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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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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라는 신화

 -탕누어 '한자의 탄생'-

 

 

증식하는 길

    

  문자는 그림 기호에서 시작된다. 잘 듣는 사람,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청각에 대한 후한 대우에 비해 시각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각 요소이자 그로 인해 가장 쉽게 어리석어질 수 있는 감각이라는 혹평을 들었다. 하지만 장님인 보르헤스는 끊임없이 그의 앞에 놓인 어둠과 빛을 헤치고 문자를 통해 무언가를 보려고 시도했다. 본다는 것은 기본적인 감각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망각하고 지나가버린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게 할 유일한 수단이 된다. 그림 기호는 인간이 본 모든 것, 그의 생활이나 수렵, 목축, 생각한 것, 운명, 죽음, 탄생을 묘사한다. 라스코 동굴벽화는 원시인의 심심풀이가 아니라 그들이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기록이었다. 왜 그들은 기록을 남겨야만 했는가? 인간에게는 짐승처럼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가 있지도 않았고 몸의 크기 또한 어중간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이 아닌 도구를 통해 생존해야만 했다. 이러한 도구, 그들과 대립되는 타자로서의 동물과의 구분선을 또렷하게 그어준 게 아니라 인간의 위치를 하락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만들어내고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게 문자였다면 어땠을까. 눈을 크게 뜨고 언덕이든 산에서든 모든 것을 바라보기 위해 애쓰는 행동, 이 간결한 그림은 후에 이라는 한자가 된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보았던 것일까? 갑골문자에서 상형 문자로, 상형 문자가 이어 전주와 가차라는 길로 갈라지면서 한자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세세한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글자는 더욱 더 복잡해지고 늘어났다. 전주의 경우 기본적으로 문자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의미의 복사이며, 확장과 연상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사용 방식을 만드는 것이고, 반면 가차의 경우 의미의 연결을 고려하지 않고 소리로만 근거해 사용하는 것이다. 전주의 경우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뿌리와 같은 유사의 관계로 형성되는 언어를, 가차의 경우 상사적인 관계로 단절되면서도 묘하게 증식되어 가는 언어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전주의 경우 기존에 지니고 있던 의미-중심은 점차 불어나는 부분들에 의해 복사원본의 지위를 잃고 만다. 시뮬라시옹의 세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반면 가차의 경우 기존 상형 문자의 뿌리를 야멸차게 끊고 오로지 소리라는 실용주의에 의거한다는 저자의 평가가 있지만, 이 또한 새로운 접붙이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러한 형성과정을 통해 한자는, 세계를 하나의 지도로 그려낸다. 처음에는 일직선 길만 그려져 있던 지도는 골목길과 부분마다 위치한 상점, 나무를 그리면서 세계를 그려나간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지도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지도의 기호를 통해 세계를 상징화시킨다. 이러한 상징화는 보존의 취지만 지니고 있지 않다. 탈락 또한 가능해진다. 과거, 교통수단이자 힘의 과시, 생계 수단으로 중요했던 말을 가리키는 한자어는 말의 모습에 따라 세세하게 다 있었다. 무릎 위가 흰색인 말, 검푸른 말, 자주색 말, 몸 전체가 붉은 색이고 배만 흰색인 말. 과거와 달리 현재에서 말의 모습에 따라 말을 묘사하는 한자는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검정색과 흰색이 뒤섞인 말, 누런색에 흰 얼룩무늬가 있는 말, 역사적 서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말들만이 살아남는다. 또한 먼지를 뜻하는 진이라는 한자는 중국 공산당의 실용주의에 의해 6획의 한자가 된다. 39획에서 15, 6획으로 줄어들면서 말하거나 쓰기에는 더 쉬워졌지만, 이러한 쉬움은 과거를 어려움으로만 포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과거에는 사슴의 아름다움에 대해 빠짐없이 묘사하겠다는 욕심이 있었고 그 욕심이 글자에 반영되었지만, 현재 우리는 사슴을 보며 아름다움을 쉽게 느끼지 못한다. 동물원 철창살 안쪽에 있는 사슴은 무기력하게 두 눈을 꿈벅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라는 소설에서는 끊임없이 소설의 시작만이 번복된다. 소설의 주된 갈등이 소개되고 점차 흥미진진해지려는 찰나 소설은 누군가에게 빼앗기거나, 뒷부분이 잘못 인쇄되어 있거나, 번역을 방해받는다. 남성 독자와 여성 독자는 그들이 읽은 잘못된 책의 뒷부분을 알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한 교수를 찾아간다. 그 교수는 이미 죽어버린 사어인 킴메르어 담당 교수다. 그는 소설을 번역해주지만, 그 소설이 이미 끊겨져 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번역해줄 수 없다. 그러한 난관의 봉착 앞에서 킴브리어 소설이야말로 킴메르 작가의 끊긴 결말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유혹적인 제의 앞에서 그들, 독자들은 뒷 이야기를 듣기를 기대하지만 거기서도 똑같이 시작만이 번복되어 번역될 뿐이다. 게다가 그 시작도 다르다. 한 문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 또한 끊임없이 변이되고 소멸되거나 튤립 구근처럼 땅 속에 가만히 묻혀 있다. 과거 중국 한자에서 사멸한 문자가 일본의 섬 이름이거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일본 선수의 이름에 턱하니 박혀 있을 때 마주하는 난처함은 동시에 과거 문자가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이러한 희망은 끊임없이 중국 한자의 모태인 그림 기호-상형자와 갑골문자에 대해 해석하게 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의 문자는 어떠한가? 과거 노자가 내게 큰 우환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내 몸 안에 있다라고 말할 때 쓴 신이라는 문자는 인간의 배 안에 조그마한 점이 하나 있는 상형문자에 기반을 둔다. 그 그림 기호에서는 큰 배에 비해 아주 작은 점이 눈에 분명하게 보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시해버리고 싶지만, 차마 무시해버릴 수 없는 또렷하고 작은 검은 점. 그러나 이 정언에 쓰인 한자는 타락한 10대 남녀 아이들이 불장난을하고 나서 직면하는 절망적인 깨달음이 되고 만다. 그들은 그들의 실수가 자신의 몸 안에 어떤 흔적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이를 직면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에서 깨달음이란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학교와 직장, 세계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인다고 착각한다. 깨달음이란 타자에게서 무언가를 찾는 것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슨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재차 알게 되는 것이다. 과거 인간은 깨달음을 통해 문자를 만들었고, 문자를 통해 기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달았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의 언어는 철저히 자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실용주의와 자본적 가치하에 선택해야 할 것이 되어버린다. 중국 공산당이 추구했던 복잡한 한자어의 간소화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 언어의 단일화를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저자가 말했던 경험처럼 대만의 경제정치구조에서 대만식 중국어는 그 중심에서 밀려나고 영어와 일어만이 중요시되며, 이러한 차별은 동시에 대만식 중국어의 사멸을 불러오고 언어의 단일화가 외국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직 자본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배우게 되면서, 언어에 대한 관심 또한 자연스레 소홀해진다. 아니, 언어는 또다른 자본적 가치의 획득 수단이 된다. 더 높고 더 밝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람들은 가장 많이 쓰는 언어를, 상류층의 언어를 배우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들의 존재를 빛나게 만들어주기는커녕 더더욱 급박하게 만들 뿐이다. 과거 사람들이 당하였듯. 우리 또한 바벨탑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선공의 세계

    

  그렇다면 한자에 대해 소홀해졌다는 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과거의 한자로 되돌아가야만 하는가? 저자는 급작스러운 단일화를 추구하는 진보도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만, 회귀를 주장하는 것 또한 퇴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어라는 언어는 그들에게 의사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언어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령 보르헤스와 바르트가 한자를 통해 중국인들이 쉽게 지나칠 수 있었을 환경에 대해 감탄하며, 한자어의 모습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또한 한자가 그들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더 찾아낼 수 있었던 계기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발터 벤야민의 모습과 유사한 상형 문자는 후에 덕이 된다. 어떤 격려나 찬양이라는 쉬운 풀이보다는 왜 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단순히 가차라고 판단하며 상형 문자와의 고리가 끊겼다고 한탄하기보다는, 그러한 벤야민적 모습이 어떻게 덕이 될 수 있는지 되짚어 보는 것이다. 이는 벤야민이 파리 시내를 걸어다니면서 찾아내고자 했던 어떤 것, 유대인 혐오가 들끓었던 독일이라는 모국을 떠나 파리라는 이국에서 그가 간절하게 생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벤야민은 제2제정기 파리에 살았던 보들레르를 통해서 그가 마주한 참혹한 현실을 분석하고 이를 구원해 낼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하고자 했다. 하지만 보들레르는 벤야민보다 훨씬 더 예전에 죽었고, 그 때의 파리와 벤야민이 있는 파리의 시간차는 어마어마하다. 벤야민은 단순히 보들레르로 도피하거나 보들레르를 남용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래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청각의 경우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통해 몇분 뒤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게끔 한다.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에 대한 우월감은 동시에 청각과 후각을 속일 수 있는 계기로 역작동하기도 한다. 반면 시각의 경우 미래를 볼 수 없으며, 단지 현재를 끊임없이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현실에 어떤 흔적을 남긴다. 보들레르는 자본주의와 스노비즘이 팽배한 현실에서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어떤 가치’, 다 늙어빠지고 퇴물 취급 당하며 흉측해진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벤야민 또한 마찬가지로 이제는 나치스의 나라가 되어버린 독일, 그리고 이에 속속들이 동조하면서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세계의 시선에 맞서 그들이 묻어버린 가치를 다시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덕이라는 단어는, 어떤 소중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의 과정에 지치지 않고 끈질기고 지고지순하게 탐색한다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레비 스트로스의 수선공에 대한 개념 또한 이와 연계된다. 수선공의 가방에는 과거 사람들이 무심코 버리거나 지나쳤던 것, 잊혀졌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수선공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전의 것을 통해 현재의 상처를 치유하고 대처하는 사람이며, 그의 손에서 과거의 것은 끊임없이 현재의 것으로 회귀된다. 저자는 한자의 탄생이라는 과거를 통해 현재의 대만을, 고급 클럽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쓰고 타자의 존중이 아니라 타자에 매몰되는 대만의 모습을 우려하며 덕의 태도로 이러한 사태를 관망하고, 이어 고려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에게 한자와 중화주의에 대한 오만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그 오만함을 통해서 끝까지 붙잡으려고 하는 한자 주체에 대한 위기의식을 숨김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공감성-한글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으로서-과 전이된 위기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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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알라딘 신간 평가단 <인문/사회과학/만화/예술>

 2월 1일~28일 출간된 작품들을 기준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이번달 리뷰 도서의 굵기가 정말 베개로 쓰기 딱 좋겠네요. 각각 번갈아가면서 베고 누워서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민음사, 2015/2

 

 롤랑 바르트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을 때, 그는 치료를 거부했다. 그의 생에서 죽음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되살아나는 것, 죽음의 고통보다 더한 정신적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전에 그가 썼던 모든 기록들은 그의 절망들을 남김없이 담고 있는 데 반해 텍스트와 세상의 기호들에서 어떤 희망의 가능성을 찾고 싶어하는 흔적이 보인다. 그의 마지막 강의는 그의 '마지막'이자 '미완'을 알리며, 동시에 우리가 이 시대에서 '포기'가 아닌 '희망'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리는 '끊겨진 보물의 지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기간>

줄리엣 미첼, 도서출판 b, 2015/2

 

 프로이트의 이론은 인문학의 기본으로 자리잡은 만큼 따분하고 고루한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가 계속 이어진다는 건 사실상 프로이트가 인간이 외면할 수 없던 어떤 지점을 분명히 짚어냈으며, 이 발견이 단순히 프로이트의 독자성을 알리는 창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아야 할 어떤 인간의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줄리엣 미첼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보이는 '증오'의 고리를 다시금 심화해 풀어내보고자 하며, 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와 연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유착의 사상>

도미야마 이치로, 글항아리, 2015/2

 

 미군 기지 유치와 학살의 역사로 인해 오키나와는 일본에 속해있는 나라이되 일본에 반발하는 지대였다. 한국과 적대적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강박과 함게 그들의 미래와 점차 유사해져가는 현실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오키나와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외면하고 있다는 현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이 계속해서 진행되어 오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쓰고 태워라>

샤론 존스, 자음과 모음, 2015/2

 

 강렬한 제목과 타이포 그래피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제 현대 사회에 문맹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읽는 데에서 나아가 거침없이 '쓴다'. 그리고 그걸 지우면 다시 여백이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동시에 '쓴다'라는 것의 가치가 떨어져버렸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한다. 쓰고 태우라는 이러한 번제를 통해 쓰는 행위는 다시금 가치를 되찾으며, 쓴다는 것의 무게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아들이 부모를 간병한다는 것>

 히라야마 료 짓고 우에노 지즈코 해설하다

어른의 시간, 2015/2

 

 출판사의 이름만큼이나 <부모의 간병>이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부모의 인권인가, 아들의 인권인가? 보통 가장 쉬운 이데올로기는 한 편만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흑백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특히 지은 사람과 해설이 따로 있다는 점은 그러한 '공평성'을 위한 것이리라. 우에노 지즈코의 해설 또한 개인적으로 기대된다.

 

 

 

 

<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의 이런 하루>

마스다 미리, 이봄, 2015/2

 

 

 신간 평가단 분야에는 분명히 만화도 껴 있는데, 사실상 만화를 추천해도 다른 분들은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금 섭섭하다. 물론 만화 중에서도 인문학과 사회 현상을 잘 반영하는 만화여야만 이 분류에 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평범한 일상을 다루지만, 그 일상은 우리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늦은 결혼, 황혼, 현 사회의 인구의 노령화에 대한 담론들이 만화 속에서 인물들의 소소한 대화와 함께 묘사되고 녹여 나올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그렇게, 부담없이 보여질 수 있어서 좋다.

 

<심미주의 선언>

문광훈, 김영사, 2015/2

 

 이 책 좀 무섭다. 현실에서 떨어진 미적 탐구라고 비판받기도 하며 그의 심오한 사유의 깊이를 찬양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렇게 솔직한 선언, 찬반을 불러일으키는 선언을 읽고 나면 내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버리게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 애당초 그럴만큼 깊지도 않았지만...서점에 잔뜩 놓여 있어도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는 걸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책을 사두고 두려워하고 있을지 내심 상상이 된다. 내 편견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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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섬 2015-04-01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과예 신간평가단 추천 목록 구경하느라 들렀습니다.
와 이달에는 7권이나 추천해주셨네요? 이달엔 어떤 3월 책을 추천해주실지 기대됩니다^^
유쾌한 만우절 보내세요!!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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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라는 공간)(인간에 의해) 어떻게 작동하는가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읽고- 

 

 

 

 

 

 

  우롱탕의 정치 

 

  현대의 역사는 경제사다. 근대 부르주아의 태동과 함께 소득의 축적은 신분의 상승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분 상승의 기회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조 아래 슬로건처럼 내걸렸고,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근검절약하는 자린고비가 모범적인 인간상이었다. 낡은 단칸방에 살면서도 수억대의 자산을 베개 속에 숨겨 놓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미담들이 전설처럼 떠돌았다. 과거를 미화할 생각은 없지만, 당시에는 지나친 소비가 흠이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호모 콘수무스, 소비자로서의 인간이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현재 지닌 정체성을 규정하고 지향하는 정체성을 좇아가고자 한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쓰는 물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그 연예인처럼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입증하는 소비인 셈이다. 때문에 연예인이 실제로는 그 제품을 쓰지 않는다라는 말은 엄청난 폭로가 되고 나아가 배신감을 안겨주기까지 하는 계기가 된다.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코스트코와 롯데월드, 두 공간은 소비사회의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공간이다. 다른 마트들과 달리 회원제로 운영하는 코스트코의 경우 일정한 카드와 현금만이 결제가 가능하다. 입장권을 두 번 확인하는 셈이다. 또한 동네 마트에서는 사먹어 볼 수 없는 미국의 음식들이 시식대를 차지하고 있으며, 싼 가격에 다량으로 포장된 물건들이 그득하다. 아메리칸 드림의 현실성이 부정된 지금,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이 재현되는 것이다. 누구든 돈과 회원권만 있으면 새로운 맛의 과자를 사먹어 볼 수 있다. 부드러운 쿠션도 최신 카메라도 구경할 수 있다. 소비는 여가가 된다. 롯데월드는 놀이 공원이지만 누구든 들어와서 즐길 수 있게 만든 공간이 아니다. 담으로 둘러쳐진 공간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일정한 돈을 내야 한다. 미키 머리띠를 쓰고 풍선을 든 채 환하게 웃고, 도날드덕이 그려진 오므라이스를 먹으면 모두가 원하는 디즈니의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다. 악인이 벌을 받고 선인이 행복해지는 디즈니 동화의 법칙은 현실에서는 돈이 없는 자와 돈을 가진 자로 전이된다. 꿈을 재현한 공간은 동시에 자본을 요구하면서 꿈을 기만한다.

  오히려 오늘날 노골적으로 자본을 요구하는 공간들의 경우, 공간의 기만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공간이 문제가 되는 순간은, 공간을 일정한 의미의 장소로 환원하는 인간의 의도가 작동할 때다. 매번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정한 계층만을 우대하고 소통을 피한다는 비판을 받을 때마다 그들이 가지 않을 공간, 전통 시장이나 골방촌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그들은 서민들의 음식이라고 표방된 김치찌개나 설렁탕을 맛있게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설렁탕 한 그릇으로 우리는 그들을 너무나도 쉽게 믿는다. 그들이 실제로 설렁탕을 먹더라도 시장 국밥집에서 먹을지 고급 한식 레스토랑에서 먹을지 확신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개천에서 이무기가 익사한 날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있었다. 노력하면 이무기도 용이 된다는 것이다.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찬 수많은 사람들이 용이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날아오르진 못해도 용트림을 할 날만을. 그러나 책에 인용된 박민규의 갑을 고시원 체류기에서도 보이듯, 고시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뿐이며, 그들을 을로 주저앉히고 고시원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은 이다. 을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만 그 시도는 가로막힌다.

  왜냐하면 그들의 거주지는 고시원이며, 그 거주지는 그들의 계급적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본질적 거주가 고시원과 일치하지 않을지라도-그들의 본질은 현실 거주지에 기반해 판단된다. 사람을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어 귀하게혹은 마구 자란것으로, 혹은 집안의 소득 상황을 파악하는 것처럼.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그의 본질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공간에서의 거주를 통해 형성이 가능하다. 심적인 고향,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하고 모든 사유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공간은 인간에게 개별적인 의미의 장소가 된다. 인간은 공간을 통해서 인간이 되고, 또 공간을 규정함으로써 인간이 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그가 속한 공간에 의해 규정될 뿐, 공간에 의미를 더해 장소를 창출하지 못한다. 모든 공간에서 인간은 월세가 끝나면 깨끗이 씻겨나가야 할 오물과 다를 게 없다.

  그러한 공허를 부정하고 뿌리를 내리겠다는 환상으로, 사람들은 성공하고 싶어한다. ‘성공을 통해 어딘가에 안심하고 정박할 수 있다면, ‘월세 전세 대란에 휩쓸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의무교육을 좇아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겨 다니는 아이들을 이길 방법은 없다. 학원은 그들에게 현실을 넘어선 미래까지 준비하도록 가르친다. 그러지 못한 아이들은 현실이라는 역풍을 헤치고 나아가느라 정신이 없다. 결국 사교육은 부모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을 현실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한 구명조끼가 된다. 설령 그 구명 조끼가 불량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아이를 맨 몸으로 바다에 빠지게 할 사람은 없다. 수영을 배우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구조는 매일 변화한다. 홍대나 신촌이라는 번화가의 가게들이 몇 달 가지 못하고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길을 잃고 만다. 결국 모든 노력이 용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이무기는 현실에 의해 익사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 로또 복권, 생명 보험

 

 

  한 때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던 교회 세습 사건이 있었다. 한 대형 교회의 목사가 은퇴할 즈음이 되자 그 아들들이 교회의 소유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단순히 소문을 퍼뜨리는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장로 뻘이 되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폭력을 사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은 그 곳에 없었다. 한 때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경찰의 단속을 피해 숨어들던 불가침영역이었던 성지는 사라졌다. 이제는 금싸라기 땅에 선 사업체일 뿐이다. 종교의 신실함을 통해 사람의 됨됨이를 볼 수 있다는 믿음조차도 고갈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어디로 향하는지 믿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우리가 믿을 것은 매주 방송되는 로또의 추첨 뿐이다. 사람들은 로또의 공이 굴러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그 공이 뽑히고 숫자를 말하는 아나운서의 입을 응시한다. 만약 1등과 2, 3등이 나중에 발표되는 식이라면 로또를 믿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 앞에서 로또의 숫자가 정해지는 과정을 보면 자신이 찍은 숫자가 나오기를 빌게 되고, 그 간절함은 마법을 현실로 바꿀 것처럼 강력해 보인다. 하지만 과연 로또에 당첨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로또 복권을 파는 장소는 크게 버스 정류장 앞과 편의점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다. 출퇴근 중에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다. 졸린 눈을 겨우 뜨면서 내릴 역을 지나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사람들 사이에 낑겨 겨우 내리고 탄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간단한 끼니를 사가고 담배 한 갑이 오른 가격에 혀를 차며 돌아선다. 그 와중에 당첨자가 여기서 나왔다는 플래카드를 보면 그들의 마음은 흔들린다. 복권을 통해 빈민층을 돕겠다는 홍보는,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빈민층이 아니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복권을 사는 사람들은 복지를 베풀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쩌면 복지를 받아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로또의 희망에 메말라갈 때, 그들은 생활이라는 공간에 억눌린다. 월세와 전세의 대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가족을 이룬 이들은 더더욱 그들의 자녀 문제로 갈등한다. 혹은 그들이 책임지거나 책임을 져줄 사람들을 위해서. 사람들은 그들이 빠진 자리로 그들이 잊혀지기를 걱정하기보다는 손실이 날까봐 걱정한다. 장례식장은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처리에 드는 금액이 점점 늘어나는 곳이다. 그들은 손실이 된다. 부조금은 그들의 손실을 어느 정도 메꿔주기는 하지만, 완전히 메꿔줄 수 없다. 그들의 생명에 일정한 가격을 부담하는 생명보험이 절실해지게 되는 것이다.

  공간은 그 공간을 점유하는 인간을 통해 일정한 의미의 공간이 되며, 인간은 공간에 의해 일정한 의미의 인간이 된다. 계급화의 진행은 부유층의 은폐가 아니라 노출로, 이너시티에 속해 도시 공간의 엔진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은폐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국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서울의 공간 뿐 아니라 서울(이라는 공간)(인간에 의해)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부제를 숨기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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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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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나라의 절망한 늙은이들을 위해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고-

 

 

 

 

 

 

 천국과 지옥

 

 

  행복과 불행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오사와 마사치가 연구를 통해 내린 불행의 정의를 언급한다. 불행은 지금의 불만족과 미래에 다가올 행복에 대한 희망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떨까? 현재의 불행이 미래의 행복을 담보한다면, 현재가 될 미래에서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이를 기반으로 행복에 대해 말한다. 행복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각고의 고통과 노력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는, 자수성가 신화의 폐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만연한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이 되는 것은, 선천적인 계급성으로 명명된다. 한국 드라마에서 주인공에게 자수성가의 신화보다는 숨겨진 가족의 비밀이 있는 편이 더 신빙성이 있을만큼 상류층으로의 진입은 불가능해 보인다. 혹 숨겨진 출생의 비밀이 없는데도 상류층으로 진입하는 주인공의 경우, 그 사람의 독한 근성이 주목된다. ‘황금의 제국왔다 장보리의 경우, 주인공은 선인과 악인의 경계를 쉼없이 오간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냉각된 사회구조는 그대로 지속된다. 그들의 시도는 헛된 것이 되어버리며 시청자들은 배드 엔딩에 대해 익숙해진다.

  젊은이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영국 산업혁명 당시 어린이의 정의가 달라졌던 것처럼, 연령대에서 직업의 유무 등 여러 기준이 제시된다. 과거 일본의 젊은이었으나 이제는 젊은이들을 한심하게 보는 단카이 세대들은, 현재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보며 혀를 찬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포부나 도전심이 없으며, 끈기도 없고 지적인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우둔한가? 파도에 모래성이 무너져도 끊임없이 모래성을 짓고 또 짓는 게의 모습에 눈물짓고 응원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응원은 언젠가는 무너지지 않는 모래성을 지을 것이라거나 파도가 안 오길 바란다는 의미의 응원이 아니었다. 실패 앞에서도 계속 일어나는 끈기를 응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끈기는 무엇에든 쿨함이 우선인 현대 사회에서는 멍청하고 아둔한 것으로만 보일 뿐이다. 아니, 이미 미래에 대해 배우고 알고 있는 이상 예지된 실패의 미래를 앞당겨 올 필요가 있겠는가? 젊은이들이 가미가제라는 내셔널리즘의 희생물이 되었던 과거와 달리 행복한 젊은이들은 내셔널리즘이라는 유령보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나라를 지키자는 운동마저도 분신이나 비장한 결의를 다지는 대신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과의 연대와 소통으로 여긴다. 한국 또한 마찬가지로, 어떤 시위에서 일정한 상징물을 도입하거나 춤, 노래로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동시에 진지하지 못하다라는 비판을 받는다. ‘진지함이 강요되는 것이다.

 

 

 

  이지메의 사회학

 

  그들은 젊은이들을 진지하게대하고자 한다. 그들의 농담이나 패션에 대해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어보고 정의를 내린다. 마치 병에 대해 그 증상을 관찰하고 진단을 내리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처방을 내린다. 처방은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닌다. 하지만 세계의 병리사에서 수많은 처방들이 제시되고 폐기되었다. 그리고 처방을 통해 원래대로 돌려놓을 젊은이는 어떤 모습인가?

  문제가 있는 요즘 젊은이를 지칭하면서 발칙하다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젊은이가 아니라는 증거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이러한 부정적인 비판을 통해 성립되는 것은 단순히 젊은이에 대한 정의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형성되는 젊은이반대 편에 속한 사람들의 정의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정의를 통해 젊은이에 대한 대오와 각성을 부르짖으며 그들의 멘토가 되는 대신, 그들에 대한 맹렬한 질투심과 불안이 드러난다고 본다. 그들이 끈질기게 일하면서 정사원이 되어 세금을 꾸준히 내야 할 테고, 그들의 소비를 통해 새로 나오는 물건들이 소비되어야 일본이 유지된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이제 그들을 희생해 일본의 대틀을 세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한국 은어로는 리얼충, 현실을 지키고 싶어하는 리아주에 가깝다. 국가가 뭘 해주었는지 묻지 말고 국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말에 수긍하기보다는 이를 강압으로 받아들이며 되묻는 것이다. ‘국가가 뭔데요?’

이소마에 준이치의 상실과 노스탤지어에서 천황은 일종의 국가 신교로, 일본이라는 내셔널리즘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이러한 국가 신교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금기가 된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소비하는 애니메이션에서 천황은 여러 가지 이미지로 변형되는 패러디이다. 진지함은 상실된다. 천황을 떠받드는 반대축들은 이에 반박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라고 한다면, 그 반대축에 있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상대화를 통해 자신을 옳은 측으로 정의하고, 그른 쪽을 비판하지만 정작 그러한 그름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어떤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지메, 왕따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도 그런 따돌림을 당할 만한 원인이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며, 평생 가지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그 원인이 과연 그의 탓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지메는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집단이 사람이 아닌 집단을 위할 때는 더더욱, 집단의 규격에 맞지 않는 이들을 떨쳐내고 이들을 으로 정의하면서 집단은 집단으로서 유지된다.

 

 

  전차남 신화

 

  결혼도 연애도 개인의 만족을 배가시키기 보다는 끊임없는 노력과 희생을 요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서로의 윈-윈을 위한 협상이 아니라 어느 한쪽이 이기고 지는 게임에 가깝기 때문이다. 게임과 연애의 차이점이란 게임은 실패했을 때 끄고 다시 하거나 아예 그만 둘 수 있지만, 연애는 그 상처를 계속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에서 지는 것 또한 상처가 될 수 있지만, 게임은 게임에서 실패한 자에게 복수심을 품지 않는다.

  일본에서 드라마와 만화, 소설로 유명해진 전차남의 경우, 인터넷과 오타쿠 문화에 익숙해진 남자와 인터넷에 대해 잘 모르는 여자의 만남을 소재로 삼는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처럼 제시된다. 에르메스 명품 접시를 선물하는 여자의 부유함과 예의바름, 공손함은 부각되며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주인공의 고충은 눈물겹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에게 대화법연애 코치를 받는다. 최대한 오타쿠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가끔씩 드러난다. 왜 오타쿠임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가. 그들이 서로 교제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같은 세계 사람이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에르메스와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고 애써 가장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만약 젊은이들을 상대화해 정의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전차남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기며, 에르메스의 착한 심성에 주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전차남의 세계로 건너오지 않으며, 전차남도 에르메스의 세계로 건너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결국 실패하는가? 그들은 성공한다. 그들이 원했던 건 서로의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어도 사랑할 수 있는, ‘만남을 원했던 것이다. 그들을 방해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그 노력에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 주변에서 견고한 세계에 속한 이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질투하거나 의아해하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거릴 것이다.

  현대 사회의 전차남은 존재하는가? 개인에게 의미 있는 개인적 신화의 형성은 가능할 것인가. ‘행복한 젊은이들에게 세계적인 인물이 되겠다는 야망이나 질투심은 이미 소멸한 듯하다. 다만 하나 희망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있었다면, ‘전차남에서 주인공을 인터넷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이 그와 동년배에 똑같은 흥미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응원을 통해 맺어진 연대의 감정은 그들로 하여금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드라마라서 더 희망적인 면이 있을지도 모르고 전차남을 방해하는 사람도 인터넷에 있었지만, 그러한 긍정적인 면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아무런 진보의 미래가 없다고 주저앉은 절망의 나라에서, 철저하게 개인화된 독방을 발명했지만 행복한 젊은이들은 그 독방을 넘어서는 연대를 발견해 행복

을 살아가려 했다.

비일상이 일상이 될지라도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토끼굴을 찾아 뛰어든다. 토끼굴이 없어질 미래보다는, 눈앞의 굴을 향해서.

 그렇다면 결국, 이러한 치킨 게임에서 진정으로 불행해지는 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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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골리앗>

 영국 만화가 톰 굴드의 대표작, 우두커니 앉아 있는 골리앗의 형상에서는 골리앗이 짓고 있는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다윗에 대입해 왔고, 골리앗은 그저 절대 악에 불과했다. 굴드의 만화는 과연 어느 쪽을 비추고 있을까.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이 흔들릴 때 태어난다. 이 만화는 어쩌면 우리에게 그 균열이 일어난 틈새를 보여줄는지도 모른다.

 

 

 

 

 

 

 

 <모스크바 일기>

 편지는 가벼운 종이 위에 무거운 펜촉으로 내리찍으면서 써나가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유대인을 탄압하는 독일의 공기 속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내려간다. 그게 농담 따먹기이든 진지한 이야기이든, 그 속에는 벤야민의 면모가 담겨 있다. 우리가 말로 하지 못하는 긴 속내를 써내려간 편지를 읽는다면, 독일 철학의 난제로 꼽히는 벤야민의 상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앙드레 말로: 참나무를 쓰러뜨리다>

 앙드레 말로와 프랑스의 샤를 드골과의 대담집. 우리 나라 정치인과의 대담집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왜 외국의 대담집을 읽어야 하는지 되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성과 이성, 문화와 정치라는 이분법적인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중간 지점을 찾기 위해 둘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러한 시도 끝에 프랑스는 나아졌는가? 설령 나아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날까지도 그 시도는 포기되지 말아야 한다.

 

 

 

 

 

 

 <여론과 군중>

  타르드의 저서, 우리는 군중의 하나이지만 군중에서 예외인 것처럼 쉽게 생각한다. 군중이 여론을 형성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론 또한 군중을 움직이고 형성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모순에 대해 더 깊이 깨달아야 한다. 폭력이 일상화되고 내리찍는 압력이 점점 강해질 수록, 우리는 더 민감해지기 보다는 무뎌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창조>

 우리는 모두가 함께 살아나갈 유토피아를 꿈꾸었는데 왜 불평등이 강화되는가. 선험적인 피와 신분에서 후천적인 자본에 이르기까지 불평등은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도 똑같이 번복된다. 개인주의 주창과 다르게 불평등에 다들 굴복하라고 강요하는 전체주의적인 모순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불평등의 아주 단순한 단계, 그 시작까지 내려가 보아야 한다. 아직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자신의 곁에 종속시키기 위해서, 그가 혼자서 틀어박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평등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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