 인근에 위치한 곳으로, 거대한 유리돔과 동굴 구역, 둘로 나뉘어 있었다. 유리돔 안은 인공태양을 통해 빛과 온도를 조절할 수 있었고, 동굴 구역 사람들은 지하 깊숙한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룰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이 세 구역은 사실상 계급이나 다름없었다.

모래구역 사람들은 모래 폭풍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버텨낸 이들이었지만 '웜스' 라고 불리며 경멸당했고, 비취구역 사람들은 모래 폭풍 동안 방공호에 숨어있던 사람들로 '뻔뻔한 병신' 취급을 당했다. 모래폭풍 당시 가장 피해가 적었던 태양구역 사람들은 그것이 특권인양 누리며 모래인들과 비취인들을 한껏 경멸하고 천시했다. 

모래구역의 중학생 '수니' 는 통합 정부의 지역간 화합 정책의 일환으로 태양구역의 중심이자 수도인 '시드' 의 중앙 고교로 진학하게 된다. 룸메이트는 돌연변이 '중성인' 으로 남녀가 한몸에 있는 '안' 으로 배정되어 수니의 생활은 하루아침에 180도로 바뀌게 된다.

한편, 이 세계는 유전학과 의학이 극도로 발달해 사람의 신체 일부를 자유롭게 변형시킬 수 있었다.

몸에서 꽃이 자라게도 할 수 있었고, 피부를 비늘로 덮거나, 레이스 무늬를 넣거나, 눈동자를 바꾸거나, 다른 목을 달거나, 날개를 달 수도 있었다.

이런 행위들을 '커스텀' 이라 했고, 이렇게 신체 일부를 변형한 이들을 '커스터머' 라고 불렀다. 

커스텀은 일종의 패션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사회적으로 찬반이 나뉘는 중이었고, 일부 커스터머들을 혐오하는 일파도 생겨났다. 그들을 '커스터비아' 라고 불렀다.

수니는 열렬한 커스텀 애호가로, 커스텀은 자신의 외모를 스스로 선택하는 행위라 여겼다. 언젠가 반드시 커스텀을 하고 말리라는 굳은 결심을 한 터였다.

하지만, 뜻밖에 자신이 머리에 뿔이 있는 돌연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새 학교 생활에 혼돈이 끼얹어진다.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해리 포터' 시리즈와 '바스라그 연대기' 시리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서 학창생활을 한다는 점이나, 마법과 같은 과학기술들이 휘황찬란하게 펼쳐진다는 점, 온갖 괴이한 신체 개조인들이 등장한다는 점 등에서 비슷한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디어들은 단순히 재료에 불과하다. [커스터머]는 완벽하게 그 작품들과 궤를 달리한다.

우선 [커스터머]의 주인공인 '수니' 와 '안' 은 사실상 인격적으로 상당히 성숙되어 있다. 예를들어, 수니는 안에게 '비취구역 사람들' 에 대한 편견을 무심결에 표출해버리지만, 안의 상처받은 표정은 단박에 알아채고, 자신의 실수를 인지, 만회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고등학교 1학년 치고는 지나치게 성숙한 인격이다. 해리포터처럼 좌충우돌하며 인격적, 육체적 성장을 세세히 담을 의도가 아예 없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이 작품은 고등학생 수니의 성장담이 아니라, 성숙된 자아를 찾아내는 일종의 성숙담으로 보인다.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라기보다 대학생, 성인들의 이야기로 읽히고, 수니와 안의 관계에 대한 묘사도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사실은, 그 페이지들을 넘긴 뒤에야, '어, 얘네는 미성년자인데? 고작....고1인데?? 라며 흠칫 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나도 별 수 없는 아재구나, 싶기도. ㅋㅋㅋ )

수니가 자신의 뿔을 알아채고, 뿔이 피부를 찢고 자라나는 과정 역시 성숙의 메타포로 읽힌다. 

아주 거칠게 예로 들면, 성장의 플롯은 애벌레가 고치를 만드는 과정이고, 성숙의 플롯은 나비가 결국 그 고치를 찢고 날아오르는 과정이랄 수 있는데, 수니의 내적 갈등과 외면의 변화는 후자로 읽힌다. 

커스터머가 일종의 성인식처럼 그려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주인공들은 어린아이에서 성인이 되는 의미의 성인식이 아니라, 이미 성인이지만, 그것을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의미의 성인식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수니와 안이 좀 더 미성숙한 모습으로 좌충우돌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을 읽고 싶기도 했다.

고1치곤, 너무 어른스러워~ 아니, 내가 '고1'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이 깊은 것일수도 있겠고.

물론, 그만큼, 이야기 안에 푹 빠져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물들이 너무 성숙하다보니, 내-외적 갈등들이 너무 고상하게 풀려나가서 탁월한 흡입력에 비해 이야기의 흐름에 있어 응축과 폭발이 약하게 느껴져서, 그 부분이 아주 조금 아쉬웠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작가의 의도였으리라.)

전체의 흐름에 군더더기도 거의 없고, 다음장이 궁금해서 몇 페이지는 대각선으로 후다닥 읽고, 마지막 장까지 덮은 뒤, 다시 돌아가서 천천히 숙독을 하기도 했다.


그 밖에 이야기 할 메타포들도 정말 많다.

세대차별, 인종차별, 젠더차별, 계급차별, 외모차별 등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디테일하게 녹여낸 세계관이 정말 멋졌다.

작가가 이렇게 만든 세계관을 이 책 한권으로 끝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연작의 형태든, 연속의 형태든 많이 나올 것 같다.

오노 후유미의 십이국기처럼, 세계관 안에서 단편과 장편이 교차되며 완성도를 높여가는 형태도 좋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 작가가 세계관과 서사에 얽매이지 않는 듯, 아니, 이미 자신의 세계관에 완벽히 적응한 듯한 인상이 좋았다.

또렷하게 구성된 이세계 안에서, 역시 뚜렷한 인상의 캐릭터들을 자유자재로 풀어놓을 수 있는 대담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세계관과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이 엿보였다는 의미다.

게다가 나보다 훨씬 어린 작가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겠지??

정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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