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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물거품 ㅣ 안전가옥 쇼-트 8
김청귤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5월
평점 :

인어공주 속 인어는 물거품으로 사라진다. 왕자를 사랑하는 게 삶의 이유였던 것처럼 물거품만 남기고 사라진다. 왕자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어가 마녀를 사랑한다면? 왕자에게 숱한 선택지 중 하나였던 인어가 아닌 마녀에게도 인어에게도 서로가 유일한 존재가 된다면 어떨까.
김청귤 작가의 재와 물거품은 인어와 무녀의 사랑이 주된 줄거리였다. 사랑 이야기 말고도 이렇게 현실적일 수가 있나 했던 점들이 가장 인상 깊었다.
익숙한 아저씨들의 진상, 무례하고 당연한 사람들의 요구, 넌더리 나는 욕망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게 하는 친절이 녹아 있었다.


마리는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아이를 낳아 무녀로 다시 길러야 한다. 요구는 많고 자신도 의아한 기원을 한다. 사람들이 해를 입으면 무녀의 탓이고 별일 없으면 마리의 덕이다가 쓸모없는 존재로 잊힌다. 그러다가 또 사람들의 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마을의 무녀다. 마리는 제를 지내다 수아를 만난다. 말이나 신체가 다른게 생긴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유일함이 되었다.
요괴를 만나느라 태풍을 막지 못했다며 마리는 화형에 처해진다. 저주를 내릴까 봐 무서워하고 축복해 주지 않을까 봐 굽실거리다 아이를 낳아야 하지 않겠냐며 치근덕대고 기분 나쁜 소리를 하던 마을 사람들은, 마리의 모든 시, 분을 자신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리의 눈앞에서 수아는 작살에 위협을 당했고, 마리는 화형에 처해졌고, 마리와 수아는 다시 살아났다.


수아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마리 곁에서 영원을 맹세한다. 마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닿을 때 울컥 치솟는 질투에도 마리 곁에 머무른다. 기억을 잊고 자신을 두고 한참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그런 마리의 곁에 머무르는 수아는 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를 생각하면서 곁에 머무를 수 있어 행복했겠지. 그렇다면 마리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자신은 모르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을 곁에 두고, 음식을 해 먹이고, 영원을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기시감이 차오르지 않았을까?

수아가 영원을 맹세한 마리는 바다 밖에서 살았다. 수아는 마리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 말라가며 바다를 그리워했다. 마리는 영원에 의구심을 품다가 곁에 있길 바라며 약을 먹였다. 그들이 서로를 알지 못하면 서로 서로를 바라고, 후회하고 다시 돌아와 사랑을 한다. 두렵지 않았을까.
자신과 함께 있어서 계속해서 서로가 아픈 것 같아서.
마리가 수아를 잃었을 때 느낀 절망이 글 너머로 절절하게 느껴졌다.

뭐가 이렇게 사실적인지. 인어와 무녀가 나오고, 알지 못할 약이 나오고, 불을 다루고 물을 다루는 주인공이 나온다고 해서 사람이 변하지는 않는다. 시간이 변하고, 마리와 수아의 기억이 변했을 때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도와주는 수아와 마리를 자신들의 몸종이나, 품평해도 되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새끼치는 물건쯤으로 안다. 알지 못하는 게 근처에 달라붙으면 매도하고, 손가락질하면서 곁에 두는 수아를 생각도 제대로 못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다 마리의 부유함을 알고 나면 마리의 돈으로 자신들의 삶이 더 호화롭길 바란다. 자신 가족 중 누군가와 결혼하면 그 돈이 다 제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젊은 남성이었으면 저렇게 치근덕 거렸을까? 세상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자신들이 알려줘야만 하고, 알려준 대로 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고 굳게 믿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몇 번 말 붙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저 도시 사람들은, 더 많이 배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했겠지.

마리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렇다고 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부당하다는걸 안다. 하지만 수아는 어찌할 줄 모른다. 인어는 그런 거니까. 인어는 사람을 돕는 게 당연하니까. 그런 수아를 변화시키는 건 마리였다.

알아도 도와주지 않는 각박한 섬. 도움을 받아도 고마워하지 않는 섬이라고 생각했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질려 하다가 현실에 어디 비춰봤을 때, 뭔가 빠진 점이 있었다. 그나마 호의를 계속 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대신 사과하고 용돈을 쥐어주시던 할머니, 편견이 없던 아이들, 나중에라도 사과하고 집을 같이 정리하는 아주머니들.

원 앤 온리, 대체 불가능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미하던 두 사람이 기억을 잊고 사랑하며 서로를 태우는 사랑을 한다. 끝끝내 돌아와 일방적인 사랑이 양 방향의 사랑이 되기까지 금방이다. 생각해 보면, 마리가 다른 여자를 데려왔을 때, 남자를 데려왔을 때, 그때도 사랑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가능했을까? 같은 집,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게.
세상 사람들은 그들 주위를 맴돌며 제멋대로 평가하고 휘두른다. 그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사람이 바람과 사랑을 할 수 있나? 사람이 음식물 쓰레기와 정서적 교감을 할 수 있나? 아니란 걸 모두가 안다.
항상 수아와 마리가 가진 것들을 휘두르기 위해 머무른다. 마리의 재력을 모를 때엔 수아라는 일손을, 사람을, 여성을. 마리의 재력을 알고 난 후엔 친분에서 나올 어떤 것들을.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영원이 된다.
평화로운 마리와 수아의 일상도, 수아가 변해가고 그걸 안 마리가 수아의 유일한 사랑이 되었단 걸 알고 기쁘다가 다시 잘못된 것을 느끼다가 결국 돌아오는 게 기억에 남는다. 서로를 원하기에 서로를 아프게만 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발전을 돕는 관계라고 느껴져서.
그리고 아주 나쁜 사람들만 있던 게 아니라 다정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그들의 입으로 말해줘서 더 좋았다. 그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삶에서 만난 모두가 악인 같지만 되짚어 보면 스쳐간 좋은 사람 몇몇 정도는 기억할 수 있는 것 같아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개인과 개인의 사랑을 볼 수 있어서 그리고 현실을 비춰주는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좋은 소설을 알게 되어서. 퐁당 쇼콜라, 수국, 파도를 보면 마리가, 수아가 생각이 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