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탐 철학 소설 11
윤지산 지음 / 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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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스파이가 되다]법가 사상을 정리한 한비자를 소설로 만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그 이기심을 통제해야만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강력한 법치는 민심을 돌리게 한다. 때론 엄격한 법도 중요하지만 때론 배려해주고 감싸주고 포용해야 한다. 기원전 진시황이 중국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법가 사상이 있었지만 그의 사후 20년 만에 멸망한 원인도 잔혹하고 엄격한 법이었다. 인간의 양면성을 잘 다스렸다면 진나라가 그리 허망하게 망했을까.

 

 

한비자가 활동하던 시절은 기원 전 250년경의 전국 시대였다. 그 시절은 어수선했고 많은 학자들이 출현했으며 많은 지략가와 영웅들이 득세하던 난세였다.

 

 

 

 

 

 

책에서는 순자가 남은 여생동안 집필을 위해 토굴로 들어가는 상황이 나온다. 초나라 난릉현에 제자들을 기르던 순자는 도관을 닫고 글을 쓰기 위해 토굴로 들어가게 되는데……. 토굴로 들어가는 상황이 좀 끔찍하다.

 

 

자신의 고향인 조나라 군사 30만 명을 생매장한 진나라를 보면서 인간의 잔학성에 치를 떨었던 순자. 그러했기에 그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악한 세상을 등지고 싶었던 걸까. 순자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집필하고자 마련했던 산속의 토굴은 단순한 토굴이 아니었다. 평소 무공이 대단했던 순자에게 한비(한비자)는 순자의 혈자리 두 곳을 눌러 무공을 쓸 수 없도록 했다니. 그동안 단련했던 무공을 혈자리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빠져나오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순자가 토굴로 들어가자 한비는 음식이 들어갈 작은 구멍만 남겨 두고 유일한 출입구를 막았다. (책에서)

 

 

스스로 세상과 유리된 채 토굴에 들어가는 순자의 모습이 섬뜩하다. 도를 얻게 되면 세상에 미련이 남지 않는 걸까.

 

 

스승 순자 밑에서 동문수학하던 한비(한비자)와 이사. 한 나라의 왕자로서 누리던 호사를 마다하고 스승을 따랐던 한비에 비해 이사의 출신은 보잘 것 없었다. 이사는 판단이 빠르고 행동이 과감했지만 한비는 이론에 밝고 문장이 좋았으나 너무 신중해 행동이 늦었다. 결단력 있는 이사와 글재주 있는 한비는 자신들의 타고난 능력대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데…….

왕자인 한비는 더 올라갈 곳이 없었지만 출신이 미천한 이사는 욕망이 컸던 걸까. 야망이 큰 이사는 순자를 떠나 진나라로 떠나고 만다. 승상 여불위 밑에서 진시황을 돕게 된 것이다. 

 

 

진나라 장양왕이 죽고 태자 영정(진시황)이 열두 살인 상황에서 승상 여불위가 권력을 잡았다. 책에서는 조나라의 장사치였던 여불위가 권력을 잡는 과정, 자신의 애첩인 조희와 왕 이인을 맺어주는 과정, 조희와 이인 사이에서 아들 영정이 태어나지만 영정은 오히려 여불위와 닮았다는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온다. 여불위가 진시황의 친아버지였다면 결국 아들에 의해 내쳐진 셈인데,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여불위도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삶이란 인과응보일까. 상인이라는 낙인을 지우고 싶어서 여불위의 <여씨 춘추>를 만든 이야기도 나오고…….

 

 

武는 몸을 지킬 수 있으나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

武는 잠시지만 文은 길고 영원하다. -순자

 

 

상앙의 비법을 배우려고 한비자는 진나라에 몰래 들어가는 과정은 무슨 첩보전을 방불케 한다.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첩자로 신고하는 진나라. 법이 엄격하여 가벼운 일에도 처벌하고 길거리에 재만 버려도 손목을 자르고, 신분이 확실치 않으면 첩자로 오해 받는 진나라는 겉보기에는 잘 정비된 나라였지만 숨 쉴 틈을 주지 않는 잔혹함은 인간성마저 변질된 나라였다니.

 

결국 한비자는 진나라에서 법가 사상을 펼치지만 동문수학했던 이사의 모함과 의심 많은 진시황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된다. 이사에 의해 음독자살을 선택한 한비자는 마지막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까. 누구보다 올바른 법치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던 한비자였지만 제왕들은  그의 사상을 실천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까. 한비자가 죽은 이후에 진시황이 후회를 했다지만 지나간 인재는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진나라 왕 영정이 이사를 고용해서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단기간에 이룰 수 있었지만 그가 죽은 후 진나라는 한의 유방에게 망하고 만다. 형벌이 너무 엄해서 마음이 떠나고 민심이 떠나고 그렇게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수련을 거치고 공부해야 사람은 착해진다. (중략) 본성대로 내버려두면 제 욕심만 채우려 들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무딘 쇠는 숫돌에 갈아야 날카로워지고, 굽은 나무는 도지개로 바로잡아야 곧아진다. 사람도 밖에서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욕망이 좇는 짐승이 된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법과 예의를 세우고 가르침을 남기셨다.(책에서)

 

 

전쟁을 통한 세계통일을 이루면 이후 전쟁은 사라진다고 했던 한비자. 철저한 형벌을 집행하면 범죄도 사라진다고 했던 한비자. 하지만  그의 학문적 업적은 후대에도 막중한 영향을 미쳤다는데......

한비자가 주장했던 法, 勢, 術은 지금도 많은 정치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고 한다. 

법은 백성을 통치하는 세세한 규칙인 입법, 사법과 관련된 것이다. 세는 백성과 신하를 굴복시키는 힘, 권력, 경영과 관련된 것이다. 술은 신하를 지배하는 은밀한 방식, 처세술,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치안과 처벌을 중요시했던 한비자와 이사 역시 살벌한 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 건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한비자의 업적은 전국 시대 여러 학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종합하고 새로운 체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진, 위, 조, 한, 제. 연, 초에 걸친 제왕학을 완성한 것이다. 이후 중국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전국 시대를 주도했던 법가. 교육, 의례, 계급 질서, 징벌, 훈계 등 국가를 강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지만 잔인하고 엄격한 정치는 오래가지 않는 법인데…….

 

서양에서 군주론의 대가를 마키아벨리라고 한다면 동양에서 제왕학의 대가는 한비자일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잔인한 면이 많지만 한비자의 법가 사상에도 잔혹한 면이 엿보인다. 모두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한 게 인간의 본성인데…….

 

 

이 책은 <탐 철학소설 시리즈>다. 청소년을 위한 고전읽기를 소설처럼 풀었다. 쉽고 재미있다. 게다가 유익하고 감동까지 있다. 고전이 낯설고 어려운 어른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도서는 탐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한우리 북카페 서평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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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논어 - 시대를 초월한 삶의 교과서를 한글로 만나다 한글 사서 시리즈
신창호 지음 / 판미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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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논어] 논어를 쉽게 제대로 익히고 싶다면...

 

공자의 삶과 인생철학, 학문의 지혜가 담긴 논어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한글 논어>를 보는 순간 쉽게 제대로 논어를 익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알고 있던 논어에 대한 부분적인 이야기들을 퍼즐조각처럼 맞출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흩어져 있던 조각들을 한 땀 한 땀 잇는 퀼트 조각보처럼 완성해 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직도 완성품을 만드는 중에 있지만…….

논어의 세 가지 원본 중에서 우리가 많이 접하는 것이 노나라 사람들이 전해 온 <노논어> 임을 처음 알았다. <논어>에 있는 글들이 공자의 제자, 공자 제자의 제자가 기록한 것들이라고 한다.

<논어>의 문답식 내용들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 생각난다.

논어의 내용에는 일상생활에 관한 공자와 제자 사이의 문답, 당시의 정치인과 정치에 대한 공자의 논평, 공자 자신의 일상생활에 관한 의례나 예절에 관한 문제, 역사적 인물의 사적에 대한 숭앙이나 찬미 등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공자의 출생과 어린 시절은 안타까움을 준다. 환갑을 넘긴 아버지 숙량흘이 안씨 가문의 10대 중반의 딸인 안징재와 야합해서 부부의 연을 맺어 낳은 아들이 공자다. 60대와 10대의 야합이라니. 요즘 같으면 비난의 대상인데....... 결국 공자는 세 살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10대 후반에 어머니마저 여의게 된다. 가난한 고아의 비천한 삶이지만 공자는 예를 지켰다는데…….

 

노나라 대부 맹희자의 유언에서는 공구(공자)를 맹희자의 맏아들 의자의 스승으로 모시라는 내용이 나온다. 원래 송나라 후계자의 집안이었기에 훌륭한 집안에서 언젠가는 통달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인물이 공구라는데…….

이후 공자는 여러 직업을 전전긍긍하다가  노나라에서 노자를 만나기도 하고…….

 

총명하고 깊게 살피는 사람에게는 늘 죽음의 위험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남을 잘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몸이 위태롭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결점을 잘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21쪽)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서로의 남다름을 알았기에 끌리기도 했겠지만 걱정이 앞서기도 했으리라. 세상에서 쓰임 받지 못하는 지혜는 위험하다고 여겼을 테니까.

 

주나라가 쇠퇴하여 예악이 없어지고 시서가 흩어지던 때 공자는 하·은·주 삼 대의 예를 집중 탐구해서 순차적으로 정리했다고 한다. <서전>과 <예기>를 최초로 편찬했다고 한다.

 

삶에 필요한 기예를 배우고 익혀라.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을 알아주고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올 때,

이보다 반가운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해 나갈 때,

참된 사람은 그 진면목이 드러나리라! (81쪽)

 

배움은 평생의 친구가 아닐까. 늘 배워도 앎과 깨침이 부족함을 느낀다. 자신을 알아주고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벗은 늘 힘이 된다. 2500년 전의 과거의 진리가 현실을 관통하는 진리가 되고 있다니. 예전과 달리 지금 배움의 내용이나 양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배우고 익히는 일은 나 자신이 좋아하는 찾도록 도와주고, 삶의 지혜를 얻게 한다.

 

훌륭한 사람은 널리 글을 배우되 예법으로 몸단속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좀처럼 없다. (190쪽)

 

공자의 말처럼 나이 들수록 배우고 익히는 일이 소중함을, 예와 상식을 갖추는 것이 귀중함을 깨치게 된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수천 종의 논어.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되어 있다. 예와 지, 인과 의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이 2500년이 지난 미래 사회에서도 통하다니, 신기한 일이다. 고전의 힘은 동서고금을 꿰뚫고 관통하는 힘이 있음을 다시금 깨치게 된다. 예전에 '공자 왈……. '처럼 배우는 것은 아니지만 한글논어라서 읽기에 부담이 없는 책이다.

청소년들이 읽기에도 좋을 책이다.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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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2 : 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 노자, 도덕경 시리즈 2
차경남 지음 / 글라이더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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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2]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

 

요즘 들어 제자백가 중에 끌리는 사람이 있다면 단언컨대, 노자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

굳이 대답하라면…….

그의 사상은 등산 중에 만나는 옹달샘 같은 달콤함이 있다고 할까.

긴 여정 중에 만나는 쉼터 같은 아늑함이 있다고 할까.

아침산책길에 만나는 벤치 같은 편안함이 있다고 할까.

 

인류의 스승, 현대인의 삶의 멘토, 동양사상의 원천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한 이가 노자라는 생각이 든다.

역설의 대가, 명백한 논리의 대가, 자연 법칙의 대가라고 할까.

비움과 여백이 동양화의 미학이라면 그것을 사상으로 잘 드러내는 이가 바로, 노자라는 생각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무위(無爲)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까.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무위를 주장한 노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하지 않으려면 먹지도 말라는 옛말에 익숙해서였을까.

무위를 무위도식으로 해석해 버리고는 노자를 장자와 묶어서 세트로 싫어하기까지 했는데.....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은 민폐요,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깨치는 무위는 이런 것이다.

행위가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행위는 하되 본질에 맞게 가도록 내버려 두는 의미임을, 자연 법칙에 따라 제대로 살라는 의미임을 깨치게 된다.

인위, 작위가 배제되고 인공과 억지가 배제된 세계가 무위임을 생각한다.

 

노자의 <도덕경>이 바른생활을 의미하는 윤리도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연의 도를 인식하고 그것을 체득하기 위한 경전이란 의미라고 한다.

노자는 보물은 내 안에 있다고 했다.

 

본질, 본성을 소중히 여기는 노자의 이론이 플라톤의 철인국가와도 통할까.

타고난 본성을 바탕으로 그 능력과 소질을 살리는 점에서는 서로 통하지 않을까.

저자는 노자의 도를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니 정기, 질료, 형상이 들어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노자가 말하는 道는 인간 윤리도덕이 아니라 자연의 도, 우주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德은 윤리적인 덕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과 여유의 경지를 말한다.

노자가 말하는 물(物)이란 물건이나 사물이 아닌 모든 사물의 배후에 있는 근본적 바탕이므로 명백하진 않으나 황홀지경이라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정(精)이란 정수, 본질을 의미하는 말인데, 정은 그윽하고 어두운 것, 생명의 기운이랄 수 있겠다.

 

노자는 사물의 참 모습을 유(有)와 무(無)가 아니라 은(隱)과 현(顯)이라고 한다.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섣불리 그것을 무라고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일 게다.

왜냐하면 잠시 휴식하식하고 있는 유가 은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결코 사라질 수 없으며, 유는 결코 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도는 황홀하고 오묘한 것이어서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허망한 무, 텅 빈 공허는 아니라는 것이다.

비어 있는 듯 채워져 있는 그 무엇 이라는 것이다.

 

별 말이 없는 것, 그것이 자연이다.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을 넘기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를 다하지 못한다.

누가 이리 하는가?

천지다.

천지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이랴.

(책에서)

 

도는 본래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소박한 통나무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나

이를 지배할 자 세상에 없나니,

왕이나 제후가 이를 지킬 줄 알면

만물이 저절로 복종할 것이오.

천지가 서로 합하여 감로를 내릴 것이오.

백성들이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잘 다스려질 것이다.

소박한 통나무가 잘리면

그릇이 되어 이름이 생긴다.

허나, 이렇게 이름의 세계가 전개되면

또한 마땅히 멈출 줄을 알아야 하나니,

멈출 줄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

비유하면 천하에 도가 존재하는 방식은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 (책에서)

 

이 부분은 노자의 사상 전체를 응축한 문장이라고 하는데......

노자가 말한 도의 심오한 경지를 어찌 다 깨칠 수 있으랴.

궁극의 진리를 깨치려는 많은 이들이 세상에 나와서 사라져 갔다.

그들이 많은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상은 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언어의 한계, 깨달음의 한계를 절감한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노자와 소크라테스가 만났다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을까.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순간을 절묘하게 노래하고 있는데...

이름이 지어지는 순간 사물의 실체가 드러나듯이 도의 실체도 이름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노자의 사상을 읽고 있으면 늘 수천석두라는 말이 떠오른다.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 자연의 순리요, 자연의 위대함을 말하는 듯하다.

수천석두의 지혜,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이치, 이 모두가 노자가 말하는 도임을 생각한다.

 

짙푸른 잎이 어느새 빨간 잎으로 물드는 나무를 보며 노자의 자연주의를 생각한다.

자연의 이치대로, 순리대로 따르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진리는 사물의 안에, 내 마음에, 자연 속에 있다는 노자의 말이 위로가 된다.

모든 사물에는 뭔가가 있는 거다. 그게 도이고 핵심이고 원형질 같은 바탕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물을 사랑한 노자를 한 권의 책에서, 산책길의 단풍나무에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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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람 - 마음이 맑고 깊어지는 고전 공부
김학경 지음 / 보누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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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하는 독서! [인생을람(人生乙覽)]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고전의 힘은 삶의 지혜를 주고 인생을 너그러이 돌아보게 한다.

수천 년 전의 선인들이 한 이야기가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건 그만큼 예나지금이나 삶의 이치가 같다는 뜻이겠지.

 

 

마음이 맑고 깊어지는 고전공부를 위한 책 <인생을람>

낯선 제목이 궁금하다.

옛 왕들이 하루의 정무를 끝내고 잠들기 전에 하던 독서를 일컫는 말인 을야지람 (乙夜之覽)에서 따 왔다고 한다. 한나라의 왕으로서 독서와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왔다는 것은 리더의 기본이었나 보다, 그 시절에도.

 

지혜를 찾는데 왕과 백성의 구분이 어디 있을까.

하루하루 켜켜이 쌓인 지혜들이 세상살이를 분명 편하게 할 터인데…….

채우기만 하는 현대인의 삶에 제대로 비우는 것도 소중함을 일깨우는 고전들…….

오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내일의 이정표를 제시하겠지.

 

이 책에는 사서삼경, 제자백가 서, 이백과 두보의 시, 법구경과 명심보감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고전의 맛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게 하고 어진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게 한다. (본문에서)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먼 것과 가까운 것을 같이 볼 줄 안다.

그래서 작은 것은 적다고 보지 않고

큰 것도 많다고 보지 않는다.

…….

모든 것이 찼다가 기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얻어도 기뻐하지 않고

잃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분수는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장자의 추수편>

 

채워도 부족한 현대인의 허기에 대한 일침이다. 무엇을 위해 채우는 지도 모른 채 습관적으로 채우고 있는 오늘, 족함에 대한 것을 생각한다. 그대로 만족이고 이대로 감사하다.

더 바라지 않는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날에 근심이 있다. <논어의 위령공편>

 

가까운 것만 보려는 근시안에 대한 충고다. 멀리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보이는 것만 이해되는 걸.... 깊이 생각하고 먼 안목으로 보고 싶다. 그리되려면 얼마나 더 도를 닦아야 할까.

 

길고 짧은 것은 생각하기에 달려 있고, 넓고 좁은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한가한 사람은 하루도 천 년보다 아득히 길고, 뜻이 넓은 사람은 아주 좁은 방도 하늘과 땅 사이만큼 넓다. <채근담>

 

모든 게 생각 나름, 하는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데, 뜻을 넓게, 마음을 넓게 쓰고 싶다.

 

 

항상 두려운 건 가을이 되어,

꽃 지고 잎 누레져 시드는 것이라네.

모든 강이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데

언제나 다시 서쪽으로 돌아오려는가?

젊은 시절 노력하지 않으면

늙어서 한갓 상심과 슬픔뿐이라네. -심약 <고문진보의 장가행>

 

젊어서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가을 지나 겨울은 쉬이 오겠지. 준비된 노후, 멋있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 건강하고 속이 편한 노후를 생각한다.

 

편안하게 지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물이 풍족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풍족하지 않은 것이다. -<묵자의 친사>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마음을 풍족하게 함이 행복임을 생각한다. 분수에 맞게 만족하는 것, 안분지족이랬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증유야, 너에게 앎에 대해서 알려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논어의 위정편>

 

 

오호~ 소크라테스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 하고 있는 현실의 나. 동서고금의 통하는 진리다. 너 자신을 알라. 모르는 것이 많은 나. 나 자신을 아는 건 더욱 어려운데.

 

을람의 시간은 혼자서 독서를 하며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왕이 했던 을람의 시간을 가진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리더의 덕목이겠지.

 

굳이 고전이 아니더라도 빡빡한 하루를 보내더라도 잠들기 전 30분 동안을 독서와 명상에 젖어 보는 시간은 정말 좋지.

 

을야지람.

그 시간은 위로가 되고 충전되는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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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공자 -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위대한 스승의 서글픔 우리가 다시 읽어야 할 정신적 스승 3
이한우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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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알아주지 않은 인류의 스승 - 슬픈 공자

 

 

시대가 위인을 만든다지만 그 시절에 위인을 이해한 사람이 진정 누가 있을까.

슬픈 공자는 아마도 그래서 탄생한 것 일게다.

 

2500여 년 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그 시절의 이야기다.

세상을 제패하고자 영웅들이 할거하던 시절이었기에 위대한 사상가들의 등장도 많았던 시절. 세상을 구할 지혜가 필요했던 그 시절에 탄생했던 인류의 스승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동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글을 남겨서 먼 훗날 유명해졌지만 그들이 살던 시절에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았기에 답답한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물론 공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자신의 말이 이 세상에 실현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설득하느라 애썼을 노력들, 소통되지 않는 세상을 보면서 공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슬픔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잠시나마 공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가르침과 비애를 음미해 본다.

 

 

<논어>에는 말만 있다면, 공자의 삶에는 실제가 있다. 슬픔이 다름 아닌 말과 실제의 갭에서 생겨났다. 말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

실제로 공자가 가장 애태웠던 것도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 것, 도리가 살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도리란 말이 말답고 행동이 행동답고, 그리하여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이다. 행해지지 않는 말은 말이 아니다. 올바른 생각과 말에서 나오지 않는 행동은 행동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일 수 없다. 여기에 공자의 근원적인 슬픔이 있었다. (서문 중에서)

 

 

 

출생이 미천했던 공자는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일 때도 출신 신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받아 들였다고 한다.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익히는 것에 의해 서로 멀어지게 된다. (본문 중에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게 태어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얼마나 배우려고 애쓰는 가에 따라 이루는 바가 다름을 공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공자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큰 뜻을 두게 된다. 한 개인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구제할 공인이 되고자 결심한다. 스스로 익히고 배우고, 배운 것을 가르치고 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깨우쳐 간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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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같은 벗이 있어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오면 진실로 즐겁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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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을 배워 익히고 그리하여 새것을 알아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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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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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 중에서)

 

 

 

시경을 암송하여 그 뜻을 깨우치기를 원했던 공자는 배운 지식이 쓸모 있도록 힘쓰라고 제자들에게 설파한다.

30세에 세상을 향해 일어나고(而立), 40세에 더 이상 유혹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나(不惑)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뜻을 알아 본 나이는 50(知天命)이었다.

 

만일 나를 등용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한 달만 되더라도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올 것이고, 일 년이면 충분한 이루어짐이 있게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공자가 30대 일 때, 제나라의 경공이 그를 등용하려다 포기한 적이 있을 정도로 현실 정치에서는 자신을 알아주지 못했다. 일찍이 큰 뜻을 품고 학문의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했던 그가 세상과 소통되지 않음을 알고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소통부재의 세상, 그 혼탁한 세상을 보며 얼마나 비애를 느꼈을까.

 

힘이 지배하던 시대에 道로써, 윤리로써 세상을 바꿔보고자 했던 공자.

권력 앞에서도 충언을 한 그였기에 군웅들이 받아들이기가 껄끄러웠던 걸까.

평소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기에 그가 이룬 교육관을 보면 여전히 위대한 인류의 스승임을  공감하게 된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공자의 진실을 알아주고 있을까.

지금 정치는 도덕적인가. 지금 사회는 충분히 윤리적인가.

그 해답은 우리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이 시공을 초월해서도 공자가 슬퍼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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