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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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글은 처음 단편을 봤을 때부터 끌렸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녀의 글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유희를 느끼게 하는 장난꾼은 성석제인데, 김애란의 글은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말’과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것을 전해준다. 나는 그녀의 웃음 코드가 좋고, 그래서 이번 장편에서도 빵빵 터지며 웃었다. 다른 하나는 그녀의 관찰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나는 그녀의 글에서 내가 살아왔고, 현재 경험하고 있는 삶들을 발견한다(나와 그녀가 비슷한 나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 내가 경험한 사실과 감정들이 그녀의 글로 고스란히 재현될 때, 삶이란 생각보다 다른 사람과 많은 공통분모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김애란이라는 작가를 내가 가장 좋아하고 기대하는 작가로 생각하고, 이 작가가 앞으로 어떻게 보다 깊게 삶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지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중에 이번 소설을 접했다. 이번 장편은 과거의 단편들보다 조금 더 깊은 문제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내 기대가 엇나가지 않았음을 느끼게 했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폭력성과 무관심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늙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니?”라고 질문하는 작가 언니의 질문은 이것을 대변한다. 이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황씨 아저씨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니들 눈엔 우리가 다 늙은 사람으로 보이지? 우리 눈엔 너희가 다 늙을 사람으로 보인다!”라는 말이다. “늙음에 데인 것처럼” 놀라고 혐오스러워 하지만, 정작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늙고 병든 “장애인”이 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름이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신이 원망스럽지 않냐는 말에 아름이는 “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건 정말 어려운 길 같거든요”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터무니없단 걸 알면서도, 또 번번히 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작가는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삶이란 부모의 헌신적인 돌봄에 의존하며 살아온 삶이다. 내 스스로 나의 능력을 가지고 이렇게 자라온 것이 아니라 아낌 없는 사랑과 돌봄에 의지하며 우리가 커 왔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랑과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이를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름이를 통해 따뜻함과 희망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람이 불고 내 마음이 날아 당신 근처까지 갔으면 좋겠다”라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나뭇가지를 잔잔하게 흔드는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이 내게도 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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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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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양보할 재밌는 소설을 발견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삶에서 모처럼 무엇엔가 오랫동안 집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것은 마치 가슴 속에 있는 앨범을 꺼내보는 것처럼 흐뭇한 일이다. 좋은 소설을 읽었을 때의 기쁨은 대개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남아 있길 마련이라서 다시 좋은 소설을 읽었을 때야만 호르몬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그늘진 면이 있듯 단점도 있다. 책장을 다 덮어버렸을 때의 허무함이란, 그 즐거움만큼이나 크다. 소설 속의 삶 속으로 들어가 잠시 일상을 떠나 있었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내 삶은 다소 낯선 느낌과 허망함을 불러온다. 그러나 그 일상이 오늘처럼 공허한 장소에서 의미 없는 웃음이나 만남을 가져야 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책에 달려있는 많은 리뷰들을 그만큼 책에 대해 느끼는 공감을 표현하는 것일 게다. 어떤 책에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반응을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각자가 너무나도 다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세상 속에서는 또 비슷한 감정의 고리들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걸 잘 잡아내는 것이 작가의 힘일테고. 그런 면에서 폴 오스터는 능력 있는 작가로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그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왠지 그의 글은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 책의 중간 중간에 나오는 책 속의 책이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하여’이고, 이 책의 제목 또한 어리석은 일들(follies)인 것처럼 살면서 어리석은 일들을 행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고, 그런 점에서 그러한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데 필요한 것이 인간애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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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열광 - 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
한재각.강양구.김병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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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늦게까지 이 책을 읽고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은 정신의 폭주는 아침 일찍부터 다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컴퓨터 앞으로 밀어냈다. 이러한 분노는 황우석의 거대한 사기극 때문이 아니다. 내가 딛고 있는 이 사회의 비이성과 몰상식, 비민주성은 나를 절망하고, 또 절망하게 만든다. 지금같은 심정에선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곤혹이다.

오랫동안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황우석’이라는 이름은 어느새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내민다면 그의 반응은 아마도 “또 황우석이냐. 이젠 지겹다. 그만해라”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황우석 교수에게 많은 기대를 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이 땅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황우석이라는 개인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가졌고, 이제 그들은 그를 외면하고 싶은 자기회피의 심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몇 달간의 한국 사회 모습은 ‘문제에 대한 자기회피’로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비참한 진실의 한 자락과 맞닿아 있을 경우 진실을 알지만 외면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이렇게라도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밀려오는 자기환멸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정은 사실상 황우석 사태를 만들어낸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자로부터 ‘그래도 황우석 같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믿었던 평범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실을 솔직하게 대면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책의 필자들의 가감 없는 펜끝은 이러한 진실된 용기를 보여준다. 그들이 사건의 한복판에서 겪었을 괴로움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과연 우리는 황우석 사태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언론의 엄청난 양의 보도를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이 이 사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나또한 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어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이 사태에 대해 뒤죽박죽 알고 있거나, 그 일부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를 그 출발점부터 차근차근 추적해 나가면서, ‘황우석 신화’를 만드는 데 기여한 정부의 인사와 장관들, 여야 국회의원들, 기업인들, 언론인들, 과학관련 연구자들을 실명으로 비판한 이 책의 앞 부분은 한편의 잘 짜여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 희극적인 진실 앞에 한참동안 웃기도 했다. 원인이 규명되지도 않은 광우병에 대해 ‘광우병 내성 소’를 말하고, “호랑이 체세포와 고양이 난자로 만든 수정란을 암사자에 이식한 다음 백두산 호랑이가 태어나길 기다”리다가 이젠 아예 맘모스 등 멸종된 생물을 복원하겠다는 황우석 교수의 말을 여과없이 보도한 한국 언론의 뛰어난 ‘사실 그대로의 보도’ 앞에서 황당함과 실소를 멈출 수 없었다.

생명윤리법의 제정 과정을 다룬 책 중반부터 마지막까지 읽으면서, 나는 지속적으로 민주주의의 약함을 떠올렸다. 생명공학에 대한 정부의 일방적 편향성과 사실상 견제되지 않는 정부정책, 사실상 황우석 개인을 위한 국회의 생명윤리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도 민주주의적 힘의 투입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황우석 사태는 한국 사회의 작동 모습을 보여준 분명한 경험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차세대 성장동력’이라는 명분으로 ‘회장님’의 선견지명을 따르며 IT, BT를 소리높여 외친 민주정부는 성장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생산체제’로의 전환만이 한국사회가 나아갈 길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다. 여기엔 미래를 내다보는 전문가들의 ‘전문적인’ 판단이 있으니 무지한 대중이 관여해서 안 된다는 관료기술적 전문가주의의 비민주성이 자리잡고 있다. 정부는 이미 IT, BT를 중심으로 한 산업을 한국의 생산체제의 대안으로 ‘결정’해 놓고 있었고, 이를 민주주의의 힘이 미칠 수 없는 ‘비결정’의 영역으로 ‘결정’해 놓았다. 생명윤리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이러한 비결정의 영역 앞에 시민사회의 민주적 힘은 얼마나 무력한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비결정의 작동에는 관료적 결정을 추수하고 승인하기 급급한 ‘정당의 부재’, ‘정치의 부재’가 기여하고 있다. 우리가 선거로 뽑은 대표들은 관료의 편향적이고 비민주적 결정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은 것이다. 정치가 들어가야 할 공간에 재벌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이익집단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된다. 거대 이익집단들은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국가의 자원(예산)을 사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부-삼성 연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 책의 9장(과학기술동맹과 의료시장화)은 의미심장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정책결정자들이 거대 사적이익과 결합하여 자신들 마음대로 ‘결정’해 놓은 방향을 일방적으로 실행해 옮겨 온 연속적인 진행의 결과물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론이 불러낸 월드컵이라는 또 다른 열광에 도취되어 있는 한국사회는 다시 한번 성과주의(4강)와 애국주의(대한민국 태극전사)에 동원되어 이러한 현실을 직시할 이성을 상실하고 있기에 ‘파국을 향한 질주’를 막을 여력이 없어 보인다. 정치 부재와 언론의 과도한 영향력, 관료와 사적이익집단의 결합에 의한 정책결정, 열광에 동원되는 대중, 외부의 시선에 일그러진 개인은 결국 한국 민주주의의 약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줄곧 ‘나는 정말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구나’ 하는 비참함이 떠나지 않았다. 동시에 어디선가 제2, 제3의 황우석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임을 생각하면 더욱 괴로워진다. 얼마나 더 많은 사건이 자기배신을 가져온 후에야 그 비극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항상 문제를 회피하려 하기 때문에 반복된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문제에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 그래서 절실하게 자신과 현실을 반성해보는 것에서만 변화의 힘은 생긴다. 그럴 마음의 용기를 지닌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감히 권한다. 그리고 동시에 묻는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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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anBen 2006-06-16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책은 읽지 않았지만 이 리뷰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적하신대로 최근 황우석이나 월드컵에 대한 열광, 극단적인 정치적 쏠림 현상 등 대중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빈번하게 목격하게 되어 씁쓸합니다. 책 꼭 읽어봐야겠네요.
 
룩 앳 미 - 일반판
아네스 자우이 감독, 마릴루 베리 외 출연 / 기타 (DVD)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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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영화를 얼마 전에야 DVD로 보게 되었다. 바로 이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건, 인간의 작음 그리고 연약함이다. 그래서 좀 슬프기도 했다. “나를 봐 주세요”라는 영화 제목처럼 애정에 목말라 있지만, 정작 다른 사람은 따뜻하게 바라볼 줄 모르는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들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건 나 자신을 들여다봐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며, 따뜻한 애정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사랑이나 성공, 행복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배경이나 권력을 이용하려 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원하는 롤리타, 하지만 그 또한 그 아버지의 권력을 이용해 남자들을 유혹하려 한다. 그러나 자신의 배경을 보고 자신에게 접근한 사람들에 대한 남자에 대한 환멸로 끝나고 말지만 말이다. 자신의 뚱뚱한 몸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아버지의 권력을 이용해서라도 사랑을 얻고 싶은 그녀는 이러한 사랑이 결국 위선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을 포기하기도 어렵다. 위선에 바탕한 사랑이라도 자신에게는 절실한 것이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롤리타의 아버지 카사드 조차도 자신의 부인이 떠났을 때는 침대에 앉아 눈물을 훔치는 연약한 개인일 뿐이다. 딸이나 아내에게 애정을 표시할 줄 모르고, 타인에게 거만한 그 조차도 애정 없이는 살 수 없 유약한 인간이라는 아이러니. 고상해보이는 음악 선생인 실비아는 남편의 성공을 위해 롤리타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녀을 통해 카사드와 만나지만 (물론 그녀는 전부터 카사드의 작품을 좋아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권력에 비굴하고, 돈에 눈 멀어버린 남편일 뿐이다. 롤리타와 함께 파티에 가서 낯선 남자와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한편으로 얼마나 애정에 목말라 있는지 보여준다. 롤리타의 새엄마 카린이나 실비아의 엄마 에디뜨도 비슷하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을 보여줄 줄 아는 인물은 롤리타(타인)의 우연한 배려(술에 취에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에게 자신의 옷을 덮어주는)를 받은 세바스티앙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서 관심[의 시선]을 상징하는 것은 롤리타가 아빠인 카사드에게 녹음해 준 슈베르트 곡의 테입이다. 하지만 카사드는 끝내 그 테입을 외면한다. 내 가까운 사람들이 내게 주는 상처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들에게 주는 상처는 너무나 쉽게 지나쳐버리는 현실. 자신은 타인의 애정을 필요하면서도 타인에게는 상처만 주는 상처의 연쇄고리. 나를 들여다보고, 타인을 바라보면 그들 또한 나처럼 연약한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것을... 이토록 가련한 인간인 것을... 눈을 뜨고 있지만 진심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인 것을... 상처의 고리를 끊는 것은 결국 작은 관심/배려와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부분에서 실비아가 잠든 집안에 롤리타의 노래를 틀어놓고 떠나는 것도, 롤리타가 아버지를 통해 자신에게 애정을 보여준 카린에게 사과를 전하는 것도, 또 그녀가 자신의 말 때문에 상처 입은 세바스티앙을 떠올리고 그를 ?아가 처음처럼 옷을 덮어주는 것도 감독의 그런 메시지가 담긴 게 아닐까 싶다. 예전에 이 영화를 추천해 주신 분은 나의 선생님이셨다. 무엇보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얘기하셨었다. 베르디의 돈 카를로의 베스가 부르는 필립2세의 독백, 몬테베르디, 슈베르트 노래 등은 귀를 맑게 해준다. 특히 시골 교회에서 불려지는 노래들과, 마지막 장면에서 어두운 시골길을 배경으로 울려퍼지는 음악은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마음과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당시 선생님은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슈베르트의 가곡 ‘An die Musik’을 적어 보내주셨다. 요즘 나는 이안 보스트리지의 음성으로 종종 이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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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지혜 동문선 현대신서 14
알렝 핑켈크로트 지음, 권유현 옮김 / 동문선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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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굳이 철학적 에세이로 규정한다면, 그 수준에 있어 최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출판사가 동문선이라는 점이 너무나 아쉽다. 편집자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잘 읽혀지지 않는 부분들을 수정하고, 기본적인 번역어를 정리했더라면 이 책의 소중한 내용들이 보다 더 감동적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내가 보고, 읽기엔 동문선에서 낸 프랑스 책 번역서들은 읽혀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지경의 책들이 상당히 많다. 이런 점에서 사실상 편집이 없다고 생각된다. 제대로 읽혀지지 않는다면, (그 책이 아무리 난해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차적으로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인데, 그런 책들을 막 찍어 낸다는 것은 출판사의 임무방기라고 생각한다. 이건 소비자에게 불량식품을 파는 것과 같다. 동문선에서 판권을 가지고 있는 많은 좋은 책들이 국내에서 이렇게 푸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들이 알면 기분이 어떨까? 이런 말을 들으면 동문선에 계시는 분들이 기분 나빠하실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책을 구입한 한 명의 소비자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것이고, 그 분들에게 한 명의 ‘타자’로서 최소한의 윤리성을 호소하고 있는 중이다. 제발 나와 같은 타자들을 ‘무관심한 소비자’로 보지 마시고, 목소리 없는 대상으로 규정하지 마시고, 책과 독자를 좀 더 ‘사랑’해 주시라고 말이다. 나의 이러한 말이 동문선 여러분께 심각한 결례가 되는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한다.

 

번역에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원 저작 자체가 워낙 좋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동문선이 어떤 기준으로 책값을 정하는지 모르겠는데, 국내에서 이미 알려진 학자들의 책은 무진장 비싸고,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들의 책은 비교적 싼 것 같다(이것도 판권 가격 차이를 잘 모르는 나의 오해였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 책에 담긴 내용에 비하면, 이 책의 가격은 거저나 다름 없다. 이 책은 사실상 레비나스 철학의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어려운 레비나스의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더구나 다른 문학/철학 작품들을 인용해서 현재적 ‘나’에게 공감을 이끌어내며 글을 전개해 간다는 데 이 책의 장점이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를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와도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에세이는 성공한 사람들의 자기 인생 자랑이나, 말도 안 되는 개똥 철학(개똥을 무시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프랑스의 엣세는 깊은 사유가 글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정말 기분 좋은 독서를 경험할 수 있었다. 더구나 상아탑 속의 철학이 현실과 좀처럼 교류할 줄 모르는 우리의 풍토에서, 철학은 현실의 ‘내’ 경험을 성찰케 해주는 하나의 평범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상식적인 사실을 이 책은 잘 증명해준다.

 

이 책의 내용을 “사랑이란 타자가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놓이는 것이며, 끊임없이 나에게서 도망가는 타자로부터 나는 도망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지혜란 이 알 수 없고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얼굴에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역자)라고 간략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은 훨씬 더 풍부하다. 나라는 ‘존재’의 참을 수 없고, 없앨 수 없는 무거움, 타인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 주는 감정의 혼란스러움, 타자성이 주는 불안감과 불확실성에 대한 폭력적 대응 양식으로 설명되는 파시즘의 경험 등 이 책은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역사적 사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각꺼리를 지니고 있다. 조금씩 나눠 먹어야 제 맛인 음식처럼, 이 책도 여유를 갖고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면서, 글도 옮겨 적어보고 내 생각도 적어보면서 읽게 되는 그런 책이다.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 삶은 왜 이렇게 무료해지고, 무의미해지는 것일까?”라는 고민 중에서 이 책을 만났고, “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이토록 무관심해 지는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기는 커녕 점점 더 폭력적으로 대하는가?”, “파편화된 공동체의 윤리적 기반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안고 이 책을 읽어 나갔다. 타자에 의한 사랑의 호소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문득 찾아오고, 내 마음을 흔들 때 이것에 대해 무관심 또는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타자를 향해 다가갈 수 있게 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해소할 수 없는 존재의 불안 때문인가 아니면,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호소하는 양심 때문인가. 나의 짧은 지식으로 대답을 구하기엔 너무 어려운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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