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내 여자친구가 물어오면, 나는 그녀에게, 내가 열세 살이던, 어느 날 밤 더그 형이 친구들 무리와 함께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서는 이웃집 앞에 주차된 폰티악 조수석 창문을 향해 석회석 벽돌을 내던졌던, 우리가 펜실베이니아주에 살게 되면서 맞이한 첫 여름에 대해 말해준다. 나는 내가 포치에 나와 앉아 있었고 그 모든 일을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다음날 이웃집에 사는 칼러 씨가 건너와 더그 형이 자기 자동차 창문을 박살냈다며, 아내가 목격까지 했다고 말했다. 더그 형은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그러자 큰 언쟁이 일었다. 그들은, 더그 형과 칼러 씨는 이십여 분가량 언성을 높였다. 결국 우리 어머니가 사과를 한 후 칼러 씨에게 수표를 써주었다.
나는 여자친구에게, 나중에, 칼러 씨가 가고 난 후에, 내가 밖으로 나가, 그의 폰티악의 비닐 카시트에서 유리 파편을 털어내고, 거리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쓸어담기 시작했노라고 말한다. 석회석 벽돌은 여전히 차 바닥에 있었다고.
잠시 후, 칼러 씨가 집에서 나오더니 내게 그렇게 하지 않아도된다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그것은 이후 좀체 내 마음을 떠날줄 모르는 말이다-그는 말했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 P154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건데?"
누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언덕 지대를 바라다보았다. "모르겠어. 앨릭스, 난 이제 서른이 다 됐어. 서른." 누나는 말을 멈추고 술을 조금 마셨다. "리처드와 나는 삼 년을 사귀었어. 삼년을 꼬박.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면 누군가를 알게 돼. 익숙해져버리게 된다고. 그이가 완벽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망할 새끼처럼 구는 경우가 안 그런 경우만큼 있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작년부터 그이가 우리를 위해, 우리가 좀더 나이가 들었을 때를 위해 따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 그게 자꾸 발목을 잡아, 그이가 벌써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누나는 한숨을 내쉬고 몸을 기울여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봐야." 누나가 잠시 뒤 말했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나겠어?"
나는 누나에게 팔을 둘렀고, 내게 온몸을 맡긴 누나의 무게감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누나가 내게 안긴 것은 아주 오래된, 몇년 만의 일인 것 같았다. 나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오자, 누나가 내 가슴께로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잠시 나는, 어린 시절 그곳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지난날의 늦여름 오후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 P245

 일 년이면, 클로이는 예술 지구에 있는 갤러리에 새로이 취직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스물네번째 생일이 지나고 사흘째 되는 날 밤, 여느 밤과 다를 바 하나 없이 그녀는 일터에서 돌아올 것이고 부엌 식탁내 맞은편에 앉을 것이다. 그녀의 손은 축축해져 있을 것이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을 것이다. 굉장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 나는 한순간 그녀가 내게 장난을 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담뱃불을 붙이고 눈을 감을 것이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내게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할것이다. 그날 밤 늦게, 그녀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 것이고 나는 부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집 저편에서 전화기에 토해내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우리 둘 다 그날 밤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많은 말이 오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서늘한 어둠 속에 마치 이방인들처럼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서로에게 눈길을 삼간 채, 허리케인의 끝자락을 통과해 휴스턴 외곽의 작은 병원으로 차를 몰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우리가 막 서명함으로써 포기한 아이에게 지어줄 수 있었던 이름들을 떠올리며,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그러나 오늘 오후, 부드러운 라임색 카펫 위 그녀의 벌거벗은 몸 옆에 누워, 비와 웃음소리를들으며, 나는 다만 클로이의 피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녀의이름처럼 서늘하고 부드러운, 내 젊은 아내의 창백한 피부. 바깥거리에서 음악 소리가 커지고 클로이가 내 쪽으로 몸을 굴린다. 맨 먼저 나의 가슴에 키스하고 차츰차츰 아래로 내려간다. 나는 눈을 감는다. 조금 후면 우리는 매일 밤 그러하듯이, 우리의 조그만 매트리스 위에서 함께 잠이 들 것이다. 창문 밖 종려나무들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 - P248

그렇지만 나는, 그 저녁,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후, 개수대가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의 가장자리에서 걸어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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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에는 교조 운동 같은 것은 서푼어치 가치도 안 되는 총리 선출보다 훨씬 더 중요하면 중요했지 못한 것은 아닌데 2000만의 늠름한 대변인들은 지금 명분이 서지 않는 감투 싸움에만 바쁘다. 이런 말을 하는 나는 교조원도 교원도 아니지만 혁명에 대한 인식 착오로 ‘과정‘의 피해자의 한 사람이 된 것만은 그들과 동일하다. 4월 혁명후에 나는 세 번이나 신문사로부터 졸시를 퇴짜를 맞았다. 한 편은 ‘과정‘의 사이비 혁명 행정을 야유한 것이고, 한 편은 민주당과 혁신당을 야유한 것이고, 나머지 한 편은 청탁을 받아 가지고 쓴 동시인데, 이것은 이승만이를 다시 잡아 오라는 내용이 아이들에게 읽히기에 온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 통과가 안 되었다. 그런데 이 동시를 각하한 H신문사는 사시(社是)로서 이기붕이까지는 욕을 해도 좋지만 이승만이는 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규가 있다는 말을 그 후 어느 글 쓰는 선배한테 듣고 알았다.
여하튼 시작(詩作) 15년간에, 그것도 두 달 사이에 세 편의 시를 퇴짜를 맞아 본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검열에 통과가 안 됐다면 싸우기라도 해 보겠지만 아는 친구들이 허다하게 있는 신문사에서 멱국을 먹었으니 하소연할 데도 없다. 아무튼 정치 하는 놈들이 살인귀나 강도같이 보이는 나의 편심증(偏心症)은 아직 손톱눈만큼도 치유될 기세가 없으니 초조하기만 하다.
1960.8.22. - P95

그런데 이런 집에도 양계를 하니까 돈이 있는 줄 알고 또 얼마 전에는 도둑까지 들었습니다. 잠을 자다가 떠들썩하는 소리가 나서 일어나 보니 여편네가 도둑이 들었다고 고함을 치고 있습니다. 도둑이 어디 들었느냐고 물으니 만용이(만용이란 닭 시중을 하는 앞서 말한 대학생)방 쪽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여편네와함께 계사 끝에 떨어져 있는 만용이 방 쪽으로 기어갔습니다. 어둠을뚫고 맞지도 않는 신짝을 끌고 가 보니 만용이는 도둑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도둑이라는 사람은 나이 50이 넘은 사나이였습니다. 헙수룩한 양복을 입고 외투는 입지 않고 만용의 방 밖에 서서, 무슨 동네에서 마을이라도 온 사람처럼 태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당신뭐요?" 하고 나는 위세를 보이느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나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도둑의 얼굴이 너무 온순하고 너무 맥이 풀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여보, 당신 이디 사는 사람이오? 이 밤중에 남의 집엔 무엇하러 들어왔소?" 말이 없습니다. ‘닭 훔치러 들어왔소?" 말이 없습니다. 여편네가 고반소"에 신고해야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도 말이 없습니다. 나는 버럭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흉기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아래위를훑어보았으나 그런 기색도 없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거 보세요.
이런 야밤에…" 하고 존댓말을 썼습니다. 그제서야 사나이는 "백번죽여주십쇼. 잘못했습니다!" 하고 비는 것이었습니다. 말투가 퍽 술이취한 듯했으나 얼굴로 보아서는 시뻘건 얼굴이 술이 취해 그런지 추위에 달아 그런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즉각적으로 이 사람이 밤길을 잃은 취한(醉漢)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이어디요?" 쑥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우이동입니다"
"우이동 사는 사람이 왜 이리로 왔소?"
"모릅니다....... 여기서 좀 잘 수가 없나요?" 이 말을 듣자 나는 어이가 없어졌습니다. "여보, 술 취한 척하지 말고 어서 가시오." 도둑은 발길을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두서너 발자국 걸어 나가더니 다시 뒤를 돌아다보고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하고 태연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나는 도둑의 이 말이 무슨 상징적인 의미같이 생각되어서 아직까지도 귀에 선하고, 기가 막히고도 우스운 생각이 듭니다. 도둑은 철조망을 넘어왔던 것입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이 말은 사람이 보지 않을 제는 거리낌없이 넘어왔지만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다시 넘어 나가기는 겸연쩍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구태여 갖다 붙이자면 내가 양계를 집어치우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장면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도둑은 나고 나는 만용이입니다. 철조망을 넘어온 나는 만용이에게 ‘백번 죽여주십쇼, 백번 죽여주십쇼‘ 하고 노상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하고 떼를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964.5. - P120

장마가 지면 강물 내려가는 모양이 장관이다. 황갈색으로 변색한강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내려가는 것을 보면 사자 떼들이 고개를 저으면서 달려 내려가는 것 같다. 높아진 수위는 사자의 등때기처럼 실거린다. 군데군데 하얀 거품이 이는 것은 숨 가쁜 사자의 입거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것은 수천 마리의 사자의 떼가 아니라 한 마리의 사자같이 보이기도 한다. 한 마리의 사자. 그러면 저 거센 물결들은 사자의 휘날리는 머리털이라고도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그 사자는 머리 쪽과 궁둥이 쪽이 서로 늘어나서 동서로 잡아당긴 엿가락처럼 자꾸자꾸 늘어나기만 하고, 그 신장되는 등 위를 물결이 흘러 내려가는 것 같다. 혹은 뛰어가는 사자는, 꿈속에서 달려가는 것처럼 열심히 달려가기는 하지만 밤낮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같기도 하다. 이렇게 계속되는 연상을 주는 강물은 삼라만상의 요술을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지만, 나는 어느덧 연상에도 금욕주의자가 되었는지 너무 복잡한 연상은 삼가기로 하고 있고, 그저 장마철에 신이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사자가 달려가는 것 같다는 정도의 상식적연상으로 자제하고 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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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있다고 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나의 중요한 또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 생각에,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시킬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로버트는 내가 거의 십 년 동안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가끔은 그에게 말을 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십 년이 되었고, 그동안 우리는 유산, 파산에 가까운 재정 상태 그리고 시부모님의 죽음을 지나왔다. 이제 나는 우리가 함께 헤쳐나갈 수 없는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반응이 아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그 사실을 내면화하여 속으로만 삭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를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그는 아마도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을 테고, 내게서 로버트에 대한 감정을 듣는다고 해도 내게 상처주지 않을 방법만 생각할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렇지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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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몬토사우루스와 트리케라톱스 무리는 들판을 가로질러 이동하면서 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식물을 주로 먹는다. 덕분에 비교적 좁은 지역 안에서도 식물의 종류와 밀도가 다른 땅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생긴 모자이크 서식지는 생명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 P202

새로 생긴 숲은 살아남은 공룡과 다른 동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새로운 생태계는 멸종 이전의 세계와는 달랐지만 다양성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지구가 대재앙에서 치유되면서 자연의 회복력이 온전히 드러났다.
나는 공룡이다. 우리가 대멸종 이후에야 새롭게 등장한 게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생존을 위해 진화했다. 그 덕분에 6600만 년 전 다섯 번째 대멸종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부리와 비대칭형 깃털이 있는 작은 공룡이다. 덕분에 나는 날 수 있다. 거대한 티라노사루우스가 사라진 이 생태계에 아직 새로운 지배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차피 큰 놈들은 존재하지 않고 나는 하늘을 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혁신의 결과다. 처음에는 체온을 조절하고 짝에게 과시하기 위해 쓰던 깃털로 하늘을 날 수 있게 진화했다. 양력과 기동성을 제공하는 양 날개를 갖추었다. 나는 몸을 가볍게 하는 데 성공했다. 뼛속을 비워 몸무게를 줄이고 비행 효율을 높였다. 선조들이 주로 거대한 목을 받치는 데 사용했던 기낭, 즉 공기주머니를 호흡에 사용해 비행에 필요한 높은 신진대사를 감당하게 했다. 의외로 결정적인 변화는 부리였다. 대재앙이 닥치자 부리는 매우 유용했다. 다양한 먹이원을 이용할 수 있었다. - P212

그렇다면 공룡은 아니라도 파충류이기는 할 것 같은가? 놀랍겠지만 나는 파충류도 아니다. 단궁류에 속한다. 단궁이란 구멍이하나 있다는 뜻이다. 무슨 구멍일까? 두개골 뒷부분에 양쪽으로 난측두창이라고 하는 구멍을 말한다. 여기에 구멍이 없으면 무궁류다. 거북이가 그렇다. 구멍이 2개 있으면 이궁류다. 익룡과 공룡이 여기에 속한다. 공룡이 여기에 속하니 새도 여기에 속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뿐만 아니라 악어, 뱀, 도마뱀도 이궁류다. 거북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파충류와 조류가 이궁류인 셈이다.
단궁류는 구멍이 하나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단궁류는 트라이아스기 대멸종기, 즉 네 번째 대멸종 때 몰살되었지만 살아남은 것들은 나중에 포유류로 진화한다. 이궁류와 단궁류 사이에는 결정적인차이가 있다. 바로 이빨의 종류다. 공룡 같은 이궁류는 이빨이 다 똑같이 생겼다. 모양이 한 가지다. 그런데 단궁류는 이빨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 여러 가지 이빨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궁류, 단궁류, 이궁류 중 어디에 속할까? 자기치아를 보면 답이 나온다. 사람의 치아는 여러 가지 모양이다. 그렇다. 인간은 단궁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디메트로돈은 공룡처럼 생겼지만 공룡보다는 사람에 더 가까운 동물이라는 뜻이다.  - P234

페름기 말기는 식물상이 매우 다양하고 풍요로운 시절이다. 윗부분이 붓처럼 생긴 양치식물 속새는 습한 지역에 번성하고 있다. 무수한 양치식물이 숲 바닥에 카펫처럼 깔려서 초식동물의 먹이가되고, 나무고사리와 겉씨식물들이 햇빛을 받기 위해 높이 뻗어 있다. 대부분의 겉씨식물은 침엽수다. 현대 소나무와 전나무의 조상뻘 되는 나무들이 우뚝 솟아 있다. 바늘처럼 생긴 잎과 솔방울은 점점 건조해지는 기후에서도 잘 버티고 있다. 노란 잎이 아름다운 은행나무도 숲 구성원 가운데 하나다. 아직 활엽수는 등장하지 않은시기지만 은행나무는 있다. 왜냐하면 은행나무는 활엽수가 아니라 침엽수이기 때문이다. 넓은 은행잎을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만져보면 무수히 많은 바늘이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236

나는 세 번째 대멸종의 목격자로서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남긴다. 최고 포식자는 반드시 멸종한다. 또 최고 포식자가 아니라고하더라도 생물량이 가장 많았던 생물은 반드시 멸종한다. 보통 두가지를 겸하는 일은 없다. 먹이 피라미드의 가장 위를 담당하는 최고 포식자는 생물량이 적고, 생물량이 가장 많은 생물은 먹이 피라미드의 아래쪽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아는가? 최고 포식자이면서 생물량도 가장 많은 별난 생명이 등장할지. 만약 그렇다면 그 생물 좋은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생명일 것이다. 가장 성공적이지만 대멸종의 시기에는 가장 파멸적인.... - P249

광합성의 결과는 무엇인가? 첫 번째 결과는 화학에너지 생성이다. 태양에너지가 아무리 많아봤자 동물들은 사용하지 못한다. 태양에너지는 오로지 광합성을 하는 박테리아와 식물의 몫이다. 식물광합성이 늘어나자 태양에너지가 어마어마한 양의 화학에너지로 전환되어서 식물이 번성했고 그 덕분에 동물들이 활용할 에너지가 풍성해졌다.
광합성의 두 번째 결과는 산소 기체 생성이다. 식물이 만들어놓은 화학에너지를 태워서 생활에너지 ATP로 전환하는 데 꼭 필요한게 산소다. 동물이 몇 분만 숨을 쉬지 못해도 죽는 이유가 바로 생활에너지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석탄기 숲은 산소를 엄청나게 많이 생산했다. 대기 중 산소 농도가 35퍼센트에 달했다. 이게 어느 정도냐고? 현대 대기의 산소 농도가 21퍼센트라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 P258

삼엽충이 고생대 바다에서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을 개발했다. 눈이 생기기전 고생대 동물의 삶은 매우 힘들었다. 동물들은 오로지 촉각과 화학적 신호에 의존해 먹이를 찾고 위험 요소를 피했다. 솔직히 말하면 찾고 피하는 게 아니라 거의 우연에 의존해야 했다. 입을 벌리고다니다가 누군가 입에 들어오면 맛있게 먹고, 내가 누군가의 입에들어가면 재수 없게 죽는 거였다. 우리 삶에는 목표라는 게 없었다.
그런데 자연사에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생명에게 눈이 열리자 각자의 삶에 목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도망가고 누구를 쫓아가야 하는지 한눈에 깨달았다. 눈이 새로운 우주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세상이 갑자기 선명하고 활기차게 보였다. 멀리서 다가오는 포식자를 볼 수 있었고, 돌틈에 숨어 있는 작은 먹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눈을 통해 동료들과 신호를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생명의 색깔과 모양이다양해졌다. 그리고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눈이 등장하자 생명의다양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생명의 빅뱅이 일어났다. - P295

다윈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눈의 진화에 있어 그럴듯한 중간단계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각 단계는 기능적이어야 하고 생명체에선택적 이점을 제공해야 했다. 완벽하지 않고 어정쩡하게 부분적으로만 형성된 눈이 어떻게 유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자연 선택을 통해각 발달 단계가 어떻게 보존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과제였다.
다윈은 자연 선택이 어떻게 목적에 완벽하게 적응한 기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이렇게 복잡한 기관이 의도적인설계 없이 생겨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처럼보일 정도였다. 이러한 우려에도 다윈은 눈의 진화가 자신의 이론에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구심에 대해 몇 가지 요점을 제시했다.
다윈은 현생 생물의 눈의 복잡성 수준이 다양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요즘도 단순한 빛에 민감한 세포부터 척추동물의 복잡한 카메라 같은 눈까지 자연계에는 다양한 수준의 눈이 존재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서로 다른 수준의 시력을 제공하는 수많은 중간 형태가 존재할 수 있는 진화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다윈은 빛에대한 감도나 움직임을 감지하는 능력이 조금만 향상되어도 생존에상당한 이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눈의 진화에 있어 각 중간 단계는 유익할 수 있으며 자연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윈은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변화의 힘을 강조했다. 작은 점진적 개선이 쌓여서 매우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단순한 감광 패치를 점진적으로 개선하면 결국 잘 발달된 눈을 만들 수 있다. 다윈은 자신의 이해와 당시의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는 미래의 연구와 발견이 눈과 같은 복잡한 기관의 진화에 대한더 많은 통찰력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역시 다윈의 후예들은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다양한 형태의 눈이 고도의 복잡성을 지니게 된 배경은 단순하다. 지구에는 태양에서 날아온 빛이 매 순간 빗발치듯 쏟아지기 때문이다. 빛은 색이 있는 물질에 부딪히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물질을 구성하는 분자는 형태가 바뀌는데, 이 과정에서 약간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그 에너지는 어떤 식으로든 세포에 영향을 주고 여기서 시각이 시작된다. - P303

일단 눈이 생기고 나자 가장 큰 선택압력으로 작용했다. 생존을 위한먹이 동물의 첫 번째 법칙은 잡아먹히지 않는 것이다. 먹이는 대개 눈이 양쪽에 있다. 선명한 상을 형성하지는 못해도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반대로 포식자의 첫 번째 생존 원칙은 먹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다. 포식자나 경쟁자에 대한 걱정은 그다음이다. 사냥을 위해서는 정확한 거리 측정이 필요하다. 이들은 한 쌍의 눈을 앞쪽에 배치했다.
눈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모든 동물은 빛에 적응해야 했다. 벌레같았던 동물들은 갑옷을 두르고, 경고색을 과시하고, 위장 형태와 위장색을 띠거나, 추적하는 적을 따돌릴 수영 실력을 갖춰야 했다.
입은 그다음이었다. 원시 삼엽충에게는 먹이를 잡을 튼튼한 다리도 물어뜯을 단단한 턱도 없었다. 원시 삼엽충은 자기 주변을 유유히 떠다니는 이웃들을 보면서 딱딱한 부분을 가져야 한다는 선택압력을 받았다. 결국 원시 삼엽충은 명실상부한 삼엽충이 되었고, 다른 동물들 역시 갑옷을 갖추기 시작했다. 캄브리아기에 갑자기 나타나서 다윈을 곤혹스럽게 했던 화석생물들의 등장은 결국 눈의 탄생으로 촉발된 것이다. - P306

눈의 조상은 누구일까?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눈은 하나의 조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려면 눈이 있는 모든 동물이 진화의 계통수에서 갈라져 나오기 전에 눈이 진화했어야 한다. 조상 눈이 있던 동물은 삼엽충(절지동물)이나 갑오징어(연체동물), 사람(척삭동물)처럼 눈이 있는 모든 동물의 조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눈은 캄브리아기가 시작되기 수억 년 전에 이들 동물이 갈라설 때 진화했어야 한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먹장어와 사람은 모두 척삭동물에 속한다. 먹장어처럼 원시적인 척삭동물에게는 눈이 없는데, 그보다 훨씬 늦게 생긴 사람에게 눈이 있다면, 척삭동물 최초의 눈은 진화계통수의 척삭동물 가지 안에서 진화했다는 얘기가 된다. 눈의 기원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 것이다. 삼엽충이나 갑오징어나사람의 눈은 진화의 다른 시점에 각각 별개로 진화한 것이다. 현대연구에 따르면 눈은 적어도 40회, 많으면 60회까지 동물계의 여러부분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진화했다. 우리 삼엽충의 눈과 그대 인간들의 눈은 기원이 다르다. - P307

미토콘드리아의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진핵생물의 건강과 기능에 여전히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세포 안에서에너지를 만드는 발전소 역할을 한다. 근육, 심장, 뇌처럼 에너지수요가 많은 조직의 기능에 특히 중요하다. 미토콘드리아의 영향력은 기본적인 기능을 넘어 건강과 수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즉 미토콘드리아는 에너지 생산, 물질대사, 세포 조절에 있어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주요 법도 바꾸었다. 호주제란 가족 집단의 중심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남계혈통을 통해 대대로 이어지는 제도다. 호주제에 대한 찬반이 수년 동안 지속되고 있을 때 내가 논의의 중심에 등장했다. 미토콘드리아는 고유의 유전자를 가지고있는데, 미토콘드리아는 난자를 통해서만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최재천 교수가 법률 토론의 현장에 소개한 것이다. 즉 후손은 수컷보다 암컷에게서 더 많은 유전자를 받는다는 사실이 널려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여론의 흐름이 바뀌면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통해 2008년 1월 1일부터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 P325

달 - (더욱 빛나며) 지구 냉각이 계속되면서 자네 바다가 깊어지더군. 역시 깊은 바다가 생기니까 훨씬 안정되어 보였어.
그런데 말해보게. 생명을 탄생시킨 화학작용의 핫스폿이어디였나? 정말로 그 깊은 바다에 있는 열수분출구가 맞는가?
바다 -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열수분출구는 열과 미네랄이 풍부해서 유기 분자 합성을 위한 완벽한 공장이야. 여기가 초기 생명의 요람이 되었지.
달 -
(생각하며) 열수분출구 주변은 극한의 조건이잖아. 깊은 바다니 수압이 매우 높을 테고 수압이 높으면 끓는점도 당연히 높아져서 아주 뜨거운 액체에서 온갖 화학작용이 일어났을 거야. 그러다가 생명체들이 만들어졌겠지. 그러고보면 심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을것 같아.
바다 -
(자랑스럽다는 듯이) 맞아. 열수분출구는 영양분이 풍부한환경이었어. 여기서 이런저런 생명의 시도들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모든 생명의 공통조상인 루카가 등장했어. 루카에서 생명의 나무가 가지를 뻗기 시작했지.
그것도 벌써 38억 년 전의 일이 되었네. 정말 까마득한 옛날이지
달 -
(고개를 끄덕이며)생명 진화의 과정에 내 역할도 잊지 말아줘. 내가 중력으로 지구의 물을 섞어 영양분과 에너지가광활한 지구 공간에 골고루 퍼지도록 했잖아. - P333

달(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뭘 어떻게 해? 아예 단단한 껍질을만들면 되지. 삼엽충처럼 말이야. 그게 바로 캄브리아기대폭발이잖아. 단단한 껍데기가 생기니까 산소가 마음대로 확산되지도 않고 단단한 껍데기가 있으니 이제부터는몸을 얼마든지 더 키울 수도 있게 된 거지.
바다(부드럽게 소용돌이를 만들며) 맞아. 산소 농도가 높아질수록더 튼튼하고 안전한 구조를 만들면서 산소의 독성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동시에 산소호흡을 해서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난 거지. 아마 지구에 산소가없었다면 지구는 결코 아름답지 못할 거야. 마치 화성과같은 붉은 행성으로 남았겠지.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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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포로 생활*

세계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는 나의 욕망과 철학이 나에게 있었다면 그것을 만족시켜 준 것이 이 포로 생활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책에서 읽고 간혹 활동사진에서 볼 정도인 포로생활에 아무 예비지식도 없이 끌려들어 가게 한 것도 6.25 동란이 시퀸 일이었지만 6.25 동란이 일찍이 우리 민족사상에 드문 일이었다면이 위대한 50여개국의 소위 UN 포로로서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버리고 제네바 협정의 통치 구역으로 용감무쌍하게 몸을 던지게 되었다는 것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지나친 괴변의 하나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 P33

포로들에게 있어서 인간들에 대한 존경과 신망은 확실히 정상 상태를 넘어서 병적인 정도에까지 이르는 수가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 피난민이건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거러지건 아니 수용소 철망 밖에 있는 것이라면 소나 망아지 같은 짐승까지 포로들에게 있어서는 황홀하고 행복스러운 구경거리였다. 한 걸음이라도 좋으니 철창 밖에 나가 보았으면! 이것이 포로들의 24시간을 통하이 잊혀지지 않는 몸에 박힌 염원이요 기도였다. - P36

나는 참다 참다 못해서 탄식을 하고 가슴이 아프다는 핑계로 다시입원을 하여 거제리 병원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내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임 간호원이 비 오는 날 오후에 브라우닝 대위를 데리고 찾아왔다. 나는 울었다. 그들도 울었다. 남겨 놓고 간 동지들은 모조리 적색 포로들에게 학살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아주 병이 들어 자리를 눕게 되었다.
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나는 미인들에게 응원을 간청하였으나그들은 상부의 지시가 없이는 독단으로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나는 국군 낙오병 포로로 명망이 높은 반공 투사요 우국지사인 황 중위를 찾아가 보고 비밀 선봉대를 조직하려고 결심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시작하였던 것이다. 실로 기구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옳은 것을 위하여는 싸워야 한다.
나의 시(詩)는 이때로부터 변하여졌다. 나의 뒤만 따라오는 시가 이제는 나의 앞을 서서 가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모두가 무서운 일이요. 꿈결같이 허무하고도 설운 일뿐이었다. 이것이 온전히 연소되어 재가 되기까지는 아직도 먼 세월이 필요한 것같이 느껴진다.
《해군》 (1953.6.) - P37

이미 나는 나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었다. 절망이 완전히 그의 테두리를 만들기까지의 시간이라는 것은 비할 수 없는위험한 요동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불안한 어머니의 얼굴, 불안에의신앙, 가족에의 신앙, 눈물이 나올 여유조차 없는 절망, 그래도 가족을만나고 싶었다. 어머니만 만나면 무슨 좋은 지혜가 생길 것도 같았다.
기어코 순경의 충고를 어기고 억지로 나는 서대문 파출소를 나왔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는 나의 심장을 앗아갈 듯이 넓기만 하였다. 이대로 어디로 달아나 버릴 수 없는가. 이런 무서운 생각조차 들었다. 조선호텔 앞을 지나서 동화백화점을 지나 해군본부 앞을 지났을 때에 지프차 옆에서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나의 얼굴을 향하여 플래시의 광선이 날아왔다.
"어디로 가시오?"
"집에 갑니다."
나는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어디서 오시오?"
"북에서 옵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
나는 한 발 쭈욱 앞으로 다가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실은 의용군에 잡혀갔다가 달아나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집은 바로 요 앞이올시다. 방금 서대문 파출소에 들려서 자초지종을 고백하고 오는 길입니다. 집에 가서 한번 가족들 얼굴이나보고 자수하겠습니다."
라고 애걸하였다.
"응 그러면 당신은 ‘빨치산‘이로구료."
그는 대뜸 이렇게 말을 하고 권총을 꺼내 들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번쩍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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