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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 - 리버럴리스트의 초상 ㅣ 지성을 찾아서 1
가루베 다다시 지음, 박홍규 옮김 / 논형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내 기억 속에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이름이 각인된 것은 그의 저서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에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1946)라는 글을 읽고 난 후였다. 국가가 윤리적 실체로서 개인의 내면적 가치를 결정하고자 할 때, 개인의 주체적 책임의식의 상실을 초래한다는 점을 일본의 초국가주의적 심리의 근거로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이 글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그의 분석이 한국 사회의 경우에도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주체의식이 존재하지 않을 때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비굴하고,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억압하는 ‘억압이양’의 원리가 작용한다는 분석이 특히 그러했다. 나는 그의 글을 통해 반공주의가 윤리의 실체로서 개인의 내면에 작용했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렸고,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억압이양의 원리가 ‘폭력의 하향이동’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데,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는 구조적 억압이 강한 곳에서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그러한 중압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성과 아이를 대상으로 한 가정 폭력이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집단 따돌림과 폭력도 크게 보면 개인의 다양성과 차이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경쟁 중심의 사회 구조의 결과라는 생각이다(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저지르는 개인에게 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아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국체’ 이념에 기초하여 국가가 위로부터 국민을 동원하는 천황제의 정신구조와 격투하는 것을 학문을 하는 내면적인 에너지로 삼았으며(p. 174), 개개인이 ‘자주적 인격’을 키워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주체’로서 나라의 정치를 담당해 가는 체제를 대안으로 여겼다(p. 91). 이 과정에서 그는 정치질서의 성립에 우선하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개인이라는 서양 근대 자유주의 사상과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한다(p. 92). 이러한 ‘근대’ 사상은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도쿠가와 시대 사상에도 그 맹아를 찾아볼 수 있는 인류 보편의 이상이며 규범(p. 93)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반영된 책이 『일본정치사상사연구』(1952)이다. 이 책에서 그는 오규 소라이라는 도쿠가와 시대의 유학자에게서 정치의 세계와 도덕의 세계 사이의 균열이 생겨 ‘공적=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논리가 인정되는 동시에, ‘사적=내면적 생활”로서의 인간의 자연적 성정이 해방되는 ‘근대적 사유양식’이 등장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p. 99). 이를 통해 그는 인간 세계의 질서의 기초를 인간의 ‘작위’에서 찾아내고, 이것을 독일 사회학자 퇴니스가 ‘근대 시민사회의 원리’로 제시한 ‘게젤샤프트의 논리’의 맹아라고 본다(p. 101). 이러한 작업은 자유주의 사상의 논리를 지나치게 일본 정치사상에 투영한 것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끊임없이 개인의 내면으로 침투하여 개인의 ‘자기결정 능력’을 약화시키는 일본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틀을 제공해 준다. 마루야마가 일본의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에게 “공통의 언어”를 제공해 주었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말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따라갈 때 그가 정치적 다원주의를 지지하고, 노동조합과 같은 자발적 결사체를 전후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생각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적과 동지라는 대립도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정신적 자립’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생각을 쉬이 안다는 태도를 버리고 그 사람을 ‘타자’로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p. 164)는 주장도 그의 자유주의적 사고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책은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지식인이 가졌던 문제의식과 학문적 흐름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짧지만 쉽고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나아가 정치적 판단에 대한 마루야마의 조언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충분한 시사점을 준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향하게 하고, 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행사하는 중심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정치화’의 과정에 저항하여 개인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 155).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리얼리즘을 갖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현실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속에서 실현 가능한 변화의 가능성을 키워나가려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1) 현실을 “일반적·추상적인 명제”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다양한 측면을 구분하여 적절한 선택을 하는 사고력, (2) 정치에 “베스트”를 기대하다 실망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디까지나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각오로 임하는 것, (3) 어느 정치세력을 지지할 것인가에 대해 지금까지의 세력 분포에 얽매이지 말고 “전체 상황에 대한 판단”에 따라 유연하게 결정해 가는 것 등과 같은 사고법이다(p. 169). 정치란 다양한 사람의 이익과 욕구를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변화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는 본래적으로 보수적인 영역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이상만을 동경하거나, 목전의 이해에만 집착해서는 변화를 이룰 수 없다. 정치의 이상이나 목표를 현실의 변화 가능성과 끊임없이 관련시켜가는 사고방식이야 말로 정치 허무주의나 무관심에 빠지지 않고 변화에 대한 낙관을 지탱해 갈 수 있는 동력이라는 게 마루야마 마사오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