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과거는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나, 육중한 발걸음 소리나, 소리 지르는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나는 이것이 ‘트라우마 Trauma‘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트라우마는 어떤 일이 잘못됐다거나 어떤 끔찍한 일이 곧 발생할 것이라고 직감으로 거의 항상 느끼는 것이다. 또한 신체의 자동적 공포반응이 내게 도망치고 피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 트라우마는 여전히 일상적인 만남으로 인해 촉발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풍경, 특정한 냄새는 나를 과거로 송환시킬 수 있다. 제이슨 풀러 대위를 만났을 때는 내가 홀로코스트의 강제수용소에서 해방된 지 30년 이상 흐른 뒤였다. 현재는 7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절대로 잊히거나 바뀔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가 과거에 어떻게 대응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비참할 수도, 희망찰 수도 있다. 나는 우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이 선택권을 가지고있다. 통제를 위한 기회 말이다. ‘나는 여기에 있어. 바로 지금.‘ 나는공황 상태에 빠진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까지 나 자신에게 반복해서 이렇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 - P21

나는 그저 완전히 미국적인 멋쟁이가 되고 싶었다. 강한 헝가리 억양을 사용하지 않고 영어를 구사하고 싶었다. 과거로부터 숨고 싶었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열망 속에서, 과거에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나는 내 고통을 계속 감추기 위해 매우 열심히노력했다. 나는 나의 침묵과 나의 인정욕구(둘 다 두려움에 기반하고있다)가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과거 그리고 나 자신과 똑바로 대면하지 않기로 선택함으로써, 실제 감옥생활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기로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비밀을 가졌고 비밀은나를 가졌다.
상담실 소파에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던 미 육군 대위는 내가 마침내 알게 된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가 우리의 진실과 이야기를 억지로 숨길 때, 비밀들은 그것 자체로 트라우마가 되고 그것자체로 감옥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수용하기 거부하는 것들은 고통을 줄여주기는커녕 감옥의 벽돌 담장과 쇠창살처럼 우리를 감옥에 가두고 절대 탈출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자신에게 자신의 상실, 상처, 실망을 애도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것들을 계속 다시 체험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자유는 이미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놓여 있다. 자유는 우리가 용기를 모아 감옥을 해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벽돌 하나씩 하나씩 말이다. - P22

스스로 자유를 향한 탐색을 하고 오랜 기간 전문 임상심리학자로경험을 쌓은 결과 나는 고통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희생자 의식은 선택적이다. 희생되는 것Victimization과 희생자 의식Victimhood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우리는 모두 삶의 과정에서 어떤식으로든 희생될 수 있다. 어떤 시점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고통이나 재앙, 학대를 겪을 것이다. 우리가 통제권을 거의 혹은 전혀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나 사람이나 제도에 의해 말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이것은 ‘희생되는 것‘의 예이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발생한다. 이웃의 괴롭힘, 분노하는 상사, 폭력을 행사하는 배우자, 바람을 피우는 연인 차별적인 법률, 뜻밖의 사고 등이 이런 경우이다.
이에 반해, 희생자 의식은 내면으로부터 발생한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우리를 희생자로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진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희생된 사실에 집착하기로 선택할 때 희생자가 된다. 우리는 희생자의 사고방식을 키운다. 완고하고, 남을 탓하고, 비관적이고, 과거에 갇혀 있고, 용서하지 않으려 하고, 가혹하고, 건강한 한계나 경계가 없는 사고방식과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희생자의 사고방식에 갇히기로 선택할 때 자기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스스로 간수가 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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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기 백인으로 이루어진 영국인 이민자들에게는 중요한 기술도 응집력도 공동의 목적도 없었다. 여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정도 일구지 못해 뉴잉글랜드의 상황과는 대조적이었다. 제임스타운은 식량도 부족했고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지휘 체계 또한 엉망이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정착민들이 서로 다투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부 젊은 이주민들은 제임스타운에서 달아나 인근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을 찾아갔다. 이는 버지니아 이주초기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는데, 뉴잉글랜드 정착민 사이에서는 없었던 일이었다. 이탈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원주민 부족의 환영을 받았으며, 특히 무기를가지고 가는 이들을 반겼다고 한다. 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새 유럽인 식구들이 부족에 통합되기만 하면 인종에 대해서는 거의 상관하지 않았던 듯하다.
반면에 아메리카 원주민이 점점 커지고 있는 영국인 정착지에자의로 합류하는 일은 드물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을 통해 그때의 상황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인디언 아이가 우리들 사이에서 자라며 우리의 언어를 배우고 우리의관습에 길들여진다 해도, 그가 친척들을 만나러 가서 그들과 함께 인디언식 산책을 한 번이라도 하고 나면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인은 남녀 불문하고 어린 나이에 인디언들에게 포로로 잡혀 한동안 그들과 함께 살고 나면, 친구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영국인들사이에 머물도록 만들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애정을 베풀어도그들은 어느새 우리의 삶의 방식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걱정과 수고에 혐오감을 느끼고,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바로 숲속으로 탈출하며,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제임스타운에는 ‘숲속으로‘ 탈출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영국 이주민들의 사례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예는 하나뿐이다. 바로 포타혼타스다. - P242

1924년에 버지니아에서는 타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다시 도입되었다. 그 법에 따르면 백인이 아닌 조상이 있는 사람은 백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는 버지니아 명문가들을 장악하고 있던 수천 명의 포카혼타스 후손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인디언혈통이 1/16 이하인 사람들은 법적으로 백인으로 간주되는 이른바 포카혼타스 조항이 이 법에 추가되었다. - P246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시간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문제도 이 논쟁에 끼어든다. 우리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조사하려고 하는 순간, 현재는 어느 틈에 지나가버리고 우리가 온전히 체협하기도 전에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노예제도나 제국주의 같은 역사적 불의에 대해 거론할 때 과거에 선을 긋는다거나, 모든 것을 백지로 돌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마치현재가 과거와 깨끗이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것이 현실적이라거나 또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는 우리의 살아 있는 일부이며, 학교나 박물관에서 배울 수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역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근원이기때문에 묻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주, 노예제도, 인종차별, 불의 또는 민족주의에 관한 모든 토론에도 우리의 역사는 등장한다. 나는 과거의 역사에 의문을 표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찾고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시작으로 그 역사들이 일부 누락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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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는 비밀을 가졌고, 비밀은 나를 가졌다

나는 장전된 권총이 그의 셔츠 아래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 여름, 육군 대위 제이슨 풀러가 나의 엘파소 상담실에 걸어 들어오는 순간, 나는 갑자기 내장이 조여들고 목 뒤가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전쟁은 내게 위험을 감지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심지어 왜 내가 두려워하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전에도 말이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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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우리나라 형법학 교과서에는 보안처분제도에 관하여 "자유사회의 이념에 반하는 것으로서 인정될 수 없다"라는 지극히 간략한 설명만이 수록되어 있었다.
1972년에 제정된 유신헌법이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보안처분을 당하지 아니한다"라는 조문을 둠으로써 이 보안처분은 처음으로 우리헌법체계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 이후 위 헌법규정에 근거하여 최초로 제정된 보안처분법이 정신장해자가아닌 반국가사범 전과자를 처분대상으로 하는 사회안전법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사회안전법의 적용대상자는 내란죄,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 반국가사범 전과자들이다.
이들에 대하여 취해질 수 있는 보안처분은 보호관찰, 주거제한, 보안감호처분 등의 세 종류이고, 이 중 감호처분이란 보안감호소에 2년간 구금하는 조치를 말하는 것인데, 매 2년마다 갱신되어서 무한정 계속될 수도 있게 되어 있다.
보안처분의 결정기관은 법원이 아니라 법무부장관으로 되어 있으며, 그 산하에 이를 심의·의결하기 위한 보안처분심의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으나 그 위원들은 모두 법무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보안감호처분의 요건에 관한 규정은 지극히 간단하다. 즉 보안처분대상자 중 "죄를 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이 있거나 일정한 주거가 없는 자" 또는 보호관찰처분이나 주거제한처분에 위반한 자가 이 처분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죄를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법무부장관의 권한에 사실상 일임되고 있다.
프랑스 인권선언에 의하면 "권력의 분립과 인권의 보장에 대한 규정을 두고,있지 않은 나라는 헌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근대헌법이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모두 국가권력, 특히 행정권력의 횡포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려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제퍼슨이 강조하였듯이 민주주의는 권력에대한 불신과 질서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견지에서 말한다면, 법무부장관의 결정 여하에 따라서는 언제라도 영장 없이 구속되어 무한정 보안감호소에 구금되는 신세가 될 수 있게끔 된 보안처분대상자들은 기본권에 관한일체의 보장을 박탈당한 완벽한 무권리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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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은 스페인 역사와 이주 역사 모두에서 중요한 해다. 콜럼버스와 니나, 핀타, 산타 마리아 등 세척의 배가 그해 8월 세비야바로 서쪽에 있는 팔로스에서 출항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 전에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 여파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1492년 1월, 서유럽의 마지막 무슬림 거점인 그라나다 토후국은무슬림이 처음 스페인에 도착한 지 780년 만에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의 군대에 항복했다. 메디나에서 온 고대 이주민의 후손으로서방 기독교 세계에서는 최후의 무어인으로 기억되는 에미르 무함마드12세는 모로코로 망명했고, 수천 명의 무슬림이 그라나다에서 도망치거나 기독교로 개종했다.
한때 스페인에서 제노바 사람들과 비슷한 특권을 가졌던 유대인들의 추방은 훨씬 더 극적이었다. 1492년 5월, 수십 년간의 박해끝에 그들은 결국 개종하거나 스페인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때 약 15만 명의 유대인들이 도피한 것으로 보이며, 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개종을 하고 남았지만 여전히 박해를 당했다고 한다. 떠난 사람들은 개인 소지품만 가지고 갈 수 있었고,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흩어졌다.
기독교 국가로 간 유대인들은 특히 더 고생이 심했다. 이웃 포르투갈로 간 유대인들은 강제로 개종당하거나 노예가 되는 등 갖은 고생을 했다. 포르투갈에 있던 유대인 난민의 자녀들은 기독교로 집단개종했고, 그중 수백 명은 무인도였던 아프리카의 상투메 섬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북아프리카와 오스만 제국으로 간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 무슬림이 다수이던 국가에서 번성했던 세파르디 유대인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었다. 20세기 후반, 그들 대부분은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났고, 그중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로 갔다. - P198

콜럼버스의 처음 목적은 무역과 탐사, 외국 통치자들과의 만남이었으나 곧 정착과 착취로 변질되었고, 그가 유럽으로 보내는 주요상품은 금, 면화, 유향수지와 노예였다. 그는 히스파니올라로 가던 길에 발견한 남쪽의 더 작은 섬들에서 식인 행위의 증거를 발견했고, 그 이야기는 곧 유럽으로 전해졌다. 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온 의사가 ‘섬 중 최고‘라고 한 푸에르토리코에 상륙했는데 그곳 현지인들은 유럽인을 보자 도망쳤다. 그리고 히스파니올라에 다시 돌아온 콜럼버스는 나비다드 정착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섬에 남아 있던 선원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신대륙은 더이상 없었다. - P208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유럽인 한 명당 인디언 백명을 처형한다‘는 비공식적 합의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라스 카사스의 주장에 따르면 1492년 300만 명이던 히스파니올라의 ‘인디언‘
인구는 반세기 후 300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의 주장을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다. 히스파니올라가 그때나 지금이나 카리브 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섬이기는 하지만 원주민의인구는 과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가 그 섬에 상륙한 이후 수십 년 동안에 살인과 기근, 질병 등이합쳐져 히스파니올라 타이노족이 거의 멸종당하다시피 사라지고, 언어와 문화 또한 대부분 말살된 것은 확실하다. 인구가 너무 극적으로감소하자 식민지 개척자들은 다른 섬에서 노동 인력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바하마 제도에서 많이 데려왔는데, 라스 카사스에 의하면 ‘강제 이주로 인해 그곳의 원주민 인구가 전멸했다"고 한다. 그들대부분은 히스파니올라에 와서 죽었고, 새로운 대규모 강제 이주민집단이 배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노예들이었고,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까지 타이노족이 주로 살고 있던 쿠바, 자메이카, 푸에르토리코도 모두 히스파니올라와 비슷한 방식으로 파괴되었다. 1519년부터는 중앙 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 인구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스페인 이주민들이 들여온 천연두가 아마도 가장 큰 사망원인이었을 것이다. 멕시코의 아즈텍 문명은 소수의 유럽인과 몇몇 현지 협력자들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했지만 극적인 인구 붕괴의 원인은 질병이었다. 그리고 10년 후 스페인이 우월한 군사 기술과 치명적인 질병을 가지고 도착하면서 페루의 잉카 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었고 완전히 통제하게되었다. - P211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잔혹했다. 16세기초 아메리카에 있던 스페인 이주민들은 ‘비호감 이주민 명단‘에서 꽤 상위권에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은 일종의 정복자의 이주 방식과 행동의 틀을 규격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각 나라별로 편차는 있지만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 벨기에, 또 훨씬 더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덴마크도 같은 행위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유럽 식민주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는 여러 면에서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때까지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원시인이나 야만인이라고 부를만한, 다른 대륙이나 아주 먼 지역의 원주민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인들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자기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아랍인이나 몽골인을 상대해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카리브해에서 만난 원주민들은 달랐다. 그곳에서 유럽인들은 바퀴도 없고 철도 없고 가축도 없는, 하나님이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 그리고 토지 소유권과 의복에 대한 생각이 매우 다른, 아주 낯선 방식으로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콜럼버스와 일행들은 미지의 대륙으로 모험을 떠나면서 개의 머리가 달린 인간, 외눈이 이마 중앙에 박혀 있는 괴물, 아니면 온통 여자만 사는 섬 등 허무맹랑한 여행기에서 언급될 만한 괴물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런괴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사람이라고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지만 자신들과는 좀 다르게 보이는 원주민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원주민들을 괴물이나 다른 동물종인 것처럼 취급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스페인 사람들의잔혹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라스 카사스와 같은 사람들의 글을 살펴보면 당시 또 다른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원주민을 ‘고귀한 야만인‘으로 낭만화하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P214

그러나 현대적 맥락에서 더 중요한 것은 타이노 운동을 현대 정체성 정치의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선택권은 더이상 과학자나 학자, 정부에게 있지 않으며, 당사자인 개인과 집단에게 주어지고 있다. 스스로를 누구라고 설명할지에 대한 권한을 자신이 갖게 된다는 것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자유롭게도 하지만, 자기편을 선택해야 하고 자신을 단순한 한 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개인이 자신을 타이노족, 아메리칸 인디언, 라티노, 흑인, 야간, 제노바인, 영국인 또는 유럽인이라고 밝히기를 원한다면, 때로 그 정체성이 정확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굳이 다른 것을 택하라고 설득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신 복수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고, 누군가의정체성이 상황이나 대화 상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어떨까? 단 하나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은 때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우리의 깊은역사, 공동 혈통, 이주민으로서의 역사(고대와 현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같은 인간으로 공유한 유산과 정체성에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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