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마지막 날이니 거꾸로 가도 될 듯했다. 시간이 많이 허비되고 산업단지 고객은 출근 전이라 건너뛰었다가 나중에가야 하는데도 상관없었다. 갑자기 여유로워졌다. 천대받던 빈털터리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듯 나는 시간을 흥청망청 보복적으로 썼다. 오랫동안 일분일초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다. 나는 늘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고 시간표에 따라 다음 목적지를 아등바등 쫓아가기만 했다. 그제야 문득 1년 넘게 일했는데도 아침 8~9시의 하이퉁우통위안과 치젠카이쉬안 단지를 보는 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존에 짜놓았던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단지로 들어서자 느낌이 달랐다.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내 일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시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만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적정과 불안 때문에 시도할 수 없었던 각도, 아무 목적 없는 각도에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정해진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면 책망하고 화내는 시급 30위안짜리 배송기계로 보지 않아도 됐다. - P159
물론 최악의 택배기사였던 것도 아니었다. 고객과의 소통을 싫어하고 잘하지 못하는 것 말고 다른 면에서는 지점에서 제일 뛰어나고 책임감 있었다. 내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일을 과하게 맡지 않아서였다. 돈을 더 벌려고 관리하기 어려울 만큼 넓은 지역을 맡은 뒤 툭하면 항의를 받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내 수입은 최고는커녕 지점 내 상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하지만 고객은 택배기사를 평가할 때 수입이 높은지 낮은지를 따지지 않았다.일을 마치기에 앞서 고객만 볼 수 있는 모멘트에 핀쥔택배의 폐업을 알리고 나도 더는 VIP숍의 물건을 배달하지 않는다고 썼다. 많은 고객이 위챗으로 내 서비스를 칭찬하며 오랫동안 고생했다고 감사의 글을 남겼다. 그 덕분에 줄곧 형편없었다고 생각했던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조금 높일 수 있었다. 한 고객은 "제가 만난 택배기사 가운데 가장 책임감 있었습니다"라고 남겨줬다. 특별한 인상을 받은 고객이 아니라서 그렇게 높이 평가해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그게 진심이라고 믿었다. 이미 업무가 종료돼 더는 만날일이 없으므로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 택배기사 경력을 과장 없이 한마디로 정의해보려 한다. 나는 몇몇 고객한테는 그동안 만났던 모든 택배기사 중 최고였다. - P164
Y는 우리가 잠시라도 한가한 걸 싫어하고 때로는 무의미한 일로 괴롭히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낌없이 음식을 대접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으려 했다. 다른 가게 사장들은 대부분 그러지 않았다. 다만 Y는 모든 면에서 과한 경향이 있었다. 과하게 요구하고 과하게 베풀고, 과하게 상처 주고 과하게 보상했다. 요컨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늘 끊임없는 격정 속에서 살았다. 그는 타고난 투사였다. - P186
‘인생은 나선형으로 상승한다‘는 말을 누가 제일 먼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절하고 생생한 비유다. 다만 상승의 폭이 무척 작고 속도가 느리다는 말이 빠져 있을 뿐. 인생은 등장하는 이름과 형태만 바뀔 뿐 늘 지난날이 반복되고 우리는 과거에 만났던 사람을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만난다. 타인은 나와의 관계만 있지, 개성은 없다. 예를 들어 여자친구를 사귀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전 여자 친구와 비슷하다는걸 발견하게 된다. 단순한 착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두여자는 이름과 외모가 달라도 ‘내 여자 친구‘를 연기하면서 그 배역에 맞춰 공통된 면모를 보여줄 뿐이다. 배우가 다르고 각본이 다를지라도 똑같은 인물을 연기하면 두 배우가 보여주는 모습이 상당히 비슷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면 다음번 여자 친구도 지금의 여자 친구와 별 차이가 없을 거라고확신하게 된다. 첫 여자 친구를 사귀었을 때 이미 마지막 여자친구와 만나고 있던 셈이다. 새로운 회사에서 만난 새로운 상사와 동료 역시 금세 이전의 상사와 동료로 변한다. 그들은 내 인생의 배우들일 뿐이라어떤 일을 겪고 어떤 대우를 받을지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의 구조, 그런 사람들은 나를 중심으로 그려진 원이고 그들의 반경이 바로 나와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연히 같은 반경 위에 여러 개의 원이 중첩될 수 있으며, 그건 평면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인생의 한 조각이다. 바로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한 사람을 좋아한다. 단순한 사람들은 표상을 꿰뚫어 보지 못해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살아가는 날들이 완전히 새로운 날이고 만나는사람들도 전부 낯선 사람이다. 그들은 똑같은 고통과 행복을 무수히 겪으면서도 매번 처음인 것처럼 느낀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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