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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편혜영 '홀'

 단편소설로 익숙했던 작가는 어느새 장편들을 연달아 내놓는, 엄청난 필력을 자랑하는 작가가 되었다. 긴장감 있는 서사와 점점 의미심장해져 가는 서술들이 어우러져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번 작품은 특히나 표지도 그렇고 완성도가 높다는 평이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작가의 저력을, 여류작가의 작품이라는 일종의 정형화를 벗어던지며 새로운 소설로 나아가는 모습에 이번 작품이 더더욱 기대된다.

 

2. 사라 허스트베트만 '불타는 세계'

 여러 분야의 학문들을 오가면서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 소설이 한 인간의 삶을 다룬 것에 불과하다면, 그 인간을 구성하는 것들은 과연 그렇게 단순할 것인가? 사라 허스트베트만의 넓은 지식만큼이나 그가 써내는 소설도 얼마나 깊을지 기대된다. 무엇보다도 여러 화자의 시선들이 얽매여 있다는 것들이 매력적이다. '불타는 세계'라는 말만큼이나 이 모든 학문들이 어떻게 밀집되고 타버릴 것인지 궁금하다.

 

3. 미야베 미유키 '비둘기 피리 꽃'

 역시 최고의 생산력을 자랑하는 미미여사 답게, 또다시 신작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기대가 사그라들기는 커녕 덕분에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번에는 어떤 작품일지 기대된다. 무엇보다도 미미여사는 기존 추리소설에서 여자가 피해자거나 사악한 가해자, 동조자에 불과하다면 이제는 주역으로 떠오르는 게 대단하다. 미미여사의 소설에서 나오는 여성 인물들의 역할에 대해 써보는 게 어떨까? 너무 좋다.

 

 

 

 

 

 

 

 

 

 

 

 

 

 

 

 

4. 폴 하딩 '에논'

 프리지아처럼 샛노랗고 햇빛처럼 아스라하게 부서지는 느낌의 표지. <에논>은 하딩의 두번째 작품으로 그의 퓰리처 수상이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는 걸 입증했다고 한다. 꽃을 한 손에 든 채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 기뻐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곧 다가올 슬픔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멋진 표지에 멋진 내용이 기대되고, 번역 문장이라 해도 아름답다는 평에 너무 읽어보고 싶다.

 

 5. 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 '못생긴 여자'

 좋아하는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의 상을 받았다는 작품. 작품 제목으로 보면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생각나지만, 그 작품에서 어떻게 다른 식으로 나아갈지 기대가 된다. 박민규의 경우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그 여자의 이야기다. 단순한 열등감의 표출, '못생긴 여자'에 대한 세간의 편견을 다시 한번 써내려가는 소설이 될 지 아니면 어떤 다른 시선을 보여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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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리스 레싱 '그랜드 마더스'

 ->황금 노트북이라는 장편과 노벨문학상으로 유명세를 거머쥔 도리스 레싱, 그녀의 작품이 정점에 달했다는 악평도 있었지만 그녀의 소설력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여성을 통해서 세계를 그려내고, 그로서 보편성으로 다가가는 작가. 이 작가는 여성이라는 자신의 성을 통해서 어떻게 개별성이 보편성에 다다를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것도 그런데 표지가 너무 예쁘다. 약간 그리스풍의 디자인이 좋은 것.

 

2. 주노 디아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 유머러스하고 재기발랄한 주노 디아스의 문장은, 그러면서도 아픈 구석을 놓치지 않고 깊숙이 꾹 찌르고 넘어가는 게 있다. 이번 제목도 뭔가 우스우면서도 어떻게 잃었는지 궁금해지는 것.

주노 디아스의 작품들이 다 10-20대에 머무른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 작가의 성장 궤적이 궁금하다. 그 궤적을 같이 따라가는 느낌이라 더 좋다.

 

3. 이기호 '왠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 이기호와 한방에 있으면 하루 종일, 밤새 이야기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다. 그의 단편 소설들 묶음이 나왔다는 소리에 부담감보다는 기대가 되고, 읽으면서 계속 웃을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다. 이번 제목도 뭔가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는 느낌이라 좋고, 표지도 귀엽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볼 이기호의 단편들이 기대된다.

 

 

 

 

 

 

 

 

 

 

 

 

 

 

 

 

 

 

 

 

 

4. 미야베 미유키 '음의 방정식'

-> 역시 미미 여사다. 솔로몬의 위증 이후로 계속 써내더니 이번에 또 멋진 표지에 멋진 제목의 추리소설로 돌아왔다. 현 사회가 시끄러울 수록 그녀의 창작은 더욱 더 끓어오르고, 그 속에 있는 사회에 대한 그녀의 시선이 어느 순간부터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걸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그냥 흥미로운 미스터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사소하게 스쳐 지나가는 등장인물의 대사나  태도가 우리의 아픈 상처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5. 니븐 '핀치 & 바이올렛'

-> 사실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고 표지도 예쁘다. 상도 탔다는 소리를 들으니 모험을 해보고 싶어진다. 사람들은 이제 명작을 뽑아 읽으려고 하고, 그건 독서의 실패를 줄이기 위한 수단이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좀 기대된다. 게다가 제목이 너무 예쁘네. 이 작가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어서 이 말밖에 하질 못하겠다. 하지만 어떤 첫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6. '타인들 속에서'

 -> 제목과 디자인이 딱 시리즈의 느낌을 풍긴다. 소설 내용 소개를 보는데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본 영화에서는 옆집의 노파가 알고 보니 마녀였고, 마녀의 마술에서 풀려나기 위해 주인공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번 소설은 엄마가 마녀란다. 게다가 악의 편에 엉겁결에 서버리게 된 주인공이라니. 그녀의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들에 불과하다. 제목도 내용도 마음에 든다. 소설도 재미있을까? 때때로 도박은 대박이거나 쪽박으로 그치곤 한다. 신간인 경우 더 그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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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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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우리 몫의 돌
-조이스 캐럴 오츠의 '그들'을 읽고-




 모든 것이 로레타의 것

 로레타는 삶을 사랑해왔다. 그녀는 버니를 사랑했고, 오빠 브록을 사랑했으며, 아버지마저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모든 긍정이 현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의 오빠 브록이 총을 들고 다니며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는 양 으시댔던 것처럼, 그녀 또한 자신의 젊음을 무기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워드 웬들과 결혼하고 난 다음, 기나긴 시골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디트로이드로 떠났을 때 그녀가 잡은 건 그녀의 친구 리타 뿐만이 아니었다. '고작 스물다섯'밖에 되지 않은 자신의 생이었다. 그녀의 자식들이 생기고 그녀가 점점 늙어갈수록,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카드패가 점점 줄어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위기감을 느낀 그녀는 자신의 카드패들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카드패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녀에게 내던질 수 있는 카드들은 너무나도 적었다. 로레타는 줄스를 사랑하는 한편 줄스를 원망했고, 모린을 질투했으며, 베티를 두려워했다. 줄스는 그녀의 또다른 가능성, 또다른 남자였지만 정작 그녀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끌어주기는 커녕 그녀에게서 도망치기에 바빴고 모린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처럼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그 차별성이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반면 베티는 로레타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탈주하고 '흑인'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끊임없이 반항한다. 소설에서 베티에 대한 서술이 극히 적은 것은, 그녀가 하나의 폭탄이기 때문이다. 로레타는 베티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해칠 수도 없다.  
 모린이 집안에서 느낀 모든 현기증들은 '모든 것이 로레타의 것'이라는, 로레타의 폐쇄적인 세계에서 얻은 질병들이었다. 로레타의 물건들이 뒤범벅된 세상에서 로레타는 팰롱과 모린이 서로를 의심하고 질투하면서 자신을 두고 싸우게끔 조장했다. 그들은 로레타를 증오하면서 그녀의 조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로레타로 하여금 둘 다 잃게 만든다. 팰롱은 도망쳤고 모린은 결국 그녀를 벗어난다. 폭동 앞에서 로레타가 느낀 건 절체절명의 고독이었다. 수많은 자식들을 낳았으나 정작 그녀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로레타가 가장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건 줄스도 모린도 베티도 랜돌프도 아니다. 바로 그녀 자신이다. 그녀가 계속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며 강요하고 몰아붙였던 자신. 로레타는 남자로부터 벗어나서, 자식들로부터 벗어나면 새 시작이 가능할 것이라고 읊조렸지만 그녀의 자식 말마따나 그녀는 계속 잠들어 있다. 그녀의 꿈속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다. 로레타는 자신이 깨어나면 이 꿈들을 언제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남은 현실이라고는 차갑게 식은 버니의 시체 뿐이었다. 그녀는 그 시체라는 실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버니를 첫사랑으로, 하워드 웬들보다 버니를 닮은 줄스로 방향을 바꾸면서 환상을 꾸며낸다. 그리고 그 기나긴 환상은 그녀의 삶을 한편의 악몽으로 만든다. 로레타는 거듭 깨어나려고 하지만, 깨어나지 못한다. 결국 이 꿈은 깨어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그녀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

 로레타의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줄스와 모린, 베티는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네이딘이 줄스에게 느꼈던 위기는 줄스의 생존에 대한 집착, '어떻게서든' 살아남으려고 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줄스는 네이딘처럼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남매들은 이 불안한 삶이 어디로흘러갈 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살아야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소유하려고 애쓰고, 부득불 살아남는다. 그들이 왜 살아남아야 할지도 모르면서. 왜일까? 언젠가 삶이 나아지리라는 희망 때문일까? 살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일까? 아니, 죽으면 조용해질 뿐, 어떤 것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브록이 그의 아버지 대신 버니를 죽이고 그 집을 탈출했듯 줄스 또한 삶의 불행을 하워드 때문으로 돌리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증오했다. 하지만 하워드는 줄스 때문에 죽지 않았다. 줄스는 증오했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은 그를 당혹하게 하는 한편 연민하게 만든다. 줄스가 깨달은 건 지리한 삶이 자신에게도 반복되리라는 것이었다. 페이는 그에게 캘리포니아로 가봤자 새로운 삶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권태, 줄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그 여유로움. 네이딘은 줄스라는 삶이 자신에게 끼어드는 것에 대해, 자신의 권태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깨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권태의 두려움은 질리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익숙해지는 순간 어떤 변화도 두려운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네이딘이 줄스에게, 줄스가 네이딘에게 '살아남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면서도 동일하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지루해하는 한편 그 삶을 깨버릴 수 있는 서로에 대해 두려워하고, 그리고 그 삶이 바뀌기는 커녕 결국 그 굴레가 견고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될까봐 서로를 증오한다. 네이딘이 차가 망가졌을 때 결국 부모에게 전화해 자신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듯이, 그녀는 줄스로 인해 이 세상이 아예 뒤바뀌거나 바뀌지 않는다면 멸망하길 바랬다. 하지만 어느 쪽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줄스는 네이딘에 의해 '살해'당할 뻔 한 다음, 다시 살아나 모트의 곁에서 '살아남으면서'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움직임에 가담하나, 이미 그 자신도 그 전복을 믿는 동시에 믿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좀 더 오래 살아남는 것뿐이다. 모린은 '로레타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지만 결국 로레타의 망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남자들의 폭력과 소유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린이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소유욕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짐 랜돌프는 불안한 삶을 견디지 못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 불안을 함께 짊어지는 대신 불안을 불안으로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그게 아니면 뭘 할거야?' 모린은 그의 불안을 눈치채고, 그가 불안해하면서도 잡고 견디고 싶어하는 것들을 욕망하며, 그에게 공감하고 그를 끌어당긴다. 그녀는 그러면서 로레타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반면 이 소설에서 가장 적은 분량의 서술을 차지하는 베티와 랜돌프의 경우, 물론 랜돌프야 막내이기 때문에 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베티는 끊임없이 줄스와 모린, 로레타에 의해 '이해할 수 없고' '전과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애'로 명명되면서도 이 소설에서 가장 '잘' 살아남는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덜 망가진다.' 웬들 할머니의 폭력에 대해 모린이 속수무책으로 견디고 참아왔던 것과 달리 베티는 할머니를 뒷문으로 밀어버리며, 로레타의 비꼬고 조롱하는 태도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줄스가 하워드를 대충 무시하면서 대꾸하려는 태도를 꼬집으면서 그들의 정면적인 충돌을 유도하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흑인'들--설령 자신들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백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흑인' 위에 있다고 자부심을 느끼는-과 어울리면서 이 집으로부터 '탈주한다.' 로레타와 그의 아이들이 로레타를 닮아 이 삶에서 탈주하려고 애썼던 것과 달리, 베티는 이 삶을 받아들이고 이 삶에서 살아나가려고 애쓴다. 그들이 '미래'를 꿈꾸면서 돈을 모은다면 베티는 철저히 현실을 즐기기 위해 소비하고 외치고 날뛴다. 그녀가 이 소설에서 별로 쓰여지지 않는 것은 그녀의 행동이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로레타가 말했듯이 '로레타의 세계'인 이 소설 안에서 로레타가 알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랜돌프는 가장 마지막 아이지만, 다리가 삔 상황에서도 집에 머무는 대신 '돌아다닌다.' 그는 결국 자신의 삔 다리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이미 그들은 '다리가 삔'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다리가 삔 채로 태어났지만 로레타는 그 다리가 '단박에 낫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다른 다리를 꿈꾸고, 줄스는 다리가 하루만에 나아버리길 바라면서 삔 다리를 외면한다. 모린은 조용히 다리가 낫기를 기다리면서 발목을 거부한다. 반면 베티는 발목으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거나 삔 다리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들은 결국 이 악몽같은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획득하려고 한다. 그게 미래든 과거든 현재든. 


 그들(Them)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네이딘과 짐, 그들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외감과 경계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외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진 것들이지만, 그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로레타가 브록과 부모 중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말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마따나 브록이 버니를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중요한 건 버니가 죽었으며 그로 인해 그녀의 삶이 꼬이리라는 것뿐이다. 로레타는 적극적으로 '브록'을 탓하면서 그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쓴다. 양심의 가책이나 악몽,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는 그녀는 독자로 하여금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1페니를 주우면서 '재수가 좋다'라고 생각한다. '진실'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진실'은 하워드와 결혼한 후로 '비밀'로 바뀌어 발화된다. 알아봤자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유해한 것으로. 무익함에서 유해함으로 바뀌는 순간 그녀의 모든 삶은 꿈처럼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모린과 줄스, 베티는 이 거짓말 같은 가능성만 믿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린은 줄스에게 자신의 안에는 짐 랜돌프의 아이가 자라고 있으며, 새로운 삶에 들어선 자신을 더이상 로레타의 세계로 끌어들이지 말라고 간청한다. 로레타가 모린에게 기대는 순간, 모린은 또다시 악몽을 맛보게 되므로. 줄스는 모린이 결국 획득해낸 모든 것에 대해 칭찬하고 축하하지만, 그녀가 온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그 안전한 세계에서 머무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한다. 결국 '그들'에 속해 있으리라는 그 예감, 그들은 살아남으려고 했다. 그 살아남음이 어떤 윤리적인 판단이나 도덕의 기준에 위배된다고 해서 과연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기나긴 소설의 끝에서, 지루할 정도로 번복되는 자극적이고 신파적인 삶들의 번복에서 깨닫게 되는 두려움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비판할 수 없으리라는 것,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계층에 속해있고 어떤 자본을 가지고 있던 간에, 우리 또한 그런 불안을 내재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그 불안이 언제든 그들처럼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리를 둔 '그들'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이 되어버린다. 이 기나긴 설득은 소설의 모든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부정하려는 모든 안전에 대한 시도들을 굴복시켜버리는 힘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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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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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한 풍경들

 -주제 사라마구 '카인'을 읽고-

 

 

 

 

 

질투하는 신

 

  여호와는 아벨의 공물은 받았지만, 카인의 공물은 받지 않았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순간 그는 두 죄를 저지른다. 하나는 인간을 죽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생을 죽였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그에게 죄를 묻지만, 카인은 이를 수긍하지 않고 반박한다. 여호와는 그가 유독 아벨만을 사랑하거나 카인을 증오했던 게 아니며, 그저 카인을 시험했다고 고백한다. 카인이 아벨을 질투했듯이 여호와 또한 완전한 헌신을 바라며 둘을 질투했다. 카인과 아벨의 사이에 균열을 가져온 건 바로 여호와였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카인에게 누구도 해칠 수 없게끔표식을 남긴다. 이 표식은 사실상 여호와가 누군가를 질투했으며 그 질투로 인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실패의 증거인 셈이다. 그는 카인과 아벨, 두 형제의 헌신을 바랐지만 그가 얻은 것은 아벨의 피와 카인의 불신 뿐이었다.

 권위와 헌신, 영광.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과 여호와가 이룬 찬란한 영광들만을 기록한다면 카인은 그 성경의 길을 벗어난다. 성경이 시대별로 점차 자라나는 유대인들을 기술한다면, 카인은 유리된 채 동일한 현재에 머무른다. 카인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구했지만, 어디선가 또 다른 아브라함이 또 다른 이삭을 죽일 것이다. 인간이 무슨 탑을 세우든 신은 계속 그 탑을 무너뜨릴 것이다. 카인은 여호와를 사랑했던 만큼 여호와를 증오하게 된다. 그의 질투로 인해 너무 많은 비극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간교하고, 질투가 많으며, 한없이 영악하다. 욥에게 밀어닥친 비극은 악마 때문이 아니라 악마에게 그를 떠민 여호와에게 있다.

 여호와는 자신의 소유를 확신하기 위해 모든 이들을 시험한다. 그리고 그들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는 그들을 소유하지 못했다’. 의심과 불신, 폭력은 그들을 끊임없이 다시 소유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카인은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브라함에게 냉소적으로 말한다. 신이 그들을 사랑했다면, 약속을 어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평생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에게 왜 그를 죽이려 했는지 계속 묻는다. 이삭이 거듭해서 알게 되는 건 여호와의 전능함이 아니다. 그저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하나의 양에 불과하다는 것뿐이다. 후일 내려지는 모든 축복들은 이삭을 설득하기 위한 여호와의 시도였다.

 

 

 

공범

    

 카인은 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 여호와가 방주를 열었을 때 마주한 사람은 카인 뿐이었다. 노아는 여호와의 뜻을 받들어 모든 동물들을 한 쌍씩 태운다. 그러나 그는 가장 태우고 싶었던 일각수를 놓친다. 일각수는 홍수로 인해 소실될 대지 너머로 사라진다. 여호와는 그가 노아를 죽였다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망쳤다고 분개한다. 카인은 왜 그들을 죽이고 인류의 시작을 막았는가?

 카인은 여호와가 저지르는 모든 실수를 막고자 했다. 여호와가 왜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한편 그들에게 엄중한 체벌을 가하는 것인지 묻는다. 천사들은 그에게 굳이 궁금해하지 말라거나 신에게서 큰 뜻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카인은 이미 신의 질투를 목격했기 때문에 묻는다. 왜 그는 처음부터실수를 저질렀는가? 신이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의 혀를 박아넣었을 때, 신과 같은 언어를 쓰게 했을 때부터 그들과의 논쟁을 예상했어야 했다. 카인은 여호와가 만든 자신의 적이자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공범이 된다.

 신의 대척점은 악마가 아니다. 신의 대척점은 카인이라는 인간이 된다. 신은 카인이 썩어 문드러질 것이며 어떤 영광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카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마주했던 모든 부조리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카인이 속죄하는 방법은 살해의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 살해의 원인을 짚어나가는 것이다. 그 원인을 짚어나가기 위해서는 여호와라는, 혹은 그 근원을 마주해야 하는데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괴물을 들여다볼 때, 괴물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괴물과 싸울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것.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괴물이 되어서만 괴물과 동등하게 맞설 수 있지 않은가?

 카인은 여호와의 전능함을 지니지는 못하지만 여호와의 게획을 망쳐 놓을 누군가가 될 수 있다. 악마는 여호와의 전능을 입증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은 신을 만들었고 그 신을 폐기하며, 다시 매달렸다가 내던지기를 번복한다. 이러한 불신과 맹신의 번복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무엇인가. 아니면 그저 회의밖에 없을까.

 

 

 

하와와 릴리스

    

 이 회의주의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노인은 카인에게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카인은 그래서 자신의 이름 대신 동생의 이름을 댄다. 굳게 믿어왔던 모든 것들은 여호와의 말 한 마디에 의해 카인처럼 떠돌아다니게 된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에게 적을 멸족시켜 달라고 말하려 하지만, 여호와는 재빨리 여호수아의 입을 막는다. 여호와가 만약 그가 처음부터 정해놓은 규칙을 어긴다면, 그건 전능함이라기보다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나지만 천사와의 협상을 통해 과일을 얻는다. 아담은 하와를 자신의 소유물로 칭하지만, 하와는 자신의 자유를 주장한다. 릴리스도 마찬가지다. 노아는 릴리스의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릴리스는 노아에게 어떤 마음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삭은 자신의 아버지를 의심한다. 유대인과 가나안,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회의는 무엇을 낳는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피바다, 혹은 재 뿐일까?

 인간은 성경을 썼고 성경은 인간을 쓴다. 성경이 모든 소설의 근원일지도 모른다는 설은 사실 인간이 쓰는 소설이 성경과 사뭇 닮아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러한 상호 쓰기의 가능성은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을 인간으로 격하시킨다는 불손함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렇다면 인간은 신보다도 못한 존재란 말인가? 인간과 신은 대화할 수 있으며, 그 대화는 한 쪽의 일방적인 납득이 아니라 어떤 논쟁으로 이어졌을 때만 생산적인 상황에 이를 수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 모든 영광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사라마구는 성경이 쓰지 않았던 풍경들을 쓴다. 모세가 자신의 형 아론을 어떻게 대우했고 삼천명의 피가 얼마나 흥건하게 흘렀는지, 여호수아가 전리품을 훔친 사람을 어떻게 대우했고 그 군대가 지나간 자리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그 풍경들 또한 성경에서 말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말해질 수밖에 없었던 어떤 것들이었다. 하와는 자신의 꿈에 대해서 말한다. 꿈에서는 이 나온다. 여호와는 뱀이 자신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느냐고 비꼰다. 이 순간 인간은 신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하와는 이미, 신이 그녀의 꿈에 간섭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여호와의 폭력으로부터 비껴 나오려 한다. ‘남자들이 너를 소유하고, 너를 죽일 것이고, 너는 산통에 시달리며’. 그 모든 저주들을 거부하는 릴리스는 카인으로부터 여호와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미 그녀는 아벨이라고 밝혔던 누군가가 사실은 카인이라는 것을 알고 수긍했다. ‘카인은 저주받았고 모두가 부정해야 하지만, 오히려 여호와에 의해 그는 부정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참견해야 한다. 이 풍경과 정서들을 써내는 것, 여백으로 처리되었던 것이 사실은 여백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야말로 지독한 회의 끝에 내심 바라는, 반짝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더 깊은 절망일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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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캐롤'

 -이번에 영화로 개봉하면서 '동성애' 논란에 휩싸인 소설. 왜 우리는 어떤 코드에 얽매여 한 작품을 한 작품으로,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못하는가? 그저 이 사랑 이야기는 다른 사랑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고 싶다면, 이들의 성별이든 뭐든 신경쓰지 말라. 그저, 그들에게 밀착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가장 어렵고도 절절한 리뷰가 써보고 싶다. 

 

 2. 마이조 오타로 '쓰쿠모주쿠'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가장 재미있는 소설, 명탐정 이야기라고 하는데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 게다가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도 아니고 원어 그대로 나온다니. 기대가 되지 않을손가.

 

 3. 기리노 나쓰오 '여신기'

 -전세계적인 '신화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하는데, 기리노 나쓰오의 폭발적인 스토리텔링은 말해 무엇하랴. 이번에는 이 신화를 어떤 방식으로 '파헤쳐' 놓았을지 절로 기대가 된다.

 

 

 

 

 

 

 

 

 

 

 

 

 

 

 

 

 

 

 

 

4. 앤 카슨 '빨강의 자서전'

 -일단 책 표지부터가 아름답다. 앤 카슨의 작품이 제대로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다는데, 이번 기회에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을 읽어보고 싶었다. 두 권이 나오는 것으로 알지만 그중 가장 읽고 싶은 책이다.

 

5. 조이 파울러 '우리는 누구나 정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산다'

-엉거주춤한 오랑우탄의 모습만큼이나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어떻게 능숙해지는지, 그러면서 어떻게 한없이 서툴러질 수 있는지 읽어볼 수 있는 소설.

 

6. '시스터 캐리'

-문학동네 블로그와 사람들이 추천한 책인데, 막상 세계명작전집이라 하면 어려워 보인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잘 안 읽는 것이 좀 아쉬워서 선정해 보았다.

 

 

 

 

 

 

 

 

 

 

 

 

 

 

 

 

 

 

7. 윤이형 '러브 레플리카'

SF든 공포든 모든 장르를 불문하고 가장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아는 한국 작가들 중 한명인 윤이형의 단편집이 나왔다. 표지부터가 예쁘고...작품들도 기대된다. 사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꼭 한권씩 집어넣어보자고 다짐했는데 이번 작품은 그냥 그런 다짐 없이도 쑥 들어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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