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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된 불평등 - 첨단 기술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분석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가
버지니아 유뱅크스 지음, 김영선 옮김, 홍기빈 / 북트리거 / 2018년 12월
평점 :
한동안 말랑말랑한 책만 읽다가, 제목부터 진지한 책을 만나 가슴이 뛰었다.
모두가 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 줄 새로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인간이 기계와 AI에게 뒤지는 사회에 대해 암울한 전망을 내비치며
'인간다움'과 '아날로그'의 아름다움으로의 회귀를 낭만적으로 읊을 때
<자동화된 불평등>의 저자 버지니아 유뱅크스는
공동체의 디지털 정보가 정부와 기업에 의해 수집, 저장, 공유되고
그것이 사회적 의사결정 및 사람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하고, 책을 써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은 분명 사회적 약자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가난한 사람들'이다.
여타의 사회적 소수자들 중에서 가장 하위층에 있는 복지의 대상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사회와 국가가 다른 대상들(다른 소수자들)에게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전체주의적인 감시망을 어떻게 펼치고 유지하는지,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정밀하고도 확실하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 처벌에 집착하고 통제하는지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영구적으로 최하류층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수단과 구조를 만들고 대를 이어 물려주는지에 대해서
비교적 쉽게 (디지털 시대 및 첨단 기술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에게 설명한다.
나아가, 어떻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지까지도 언급한다.
책에서는 미국 최초로 보스턴에 세워진 (1662년에...) 구빈원을 소개한다.
청교도적 관점의 사람들이 시혜적으로 베푼 구호 활동이
1820년대 미국과 영국의 전쟁과 미국의 대공황을 겪으며
자유민 성인 남성 인구의 약 1/4이 실직하였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보다는 '구제가 필요한 빈민'의 증가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공공기관에 가두어 빈곤을 통제하고자 했던 국가의 정책으로 바뀌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다.
구빈원의 가혹한 환경으로 노동하는 빈민이 원조를 구하는 일을 단념시키는 것.
구빈원에 들어가려면, 자유민으로서 누리는 모든 기본 시민권의 박탈을
받아들인다는 빈민 서약을 하도록 요구받고
투표나 결혼을 할 수도 없고, 공직을 맡을 수는 더더욱이나 없었으며
심지어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부유한 가정과의 접촉을 통해 '구제'하기 위해
부모와 떨어뜨려 놓고 견습생이나 가정부로 내보내지거나
개척자 농장의 무임금 노동력으로 보내지기도 했다고 한다.
반면, 구빈원의 운영자는 개인적으로 이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단다.
보수의 일부로 땅과 입소자의 노동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고
"규모의 효율성"과 유능한 빈민의 입소를 단념시켜야 하기 때문에
열악하고 불편하며, 입소된 사람들 스스로 희망을 버리게 만들었다.
왜냐고?
가난하지만 '유능'한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 구빈원이고
구빈원은 아이들, 정신질환자, 신체장애자 및 발달지체자,
고령자, 병자등이었다.
그들을 받아주는 '바깥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은 밖의 공동체에 속하기에는 '능력'이 없었기에
사회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고 '무위도식'하고 있는 자신들에게 베푸는
'돌봄' 덕분에, 겨우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세기 사회철학자 너새니얼 웨어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인류애를 접어 두면, 그런 무위도식자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사회에 가장 큰 이익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낯설지가 않다.
처음에는 나와 '가난한 사람들'을 분리하고 타자화해서 인식하며 읽다가
누구나 디지털 의사결정 시스템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당장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회 집단의 일원으로서 디지털 감시의 표적이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하다못해,
아프기만 하면 세상 끝까지 도와줄 것처럼 얘기하는 사적 보험들도
막상 병원에 들어가면 연락이 끊기고,
이런저런 핑계로 쥐꼬리만한 보상금을 주며
다음번 보험료는 그 보상금 수령으로 인해 훌쩍 올리거나
아예 다른 보험에 가입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경우를 풍자한
보험업계의 (타사를 겨냥했겠지만) 광고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지 않는가?
능력이 있고, 혹은 주류에 속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조금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얼마든지 가혹하고 깐깐하게 다가오는 경험은
이 '자동화된 불평등'이 비단 소수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가난한'을 지워버리면 모두의 문제가 된다.
공적 혜택에 접근하거나, 치안 유지가 잘 되는 지역을 통행하거나
의료보험 제도 안에 들어가거나, 국경을 넘을 때
더 높은 수준의 데이터 수집 요구에 맞닥뜨리게 되며,
그 데이터가 그 사람들을 의심과 추가 조사의 표적으로 삼는데 이용되는
집단적 적신호와 되먹임되는 불평등의 순환고리는
오로지 빅데이터의 문제일까?
획기적인 기술과 제도도
그것을 사용하는 소수 권력집단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디지털 감시 인프라로 작용하여
역사상 가장 꼼꼼한 통제력을 발휘하는
불평등의 수단으로 전락하고야 말 것이다.
그래서 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우리'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사람 하나하나가
스스로를 두려워하고 살피며
변화를 위한 결단을 내리고 결정해야 한다.
자동화된 불평등은 우리 모두에게 해를 끼친다.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정책과 네트워킹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장 저열한 수준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만성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해 경멸감을 갖고서 만든 프로그램에서
언젠가 우리 자신을 맞닥뜨리게 되지 않으려면
남의 일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