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러한 순간-강제수용 생활의 끝, 전쟁의 끝을 상상할 때 나는 환희가 가슴에서 넘쳐나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목청껏 외치리라고 상상했다. "나는 자유다! 나는 자유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목소리가 없다. 우리는 침묵의 강물이다. 군슈키르헨의 묘지로부터 근처의 마을을 향해 흐르는 해방자들의 물결이다. 나는 임시로 만든 수레에 타고 있다. 바퀴가 끼익 소리를 내며 삐거덕거린다. 의식이 왔다갔다 한다. 이 자유에는 어떠한 환희도 안도도 없다. 우리는 숲에서 느리게 걸어 나온다. 멍한 얼굴을 하고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든다. 자유는 잘못된 종류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게 하는 위험이다. 자유는 상처, 이, 발진티푸스, 잘린 배, 힘없는 눈이다. - P136

 우리 대부분은 신체적으로 너무 피폐해진 나머지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우리는 수레 위에 누워 있거나 지팡이에 기대어 걷는다. 우리의 죄수복은 더럽고 해졌다. 낡을 대로 낡고 누더기가 다 되어서 우리의 피부를 거의 보호하지못한다. 우리의 피부 또한 우리의 뼈를 거의 보호하지 못한다. 우리 몸자체가 해부학 수업이다. 팔꿈치, 무릎, 발목, 광대뼈, 손가락 관절, 늑골들이 시험에 나오는 문제들처럼 돌출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일까? 우리의 뼈는 역겨워 보이고 우리의 눈은 텅 비고 어둡고 공허한 동굴이다. 움푹 꺼진 얼굴들. 암청색의 손톱들. 우리는 움직이는 트라우마다. 우리는 느리게 움직이는, 악귀들의 행진이다. 우리는 비틀거리면서 걷고 우리가 탄 수레는 자갈길 위를 덜커덕거리며 굴러간다. 우리는 줄에 줄을 지어 오스트리아 웰스의 광장을 가득 메운다. 마을 사람들이 창밖으로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우리는 두려움의 존재다. 아무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침묵으로 광장을 질식시킨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뛰어들어간다. 아이들이 두눈을 가린다. 우리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끝에 다른 누군가의 악몽이된다. - P137

생존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살아남기 위해 투쟁할 때는 ‘하지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제 ‘하지만‘이 우르르 몰려온다. 우리에겐 먹을 빵이 있다. ‘그래, 하지만 무일푼이지.‘ 살이 붙고 있어 다행이다. ‘그래, 하지만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 너는 살아남았어. ‘그래, 하지만 우리 엄마는 죽었지.‘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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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이상 지역감정의 문제를 있어도 없는 것처럼 덮어두기만 할 때는 지난 것 같다. 이 문제를 엄연한 현실문제로서 정면으로 다루어 올바르고도 근본적인 해결방향을 모색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흔히들 지역감정을 그저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 무조건 ‘해소‘되어야 하고 또 해소되기만 하면 그만인 것처럼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는 그런 관점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의심한다. 호남사람들의 지역감정과 영남사람들의 지역감정을 똑같은 차원에 놓고 평면적. 무차별적으로 다루는 것은 문제가 있다.
광주사건 직후 김영삼씨의 마산유세장에 예상을 넘는 엄청난 군중이 운집하였던 사태에서도 드러나듯이 영남사람들의 지역감정은 다분히 호남의 지역감정에 대한 역감정으로서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호남사람들의 지역감정은 멀리 거슬러올라가자면 삼국시대 이래 천수백년, 그리고 가까이만 보더라도 박정희정권 이래 4반세기에 걸쳐 심화되어온 지역적 억압과 차별의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시정되지 않는 한 결코 ‘해소‘될 수가 없는성질의 것이다.
거기에다가 다른 무엇보다도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겪은 엄청난 비극적 참화의 역사가 있다. 그 가슴속에 맺히고 쌓인 한과 분노가 어떠리라는 것은누구나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고려한다면 호남사람들에게 ‘지역감정‘을 갖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 애시당초 무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덮어만 두겠는가. 이러한 ‘지역감정‘은 마땅히 있어야만 하고 지역적 억압과 차별의 부당한 현실을 타파하는 추진력으로서 활용되어야만 한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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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주장에는 드러나지 않은 가정이 있다. 사실 그 가정은 여러 개인데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중에서도 특정한 한 가지이다. 그것은 생명(즉 복제자와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일단 탄생하면 진화를계속하여 마침내는 그 자신의 기원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갖춘 생물이 될 때까지 발전해 간다는 가정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행운의 정도는 그에 걸맞게 축소되어야 한다. 좀 더 정확히말하자면 앞에서 주장한 이론이 허용하는 어떤 행성에서 생명이 탄생할확률의 최댓값은 우주에 있는 생명 탄생에 적합한 행성의 수를, 일단 탄생한 생물이 자신의 기원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갖춘 생물로 진화할 확률로 나눈 값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기원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이 적절한 변수라는 말이 약간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것이 적절한 변수인지를 이해하려면 그와 반대되는 가정을 해 보면 된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사건이 꽤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만, 그것에 따른 지능의 진화는 거의 불가능하고 엄청난 행운이 필요한 사건이라고 가정해 보자. 생명은 여러 행성에서 탄생했지만, 지능의 진화라는 사건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건이어서 우주에 있는 행성 가운데 단 한 군데서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인간이 그 의문점에 관해 토론할 정도의상당한 지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지구가 바로 그 행성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이번에는 생명의 탄생과 생명 탄생 후 지능의 탄생이라는 두 사건이 모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건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지구와 같은 어떤 한 행성이 그 두 가지 행운을 모두 누릴 확률은 매우 낮은 2개의 확률을 곱한 것과 같다. 그러면 가능성은 훨씬 더 적어진다. - P242

그것은 마치 우리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지금의이론에서 얼마간의 행운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이 얼마간의 행운의 최댓값은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 탄생에 적합한 행성의 숫자와 같다. 우리에게 할당된 행운이 주어지면 그것을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제한된 용품으로 ‘소비‘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행성에서 생명이 처음 탄생한 과정을 설명하는 데 우리에게 할당된 행운의 거의 대부분을 써버린다면 그 이론의 나머지 과정, 즉 뇌와 지능의 누적적인 진화를 설명하는 데 쓸 수 있는 행운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생명의 탄생 부분에서 행운의 대부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후의 진화 과정에 사용할 행운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지능의 탄생에 할당된 행운의 대부분을 사용하기를 바란다면, 생명의 탄생 부분에서 행운을 많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생명의 탄생을 거의 불가피한사건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할당된 행운의 전부가 우리 이론의 두 단계 모두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사실상 우주의 도처에서 생명이 존재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 P243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일단 시작되기만 하면, 지능의 진화를불가피한 것 정도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만들 위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할당된 행운 전체를 행성에서의 생명 탄생 과정에 쏟아 부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생명 탄생의 과정에 최대 10분의 1의 확률을 써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의 이론에서 생각할 수 있는 행운의 최댓값이다. 가령 생명이 DNA와 단백질을 기초로 한 복제 기구가 한꺼번에 우연히 자연 발생했을 때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한다고 가정하자. 이 우연의 일치가 한 행성에서 동시 발생할 확률이 10분의 1보다도 작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러한 터무니없는 이론의 사치를 허용할 수 있다.
이 허용선은 매우 커서 아마도 DNA나 RNA의 자연 발생을 수용하기에도 넉넉할 것이다. 그러나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없이는 전혀 충분하지 않다. 단 한 번의 사건(1단계 자연선택)으로 칼새처럼 잘 날고, 돌고래처럼 헤엄을 잘 치고, 독수리처럼 먼 곳을 잘 보는 훌륭한 신체를 만들어 낼 확률은 우주에 있는 행성의 수는 고사하고 원자의 수보다도 더 큰 어마어마한 수의 역수이다! 생명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 P244

 기본문제(누적적인 자연선택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나 하는 문제)가 어떻게해결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예를 살펴보는 것으로 가장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럼 어떤 이론을 본보기로 들 것인가?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유기물로 이루어진 ‘원시 수프‘를 기초로 한 일련의 이론(오파린의 가설과 밀러의 실험 등을 말함 옮긴이)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생명이 탄생하기전 지구의 대기 상태는 아마 현재 생명이 없는 다른 행성의 대기와 비슷했을 것이다. 원시 대기에는 산소가 없었고 수소와 물과 이산화탄소가풍부했으며 암모니아NH3, 메탄CH4 그리고 그 밖의 몇 가지 간단한 유기 분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화학자들은 이처럼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는 유기 화합물이 자연적으로 합성되기 쉽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플라스크 안에서 원시 지구의 조건을 축소하여 재현했다. 그런 다음 번개를 대신하는 방전 불꽃을 일으켰고, 지금처럼 오존층이 태양 복사선으로부터지구를 보호하기 전에는 훨씬 강했을 자외선을 쬐었다. 실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정상적으로는 살아 있는 생물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몇 가지 유기 분자를 포함해서 여러 종류의 유기 분자들이 플라스크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다. DNA RNA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구성 단위인 퓨린 염기와 피리미딘 염기가 플라스크 안에 있었다. 단백질의 구성 단위인 아미노산도 있었다. 이 이론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것은 복제자의 기원이다. 구성 단위들이 서로 모여 RNA 같은 자기 복제사슬을 만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마 언젠가는 만들겠지만 말이다. - P246

 이 이론은 글래스고 대학교의 화학자 그레이엄 케언스스미스가 주장하는 ‘무기 광물질‘이론이다. 처음 제안된 것은 20년 전이었고 그 후 세 권의 책을 통해 개선되고 정교해졌다. 가장 최근의 것인 『생명의 기원에 관한 일곱 가지단서』에서는 생명 탄생의 수수께끼를 명탐정 셜록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케언스스미스는 DNA. 단백질 기구가 비교적 최근에 출현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대략 30억 년 전 정도 되는 비교적 최근에 그것들이 출현했다는 말이다. 그전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형태의 복제자가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룩한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있었다. 그러던 중DNA가 출현했고 그것이 훨씬 효율적인 복제자로 판명되자 원래의 복제 시스템은 DNA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잊혀져 갔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의 DNA 체계는 뒤늦게 출현했으며, 기본적인 복제자로서의 역할을 찬탈했고, 초기의 투박한 복제자가 했던 역할을 최근에 넘겨 받은것이다. DNA에게 기본적인 복제자의 역할을 빼앗기기는 했어도 최초의 복제자는 내가 항상 뇌까리는 1단계 자연선택‘을 통해서 생겨날 수있을 정도로 단순해야만 한다.
화학은 크게 유기화학과 무기화학으로 나뉜다. 유기화학이란 탄소라는 특정한 원소에 관한 화학이며 무기화학은 그 나머지를 말한다. 탄소는 매우 중요한 원소이고 화학에서 고유한 영역으로 분류될 만한 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생물에 관련된 화학이 탄소 화학이기 때문이고, 탄소 화학을 생물에 적합하게 만든 바로 그 성질이 플라스틱 공업과 같은산업에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탄소 화학을 생물과 공업에 적합하도록만든 탄소 원자의 가장 중요한 성질은, 거의 무한히 많은 종류의 거대분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질을 가진 원소로는 탄소말고도 규소가 있다. 오늘날 지구 생물의 화학이 탄소 화학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주 전체에 해당된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지구에서도 그 사실이 항상 변함이 없었다고 볼 수도 없다. 케언스스미스는 지구에 출현한 최초의 생물은 스스로를 복제하는 규산염 같은 무기 결정에 바탕을 둔 존재라고 믿는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기물 복제자, 즉 DNA는 나중에 그 역할을 넘겨 받았거나 찬탈한 것이 된다. - P247

케언스스미스는 최초의 복제자가 진흙이나 점토에서 발견되는 무기물의 결정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결정이란 원자나 분자가 고체의상태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것을 말한다. 원자나 작은 분자들은 그들의 ‘모양‘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성질에 따라서 어떤 고정된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차곡차곡 쌓인다. 마치 어떤 특정한방식으로 서로 끼워 맞춰지길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현상은 그들이 지닌 성질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일 뿐이다. 원자나 작은 분자들이 서로 끼워 맞춰질 때 어떤 방식을 ‘선호하는가‘에 따라 전체 결정의 모양이 달라진다. 이 말은 또한 다이아몬드와 같은 커다란 결정에서조차도 흠이 있는 곳을 제외한다면 어떤 한 부분의 형태가여타의 부분과 정확하게 같음을 뜻한다. 만약 우리가 원자의 크기로 줄어들 수 있다면 우리는 수평선을 향해 곧게 뻗은 끝없이 이어진 원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복제이기 때문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결정이 자체의 구조를 복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결정은 원자(또는 그에 상응하는 것)의 층들이 겹겹이 쌓인 것이고 각각의 층은 바로 아래의 층위에 만들어진다. 원자들은 용액 속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지만(원자와 이온의 차이는 지금으로서는 큰 문제가 안 된다.) 우연히 결정을 만나면 결정의 표면에 있는 적당한 위치에 끼어 들어가는 자연스런 경향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소금물에는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다. 소금 결정은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이 전후 좌우 상하 교대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물속에 떠다니던 이온이 결정의 딱딱한 표면에 부딪히게 되면 거기에 달라붙어서 새로운 층을 형성하는데, 그 층은 바로 아래층과 동일하다. 그래서 일단 결정이 자라기 시작하면 각층은 그 밑의 층과 똑같이 만들어진다. - P249

진흙과 점토와 바위는 작은 결정들로 만들어져 있다. 그것들은 지구어디에나 풍부하며 아마 줄곧 그래 왔을 것이다. 점토와 암석의 표면을 주사 전자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놀랍고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마치 꽃송이들이 줄지어 있는 것처럼 자라난 결정, 선인장처럼 자란 결정들. 장미꽃 가득한 정원처럼 보이는 부분, 다육질 식물의 단면처럼 생긴 작은 나선들, 쭉쭉 뻗은 파이프 오르간 모양, 벌레의 똥이나 치약을짜놓은 것 같은 구불구불하고 비틀린 모양의 결정, 투명 플라스틱으로만든 모형처럼 생긴 각진 결정 등 온갖 모양의 결정들을 볼 수 있다. 좀더 확대해 보면 결정들이 가진 질서정연한 형태에 더욱 놀라게 된다. 원자들의 위치가 드러날 정도로 확대해 보면 결정의 표면은 마치 기계로짠 옷감과 같은 규칙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약간의 흠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핵심적인 요소이다. 잘 짜여진 옷감의 한가운데 짜깁기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부분과 똑같지만 단지 옷감이 짜여진 방향이 다르다. 아니면 방향은 같은데 약간 밀려나서 다른 부분과 줄이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결정들은 거의 대부분 흠이 있다. 그리고 일단 흠이 생기면 그 위에 새로 생기는 층에도 그형태가 그대로 복사된다. - P253

흠은 결정 표면 어디에나 생길 수 있다.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다면 결정의 표면에 여러 가지 형태로 생길 수 있는 수많은 흠들을 상상하면 된다. 신약 성경을 세균 1개가 가진 DNA 속에저장한다고 할 때 써 먹은 방식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결정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DNA가 결정보다 우수한 점은 저장된 정보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읽어 내는 문제는 일단 접어 두자. 결정 속의 원자배열 형태에 생긴 흠이 2진수를 나타내는 암호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편의 머리 크기만 한 결정 속에 신약 성경 여러 권에 해당하는 정보를담을 수 있다. 거시적인 수준에서 보면 이런 방식은 레이저 디스크(콤팩트 디스크) 표면에 음향 정보를 담는 것과 똑같다. 음향 또는 음악은 컴퓨터를 통해 2진수로 바뀐다. 레이저는 유리같이 매끈한 디스크의 표면에 작은 흠들을 낸다. 레이저로 만든 각각의 흠들은 2진법의 1(또는 01다. 이것은 정하기 나름이다.)을 나타낸다. 디스크를 걸어 음악을 재생할때에는 다른 레이저 빔이 그 흠들의 패턴을 ‘읽는다.‘ 그러면 CD 플레이어 속에 장치된 특별한 목적을 가진 컴퓨터를 통해 그 2진수가 음의진동으로 변환되고 다시 엠프를 통해 증폭되어 들을 수 있게 된다.
지금은 레이저 디스크가 주로 음악을 저장하는 데 사용되지만, 똑같은 기술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전체 내용을 저장하고 읽을 수 있다. 결정 속 원자 수준에서 생긴 홈은 레이저 디스크 표면에 만들어진흠보다 훨씬 작다. 따라서 결정은 같은 면적에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수있는 잠재력이 있다. 앞에서 DNA의 정보 저장 능력을 살펴보고 깊은인상을 받은 바 있는데 사실 DNA는 그 자체가 결정과 매우 흡사하다.
비록 점토의 결정들이 이론적으로는 DNA나 레이저 디스크만큼의 정보저장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실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이론에서 점토와 다른 광물 결정들이 하는 역할은 지구상에 최초로 출현한 ‘저급한 수준‘의 복제자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어느 순간에 ‘고급 수준‘의 DNA로 대체되었다. 결정들은 지구에 풍부하게 존재하는 물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 DNA가 복제될 때 복제 효소와 같은 정교한 ‘기구‘가 필요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시에 그 결정에는 흠이 생긴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결정이 자라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층에서 복제된다. 결정이 자란 후에 몇 개의 조각으로 부러지면 그것들은 새로운 씨를 뿌리는 셈이다. 그리고 각각의 조각들은 ‘부모‘ 결정이 갖고 있는 흠의 형태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 P254

그래서 우리는 이제 원시 지구에서 복제, 증식, 유전, 돌연변이를 보여 주는 광물 결정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 결정들이 보여주는 현상들은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들
"이다. 하지만 아직도 ‘위력‘이라는 요소가 부족하다. 이것은 복제자가자신의 복제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성질을 말한다. 복제자를 추상적으로 생각했을 때, 우리는 ‘위력‘이라는 것을 복제자가 가진 직접적인 성질, 즉 ‘점착성‘ 같은 본질적인 성질로 이해했다. 이 초보적인 수준에서는 위력‘이라는 용어가 합당하지 않은 것 같다. 단지 진화의 나중 단계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을 뿐이다. 가령 뱀의 독니의 위력은 뱀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독니에 대한 DNA 암호를 보존하는 것이다. 최초의 저급한 복제자가 광물 결정이었는지 아니면 DNA 자체의 직접적인 조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이 발휘한 ‘위력‘은 점착성 같은 초보적이고 직접적인 것이었으리라고 추측할수 있다. 뱀의 독니와 난초의 꽃 같은 고등한 수준의 위력은 훨씬 나중에 나타났다.
점토에 있어 ‘위력‘ 이란 어떤 것인가? 점토의 어떤 성질이 자기와 같은 종류의 변종이 풍부해지게 만들 수 있을까? 점토는 강이나 뱃물의 상류에서 바위가 풍화되어 물에 녹아 들어온 규산과 금속 이온 같은 화학적 구성 단위로 만들어진다. 조건이 적당히 만들어지면 그것들은 하류에서 다시 결정을 이루고 점토를 형성한다. 어떤 특정한 형태의 점토 결정이만들어지느냐 안 만들어지느냐는 무엇보다도 물 흐름의 속도와 패턴에 달려 있다. 그러나 반대로 점토의 침전도 물의 흐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것들은 지하수가 흐르는 땅의 짜임새, 모양, 수위를 변화시킴으로써 무심코 이 일을 한다. 어떤 점토 변종이 우연히 토양의 구조를 바꿔서 지하수의 흐름을 빠르게 하는 성질을 갖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결과 점토는 씻겨 내려갈 것이다. 이런 종류의 점토는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정의한다. 또 흐름을 변화시켜서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점토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는 점토도 성공적이지 못하다.
물론 점토가 존재하고 ‘싶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복제자가 우연히 갖게 된 성질에서 비롯된 사건과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것이다. 이제 다른 종류의 점토를 생각해 보자. 이번 것은 지하수의 흐름을 늦춰서 자기와 같은 종류의 점토가 더 많이 침전되도록 만든다. 확실히 이런 변종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더 많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지하수의 흐름을 조작했기 때문이다. 이번것은 ‘성공적인‘ 점토 변종이 될 것이다.  - P255

자,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 결정들 중의 일부가 촉매 역할을하여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일이 우연히 발생했다. 그 새로운 물질은 결정들이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 가는 것을 돕는다. 이 이차 물질들은(처음에는) 그것들만의 고유한 가계(家系), 다시 말해 조상과 자손을 갖지 않았다. 그 대신 원래의 복제자를 통해 각 세대에서 그때그때 새로만들어졌다. 그것들은 결정들의 도구, 즉 원시적인 ‘표현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케언스스미스는 그의 결정 복제자가 만든 도구들이 복제되지 않으며, 이들 가운데 유기 분자가 많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무기화학 공업에서 유기 분자들이 자주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유기 분자들이액체의 유동성이나 무기 입자의 성장 또는 균열 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과는 결정 복제자의 ‘성공‘ 여부에 영향을 주는 성질과 똑같다. 예를 들어 몬모릴로나이트(montmorillonite)라는 아름다운이름을 가진 점토 광물은 카르복시메틸 셀룰로오스(carboxymethylcellulose)라는 덜 아름다운 이름의 유기 분자가 소량 존재할 경우 잘 부러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카르복시메틸 셀룰로오스의 양이 적어지면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나서 몬트모릴로나이트 입자들이 서로 붙는다. 탄닌이라는 유기 분자는 석유를 시추하기 위해 진흙에 구멍을 뚫을 때 구멍을 더 쉽게 뚫으려고 사용한다. 석유 시추업자가 진흙의 점성을 변화시키고 구멍이 잘 뚫리는 정도를 조절하기 위해 유기 분자를 사용할 수 있다면, 자기 복제 능력이 있는 광물질이 누적적인 자연선택의 결과, 자기 복제를 위해 유기 분자를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케언스스미스의 이론은 약간의 기분 좋은 보너스를 얻는다. 이제까지 정설로 여겨 왔던 유기 분자의 ‘원시 수프‘ 이론을 지지하고있는 다른 화학자들이 점토 광물이 그 이론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의 한 사람(D. M. 앤더슨)은 "지구에서 스스로를 복제하는 미생물을 탄생시킨 몇 가지 혹은 대다수의 비생물적인 화학 반응과 과정이 지구 역사의 초기에 점토 광물의 표면이나 다른 무기 분자의 표면에 아주 근접한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 P259

우리의 관심사는 RNA나 그와 비슷한 분자들이 스스로를 복제하는 분자가 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광물 결정 ‘유전자‘가 RNA (또는 비슷한. 물질)를 더 효과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RNA가 스스로 복제되도록 만들었다.
즉 RNA의 자기 복제 능력은 RNA를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RNA는 자기 복제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일단 새로운 자기 복제 분자가 탄생하자 새로운 종류의 누적적인 자연선택이시작되었다. 새로운 복제자는 본래 찬조 출연자였지만 원래의 결정보다더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나자 그 역할을 넘겨 받게 되었다. 그들은 진화를 계속했다. 그래서 결국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DNA 암호를 완성하였다. 원래의 광물 복제자는 닳아빠진 주형처럼 버려졌다. 그리고 오늘날의 생물은 단일한 유전 체계와 단일한 생화학을 바탕으로 비교적 최근의 조상에서 진화해 나왔다. - P261

히 사람들은 자연선택이 순전히 부정적인 힘에 지나지 않는다으고 생각한다. 기형이나 실패작을 제거하는 능력은 있지만 복잡하거나 아름답고 효율적인 설계를 구축할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선택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무언가를 제거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일까? 진정 창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무언가를 덧붙이지는 못하는 것인가? 우리는 조각 작품의 예를 통해 이 물음에 대한 부분적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각가는 대리석 덩어리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 조각가는 오직 떼 내기만 할 뿐이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조각 작품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자칫하면 사람들을 나쁜 생각(즉 조각가가 의식을 가진 설계자라는 생각)으로 비약하게만들고 정작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게 만들 위험의 소지가 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조각가의 작업이 무엇을 부가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조각가의 비유에 지나치게 매달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비유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은 무언가를 제거하기만 할지도 모르지만 돌연변이는 무언가를 부가할수 있다.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결합하는 방법 중에는 오랜 지질학적시간 동안 삭제보다 부가를 많이 함으로써 복잡성의 구축을 이끌어 낼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주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서로 적응한 유전자형(coadapted genotypes)‘이고 다른 하나는 ‘군비 확장 경쟁 (arms races)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공진화(계통적으로 관계없는 여러 생물이 서로 연관되며 진화하는 것 옮긴이)‘와 ‘서로에게 환경이 되는 유전자‘ 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결합된다. - P277

물론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이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전자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느냐 불리한 ‘상황‘이 되느냐에 가장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그 집단 가운데 이미 다수를 점하고 있는 다른유전자, 즉 몸을 공유할 가능성이 높은 다른 유전자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른‘ 유전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유전자 집단이 일체가 되어 어떤 문제를 협동해서 해결하는방향으로 진화하게 되리라는 것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유전자 자신이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는 오직 유전자 풀 속에서 생존하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할 뿐이다. 진화하는 것은 유전자의 ‘팀 (team)‘이다. 그런데 다른 팀 역시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능숙하게 기능할지도모른다. 그러나 일단 한 팀이 그 종의 유전자 풀 속에서 우세를 점하기시작하면 그 팀은 필연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설령 어떤 소수파팀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기능한다 하더라도 소수파 팀이 뚫고 들어오기란 매우 어렵다. 다수파 팀은 단순히 다수파라는 이유만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수파 팀이 절대 치환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절대 바뀌지 않는다면 진화는 브레이크가 걸려 정지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 속에 일종의 내재된 관성이 있다는 뜻이다. - P281

물론 이런 논의가 생화학적 수준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눈, 귀, 코, 보행에 사용되는 사지(四肢)처럼 동물 신체의 협동적인 기관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부분을 만드는 적응력이 높은 유전자 집단에 대해서도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살을 베어 무는 데 적합한 이빨을 만드는유전자는 고기를 소화하는 데 적합한 창자를 만드는 유전자가 우위를점한 ‘상황‘에서 유리하게 된다. 역으로 식물을 으깨기 좋은 이빨을 만드는 유전자는 식물을 소화하는 데 적합한 창자를 만드는 유전자가 우세한 ‘상황‘에서 유리해질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역이 성립한다. 따라서 ‘초식 유전자‘ 팀은 함께 진화하기 쉬울 것이다. ‘육식 유전자‘ 팀 역시함께 진화하기 쉽다.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몸속에 들어 있는 유전자의 대부분은 하나의 팀으로 서로 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화적 시간을 거쳐 그 유전자들(그들 자신도 선조의 복제이다.)은서로 자연선택을 하는 환경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왜 사자의 선조는 육식을 선택했고, 영양의 선조는 초식을 채택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원래 처음부터 우연히 결정되었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연이라고 말한다면 사자의 선조가 초식을 선택할 수 있었고, 영양의 선조 역시 육식을 채택할 수 있었다는 의미도 된다. 하지만 어느특정한 계통이 일단 풀보다 고기를 잘 처리하는 유전자 팀을 구축하기
‘시작‘ 하면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강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계통이 일단 고기보다 풀을 잘 처리하는 유전자 팀을구축하기 시작하는 경우에도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방향으로 강화될 것이다.
생물의 초기 진화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사건의 하나는 그러한 협동사업에 참여하는 유전자의 수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 P282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은 환경의 한정된 부분, 즉 기후에대한 것뿐이었다. 기후는 동물과 식물 모두에게 극히 중요한 요소이다. 그 패턴은 수세기에 걸쳐 변화하며, 끊임없이 진화가 그 변화를 뒤따르‘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기후 변동은 임의적이고 일관성도 없다. 그런데 동물의 환경에는 그보다 훨씬 일관적이고 악의에 찬 방향으로 변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따르지‘ 않는 수많은 부분이 있다. 환경의 이러한 부분이란 생물 그 자체이다. 하이에나와 같은 포식자에게있어 최소한 기후만큼 중요한 환경은 먹이, 즉 누(소처럼 생긴 영양의 일종옮긴이)나 얼룩말이나 영양 같은 동물들의 개체군이다. 풀을 찾아 평원을 이동하는 영양이나 그 밖의 초식 동물에게는 기후뿐 아니라 사자나 하이에나 같은 육식 동물들도 매우 중요하다. 누적적인 자연선택은동물들을 기후 조건에 훌륭하게 적응하게 만들 뿐 아니라 먹이가 되는초식 동물들을 포식자보다 빠른 속도로 적응하게 만든다. 따라서 진화가 장기적인 기후 변동을 ‘뒤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먹이가 되는 생물의 진화적 변화는 포식자의 습성이나 무기의 장기적 변화를 ‘뒤따르게‘ 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 P293

동물이나 식물의 계통은 진화적 시간 속에서 평균적인 기후 조건의변화를 뒤따르는 데 뒤지지 않을 만큼 부지런히 적의 변화를 ‘뒤따를‘것이다. 가젤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치타의 무기나 전술의 진화적 개선은 기후의 지속적인 악화와 마찬가지이다. 가젤은 기후에 적응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치타의 개선을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기후는 수세기에 걸쳐 느린 속도로 변화할 뿐이고 가젤에 대해서만 특별히 악의적인 방식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기후가 가젤을 ‘잡아먹지‘ 는 않는다. 치타도 수세기에 걸쳐 변화한다. 그것은 연평균 강우량이 수세기에 걸쳐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연평균 강우량은 특별한 이유나 주기 없이 오르내리는 데에 비해 치타는 수세기에 걸쳐 그 선조보다 가젤을 포획하는 능력을 높여 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계속되는 치타의 세대가 해마다 바뀌는 기후 조건의 연속적인 변화와 달리 그 자체가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되기때문이다. 따라서 치타의 다리는 점점 빨라지고, 눈은 점차 예리해지고, 이빨은 계속 날카로워진다. 기후 같은 무생물적 조건들은 그것이 아무리 ‘적대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 적대성을 점진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어디에도 없다. 반면 살아 있는 천적은 진화적 시간 척도에서 볼 때, 그 적대성을 점진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
육식 동물이 차츰 ‘나아지는‘ 경향은 먹이가 되는 동물이 육식 동물과 마찬가지로 평행하게 나아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군비 확장 경쟁처럼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경제적 비용 문제 때문에) 금방 속도가 떨어지게 될것이다. 먹이가 되는 생물에게도 마찬가지 경우가 성립한다. 가젤은 치타와 동일하게 누적적인 자연선택을 통해, 역시 세대를 거치면서 점차 빠른 속도로 달리고 신속하게 반응하고 키 큰 풀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는 방법을 터득하는 등의 능력을 개선하게 된다. 가젤 역시 천적에 대해서(이 경우에는 치타에 대해서) 적대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주위 환경에 훌륭하게 적응한 동물에게는 어떤 변화도 악화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치타의 관점에서 연평균 기온의 변화는, 해를 거듭한다고 체계적으로 더 좋아지거나 나빠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갈수록 가젤은 오로지 나쁜 방향으로만, 즉 치타로부터 교묘하게 도망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적응해서 점점 더 잡기 어려워진다. 여기에서도포식자가 그와 평행하게 개선되는 경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가젤의 전진적인 개선을 향한 경향은 점차 느려져 언젠가는 브레이크가 걸려버릴 것이다. 한쪽이 조금 개선되면 다른 한편도 조금 개선된다. 그리고 다른 편이 조금 더 개선되면 한편도 조금 더 개선된다. 이 과정은 수십만년이라는 시간 척도 속에서 악의에 찬 나선을 그려 간다.
국가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이보다 훨씬 짧은 시간 척도로 두 적대국이 병기류를 서로 다른 나라의 개선에 대응해 전진적으로 개선시키고있을 때 이것을 ‘군비 확장 경쟁‘ 이라고 부른다. 군비 확장 경쟁과 진화는 매우 유사한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 용어를 차용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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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의 맹위猛威가 여기에 이르매, 부득불 녗마디 말로써 그 공덕을 기리고 그 성미를 달래지 않을 수 없다. 크도다! 최루탄이여. 바람을 타고 사람의 무리를 뒤쫓으며, 사람들은 네가동으로 몰면 동으로 밀려가고 서로 몰면 서로 밀려가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면팔방으로 흩어지니 그 황급함이 이루 말할 수 없구나. 예부터 이르기를 인중승천(人衆勝天)이라 사람의 무리는 하늘보다도 승하다고 하였으되, 그 사람의 무리란 것도 네 앞에서는 한낱 짚단과 같고 검불과 같으니 너는 필시 하늘보다도 높은 것이 분명하다.
크도다! 최루탄이여. 너는 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아무도 차별함이 없으니, 갓난아이를 안은 주부가 탄 시내버스 속으로도 파고들고 제1야당 총재의 승용차도 넘보며 학교와 병원, 주택, 상가, 교회, 성당을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구나. 너는 실로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자‘로다.
크도다! 최루탄이여, 전국 각지에서 네 무용담이 우레와 같이 들려온다. 광주 원각사의 법당 안으로 성큼 뛰어들어 영겁의 미소 속에 잠든 부처님의 단꿈을 깨웠으니, 아마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부처님께 ‘매운맛‘을 보여드린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네가 처음이 아닐는지. 마산에서는 네가 한번 공설운동장의 높은 담을 넘어들어가매 이역만리 이집트에서 언감생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한국 축구에 도전하려고 찾아왔던 나일과 피라미드의 후예들이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눈물만 흘리다가 돌아서는구나. 이제 너의 명성이 사해(四海)에 전파되면 앞으로는 어리석은 이방인들이 함부로 스포츠 한국에 덤벼들기를 삼가하게 될 것이로다.
크도다! 최루탄이여. 네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의 질서가 어찌될 뻔하였는지, 실로 모골이 송연하다. 이제 네가 단순히 냄새로 사람들을 쫓을 뿐만 아니라 70미터를 직선으로 나는 탄환의 위력으로써 인명을 살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온 천하가 너의 위엄 앞에 전율하고 있다.
그러나 최루탄이여! 사물의 이치가 항용 그렇듯이 너의 영광이 절정에 다다른 이 순간에 나는 너의 몰락이 준비되고 있음을 본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자고로 공명을 이루고 나면 조용히 몸을 떼어 물러나는것이 우리 선현들의 처신이었건만 너는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을 모르니 내 너를 위하여 이것을 슬퍼하노라. - P151

그렇다. 민의의 물결이 갈수록 더 큰 파도로 끊임없이 밀어닥칠 때, 최루탄이 세면얼마나 세겠는가? 내 가슴을 온통 뒤흔들어놓았던 그 경적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서라면 나는 또다시 최루탄 가스 속을 이리저리 뛰는 졸경을 치르기를 마다하지 않으리라....
그후 6.26대행진 때 나는 정말로 6. 10 때보다 더 지독한 최루탄 가스 속을헤매며 6.10 때보다 훨씬 더 크고 장엄한 경적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경적소리와 함께 우리의 민주화는 마침내 분수령을 넘어섰다. 이제 최루탄이 모든 것위에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저 기이한 시대는 다시는 우리의 삶 속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누가 나에게 이 세상에서 최루탄보다 더 센 것이없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경적이 최루탄보다 세지!" 하고 대답할것이다.
(가정조선, 1987.7) - P152

원래 이번 개헌논의의 주안점이 ‘유산‘ 이래 15년간 박탈당해왔던 국민의 정•부선택권을 회복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표현으로집약되었던 것에 대하여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줄 안다. 그러나 ‘대통령을 내손으로‘ 뽑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그 지위틀 격하시키는 일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첫번째 계율은 모든 권력자를 의심하고 불신하라는 것, 어느 누구에게도 결단코 절대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 알다시피 1972년의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사실상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을 집중시키고 더욱이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말고는 무엇이든지" 뜻대로 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까지 부여함으로써 대통령을 거의 초헌법적인 절대권력자로 만들었다. 현행 헌법 또한 긴급조치권과 대동소이한 내용의 ‘비상조치권‘을 대통령의 권한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같은헌법환경이 대통령직에 대한 우상숭배를 낳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의 의식 속에 ‘대통령‘이란 과연 어떤 존재였던가를 냉철하게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대통령을 직접 지칭하는 것이어쩐지 ‘불경(不敬) ‘스러운 일이 되는 것 같아 ‘고위층‘이니 무어니 하는 야릇한 대명사를 쓰는 버릇이라든지, 나라의 ‘통치권‘은 엄연히 주권자인 국민에게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통치권자‘라고 지칭한다든지, 박대통령 ‘시해(弑害) ‘사건이라는 봉건왕조적 표현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든지, 형법전 어디에도 ‘국가원수모독죄‘라는 죄명이 없는데도 많은 국민들이 마치 그런 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대통령을 결코 ‘동료시민‘으로서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 신비스러운 후광에 싸인 우리와 다른 특수한 존재, 신성 불가침의 존재, 요컨대 ‘나랏님‘이요. ‘왕‘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같은 대통령 숭배를 타파하지 않고는 참된 민주사회의 성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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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의 정보 저장 기술은 디지털 방식이다. 이 사실은 19세기에 그레고어 멘델이 발견했다. 비록 그가 이런 식의 설명을 하지는 못했지만말이다. 멘델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가 자손의 몸에서 잉크와 물이 섞이듯 뒤섞여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자손은 부모로부터 여러 가지 유전자를 받을 때, 그것들을 구분된 입자의 형태로 받는다. 각각의 입자에 관해 말하자면 자손은 그것을 물려받든가 물려받지못하든가 둘 중 하나다. 오늘날 신다원주의이라 불리는 사조를 일으킨 선구자 중 한 사람인 R. A. 피셔는 입자 형태의 유전이라는 이 사실은우리가 자손의 성별에 관해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임을 지적했다.
우리는 남성인 아버지와 여성인 어머니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지만 양성 또는 중성이 아니라, 항상 남성 아니면 여성이다. 새로 태어날 아기가 남성이 될 확률과 여성이 될 확률은 거의 똑같다. 그러나 항상 아기는 이 두 성별 중 한 가지를 가질 뿐 2개의 성이 혼합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제 다른 유전 입자에서도 마찬가지 사실이 적용된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뒤섞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구분된 채로 있으며 세대를 거쳐 내려가는 동안 카드들이 섞였다가 다시 분리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물론 유전 단위들이 한 몸 안에 있을 때 마치 잉크가 물에 섞이는 것과 같은 현상을 나타내는 일이 종종 있다. 키가 큰 사람이 키가 작은 사람과 결혼했을 경우, 또는 흑인이 백인과 결혼했을 경우 그들의 자손은 중간형을 띤다. 그러나 잉크가 물에 섞이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단지 겉보기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는 각자 작은효과를 나타내는 많은 수의 유전 입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이다. 입자들 각각은 분리된 채로 남아 있으며 다음 세대로 그대로 이어진다.
유전이란 물과 잉크가 섞이는 것과 같다는 생각과, 그것이 아니라 유전자는 중간에 뒤섞이거나 소멸되지 않는 입자의 형태로 다음 세대로넘어간다는 생각을 구분하는 것은 진화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P193

어떤 한 정자 속에 있는 모든 장소는 다른 나머지 정자 속에들어 있는 특정한 장소들에 각각 대응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난자나정자와 비교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세포들(체세포)은 모두 46개의 염색체, 즉 두 벌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세포들에서는 같은 주소가 두 번 사용되는 것이다. 모든 세포는 9번 염색체 2개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9번염색체 속에 들어 있는 7,230번 장소도 2개이다. 그 두 장소에 있는 내용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이것은 다른 개체와 비교할 때도마찬가지다. 46개의 염색체를 가진 세포에서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정자가 만들어질 때, 정자는 같은 주소를 가진 2개의 장소 중 어느 하나만을 갖게 된다. 정자가 그중 어느 것을 가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난자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정자와 난자의 주소 체계는 같은 종이면 모두 같지만 저장된 내용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무시해도 좋을극소수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되면 다시 46개의 염색체 모두가 갖추어진다. 그리고 이 46개의 염색체는 발생중에 있는 배의 모든 세포 속에서 복제된다.
ROM은 처음 만들어질 때를 제외하고는 거기에 뭔가를 써넣을 수는 없다고 했다. 복제 중에 가끔 실수가 생길 때를 제외하면 이것은 세포속에 있는 DNA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종 전체의 ROM들로 이루어진 집합적인 정보 은행의 차원에서는 무엇인가를 써넣을 수 있다는 말이틀리지 않는다.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선택적으로 살아남고 번식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발전된 생존 지침이 그종의 유전자 집합에 ‘씌어진다. 진화는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DNA의 각 저장 장소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내용들 중 어떤 것이 득세하는가하는, 유전자의 빈도 변화에서 비롯된다. 말할 것도 없이 모든 내용들은 어느 때건 개체의 몸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집단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대립 유전자들의 빈도 변화이다. DNA의 주소 체계는 그대로 보존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저장 장소에 들어 있는 내용들의 통계적인 수치가 변화하는 것이다. - P203

모든 체세포가 똑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세포들의 형태와 기능이 천차만별인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체세포들이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모양과 행동을 보이는것은 세포마다 다른 유전자들이 ‘읽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유전자들만읽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린다. 가령 간세포는 자기의 DNA ROM에서신장세포를 만드는 데 해당하는 유전자는 읽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마찬가지다. 세포가 어떤 모양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는 세포 속의유전자 중 어떤 것이 읽히고 번역되어 단백질 분자로 만들어지는가에달려 있다. 이것은 다시 세포 안에 이미 존재하는 화합물의 영향을 받는다. 세포 안에 이미 존재하는 화합물이 어떤 것인가는 전에 읽힌 유전자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인접한 세포가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1개의 세포가 2개로 분열할 때, 2개의 딸세포가 반드시 똑같지는 않다. 가령 수정란 속에서는 특정한 화합물이 골고루 분포하지 않고 세포의 어느 한쪽에 몰려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극화(化)된 세포가 분열하면 딸세포는 위치에 따라 다른 종류의 화합물을 갖게 된다. 이것은 두 딸세포에서 서로 다른 유전자가 읽힐 것임을 의미한다. 그 결과 세포 스스로 분화를 촉진하는 과정이 진행된다. 최종적인 신체의 모양, 팔다리의 길이, 뇌의 기능, 행동 양식 등은 모두 다른 종류의 세포들이 상호 작용하여 나타나는 간접적인 결과이다. 세포들의 차이는 다른 종류의 유전자를 읽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분화 과정은 고도로 복잡한 하나의 기관이 치밀하게 구성된 어떤 위대한 설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3장에서 살펴본 ‘피드백‘ 방식을 통해 자동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훌륭한 예다. - P207

DNA의 정보가 전달되는 두 가지 경로, 즉 수직적 전달과 수평적 전달 간에는 기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DNA의 정보는 정자나 난자를 만드는 세포의 DNA로 수직적으로 전달된 다음에 다음 세대에게 전달된다. 다음 세대는 또 그 다음 세대에게 전달한다. 이런 식으로 DNA의 정보는 미래에 나타날 세대에게 한없이 전달된다. 이것을 ‘보존용 DNA‘ 라부르겠다. 이 보존용 DNA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보존용 DNA가 전달되는 세포들의 계보를 생식 세포선(germ line)이라 부른다. 생식 세포는 정자와 난자를 만드는 세포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다음 세대의 조상인 셈이다. DNA는 또한 ‘옆으로‘, 즉 수평적으로도 전달된다. 생식 세포가 아닌 세포, 예를 들면 간세포나 피부 세포 따위에 전달되고, 그러한 세포들 속에서 다시 RNA에 전달된다. 그 다음 단백질에전달되고, 그 결과 배의 발생 과정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최종적으로 성체의 형태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수평적전달과 수직적전닿은 3장에서 말한 ‘발생‘이라는 프로그램과 ‘생식‘이라는 프로그램에 각각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 P208

기록 보존용 매체로서 DNA의 기능은 탁월하다. 메시지를 보존하는능력은 돌이나 바위의 불변성을 훨씬 능가한다. 소와 강낭콩은 (그 밖의모든 생물도) 히스톤 H4 유전자라는 거의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것의 내용은 306개의 DNA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히스톤 H4 유전자가모든 종의 염색체에서 같은 주소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종은 염색체의 주소 체계가 달라서 주소를 비교할 수 없기때문이다. 하지만 소의 DNA에 들어 있는 그 306개의 문자열과 강낭콩에 있는 306개의 문자열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소와 강낭콩은그 306개의 문자열 중 단지 2개에서만 차이가 있다. 소와 강낭콩의 공통조상이 정확히 얼마나 오래전에 살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화석증거에 따르면 그 시기가 10억 년 전과 20억 년 전 사이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대략 15억 년 전이라고 가정해 보자. (사람한테는 상상을초월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공통 조상에서 갈라진 이 두 생물은 각자306개의 문자 중에서 305개를 보존했다. (아니면 어느 한쪽이 306개 모두를보존하고 다른 쪽이 304개를 보존했을 수도 있다.) 묘비에 새긴 글자도 수백년 정도만 지나면 닳아 없어져 거의 분간할 수 없게 되는 것과 비교하면엄청난 내구성이라 할 수 있다. - P209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뭔가 약간 역설적인 면이 있는 듯하다. 히스톤같이 아주 느리게 진화하는 분자들은 자연선택의 영향을 가장 받기 쉬운 분자들이었다. 피브리노펩티드는 가장 빠르게 진화하는 분자들이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에 거의 완전히 무시당하기 때문이다. 피브리노펩티드는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속도로 자유롭게 진화할 수 있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항상 진화의 원동력으로 자연선택을 강조하기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선택이 없으면 진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역으로 강력한 ‘선택압‘ 은 진화 속도를 빠르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은 그와 정반대이다. 자연선택은 진화에 브레이크를 거는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자연선택이 없는 상태의 표준 진화 속도가 바로 진화의 최대 속도이며. 그것은 돌연변이 속도의 동의어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 잘 생각해 보면 다른 해답이없음을 알 수 있다. 자연선택를 통한 진화는 돌연변이 속도보다 빠를 수없다. 왜냐하면 돌연변이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변종이 만들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떤 새로운 변종을 수용하고 다른 것을 도태시키는 일이다. 돌연변이 속도는진화가 일어나는 속도가 가질 수 있는 최대 한계선이다. 자연선택은 대개 진화에 관련된 변화를 막는 것과 상관이 있지 그것을 추동하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다. - P213

생물의 놀라운 정보 저장 능력의 핵심에 DNA 분자가 있다는 것을알았다. DNA는 아주 작은 공간에 엄청난 양의 정밀한 디지털 정보를 담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수백만 년 단위의 오랜 기간 동안 보존할 수 있다. (거의 틀리지 않고, 하지만 틀리는 수가 있긴 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DNA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의 본질이라는말이다. 이것은 버드나무 씨앗의 이야기에서 끌어내려고 했던 사실이다. 살아 있는 생물은 다름 아닌 바로 DNA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말이다. 이 사실이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독자가 그 사실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DNA 분자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개체의일생과 비교해 볼 때 거의 영원히 보존된다. DNA가 담고 있는 메시지의 수명은 (몇 안 되는 돌연변이를 포함한다면) 몇백만 년에서 몇억 년에이른다. 다시 말해서 개체 수명의 몇만 배에서 몇조 배에 달하는 것이다. 개체는 단지 DNA가 그들의 천문학적인 수명 중 얼마간의 시간 동안만 짧게 거처하는 일시적인 용기에 불과한 것이다. - P215

생명이 없는 행성에서 생명이 생기기 위한 필수 요소는 무엇인가? 그 요소는 지구에서 어느 순간에 생명력으로 변했다. 그것은 숨도, 바람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어떤 종류의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성질이다.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는 성질이다. 이것이야말로 누적적인 자연선택을 위한 기본적인 요소다. 어쨌거나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리학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는 어떤 존재, 또는 내가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 복제자(複製子)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생물에서 그 역할은 거의 전적으로 DNA 분자가 맡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성질을 가진 것이면 어떤 물질도 가능하다. 원시 지구에 출현한 최초의 복제자가DNA는 아니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세포 속에서만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분자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유지될 수 없는 DNA 분자가 저절로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최초의 복제자는 아마 DNA보다 더박하고 단순했을 것이다. - P218

생명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은 생명이 탄생하는 데에 얼마간의 행운이 따랐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행운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의문점은 얼마만큼의 행운이 필요했나 하는 것이다. 지질학적 시간의 유구함은 법률이 우연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우연의 일치를 상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생명에 관한 현대의 이론에서 핵심은 누적적인 자연선택이다. 그 이론들은일어날 수 있는 일련의 운 좋은 사건들(무작위적인 돌연변이)과 자연선택과정을 결합한다. 그래서 그 과정이 끝나갈 때쯤 완성된 최종 산물은 한번의 행운으로 생겨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심지어 우주의 나이보다 100만 배나 긴 시간이 주어져도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엄청난 행운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문제를 푸는 열쇠다. 하지만 그것도 일단은 어떤 작용을 통해 시작되어야 한다. 따라서 누적적인 자연선택의 기원 그 자체에서도 일회의 우연으로 발생한 사건을 생각해야만 한다. - P234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창조주는 아마 매일매일 일어나는진화 과정을 통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창조주가 호랑이나 염소를 설계하거나 나무를 만들지는 않지만 태초의 복제 기구와 복제자, 즉 DNA와 단백질을 만들어 놓았고, 그 결과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일어나 모든 진화 과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자가당착에 빠지는, 근거가 박약한 주장이다. 생물이 가진 복잡성을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일단 어떤 복잡한 것을전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즉 그 복잡한 DNA • 단백질 복제 기구를 전제한다면 그것이 더 복잡한 생물을 만드는 과정을 상상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DNA • 단백질 복제 기구와 같은 복잡한 것을 설계할 수 있는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도 최소한 그 복제 기구만큼이나 복잡할 것이다. 하물며 그가 기도를 들어주고 죄를 벌하는 따위의 고도의 기능까지 추가로 가진다면 그는 훨씬 더 복잡한 존재일 것이다. 초자연적인 설계자로 DNA • 단백질 복제 기구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은 엄밀히 밝히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설계자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은 원래부터 있었다.‘ 따위의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나태한 방식을 버리고자 한다면 단지 ‘DNA가 원래부터 있었다.‘ 또는 ‘생명은 원래부터 있었다.‘ 라고 말하면 된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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