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 ‘박사‘의 공범, ‘부따‘가 신상공개 처분을 받아 뉴스를 타는 걸 보며 출근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남자애 얼굴. 유포자도, 소지자도, 관전자도 전원 신상공개 하라고 청원도 열심히 하고 시위도 나갔지만 정작 그들의 얼굴이 공개되고 내가 그 면상들을 확인하고 나면 하루종일 기분이 나쁘다. 초대한 적 없는 불청객이 내 집 문따고 들어와 하루종일 안나가는 느낌.

그러고보면 나는 어릴적부터 범죄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애였다.

열 네댓살 무렵, 내 또래들 사이에서는 일본 작가의 범죄추리소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나도 유행에 동참하고자 몇 권 읽어봤지만 영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중도하차가 일반이었다. (미스터리를 읽어야 한다면 차라리 『오페라의 유령』을 읽지!) 작가는 이런걸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내나, 싶게 완벽한 범죄 수법과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잔인한 살인 사건들은 구태여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건 이미 TV만 켜도 쉬이 볼 수 있었으니까. 내게는 언제나 일상이 공상보다 무섭고 교묘했다.

현실은 으레 상상을 뛰어넘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그림 슬리퍼』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범죄르포다.

‘그림 슬리퍼(Grim Sleeper)‘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흑인여성연쇄살인을 저질러왔던 살인마, 로니 프랭클린 주니어의 닉네임이다. 사신을 뜻하는 Grim Reaper를 변용한 것으로 보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저자인 크리스틴 펠리섹이 직접 만들었다.

아젠다 세팅과 이슈몰이에는 언론이 의도하는 이미지가 즉각적으로 연상되는 별명을 사건에 부여하는 것이 커다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런 ‘이름짓기‘는 조주빈이 스스로를 악마라 여기며 자신을 캐릭터라이징했던 것(‘박사‘ 조주빈 ˝악마의 삶 멈춰주셔서 감사˝ ...검찰 송치)과 맞물리며 내게 어떤 의문을 던졌다.

우리는 가해자의 삶과 피해자의 삶 중 어떤 것을 궁금해 해야 할까. 스포트라이트는 어느 쪽을 비춰야 하는가.




펠리섹은 책의 도입부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캐나다의 조용한 수도 오타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연쇄살인범에게 매료되었다고 밝힌다. 어려서부터 범죄 실화 관련 책들을 탐독하고 <형사 콜롬보>, <제시카의 추리극장> 같은 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봤다고 하니, 나와는 정반대인 셈이다.

장성한 펠리섹은 범죄전문기자가 되어 로스앤젤레스의 슬럼가, ‘사운스 센트럴‘에서 벌어지는 흑인여성연쇄살인에 관심을 갖고 취재를 시작한다. 그리고 10년에 가까운 취재기간을 거쳐, 20여년 동안 무려 10명 이상의 여성을 살해한 범죄자 프랭클린을 잡아내기에 이른다.

저자는 범인 특정과 검거에 몇 십년에 걸친 오랜 세월이 소요된 이유가 피해자들이 전부 ‘가난한 흑인 여성‘이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사건이 LA의 슬럼가가 아닌 베벌리힐즈에서 일어났고, 금발 백인 여성이 살인사건의 피해자였다면 언론의 관심과 수사가 이토록 지지부진했을리가 없다. 피해자들은 가난한 흑인 여성이었기에 범죄의 대상이 되었고, 가난한 흑인 여성이었기에 수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펠리섹은 이 책이 범죄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선언한다. 그는 피해자 한명 한명의 삶을 조명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소개하는 데에 지면을 아낌없이 할애한다. 납작한 ‘피해자‘로만 존재했던 이들이 이름과 목소리를 얻어 각자 삶의 양감을 드러낸다.



펠리섹의 이런 전략은 N번방을 보도하는 한국언론의 태도와 상당히 대비된다. 요즘 한국언론은 ‘박사‘에게 서사를 부여하느라 여념이 없다.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실은 과거에 보육원 자원봉사를 다니는 모범생이었든, 대학 신문사에서 편집국장을 맡는 ‘인재‘였든, 그런 정보들은 시민의 알권리에 전혀 봉사하지 않는다. (이런 보도행태야말로 황색언론의 요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담 범죄자 ‘신상공개‘는 시민의 알권리냐?˝ 나는 그건 권리보단 의무에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그들이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다. 실체를 확인하고 나면 자꾸 떠올라서 온종일 괴롭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관심을 두지 않으면 ‘내 문제‘가 아니게 되니까. 사회범죄를 다른 사람들만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완곡한 형태의 방조이고, 결국 그들과 공범이 되겠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그림 슬리퍼, 로니 프랭클린 주니어는 펠리섹의 끈질긴 취재와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 끝에 검거될 수 있었고 긴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 받는다. 판사 캐슬린 케네디는 판결을 내리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당신이 저지른 이 모든 범죄가 끔찍하며, 말했다시피, 어떤 정당화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내릴 판결은 복수의 판결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이 범죄들처럼 끔찍한 짓을 저지르면 사회에서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처벌이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보호책으로 그 사람은 계속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사회에서 말할 권리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형법계에서 몇 년을 일하는 동안 만나본 모든 사람들 중 당신이 저지른 것처럼 무시무시한 죄를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많이 저지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젊은 여성들은 끔찍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워싱턴양의 살인미수건도 끔찍합니다. 그 영향으로 여기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아 왔고 여전히 고통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말씀하신 대로, 이 분들은 약간의 평화를 얻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도 약간의 평화를 얻어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건 복수가 아닙니다. 그건 정의입니다, 프랭클린씨.˝ p.439





정말 그렇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반복되어온 페미사이드 앞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일회성의 복수가 아닌, 계속될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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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도대체 뭘로 만든걸까? 휘어지는 양장본은 처음보는디

휘어지려고 만든 책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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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1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는 게 왠지 시시해질 때마다 집어 드는 그래픽 노블이 있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켄 크림슈타인이 지었고, 국내에선 더숲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은 아렌트의 생애를 그린 만화다. 이렇게 설명하면 예림당에서 내는 WHY 시리즈 위인전 느낌일 것 같지만, 엄연히 성인 대상의 ‘그래픽 노블’이다.


어쨌든 그 책을 통해 전체주의 광풍으로 혼돈을 맞았던 20세기 초 유럽 모습과 지금은 전설이 된 천재들(엑스트라처럼 등장하는 인물조차 업적 설명을 위한 각주가 달려있다…)이 기어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 이렇게 열렬한 게 바로 삶인데!” 같은 생각이 절로 들어 권태를 씻고 일어나게 된다. 사유하지 않는 것이 그릇된 사유 보다 더욱 위험한 거라는 아렌트의 일침이 귓전을 때리고, 무기력해진 몸과 정신을 다시 한번 일으켜 내는 것이다.



쓸데없이 서두가 길었다. 그러니까, 누군가 내게 아렌트를 좋아하냐 물었을 때 내가 “아유 그럼요”(그런데 누가 아니라고 할까?)라 대답하는 배경에는 만화책 한 권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좀 어이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아렌트 팬을 자처하면서 아렌트의 저작을 읽어본 적이 없다. 위의 그래픽 노블을 포함해 아렌트 다룬 책 서너 권 읽었지만, 정작 그가 직접 쓴 책은 읽지 않았다.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제목은 술술 나오고 어디가서 어쭙잖게 아는 체도 하지만 기실은 단 한 권도 안 읽었다. 그러니 아렌트를 좋아한다는 내 대답은 알량한 허세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렌트가 직접 쓴 책보다 아렌트를 오랫동안 숙고해온 다른 어떤 이가 그에 대해 쓴 책이 좀더 아렌트를 아렌트답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너무 아렌트 안 읽은 티 팍팍 내는 발언인가?




『탈학습,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은 저자 마리 루이제 크노트가 아렌트의 사유방식을 사유해낸(그렇담 이것은 메타사유인가) 걸출한 작품이다.

저자는 웃음/번역/용서/표현 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탈학습’을 설명한다. 탈학습이란, 이미 존재하는 언어체계와 전승되어온 관념들에 대한 이해를 폐기하고 기존 맥락을 분해하여 개념의 새로운 쟁취를 시도하는 것으로, 친숙한 것을 다시 낯선 것으로 바꿈으로써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맺기를 가능하게 한다.



저자는 아렌트의 이러한 독특한 사유방식이 계획적으로 개발된 것이 아닌 충격에 대한 반작용에 더 가깝다고 설명한다. 독일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며 늘 낯선 세계에 내던져졌던 아렌트는 기존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자신 안에 계속해서 축적했다. 그리고 그 충격에 의한 반작용으로 체득한 사유방식―‘탈학습’을 통해 기존 통념을 뒤집는 사유(악의 평범성!)를 구축했다. 또한 아렌트의 웃음, 번역, 용서, 표현 행위는 앞선 충격에 의해 형성된 균열을 봉합하거나 덮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열어둔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균열에 계속해서 관여하도록 한다. 이 ‘관여’가 바로 아렌트의 정치 개념에 대한 실마리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탈학습’이라는 아렌트의 사유방식은 사고의 폐쇄성이 짙어지고 있는 오늘날 특히 되새길 지점이 많은 개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아렌트보다 더 아렌트처럼 생각하는’ 마리 루이제 크노트, 즉 저자의 존재다. 아렌트의 사유방식을 탈학습으로 설명하겠다는 아이디어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아렌트를 떠올렸까. 아마 아렌트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생각한 것보다 더 깊이, 더 오래 그러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그 덕분에 아렌트를 읽지 않고도 아렌트를 만나게 된다. 혹은 만났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장 그르니에의 『섬』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섬』 속 텍스트가 아닌 카뮈의 추천사였던 것처럼, 우리가 다른 이에게 받은 편지 속에 묘사된 자신을 보고 ‘진짜 나’를 마주친듯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타인의 애정이 개입된 해석이야말로 그를 더욱 그답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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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가장 또렷이 다가온 것은 내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외형을 변화시켜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탈코르셋에 대해 글을 쓰려니 여간 민망하고 송구스러운 게 아니다. 내가 머리를 가장 짧게 잘랐던 때는 엄마가 항암치료를 받느라 머리를 꽝꽝 밀어버렸을 때다. 뭐 갸륵한 효심이 끓어 올랐던건 아니지만, 엄마가 자고 일어나면 베개에 수북이 빠져 있는 머리털을 보며 주륵주륵 우는 게 좀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자기랑 비슷한 머리통 가진 애가 집안을 돌아다니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나도 머리를 최대한 짧게 잘랐다. 의도와 다르게 엄마의 성질을 더 북돋는 결과를 낳았지만…….

아무튼, 엄마는 항암도 이제 끝냈고 머리도 많이 길렀지만 나는 어쩐지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이 가장 적절한 대답일 정도로 너무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주변에 워낙 페미니스트가 많고, 다들 노메이크업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어 그냥 나도 나의 이 모습이 ‘좋아보이게 됐다.‘ 뜻이 있어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한게 아닌데도 20대 페미니스트 여성으로서 탈코르셋의 자장 속에 있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과거 사진들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20대 초반 사진들을 보며 떠오르는 내 감상은 “왜 저래..” 로 수렴된다. 내가 당장의 외양상 변화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인식변화다. 탈코르셋 운동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모습, 내가 나답다고 여기는 내 모습을 점점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며 이전에 가졌던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화장과 꾸밈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빈자리를 메꿨다. 오랜만에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바르고 친구를 만났더니 친구는 나를 유심히 보곤 ˝오늘 좀.. 꾸몄네?ㅎ˝ 라고 첫마디를 건넸다. 그 순간 갑자기 수치스러움이 뒷덜미를 꽉 물었는데, 내게 이 수치라는 감각이 찾아오는 경로가 완전히 뒤바뀐게 생경했다. 하지만 단박에 이해가 따라와서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탈코르셋 운동은 뭐가 웃기고 두려운 것인지에 대한 기존 문법을 공격하고 유쾌하게 뒤집는다. 뒤집기만 했나? 원래 자리를 되찾아 주기도 했다. 두껍다, 얇다, 쪘다, 빠졌다 같은 표현들에 더이상 가치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 내 몸의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들에 높낮이나 호오를 부여하지 않게 됐다.

글을 쓰며 기억들을 주워 섬기다 보니 이상하다. 동참한다는 인지 없이 동참하고 있었나? 아무렴 한번 몸을 맡긴 이상, 조류는 내 위치를 바꿔 놓는다.

여전히 화장 안하는 날보다 하는 날이 더 많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잘보이고 싶어 온통 안달이라 쇼핑 반도가 급격히 는다. (사랑이 나를 조종한다!) 하지만 어떤 방해도 거스름도 없이 내가 ‘잘 있는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싶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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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가네코 후미코 지음, 조정민 옮김 / 산지니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 주 일요일은 3.8 세계 여성의 날이다. 작년이 111주년이었으니 올해는 112주년일 것이다. 112.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어쩐지 마주하기 민망해지는 숫자다. 문득 중학교 때 배웠던 공식이 떠오른다. 거리를 속력으로 나누면 시간이 된다. 우리가 여기까지 얼마나 느리게 왔기에 112년이라는 커다란 시간이 나온걸까? 그리 멀리 온 것 같지도 않은데, 변화의 속도는 언제나 너무 더디다.

 

반면 요즘 내 하루는 쾌속으로 흘러간다. 산지니 인턴생활을 시작한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으니. 출근 첫날, 책으로 빼곡히 들어찬 사무실 책장을 구경하다 대표님께 책 한 권을 받았다. 가네다 후미코의 옥중수기 나는 나. 여성의 날이 곧이니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써보라는 말씀이셨다. 이것이 내가 처음 맡은 업무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 (이것은 업무인가 복지인가)

 

책을 받아들었을 때만 해도 가네코 후미코가 누군지 아는 바가 없었다. 영화 박열도 보지 않았으니까. 나는 한국사를 주제로한 5분짜리 지식채널e만 봐도 열혈의 가슴 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한국영화들과는 부러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애국심이 쉽게 고취되는 사람은 민족주의에 경도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영화 박열을 보지 않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말하고 움직이며 숨 쉬는 후미코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희서는 짱이다.......) 나는 나의 원제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원제에서 알 수 있듯,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갖고 사는 인간이었다. 스스로를 궁금해하는 사람의 삶은 결코 지루해지지 않고, 그런 이의 글은 삶만큼이나 진실되다.

 


"운명적으로 불운한 탓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짧은 생애 내내 한번도 기초적인 사회 공동체의 보호를 보장받지 못했다. 무적자(호적에 오르지 못한, 서류상 세상에 없는 사람)였기 때문이다. 후미코는 그토록 바라던 학교도 가지 못하고, 친척들 사이에선 식모살이를 전전하며 갖은 수모와 학대를 다 당하고 성장한다. 일찍부터 모든 사람의 기쁨은 타인의 슬픔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쳤던 후미코에게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미코의 입속에는 이런 말이 맴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나 자신이 태어났고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 나는 내가 태어나 살아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나는 태어나 숨 쉬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그를 구박해도, 후미코는 언제나 자기의 주인이었다.

 

그래서 가네다 후미코라는 여성의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해 흔히 부여하곤 하는 박열의 연인이었던같은 수사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의 연인인 것이 아니라, 박열이 후미코의 연인인 것이다. 두 문장은 의미상 동어반복이지만, 소유격조사 는 앞뒤 체언의 소유관계를 분명한 뉘앙스로 나타낸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를 저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후미코는 책의 말미에서 박열과의 만남을 명료하게 회상한다. ‘내내 찾아오던 어떤 것을 박열의 가슴속에서 발견했고, 그래서 박열을 선택한다. 둘은 교제를 시작하기 전에 한 중국요릿집에서 만나 서로의 사상과 가치관에 대한 합의를 맺는다. 후미코는 자신은 조선인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박열이 민족운동가라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후미코의 이름 앞에 따라붙곤 하는식민지 조선을 사랑한따위의 수사는 가네코 후미코가 처음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을 거라는 착각을 일게 하지만, 이것은 우리(한국인)의 바람일 뿐이다. (그가 박열과 함께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는 활동을 했던 것은 맞지만, 투쟁의 기반은 조선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단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인권의식에 뒀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내가 나는 나를 읽으면서 후미코에게 가장 감탄했던 것은 바로 이런 계급에 대한 민감한 인식과 정확한 표현력이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조선으로 떠난 후미코가 포착했던 충남 부강의 모습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돈이 있어 빈둥 눌고 지내며, 도시에서는 약간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있는, 그런 계급들이 으스대고 있었다"

 


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인가. 후미코는 도시와 시골본토와 식민지 사이 생겨난 잉여를 갈취하며 성장한 신생 계급의 모습을 빈둥거리지만 도시에서는 약간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있는이라는 한 문장으로 냉정하게 축약한다. 대충 부르주아라고 퉁칠 수도 있었을텐데. 후미코의 관찰력은 용의주도하다.

그는 박열과의 교제 또한 결국 우리 사이에 양해가 성립했다는 표현으로 나타낸다. 나는 둘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는 이 문장이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필시 둘 사이에는 성애적 로맨스, 전투적 동지애, 사상적 의지가 한데 뒤얽힌 어떤 감정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뭉갤 수도 있겠으나(그리고 실제로 그런 이미지로 소비되곤 하지만, 후미코에게 박열과의 애정관계가 셀링 포인트여선 안된다) 나는 양해야말로 알맞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기꺼워하는 마음으로 용납하는 관계. 사랑보다 굳셀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뭐라해도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후미코는 동지들과 사회주의를 공부하며 해방운동을 펼치다가 마침내 대역사건으로 수감 되고 만다. 매사를 기민하게 감각하는 그이기에 사회주의 방법론의 한계권력의 본질적 속성에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끝내 후미코는 뭐라해도 사람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받아야 하는 대접이 있는데.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보장되어야 하는 최소한의 양식적 삶이 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믿음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믿음이야 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곧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질 뿐, 영원의 실재 속에서는 존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네다 후미코는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친다.(자살인지 타살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서류상 자살로 되어있다) 옥중 결혼으로 박열의 호적에 들어간 덕에 후미코의 시체는 해방 이후 문경에 묻혔다. 한평생 무적자로 설움과 괄시를 받았던 후미코가 결혼으로 호적을 얻었다는 사실이 못내 슬프게 다가온다. 그저 나로 태어나 살아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숨쉬는 것만으로 존재를 증명할 순 없는 걸까?

 

올해는 여성의 날 112주년. 대한민국에서 호주제가 폐지된 지는 12년이 지났다. 후미코는 죽음 앞에서 위와 같은 말로 책을 맺었다.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질 뿐, 자신은 영원의 실재 속에서 존속할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책의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네코 후미코의 육체라는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졌지만, 그의 영혼과 정신은 책이라는 실재 속에서 영원히 존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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