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는 해피엔딩
조현선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스물한 살의 소미가 의문의 화재로 삼촌과 동생과 집을 모두 잃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집이 불타고 있던 시간 소미는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집으로 가던 중 동산 어딘가에 쓰러져 잠이 들었었다. 화재의 원인은 방화로 밝혀졌으나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소미는 알리바이가 확실치 않아 화재를 일으킨 범인의 용의선상에 올라와 있다. 소미는 유일한 가족을 잃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슬프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하지도 않았다.

나의 분신처럼 내 어깨에 딱 붙어 있고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말하는 인형이 내 곁에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소미 곁에는 말하는 인형 곰이가 있다. 불타버린 집이 있는 동네를 떠나 과거를 다 잊고 새롭게 정착한 소도시에서도 외롭지 않았던 이유는 곰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일들이 가득한 '우신 장난감 가게'의 우신과 민호를 만나면서 소미의 삶은 변하기 시작한다.

소설은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우리 주변에 충분히 있음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과 다정함이 더해져 따뜻하면서 사랑스러운 소설이 탄생했다. 재미와 감동에 반전까지 고루 갖춘 웰메이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를 애틋하게 보듬어 주었던 언니와 관계가 틀어진 지희, 학교 폭력을 당하는 철웅을 말없이 도와주었던 연우, 손을 다쳐서 더이상 기타를 칠 수 없게 된 기타리스트 현주, 어린 딸을 잃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주인집 할머니, 아픈 과거를 안고 살아가던 소미를 쫓던 형사 권선형, 민호와 우신의 관계,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드러난 충격적인 소미의 과거까지 풀어낸 탄탄한 플롯과 개성있는 캐릭터의 조화는 완벽한 엔딩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모티브가 되었다. 독자들은 소설속 캐릭터들이 두 번째 삶에서는 모두 해피엔딩을 맞이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갖게 된다.

이 아이들은 애정에 반응해서 숨을 쉬기 시작해. 네가 어떤 존재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주면, 그리고 운 좋게 그 녀석들에게 힘이 있다면, 숨을 쉬면서 존재하기 시작하지.(229쪽)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건 그저 온기가 담긴 한 웅큼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 하나만 있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삼스럽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없는 듯 느껴졌다. 발목에 엉겨붙었던 불행은 전부 떼어내고 소박한 현실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소미가 나아갈 길이었다. (315쪽)

살다보면 과거에 발목 잡혀, 혹은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다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발목에 엉겨 붙어 있는 불행과 미련과 아쉬움과 후회를 떨쳐 내는 것이 남은 삶을 해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나 역시 뒤돌아보지 말고 한걸음씩 뚜벅 뚜벅 나아가 보려고 한다. 소미가 그랬던 것처럼.

출판사에서 무상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북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처럼 - 2024 창비그림책상 수상작
포푸라기 지음 / 창비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오랜만에 그림책을 펼쳤다. SNS를 통해 서평단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림책 서평단을 신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포푸라기 작가님의 그림을 보는 순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눈 위에 마음을 차분히 내려앉게 하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새처럼>은 제2회 창비그림책상 대상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한 아이가 눈길을 걸으며 펼쳐내는 상상을 그리고 있다. 눈밭에 한 아이가 서 있는 아주 간결한 그림들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지만, 계속 반복해서 읽을수록 겹겹이 쌓아올려진 다양한 감정들을 건드려 준다.

포푸라기 작가님의 첫 창작 그림책인 <새처럼>에는 오늘날 곳곳에서 크고 작은 위기와 폭력을 마주하게 되는 어린이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한다.

함박눈이 내리는 눈밭에 홀로 서 있던 아이가, 새 발자국을 발견하고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점점 늘어나는 발자국이 반가운 아이는 신나게 뛰어 논다. 그리고 발자국들이 새처럼 보이고, 새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신도 새처럼 훨훨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그림자가 드리워져 두렵지만 자유를 찾아서, 평화를 찾아서 떠나는 여정 속에서 희망을 꿈꾸는 듯 하다.

 


거듭해서 또 읽고 또 읽게 하는 그림책이다. 읽을때마다 다른 해석을 하게 되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지 고민하게 한다. 단순한 선과 최소한의 색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그림이지만 읽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달아 오르게 하는 강렬한 울림이 있는 책이다. 그림책에 담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가치를, 상상력과 희망을 통해 또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폭넓은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수준 높은 그림책이다.

<새처럼>의 내용과 구성은 결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지 않다. 우선 그림을 눈에 담은 뒤,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고 자유롭게 상상해 보는 고요한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오랜만에 마음이 맑아지는 그림책을 만나서 참 반가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실 온라인 게임
김동식 지음 / 허블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출간한 김동식 작가의 단편소설집 <현실 온라인 게임>. 김동식 작가가 초단편 외길 9년 만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집을 냈다. 제목만 봐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던 게임이 현실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표제작인 <현실 온라인 게임>에는 현실 같은 게임, 게임 같은 현실에 중독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외에도 <이 세계 과몰입 파티> <내일을 부르는 키스>까지 김동식 특유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현실 온라인 게임>에 등장하는 김남우는 과거에 * MMORPG 게임을 중독적으로 즐겼다. 그가 이 게임에 탐닉한 이유는, 현생에서는 별 볼일 없지만, 온라인 게임 속에서는 적어도 무언가가 될 수 있었기(9쪽)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회사원인 김남우는 잘릴 위험은 없지만 비전도 없고, 크게 바쁘진 않지만 크게 벌지도 못하는 무채색 삶을 살아간다. (10쪽) 그런 삶에 염증을 느끼던 중 홍혜화라는 여직원을 짝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통해 캐릭터 게임의 세계로 초대된다. 김남우가 '마법사'라는 닉네임으로 참여하게 된 이 게임의 이름은 <현실 온라인>이다.

홍혜화와 함께 게임에 참여하며 현실 속 퀘스트를 하나씩 완료하면서 받게 되는 보상의 재미에 빠지게 된 김남우는 더 높은 레벨로의 상승을 꿈꾼다. 그러나 레벨 업이 될수록 이 게임의 수익구조가 궁금해지고 뭔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레벨 10까지 올라갔을 때, 수익구조가 범죄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퀘스트 달성을 포기하던 김남우, 갈등 끝에 계속 게임에 참여하며 고급 퀘스트를 달성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순간 여자친구인 홍혜화의 핸드폰에는 이런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당신은 마법사를 전장에 보내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특별 퀘스트 완료 보상이 주어집니다.'라고. 결국 홍혜화는 남자친구 김남우를 이용해 자신의 퀘스트 달성하고 보상을 받았던 것이다. 소설의 결말, 김동식 작가는 역시나 반전 포인트를 배치해 독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

세 번째 소설 <내일을 부르는 키스> 역시, 김동식 작가만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신혼부부인 김남우와 홍혜화는 신혼여행지에서 남녀가 서로 키스하는 자세를 하고 있는 신비한 석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대들의 사랑이 변치 않는다고 자신하는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절대 변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한 신혼부부는 키스를 하지 않으면 내일이 오지 않는 저주를 받게 된다. 키스를 하지 않으면 같은 날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그들은 반복되는 하루를 이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쓰는 재미에 빠진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은 비행기 안, 한 사람은 아르헨티나. 26시간 거리만큼 떨어져 버리고 키스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같은 날이 계속 반복된다. '내일을 부르는 키스'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던 것이다. 공항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만남을 시도하려다 결국 김남우는 총상을 입어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홍혜화는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매일 찾아와 키스를 하고 돌아간다. 내일을 부르는 키스를....

'현실 온라인 게임'과 '내일을 부르는 키스' 모두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평생 써도 줄지 않는 부를 누려보고 싶은 욕망, 즐거웠던 순간을 계속 만끽하고 싶은 욕망까지 인간은 대부분 비슷한 욕망을 품고 산다. 그러나 욕망에 지나치게 탐닉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릇된 판단을 할 수도 있다.

김동식 작가의 소설은 삶의 보편성에 기대어 인간의 본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면서 다양한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 준다. 유머와 오락적인 요소 저변에 깔려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냉철한 사회 비판이, 독자들이 끊임없이 김동식 작가의 소설을 찾는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실 온라인 게임> 역시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도덕적 딜레마와 인간의 깊은 내면을 다루고 있다. 가볍게 읽기 시작했던 독자들이 무릎을 탁 치며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이야기꾼 김동식 작가가 다음에는 어떤 소설을 들고 나타날지 기대가 된다. 이제 '김동식'은 새로운 장르,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파리의 한국문학 전도사
임영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외국어로 된 문학 또는 영화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번역가의 일상을 담은 책을 몇 권 읽었다. 영화 번역가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름 '황석희' 번역가의 첫 에세이, <번역 : 황석희>를 읽으며 번역가로서의 생활과 작업 환경, 여러 작품을 번역하면서 경험했던 에피소드 등을 접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또한 일본 문학 번역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 권남희는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작가로, 그녀가 번역한 책과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까지 전작을 거의 다 읽었다.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닌 한국문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한국문학 전도사 임영희 작가의 이야기 <나는 파리의 한국문학 전도사>는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에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루 만에 다 읽어낼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정독했다. 비전공자인 임영희 작가가 한국문학 번역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어내야 했던 어려움, 예기치 않았던 좌절의 순간, 목표하는 바를 이뤘을 때 작가가 느꼈던 희열 등이 고스란히 감동으로 전해졌다.
​​
프리랜서 번역가로 산다는 것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육자의 길을 가려던 꿈을 접고 번역가의 길에 들어선 임영희 작가는 두 번째 작품을 번역하면서 번역가라는 직업이 자신과 잘 맞는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게 되었다. 또한 한국문학 번역을 통해 한국을 프랑스에 알리는 데 일부나마 기여한다는 점에서 뿌듯한 자부심과 보람을 느꼈다(25쪽)고 한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기는 하지만, 항상 원하는 출판사에서 원하는 작품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아무리 일을 사랑하고 열정이 있어도 그것으로 생활이 되지 않으면 계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산다는 것은 늘 경제적인 불안정을 감수해야 한다(195쪽)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여러 번의 고비를 통해 이런 사실을 터득하게 된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어떻게든 무너지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삶은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문을 열어준다는 사실을 나는 이후에도 찾아온 몇 번의 고비를 통해 터득했다.(124쪽)


임영희 작가는 낯선 땅 프랑스에서 번역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출구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고 그것이 작가의 삶을 전진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35쪽).

임영희 작가는 자신이 번역한 책이 호평을 받고 나쁘지 않은 판매 성적도 거두고 간혹 문학상 후보에 오르거나 문학상을 받기도 하면서 한국문학 번역가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그런 성과들은 작가가 응달에서 묵묵히 작업해온 시간들을 보상해 주고도 남을 만큼의 거움이자 기쁨이 되었던 것이다. 그 지난했던 시간들에 경의를 표한다.

프랑스에서 한국문학 열풍을 불러온 것은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것과 더불어 프랑스 및 전 세계에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케이팝과 한국 영화 및 드라마로 대표되는 한류열풍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184쪽)

프랑스에서 한국문학 시장성이 성장과 저성장을 오르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했을 때 한국문학의 인지도는 계속 높아질 수밖에 없으면 전망 역시 밝다고 하니(185쪽),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번역 시 봉착하게 되는 난제

모든 문학작품의 번역에 동일하게 주어지는 난제일 수 있는데, 임영희 작가는 한국문학 번역 시에 가장 자주 봉착하게 되는 두 난제로 시제 문제와 문화 차이를 이야기한다. 또 하나를 덧붙이자면 원문과의 충실성 문제라고 한다.

움베르토 에코 작가가 '번역이라는 것은 단어와 문장을 그대로를 옮기는 작업이 아닌 세계와 세계를 충실하게 옮기는 작업'이라고 말한 점이 깊이 공감된다.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점인 것 같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는 말했다. 번역에서 충실성이란 단어와 단어가 아닌, 세계와 세계를 충실하게 옮기는 것이며, 번역가란 단어의 무게를 재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의 무게를 재는 사람이다, 라고. 내가 좋아하는 좋은 번역이란 작가의 의도, 정신, 영혼을 배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원문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를 취해 보다 매끄럽고 유려한 현지어 문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단어들에 집착하지 않고 문장이나 문맥의 뉘앙스를 보다 잘 살리는 번역이다.(192쪽)


특히 외국문학 번역가가 아닌 한국문학 번역가가 되고 싶은 이들은 잘 알려진 언어권 번역가에 비해 추가적인 안목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국어를 읽지 못하는 출판인들이 한국 작품의 퀄리티를 판단해서 출판 결정을 내릴 수 없으므로 번역가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외국 독자층의 주목을 끌만한 한국 작품을 발굴해 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역할을 임영희 작가가 누구보다 능동적이고 다이내믹하게 잘 해내고 있기에 좋은 한국 작품들이 프랑스에서 빛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랑스러웠다.

한국문학 번역가의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임영희 작가의 여정을 한번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단순한 호기심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수많은 좌절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엄중한 경고가 담겨 있는 책이므로 단단한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임영희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의 권위에 힘입어 프랑스에서 한국문학이 다시 한번 뜨거운 열풍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사랑하는 미친 누나 네오픽션 ON시리즈 30
배기정 지음 / 네오픽션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형철 작가님의 책 '인생의 역사'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덕질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탁월함을 갖게 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덕질은 우리에게 그런 덕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자꾸만 나를 혐오하게 만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와 맞서고 있다'라고. 프로 덕질러로서 굉장히 공감됐던 문장이어서 이곳저곳에 자주 인용했었다.

<나를 사랑하는 미친 누나>의 초반부를 읽으며, 최근 몇 년간 덕질하고 있는 나의 최애 뮤지션이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리고 내 모습은 소설 속 주인공 지세준을 사랑하는 '누나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나와 비슷한 감정선으로 누군가를 덕질하며 행복을 느끼는 어떤 누나의 밝은 이야기일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대가 처참히 무너졌다. 선 넘는 여자들의 이야기, 덕질이라는 이름으로 결코 용인되어서는 안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호러 장르의 소설이었다.

덕질 비지니스가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두 가지다. 여자들의 선을 넘은 애정과, 유사 연애를 말아주는 최애.(11쪽)

내가 덕질하고 있는 뮤지션을 이 소설과 연관 지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소설 속 연예인 지세준과 그를 덕질하는 홈마 연희정, 아니 사생팬 사이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험하고 거칠고 흉포하다. 이건 결코 사랑이 아니다. 연희정이 올린 영상 덕분에 지세준은 한물간 아이돌에서 다시 주목받는 아이돌로의 비상을 꾀하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연예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순순한 덕심으로 끝났어야만 했다. 욕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지지하는 마음 즉 덕심이라는 것은 불현듯 교통사고처럼 찾아온다. 누군가를 '사랑해야지' 마음먹는다고 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덕질 인생 4년 차인 나는 확실히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하게 찾아온 그 마음을 삐뚤어진 욕심으로 채운 연희정이라는 인물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나는 미친 것 같아요. 맞는 말이야. 누나, 이거 칭찬 아니에요. 미치지 않고서야 되겠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야, 사랑하는 일이야. (213쪽)

소설 속 이야기는 전적으로 허구가 아닌, 현재에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욱 섬뜩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최애 연예인의 집 앞으로 찾아가고, 사생활을 염탐하고, 급기야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가 기함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간간이 기사로 접하면서, 덕질하는 마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최애 연예인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을 한다.

최애와 팬이 서로의 니즈를 채워가면서 작동한다는 뜻의 '덕질 비즈니스'. 굉장히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단어이다.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미친 짓'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감정에 깊숙이 빠져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도 안다. 팬심이라는 감정이 단순히 '미친 짓'으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팬'이라는 이름을 더럽히는 '사생팬'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덕질이 스토킹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최애 연예인을 소중하게 지켜줬으면 좋겠다.

최근에 읽은 책 <나는 파리의 한국문학 전도사>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순전히 방탄소년단 덕분'이라고, '삶의 난관을 딛고 일어서자는 불굴의 의지와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으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너무도 깊어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그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라고 고백한 프랑스 여인의 사례를 본 적이 있다.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삶의 탁월성을 가지게 만들어주고 하루하루를 빛나게 만들어준, 심지어는 생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순간에 다시 용기 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게 만들어준 나의 최애 연예인에게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다. 매너 있는 덕질과 건강한 팬덤 문화를 만들어가면 좋겠다. 나의 잘못된 행동 하나, 한 끗 차이로 팬덤 전체를 조롱과 지탄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예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빛과 어둠 사이를 묵묵히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들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고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공인으로서의 삶과 개인으로서의 삶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진짜 팬이라면 최애 연예인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배기정 작가는 아마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수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연예인에게 열광하는가?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그녀)의 매력은 무엇인가? 그리고 덕질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덕질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고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하면서 소설 <나를 사랑하는 미친 누나>를 떠나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