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는 지구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나는 인간 없는 지구를 꿈꿉니다."
자연과 지구를 사랑하는 많은 분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지구 역사 46억 년 가운데 대부분은 인간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우리가 꿈꾸기도 전에 인간 없는 세상은 이미 존재했죠. 정말 길고 지루한 세상이었습니다. 노을이 지는 것도 아닌데 온종일 붉기만 한 하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뿌연 바다, 암컷과 수컷이 서로 짝을 찾아 알콩달콩하는 대신 끊임없이 자기 복제만 하는 무성생식 박테리아가 살던 세상입니다. 과연 아름다웠을까요? - P6

새로운 게 등장하려면 원래 있던 게 사라져야 한다.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생명이 등장하려면 빈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생태계는 꽉 차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가 생태계에 빈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멸종이다. 멸종이란 다음 세대의 생명체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자연스러운일이다. - P23

직립을 하게 되면서, 즉 똑바로 서서 걷게 되면서 골반은 작아지고뇌는 커졌다. 침팬지와 인류 최초의 발자국 화석을 남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루시‘라는 별명으로 불린다)와 마지막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골반과 머리 그리고 태어날 때와 성장한 다음의 뇌 용량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는 430~550밀리리터며, 호모 에렉투스는 1000밀리리터,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는 평균 1400밀리리터정도인데 태어날 때도 이미 400밀리리터에 가깝다.
그렇다면 커다란 뇌 덕분에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일까? 설마! 뇌의 크기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대륙은 아프리카코끼리(뇌 용적 4000밀리리터)가 지배해야 하고, 해양은 대왕고래(뇌용적 8000밀리리터)가 지배해야 한다. 그렇다면 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직립은 커다란 뇌, 넓은 시야와 더불어 인류에게 한 가지 선물을 더 주었다. 바로 자유로워진 손이다. 걷는 데는 두 발이면 충분했고, 더 이상 나무에 매달리는 데 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손이 자유로워졌다. 예민한 감각이 모여 있는 손은 물건을 쥐고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자유로운 손은 노동을 탄생시켰다.
인간으로의 진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뇌의 변화라기보다는 노동이며, 노동은 직립보행의 결과 손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라는말이다. 똑바로 선 인간은 자유를 얻었고, 자유를 얻은 인간은 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노동은 다시 인간의 진화를 촉진해 마침내 ‘슬기인간 Homosapiens‘으로 발전시켰다. - P31

이때부터 인류 진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불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공간이 늘어났다. 추운 곳에서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루가 길어졌다. 해가 지면 자던 생활 패턴에서 벗어나 불 주변에 오순도순 모여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지혜가 전수되었다.
"너 사냥할 때 그렇게 떠드는 것 아냐!"
"빨간 열매 함부로 따 먹으면 안 돼!"
유대감도 커졌다. 현대인은 생일파티를 한답시고 멀쩡한 형광등을 끄고 작은 촛불을 켜고 했다. 또 환한 가로등 불 밖에서 굳이 촛불을 들고 시위를 했다. 왜 그랬을까? 불 주변에 모이면 자신들이 하나의 무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불은 식량을 오래 보관하게 해주었다. 불에 익은 고기는 잘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에 익은 고기는 소화가 잘되었다. 뇌에 많은 에너지가 공급되었다. 동물원의 침팬지는 하루에 12~14시간을 먹어야 겨우 자기 체온을 유지할 수 있지만 불에 익혀 먹으면 하루에 한두 시간만 먹어도 충분히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 시간도 많이 남았다. 남은 시간에 문화를 발전시키고 도구를 만들었다. - P33

머리가 똑똑해져서가 아니라 지구의 기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2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 사이에 지구 평균기온이 한꺼번에 4도 이상 올랐다. 그리고 지구의 평균기온은 15도가 되었다.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농사는 자연사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다. 지구에 사는 모든생명체는 지구 환경에 맞추어 산다. 환경에 적응해서 사는 것이다. 인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29만 년 동안 환경에 잘 적응해 살던호모 사피엔스가 갑자기 1만 년 전에 농사를 발명하면서 이 규칙이 깨졌다. 호모 사피엔스는 환경에 적응하는 대신 환경을 바꾸었다. 멀쩡한 벌판에 불을 질러 밭으로 바꾸었다. 멀리 흐르던 물을 물길을 내어 당겨 와 농사를 짓고 식수로 썼다. 농사는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고 정착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사람이 사람다워졌다. - P36

전기, 물, 공기, 식량이 있어도 여기서는 인류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지구인들이 깨달았다. 화성에는 바다가 없다. 바다가 없으면 생명도 없는 것이다. 이상하다. 왜 화성에는 바다가 없을까? 화성에는 분명히 강의 흔적이 있고 호수와 바다의 흔적도 있다. 그 바다는 어디로 갔을까?
지구와 화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구의 구조는 양파처럼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 중심부터 내핵, 외핵, 맨틀, 지각으로 구분된다. 내핵과 외핵은 철과 니켈 같은 무거운 금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랫동안 식지 않고 용융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무거운 원소들이 아래쪽으로 내려간 것이다. 외핵은 아직도 액체 형태로 내핵을 돌고 있다. 금속 둘레를 금속이 돌면 자기장이 생긴다. 내핵 주변을 외핵이 돌면서 자기장이 만들어졌다. 지구는 거대한 자석이 되었다. 물과 DNA, RNA 같은 생명의 분자를 쪼개는 우주 입자인 태양풍을 지구 자기장이 막아주고 있다. 자기장 덕분에 지구에는 생명이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화성은 일찌감치 식는 바람에 지구와 같은 내부 구조가 형성되지 않았고 자기장도 생기지 않았다. 자기장이 없으니 태양풍을 막을 수도 없다. 태양풍은 화성의 바다를 없애 버렸다. 그 결과 우리가 도착하기 전의 황량한 화성이 만들어졌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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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빚쟁이 심리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빚에 눌려 있을 때의 압박감과 갚아가는 과정의 고통과 다 갚았을 때의 복잡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쁘고 슬프고 서럽고 허무하다. 이상하게 불안해진다. 또 빚질 일이 생길까 봐. 혹은 앞으로 뭘 목표로 살아야 할지 막막해서.
빚을 갚는 동안 이 아이는 견뎌야 할 일이 많았을 것이다. 화가 나도, 모욕을 당해도, 내일이 두려워도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도가고 싶었을 테다. 예쁜 사진도 찍고 싶고, 좋은 옷도 입고 싶었을 텐데 그걸 다 참아야 했을 것이다. 기댈 사람 하나 없었다면 늘 외로웠을 것이다. 도토리처럼 아무 데로나 굴러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했을 것이다. 이 조그만 아이가 홀로 맞서왔을 삶이 장하고 대견했다. 그 바람에 술을 한 잔 더 따라주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
‘그래, 이제부터 뭘 할 건데?" - P453

그녀가 내민 잔에 커피를 채워주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 걸려들었다. 아니, 그 순간에 갇혔다. 그녀가 일순 낯설어지는 사술에 빠졌다. 비스듬하게 비쳐든 아침 햇빛이 그녀의 속눈썹에 가닥가닥 걸려 있었다. 검고 깊은 눈동자 안에서는 햇살이 은빛으로 산란했다. 두 뺨이 개울가에 내려앉은 첫눈 같았다. 귓불 아래로 돋아난 솜털들이 포실포실 고개를 든 눈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쓸어보고싶은 돌연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의 코끝이 장미 봉오리처럼 빨개지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재채기를 터트리기 전에 나는 시선을 비켰다. 베란다로 날아든 까마귀 한 쌍의 움직임에 눈을 붙박았다.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조금 전 나를 가둔 ‘그 순간‘이었다. 귓속에서 맥박이 쿵쿵거렸다. 모세혈관들이 일제히 팽창하는 것처럼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뱃가죽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그녀가 여자로서 내 안에 들어온 첫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내게, 코가 빨개진 채 아침 햇살 속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기억돼 있다. -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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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 같았다. 업로드된 이라면 예외 없이 그랬을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실제로 만났는데, 그게 예상만큼 좋지 않았어요. 아니, 사실은•••••• 지옥에 빠져 형벌을받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공달을 불러들였어요. 저놈에겐 별다른 감정이 없으니까. 가장 견딜 만한 상대였던 거죠."
이렇게 해석되는 말이었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자 롤라에 왔으나, 누군가가 오히려 고통이 되었다. 해석이 맞다면, 그도 나처럼 누군가를 가뒀을 것이다. 대신 시끄럽지만 감정을 견딜 만한 공달과 살아왔을 테고. 내가 매번 제이 대신 여우를 불러내는 것처럼. 억겁을 살아도, 모든 것이 가능한 천국에서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고통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감정적 존재였다. -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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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롤라 극장을 설계한 사람이 제이라는 것도. 내게 그토록 열심히 프로그래밍을 가르친 이유가 뭔지도. 나를 이곳에 보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영겁의 시공간을 버텨낼 수있도록 재미난 ‘놀이‘ 하나를 미리 손에 쥐여준 거였다. 경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끝내 몰랐을 진실이었다.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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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이 다 사실이라 치자. 그래도 난 이해를 못하겠네. 과학이 왜 인간한테 그런 짓을 해?"
"과학은 후진이 불가능해. 그저 도착하기로 예정된 곳에 도착한 것뿐이야."
그러니까 롤라는 인간이 결국 도착하고야 말 숙명이자 특이점이라는 얘긴가. 나는 혼잣말처럼 물었다.
"근데 거길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
"생명체는 유한하고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으니까."
"그걸 산다고 해도 되는 건가?"
"그건 철학의 영역에 속한 문제겠지. 과학의 입장에선 롤라 자체가 하나의 우주고."
제이에게는 모든 질문에 대한 모든 답변이 준비돼 있었다. 내 입장에선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드는 답변이었다. 오지게 잘난 척은 하는데 알맹이 없는 맹탕 같았다. 나는 물었다.
"그래서 네 입장은 뭔데?"
" 난 철학자도 과학자도 아냐. 게임개발자로서 내게 맡겨진 일을 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네가 뭘 했다는 거냐고?"
"아까 말했잖아 극장을 만들었다고. 인간은 놀이 동물이야. 놀이를통해 삶을 배우고, 순전히 놀기 위해 놀이를 하고, 죽을 때까지 놀이에 몰두하는 철딱서니 없는 종. 그중에서도 가장 고유한 놀이가 아마 서사 놀이일 거야. 영화, 드라마, 뮤지컬, 연극, 문학•••••• 난 그 콘텐츠들을 만드는 데 참여한 거야. 롤라에 도착할 첫 인간 개체들을 위해서."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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