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은 스페인 역사와 이주 역사 모두에서 중요한 해다. 콜럼버스와 니나, 핀타, 산타 마리아 등 세척의 배가 그해 8월 세비야바로 서쪽에 있는 팔로스에서 출항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 전에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 여파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1492년 1월, 서유럽의 마지막 무슬림 거점인 그라나다 토후국은무슬림이 처음 스페인에 도착한 지 780년 만에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의 군대에 항복했다. 메디나에서 온 고대 이주민의 후손으로서방 기독교 세계에서는 최후의 무어인으로 기억되는 에미르 무함마드12세는 모로코로 망명했고, 수천 명의 무슬림이 그라나다에서 도망치거나 기독교로 개종했다. 한때 스페인에서 제노바 사람들과 비슷한 특권을 가졌던 유대인들의 추방은 훨씬 더 극적이었다. 1492년 5월, 수십 년간의 박해끝에 그들은 결국 개종하거나 스페인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때 약 15만 명의 유대인들이 도피한 것으로 보이며, 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개종을 하고 남았지만 여전히 박해를 당했다고 한다. 떠난 사람들은 개인 소지품만 가지고 갈 수 있었고,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흩어졌다. 기독교 국가로 간 유대인들은 특히 더 고생이 심했다. 이웃 포르투갈로 간 유대인들은 강제로 개종당하거나 노예가 되는 등 갖은 고생을 했다. 포르투갈에 있던 유대인 난민의 자녀들은 기독교로 집단개종했고, 그중 수백 명은 무인도였던 아프리카의 상투메 섬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북아프리카와 오스만 제국으로 간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 무슬림이 다수이던 국가에서 번성했던 세파르디 유대인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었다. 20세기 후반, 그들 대부분은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났고, 그중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로 갔다. - P198
콜럼버스의 처음 목적은 무역과 탐사, 외국 통치자들과의 만남이었으나 곧 정착과 착취로 변질되었고, 그가 유럽으로 보내는 주요상품은 금, 면화, 유향수지와 노예였다. 그는 히스파니올라로 가던 길에 발견한 남쪽의 더 작은 섬들에서 식인 행위의 증거를 발견했고, 그 이야기는 곧 유럽으로 전해졌다. 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온 의사가 ‘섬 중 최고‘라고 한 푸에르토리코에 상륙했는데 그곳 현지인들은 유럽인을 보자 도망쳤다. 그리고 히스파니올라에 다시 돌아온 콜럼버스는 나비다드 정착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섬에 남아 있던 선원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신대륙은 더이상 없었다. - P208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유럽인 한 명당 인디언 백명을 처형한다‘는 비공식적 합의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라스 카사스의 주장에 따르면 1492년 300만 명이던 히스파니올라의 ‘인디언‘ 인구는 반세기 후 300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의 주장을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다. 히스파니올라가 그때나 지금이나 카리브 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섬이기는 하지만 원주민의인구는 과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가 그 섬에 상륙한 이후 수십 년 동안에 살인과 기근, 질병 등이합쳐져 히스파니올라 타이노족이 거의 멸종당하다시피 사라지고, 언어와 문화 또한 대부분 말살된 것은 확실하다. 인구가 너무 극적으로감소하자 식민지 개척자들은 다른 섬에서 노동 인력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바하마 제도에서 많이 데려왔는데, 라스 카사스에 의하면 ‘강제 이주로 인해 그곳의 원주민 인구가 전멸했다"고 한다. 그들대부분은 히스파니올라에 와서 죽었고, 새로운 대규모 강제 이주민집단이 배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노예들이었고,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까지 타이노족이 주로 살고 있던 쿠바, 자메이카, 푸에르토리코도 모두 히스파니올라와 비슷한 방식으로 파괴되었다. 1519년부터는 중앙 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 인구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스페인 이주민들이 들여온 천연두가 아마도 가장 큰 사망원인이었을 것이다. 멕시코의 아즈텍 문명은 소수의 유럽인과 몇몇 현지 협력자들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했지만 극적인 인구 붕괴의 원인은 질병이었다. 그리고 10년 후 스페인이 우월한 군사 기술과 치명적인 질병을 가지고 도착하면서 페루의 잉카 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었고 완전히 통제하게되었다. - P211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잔혹했다. 16세기초 아메리카에 있던 스페인 이주민들은 ‘비호감 이주민 명단‘에서 꽤 상위권에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은 일종의 정복자의 이주 방식과 행동의 틀을 규격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각 나라별로 편차는 있지만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 벨기에, 또 훨씬 더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덴마크도 같은 행위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유럽 식민주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는 여러 면에서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때까지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원시인이나 야만인이라고 부를만한, 다른 대륙이나 아주 먼 지역의 원주민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인들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자기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아랍인이나 몽골인을 상대해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카리브해에서 만난 원주민들은 달랐다. 그곳에서 유럽인들은 바퀴도 없고 철도 없고 가축도 없는, 하나님이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 그리고 토지 소유권과 의복에 대한 생각이 매우 다른, 아주 낯선 방식으로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콜럼버스와 일행들은 미지의 대륙으로 모험을 떠나면서 개의 머리가 달린 인간, 외눈이 이마 중앙에 박혀 있는 괴물, 아니면 온통 여자만 사는 섬 등 허무맹랑한 여행기에서 언급될 만한 괴물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런괴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사람이라고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지만 자신들과는 좀 다르게 보이는 원주민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원주민들을 괴물이나 다른 동물종인 것처럼 취급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스페인 사람들의잔혹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라스 카사스와 같은 사람들의 글을 살펴보면 당시 또 다른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원주민을 ‘고귀한 야만인‘으로 낭만화하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P214
그러나 현대적 맥락에서 더 중요한 것은 타이노 운동을 현대 정체성 정치의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선택권은 더이상 과학자나 학자, 정부에게 있지 않으며, 당사자인 개인과 집단에게 주어지고 있다. 스스로를 누구라고 설명할지에 대한 권한을 자신이 갖게 된다는 것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자유롭게도 하지만, 자기편을 선택해야 하고 자신을 단순한 한 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개인이 자신을 타이노족, 아메리칸 인디언, 라티노, 흑인, 야간, 제노바인, 영국인 또는 유럽인이라고 밝히기를 원한다면, 때로 그 정체성이 정확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굳이 다른 것을 택하라고 설득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신 복수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고, 누군가의정체성이 상황이나 대화 상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어떨까? 단 하나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은 때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우리의 깊은역사, 공동 혈통, 이주민으로서의 역사(고대와 현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같은 인간으로 공유한 유산과 정체성에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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