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좋았던 책에 대해서, 아무 말도 잘 안 적어진다. 나만 그러진 않겠지만, 유독 심한 것 같은데. 

너무 좋았어... 으헝헝.. 엉엉엉.. 광광대는 것 말고는 좋다고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도 하고,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다가 책(저자)에 실례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일 수도 있겠다. 나는 책을 혼자만 읽었어서, 꽤 오래 그랬어서, 이렇게 글로 책이 어디가 어떻게 좋았다..고 자세히 적어보는 게 온전히 나를 위한 행위일 수 있다니!(물론 그 이상이기도 하지만) 깨달은 지 얼마 안된 것도 있다.

 이렇게 왜일지 적어볼수록 그럴 필요까지 없는 이유들이라 이제 엉엉엉 거리지 말고 엉엉엉 카테고리 만들어서 본격 좋다고 광광대며 아무말이나 주워 섬기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내가 벼르던 리스트 xx권... 맨 위에 이 책이 있다.



책의 키워드는 여러가지가 있겠다. 책 소개에 쓰인대로 부제에 쓰여있듯 회복 일지, 트라우마, 생존자, 페미니스트, 페미니즘 교육, 몸, 양육, ..하고도 찾자면 더 있을 것이다. 모두 평소 내가 찾아 읽는 책들과 접점이 있는 화두들이라 내용을 모르는 ai라도 '이 책을 추천합니다'할 지경이겠지. 그런데 그에 더해, 뭐가 더 있는데. 나는 어떻게 그걸 설명할까.


"지금의 나는 무력감 속에서 '가부장'의 승인을 걱정하는 꿈속의 나에게서 멀리 와 있다. 그때에 비하면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몇 겹의 탈피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러나 억압의 세계로부터 탈출한 게 아니라 여전히 짓눌린 채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을 뿐이다. 나의 한 시절을 완전히 장악했던 남교사의 폭력과 야만이 이제는 강건너 구경해도 되는 먼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편적인 폭력이라 굳이 꺼내 매만져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경험을 한 번은 다시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꿈에서 깨 얼굴을 찡그린 채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깨달았다."


작가는 계속 현재 상태를 분석한다. 책에는 '그런 자신'에 대한 기록이 꽤 자주 나온다. 읽다보면 자연스럽다. '회복일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을 시작하면서 작가는 회복을 재정의하게 된 이유를 밝힌다. 

"일상의 회복'이라는 목표는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그 목표를 감당하기에 하루라는 단위는 너무 작고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내가 되찾겠다고 하는 '일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의심도 했다."

돌아가야 하는 일상만을 목표로 주의를 너무 많이 기울이면 현재가 흔들린다. 회복하고자 하는 상태는 더 멀어지기만 하고 현재 상태는 결핍을 더 크게 인식하게만 할 테니까. "회복에는 긍정적인 생각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과거의 부정적 경험을 떠올리는 것이 이때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되돌아가야할 일상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좀 편안해졌다."라는 고백에 상시로 곤두선 내 신경도 누그러진다.


최현희 선생님(작가보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편하네)은 내내 스스로를 다루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 와중에 몇몇 센 외부 자극(?)에 대해서는 의연하고 단호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이 글들에는 늘 웃음이 있다. 폭소라든지, 그게 아니라면 제목의 재치에서라도. 헛웃음이든, 아니면 별이를 보고 그려지는 미소일 수도. 이 기록을 보고 있는 읽는 사람에게는 묘한 동일시 감각을 준다.  공감도 하면서, 동시에 그런 상태가 아주 멀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책의 아주 웃기고 재미난 부분만 밑줄 인용 적으려고 했는데 그게 안되네. 또 써야지. 2022의 나는 이 책 너무 좋았으니까. 엉엉엉! 광광광!



누구나 그때는 최선이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후회되는 선택 같은 걸 한다. 당연히 남편을 정하는 일도 그렇다. 서로 노력해서 함께 성장하는 부부 사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10년을 넘게 살면서 친구들이 겪어낸 일들을 생각하면, 애초에 글러먹은 관계도 있는 것이다. 특히 페미니즘의 언어가 삶에 스미지 않았던 시절 나이의 압박에 떠밀리듯 선택한 결혼이라면, 아내나 엄마가 아닌 동등한 한 인간으로 나를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고를 만한 안목이 없던 시절의 선택이라면, 글러먹은 남편감을 골랐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거기에 애초에 여성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남자라는 게 현실에 많기나 했을까. 이것은 복잡할 것도 없는 단순한 확률의 문제다. [이혼정보회사] - P261

심각한 표정으로 무너진 교권에 대해 말하는 다른 한 편에서는 학생들이 문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교사의 권위가 없어져서라고도 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 교사에게 더 많은 권력이 생김으로써 해결되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며, 더 이상 그런 시대가 오지도 않을 것이고 와서도 안된다. 문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다 가로채버린 것이다. 권력이나 권위 같은 말은 이미 너무 많은 악한 구습을 포함하고 있어서 내 고민의 진의를 항상 망가뜨린다. [교사의 권력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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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애정 - 여성 작가 16인의 엄마됨에 관한 이야기
도리스 레싱 외 지음, 모이라 데이비 엮음, 김하현 옮김 / 시대의창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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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알게 된 후부터는 소소한 의식처럼 한해 마지막 날에 아무데나 펼치고 읽게 된다. 어제는 앨리스 워커와 어슐러 르 귄의 글이 특히 좋았다.


(자기 엄마 대답ㅋㅋㅋ 몇 대 맞으며 비판 받아야 된다고)



앨리스 워커가 젊은 시절 갓 엄마가 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스스로를 '우리의 젊은 엄마'로 전환해서 서술하는 부분이 놀랍도록 강렬하고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이 '젊은 엄마'는 글 말미에 이르러 "...은 저의 아이가 아닙니다."부분과 자연히 연결된다.


작가는 뉴잉글랜드로 이사가게 되는데 하필 어린 아이와 함께 독감에 걸린다. 낯선 곳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치료를 받으러 이리저리 알아보는데 이 과정에서 (아마도) '진보' 소아과 의사의 위선적이고 차별적인 태도에 불쾌감을 느낀다. 

워커는 이 경험을 "역겹지만, 엄마가 바라왔던, 결국은 이로운 결과를 여럿 남은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엄마와 아이를 사회의 어느 편이든 간에 이 남자와 반대편에 위치시킵니다. 이 여성, 엄마는 아이를 낳기 수년 전에 썼던 이야기를 마음속 더 깊은 곳에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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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했던 경험이 내면에 균열을 낸다. 그 전까지의 모든 개인사를 재위치시키고 소용돌이를 만든다. 너 왜 그래?라는 물음에 한마디로 대답을 할 수 없게 된다. 안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앎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원리를 학습하고 체화했는지의 영역에 속해있다는 것을 새로 깨닫는다. "마음속 더 깊은 곳에서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런 뜻일 거다.


"이제 엄마도 (고열로 어지러운) 그 순간 자기가 구성하고 있는 이야기에서 새로운 차원을 보기 시작합니다. 엄마는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며 말합니다. 왜 모든 역사는 현재인가. 왜 모든 불의는 세상 어딘가에서 일정 수준으로 유지되는가. "진보는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칩니다. 오직 혁명만이 다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 "그녀 자신"은 엄마 혼자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어느 때건 그녀는 그저 대표였을 뿐입니다."


대표성, 여성운동에서의 통찰, 그리고 이후에 다시 창작의 고통과 자기연민....을 갖게 된 이 "우리의 젊은 엄마"는 글 마지막에서 "우리의 아이"를 재정의한다. "제 아이와 저, 우리는 함께입니다. 우리는 엄마와 아이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의 온 존재를 부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자매입니다."209  이 문장은 책의 원제가 in search of our mother's garden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 풍성해지는 듯하다. 원문의 문맥은 모르지만 이 자체가 모성 담론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구제해줄 것 같아서ㅋㅋㅋ 왤까. 이제껏 학습해온 엄마 상을 따르려고 하다 보면 아이의 삶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까. 글 처음에서 워커가 뮤리얼 류카이저를 추모하며 말했듯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것의 필요성과 더불어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항상 아이를, 자기 아이의 삶을 긍정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선언이 이렇게 성립하게 된다. 



뮤리얼 류카이저, <어둠의 속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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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전자책 기준)



“나는 그 악몽과 화해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정신을 잃지 않았던 것은 계속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말을 하고있습니다.”


“당신의 침묵은 자신과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나에게는 인도 여성들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다는 수치심 유전자가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강간을 당하고 죄책감, 공포, 트라우마, 혼란 속에 사로잡혔지만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P24

나를 ‘드러냄으로써’ 얻은 이런 위로와 공감은 사실 전혀 원하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내게 진짜 공감과 위로가 필요했던 날로부터 30년이나 지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내 일에 충격과 분노를 느꼈지만, 나의 충격과 분노는 이미 오래전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들의 위로는 내게 전혀 새롭지 않았고, 내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는 이상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 P34

강간법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합니다. 남성이 남편을 강간하는 것은 허용될까요? 힘의 역학이 젠더의 역학으로 바뀔까요? - P80

나의 아버지는 나를 두 팔로 감싸 안고는 옥상으로 데리고 가면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고 싶니?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자."

그로부터 4년 후, 나는 강간 생존자를 상담하고 전문가를 훈련시키고 학교에서 강의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생존자 행동 요령의 기본 지침으로 사용했습니다. 아버지는 심리학이니 사회학이니 젠더니 하는 교육은 전혀 받지 않은 평범한 중년의 무슬림이었습니다.

전혀 복잡하지 않습니다. 생존자에게 아무것도 통제하지 말고 무한으로 수용하고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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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밥하면서 읽었다. 바다 앞에서 해방감을 누리는 소녀의 뒷모습을 그린 장면에, 좁은 공간을 왔다리 갔다리 어설프게 칼질하는 주부가 벅차오르는 거 뻔하긴 하다. 그런데 단지 그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요즘에 아이와 옛이야기 그림책들 읽다가 지쳐버린 지점이 있는데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책이었다.

옛이야기는 동일 문화권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 되고, 설화 자체에도 옛사람들의 핵심가치를 보존하고 전승한다는 역할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읽는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의 무의식에 자취를 남기는 서사로써 치명적 결함이 있다고 한다면 교과과정에 싣는 등의 관행은 개정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선녀와 나무꾼이 1학년 교과서에 지금 있다는데…)

옛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제국주의, 물질만능주의, 엘리트주의, 비장애 중심주의를… 그렇다 친다고 쳐서 치더라도(안댐) 개인적으로 늘 답답했던 지점은 구원의 일방향성이었다.

구원은 왜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질까. 미션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남자가 보상(주로 여자, 누구 딸)을 받는 얘기에서든지, 왕자를 기다리던 여자가 결혼해서 해피엔딩을 맞는 이야기에서든 혹은 고난에 처한 주인공을 위해 온갖 수난을 감수하는 여자의 위대한 자기 희생이 됐든지 말이다. 위험에 처한 동물을 도와주고 보답으로 선녀 잡는 치트키 알려주는 식의 교감 말고, 왜 사람들 간의 위계를 초월하는 우정, 선한 의도에서 생겨나는 상호 신뢰와 사랑 같은 건 그려지지 않을까. 옛이야기 이론서를 읽어 봐도 나는 설득되지 못했다. 이해 관계가 작동하지 않는 사이, 우정(이 얼마나 큰데!), 그걸 작아보이게 만드는 이야기들에 질려버림..

조이스 박은 <빨간 모자가 하고 싶은 말>에서 인어공주를 “두 개의 구멍으로 환원되는 이야기”라 말한 바 있다. 여자가 목소리를 내기로 선택하면 다리를 잃을 것이고 다리를 선택하면 목소리를 잃는다는, 어떤 구멍이 될지를 선택하기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가부장 사회는 여자가 두 개의 구멍을 다 가지고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말을 하고 싶은가? 그러면 하반신의 구멍이 없는 물고기 하체를 입으면 된다. 그러나 남자의 파트너가 되어 그에게 사랑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혀를 내주고 다리 사이의 구멍을 얻으면 된다. 그렇게 하나의 존재는 두 개의 구멍으로 환원된다. 온전히 구멍 두 개를 다 쓰며 살 수 없다. 버젓이 쓰라고 달린 두 개 중 하나만 쓸 수 있다.”143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이야기들은 자주 실패한다. 검열과 삭제, 재구성이라는 과제 때문에 일단 재미 면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입에 오르내릴 수 없으니 시간성이라는 절대 권력을 획득할 수도 없다.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차별, 혐오 없는 전래동화 <선녀는 참지 않았다>의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한계점을 적어뒀는데, 뼈 아프고 의미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써내려간 이야기를 수차례 검토하며, 맞닥뜨린 한계점들은 우리의 서사가 진정 뿌리 깊은 차별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우리는 기존의 전래 동화와는 다른 주체적인 여성상을 구현하고 싶었다 (…) 높은 사회적 부나 지위를 가지는 것만이 성공이고,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는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는 단순히 ‘성공하는 인간’의 범주에 여성을 끼워넣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곧 모든 문제에 해답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더불어 잘못된 남성 인물을 벌주는 것도 하나의 해소 방안으로 그려냈지만 과연 그것이 마땅한, 혹은 유일한 해결책일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찰이 필요하다(…) 즉, 우리는 기존의 성차별주의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것에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에필로그(<선녀는 참지 않았다>)

같은 책 추천사에서 정희진은, “사실 동화는 단어의 어감과 달리 공포와 단죄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권선징악의 결말이 교훈을 주는 것 같지만, 문제는 누구의 입장에서 권선징악이고 사필귀정이냐는 것이다. 동화처럼 당파적인 서사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어 소녀>로 돌아가서.. 책 속 인어소녀 미라는 넵튠왕이라 자처하는 어부에게 바다의 왕인 본인이 인어인 자기를 거둬키웠다는 이야기를 믿고 자란다. 미라는 넵튠의 수족관에서 신비한 인어공주를 재현하고 보일 듯 말듯 자취를 숨기는 게임으로 손님을 끌고, 소원 동전을 줍는 일을 하며 산다.(가해자 진짜 한심하고 그릇 작은 새끼다) 단 한번도 건물밖으로 나온 적이 없는 인어소녀의 유일한 낙은 넵튠이 들려주는 자기의 (지어낸) 어린시절과 인어 어머니 이야기이다. 미성년자 감금 착취 범죄 현장.. 대환장..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케이스라 할 만한데 이런 상황을 탈출할 계기는 우연히 사귀게 된 친구 리비아에게서 온다. 또래로 짐작되는 둘 사이에 서로에 대한 호기심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물 속의 인어소녀에게 다가가기 위한 리비아의 노력이 특히 정성스럽다. 물에 젖지 않게 그림을 코팅해 선물하는데 인어소녀는 넵튠에게 들키지 않게 잘 숨겨둔다. ‘내 방에서 보이는 나무는 이렇게 생겼어’, ‘내 개는 방바닥에 꼬리를 찰싹대서 찰싹이라 이름 붙였어’ 사사프라스 나무와 개 그림, 그리고 이런 것까지 네가 궁금해할지는 모르겠는데 본 적 없을 거 같아 그려봤다는 참치 상추 샌드위치 그림까지. 리비아를 보고 이렇게 말 많은 인간은 처음 봤다는 인어소녀의 내적 놀라움이 너무 와닿는다 ㅋㅋㅋ 둘의 대화는 조건(인어소녀에게 목소리가 없고, 공통 문화권에서 자라지 않았다는)에 비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다시 만나는 것,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 그러려면 탈출할 것. 인어소녀는 혼자서 걷기를 훈련하고 나가기로 마음 먹는다. 당연하다. 두 소녀 사이에 흐르는 케미스트리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우린 아니까. 인어소녀가 수족관을 탈출한 것은 스스로 해낸 일이지만 그 동력은 친구와 스스로의 세계를 오가는 순수한 우정에서 왔다.


인어소녀의 미라, 라는 이름은 리비아가 지어주는데, 미라클에서 따왔다. 네게 미라클은 발음하기 어려울까, 그렇다면 미라는 어때?라고 제안한 것. 안데르센이 쓴, 왕자를 구하고도 대신 죽기를 자청해 바다의 거품으로 이름도 없이 사라진 인어공주의 사랑이 아름다운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정직한 시작일텐데. 정희진의 말대로 “동화도 다른 담론처럼 치열한 정치적 경합의 장”이다. 읽고 거르고 다시 읽는 것이 현재 양육자들의 소명이다. 다시 쓰인 이야기를 찾아내 읽어주는 것이 쉽지는 않아도 이런 책을 만날 때의 짜릿함에 비하면 감수할만한 고생이다.

북플앱은 왜 상품넣기로 책 순서 편집도 안되고.. 안되는 건지 방법을 못찾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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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소녀 Wow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위즈너 그림, 도나 조 나폴리 글, 심연희 옮김 / 보물창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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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위즈너

엉엉엉…
엉엉엉 카테고리를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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