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마음 수업 - 감정 이해부터 관계 맺기까지, 초등 사회정서 훈련
김소연 지음, 그리움리우 그림, 김우람 글 / 메가스터디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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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마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부족한 공교육의 부재를 사교육은 채우지만 '마음 수업'의 부재는 '사교육'에서도 채워지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마음을 모른채 어른이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 공백이 보여질 때가 있다.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려 고민하다 보면 결국 '나'의 어린시절을 만나게 된다. 어린시절을 만난 뒤에는 삶을 돌이켜 현재의 나까지 온다.

본래 사람은 태어나면 단일의 감정 밖에 없단다. 그 감정은 '긍정과 부정'으로 쪼개진다. 긍정은 기쁨과 사랑으로 분화하고 부정은 두려움과 분노로 분화한다. 마치 아이의 생물학적 신체가 세포분할하듯 감정 또한 제곱분화한다. 처음 한개의 원초적 감정 즉 무감정은 2개의 대분류(긍정과 부정)으로 나눠지고, 각 두개는 다시 2개씩 세분화되어 4개로 나눠진다. 4개가 다시 2개씩 갈라져서 8개...

이런 구조는 뇌 발달, 언어 습득, 사회적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데 모든 감정이 고르게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감정은 제대로 이름 붙여지지 못하고, 어떤 감정은 너무 일찍 억눌려 마른 가지처럼 되어 버린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채, 거의 반사적 반응만 하며 살아간다.

외부 입력값에 자동반사하듯 주체성 없이 외부적인 환경에 자극만 받는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반응',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반응' 이런 반사적 반응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그 매커니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고로 중요한 것은 먼저 '인지'하고 '이해'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어린이 마음 수업'은 앞서 말한 '감정 분화 과정에서 잘못 자란 감정의 가지를 되돌아보도록 한다.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학술적 개념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일상 속 상황을 이야기로 꺼내어 그 속에 숨은 감정의 본질을 찾는다. 애당초 감정이란 언어화 하기 힘든 것 아니던가.

'마음이야기, 마음 진단, 마음활동'

3단 구조를 통해 '그랬구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제대로 인식 혹은 인지하고, 개념으로 정리하며 행동으로 옮긴다.

가령 불안이라는 감정은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것이 어떻게 짜증이라는 2차적 감정으로 포장되는지를 풀어낸다. 아이가 '짜증난 것이 아니라 불안했었구나'하고 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실 이런 감정 수업이 어디 아이에게만 필요하던가. 마음 수업은 우리 아이에게만 부재한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부모들에게도 부재하다. 나 역시 그렇다. 어떤 감정이 올라왔을 때,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그것을 다루기 쉽지 않다. 어린 아이일 때는 그것에 붙일 마땅한 이름을 몰랐기에, 그 어휘력 부재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면 성인이 된 다음에 와서는 그저 떠돌아다니는 감정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이면 대상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런 관계를 맺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은 '상호 주종관계'를 맺도록 하고 인연을 맺도록 돕는다. 이름 없는 어떤 것에는 막연함이 있지만 대상에 이름을 짓는 순간, 그것을 불러 다룰 수 있고 그것이 왔을 때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책의 후반부에는 자존감, 용기, 공감,다양성 존중등 긍정적 감정의 성장을 다룬다. 이런 감정 분화의 마지막 가지를 건강하게 뻗어날 수 있도록 한다. 부모를 위한 감정 교육 가이드도 포함되어 있다. 아이의 마음뿐만 아니라 부모의 반응까지 함께 다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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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사소한 별리
최석규 지음 / 문학수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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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이런 류의 소설이 참 좋은데 자극적이지 않고 수수한 맛이 있어 그렇다. 뭔가 대단한 서사. 자극적인 '사랑'과 '이별'이 아니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별 이야기.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이야기가 흔한고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소설은 중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특별히 '이별 이야기'라고 생각치 않고 다른 인생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설에는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가져보지 못한 직업과 취미, 삶에 대해 간접 체험을 해보는 일은 몹시 즐거운 일이다. 짧은 소설 하나하나 다양한 인물의 삶이 녹아져 있으며 그 체험을 하는 일은 뜻 깊다. 또한 그 인물들로 하여금 뒷맛이 떫은 이별을 경험하는 일은 여운이 길게 남는다.

떫다. 이별 이야기는 어떤 방식이든 깔끔치 못하다. 개운하지 못하고 텁텁하다. 그렇다고 그 미각 장애가 오래는 것은 아니다. 얼마간 혀와 입앗을 괴롭히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져 버린다.

장애인을 도와주는 사회복지사 '중배'는 장애인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 한때 춤을 굉장히 잘 추던 대학 동기를 만난다. 그리고 절뚝 거리는 그녀의 장애를 목격하고 돕는다. 소설은 친절치 못하다. 그들의 감정과 서사를 과감히 생략하고 주요 사건만 전개한다. 고로 사건이 있었다는 점.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 그리고 어떻게 되었다는 나열이 있다. 이 불친절한 전개는 불쾌보다는 쾌에 가깝다.

빈 구간은 공백이 아니라 여백이다. 공백과 여백 확실히 다르다. 공백은 비어 있는 '부재'만 있지만 '여백'은 의도적으로 남겨둔다. 빈 공간에는 독자의 상상이 채워진다. 알지 못하는 인물의 현재와 과거를 알게 되고 독자는 그의 인생과 현재, 미래를 음미할 수 있게 된다. 과연 그렇다. 소설 하나 하나가 끝날 때마다 알지 못한 여운이 남는다. 여백이 남긴 여운은 중단편답지 않게 길게 간다.

오디션에 수없이 떨어진 기타리스트의 이야기가 두 번째 단편에 나온다. 꿈을 접고 현실로 돌아온 그는 밥벌이를 위해 '생동성 실험'에 참여한다. 이 얼마나 현실감 있는가. 꿈을 달성한 하나의 스타 아래로 얼마나 많은 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는가. 과연 그렇다. 어떤 꿈을 가져 본 적 있고 거기에 근접하게 닿아 본 적 있었을 때, 꿈이란 '노력'을 만나면 반드시 닿게 되는 '필연'처럼 느껴진다. 마치 시킨대로 했으니, 약속대로 '내놔'하는 것처럼 떼를 쓰면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은 매우 현실적이며 '노력'이 아니라 '기회와 운'이 함께 따랐을 때 이뤄진다. 수많은 방아쇠를 당겼던 러시아룰렛의 참가자 중 생존자의 이야기처럼 '누구나 될 수 있다'고 믿으면 다음 방아쇠의 희생자가 될 여지도 있다. 그렇게 밀리고 밀려서 현실의 어느 공간에 닿게 되면 그곳은 꽤 극단적인 상황으로 떨어져 있을 때가 있다.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소설이라는 허구에서 그 현실과 꿈의 괴리를 다시 한번 보았다. 기타리스트는 그림을 그리는 여자를 발견한다. 그녀는 꽤 까칠한 사람이다. 우연히 그녀가 항상 듣고 있던 노래가 자신의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림'을 그리던 그녀는 어떻게 '이곳'에 닿게 됐는가. 따지고보면 음악을 사랑하던 그가 그곳에 닿게 된 바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냉정하도록 현실은 맡겨 놓은 생선을 내어 놓지 않는다. 그저 모르쇠하고 노력에 대한 더 가혹한 현실을 부여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던가. 녹녹치 않은 현실에서 꿈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때로는 '사랑'이나 '경제', 그 어디에서도 여유를 잃어 버린다.

벌써 최석규 작가의 책은 3권도 넘게 읽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은 '한 사람' 이토록 많은 인생을 묘사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모든 인물이 다른 성격과 다른 과거를 가지고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 마치 '밑' 위로 지수가 높아지면 '차수'가 곱으로 변하듯, 이야기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넓어진다. 이런 다양성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현실'도 좋지면 '소설'이 너무 좋다.

허구의 인물과 인생들이겠지만 내가 어디서 '그런 삶'을 관찰해 보겠는가.

소설은 잔잔하고 사소한 이별을 이야기한다. 그 이별이란 단순히 남녀의 사랑 끝에오는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흘러간 대부분의 흔적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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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진짜 재밌는 괴물 그림책 - 그림으로 배우는 신기한 지식 백과 진짜 진짜 재밌는 그림책
게리 맥콜.크리스 맥냅 지음, 케런 해러건 그림, 김맑아.김경덕 옮김 / 라이카미(부즈펌어린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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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입장에서 '역사책', '과학책', '상식책' 이런 것들을 꺼내 읽으면 좋겠지만 아이들이 가장 많이 꺼내 보는 책 중 하나는 '괴물책'이다.


 이 책을 어떻게 발견했는가,하면 아이와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구경을 할 때 였다. 아이가 보는 동화책은 너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잔뜩 있는데, 개인적으로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자극적인 그림이 있는 책을 뽑아 보여줬더니 그 책이 이 책이다. 그때가 대략 7살인가 8살이었던 것 같다. 그뒤로 몇번을 이 책을 빌려보다가, 나중에는 아이가 사달라고 이야기해서 사두었다.


 사회에서도 불법이거나 음지에 있던 활동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제도권으로 안전하게 끌어 들이는 일들이 있다. 가령 노점상을 양성화 한다거나, 사채 시정을 법정 금융권으로 유도하거나 그런 일들 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식 중 하나는 '강원랜드'다. 강원랜드는 대표적인 제도화 된 사업을 운영하는 회사다. 음지로 두면 더 음습해지고 극단적으로 변해간다. 일부를 양성화하여 이를 차라리 잘 관리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 동의한다.


 아이에게 '괴물'이 있고, '비극'이 있고, '실패'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애당초 모르게 키울 수 있다면 상관 없겠지만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숨길 것이 아니라 잘 관리하는 편이 낫다.


 초등학교 시절 꽤 비싼 대학노트를 산 적 있다. 거기에 무엇을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노트를 아주 예쁘게 관리하고 싶었던 마음은 확실히 남아 있다.

 첫 페이지에 무언가를 기록했고 두 번째 페이지에 다른 무언가를 기록하기 전에 나는 첫 번째 페이지를 찢어 버렸다.

 삐뚤빼뚤하게 글씨가 써졌다거나, 앞장에 비해 뒷장에 눌린 연필자국이 불쾌해 보여서 그렇다. 그렇게 완벽하게 유지하고 싶던 그 노트는 정말로 실패를 할 때마다 찢어내면서 완전해졌다. 단 한장도 쓰여지지 않은 '새것'의 상태로 어딘가 뒹굴다가 사라졌다.


 그것이 내가 본 '완벽'의 모습이다. 가장 완벽한 성공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도전'하지 않으면 된다. 쉽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최고의 완벽주의자가 때로는 엉망의 결과를 내어 놓는 이유는 나의 '최선'을 발견하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다. 무언가 100%를 발휘하지 않는 실패하지 않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런 도전과 실패도 하지 않는 '실패자'보다 차라리 '게으른 천재'로 남고 싶은 그 바람은 언제나 이루어진다.


 이유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안해도 되기 때문이다.

 후반에 다다르면 모든 갈등이 마법처럼 풀려지는 '디즈니'같은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일찍 깨우쳐야 하고, 어차피 느껴야 하는 공포나 실패 같은 거라면, '그거 원래 있는거야, 당연한거야,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인식을 어린 시절부터 학습하고 사회로 나가는 편이 낫다.


 살다보니 어린 시절에는 무시무시하던 '괴물'들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 이유는 세상에는 '괴물'보다 훨씬 무서운 것들이 많으며 대체로 그런 것에는 '사람'과 '세상'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다.


 어디서 듣기에 '귀신'이 나오는 영화가 무섭지 않은 이유는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서 그렇단다. 실제로 귀신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아무런 감흥이 없다. 차라리 '살인자'라던지, '배신자'가 등장하여 실질적인 위협을 끼치는 영화에서 더 소름이 끼치곤 한다.


 인간은 '공포'가 제도권에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것을 '여가'로 즐기기도 한다. 공포나 스릴러 영화를 즐겨보고 어떤 경우에는 떨어지는 롤러코스터를 타기도 한다. 그것이 허상이고 감정만 남기고 실질 위협은 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삶이 안정적일수록 그런 믿음이 더 강하고 '현실'에서 느끼지 못하는 공포를 '유희'하고자 한다. 어쩌면 무서운 이야기를 찾는 아이가 되려 올바른 정서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심리가 불안하면 공포영화던 추리소설이던 즐겨 보지 못한다. 이건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경험인데, 꽤 확실한 결과를 내려 두었다.


책장에는 '살인'이나 '범죄'에 관한 추리소설이 가득하다. 아빠도 이런 공포를 즐긴다. 아이가 좋아하는 '괴물책'에 그런 의미를 부여해 본다.


 책은 그냥 괴물이 아니라, 다양한 국가의 설화에 나오는 괴물들이다. 여기에는 꽤 많은 국가들이 나오고, 꽤 많은 문화와 문명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방에 문을 닫고 한참을 떠들던 아이들이 가끔 문을 열어보면 둘이서 머리를 박고 이 책을 들여다보며 한참 이야기 한다.


 '그거 다 거짓말이야'라고 알려주지 않고 조용히 방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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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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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기록한 일기에는 향기를 담을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아닌 '타인'이 기억해 주는 기록에서만 담을 수 있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길, 꼭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체취를 느낄 수 없고 자신의 걸음거리나 말투, 표정을 느낄 수 없으며 심지어 치아 사이에 낀 고추가루 마저 타인이 아니면 알아차리기 힘들다.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은 어쩌면 굉장한 오만일지 모른다. 자신을 타인에게서 완전히 분리하는 작업일지 모른다. '나'라는 것은 애당초 '혼자' 존재할 수 없다. 본래 '존재'란 '기억'에 의해 '가능'하다. '나'라는 것은 애초에 '스스로의 기억'으로 완전할 수 없고 '타인의 기억'으로 완성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과 '타인'은 모두 '나'를 구성하는 요소이며, '타인' 또한 '내'가 함께 만들어가는 존재다.


 직점 남긴 기록이라도 모두 '내 시선' 속에 갇힌다. 내가 고른 장면, 내가 선택한 단어, 내가 의도한 해석만이 남는다. 어떤 기억 속에서 분명하게 본 것을 타인과 논쟁하고 있었다. '타인'의 오류가 확실할 정도로 생생한 나의 기억을 비웃듯, 제3제가 하나 둘 '타인'의 기억을 옹호했다. 나의 기억에 오류가 있다고 하기에 너무 확실한 기억이지만 관찰자가 더 많이 늘어 날수록 주변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됐다. '내'가 완전하다는 착각이 어쩌면 스스로를 가둬 버리는지 모른다.


 20대 초반, 해외에서 일을 했다. 직업은 꽤 안정적이었다. 큰 이변이 없다면 아마 나는 20대 때 가졌던 그 직업을 그대로 은퇴까지 유지했을 것이다. 괜찮은 조건으로 계약을 마치고 한국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명절에도 자주 마주치지 못하는 '친척분'과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너 거기서 살 생각은 아니지? 거기서는 젊은 시절 경험만 쌓고 삶은 한국으로 와서 살아라."


 귓등으로 흘려 들어도 될 이야기지만 상대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부모님이 여기 계신데, 헛바람 들어서 밖으로 싸돌아 다니지 말고 적당히 놀고 돌아와.'


사실 당시에는 역시 '귓등'으로 들었지만 해외에서 일하다가 문뜩 그말이 떠오르곤 했다. 특히 명절이 되면 화상통화로만 간간히 집에 전화했는데 그때마다 마치 뇌리에 밖힌 듯, 그의 말이 떠올랐다. 마치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것이 큰 죄악을 끼치는 것 마냥.


 그의 말이 나의 귀국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사건마다 그의 눈빛과 말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이후 나는 귀국했으나 그 말을 했던 당사자는 아마 본인이 그 말을 했다는 사실마저 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 뒤에도 전혀 교류가 없었기도 했다. 다만 내 속에 있는 어떤 무의식을 그 말이 계속해서 자극했고 굉장히 결정적인 순간마다 큰 결정을 바꾸도록 하기도 했다.


 따지고보면 모든 것은 '선택'을 기준으로 죽거나 살게 된다. 내가 해외에서 돌아온 순간, 나는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는 나'를 죽인 것이며, 다시 귀국해서 돌아온 나를 살려낸 것이다. 그렇게 모든 순간, 인생이 극변하는 기준점에서 '선택'은 있고, 그 선택마다 무수한 나 중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죽여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실 나에게 했던 친척 어른은 그 뒤로 내가 한국에서 애를 먹고 있는 동안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 뒤로 어떤 배움이 생겼다. 어떤 사람에게 '충고'를 할 때는 꽤 신중한 편이 좋겠다. 그 충고가 부정적인 방향일 때는 더욱 그렇다. 사람이 살면서 짓는 죄 중에서 스스로 깨닫게 되는 죄는 아주 극일부일지 모른다. 앞서말한 친척도 스스로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듯. 나 또한 무수한 말을 뱉었고 그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가능성을 '살해' 했을지 모른다. 이런 사회적, 심리적 원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은 정말 싶지 않다. 그러한 자기 인식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오만해서는 안되고 항상 겸손하고 '죄'를 '사'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나'는 실제 '나'의 몇 퍼센트나 알고 있을까.


모르겠다. 쓸데 없는 말을 많이 하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한번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정확히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어머니는 나를 혼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몹시 억울했던 기억이 있다. 분명 나의 죄는 아니었는데 어머니는 '분명하게 네가 했다'라고 말씀 하셨다. 그 10살도 되지 않은 억울함이 30년도 더 지난 지금 궁금했다.


  그리고 왜 그러셨냐고 물었다.


그때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답하셨다. 젊은 나이에 일하고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고 스트레스가 쌓여 있지 않았겠느냐, 말씀하셨다.

 그리고 떠올려보니 내가 아이에게 화를 냈던 몇몇 상황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행복하게 지냈지만 어쩌면 아이는 불합리하게 혼났던 그 순간을 기억할지 모른다. 너무 바쁜 언젠가는 아이가 너무 시끄럽게 인형놀이를 한다고 혼을 내기도 했다. 육아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 본인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 상대에게 기록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가 이해가 되고, 나의 잘못이 떠올랐다. 참 바보 같게도 나는 30년을 중심으로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중복되는 어머니와 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마치 한번 녹화가 되면 지워지지 않는 녹화테이프가 돌아가듯, 나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누군가에게 기록된다. 개중 나는 아주 극일부 스스로 인지한 면만 '나'라고 느낄지 모른다.


 '김영하 작가'의 '단 한번의 삶'을 보고 참 많은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김영하 작가'의 소설보다 수필을 더 많이 읽어 본 독자로써.. 그는 역시 수필로도 글맛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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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아기 - 세계적 심리학자 폴 블룸의 인간 본성 탐구 아포리아 8
폴 블룸 지음, 김수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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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정신과 물질, 무엇이 먼저인가'

이 질문에는 두 개의 해석이 있다. 하나는 관념론이고 다른 하나는 유물론이다. 관념론은 정신이 우선한다고 본다. 인간의 의식, 사고, 감정, 신념이 세계의 근본이라는 의미다. 반대로 유물론은 '물질'이 우선이라고 본다.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칼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봤다. 그리고 종교나 도덕도 사회적 산물이라고 여겼다.

이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해석이다. 하나는 '사람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존재하니까 생각한다'고 말한다.

모든 현실은 물질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의식, 도덕, 종교, 예술도 모두 물질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즉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그것이 칼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산업혁명 시기, 사회 불평등과 계급 갈등이 심해져가면서 노동과 계급이라는 물질적인 설명은 아주 유용한 해석 방식이었다. 다만 인간은 단순히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특이하게 이익에 반하는 행동만 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고, 비합리적인 신념이나 상징을 위해서 목숨도 바친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유물론이 이런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부족하다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시 '이원론'이 나온다. 이원론이란 물질과 정신은 둘다 실재한다는 생각이다. 이 둘은 모두 실재하고 분리된 실체다. 육체와 정신은 별개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물질과 관념도 마찬가지다.

몸이 죽어도 마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원론은 유물론과도 관념론과도 충돌할 수 있지만 이 둘을 모두 포용하기도 한다. '폴 블룸'의 '데카르트의 아기'는 이 철학적인 논장의 장에 '심리학자로서 개입'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원론적 직관을 갖고 태어난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고, 정신적 존재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갓 태어난 아기'가 필요하다.

'아기들은 움직이는 인형을 보면 '의도'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표정을 보면 '감정'이나 '목적'이 있다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불공정한 상황에 분노하고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과 돕는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인간'의 이런 특성은 '사회화 이전' 즉, '말도 하기 전 아기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다시말해서 인간은 도덕성, 이원론, 영혼과 같은 관념론적인 개념을 '학습'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사람은 마음이 중요하다'라고 배운다. 혹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마라'라는 말도 배운다. 심지어 수천년 전에 죽은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기리는 일도 한다. 우리 인간은 수만 년 동안,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로 앞서 말한 우리의 본성은 '진화의 과정'에서 얻어진 산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 '말투', '의도'를 본능적으로 해석하려는 심리장치를 진화 과정에서 갖게 되었고, 그것이 곧 정신의 실쟁성을 믿게하는 토대가 되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초월적 진리를 믿었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바는 그러한 초월적 진리는 없다는 것.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두뇌'의 자동 반응을 이야기 한다. 다시말해서 '데카르트의 아기'는 철학적 관념론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인간이 왜 그렇게 관념론적인 사고 방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는지를 탐구한다. 우리가 이런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은 '진화'의 방향이 그랬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태어난 존재라는 것.'

우리가 가진 신념과 감정, 정의와 도덕은 어쩌면 어딘가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진화의 산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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