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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한강을 읽는 한 해 (주제 1 : 역사의 트라우마) - 전3권 - 소년이 온다 + 작별하지 않는다 + 노랑무늬영원,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ㅣ 한강을 읽는 한 해 1
한강 지음 / 알라딘 이벤트 / 2014년 5월
평점 :
그러니까, 나에게도 눈에 대한 기억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새벽에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찾아서 걸어가던, 남들은 좀처럼 겪어보지 못하는 길을 걸어갔다. 생에 대한 실패를 자식에게 전가하는 술 취한 아버지의 닦달과 윽박에 못 이겨 동생의 손을 잡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함박눈이 내리던 겨울이었고 새벽이었다.
누구나 걷지 못하는 그 길, 신작로에서 파출소 순경이 나와 동생을 불러 세웠다. 어른들도 꺼리는 통금시간에 조그마한 아이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행색이 신기하였는지, 불쌍하였는지 순경은 미소를 머금고 “너희들, 어디 가니?”라고 상냥하게 물어본 것 같다. 그 시절의 새벽, 하늘에서 떨어지던 눈들은 세상 무엇보다 밝았던 파출소의 가로등 불빛 속에 머물렀다.
“엄마 찾으러 가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참말로 철없는 나의 대답이었다. 미소가 가로등처럼 환했던 순경 아저씨가 동생의 머리에 쌓인 눈들을 살살 밀어내었다. “어유, 겁도 없이.” 눈길에 미끄러지지 말고 조심히 걸어 다니라며 내 어깨에 쌓였던 눈까지 털어주며 순순히 보내 주었다. 변변한 옷가지도 걸치지 못하고 어딘지도 모르고 걷던 눈길, 시간을 먹고, 소리를 먹고, 울음도 먹고, 심지어 엄마까지도 먹어버린 그날 새벽은 소년의 처지와는 다르게 얼마나 따뜻하였던지, 동생의 손을 모아 쥐고 찍고 찍었던 네 개의 발자국은 멍울처럼 기억에서 뭉쳐져 있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70년 전에 내렸던 눈을 한데 모아 제본한 책이다. 하지만 눈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들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경하와 인선은 눈밭에서 마지막을 함께 한다. 여전히 눈은 뺨 위에서 녹고 있고 인선의 혼은 자꾸 눈이 감긴다. 삶의 어느 순간에 서있는 두 친구는 자꾸만 등 뒤에 있는 죽음의 기억을 되짚으며 ‘작별하지 않는다’라며 몇 개 남지 않은 성냥을 긋는다.
부러진 성냥개비에도 화약은 남아있고 여전히 공항 활주로 밑에, 썰물에 쓸려가는 모래 위에, 어느 동굴에, 우뚝 세워져 나무나 덩굴 밑에, 원혼을 먹고 자란 문명 밑에서 불꽃을 당기지 못한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떠나보내지 못하면서 여전히 보고 싶은 그네들은 아직 잠들어 있을 거라고 억지 착각하며 가슴에 온전히 묻힐 때까지 울면서 살아가면 된다.
사람이 걸어야 할 걸음이 평생 백 걸음이라면 제주의 핏빛 원혼들은 지금까지 해마다 한걸음 씩 칠십 걸음을 걸어왔다고 여기면 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걸음은 누가 걸어주나. 쏟아지는 눈들의 아우성에 파묻힌 저들의 원혼을 누가 녹여서 꺼내어 주나. 핏기 없는 얼굴에서 녹지 않은 눈들을 걷어 내던 소녀의 손끝은 한세월 자신에게 쌓인 적설들은 걷어 내지도 못했는데.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만난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이야기다.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증유, 바르도. 다음 생은 억울하게 죽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애도사이며, 진혼곡이 아닐까. 일전에 읽었던 박상륭의 문장을 쓴다.
어찌해서 모든 생명들은 독수리나 사자나 상어의 형태에 제휴하지 못하고, 지렁이며 빈대며 굼벵이 따위의 몸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며, 어떻게 저 빈 그릇과 흐르는 생명은 서로 화합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다시 어머니의 배 속으로 들어가 보는 수밖에는 없으리라, 그리하여, 한낱 하늬바람으로 흘렀던 자기가, 어떤 의지에 의해서, 자기의 형태를 입혀주는 그 어미의 자궁으로 들었는가를, 열심히 살펴보는 수밖에 없으리라. ‘︎바르도로 가자, 아으 바르도로 가자. 망자들의 마흔 아흐레의 객숙소, 그래서 운명들이 산지 사방으로, 팔만 유정으로 헤어져 가며, 흔드는 손들을 보자. 하직하는 손들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그 눈물 위에로 번지는 어두움을, 그 어두움을 통해 어머니들의 사타구니가 환하게 열리는 것을, 그 모두를 보기 위해, 바르도로 가자, 아으 바르도로 가자.’︎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