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조각들
연여름 지음 / 오리지널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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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도서는 ‘이옥토 작가’와 콜라보한 표지 디자인이 눈에 띈다.

이옥토 작가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개정판 표지를 담당한 사진작가로

대상을 표현하는 특유의 ‘반 투명함’이 특징이다.

이번 표지도 ‘이옥토 작가’ 특유의 느낌이 너무 매력적이다.


도서 크기도 한 손에 쏙 들어온다.

이런 아담한 판형은 ‘’소장 욕구”를 자극한다.

판형 도서는 한손으로 보기 쉽고 가방에 쏙 들어가 언제든 펼쳐 보기가 좋다.

개인적으로 가방이 무거워지는 일을 경계하는데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어 좋은 듯 하다.

거기에 표지까지 예뻐서 디자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예술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화가 ‘소카’와 흑백증을 가진 청소부 ‘뤽셀레’.

서로 다른 결핍을 가진 두 사람이

조금씩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SF이지만 결국은 인간의 마음과 온기에 대한 이야기다.



미래의 인간은 신체의 원하는 부위를 자유롭게 강화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인간은 신체를 강화시킨 ‘인핸서’와 강화하지 않은 ‘오가닉’으로 나눠진다.

빛의조각들은 ‘뤽셀레’라는 인물이 ‘소카’를 만나며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소카’는 예술을 위해 인핸서가 되지 않은 중증 폐 질환 환자다.

질환 때문에 그의 집은 항상 청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작은 먼지로도 죽을 수 있는 ‘소카’지만, 직업적 특성상 ‘오가닉’의 삶을 지킨다.

반면,

‘뤽셀레’는 본래 항성 간 운행을 하는 우주선의 파일럿 이었다.

다만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고 흑백증을 앓는다.

흑백증은 망막의 ‘원추세포’ 기능이 없어 세상을 완전히 ‘흑과 백’으로만 보게 되는 증상이다.

그로 인해 ‘인핸서 수술’을 통해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

그렇게 ‘청소부’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담당하게 된 저택에서 ‘소카’를 만나게 된다.


완전함은 행복과 비례한가.

생각해 볼 문제다.

기계로 신체를 강화시킬 수 있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소카는 예술의 순수함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했고 ‘뤽셀레’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기계를 선택하고자 했다.

두 사람은 완전히 정반대의 선택을 하고자 했지만 종국에는 같은 곳에 닿게 된다.


‘이해’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소설의 배경이 현대 우리 사회와 닮아 있다.

정해진 규칙과 정답이 있으며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우리 사회에 너무 깊게 들어와 있다.

모두가 완전해져야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삶을 저당잡히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소설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을 넌지시 말한다.

서로의 약함을 인정, 이해하고 그 속에서 인간다움을 찾아가는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세상에 완전해지면서도 사회를 움직이는 건 어쨌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 ‘이해’와 같은 인간다움이 분명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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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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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배경지식 없이 '김숨' 작가의 '간단후쿠'를 읽었다. 그것이 이 소설을 더욱 매력적이게 만들었다. '간단후쿠' 발음 자체가 '일본식'이라 얼핏 일본이 배경이겠거니, 했을 뿐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소설 초반을 시작하면 '간단후쿠'가 무엇이고, 소설의 배경이나 분위기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소설제목'인 '간단후쿠'는 일본군 '위안부' 여자들이 입는 원피스 옷을 말한다. 소설은 마치 한폭의 수채화를 완성하듯, 흐릿한 색체부터 서서히 덧칠하며 분위기와 사건, 시간, 성격을 완성해 나간다.


 어찌나 그것이 실감이 나는지, '소설가'의 서술방식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듯 당시의 분위기와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 그것도 몹시 어린 소녀다. 비슷한 어린 아이들이 역사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이끌려 꽤 비극적인 유년기를 보낸다.


 거기에는 지금도 다르지 않은 '양심'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간호사, 군의관, 군인 등.

 부끄러움도 잊게 하는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는 어린 아이들의 시선은 극적일 정도로 순진하다. 자신들을 비하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스스로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에 대한 인식도 없다.


 그저 주어진 일에 대한 무의식적인 관성을 따라 나아갈 뿐이다. 여기에는 감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수치,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참혹함이 녹아져 있다.

 '김숨' 작가의 문장은 '이것은 잔혹하다'하고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의 질감, 빛의 온도, 공기의 냄새, 분위기, 말투 등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그 현실을 체감하게 만든다.

 실제로 그렇다. '외롭다'하는 세단어로 이뤄진 감정보다 빨갛게 익은 단풍잎이 아슬아슬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가 떨어지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더 진한 '외로움'을 전달 받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언표'가 만들어내는 '사고의 제한성'을 이 소설은 극히 적게 만들었다. '피'를 묘사하지 않아도 '피비린내'까지 느껴지는 리얼함이, 울음을 그리지 않아도 울음이 들리는 굉장히 매력적인 서술이다. 그 절제된 문체가 '간단후쿠'라는 제목이 가진 아이러니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설의 중반부까지 읽게 되면 '소설이 가진 정체성'이 명료해진다. 수채화의 색이 짙어지며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고 서로 덧칠했던 다양한 색감들이 대략의 선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가볍게 '재미있는 소설'하나 읽어야지, 했던 마음가짐을 자세와 함께 고쳐 잡고 한장씩 읽어 넘겨간다.

 

 이 시점부터는 독자가 '독자'가 아닌 '증언의 청자'로 바뀐다. 소설을 읽어가던 '독자'에서 '목격자' 혹은 개입이 불가능한 '방관자'로써의 자책감과 무기력을 함께 느껴질 수 있다.

 이 작품은 결과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는 '이렇다'하는 과정의 묘사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보며 사건이나 시간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어쩌면 '소설의 제목'이었던 '간단후쿠'가 그렇다. 아이들이 입은 훌러덩 훌러덩 입고 벗을 수 있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애착도 담겨져 있지 않은 천 조각.


 책을 읽고 난 뒤에도 불편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상황에 개입할 수 없는 그 무기력함이 오래 갔다. 소설은 굳어진 작가의 글이기에 그것에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간단후쿠'가 묘사하는 '과거' 역시 돌아가 바꿀 수 없는 '개입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지나간 고통스러웠던 사진을 바라보며 언제든 사진 속으로 들어가 구해주고 싶다는 안타까움만 생겨난다.


 소설은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저 보여주고 싶은 바를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관경을 지켜보며 아마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감정'과 '분위기'를 보편적인 독자는 전이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데없이 '간단후쿠'가 보여주는 역사적 장면이 21세기 오늘 서재로 다가왔다. 책은 이처럼 갑작스럽게 '감정', '역사'를 상기시켜 오늘의 내가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특징이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시간이 흐르고 몇번은 다시 꺼내 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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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식사가 잘못됐습니다
이토 미쓰코 지음, 이현욱 옮김, 김아람 감수 / 더난출판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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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 가장 많이 느끼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부모 먼저'라고 하는 생각이다. 육아를 하다보면 '아이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다'하는 바람이 본의아니게 생겨난다. 그 바람대로 아이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어린 시절을 상기해보면 알 수 있다.

 어디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가 부모의 바람대로 크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부모'의 바람이 대체로 '불가능'에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 불가능'을 말한다.

 눈이 내린다는 것은 분명 '불가능'의 영역은 아니겠지만 두바이나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사람이 '눈이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 실제로 두바이 시내에서는 기록된 자연 강설량이 0이다. 즉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평생 단 한번의 눈도 본 적 없는 경우가 많다.


 '환경'이란 그런 것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말처럼 인간의 경험이 '지정학적 위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 개개인의 경험 또한 '가정환경'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아이에게 '환경'은 '부모'가 된다. 즉 눈이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어떤 지역에 있으면 '눈'이라는 것은 존재 여부를 가려 낼 수 조차 없는 개념이 되어 버린다.


 프랑스에서는 '나방'이 없다. 나방이 없는 이유는 프랑스어에서 '나비'와 '나방'을 따로 구분하는 명사가 없기 때문이다. 빠삐용은 날개가 부드럽게 퍼지는 곤충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낮에 활동하면 '낮의 나비', 밤에 활동하면 '밤의 나비'라고 구분하여 '나방'을 '밤의 나비'라고 부른다.


 정의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것들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일주일 용돈은 500원이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 때, 용돈이 1000원으로 인상됐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를 올라갔을 때, 친구들이 피씨방을 가는 것을 보았다. 농촌지역에서 살았던터라 당시 '피씨방'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생소했다. 친구들이 한창 다니기에, 거기는 금액이 얼마가 되느냐고 묻자, 한시간에 1000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당시 그 이야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충격이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일주일에 1000원을 받았을 때, 문방구에서 간식과 딱지, 오락 한번 정도를 해도 충분히 돈이 있었다. 문방구에서 집어드는 간식은 대체로 50원에서 200원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00원이라니...


 돌이켜 생각해보건데, 어린시절에는 '가정'의 환경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후 중학교를 가면서 '친구'들과 교류를 시작하며 주변의 상황에 점차 눈을 뜨게 된다. 환경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건 어린 시절에 가졌던 기본적인 삶의 패턴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워낙 내가 단 것을 좋아하다 보니, 아이의 식사가 많이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는 달달한 시리얼을 먹고 저녁에는 배달음식을 먹는 식습관은 아이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아이는 유독 '초콜렛'과 '사탕'을 좋아하는데 그 모습에서 '나'를 보게 됐다. 물론 좋은 점이란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이겠다. 다만 아이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를 볼 수 있게 됐다.


 몇 달 전부터 운동을 시작한다. 단순히 운동이 아니라 몇시에 취침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먹는지도 매일 꾸준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냥 생각없이 스쳐 지나온 많은 시간이 비수가 되어 꽂히는 듯하다. 정제된 음식과 단백질 식품을 찾으며 나를 관리하다보니 아이의 식단에서도 '위험요소'가 너무 많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맛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차 나의 식단에 변화가 생겼다. 부모가 먹는 식단이 변화하자 역시 아이의 식단도 바뀔 수 밖에 없다. 식습관은 절대적으로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

 그 책임을 매번 통감하며 최근 '식단'과 '운동'에 관한 많은 책을 읽고 있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어떤 음식을 먹으면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가장 먼저 '라면'과 같은 음식을 끊었더니 피부에 올라오던 것들이 많이 사라졌다. 함께 식사를 해오던 '아이'도 '내'가 가졌던 염증 만큼이나 나쁜 독소가 쌓여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든다. 철저하게 지킬 수는 없겠으나, 식단에 대한 의식을 놓고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확신이 생긴다. 


 최근 아이가 '비염'이 심해지면서 아침에 코피를 쏟는 경우가 많아졌다. 약국에 갔더니 '지르텍' 하나를 먹으라고 알려 주었다. 약사 선생님 말로는 큰 부작용이 있거나 내성이 생기거나 하진 않는다는데, 그래도 양약이 어린 아이 입으로 삼켜지는 것에 약간의 불안감이 생겼다.

 식사와 수면을 잘 챙기고, 피부, 건강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굉장히 긍정적이고 유해진 기분이 든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건강에 대한 방향성이 확실히 잡혔다.


 병은 생기기 전에 관리해야 한다. 아이의 비염을 보고 먹는 것, 자는 것, 기타 생활 하는 것을 모두 점검하며 다양한 반성을 하게 된다.


 해당 책은 챕터로 나눠져 있어 순차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내용이 간결하고 쉬워 집에 두고서 간간히 꺼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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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미워할 시간에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 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지키는 방법
윤서진 지음 / 스몰빅라이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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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육아'에 철학이 하나 있다. 바로 '희생하지 말자'다. '육아'를 넘어서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된다. 결코 '희생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된다. 마음을 이렇게 먹는 이유는 가까운 관계일수록 '댓가 없는 희생'을 하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희생'이 있어서는 안된다. 희생이란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며 '상대'에게 '득'을 주는 행위다. '상대'에게 '득'을 주는 것은 '옳은 일'이겠으나 '스스로'에게 '해'를 주는 것은 결코 '기본값'이 될 수 없다. 조금더 장기적인 시선에서 그것은 '유지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일에는 '지속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장기적이어야하고 꾸준해야 한다. '희생'은 이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하며 꾸준한 사랑'의 속성을 지켜내지 못한다.

 투자관련 책 중에 '저스트 킵 바잉'이라는 책이 있다. 인덱스 펀드에 장기투자를 권하는 책이다. 급등이나 천지개벽할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만 느리지만 꾸준하게 일어나는 '복리'의 중요성을 설명한 책이다.

 '금융투자'뿐만 아니라 '사랑' 혹은 '관계'에 있어서도 적용된다. 관계의 깊음은 시간을 따라 깊어진다. 고로 '시간'이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속성이고 그것을 길게 가져가기 위해서는 '지속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굉장히 이기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가장 완전해야 한다. 상대에게 지나치게 몰입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몰입해야 하며 '희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잘 챙겨야 한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누군가의 잔을 채우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잔부터 채우는 것이 먼저다. 스스로의 잔이 넘쳐, 흘러 넘치는 것으로 상대를 채우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해야하고, 기부를 많이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경제적 능력을 길러내야 한다. 모든 이치가 그렇다. 가르치는 행위만 몰입되어 스스로의 공부를 멀리하거나 기부를 하기위해 스스로 빈곤해지는 것만큼 어리석고 '지속불가능한 사랑'은 없다. 무엇이든 안으로 가득하고 밖으로 흘러넘쳐 풍만함이 충분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윤서진 작가'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타인의 변화와 성장으 돕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길러내고 돕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전반적으로 살펴 볼 때, 충분하게 자신을 성시킨다.


 예전 한 작가가 했던 말이 있다. 


'머리가 비워지면 많이 읽고, 생각이 많아지면 많이 쓴다'


 비워진 머리로는 많은 글을 쓸 수 없다. 많은 글을 읽고 많은 사색을 하여 스스로의 언어로 잘근 잘근 감정과 지식을 소화시킨 후에야 그것을 글로써 보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컨데 모든 우주의 매커니즘은 '인풋', '소화', '아웃풋'의 형태를 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필연적으로 어떤 동물이나 식물의 '배설'을 '섭취'할 수 밖에 없으며 우리가 '배설'한 어떤 것도 누군가의 '양분'이 되어 '섭취'된다. 이런 돌고 도는 우주의 이치는 '도가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에르난 디아스' 작가의 '먼곳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스웨덴 농장 감자에 떨어진 빗방울도 한 때는 호랑이 방광에 있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스치고 돌고 도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즉 어떤 언어, 감정, 행동도 사실 외부의 무언가의 영향을 받은 산물이고, 그것이 나에게 '인풋'되면 잘 소화되어 다음 사람들에게 '배설'의 형태로 '전이'되는 것이다.


 즉 나는 관계에 있어서 '전달자'의 역할을 한다. 좋은 양분을 상대에게 잘 넘기기 위해서, '나'라는 필터는 깨끗하고 맑아야 한다. 이런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사람의 유전자는 워낙 이기적이라 '댓가'를 바란다.

 '주'와 '종'의 관계로 얽히며 '종속'적인 관계가 된다. 내가 투입한 시간과 사랑의 값으로 상대를 소유할 수 있다고 여기며 여기에 적절한 댓가가 없다면 그 댓가의 기대값을 치루지 못한 상대를 미워하게 된다.


 대부분의 폭력은 사실 '가족', '연인' 등 아는 사람사이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모르는 타인'보다 가까울수록 '미움'이라는 감정이 더 생길 수 있는 것은 비슷한 원리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모든 관계는 '상대'가 아니라 '상호'가 있을 때 발생한다. 즉 어떤 '상대'와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더 생각하고 집중할 때 명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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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 - 더 이상 불안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키렌 슈나크 지음, 김진주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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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렌 슈나크 박사는 임상심리학자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다양한 인물들의 정신건강을 관리하면서 60만 이상의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기도 하다. 키렌 슈나크 박사의 '조언' 역시 결과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상식으로 머물던 정보에 다양한 논리와 근거를 둠으로써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설득력을 부여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키렌 슈나트 박사가 다시 한번 더 강조했던 정신 건강을 위한 기본 생활 수칙은 이렇다. 첫째, 수면. 수면은 역시 모두에게 중요하다. '삼당사락', '사당오락' 하며 목표와 성공을 위해 '잠' 줄이는 것을 '절대선'으로 여겨지는 우리 현대 사회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거리를 던진다. 당연하겠지만 잠들기 전에는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어렵다면 애초에 충전을 방에서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도 몹시 좋다. 떠오르는 상념을 '암산'으로 해결하기 보다 '일기장'이나 '노트'에 적어두고 다음날 해결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구구단이야, 언제든 암산으로 답을 내어 놓을 수 있겠지만 자릿수가 두자리만 넘어가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종이와 펜'이 필요하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그 복잡한 문제는 어차피 암산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일터, 애초에 종이와 노트에 적어두고 최적의 상태일 때 해결하는 것이 나은 듯 하다. 둘째는 식단. 인간이라고 우주에 통용되는 '물리법칙'이 피해 갈리는 없다. 물과 소금을 더하면 소금물이되고, 오른쪽으로 던진 공이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당연한 법칙을 인간만 예외로 두진 않는다. 우리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은 입으로 들어와 화학분해되고 다시 신체 곳곳을 구성하게 된다. 고로 무엇을 먹었는지가 무엇이 되는지는 어찌보면 '달'이 지구를 돌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처럼 당연한 '물리법칙'이자 '인과관계'다. 셋째, 운동. 쉽게 말하자면 '뇌'는 운동기관이다. 뇌는 '운동'을 위해 진화된 기관이며 특이 인간의 뇌가 비대해진 이유중 하나는 인간의 '지구력'과 관련되어 있다.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 중 가장 지구력이 강한 생명은 '인간'이다. 이 밖에 운동은 몸의 긴장을 풀게하고 수면의 질을 높이며 주의력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 넷째, 여가 여가 활동은 불안 장애를 겪을 때 증가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분비를 감소시킨다. 반면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를 증가시킨다. 크게 대단할 것 없이 그저 일주일에 한번 스스로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섯째, 관계 인간관계는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불안 문제를 겪는 사람들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고립은 불안을 악화시킨다. 불안은 다시 교류를 줄어들게 한다. 즉 이러한 악순환으로 인해 점차 혼자가 되고 혼자가 되면 정신건강에 좋지 않게 된다. 여기 다섯가지는 딱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무언가 '기가막힌 새로운 방법'을 이야기하기에 '정도'는 본래 '클래식'한 법이다. 개인적으로 뉴스를 보지 않은지 '몇년'은 지났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끊는다'라는 목적이 아니라 뉴스가 자극하는 불안이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그렇다. 행복과 불안은 '사실' 빈도와 관련있다. 만약 커다란 독사가 우글거리는 방에 가둬 놓고 '불안'을 없애는 요령을 열심히 실천한다면 과연 그것이 성공하겠는가. 역시 어렵다. 주변에 나를 불안으로 이끌어가는 요소를 줄이고 스스로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배치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끊임없이 불안하고 있다면 내가 치우지 못한 불안의 요소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공포영화를 볼 때, 손에 땀을 쥐게 하다가 '그 공포감'을 없애는 방법을 찾는다면 당연히 '그 화면'을 끄는 방법이 최고다. 공포스러운 영상과 소리를 재생 시켜놓고 무섭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은 어찌보면 더 간단하고 쉬운 길을 벗어나는 길이다. 사실 아무리 위험하고 긴급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상태에 쳐해 있다고 하더라도 스마트폰 전원을 끄고 방에 들어가 문을닫고 눈을 감는다면 스스로를 해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세계에서 완전하게 차단된다. 그 빈공간에 다시금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불안을 끄집어 오는 능동적 수고스러움만 없앤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불안으로 부터 해방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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