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사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병마로 조영래를 잃고 난 후 선후배 동지들과 친구들이 모여 그의 문집 하나 엮어보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제 그를 보낸 지 1주기를맞으며 한권 책으로 펴내게 되었지마는 지금 책을 펼쳐들고 그의 글을 다시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작은 성취감이나 보람보다는 다시 한번 가슴속을 찌르르하게 저려오는 분함과 아쉬움이다.
무엇이 그토록 빨리 조영래를 우리에게서 앗아갔는가. 그가 불치의 병으로쓰러졌으니 어떤 이는 그 병마의 안정사정 두지 않는 비정함을 원망하기도 하고또 어떤 이는 그토록 자기 건강을 돌볼 줄 모르고 밤새워 글 쓰며 줄담배를 피워대던 본인의 무심함을 탓하기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가 그저 병마의 장난으로 쓰러진 것이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저 멀리 3공하에서 3선개헌 반대, 반유신투쟁의 앞장에 섰던 그에게 가해진 짧지 않은 옥고는 그의 몸에 얼마나 끈끈한 피로의 찌꺼기를 쌓아놓았으며, 장장 5년여에 걸친 도피생활 속에서의 암담한 강박감은 그의 심령에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겨놓았을까. 그리고 우렁찬 민주화의 새날을 눈앞에 두고 야당이 분열함으로써 정권교체 실패의 한을남긴 저 87년 대선 이후의 실의에 빠진 나날들, 그 좌절과 허무의 세월 속에서그가 참아내야 했던 아픔 같은 것들이 모두 모이고 쌓여서 그의 육신을 쓰러뜨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저 5.16 군사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이 땅의 군부독재의 우악스런 박해, 그 독재세력에 빌붙어서 역사를 왜곡시키고 눈앞의 영달만을 탐하던 무리들의 온갖 음모, 그리고 천재일우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정신못 차리고 분열과 파쟁으로 대사를 그르쳐버린 한심한 정치인들의 어리석음 같은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서 우리의 희망이었던 청년 조영래를 음해한 것이다. - P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지막으로 야간족은 수천 명의 후손들을 남겼다. 그들은 다른 종족들과의 혼인을 통해 얻은 자손들로 크리스티나 칼데론처럼 ‘순수 혈통‘이거나 야간어를 쓰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중 많은 이들이 서로에게, 또 인구조사원과 방문객들에게 스스로를 야간족이라고 밝히고 있으니 그들을 통해 야간족이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수 혈통‘이라는 개념은 사실 애매하기도 할 뿐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적이기도 하다. 특히 그 말이 유구한 인류의 역사와 비교하면 아주짧은 기간 동안 동족끼리 섞인 소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경우에는더욱 더 그렇다.
실제로 모든 야간족들은 나, 티에라 델 푸에고의 유럽인 정착민, 또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공통 유산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모두 네안데르탈인과 약 1억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현대 인류의 후손들이다. 우리의 혈족관계는 순수 혈통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야간족의 혈통을 잃는 것이 아니라 야간족의 문화를 잃는 것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 - P40

메소포타미아의 마을 중 일부는 지방 도시가 되었고, 시골에서이주민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은 계속 농사를 지었지만 도기, 직조, 금속 가공 등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그 기술과 제조품을 식량과 물물교환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 도시들은 흔히 관청이나 종교 건축물 같은 것들을 갖고 있었고, 일부 거주자들은 사제나 통치자가 됐고 겸직을 하기도 했다. 재산과 신분은 상속할 수 있었고 소수의 사람들은 법을 만들고 세금을 부과했다. 도시 중 일부는 성장해 부유하고 강력해졌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쯤에는 도시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시와 축적된 부, 식량과 농지를 방어하기 위해 장벽이 세워지고 경계가 표시되었으며 군사들이 양성되었다. 그들은 다른 도시 국가들의 공격보다는 약탈자들, 즉 자기 소유의 땅이 없고 도시의 주민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유목민들을 더겁냈던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수렵채집인으로 시작해, 다음에는 농부 그리고 도시의 주민으로 인류가 처음으로 정착한 장소였고 사유 재산 개념이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새로운이주민들이 등장한 것도 바로 이때이기 때문이다. 특히 더 중요한 것은 이주 이주민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현존하는 서면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때 나왔다는 점이다.
••••••
따라서 이 이야기는 유목민을 배척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화합과 혼혈교배를 권장하는 것으로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 유목민들이 도시인들과 다른 삶을 살 수는 있지만 야만적이거나 완전히 다른 종족은 아닌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유목민들이 도시 사람들과 다르지만, 그들도 ‘문명화‘되어 도시 생활에 정착할 수 있으며, 도시 처녀와 혼인까지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마르투를 강하고, 관대하고, 결단력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있는 이면에는 사실 유목민을 깔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동시에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도시 국가에 다문화를 수용하는 태도가 있음을 반영하기도 한다. 또한 고대의 다른 이야기에는 한때 우리 모두가 유목민이었다는 희미한 인식이 깔려 있기도 하다. - P50

중국이나 인도, 이집트 등에서 발굴된 고대 기록을 살펴보면 대부분이주민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기록에 등장하는그들은 노예나 죄수, 국경 너머에서 온 수상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사람들, 야만인으로 묘사된 지나가는 유목민, 혹은 선사시대 전설에 나오는 인물 등 일반적이지 않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만 그려졌다. 또한 그들은 대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목소리 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리고 성벽에서 환호하고 바빌론 강가에서 울부짖었던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고대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에서는 이주에 대한 이야기를 찾기 위해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대홍수 이후 인구 재건에 나서고, 홍해를 건너 도피하는 등 성경 어디에나 이주민들을 찾아볼 수 있기때문이다. 성경을 이주 지침서로 읽어도 될 정도다. 게다가 대부분의 이주 관련 기록들과는 달리 성경은 이주민들에 의해 이주민들을 위해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많은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와 관계가 없기는 하지만, 약 2,500년 전 구약이 처음 쓰여질 당시 사람들이 이주를 보는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 P55

영국 이스라엘주의 운동은 20세기 전반까지 이어졌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 중 한 명은 1981년 사망할 때까지 영국-이스라엘 세계 연맹 BIWF, British-Israel-World Federation의 후원자였다. BIWF는 아직도 존재하지만 예전보다 많이 축소되었고 더 이상 버킹엄 궁 안이 아닌 잉글랜드 북부 비숍 오크랜드 Bishop Auckland에 본부를 두고 있다. 이들은우익 기독교 압력단체가 됐으며, 영국인이 단 부족의 후예라는 신념을 고수하면서도 중동에서 오는 이민자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BIWF는 브렉시트의 열렬한 지지 단체였는데 "어려운 협상이 진행 중이니주님께서 바빌론 같은 EU에서 영국을 완전히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며 추종자들에게 영국의 EU 탈퇴를 지원하기 위해 하루동안 금식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브렉시트를 논할 때조차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이주 이야기를 잊지 않은 것이다. - P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문

짧고 특별한 이야기로 이 책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전쟁과 지중해를건너는 힘겨운 여정에서 살아남아 유럽에서 새 삶을 시작한 한 이주민의 이야기다.

AT는 30대 남자로 아시아 지역 국가의 좋은 가문 출신이었지만 내전에서 패배한 진영에 속해 있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한 전사였으므로, 자신이 곧 밀려들어올 승리한 적군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AT와 언어와 종교가 같은 그들은 이미 AT의 장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 - P5

이주민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겨간 사람으로, 그가 경험하는 두번째 문화는 첫 번째 문화와 크게 다르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도전 과정을 겪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간 동안 머문다.

내가 이 정의를 선호하는 이유는 국적이나 민족, 국경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현대와 고대 이주민, 자발적으로 이주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또 이주민들이 이동한 거리나 통과한 국경보다는 그들의 경험을 강조하고있다. 이는 또 자유롭게 선택해 이동하는 이들과 강제로 이주당하는 이들을 양극으로 나누어 그 사이에 있는 모든 다양한 경우들을 다 포함한다.
이것은 ‘이주민‘이라는 단어가 노예와 배우자, 난민과 은퇴생활자, 방랑자와 주재원, 정복자와 구직자 등 다양한 경험을 한 이들을아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본인이 의도해 이주한 사람, (나처럼)단기 체류 목적으로 어딘가 갔다가 주저앉은 사람, 추방되거나 원치않는 망명 등으로 강제로 밀려 이주한 사람 등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다. 또한 겨우 몇 킬로미터 이동해 국경을 넘은 사람이나 같은 나라안에서 먼 거리를 이동한 사람도 해당된다. - P10

이와 관련된 언어들은 폭발력 있고 혼란스러우며 최근에는국가와 국경 개념, 인종과 인종차별주의와 연관된다. 이민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은 보는 시각만 다를 뿐같은 이주민인데도 그들에 대한 태도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이주방향에 따라 함축된 의미가 매우 다른 것이다. 부유한 나라를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은 보통 대담한 모험가로 여겨지는 반면 그곳으로 들어오는 이주민들은 기생충처럼 묘사되곤 한다. 이민자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전혀 일관성이 없다. 거주민들과 동화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그들의 다른 점을 지키라고 주문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문화유산을 지키라고 한다. 이러한 편견 속에서 이민자들은 인간 이하가 되었다가 초인이 되었다가 하며, 낭만적으로그려지다가 뭇매를 맞기도 하고, 찬사와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P11

그 중 가장 긴 여행은 남아메리카 남단에 위치해 지금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지역인 티에라 델 푸에고 Tierra del Fuego 군도로 가는 여정이었을 것이었다. 인류가 그곳에 처음 도착한 것은 약 만 년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주민들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아시아를 지나 알래스카, 아메리카 대륙을 통과해 내려가 남극에 가장 근접한 인간 정착지인 남위 54도 이남에 도달했다. 최근까지 사람들은 북아메리카의 초기 이주민들이 대평원에서 어슬렁대는 큰 사냥감들을 따라 내륙으로 온 수렵민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은 켈프 하이웨이 가설 Kelp Highway Hypothesis로 초기아메리카 이주민들은 사냥꾼들이 아니라 해안선으로 이동한 어부들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해물 뷔페‘라고 부를 정도로 온갖 식용 바다 생물로 가득한 해양계를 지탱해주는 거대한 해초 숲을 따라 이동했다는 것이다. - P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 없이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갖는 모든 감정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기억 없이도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내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병으로 돌아가시던순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의 결혼 후 성도, 손주들도, 아홉 명의 자녀도 모두 잊었다. 할머니에게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고 거울 속 얼굴은 더 이상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생애 마지막 4년간 자신만을 돌보던 딸 메리를 자신이 온정을 베풀어 집에들인 노숙자라고 생각했다. 병과 싸우던 마지막 수년 동안 할머나는 너무 힘든 기억만 남겼다. 하지만 돌아가시는 그날도 할머니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우리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사랑한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셨다.
소중하게, 그렇지만 결코 무겁지 않게. 기억이 우리의 전부는아니다. - P2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은 사용하는 어휘가 점점 단순해진다. 여행가방이나 캐리어 대신 가방 서류 대신 종이나 그거.
이런 식으로 단어가 막히는 증상은 단순히 답답한 경험, 한두번 그럴 수도 있다며 넘어갈 수 있는 불편한 상황이 아니다. 삶에지장을 주는 심각한 기억손실이다. 이것이 치매다. 예를 들어 그렉이 오랜 세월 알고 지내던 지인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만난다고 하자. 지금의 진행 상태라면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 못할 확률이 70퍼센트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 P196

불행히도 알츠하이머병은 해마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동차를타고 누비며 희생자를 물색하는 살인마처럼 뇌의 다른 부위에 침입한다. 병이 공간정보를 처리하는 두정엽으로 퍼지면 환자들은늘 가던 장소에서 길을 잃는다. 『스틸 앨리스』에는 공간기억을인출하지 못하게 된 앨리스가 25년간 살았던 하버드 스퀘어에서느닷없이 길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영화에서는 하버드 스퀘어를 뉴욕으로 바꿔서 앨리스가 컬럼비아대학교 캠퍼스에서 길을 잃는다).
알츠하이머병은 또 전전두엽과 전두엽의 신경회로를 손상시킨다. 뇌에서 가장 나중에 발달한 부위들이다. 이 부위들이 손상된 환자는 논리적 사고, 의사결정, 계획 수립, 문제해결능력 등에장애를 겪는다. 그렉이 계획을 바꾸도록 생각을 전환하지 못해결국 마른 옷 대신 젖은 옷을 입고 나왔을 때 알츠하이머병은 그의 전두엽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또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이 손상되면서 기억에 이상이 생기기시작한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은 열쇠, 지갑, 전화기, 안경, 노트북컴퓨터, 돈을 아무 데나 놓아두기 시작한다. 오늘날 어수선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물건을 놓아둔 장소를 늘 잊어버린다. 어떤 경우가 정상적인 경우이고 어떤 경우가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일까? 열쇠를 현관 근처 탁자 위나 코트 호주머니에서 찾았다면 대개 그냥 건망증이다. 짜증은 나겠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열쇠를 거기에 두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밀로이드찌꺼기가 아직 한계치까지 쌓이지 않았다.
하지만 열쇠를 냉장고 안에서 발견했다면 염려된다. 열쇠를 발견하고서도 잠시 동안 ‘무엇에 쓰는 물건이지?‘라는 의문이 든다면 이것은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열쇠가 어떤 용도로 쓰는 물건인지 잊어버리는 것은 의미기억 장애이고 이것은 기억체계 내의 병증일 수 있다. - P198

알츠하이머병은 또 뇌에서 기분과 감정을 제어하는 영역인 편도체와 변연계를 오염시킨다. 그러면 슬픔, 분노, 욕망 등을 조절•억제하지 못하게 된다. 늘 조용하던 아버지가 무섭게 화를 내는일이 잦아질지 모른다. 그렉도 자주 분노가 치솟는 경험을 한다. 내 할머니는 슈퍼마켓에서 잘생긴 남자만 보면 손을 댔다.
알츠하이머병은 또 근육기억이 저장된 회로에도 침범한다. 이경우 환자들은 전에 할 줄 알던 것들을 못 하게 된다. 그렉은 알파벳 Q를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내 할머니는 수표장 관리하는 법, 브리지게임 하는 법, 요리하는 법을 잊었다. 환자들은 결국 옷 입는 법, 화장실 사용하는 법, 아이스크림콘 먹는 법, 음식 삼키는법도 잊어버린다.
알츠하이머병은 새로운 기억의 생성을 방해하는 정도로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이미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기억이 보관된 신경연결망을 어쩌면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망가뜨린다. 이 단계까지 간 내 할머니는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 P201

그 답은 맥락이다. 기억을 떠올릴 때의 맥락이 기억이 생성될때의 주변 맥락과 일치할 때 우리는 기억을 훨씬 더 쉽고 빠르게완전한 형태로 불러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하려는 일에 대한) 미래기억,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일화기억, (지식정보에 대한) 의미기억, (동작을 취하는 방법에 대한) 근육기억 모두에서 나타난다.
방금 소개한 사례에서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기억, 즉 부엌에가서 안경을 가져오기로 한 기억은 침실에서 부호화되었고, 당시내 주변에는 침대, 침대 옆의 탁자에 놓인 책과 책장 안의 책들과같은 여러 가지 단서로 이루어진 구체적인 맥락이 있었다. 그런데 부엌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줄 단서가 아무것도 없었다. 냉장고, 토스터, 볼에 담긴 바나나, 재킷이 있었지만, 그중 어떤 것도 내게 필요한 기억을 촉발할 단서가 아니었다(안경은 중요한 단서지만 나는 안경을 보지 못했다). 더구나 이들 물건들은 안경을 찾아야 하는 내 주의를 교란시켜 아침식사, 계절에 안 맞게 쌀쌀한 날씨 등 안경과는 무관한 신경경로 로 나를 이끌었다. 부엌의 맥락이 내가 왜 부엌에 왔는지 떠올리지 못하도록 나의 기억에 오히려 방해가 된 것이다. 침실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처음의 의도가 만들어질 때와 동일한 단서들 사이에 다시 놓이게 되었고, 따라서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바로 기억을 인출할 수 있었다. - P207

왜 그럴까. 지금 보고 있는 숫자만 기억으로 강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숫자를 외우는 동안 경험하는 것은 모두 잠재적기억으로 한데 묶인다. 외적. 내적 맥락 모두 기억의 일부가 되고 그중 어떤 부분이건 활성화되면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기억도 촉발된다. - P210

그러므로 일시적이고 적당한 수준의 스트레스는 기억형성에도움이 되는 반면 기억회상에는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주 또는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대다수 현대인들의 경우는어떨까? 만성스트레스가 기억에 좋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실 끊임없는 스트레스는 기억에는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지속적인 스트레스의 영향은 이렇다. 폭군 같은 상사, 가학적인 파트너, 아픈 자녀와 같이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여러 가지 스트레스 유발 상황에 연달아 노출된다고 하자, 예를 들면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진데다 직장을 잃어서 공과금도 낼 수 없는 처지라고 해보자. 투쟁 도피 반응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고 매번 코르티솔이 분비된다. 코르티솔 과다 상태가 지속되면 시상하부의 잠금 밸브가 둔감해지다가 더 이상 반응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스트레스 반응 스위치가늘 켜진 상태가 된다. 이제 우리 뇌와 몸은 늘 쫓기는 도망자처럼 항상 투쟁 도피 상태가 된다.
이런 상황은 기억에 좋지 않다. 만성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편도체에 경보를 울리면, 우리는 사고하는 뇌가 아닌, 원시 상태의 감정적인 뇌 활동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스트레스는 전전두엽을 제한해 사고능력을 떨어뜨린다. 무슨 일을 하건 장단점을 신중하게 따지지 않고 즉각적으로 대응한다.
눈앞에 사자가 나타났다면 이런 대응이 도망치는 데 유리할지 모른다. 하지만 만성스트레스의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는 명확한 사고를 하기 어려워진다.
더욱 걱정되는 점은 스트레스가 지속될 경우 해마의 신경세포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성인의 신경세포는 재생되지 않으므로한 번 죽으면 끝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이미 1990년대에 거짓으로 판명 났다. 신경생성(새로운 신경세포의 성장)은 일생에 걸쳐 뇌의 여러 부위에서 일어나고 특히 해마에서 가장 활발하다. 단 해마가 항상 코르티솔에 절어 있다면 사정은 다르다. 만성스트레스는 해마의 신경생성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있다면, 해마가 작아졌을 것이다. 그러면 기억강화를 담당할 신경세포가 적어서 새로운 기억을 생성하는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수 없다. - P220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뇌와 몸의 반응에 극적인 변화를 줄 수는 있다. 요가, 명상, 건강한 식습관, 운동, 마음챙김 수행, 감사와 공감을 통해 우리는 스트레스에조금 둔감해지고, 도피 반응에 브레이크를 걸고, 불안이라는 독을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모든 방법들이 고혈압, 염증, 불안, 스트레스를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활동은 코르티솔 수준도 정상화시킨다. 또한 해마의 신경생성을 강화함으로써 만성스트레스를 퇴치하고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가령, 8주 동안 하루 30분씩 매일 명상을한 사람의 해마는 명상을 하기 전보다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 명상을 하지 않은 동일 연령대의 사람들은 해마의 크기에 변화가 없었다. 규칙적으로 운동한 사람들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 P222

잠이야말로 진정한 슈퍼히어로인 셈이다!
잠은 여러모로 기억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선 집중하려면 잠을 자야 한다. 밤에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전두피질이 맥을 못 추고, 그러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이제 우리는 기억성의 첫 단계가 기억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임을 알고 있다. 뭔가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대상을 인지하고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잠은 전두피질의 신경세포가 깨어서 활기차게 임무를 수행할준비를 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기억을 부호화하는 데 필요한 집중력을 높인다.
하지만 집중력을 높이는 것은 잠이 기억에 미치는 강력한 효과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잠은 새롭게 부호화된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저장 버튼을 누르는 역할도 한다. 잠이 기억을 저장하는 과정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선 깨어 있는 동안 뭔가를 ㄴ경험, 학습, 심지어 반복할 때 뇌에서 활성화되었던 고유한 신경패턴이 자는 동안 다시 활성화된다. 이런 재활성화는 신경세포간의 연결을 더욱 용이하게 하고, 연결 패턴을 하나의 기억으로단단히 접합한다. 사실 수면 중에 기억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재활성화가 일어났는지는 잠에서 깨어난 후 회상할 수있는 기억의 양과 직결된다. - P226

아직도 충분한 잠이 기억에 꼭 필요한 슈퍼히어로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얘기다. 수면이 알츠하이머병의 위험을 낮추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증거가속속 나오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대다수의 신경과학자들은아밀로이드 퇴적물이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이라고 믿는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뇌의 청소부라고 불리는 신경교세포가 아밀로이드의 청소와 대사를 맡는다. 신경교세포는 뇌의 폐수 처리와 위생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깨어서 바쁘게 활동하는 동안 시냅스에 대사 잔해들이 쌓이는데, 깊은 잠을 자는 동안 신경교세포가 이 잔해들을 청소한다. 숙면은 뇌의 대청소 시간인 셈이다. 특히 우리가 밤에 깊은 잠을 자는 동안 신경교세포는 가장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바로 아밀로이드의 처리다. - P230

하룻밤만 잠을 못 자도 뇌척수액에 아밀로이드와 타우rau (또 다른 알츠하이머병 예측지표)가 증가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잠이 부족할 경우 아밀로이드가 매일 밤 점점 쌓여서 한계치에 가까워지게 되고,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을 날도 점점 가까워진다.
아밀로이드가 쌓이면 숙면을 방해하고 그 결과 더 많은 아밀로이드가 쌓이게 되므로 퇴적물 형성을 가속화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게 된다. 이 모든 정보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수면부족은 알츠하이머병을 진행시키는 매우 중요한 위험 인자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 - P231

경험상 심장에 좋으면 뇌에도 좋고, 알츠하이머병 예방에도좋다. 그러므로 이미 심장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뇌건강도나쁘지 않을 것이다. 고혈압, 비만, 당뇨, 흡연, 높은 콜레스테롤수치 등은 모두 알츠하이머병 발병 위험을 높인다. 몇몇 사후 부검 결과에 따르면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80퍼센트가 심혈관계 질환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고밀도 지방단백질DL(일명 좋은 콜레스테롤)이 높은 사람들은 HDL이 낮은 사람들에 비해 알츠하이머 발병 위험이 60% 낮았다. - P238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배움으로써 어떻게 알츠하이머병의 위힘을 줄일 수 있을까? 75세 이상의 수녀 678명을 대상으로 20년간 진행된 연구에서 답을 찾아보자. 연구에 참여한 수녀들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과 인지검사를 받았고, 사망 시에 되는 연구를 위해 기증되었다. 연구자들은 일부 뇌에서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퇴적물이 쌓이고 엉키는 등 뇌의 상태로는 알츠하이머병이확실한데도 생전에 알츠하이머병의 행동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이 수녀들이 치매 증상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인지적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온전히 기능할 수 있는 시냅스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규교육을 오래 받고, 지식 정도가 높고, 정기적으로 사회적·정신적 자극을 받는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인지적 비축분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신경연결이 풍부하고 따라서 여분을많이 가지고 있다. 즉 알츠하이머병으로 일부 시냅스가 손상되더라도 예비 혹은 대안이 많기 때문에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을 위험이 적다.
그러므로 알츠하이머병이 이미 진행된 상태라도 아직 손상되지 않은 신경경로로 우회함으로써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 P2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