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금방 어두워지고 다시 암흑의 세계는 닥쳐왔다. 기차 안에는 공습 때문에 물론 불을 켜지 않는 것이다. 성냥도 손으로 가리고 켜거나 걸상 아래에 감추고 켜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기차가 가는 중에도, 대원들은 마음을 긴장하고 비행기 떠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억지 같은 명령이 내린다. 순오도 그것이 되는 일인가 하고 몇 번이나 시험을 해 보았지만 폭포 같은 기관차 달려가는 소리 속에 비행기 떠 오는 소리란 모깃소리보다도 더 가늘은 것이었다. - P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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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자랑이라면 ‘프린스‘ 다방에서 오래 앉아 책을 읽었다는 것.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좀 오래 앉아 있을 만한 인내심이 생겨야 할터인데
이것은 강인한 정신이 필요하다.
오래 앉아 있자!
오래 앉아 있는 법을 배우자.
육체와 정신과 통일과 정신과 질서와 정신과 명석과 정신과 그리고 생활과 육체와 정신과 문학을 합치시키기 위하여 오래 앉아 있자! - P676

10월 6일
시 「잠꼬대」를 쓰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썼는데, 현경한테 보이니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언론 자유‘에 대한 고발장인데, 세상의 오해 여부는 고사하고, 현대문학지에서 받아줄는지가 의문이다. 거기다가 거기다가 조지훈도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는가?
* 이 작품의 최초의 제목은 「金日成萬歲」. 시집으로 내놓을 때는이 제목으로 하고 싶다.
미(美)는 선(善)보다 강하다. - P722

10월 18일
시 「잠꼬대」를 <자유문학》에서 달란다. 「잠꼬대」라고 제목을 고친 것만 해도 타협인데, 본문의 ‘金日成萬歲‘를 ‘김일성만세‘로 하자고 한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고치기 싫다. 더 이상 타협하기 싫다.
하지만 정 안 되면 할 수 없지.‘ ‘부분만 언문으로 바꾸기로 하지.
후일 시집에다 온전하게 내놓기로 기약하고.
한국의 언론 자유? Goddamn이다! - P723

 그중에서도 고은을 제일 사랑한다. 부디 공부 좀 해라. 공부를 지독하게 하고 나서 지금의 그 발랄한 생리와 반짝거리는 이미지와 축복받은 독기가 죽지 않을 때, 고은은 한국의 장 주네가 될 수 있다. 철학을 통해서 현대 공부를 철저히 하고 대성하라. 부탁한다.
1965년 12월 24일 - P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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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의 「나의 배후」(《문학》)가 읽을 만하다.

나의 등뒤에도
넘치는 물빛 세계.
허지만 그것은
실없이 주는 젊은 날의 꿈.
누구나
등뒤는 허전하다.
적막하게 건조한
운명의얼룩을 느낄 뿐.
나의 배후에는
아무도 없다.
- P621

이렇게 되면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체취란 뭐요?" 하고 필자의 체취의 설명이 미흡한 테에대한 공박을 오히려 받게 될 것 같다. 여기에 대한 성급한 답변으로,
이들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육성(肉聲)이 모자란다는 말을 나는 감히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당신이 말하는 육성이란 어떤 거요?" 이에 대해서는 나의 말이 아닌 그들의 동인의 한 사람인 김주연의 명석하고 진지한 시론 「시와 진실」에 나오는 말을 빌려 하자면, 그것은 ‘진실의 원점‘이다. 그는 ‘진실의 원점으로 가려는 피나는 고통 앞에서 언어는 부활하는 것이며, 언어와 시와 진실은 모두 하나의 디멘션에 늘어서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평자가 <사계> 동인들의 작품에서 일률적으로 받은 인상은 ‘언어‘의 조탁에 지나치게 ‘피나는 고통‘을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사계》의 동인들이 우리 시단의 신진들 중에서 가장 교양 있는 젊은 역군들이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내가 요청하는 이런 초보적 시의 지식을 안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이 시는 지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시를 지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식으로쓰게 되는 것 같은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의 원인이 나변에 있는가 하는것까지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나는 그들에게 감히 말한다. 고통이 모자란다고! ‘언어‘에 대한 고통이아닌 그 이전의 고통이 모자란다고. 그리고 그 고통을 위해서는 ‘진실의 원점‘ 운운의 시의 지식까지도 일단 잊어버리라고. 시만 남겨놓은절망을 하지 말고 시까지도 내던지는 철저한 절망을 하라고. 그러나 아직도 이들은 젊고 이들은 이제부터 노력할 사람들이다. - P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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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와는 대극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고 보는 ‘참여파‘의 신진들의 과오는 무엇인가. 이들의 사회 참여 의식은 너무나 투박한 민족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미국의 세력에 대한 욕이라든가, 권력자에 대한 욕이라든가, 일제 시대에 꿈꾸던 것과 같은 단순한 민족적 자립의 비전만으로는 오늘의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는 독자의 감성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단순한 외부의 정치 세력의 변경만으로 현대인의 영혼이 구제될 수 없다는 것은 세계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현대의 예술이나 현대시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 시가 상대로 하고 있는 민중-혹은 민중이란 개념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것은 세계의 일환으로서의 한국인이 아니라 우물 속에 빠진 한국인 같다. 시대착오의 한국인, 혹은 시대착오의 렌즈로 들여다본 미생물적 한국인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라보는 즉, 작가가 바라보는 군중이고 작가의 안에 살고 있는 군중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와 함께 앞을 향해 세차게 달리고 있는 군중이 아니라, 작가는 달리지 않고 군중만 달리게 하는 유리)에서 생기는 현상인 것이다. 오늘의 민중을 대변하는 시는 민중을 바라보는시가 아니다. - P464

그런데 이번에는 나의 상상은 다시 비약해서 이 메모를 다음과 같은 언어론으로 고쳐 본다.

모든 언어는 과오다. 나는 시 속의 모든 과오인 언어를 사랑한다. 언어는 최고의 상상이다. 그리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잡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그래서 최고의 상상인 언어가 일시적인 언어가 되어도 만족할 줄 안다.

이런 즉흥적인 수정의 유희를 하는 끝에 첫머리의 것까지도 고쳐보려면 이렇게 고칠 수가 있다.

지금의 언어도 좋고 앞으로의 언어도 좋다. 지금 나도 모르게 쓰는 앞으로의 언어. - P468

이런 언어의 로테이션은 어느 시대이고 있는 일이지만, 다만 오늘의 시대는 박자가 빠른 시대라 그에 따라서 그 회전도가 갑자기 빨라져서 눈에 뜨일 따름이고, 때에 따라서는 비명까지도 날 정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경우에는 일제 시대의 저해로 회전을 하지 못하고 있던 낱말들이 요즘에 와서 새로 발동을 시작하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이것들의 처리가 힘이 들 때가 많다. 국민학교 아이들의 교과서나 자연학습도감 같은 데에 나오는, 동물, 식물, 광물 이름 같은 것 중에 그런 것이 많다. 이를테면 ‘바랭이풀‘ 같은 것도 보기는 많이 본 풀인데도 일단 글 속에 써 보려고 하면 어쩐지 서먹서먹하다. ‘개똥지빠귀‘란 새 이름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실감이 안 나는 생경한 날말들을 의식적으로 써 볼 때가 간혹 있다. ‘제3인도교‘의 ‘과오‘를 저지르는 식의 억지를 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구태여 말하자면 진공(眞空)의 언어다. 이런 진공의 언어 속에 어떤 순수한 현대성을 찾아볼 수없을까? 양자가 부합되는 교차점에서 시의 본질인 냉혹한 영원성을구출해 낼 수 없을까? - P470

그러면 진정한 아름다운 우리말의 낱말은? 진정한 시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 있는 낱말들이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반드시 순수한 우리의 고유의 낱말만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이 점에서 보아도 민족주의의 시대는 지났다. 요즘의 정치 풍조나 저널리즘에서 강조하는 민족주의는 이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세력에 대한 대칭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실생활이나 문화의 밑바닥을 정밀경(精密鏡)으로 보면 민족주의는 문화에 적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언어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요. 그 생활은 민중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민중의 생활이 바뀌면 자연히 언어가 바뀐다. 전자가 주(主)요. 후자가 종(從)이다. 민족주의를 문화에 독단적으로 적용하려고 드는 것은 좋을 가지고 주를 바꾸어 보려는 우둔한 소행이다. 주를 바꾸려면 더 큰 주로 발동해야 한다.
언어에 있어서 더 큰 주는 시다. 언어는 원래가 최고의 상상력이지만 언어가 이 주권을 잃을 때는 시가 나서서 그 시대의 언어의 주권을 회수해 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잠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이 수정의 작업을 시인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상상인 언어가 일시적인 언어가 되어서 만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름다운 낱말들, 오오 침묵이여, 침묵이여.
1966. - P472

좌우간 이런 작가들은 대부분이 제각기의 창(窓) 앞에 서서 "모든창은 신화의 모양을 취하거나, 아니면 사실의 모양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창은 이러이러한 모양으로 생겼어요." 하고 말함으로써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1966. - P479

초현실주의 시대의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는 실존주의 시대에 와서는 실존과 이성의 관계로 대치되었는데,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참여시라는 것의 형성 과정에서는 이것은 이념과 참여 의식의 관계로 바꾸어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기형적인 정치 풍토에서는 참여시에있어서의 이념과 참여 의식의 관계가 더욱 미묘하고 복잡하며, 무의식과 의식의 숨바꼭질과는 다른 외부적인 터부와 폭력이 개입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나라의 오늘의 실정은 진정한 참여시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쁘게 말하면 참여시라는 이름의 사이비 참여시가 있고, 좋게 말하면 참여시가 없는 사회에 대항하는 참여시가 있을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참여시에 있어서는 초현실주의 시에서 의식이 무의식의 중인이 될 수 없듯이, 참여 의식이 정치 이념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은 행동주의자들의 시인 것이다. 무의식의 현실적 증인으로서, 실존의 현실적 증인으로서 그들은 행동을 택했고 그들의 무의식과 실존은 바로 그들의 정치 이념인 것이다. 결국 그들이추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불가능이며 신앙인데, 이 신앙이 우리의 시의 경우에는 초현실주의 시에도 없었고 오늘의 참여시의 경우에도없다. 이런 경우에 외부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외부와 내부는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에서 합치되는 것이다. - P488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을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 ‘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P498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서방측의 자유세계‘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서방즉 자유세계의) 시민들의 대부분은 군거하고, 인습에 사로잡혀 있고, 순중하고, 그 때문에 자기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싫어하고, 만약에 노예 제도가 아직도 성행한다면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도 싫어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혹은 지적 일치를 시민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의미에서, 이 세계가 자유를 보유하는 한 거기에 따르는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 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혼란‘은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깃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깃소리보다도 더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못한 말을. 그것을.
1968.4. - P502

하지만 이것을 무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근대적인 감상일 것이다. 고약한 취미의 불쾌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천박한 반응일 것이다. 분명히 모든 메멘토 모리는 냉수를 등골에 끼얹으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고, 냉수가 가장 유효한 순간에 끼얹어지게꾸며져 있다. 축제의 술이나 환성에 취해 들어가려는 마음에, 그것은한 조각의 정기(正氣)를 불러일으켜 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연회 행진의 중지를 바라는 소리는 아니다. 편안한 체념과 무위에의 유혹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각성된 생명을, 끊임없는 새로운 출발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의 악의가 깃들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기 위한 너무나도 자명한 기본적인 진실을 납득시키기 위한 양념 정도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종류의 진실을 확보하기 위해서 먼 고대의 장군들은 노예를 사용하고,
왕후들은 일부러 입이 건 어릿광대를 고용했다. - P520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설명은 발언이 아니다. 그리고 설명이 아닌 발언을 하기 위해서는 사상과 사상의 여과가 필요하다. 우리의 현대시가 겪어야 할 가장 큰 난관은 포즈를 버리고 사상을 취해야 할 일이다. 포즈는 시 이전이다. 사상도 시 이전이다. 그러나 포즈는 시에 신념 있는 일관성을 주지 않지만 사상은 그것을 준다. 우리의 시가 조석으로 동요하는 원인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시의 다양성이나 시의 변화나 시의 실험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영해야 할 일이다. 다만 그러한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아니 되며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지성인으로서의 시인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있어야 한다. 이러한, 누구나 다 아는 소리를 새삼스럽게 되풀이하지않으면 아니 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시단의 너무나도 많은 현대시의 실험이 방황에서 와서 방황에서 그치는 너무도 얄팍한 포즈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 P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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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협박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연구서 죽음과 죽어감』(1971)에서 불치병이라는 진단에 반응하는 다섯단계라는 유명한 모델을 선보였다. 첫 번째 단계는 부정이다.
부정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태도다(‘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두 번째 단계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어 터지는 분노다(‘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세 번째 단계는 사실을 어떻게든 미루거나 축소시키려는 타협의 태도다("적어도 애들이 학교 마치는 것은 보게해줘). 네 번째 단계는 우울증이다(성적 관심의 급감, 공허한 감정, ‘어차피 죽을 텐데 그런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체념과 수용이다(‘어차피 내가 바꿀 수있는 게 없구나. 준비라도 잘 해두자‘). 후에 퀴블러 로스는 이 다섯 단계를 개인이 겪는 모든 비극적인 상실 경험(실직, 사랑한 사람의 죽음, 이혼 또는 약물중독 등)에 적용했고, 아울러 각 단계가 반드시 같은 순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모든 당사자가 다섯 단계를 고스란히 거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 P7

슬로터다이크는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개방과 정복을 노릴뿐 아니라 안과 밖을 가르는 독자적 세계를 목표로 한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곧 개방성과 폐쇄성이라는 두 측면은 서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전 세계에 철저한계급 분리를 선포했다. 이로써 내부 영역에서 보호받는 계급과 그 보호권 바깥에 있는 계급으로 분리되었다.
파리 테러 공격과 물밀 듯 몰려오는 난민 행렬도 우리의 지붕 밖 세상이 얼마나 폭력으로 물들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내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바깥세상은 아주 멀리 떨어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들일 뿐이다. 그리고 결코 우리현실의 일부가 아닌 듯 다루는 텔레비전 뉴스로만 접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지붕 밖 모든 것을 장악한 이 잔혹한 폭력을 온전히 의식해야만 한다.- 폭력은 종교, 인종, 정치에 그치지 않고 섹스의 영역까지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 P10

유럽으로 밀려오는 가난한 난민에게 공감을 가져달라는 호알고 있다"
소만으로는 왜 충분하지 않은지는 이미 1세기 전 오스카 와일드가 밝힌 바 있다. 에세이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서두에서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인간은 누군가의 생각보다는누군가의 고통에 훨씬 더 쉽게 공감을 느끼는 법이다."
그들은 끔찍한 가난과 끔찍한 추레함과 끔찍한 굶주림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모든 것들에 커다란 영향을받는다. 인간의 감정은 지성보다 훨씬 더 빨리 자극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람들은 방향이 잘못되긴 했어도 훌륭한 의도로,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매우 감상적으로 자신들이 목격하는 악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임무를 스스로에게부여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처방은 질병을 치유해주지못한다. 처방은 병을 연장시킬 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처방은 질병의 일부인 셈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의생을 유지시킴으로써, 혹은 매우 진보적인 한 학파의 경우처럼 가난한 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빈곤의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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