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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열광 - 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
한재각.강양구.김병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평점 :
새벽 늦게까지 이 책을 읽고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은 정신의 폭주는 아침 일찍부터 다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컴퓨터 앞으로 밀어냈다. 이러한 분노는 황우석의 거대한 사기극 때문이 아니다. 내가 딛고 있는 이 사회의 비이성과 몰상식, 비민주성은 나를 절망하고, 또 절망하게 만든다. 지금같은 심정에선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곤혹이다.
오랫동안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황우석’이라는 이름은 어느새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내민다면 그의 반응은 아마도 “또 황우석이냐. 이젠 지겹다. 그만해라”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황우석 교수에게 많은 기대를 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이 땅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황우석이라는 개인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가졌고, 이제 그들은 그를 외면하고 싶은 자기회피의 심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몇 달간의 한국 사회 모습은 ‘문제에 대한 자기회피’로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비참한 진실의 한 자락과 맞닿아 있을 경우 진실을 알지만 외면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이렇게라도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밀려오는 자기환멸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정은 사실상 황우석 사태를 만들어낸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자로부터 ‘그래도 황우석 같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믿었던 평범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실을 솔직하게 대면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책의 필자들의 가감 없는 펜끝은 이러한 진실된 용기를 보여준다. 그들이 사건의 한복판에서 겪었을 괴로움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과연 우리는 황우석 사태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언론의 엄청난 양의 보도를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이 이 사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나또한 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어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이 사태에 대해 뒤죽박죽 알고 있거나, 그 일부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를 그 출발점부터 차근차근 추적해 나가면서, ‘황우석 신화’를 만드는 데 기여한 정부의 인사와 장관들, 여야 국회의원들, 기업인들, 언론인들, 과학관련 연구자들을 실명으로 비판한 이 책의 앞 부분은 한편의 잘 짜여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 희극적인 진실 앞에 한참동안 웃기도 했다. 원인이 규명되지도 않은 광우병에 대해 ‘광우병 내성 소’를 말하고, “호랑이 체세포와 고양이 난자로 만든 수정란을 암사자에 이식한 다음 백두산 호랑이가 태어나길 기다”리다가 이젠 아예 맘모스 등 멸종된 생물을 복원하겠다는 황우석 교수의 말을 여과없이 보도한 한국 언론의 뛰어난 ‘사실 그대로의 보도’ 앞에서 황당함과 실소를 멈출 수 없었다.
생명윤리법의 제정 과정을 다룬 책 중반부터 마지막까지 읽으면서, 나는 지속적으로 민주주의의 약함을 떠올렸다. 생명공학에 대한 정부의 일방적 편향성과 사실상 견제되지 않는 정부정책, 사실상 황우석 개인을 위한 국회의 생명윤리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도 민주주의적 힘의 투입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황우석 사태는 한국 사회의 작동 모습을 보여준 분명한 경험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차세대 성장동력’이라는 명분으로 ‘회장님’의 선견지명을 따르며 IT, BT를 소리높여 외친 민주정부는 성장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생산체제’로의 전환만이 한국사회가 나아갈 길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다. 여기엔 미래를 내다보는 전문가들의 ‘전문적인’ 판단이 있으니 무지한 대중이 관여해서 안 된다는 관료기술적 전문가주의의 비민주성이 자리잡고 있다. 정부는 이미 IT, BT를 중심으로 한 산업을 한국의 생산체제의 대안으로 ‘결정’해 놓고 있었고, 이를 민주주의의 힘이 미칠 수 없는 ‘비결정’의 영역으로 ‘결정’해 놓았다. 생명윤리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이러한 비결정의 영역 앞에 시민사회의 민주적 힘은 얼마나 무력한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비결정의 작동에는 관료적 결정을 추수하고 승인하기 급급한 ‘정당의 부재’, ‘정치의 부재’가 기여하고 있다. 우리가 선거로 뽑은 대표들은 관료의 편향적이고 비민주적 결정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은 것이다. 정치가 들어가야 할 공간에 재벌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이익집단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된다. 거대 이익집단들은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국가의 자원(예산)을 사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부-삼성 연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 책의 9장(과학기술동맹과 의료시장화)은 의미심장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정책결정자들이 거대 사적이익과 결합하여 자신들 마음대로 ‘결정’해 놓은 방향을 일방적으로 실행해 옮겨 온 연속적인 진행의 결과물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론이 불러낸 월드컵이라는 또 다른 열광에 도취되어 있는 한국사회는 다시 한번 성과주의(4강)와 애국주의(대한민국 태극전사)에 동원되어 이러한 현실을 직시할 이성을 상실하고 있기에 ‘파국을 향한 질주’를 막을 여력이 없어 보인다. 정치 부재와 언론의 과도한 영향력, 관료와 사적이익집단의 결합에 의한 정책결정, 열광에 동원되는 대중, 외부의 시선에 일그러진 개인은 결국 한국 민주주의의 약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줄곧 ‘나는 정말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구나’ 하는 비참함이 떠나지 않았다. 동시에 어디선가 제2, 제3의 황우석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임을 생각하면 더욱 괴로워진다. 얼마나 더 많은 사건이 자기배신을 가져온 후에야 그 비극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항상 문제를 회피하려 하기 때문에 반복된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문제에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 그래서 절실하게 자신과 현실을 반성해보는 것에서만 변화의 힘은 생긴다. 그럴 마음의 용기를 지닌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감히 권한다. 그리고 동시에 묻는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