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우리시대의 논리 2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이 먹먹해진 나머지 머리가 공허해지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 오늘 이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오면서 한참 하늘을 쳐다봤다. 외롭게 빛나는 별들이 몇 개 있었다. 탁한 서울의 대기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을 빛을 발하는 그 별들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나처럼 기분 좋은 위안을 느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이 책은 첫 글을 읽었을 때부터 심상치 않게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름대로 ‘노동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들은 내 마음에 하나씩 하나씩 파장을 더해갔다. 그렇다고 그의 말투가 열정적인 것도 아니다. 그의 말투는 차분하고 소박하다. 노동운동의 필요성과 그 의미에 대해 너무나 상식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너무나 비상식적인 이 땅의 노동현실을 얘기한다. 글을 읽다보면 그의 이러한 차분함이 ‘이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현장 방문을 통한 ‘가슴’에서 나옴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차분함은 뜨겁고, 감동적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그의 강연에 대한 평가를 읽으면 그의 말도 글과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그의 강연엔 늘 그가 직접 겪은 그 생생한 ‘현실’과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들어간다.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파업현장에서, 집회에서, 평범한 일상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겪은 고통, 울분, 저항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여러 감동들이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달된다.” 더구나 그가 한 달에 25~30회, 1년이면 3백 회 이상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는 막중한 노동시간의 노동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가 틈틈이 쓰고 말한 이 책의 글들은 더욱 진실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한다는 게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여겨진다.

언제부턴가 언론이나 지식사회에서 양극화 문제, 비정규직 문제, 빈곤 문제, 소득불평등 문제를 얘기하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각종 통계수치, 그래프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얘기하지만 이러한 글들은 말하려고만 할 뿐, 현실의 목소리를 좀처럼 듣는 법이 없다. 객관성, 중립성, 방법론적 엄밀성을 보여주는 그러한 글들은 세련되긴 하지만 불편함이 없다. 그래서 문제제기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고, 때론 비현실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긴 현실 자체가 비현실적이니 그러한 글들만 문제삼는 게 부당할지도 모르겠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곤한다. 사회는 점점 비참해지고 있는데, 그러한 사회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온통 내 주위엔 화려한 것 뿐이니 내가 있는 현실은 현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마치 매트릭스처럼 이 현실은 가상이고, 진짜 현실은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나에게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다 가깝게 보여주었다. 비참한 노동 현실에 꿋꿋이 저항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읽고 나니 책임감마저 느껴졌다. 그들의 힘이 되어주지 못할망정,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회적 폭력에 무관심한 시선으로 동조하지는 않겠다고. 노동자들의 삶을 감히 나의 짧은 지식으로 재단하지는 않겠다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필자와 그의 글을 모아준 편집자에게 진실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은 조화 - 심미적 경험의 파장
문광훈 지음 / 아트북스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봄바람이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시원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화창해지기도 먹먹해지기도 한다. 도서관 한켠에서 문광훈 선생님(나는 내가 진실로 좋아하는 분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이를 강요할 뜻은 없다)의 글을 읽고 있다. 그는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담긴 고요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문득 그의 글도 베르메르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글 역시 화려하지 않은 절제가 있고,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소중함을 잡아내는 세심함이 있으며, 번잡한 세상을 초탈하게 하는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다. 자신의 뒷모습만 보여주는 베르메르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음’도 비슷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짧은 칼럼이건, 긴 글이건 일상의 감각을 정갈하게 만들어주는 그의 차분한 문체가 좋고,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좋다. 최근에는 느림, 여유, 화의 절제 등을 강조하는 책들이 자주 보인다. 사회가 급속하게 변화해가고, 그 속에서 점점 더 불안과 소외를 느껴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들이다. 이런 주장들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절제가 없이는 근본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실존적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되는 면도 없지 않지만, 현실의 상황을 외면하고 초월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한다는 점에서 다소 허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 나오는 사내처럼 현실의 시끄러움을 벗어나 자연의 평화로움을 마음에 담는 것이 대다수의 현대인에게 가능할까. 스콧 니어링의 삶이나 종종 들려오는 귀농자의 삶에 대한 예찬은 오히려 현실의 긴박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다수 사람들의 절망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는 문학과 예술은 “날것으로의 현실”을 대변하기보다는 이를 가리거나 억압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현실을 대변하는 문학과 예술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문학과 예술은 거대한 위선의 중심에서 고상함으로 삶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상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는 이러한 사회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다) 문광훈은 예술이 주는 심미적 경험과 성찰성의 도덕적 실천적 힘을 신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감각의 생활에서 벗어날 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으로의 고립, 삶의 의미의 상실, 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삶 속에서 고요한 한줌의 빛을 경험해 볼 것을 권한다. 예술과 문화란 교양으로 강요된 무엇이 아니라 누군가(자신을 포함한)의 그림, 음악, 사진, 글 등을 통해 자신의 진실성,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즐거운 경험임을 말한다. “고요는 명상 속에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일상의 소음 가운데서 경험되고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예술의 빛나는 순간은 스쳐가는 누구나의 삶의 순간에 편재하는 것이다. 삶에서 찾아낸 “심미적(추악함까지도 포괄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무덤덤하고 협소해진 개인의 삶의 지평을 확대시켜주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이를 다른 사람과 나눔으로써 사회를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는 믿는 듯하다. 내가 그의 글을 통해서 어떤 설레임을 얻고, 삶의 쓸쓸함을 견뎌낼 힘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예술과 문학의 “숨은 조화”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내가 그의 글을 감히 타인에게 권하는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자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주제는 ‘정당체제의 저발전’이라는 현대 한국정치사의 구조적 특징이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실천과 수준은 대체로 정치경쟁의 장에서 국가와 사회를 매개하는 대표체계인 정당의 발전 수준과 역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때,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적 위기는 정당체제의 저발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정당체제 저발전의 기원과 구조, 그리고 그것이 낳은 현재적 모습을 분석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초판의 경우 결론 부분에 가서 ‘왜 마지막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대안은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저자의 말에 비추어 본다면 다소 추상적인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개정판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되었고, 저자가 이 부분을 쓴 이유와 개정판에서 삭제한 이유를 기술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밖의 자유주의나 공화주의와 같은 어떤 외부의 이념에서 이를 보강할 자원을 찾기보다, 그 내부로부터 이념적․제도적․실천적 자원을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하고 강화시키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답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정치(정당과 정당체계)를 통해 해결해 나가는 실천을 통해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본 것이다.

저자가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는 ‘민주주의의 질’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를 부분체제(partial regime)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노동의 배제, 중앙의 초집중화 등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이 그대로 잔존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수준(최소정의적 차원)에서는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실질적 차원에서는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개정판 후기에서 ‘한국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책레짐’의 일방적 실현, 사회의 양극화, 슈퍼재벌의 등장 등을 중심으로 다시 비판되고 있다. 그 원인은 다시 정당과 정당체제의 약함으로 돌려진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정당체제의 사회적 기반이나 이념적 스펙트럼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당체제는 “정당간의 경쟁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체계”이다. 정당체제의 문제는 개별 정당의 문제(당내 민주화)와 분석 수준을 달리한다. 복수정당제에서 나타나는 정당간 경쟁은 단일정당 내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경쟁과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다. 저자는 이러한 정당간 경쟁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좁고 사회에 뿌리내리지 않을 때, 그것은 상층 편향적이기 쉽고, 일반 시민의 이해와 요구는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으며, 대중의 정치참여도 축소된다고 본다. 이러한 정당체제의 강화는 오직 정당들이 한 사회의 중심적 갈등과 균열에 기반해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할 때(중심적 갈등들이 정당을 통해 전국화될 때)에만 가능하다. “갈등의 범위와 크기가 정당간의 차이를 의미있게 만들고 이들간의 정치가 민주적 내용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개정판 후기에서 저자는 이 말을 의미를 노무현정부의 정책을 사례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경제정책, 사회정책, 교육정책 등은 삶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보편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 사회에 직접적이고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한 사회의 생산체제와 분배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에 갈등의 범위가 넓고 그 강도가 크다. 그러므로 “정당체제가 이러한 갈등구조 위에 서 있을 때 정당간 정치경쟁은 보다 더 사회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갖게 되며, 그 결과 정부가 된 정당도 민주적이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문제는 경제정책, 사회정책, 교육정책 분야에서 신자유주의 논리가 일방적으로, 그것도 급속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이며, 정당들과 민주정부는 이것이 가져오는 분배구조의 악화와 사회의 파편화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선거제도나 권력구조(헌법)와 같은 절차적․제도적 수준의 변화나 개선에 부정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변화가 전혀 민주주의에 개선에 기여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선거제도가 바뀌어 특정 정당들의 자신들의 지지기반에서 획득하는 의석수가 줄어든다고 해서 정치가 질적으로 개선된다는 보장은 없다. 지역주의에 근거한 기존 정치인들과 정당의 독과점적 구조가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지만, 이러한 독과점적 구조가 깨진다고 해도 정당체제는 경쟁적이지 않을 수 있다. 실제 한국 정치의 현실은 여야 간의 경쟁이 극심한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상생’이나 ‘화합’의 정치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정당들이 좁은 정책적 스펙트럼 속에서 경쟁하다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정당체제의 측면에서 볼 때 이들간의 경쟁이 활발하다고 볼 수는 없다. 경제 및 사회정책의 내용이 정치경쟁과 무관하게 경제관료들의 관장사항이 되고 있는 상황하에서는, 성장․시장지상주의와 노동배제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가 확고한 정책레짐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는 절차적 측면의 개선이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안은 정치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힘들에 대항하며, 정당이 중심이 되는 정치체제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저자는 대중정당 모델을 중심으로 한 정당 민주주의 모델을 대안으로 보고 있다. 이는 서구의 정당체제 약화와 유권자의 유동성 증가에 바탕하여 주장되고 있는 원내정당, 정책정당, 선거전문가정당 모델과 구별된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대부분의 제도개혁 논의는 후자의 주장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당파성(partisanship)의 약화가 문제가 되기보다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중심으로 당파성이 형성되고 이를 중심으로 경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일 수 있다. 더구나 사회 불평등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러한 경쟁의 공간은 충분히 열려 있다. 대중정당 모델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통해 정부가 국가를 민주화하고, 시민사회의 보수적 힘(강력한 시장 헤게모니)에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다. 정당의 주변부에서 등장하여 확고한 지지기반과 넓은 인적자원을 갖지 못한 노무현정부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낳은 사회적 힘은 여전히 존재하고, 이들은 기존 정치에 대한 불만과 실망으로 유동하고 있다. 정치의 중요한 과제는 정당이 이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이들의 참여와 지지를 바탕으로 정강정책을 통해 가치의 우선 순위와 나아갈 방향을 구체화하는 일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