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가장 또렷이 다가온 것은 내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외형을 변화시켜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탈코르셋에 대해 글을 쓰려니 여간 민망하고 송구스러운 게 아니다. 내가 머리를 가장 짧게 잘랐던 때는 엄마가 항암치료를 받느라 머리를 꽝꽝 밀어버렸을 때다. 뭐 갸륵한 효심이 끓어 올랐던건 아니지만, 엄마가 자고 일어나면 베개에 수북이 빠져 있는 머리털을 보며 주륵주륵 우는 게 좀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자기랑 비슷한 머리통 가진 애가 집안을 돌아다니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나도 머리를 최대한 짧게 잘랐다. 의도와 다르게 엄마의 성질을 더 북돋는 결과를 낳았지만…….
아무튼, 엄마는 항암도 이제 끝냈고 머리도 많이 길렀지만 나는 어쩐지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이 가장 적절한 대답일 정도로 너무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주변에 워낙 페미니스트가 많고, 다들 노메이크업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어 그냥 나도 나의 이 모습이 ‘좋아보이게 됐다.‘ 뜻이 있어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한게 아닌데도 20대 페미니스트 여성으로서 탈코르셋의 자장 속에 있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과거 사진들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20대 초반 사진들을 보며 떠오르는 내 감상은 “왜 저래..” 로 수렴된다. 내가 당장의 외양상 변화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인식변화다. 탈코르셋 운동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모습, 내가 나답다고 여기는 내 모습을 점점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며 이전에 가졌던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화장과 꾸밈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빈자리를 메꿨다. 오랜만에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바르고 친구를 만났더니 친구는 나를 유심히 보곤 ˝오늘 좀.. 꾸몄네?ㅎ˝ 라고 첫마디를 건넸다. 그 순간 갑자기 수치스러움이 뒷덜미를 꽉 물었는데, 내게 이 수치라는 감각이 찾아오는 경로가 완전히 뒤바뀐게 생경했다. 하지만 단박에 이해가 따라와서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탈코르셋 운동은 뭐가 웃기고 두려운 것인지에 대한 기존 문법을 공격하고 유쾌하게 뒤집는다. 뒤집기만 했나? 원래 자리를 되찾아 주기도 했다. 두껍다, 얇다, 쪘다, 빠졌다 같은 표현들에 더이상 가치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 내 몸의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들에 높낮이나 호오를 부여하지 않게 됐다.
글을 쓰며 기억들을 주워 섬기다 보니 이상하다. 동참한다는 인지 없이 동참하고 있었나? 아무렴 한번 몸을 맡긴 이상, 조류는 내 위치를 바꿔 놓는다.
여전히 화장 안하는 날보다 하는 날이 더 많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잘보이고 싶어 온통 안달이라 쇼핑 반도가 급격히 는다. (사랑이 나를 조종한다!) 하지만 어떤 방해도 거스름도 없이 내가 ‘잘 있는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싶은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