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캐롤'

 -이번에 영화로 개봉하면서 '동성애' 논란에 휩싸인 소설. 왜 우리는 어떤 코드에 얽매여 한 작품을 한 작품으로,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못하는가? 그저 이 사랑 이야기는 다른 사랑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고 싶다면, 이들의 성별이든 뭐든 신경쓰지 말라. 그저, 그들에게 밀착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가장 어렵고도 절절한 리뷰가 써보고 싶다. 

 

 2. 마이조 오타로 '쓰쿠모주쿠'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가장 재미있는 소설, 명탐정 이야기라고 하는데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 게다가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도 아니고 원어 그대로 나온다니. 기대가 되지 않을손가.

 

 3. 기리노 나쓰오 '여신기'

 -전세계적인 '신화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하는데, 기리노 나쓰오의 폭발적인 스토리텔링은 말해 무엇하랴. 이번에는 이 신화를 어떤 방식으로 '파헤쳐' 놓았을지 절로 기대가 된다.

 

 

 

 

 

 

 

 

 

 

 

 

 

 

 

 

 

 

 

 

4. 앤 카슨 '빨강의 자서전'

 -일단 책 표지부터가 아름답다. 앤 카슨의 작품이 제대로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다는데, 이번 기회에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을 읽어보고 싶었다. 두 권이 나오는 것으로 알지만 그중 가장 읽고 싶은 책이다.

 

5. 조이 파울러 '우리는 누구나 정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산다'

-엉거주춤한 오랑우탄의 모습만큼이나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어떻게 능숙해지는지, 그러면서 어떻게 한없이 서툴러질 수 있는지 읽어볼 수 있는 소설.

 

6. '시스터 캐리'

-문학동네 블로그와 사람들이 추천한 책인데, 막상 세계명작전집이라 하면 어려워 보인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잘 안 읽는 것이 좀 아쉬워서 선정해 보았다.

 

 

 

 

 

 

 

 

 

 

 

 

 

 

 

 

 

 

7. 윤이형 '러브 레플리카'

SF든 공포든 모든 장르를 불문하고 가장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아는 한국 작가들 중 한명인 윤이형의 단편집이 나왔다. 표지부터가 예쁘고...작품들도 기대된다. 사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꼭 한권씩 집어넣어보자고 다짐했는데 이번 작품은 그냥 그런 다짐 없이도 쑥 들어가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뒤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헤닝 만켈 '불안한 낙원'을 읽고-

    

 

 

 

아나, 이게 다예요.

    

  한나 뢴스트렘은 한나 룬드마르크가 된다. 한나 룬드마르크는 세뇨르 바즈의 부인이 되고, 미망인이 된다. 펠리시아와 사창가의 여자들에게 구조를 받고 살아난다. 그녀는 가난한 여자에서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게 된다. 포르스만의 자비를 갈구했던 그녀, 베르타처럼 그의 가재도구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그녀였다. 왜 그녀는 이사벨을 구하고자 했는가? 이 소설의 전반부에서 그녀의 첫 남편이 죽으면서 그녀 또한 죽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긴장감이 드리워지고, 점차 그녀가 새로운 로맨스보다는 생존하기에 급급해 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후반부에 갑자기 모세스라는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어떤 이유도 없다. 그녀는 스스로를 아나 브랑카라고 인식한다.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사유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인류애가 뛰어난 것도 아니며 괜한 오지랖이 넓은 것도 아니다. 혼혈인인 변호사 안드레가 아는 걸리버 여행기도 읽지 않았다고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그녀가 펠리시아의 뜻을 모르겠다고 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우리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때라고는,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때다.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때. 가난은 그녀를 쫓아내고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아프리카도 온전한 낙원이 되지는 않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을 껴안은 채 그녀는 불면증과 의심에 시달린다. 식민주의-개척주의는 사실 순수한 모험정신이 아니라 생존과 새로운 시장 자원의 개척을 위한, 죽음을 무릅쓴 항해의 결과였다. 그들은 전설의 섬 엘도라도를 찾을 수도 없었고 흑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공격했다. 어떤 인과론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했고 그 곳을 자신의 낙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세뇨르 바즈를 비롯한 백인 남성들이 흑인들에게 보이는 적의는, 아프리카가 온전한 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함구하려 한다. 그들은 흑인을 두려워한다. 이 곳을 벗어나면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나 브랑카도 마찬가지로, 그런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다. 만약 다른 곳이었다면 그녀는 세뇨르 바즈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그리고 이곳에서만 가능하게도 프로포즈를 받았다. 그녀가 아프리카 땅에서 맨 처음 배운 교훈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나 돌로레스에게서 배운 혐오를 그대로 행한다. 공격받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방어가 아닌 선제 공격이다. 하지만 아나 브랑카는 베르타를 기억한다. 그녀의 친구, 포르스만의 발치에서 집안을 치우고 엎질러진 차를 묵묵히 닦아내던 그녀를.

 

 

 

 

걸리버의 여행

 

  아나 브랑카, 한나가 아프리카에서 마주하는 이들은 백인과 흑인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병들고 지친 사람들이다. 그들이 벌이는 축제는 모두 가장이며, 거짓말이다. 그들은 공격받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 평온한 전장, “흑인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백인들은 현재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 아랍인과 인도인들은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진실이 파고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208p)” 그녀는 가장 최상위 카스트인 백인이다. 그녀가 매음굴의 창녀들과 사진을 찍기 위해 스스로를 동양풍으로 꾸민다 하더라도, 그저 우스울 뿐이다. 단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모든 수난들을 겪고 난 그녀는 지극히 멜로드라마에 해당하는 감상적인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행동들을 다시 돌이켜 보면,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이나 다른 백인-흑인의 대립 구도를 그린 소설의 인물들과는 다르다. 이 소설에서는 그녀의 어떤 의미있는 성찰보다는 질문이 많다.

 펠리시아는 매음굴의 창녀지만 그녀의 돈을 훔치는 대신 내버려 두고, 그녀를 간호한다. 그녀가 건네준 약이 어쩌면 세뇨르 바즈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설에서는 바즈의 자살 여부가 정확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펠리시아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아나 돌로레스와 같은 백인 여성이다. 그녀가 아나 브랑카를 두려워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흑인인 이사벨을 구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 또한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은 에스메랄다도 펠리시아도, 한나의 마지막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들은 계속 매음굴에 머물고 싶어한다. 이 곳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백인들의 세상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를 죽인 것이 백인처럼 흰 촌충이라 할지라도.

 라틴계의 갈색 피부를 지닌 안드레는 도둑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도둑이 되지 않는 법을 공부했다. 하지만 백인이 통치하는 세상은 그에게 매음굴에 들어갈 권한조차 내주지 않는다. 아나 브랑카는 공정한 거래를 위해 매음굴의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만, 애당초 매음굴 자체가 공정한 거래에 해당하지 않는다. 피멘타가 그나마 공정하다라고 말했듯이, 공정한 것에 조금 더 가까울지언정 공정하지 않다.

 바즈의 형 제는 피아노를 조율한다. 아나 브랑카가 이 불안한 낙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계시와 같은 그의 피아노 조율 때문이었다. 이곳에도 음악이 있고, 아름다운 합창이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 소리를 하찮게 여기거나 비웃는다. ‘조금 이상한 사람인 제는 카를루스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은 지극히 선량하게 보인다. 그는 어떤 날이면 아 마그리냐에게 구애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한다.

 이 불안한 낙원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미쳐야 하거나 끊임없이 불안에 떨어야만 하는가? 이사벨을 구하면서 아나 브랑카가 얻고 싶어했던 건, 어쩌면 떠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이 곳을 온전한 낙원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의 실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사벨은 살해당하고, 강인해 보였던 경비대장 설리번은 끝내 실패하며 모세스는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계속 재촉한다. 매음굴의 여자들마저도 그녀를 매음굴의 주인으로 볼 뿐, 아나 브랑카로 보지 않는다. 그녀는 실패한 것이다.

 

 

 

 

:출애굽

    

 이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주 단순한 유추지만, 모세스라는 이름은 출애굽기의 모세를 연상하게 한다. 한 때 예수가 흑인이었을 수 있다는 추측들이 떠돌곤 했다. 사실일지도 모른다. 아직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예수가 백인이라는 생각은 지극히 백인우월주의적 가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스는 맨 처음 이사벨을 구하려 한다. 그는 이사벨에게 먹으면 나비처럼 날아갈 수 있는 가루를 주지만 실패한다. 땅굴을 파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아나 브랑카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돈을 쓰지만, 그 돈도 실패한다. 어느 누구도 이사벨을 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사벨의 살해는 정당한가? 그 전에, 피멘타에 대해 살펴보자. 피멘타는 아프리카에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남았고, 기존의 가족과 똑같은 가족을 거울처럼 비추어 만들었다. 그는 불안을 보았고, 그 불안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세뇨르 바즈의 신임을 얻었고, 한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부인하지만 그녀를 이해한다. 그가 이사벨에게 살해당했을 때, 그는 이 불안에서 끝날 수 있었다. 이사벨은 그와 해왔던 이 모든 긴장어린 관계들을 순식간에 끊어버린 것이다. 거울을 깬 순간 피멘타는 해방되었다. 이사벨이 피멘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사벨은 백인을 죽인 흑인이 아니라, 남편을 죽인 아내로서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다.

  그 가루의 효과를 보는 건 한나 뿐이다. 그녀는 매음굴이 있는 대륙을 떠난다. 그녀의 사랑을 이해해 주는 선장을 만나고, 또다른 호텔을 잡아 들어가지만 그 곳 또한 그녀가 떠나온 호텔-매음굴과 마찬가지다. 그곳은 마룻바닥이 벌써 삐걱거린다’. 한나는, 아나 브랑카는 검은 아나로-모세스와 함께 이 불안한 낙원, 거짓 낙원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 성공은, 알길이 없다. 다만 모든 식상한 로맨스 소설처럼 그들이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 외에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 부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쓸모없는 죽음

-장강명 '댓글부대'를 읽고-

 

 

 

 

 

전쟁과 평화

    

 소설의 세 인물은 각기 닉네임으로 지칭된다. 소설에 나오는 커뮤니티의 이름은 작가가 뒤에 밝혔듯이 실존하는 커뮤니티들을 모델로 한다. 이 소설은 사실 온전한 픽션이 아니라 팩션이다. 소설은 사실일 법한이야기들을 엮는다. 그래서 소설은 늘 개연성과 허구라는 틀에 구속된다. 그러나 이 개연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사실을 끌어들이는 순간 소설의 가장 큰 능력이 사라지고 만다. 그건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디테일에 있는가, 그 디테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순간 우리에게는 악마가 찾아든다. 악마는 디테일로 우리를 유혹한다. ‘댓글부대의 디테일은 바로 세 인물이 지니는 욕망과 좌절, 그리고 헛된 희망이다.

 이 디테일들은 지극히 사실적이기에 빛나기 어렵다. 이철수와 어르신, 호화찬란하게 빛나는 호텔과 한 신문을 파괴시키는 공작들은 허무맹랑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다. 이미 우리는 수많은 근대사를 다룬 영화에서 얼마나 세상이 비현실적이 될 수 있고 부패할 수 있는지 목격해 왔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도 고백하듯 댓글 부대1차가 아닌 2차다. 2차는 1차적인 산물을 재가공한 것을 의미한다. 소설은 하나의 소설로서 독립하지 못한다. 반영과는 다르다.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절망들은 사실상 인터넷 공간에서 난무하는 이야기들, 좌절들을 그대로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게 20대의 초상이고, 우리는 이 초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소설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소설은 철저하게 현실을 묘사할 뿐이며, 현실의 거울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건가? 모든 소설은 확인에 불과한 것인가?

 삼궁과 찻탓캇 등의 인물들이 술집에서 만난 여자들에 의해 농락당하거나 돈을 뜯기고, 희망을 걸었으나 배신당하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녀들을 걱정하는 모습은 지극히 찌질하다. 작가는 이전에 댓글부대를 작업하기 전 한 인터뷰에서 지극히 찌질한 군상들을 그릴 예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찌질함은 우리가 익히 아는 찌질함에서 변하지 않는다.

 이 익숙한 찌질함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발언들 덕분에 이 소설의 가독성은 뛰어나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읽을 때 순식간에 읽었다가 장점이 될 수 있듯이, 이 가독성은 또다른 단점으로도 작용한다. 그것은 바로 드라마의 문제다.

 

 

 

 

죽음

    

 삼궁은 찻탓캇의 죽음을 몰랐을까? 이철수는 찻탓캇을 죽였을까? 소설에서 등장하는 20대 청년들은 주도자가 되었다가 피해자가 되고, 이내 장기말이 되어 버려진다. 이철수는 그 위에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어떤 역전을 바라지는 않았다. 희망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설은 지극히 위악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보는 적대 대상’, 그들이 의뢰받아서 파괴해야 할 대상들 또한 그들의 내부에 모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극히 착한 척하고 옳다고 믿는다. 그들만이 선을 구현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은 순식간에, 아주 작은 파문으로 깨질 수 있다. 임상진 기자와 찻탓캇의 인터뷰를 배제한다면, 어쩌면 그 작업은 그 댓글부대가 행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이미 파국은 왔다. 그들이 행동하지 않아도 정해진 것이다.

 다만 이 소설과 작가의 첫 발표 소설인 표백이 지니는 죽음의 층위가 조금 다르다. 물론 수적으로 봐서 표백이 압도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죽음의 경우 살기 위해 죽었다라는 역설이 있는 반면 이 죽음은 너무나도 허망하다. 쓸모없는 죽음, 그게 만약 이 현실에서 죽음이 통용되는 방식이라면, 우리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 말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재미를 추구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는 강한 죽음의 정서에서 나는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그는 계속 죽음의 쓸모에 대해, 효용에 대해 묻는다. 그렇다면 이제, 그 죽음은 여전히 똑같이 작용하면서 그 효과를 덜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 뒤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헤닝 만켈 '불안한 낙원'을 읽고-

    

 

 

 

아나, 이게 다예요.

    

  한나 뢴스트렘은 한나 룬드마르크가 된다. 한나 룬드마르크는 세뇨르 바즈의 부인이 되고, 미망인이 된다. 펠리시아와 사창가의 여자들에게 구조를 받고 살아난다. 그녀는 가난한 여자에서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게 된다. 포르스만의 자비를 갈구했던 그녀, 베르타처럼 그의 가재도구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그녀였다. 왜 그녀는 이사벨을 구하고자 했는가? 이 소설의 전반부에서 그녀의 첫 남편이 죽으면서 그녀 또한 죽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긴장감이 드리워지고, 점차 그녀가 새로운 로맨스보다는 생존하기에 급급해 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후반부에 갑자기 모세스라는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어떤 이유도 없다. 그녀는 스스로를 아나 브랑카라고 인식한다.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사유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인류애가 뛰어난 것도 아니며 괜한 오지랖이 넓은 것도 아니다. 혼혈인인 변호사 안드레가 아는 걸리버 여행기도 읽지 않았다고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그녀가 펠리시아의 뜻을 모르겠다고 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우리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때라고는,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때다.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때. 가난은 그녀를 쫓아내고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아프리카도 온전한 낙원이 되지는 않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을 껴안은 채 그녀는 불면증과 의심에 시달린다. 식민주의-개척주의는 사실 순수한 모험정신이 아니라 생존과 새로운 시장 자원의 개척을 위한, 죽음을 무릅쓴 항해의 결과였다. 그들은 전설의 섬 엘도라도를 찾을 수도 없었고 흑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공격했다. 어떤 인과론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했고 그 곳을 자신의 낙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세뇨르 바즈를 비롯한 백인 남성들이 흑인들에게 보이는 적의는, 아프리카가 온전한 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함구하려 한다. 그들은 흑인을 두려워한다. 이 곳을 벗어나면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나 브랑카도 마찬가지로, 그런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다. 만약 다른 곳이었다면 그녀는 세뇨르 바즈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그리고 이곳에서만 가능하게도 프로포즈를 받았다. 그녀가 아프리카 땅에서 맨 처음 배운 교훈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나 돌로레스에게서 배운 혐오를 그대로 행한다. 공격받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방어가 아닌 선제 공격이다. 하지만 아나 브랑카는 베르타를 기억한다. 그녀의 친구, 포르스만의 발치에서 집안을 치우고 엎질러진 차를 묵묵히 닦아내던 그녀를.

 

 

 

 

걸리버의 여행

 

  아나 브랑카, 한나가 아프리카에서 마주하는 이들은 백인과 흑인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병들고 지친 사람들이다. 그들이 벌이는 축제는 모두 가장이며, 거짓말이다. 그들은 공격받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 평온한 전장, “흑인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백인들은 현재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 아랍인과 인도인들은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진실이 파고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208p)” 그녀는 가장 최상위 카스트인 백인이다. 그녀가 매음굴의 창녀들과 사진을 찍기 위해 스스로를 동양풍으로 꾸민다 하더라도, 그저 우스울 뿐이다. 단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모든 수난들을 겪고 난 그녀는 지극히 멜로드라마에 해당하는 감상적인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행동들을 다시 돌이켜 보면,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이나 다른 백인-흑인의 대립 구도를 그린 소설의 인물들과는 다르다. 이 소설에서는 그녀의 어떤 의미있는 성찰보다는 질문이 많다.

 펠리시아는 매음굴의 창녀지만 그녀의 돈을 훔치는 대신 내버려 두고, 그녀를 간호한다. 그녀가 건네준 약이 어쩌면 세뇨르 바즈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설에서는 바즈의 자살 여부가 정확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펠리시아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아나 돌로레스와 같은 백인 여성이다. 그녀가 아나 브랑카를 두려워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흑인인 이사벨을 구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 또한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은 에스메랄다도 펠리시아도, 한나의 마지막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들은 계속 매음굴에 머물고 싶어한다. 이 곳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백인들의 세상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를 죽인 것이 백인처럼 흰 촌충이라 할지라도.

 라틴계의 갈색 피부를 지닌 안드레는 도둑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도둑이 되지 않는 법을 공부했다. 하지만 백인이 통치하는 세상은 그에게 매음굴에 들어갈 권한조차 내주지 않는다. 아나 브랑카는 공정한 거래를 위해 매음굴의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만, 애당초 매음굴 자체가 공정한 거래에 해당하지 않는다. 피멘타가 그나마 공정하다라고 말했듯이, 공정한 것에 조금 더 가까울지언정 공정하지 않다.

 바즈의 형 제는 피아노를 조율한다. 아나 브랑카가 이 불안한 낙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계시와 같은 그의 피아노 조율 때문이었다. 이곳에도 음악이 있고, 아름다운 합창이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 소리를 하찮게 여기거나 비웃는다. ‘조금 이상한 사람인 제는 카를루스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은 지극히 선량하게 보인다. 그는 어떤 날이면 아 마그리냐에게 구애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한다.

 이 불안한 낙원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미쳐야 하거나 끊임없이 불안에 떨어야만 하는가? 이사벨을 구하면서 아나 브랑카가 얻고 싶어했던 건, 어쩌면 떠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이 곳을 온전한 낙원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의 실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사벨은 살해당하고, 강인해 보였던 경비대장 설리번은 끝내 실패하며 모세스는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계속 재촉한다. 매음굴의 여자들마저도 그녀를 매음굴의 주인으로 볼 뿐, 아나 브랑카로 보지 않는다. 그녀는 실패한 것이다.

 

 

 

 

:출애굽

    

 이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주 단순한 유추지만, 모세스라는 이름은 출애굽기의 모세를 연상하게 한다. 한 때 예수가 흑인이었을 수 있다는 추측들이 떠돌곤 했다. 사실일지도 모른다. 아직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예수가 백인이라는 생각은 지극히 백인우월주의적 가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스는 맨 처음 이사벨을 구하려 한다. 그는 이사벨에게 먹으면 나비처럼 날아갈 수 있는 가루를 주지만 실패한다. 땅굴을 파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아나 브랑카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돈을 쓰지만, 그 돈도 실패한다. 어느 누구도 이사벨을 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사벨의 살해는 정당한가? 그 전에, 피멘타에 대해 살펴보자. 피멘타는 아프리카에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남았고, 기존의 가족과 똑같은 가족을 거울처럼 비추어 만들었다. 그는 불안을 보았고, 그 불안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세뇨르 바즈의 신임을 얻었고, 한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부인하지만 그녀를 이해한다. 그가 이사벨에게 살해당했을 때, 그는 이 불안에서 끝날 수 있었다. 이사벨은 그와 해왔던 이 모든 긴장어린 관계들을 순식간에 끊어버린 것이다. 거울을 깬 순간 피멘타는 해방되었다. 이사벨이 피멘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사벨은 백인을 죽인 흑인이 아니라, 남편을 죽인 아내로서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다.

  그 가루의 효과를 보는 건 한나 뿐이다. 그녀는 매음굴이 있는 대륙을 떠난다. 그녀의 사랑을 이해해 주는 선장을 만나고, 또다른 호텔을 잡아 들어가지만 그 곳 또한 그녀가 떠나온 호텔-매음굴과 마찬가지다. 그곳은 마룻바닥이 벌써 삐걱거린다’. 한나는, 아나 브랑카는 검은 아나로-모세스와 함께 이 불안한 낙원, 거짓 낙원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 성공은, 알길이 없다. 다만 모든 식상한 로맨스 소설처럼 그들이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 외에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마커스 주삭 '내 첫번째 여자친구는'

 '책도둑'으로, 순진무구한 화자가 성장해 나가면서 겪는 역사적인 고난의 상황들과 성장기를 아름답게 써냈던 작가가 이번에는 듣기만 해도 새콤해지는 성장담을 들고 왔다. 일단 제목이나 표지부터가 마음이 간지러워지는데, 겨울에는 사실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봄을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2. 이상우 '프리즘'

 한국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던 작가 이상우의 첫 소설집이다. 동명이인인 작가도 있지만, 그래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 그의 작품들이 궁금하다. 특히 현 한국의 상황을 어떻게 작가들이 보고 그려냈는지, 지금은 꼭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우에하시 나오코 '사슴의 왕'

 수많은 상을 타고 문화 인류학적인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은 책, 뿐만 아니라 병에 관련된 문학 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동물문학이 이토록 주목받은 적은 오랜만이다. 점점 사라져가는 자연에 대한 존중과-이는 인간의 삶이 버겁다는 이유로-살아남는 것과 생의 가치에 대해 고려해 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일 것 같다.

 

 

 

 

 

 

 

 

 

 

 

 

 

 

 

 

 

 

 

4. 코니 윌리스 '여왕마저도'

 코니 윌리스라는 작가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한국에서는 왜 마니아층에게만 소비되었는가. 장르소설이 작품적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는 편견 아래 외면되었던 경향이 있었지만 수많은 노력 아래 작가의 전집이 나왔다. 다른 매니아들도 있겠지만 이 매니아에만 한정된 작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5. 마리 유키코 '골든 애플'

 일본 추리 소설은 정말 따라잡을 수가 없는데, 거기에 장르적인 미래 세계를 무대로 삼는다면 어떨까? 설명이든 서사의 속도든 능수능란할 것만 같다.

6. 요제프 로트 '거룩한 술꾼의 전설'

 일단 연말과 연초에 어울리는 멋진 제목이다. 아마 리뷰를 쓰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이 거룩함에 대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제목에서 공감이 가고 궁금해지는 내용이다. 한번 꼭 읽어보고 싶은, 멋진 번역자의 멋진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