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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평점 :
직접 기록한 일기에는 향기를 담을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아닌 '타인'이 기억해 주는 기록에서만 담을 수 있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길, 꼭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체취를 느낄 수 없고 자신의 걸음거리나 말투, 표정을 느낄 수 없으며 심지어 치아 사이에 낀 고추가루 마저 타인이 아니면 알아차리기 힘들다.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은 어쩌면 굉장한 오만일지 모른다. 자신을 타인에게서 완전히 분리하는 작업일지 모른다. '나'라는 것은 애당초 '혼자' 존재할 수 없다. 본래 '존재'란 '기억'에 의해 '가능'하다. '나'라는 것은 애초에 '스스로의 기억'으로 완전할 수 없고 '타인의 기억'으로 완성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과 '타인'은 모두 '나'를 구성하는 요소이며, '타인' 또한 '내'가 함께 만들어가는 존재다.
직점 남긴 기록이라도 모두 '내 시선' 속에 갇힌다. 내가 고른 장면, 내가 선택한 단어, 내가 의도한 해석만이 남는다. 어떤 기억 속에서 분명하게 본 것을 타인과 논쟁하고 있었다. '타인'의 오류가 확실할 정도로 생생한 나의 기억을 비웃듯, 제3제가 하나 둘 '타인'의 기억을 옹호했다. 나의 기억에 오류가 있다고 하기에 너무 확실한 기억이지만 관찰자가 더 많이 늘어 날수록 주변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됐다. '내'가 완전하다는 착각이 어쩌면 스스로를 가둬 버리는지 모른다.
20대 초반, 해외에서 일을 했다. 직업은 꽤 안정적이었다. 큰 이변이 없다면 아마 나는 20대 때 가졌던 그 직업을 그대로 은퇴까지 유지했을 것이다. 괜찮은 조건으로 계약을 마치고 한국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명절에도 자주 마주치지 못하는 '친척분'과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너 거기서 살 생각은 아니지? 거기서는 젊은 시절 경험만 쌓고 삶은 한국으로 와서 살아라."
귓등으로 흘려 들어도 될 이야기지만 상대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부모님이 여기 계신데, 헛바람 들어서 밖으로 싸돌아 다니지 말고 적당히 놀고 돌아와.'
사실 당시에는 역시 '귓등'으로 들었지만 해외에서 일하다가 문뜩 그말이 떠오르곤 했다. 특히 명절이 되면 화상통화로만 간간히 집에 전화했는데 그때마다 마치 뇌리에 밖힌 듯, 그의 말이 떠올랐다. 마치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것이 큰 죄악을 끼치는 것 마냥.
그의 말이 나의 귀국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사건마다 그의 눈빛과 말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이후 나는 귀국했으나 그 말을 했던 당사자는 아마 본인이 그 말을 했다는 사실마저 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 뒤에도 전혀 교류가 없었기도 했다. 다만 내 속에 있는 어떤 무의식을 그 말이 계속해서 자극했고 굉장히 결정적인 순간마다 큰 결정을 바꾸도록 하기도 했다.
따지고보면 모든 것은 '선택'을 기준으로 죽거나 살게 된다. 내가 해외에서 돌아온 순간, 나는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는 나'를 죽인 것이며, 다시 귀국해서 돌아온 나를 살려낸 것이다. 그렇게 모든 순간, 인생이 극변하는 기준점에서 '선택'은 있고, 그 선택마다 무수한 나 중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죽여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실 나에게 했던 친척 어른은 그 뒤로 내가 한국에서 애를 먹고 있는 동안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 뒤로 어떤 배움이 생겼다. 어떤 사람에게 '충고'를 할 때는 꽤 신중한 편이 좋겠다. 그 충고가 부정적인 방향일 때는 더욱 그렇다. 사람이 살면서 짓는 죄 중에서 스스로 깨닫게 되는 죄는 아주 극일부일지 모른다. 앞서말한 친척도 스스로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듯. 나 또한 무수한 말을 뱉었고 그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가능성을 '살해' 했을지 모른다. 이런 사회적, 심리적 원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은 정말 싶지 않다. 그러한 자기 인식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오만해서는 안되고 항상 겸손하고 '죄'를 '사'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나'는 실제 '나'의 몇 퍼센트나 알고 있을까.
모르겠다. 쓸데 없는 말을 많이 하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한번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정확히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어머니는 나를 혼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몹시 억울했던 기억이 있다. 분명 나의 죄는 아니었는데 어머니는 '분명하게 네가 했다'라고 말씀 하셨다. 그 10살도 되지 않은 억울함이 30년도 더 지난 지금 궁금했다.
그리고 왜 그러셨냐고 물었다.
그때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답하셨다. 젊은 나이에 일하고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고 스트레스가 쌓여 있지 않았겠느냐, 말씀하셨다.
그리고 떠올려보니 내가 아이에게 화를 냈던 몇몇 상황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행복하게 지냈지만 어쩌면 아이는 불합리하게 혼났던 그 순간을 기억할지 모른다. 너무 바쁜 언젠가는 아이가 너무 시끄럽게 인형놀이를 한다고 혼을 내기도 했다. 육아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 본인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 상대에게 기록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가 이해가 되고, 나의 잘못이 떠올랐다. 참 바보 같게도 나는 30년을 중심으로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중복되는 어머니와 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마치 한번 녹화가 되면 지워지지 않는 녹화테이프가 돌아가듯, 나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누군가에게 기록된다. 개중 나는 아주 극일부 스스로 인지한 면만 '나'라고 느낄지 모른다.
'김영하 작가'의 '단 한번의 삶'을 보고 참 많은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김영하 작가'의 소설보다 수필을 더 많이 읽어 본 독자로써.. 그는 역시 수필로도 글맛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