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에리카 밀러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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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언어는 정말 유기체 같다. 내가 단어를 골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가 자신의 쓰임을 조정하며 나를 사용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한 단어가 다른 어떤 단어와 친한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며, 우리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채 더 거시적인 다음 논리(법, 제도, 정치 등)를 구성하게 만든다. 이성과 논리는 감정을 수호하기 위해 개발된다.

지금껏 나는 임신중지 문제에 있어서 항상 프로초이스 편에 서있다고 여기면서 선택을 자유와 거리낌 없이 등치시켰다. 그러나 ‘자유‘에는 설명과 정당화가 필요 없는 반면, ‘선택‘은 왜 하필 다른 옵션이 아닌 바로 이것을 택했는지에 대한 변명을 요구한다. 그리고나선 그 설명ㅡ호소ㅡ이 주류질서 아래 편입될만한 여지가 있는지 여부를 가르고 선악을 판단한다. 임신중지 문제에 있어서 주류질서는 바로 모성이다. 이 질서는 결과를 조금씩 다르게 도출할 뿐, 친임신중지든 반임신중지든 관계없이 통용되어 왔다. 가령 프로라이프가 태아의 현재적인 생명을 다루는 반면, 프로초이스는 태아의 미래적인 생명(원치 않는 임신이 어떻게 ‘불행한 아이‘를 만들어내는지)을 다루는 식이다.

임신중지를 법적으로 규제하든, 그렇지 않든 임신중지를 ‘필요악‘이나 ‘차악‘으로 여기는 관점은 바로 이렇게 선택이라는 수사에서 창조되며, 본능적 모성이라는 환상을 존치시킨다. 또한 동시에 모성과 결부되지 않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상상하는 일에 한계를 부여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선택‘이란, 결과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거론하기 위한 수사적 전략 불과하다. 국가와 가부장제는 이익을 골라 누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개인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도용하고 약자의 삶을 방치한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듯, 개인이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생애사건에 총체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현대사회의 망상이다.

사실 ‘선택‘이라는 수사는 그것이 예외적 사항이라는 전제 위에서 사용된다. 임신중지란 다른 어떤 사안들(백인국가 만들기에 방해되는 재생산, 안정적 양육이 어려운 경제사정)을 감안하고 나서야 지지할 수 있는 사건인 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임신중지가 아닌 임신중지를 하지 않는 것ㅡ모성이야 말로 선택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좀 더 개입시켜야 한다. 생리하는 여성을 가임기 여성으로 치환해서는 안되듯, 착상 상태에 있는 여성을 모두 임신한 여성으로 일원화해서는 안된다. 임신(과 그에 따른 이벤트)을 선택한 여성이 임신한 여성이다. 임신중지는 그 어떤 모성적 판단 없이 모성의 경계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모성과 관계없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임신이지, 임신중지가 아니다. 행복한 임신중지가 가능해질 때, 행복한 임신도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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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가장 또렷이 다가온 것은 내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외형을 변화시켜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탈코르셋에 대해 글을 쓰려니 여간 민망하고 송구스러운 게 아니다. 내가 머리를 가장 짧게 잘랐던 때는 엄마가 항암치료를 받느라 머리를 꽝꽝 밀어버렸을 때다. 뭐 갸륵한 효심이 끓어 올랐던건 아니지만, 엄마가 자고 일어나면 베개에 수북이 빠져 있는 머리털을 보며 주륵주륵 우는 게 좀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자기랑 비슷한 머리통 가진 애가 집안을 돌아다니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나도 머리를 최대한 짧게 잘랐다. 의도와 다르게 엄마의 성질을 더 북돋는 결과를 낳았지만…….

아무튼, 엄마는 항암도 이제 끝냈고 머리도 많이 길렀지만 나는 어쩐지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이 가장 적절한 대답일 정도로 너무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주변에 워낙 페미니스트가 많고, 다들 노메이크업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어 그냥 나도 나의 이 모습이 ‘좋아보이게 됐다.‘ 뜻이 있어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한게 아닌데도 20대 페미니스트 여성으로서 탈코르셋의 자장 속에 있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과거 사진들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20대 초반 사진들을 보며 떠오르는 내 감상은 “왜 저래..” 로 수렴된다. 내가 당장의 외양상 변화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인식변화다. 탈코르셋 운동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모습, 내가 나답다고 여기는 내 모습을 점점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며 이전에 가졌던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화장과 꾸밈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빈자리를 메꿨다. 오랜만에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바르고 친구를 만났더니 친구는 나를 유심히 보곤 ˝오늘 좀.. 꾸몄네?ㅎ˝ 라고 첫마디를 건넸다. 그 순간 갑자기 수치스러움이 뒷덜미를 꽉 물었는데, 내게 이 수치라는 감각이 찾아오는 경로가 완전히 뒤바뀐게 생경했다. 하지만 단박에 이해가 따라와서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탈코르셋 운동은 뭐가 웃기고 두려운 것인지에 대한 기존 문법을 공격하고 유쾌하게 뒤집는다. 뒤집기만 했나? 원래 자리를 되찾아 주기도 했다. 두껍다, 얇다, 쪘다, 빠졌다 같은 표현들에 더이상 가치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 내 몸의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들에 높낮이나 호오를 부여하지 않게 됐다.

글을 쓰며 기억들을 주워 섬기다 보니 이상하다. 동참한다는 인지 없이 동참하고 있었나? 아무렴 한번 몸을 맡긴 이상, 조류는 내 위치를 바꿔 놓는다.

여전히 화장 안하는 날보다 하는 날이 더 많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잘보이고 싶어 온통 안달이라 쇼핑 반도가 급격히 는다. (사랑이 나를 조종한다!) 하지만 어떤 방해도 거스름도 없이 내가 ‘잘 있는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싶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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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가네코 후미코 지음, 조정민 옮김 / 산지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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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일요일은 3.8 세계 여성의 날이다. 작년이 111주년이었으니 올해는 112주년일 것이다. 112.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어쩐지 마주하기 민망해지는 숫자다. 문득 중학교 때 배웠던 공식이 떠오른다. 거리를 속력으로 나누면 시간이 된다. 우리가 여기까지 얼마나 느리게 왔기에 112년이라는 커다란 시간이 나온걸까? 그리 멀리 온 것 같지도 않은데, 변화의 속도는 언제나 너무 더디다.

 

반면 요즘 내 하루는 쾌속으로 흘러간다. 산지니 인턴생활을 시작한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으니. 출근 첫날, 책으로 빼곡히 들어찬 사무실 책장을 구경하다 대표님께 책 한 권을 받았다. 가네다 후미코의 옥중수기 나는 나. 여성의 날이 곧이니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써보라는 말씀이셨다. 이것이 내가 처음 맡은 업무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 (이것은 업무인가 복지인가)

 

책을 받아들었을 때만 해도 가네코 후미코가 누군지 아는 바가 없었다. 영화 박열도 보지 않았으니까. 나는 한국사를 주제로한 5분짜리 지식채널e만 봐도 열혈의 가슴 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한국영화들과는 부러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애국심이 쉽게 고취되는 사람은 민족주의에 경도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영화 박열을 보지 않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말하고 움직이며 숨 쉬는 후미코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희서는 짱이다.......) 나는 나의 원제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원제에서 알 수 있듯,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갖고 사는 인간이었다. 스스로를 궁금해하는 사람의 삶은 결코 지루해지지 않고, 그런 이의 글은 삶만큼이나 진실되다.

 


"운명적으로 불운한 탓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짧은 생애 내내 한번도 기초적인 사회 공동체의 보호를 보장받지 못했다. 무적자(호적에 오르지 못한, 서류상 세상에 없는 사람)였기 때문이다. 후미코는 그토록 바라던 학교도 가지 못하고, 친척들 사이에선 식모살이를 전전하며 갖은 수모와 학대를 다 당하고 성장한다. 일찍부터 모든 사람의 기쁨은 타인의 슬픔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쳤던 후미코에게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미코의 입속에는 이런 말이 맴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나 자신이 태어났고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 나는 내가 태어나 살아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나는 태어나 숨 쉬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그를 구박해도, 후미코는 언제나 자기의 주인이었다.

 

그래서 가네다 후미코라는 여성의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해 흔히 부여하곤 하는 박열의 연인이었던같은 수사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의 연인인 것이 아니라, 박열이 후미코의 연인인 것이다. 두 문장은 의미상 동어반복이지만, 소유격조사 는 앞뒤 체언의 소유관계를 분명한 뉘앙스로 나타낸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를 저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후미코는 책의 말미에서 박열과의 만남을 명료하게 회상한다. ‘내내 찾아오던 어떤 것을 박열의 가슴속에서 발견했고, 그래서 박열을 선택한다. 둘은 교제를 시작하기 전에 한 중국요릿집에서 만나 서로의 사상과 가치관에 대한 합의를 맺는다. 후미코는 자신은 조선인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박열이 민족운동가라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후미코의 이름 앞에 따라붙곤 하는식민지 조선을 사랑한따위의 수사는 가네코 후미코가 처음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을 거라는 착각을 일게 하지만, 이것은 우리(한국인)의 바람일 뿐이다. (그가 박열과 함께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는 활동을 했던 것은 맞지만, 투쟁의 기반은 조선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단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인권의식에 뒀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내가 나는 나를 읽으면서 후미코에게 가장 감탄했던 것은 바로 이런 계급에 대한 민감한 인식과 정확한 표현력이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조선으로 떠난 후미코가 포착했던 충남 부강의 모습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돈이 있어 빈둥 눌고 지내며, 도시에서는 약간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있는, 그런 계급들이 으스대고 있었다"

 


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인가. 후미코는 도시와 시골본토와 식민지 사이 생겨난 잉여를 갈취하며 성장한 신생 계급의 모습을 빈둥거리지만 도시에서는 약간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있는이라는 한 문장으로 냉정하게 축약한다. 대충 부르주아라고 퉁칠 수도 있었을텐데. 후미코의 관찰력은 용의주도하다.

그는 박열과의 교제 또한 결국 우리 사이에 양해가 성립했다는 표현으로 나타낸다. 나는 둘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는 이 문장이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필시 둘 사이에는 성애적 로맨스, 전투적 동지애, 사상적 의지가 한데 뒤얽힌 어떤 감정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뭉갤 수도 있겠으나(그리고 실제로 그런 이미지로 소비되곤 하지만, 후미코에게 박열과의 애정관계가 셀링 포인트여선 안된다) 나는 양해야말로 알맞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기꺼워하는 마음으로 용납하는 관계. 사랑보다 굳셀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뭐라해도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후미코는 동지들과 사회주의를 공부하며 해방운동을 펼치다가 마침내 대역사건으로 수감 되고 만다. 매사를 기민하게 감각하는 그이기에 사회주의 방법론의 한계권력의 본질적 속성에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끝내 후미코는 뭐라해도 사람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받아야 하는 대접이 있는데.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보장되어야 하는 최소한의 양식적 삶이 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믿음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믿음이야 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곧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질 뿐, 영원의 실재 속에서는 존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네다 후미코는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친다.(자살인지 타살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서류상 자살로 되어있다) 옥중 결혼으로 박열의 호적에 들어간 덕에 후미코의 시체는 해방 이후 문경에 묻혔다. 한평생 무적자로 설움과 괄시를 받았던 후미코가 결혼으로 호적을 얻었다는 사실이 못내 슬프게 다가온다. 그저 나로 태어나 살아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숨쉬는 것만으로 존재를 증명할 순 없는 걸까?

 

올해는 여성의 날 112주년. 대한민국에서 호주제가 폐지된 지는 12년이 지났다. 후미코는 죽음 앞에서 위와 같은 말로 책을 맺었다.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질 뿐, 자신은 영원의 실재 속에서 존속할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책의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네코 후미코의 육체라는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졌지만, 그의 영혼과 정신은 책이라는 실재 속에서 영원히 존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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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몸을 오그리고 읽었다
내 뱃속에도 자궁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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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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